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그 이후-증산교의 분열




(2) 증산교의 분열


참여자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고씨 부인은 1914년 강일순을 敎祖로 하고 자신을 敎主로 하여 선도교(善道敎, 일명 太乙敎)라는 명칭의 교단을 창립하였다. 교세가 커져 가자 차경석1)은 고씨 부인과 신자들간의 접촉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교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다른 추종자들은 그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교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고씨 부인 또한 차경석과 결별하고 새 교단을 창립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교의 분파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15 – 20년 사이에 나타나게 된 증산교 교단으로서는 고씨 부인의 태을교(太乙敎)를 비롯하여 미륵불교(彌勒佛敎)·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 이치복의 제화교(濟化敎)와 삼덕교(三德敎)․ 박공우의 태을교(太乙敎)·문공신파(文公信派)교단 · 도리원파(桃李園派) 등이 있다. 




①대표적 교단


이렇게 분파현상을 보이는 와중에서 가장 급속한 성장을 보인 교단은 차경석의 교단이었다. 차경석은 교세가 날로 커지게 되자,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카리스마의 강조는 그의 천자등극설(天子登極設)로 극대화되었다. 특히, 3·1만세운동의 실패로 정신적 구심점을 상실한 民衆은 새 왕조가 건설되고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쉽게 매혹되었다. 世間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로, 그리고 그의 교단을 차천자교(車天子敎)로 불렀으며, 그의 심복들 가운데에서는 그에게 폐하(陛下)라는 칭호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반일적(反日的)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격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등으로 인해 하류계층에게 더욱 쉽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 교단에서 발급하는 교첩(敎帖)이 새 왕조에서의 벼슬을 보장할 것이라는 소문은 억압된 하류계급의 현세기복적인 욕구와 일치함으로써 많은 입교자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도의 수효가 급증하자, 차경석은 교단조직을 60방주(方主)로 개편하고 1921년 9월 경남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다. 그는 그를 체포하려는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포위망을 뚫고 1천여 명의 간부신도들과 황석산 정상에 올라 장엄한 제단과 촛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힌 가운데서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으로, 그리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고 선언하는 고천의식(告天儀式)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천제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이었으며, 차경석이 황제로 등극하였음을 하늘에 告하는 즉위식이었다. 이 사건 이후, 차경석과 그의 교단에 대한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이 교단에 들어오게 되었다. 보화교의 신자 수는 6백만 명을 호칭하였으며, 간부의 수효만도 557,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와 체포 활동이 강화3)되자, 차경석은 친일적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22년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개명(改名)하고, 1924년에는 기산조합(己産組合)이라는 신자들로 구성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친일사절을 일본정부에 파견하고, 동양인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여 친일강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 자신의 권능강조와 친일적 경향은 교단 자체내에서 심한 반발과 내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교단내에서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교단 간부들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 때, 보천교에서 새로 분파된 교단들로서는 신현철의 태을교(太乙敎)․동화교(東華敎)․서울 대법사(大法寺)․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객망리파(客望里派)교단․수산교(水山敎)․홍로교(洪爐敎)․김옥환의 보화교(普化敎)․여처자의 선도교(仙道敎)․무을교(戊乙敎)․임무교(壬戊敎)․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 있다. 




② 그 외 교단


한편, 차경석 이외의 강일순 추종자들이 세운 교단에서도 새로운 분파들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단들로서는 순천교(順天敎)․법문파(法文派)․미륵계(彌勒禊)․김자현파․김사모파(金師母派)․오동정이파․태극도(太極道)․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정인표의 미륵불교(彌勒佛敎) 등이 있다. 


일제시대의 증산교는 한때 1백개에 달하는 교파들을 갖고 있었고, 신자의 수효도 수 백만에 달했었다. 그러나 1938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이 내려진 이후, 그 교세는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대부분의 교단은 소멸되고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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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2) 증산교의 분열

    참여자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고씨 부인은 1914년 강일순을 敎祖로 하고 자신을 敎主로 하여 선도교(善道敎, 일명 太乙敎)라는 명칭의 교단을 창립하였다. 교세가 커져 가자 차경석1)은 고씨 부인과 신자들간의 접촉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교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다른 추종자들은 그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교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고씨 부인 또한 차경석과 결별하고 새 교단을 창립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교의 분파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15 – 20년 사이에 나타나게 된 증산교 교단으로서는 고씨 부인의 태을교(太乙敎)를 비롯하여 미륵불교(彌勒佛敎)·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 이치복의 제화교(濟化敎)와 삼덕교(三德敎)․ 박공우의 태을교(太乙敎)·문공신파(文公信派)교단 · 도리원파(桃李園派) 등이 있다. 


    ①대표적 교단

    이렇게 분파현상을 보이는 와중에서 가장 급속한 성장을 보인 교단은 차경석의 교단이었다. 차경석은 교세가 날로 커지게 되자,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카리스마의 강조는 그의 천자등극설(天子登極設)로 극대화되었다. 특히, 3·1만세운동의 실패로 정신적 구심점을 상실한 民衆은 새 왕조가 건설되고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쉽게 매혹되었다. 世間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로, 그리고 그의 교단을 차천자교(車天子敎)로 불렀으며, 그의 심복들 가운데에서는 그에게 폐하(陛下)라는 칭호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반일적(反日的)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격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등으로 인해 하류계층에게 더욱 쉽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 교단에서 발급하는 교첩(敎帖)이 새 왕조에서의 벼슬을 보장할 것이라는 소문은 억압된 하류계급의 현세기복적인 욕구와 일치함으로써 많은 입교자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도의 수효가 급증하자, 차경석은 교단조직을 60방주(方主)로 개편하고 1921년 9월 경남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다. 그는 그를 체포하려는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포위망을 뚫고 1천여 명의 간부신도들과 황석산 정상에 올라 장엄한 제단과 촛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힌 가운데서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으로, 그리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고 선언하는 고천의식(告天儀式)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천제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이었으며, 차경석이 황제로 등극하였음을 하늘에 告하는 즉위식이었다. 이 사건 이후, 차경석과 그의 교단에 대한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이 교단에 들어오게 되었다. 보화교의 신자 수는 6백만 명을 호칭하였으며, 간부의 수효만도 557,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와 체포 활동이 강화3)되자, 차경석은 친일적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22년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개명(改名)하고, 1924년에는 기산조합(己産組合)이라는 신자들로 구성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친일사절을 일본정부에 파견하고, 동양인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여 친일강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 자신의 권능강조와 친일적 경향은 교단 자체내에서 심한 반발과 내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교단내에서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교단 간부들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 때, 보천교에서 새로 분파된 교단들로서는 신현철의 태을교(太乙敎)․동화교(東華敎)․서울 대법사(大法寺)․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객망리파(客望里派)교단․수산교(水山敎)․홍로교(洪爐敎)․김옥환의 보화교(普化敎)․여처자의 선도교(仙道敎)․무을교(戊乙敎)․임무교(壬戊敎)․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 있다. 


    ② 그 외 교단

    한편, 차경석 이외의 강일순 추종자들이 세운 교단에서도 새로운 분파들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단들로서는 순천교(順天敎)․법문파(法文派)․미륵계(彌勒禊)․김자현파․김사모파(金師母派)․오동정이파․태극도(太極道)․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정인표의 미륵불교(彌勒佛敎) 등이 있다. 

    일제시대의 증산교는 한때 1백개에 달하는 교파들을 갖고 있었고, 신자의 수효도 수 백만에 달했었다. 그러나 1938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이 내려진 이후, 그 교세는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대부분의 교단은 소멸되고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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