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 성자 성령 3위이며 하나이신 신비(삼위일체)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길 빕니다.”(2고린 13,13)

1.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창조주시요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야훼”라 부르며 흠숭해 왔는데,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이 하느님을 아버지(聖父)라고 부르고 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일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마태 26,39.53; 마르 14,36; 요한 14,2.7)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씀에서는 ‘너희의 아버지(루가 6,36; 마태 6,4.6.8; 7,11)라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그분께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고 했다. 예수님은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루가 1,32) 분이시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요한 1,14) 분이시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 인성(人性)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성령의 활동이 나타난다. 많은 예언자들에게 성령의 힘을 입혀주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이나 말씀이나 행동도 성령이 같이 하셨다. 특히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의 특별한 전능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복음 전파와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일에 성령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무한히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여럿일 수 없다. 오직 한 분만이 계실 뿐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부가 계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성자도 계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도 계신다. 이 때문에 마치 하느님이 세 분인 것 같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다 같이 하느님이시면서도 하느님은 세 분이 아니고 오직 한 하느님이시다. 이 신비를 ‘삼위일체’라 한다.
성경에는 아버지자 아들보다 크다는 말도 있고 아들과 성령은 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성부가 가장 높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고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온 것이니 그 지위가 성부보다 낮다고 하였으면 좀 납득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종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교리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에게는 서로 높고 낮음이 없다.
또 성부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성자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직분을 자지고 오셨는데,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창조 때부터 예수님의 강생까지를 성부의 시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을 성자의 시대, 성령이 강림한 그 이후를 성령의 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린 해석은 상식적으로 알아 듣기 쉽고 그럴 듯하게 생각되지만 교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해석이다. 하느님은 신령한 분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 분은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는 것이다. 세 분은 다 같이 전지 전능하시고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하느님이시다. 또 세 분의 역할은 각각 다르지만 활동하실 때에는 언제나 세 분이 다 함께 하신다. 이와같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느님은 본질도, 권능과 영광도 같다. 다만 그 위격이 다를 뿐이다,

2. 삼위 일체는 알아 듣기 어렵다
위에서 말한 하느님의 삼위일체는 우리의 이성으로서 일아 듣기 힘든 신비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성부 성자 성령이 있다는데 어떻게 서로 높고 낮음이 없겠는가! 한 분은 아버지이고 한 분은 아들이고 또 이 두 분이 성령을 보내셨다면 선후 관계자 있을텐데 그것도 없다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한참 동안 사색에 잠겨 거닐고 있는데 옆에서 조그만 아이가 모래 바닥에 구멍을 파고 조개 껍질로 바닷물을 담아서 자꾸 그 구멍에 갖다 붓고 있었다. 그는 이상해서 “얘, 너 거기서 뭘 하니?”하고 물으니까 “네, 지금 이 바닷물을 이곳으로 옮겨 담으려고 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아니 이 바보같은 녀석아, 그 조개 껍질로 어떻게 저 바닷물을 옮겨 담겠느냐?” 하니까 그 아이는 “설령 내가 이 일을 완성한다 하더라도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하고는 없어졌다.
이 짧은 이야기는 삼위일체 신비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세 위이시며 한 분이시라는 이 신비를 이성으로서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으로써만 성경에 계시된 이 신비를 믿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세 위격(立格)의 일체성(一體性)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기 예를 들어보겠다. 사람에게서 예를 찾아본다면, 한 사람 안에 지․정․의(知․情․意) 셋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 지․정․ 의가 조화를 이룰 때 인격자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성부 성자 성령은 완전한 조화를 갖추신 한 하느님이시다. 또 한 가정을 하나의 단일체로 생각할 때 아버지, 어머니, 자녀간의 관계가 서로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점에서 다 같이 일치되고 사랑을 통해 완전한 한 가정을 이룬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도 서로 다르지만 사랑 안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불을 들 수 있겠다. 불은 하나의 형체가 있고 열이 있고 빛이 있다. 이 세 가지 특성이 불을 이루고 있는데, 분명히 서로 구별되면서도 다 불이라는 하나에 속해 있다. 이와같이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한 하느님이신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우리의 생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따라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그분께 우리를 봉헌하고 의탁하며 성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을 약속한다. 또한 우리는 모든 일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구별됨이 없이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며 우리들의 일치를 원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 하시며 성부께 기도드리신 것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결합된 하느님 자녀들의 일치와 하느님의 삼위일체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우리들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으로써 서로 일치될 때 하느님의 일치(삼위일체)를 알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분열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생활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 글은 카테고리: 예비신자교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성부 성자 성령 3위이며 하나이신 신비(삼위일체)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길 빕니다.”(2고린 13,13)

    1.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창조주시요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야훼”라 부르며 흠숭해 왔는데,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이 하느님을 아버지(聖父)라고 부르고 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일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마태 26,39.53; 마르 14,36; 요한 14,2.7)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씀에서는 ‘너희의 아버지(루가 6,36; 마태 6,4.6.8; 7,11)라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그분께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고 했다. 예수님은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루가 1,32) 분이시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요한 1,14) 분이시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 인성(人性)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성령의 활동이 나타난다. 많은 예언자들에게 성령의 힘을 입혀주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이나 말씀이나 행동도 성령이 같이 하셨다. 특히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의 특별한 전능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복음 전파와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일에 성령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무한히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여럿일 수 없다. 오직 한 분만이 계실 뿐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부가 계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성자도 계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도 계신다. 이 때문에 마치 하느님이 세 분인 것 같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다 같이 하느님이시면서도 하느님은 세 분이 아니고 오직 한 하느님이시다. 이 신비를 ‘삼위일체’라 한다.
    성경에는 아버지자 아들보다 크다는 말도 있고 아들과 성령은 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성부가 가장 높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고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온 것이니 그 지위가 성부보다 낮다고 하였으면 좀 납득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종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교리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에게는 서로 높고 낮음이 없다.
    또 성부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성자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직분을 자지고 오셨는데,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창조 때부터 예수님의 강생까지를 성부의 시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을 성자의 시대, 성령이 강림한 그 이후를 성령의 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린 해석은 상식적으로 알아 듣기 쉽고 그럴 듯하게 생각되지만 교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해석이다. 하느님은 신령한 분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 분은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는 것이다. 세 분은 다 같이 전지 전능하시고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하느님이시다. 또 세 분의 역할은 각각 다르지만 활동하실 때에는 언제나 세 분이 다 함께 하신다. 이와같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느님은 본질도, 권능과 영광도 같다. 다만 그 위격이 다를 뿐이다,

    2. 삼위 일체는 알아 듣기 어렵다
    위에서 말한 하느님의 삼위일체는 우리의 이성으로서 일아 듣기 힘든 신비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성부 성자 성령이 있다는데 어떻게 서로 높고 낮음이 없겠는가! 한 분은 아버지이고 한 분은 아들이고 또 이 두 분이 성령을 보내셨다면 선후 관계자 있을텐데 그것도 없다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한참 동안 사색에 잠겨 거닐고 있는데 옆에서 조그만 아이가 모래 바닥에 구멍을 파고 조개 껍질로 바닷물을 담아서 자꾸 그 구멍에 갖다 붓고 있었다. 그는 이상해서 “얘, 너 거기서 뭘 하니?”하고 물으니까 “네, 지금 이 바닷물을 이곳으로 옮겨 담으려고 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아니 이 바보같은 녀석아, 그 조개 껍질로 어떻게 저 바닷물을 옮겨 담겠느냐?” 하니까 그 아이는 “설령 내가 이 일을 완성한다 하더라도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하고는 없어졌다.
    이 짧은 이야기는 삼위일체 신비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세 위이시며 한 분이시라는 이 신비를 이성으로서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으로써만 성경에 계시된 이 신비를 믿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세 위격(立格)의 일체성(一體性)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기 예를 들어보겠다. 사람에게서 예를 찾아본다면, 한 사람 안에 지․정․의(知․情․意) 셋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 지․정․ 의가 조화를 이룰 때 인격자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성부 성자 성령은 완전한 조화를 갖추신 한 하느님이시다. 또 한 가정을 하나의 단일체로 생각할 때 아버지, 어머니, 자녀간의 관계가 서로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점에서 다 같이 일치되고 사랑을 통해 완전한 한 가정을 이룬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도 서로 다르지만 사랑 안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불을 들 수 있겠다. 불은 하나의 형체가 있고 열이 있고 빛이 있다. 이 세 가지 특성이 불을 이루고 있는데, 분명히 서로 구별되면서도 다 불이라는 하나에 속해 있다. 이와같이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한 하느님이신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우리의 생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따라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그분께 우리를 봉헌하고 의탁하며 성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을 약속한다. 또한 우리는 모든 일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구별됨이 없이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며 우리들의 일치를 원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 하시며 성부께 기도드리신 것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결합된 하느님 자녀들의 일치와 하느님의 삼위일체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우리들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으로써 서로 일치될 때 하느님의 일치(삼위일체)를 알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분열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생활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