한국의 성직자 양성

 

한국이 성직자 양성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 교회를 책임 맡은 이후로 항상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두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박해 시대에는 소년들을 마카오와 페낭에 있는 신학교에 보내거나 국내에서도 비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쳤고 금교(禁敎) 정책이 완화되거나 신교(信敎)가 묵인되었을 때에는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모집, 교육하였다. 그러나 재발하는 박해 때문에 김 대건 신부와 최 양업 신부 이후로 50여 년 동안 방인 성직자는 탄생하지 못하였다.


  1884년에 이르러 페낭 신학교에서 2년 전부터 유학하고 있는 조선인 신학생들이 열대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건강이 약화되거나 병사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그래서 블랑 주교는 유학생 파견을 중단하고 유학 중인 신학생들에 대한 귀국 조처를 취하는 동시에 국내에서 신학생을 모집하여 성직자를 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1885년 10월 26일에 주교는 1866년의 병인 대박해로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가 문을 닫은 지 20여년 만에 강원도 지방의 부엉골(또는 부흥골 및 범골,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강청면 등평리)에 ‘예수 성심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에는 개교 당시에 한 기근(바오로) 등 4명의 페낭 유학생들을 포함하여 7명의 신학생들과 마라발 신부가 교수로 있었다.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 비준된 이후에 블랑 주교는 김 대건 신부와 선교사들이 순교한 새남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용산 함벽정(涵碧亭, 지금의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번지, 성심 여자 고등학교)의 한옥과 대지를 매입하여 부엉골의 ‘예수 성심 신학교’를 이전하였다. 용산의 신학교는 1887년 3월에 개교하였고 리우빌 신부가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교장 신부 외에 마라발 교수 신부와 1명의 한문 선생이 14명의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리우빌 교장 신부는 신학교 교사로 사용되는 한옥이 낡고 불편하여 서양식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고 1891년 5월에 정초식을 가졌다. 꼬스뜨 신부의 설계와 감독으로 1년만에 서양식 벽돌로 건립된 2층 양옥 교사가 준공되어 1892년 ‘예수 성심 축일’인 6월 25일에 축성되었다. 그리고 1902년에는 신학교 성당이 건립되었고, 신학생들의 증가로 두 차례에 걸쳐(1911년과 1914년)교사가 증축되어 이 신학교는 194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방인 성직자 양성의 요람지 역할을 하였다.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개교 이후 재정적 빈곤, 시설 미비, 교수 부족 등의 역경 속에서 리우빌, 빌헬름(Nicolas-Joseph-Marie Wilhelm : 洪錫九, 1893년 재직), 로(Jean-Louis Ralut : 盧若望, 1893-1897년 재직), 샤르즈뵈브(Joseph-Marie-Entienne Chargeboef : 宋德望, 1897-1900년 재직), 기낭(Pierre Guinand :   普安, 1900-1944년 재직) 드으이 역대 교장들의 노력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1887년 개교 당시에 14명이었던 신학생이 1910년에 41명에 이르렀으며 개교 9년만인 1896년 ‘성 요셉 보천하(普天下, 온세상-보편 교회의 의미를 갖고 있음) 대주보 축일’(4월 26일, 지금은 없어졌음)에 약현 성당(지금의 중림동 성당)에서 3명의 새 신부가 탄생하였다. 이들은 페낭 신학교에서 귀국한 후에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계속 수학한 제1회 졸어생인 동시에 김 대건, 최 양업 다음으로 세 번째 탄생한 방인 신부이며 우리 땅에서 최초로 서품된 성직자였다. 이후로 10년 동안에 방인 사제들이 꾸준히 배출되어 46명에 이르렀다.




이 글은 카테고리: 교회사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한국의 성직자 양성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한국이 성직자 양성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 교회를 책임 맡은 이후로 항상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두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박해 시대에는 소년들을 마카오와 페낭에 있는 신학교에 보내거나 국내에서도 비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쳤고 금교(禁敎) 정책이 완화되거나 신교(信敎)가 묵인되었을 때에는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모집, 교육하였다. 그러나 재발하는 박해 때문에 김 대건 신부와 최 양업 신부 이후로 50여 년 동안 방인 성직자는 탄생하지 못하였다.

      1884년에 이르러 페낭 신학교에서 2년 전부터 유학하고 있는 조선인 신학생들이 열대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건강이 약화되거나 병사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그래서 블랑 주교는 유학생 파견을 중단하고 유학 중인 신학생들에 대한 귀국 조처를 취하는 동시에 국내에서 신학생을 모집하여 성직자를 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1885년 10월 26일에 주교는 1866년의 병인 대박해로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가 문을 닫은 지 20여년 만에 강원도 지방의 부엉골(또는 부흥골 및 범골,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강청면 등평리)에 ‘예수 성심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에는 개교 당시에 한 기근(바오로) 등 4명의 페낭 유학생들을 포함하여 7명의 신학생들과 마라발 신부가 교수로 있었다.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 비준된 이후에 블랑 주교는 김 대건 신부와 선교사들이 순교한 새남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용산 함벽정(涵碧亭, 지금의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번지, 성심 여자 고등학교)의 한옥과 대지를 매입하여 부엉골의 ‘예수 성심 신학교’를 이전하였다. 용산의 신학교는 1887년 3월에 개교하였고 리우빌 신부가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교장 신부 외에 마라발 교수 신부와 1명의 한문 선생이 14명의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리우빌 교장 신부는 신학교 교사로 사용되는 한옥이 낡고 불편하여 서양식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고 1891년 5월에 정초식을 가졌다. 꼬스뜨 신부의 설계와 감독으로 1년만에 서양식 벽돌로 건립된 2층 양옥 교사가 준공되어 1892년 ‘예수 성심 축일’인 6월 25일에 축성되었다. 그리고 1902년에는 신학교 성당이 건립되었고, 신학생들의 증가로 두 차례에 걸쳐(1911년과 1914년)교사가 증축되어 이 신학교는 194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방인 성직자 양성의 요람지 역할을 하였다.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개교 이후 재정적 빈곤, 시설 미비, 교수 부족 등의 역경 속에서 리우빌, 빌헬름(Nicolas-Joseph-Marie Wilhelm : 洪錫九, 1893년 재직), 로(Jean-Louis Ralut : 盧若望, 1893-1897년 재직), 샤르즈뵈브(Joseph-Marie-Entienne Chargeboef : 宋德望, 1897-1900년 재직), 기낭(Pierre Guinand :   普安, 1900-1944년 재직) 드으이 역대 교장들의 노력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1887년 개교 당시에 14명이었던 신학생이 1910년에 41명에 이르렀으며 개교 9년만인 1896년 ‘성 요셉 보천하(普天下, 온세상-보편 교회의 의미를 갖고 있음) 대주보 축일’(4월 26일, 지금은 없어졌음)에 약현 성당(지금의 중림동 성당)에서 3명의 새 신부가 탄생하였다. 이들은 페낭 신학교에서 귀국한 후에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계속 수학한 제1회 졸어생인 동시에 김 대건, 최 양업 다음으로 세 번째 탄생한 방인 신부이며 우리 땅에서 최초로 서품된 성직자였다. 이후로 10년 동안에 방인 사제들이 꾸준히 배출되어 46명에 이르렀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