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수난

 

교회의 수난


  일제는 1910년 8월에 강제로 ‘한일 합방 조약’을 체결, 공포하여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이후로 다방면에 있어서 교회 탄압에 나섰다.


  첫째로, 일제는 교회의 활동과 사업을 억제하는 법적 조취를 취하였다. 1915년 3월에 ‘사립학교 규칙 개정령’을 공포하고 종교와 교육의 분리 원칙을 내세워 당시에 대부분 종교계 학교였던 사립학교에서 수업이나 과외 활동을 통한 종교 교육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천주교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리 교육이 금지되어 교육 사업을 선교의 수단으로 삼았던 교회는 중요한 포교 무대를 상실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일제는 ‘포교 규칙’을 공포하여 교회의 선교 활동과 성당 신축을 억제하였다. 총독부는 이러한 교회 사업에 있어서 일제 당국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조처하였고 이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여 허가를 받는 절차도 까다롭고 복잡하게 규정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포교 규칙’에 대한 준수 여부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경찰을 통해서 본당 사찰을 감행하였고, 법규에 위배되는 선교 활동을 한 신부들에 교회의 인사 조처를 강요하였다.


  둘째로, 일제는 교회의 신앙 생활에 막대한 불편과 위협을 가하였다. 총독부는 단순한 국민 의례라는 명목을 내세워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사립학교도 시행하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1917년에 교회는 신사 참배의 의식에 종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배척하였고, 1925년에는 교리 교육 지침서를 내놓아 신사 참배는 천주교인에게 금지된 이단적 우상 숭배라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공립학교의 천주교 신자 학생들은 신사 참배의 거부로 퇴학을 당하였다. 1932년에 일본 천주교 주교단이 신사 참배를 애국과 충성을 표시하는 시민적 행위로 규정, 허가하고 1936년 5월에 교황청의 승인 훈령이 있은 이후로 조선 교회도 이를 시민적 행위로 묵인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천황의 신격화가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으로 신사 참배를 단순한 국민 의례로 인정할 수 없었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은 이를 거부하여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투옥되었다. 이외에도 일제는 모든 성당의 감실 위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이란 붉은 도장을 찍어 종이에 싸서 나무궤 속에 넣은 가미다나를 안치하라고 강요하여 천주교 신앙 자체를 위협하였다. 또한 일제는 강론에 일본어 사용을 요구했고 지방에서는 예절 중에 공습 경보 싸이렌을 울려 종교 의식을 방해하였으며 더욱이 간첩 적발이라는 구실로 고해소의 형사 입회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기습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평양대목구에서 전교하던 메리놀회 소속 미국인 성직자들을 전쟁 당사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체포, 구금하였다가 1942년 1월에 국외로 추방하였고 광주대목구와 춘천지목구에서 활동하던 아일랜드 성직자들도 그들의 조국이 영연방에 속하여 적성국이라는 구실로 연금시켰다. 동시에 외국인 주교들은 사임 압력을 받아 대구대목구와 광주대목구의 책임자는 일본인으로 강제 교체되었다. 일제는 교회 건물을 군사 시설로 징발하였고 군수품의 생산을 내세워 고철 헌납 운동을 강행하여 성당의 종, 철제 성체 난간 등을 철거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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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수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교회의 수난

      일제는 1910년 8월에 강제로 ‘한일 합방 조약’을 체결, 공포하여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이후로 다방면에 있어서 교회 탄압에 나섰다.

      첫째로, 일제는 교회의 활동과 사업을 억제하는 법적 조취를 취하였다. 1915년 3월에 ‘사립학교 규칙 개정령’을 공포하고 종교와 교육의 분리 원칙을 내세워 당시에 대부분 종교계 학교였던 사립학교에서 수업이나 과외 활동을 통한 종교 교육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천주교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리 교육이 금지되어 교육 사업을 선교의 수단으로 삼았던 교회는 중요한 포교 무대를 상실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일제는 ‘포교 규칙’을 공포하여 교회의 선교 활동과 성당 신축을 억제하였다. 총독부는 이러한 교회 사업에 있어서 일제 당국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조처하였고 이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여 허가를 받는 절차도 까다롭고 복잡하게 규정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포교 규칙’에 대한 준수 여부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경찰을 통해서 본당 사찰을 감행하였고, 법규에 위배되는 선교 활동을 한 신부들에 교회의 인사 조처를 강요하였다.

      둘째로, 일제는 교회의 신앙 생활에 막대한 불편과 위협을 가하였다. 총독부는 단순한 국민 의례라는 명목을 내세워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사립학교도 시행하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1917년에 교회는 신사 참배의 의식에 종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배척하였고, 1925년에는 교리 교육 지침서를 내놓아 신사 참배는 천주교인에게 금지된 이단적 우상 숭배라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공립학교의 천주교 신자 학생들은 신사 참배의 거부로 퇴학을 당하였다. 1932년에 일본 천주교 주교단이 신사 참배를 애국과 충성을 표시하는 시민적 행위로 규정, 허가하고 1936년 5월에 교황청의 승인 훈령이 있은 이후로 조선 교회도 이를 시민적 행위로 묵인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천황의 신격화가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으로 신사 참배를 단순한 국민 의례로 인정할 수 없었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은 이를 거부하여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투옥되었다. 이외에도 일제는 모든 성당의 감실 위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이란 붉은 도장을 찍어 종이에 싸서 나무궤 속에 넣은 가미다나를 안치하라고 강요하여 천주교 신앙 자체를 위협하였다. 또한 일제는 강론에 일본어 사용을 요구했고 지방에서는 예절 중에 공습 경보 싸이렌을 울려 종교 의식을 방해하였으며 더욱이 간첩 적발이라는 구실로 고해소의 형사 입회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기습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평양대목구에서 전교하던 메리놀회 소속 미국인 성직자들을 전쟁 당사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체포, 구금하였다가 1942년 1월에 국외로 추방하였고 광주대목구와 춘천지목구에서 활동하던 아일랜드 성직자들도 그들의 조국이 영연방에 속하여 적성국이라는 구실로 연금시켰다. 동시에 외국인 주교들은 사임 압력을 받아 대구대목구와 광주대목구의 책임자는 일본인으로 강제 교체되었다. 일제는 교회 건물을 군사 시설로 징발하였고 군수품의 생산을 내세워 고철 헌납 운동을 강행하여 성당의 종, 철제 성체 난간 등을 철거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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