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심 판

6. 심 판

심판 신앙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찾은 것은 언제나 하느님이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고 하느님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상선벌악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색다른 체험(이방인의 지배, 의인의 고통,죽음 등)을 하면서 이제 상선벌악은 현재가 아니라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속에서 나타난다. 물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원수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도 심판하신다. 그 목적은 파멸이나 영원한 고통은 아니다.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은 구원에 대한 희망이고,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망이다. 즉 야훼의 날에는 단죄보다는 정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이는 역사에서 이루어질 사건(전쟁, 지배…)으로 간주되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새로와 질 것을 선호하신 까닭에 역사가 다시 올바른 길로 가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3) 신약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묵시적 기다림을 배경으로 선포된다.
예수에 있어서도 묵시적 상징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위협의 근본적 동기는 외경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는 초대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완벽하게 느끼라는 초대이다. 이런 초대, 부르심은 결단의 상황에로 이끈다. 이를 거부하는 이는 하느님 나라에서 배제된다. 하느님의 심판이 가져왔다는 자각은 해방적 성격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관이다.
이는 모든 사도들의 강론의 핵심이다. 모든 종말론적 선언들은 마지막의 사건에 대한 단순한 정보제공이다. 이는 역사안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결단의 기준으로, 희망으로 다루어진다. 예수가 심판관이란 의미는 ①마지막이 예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예수가 의도하고 예수가 설계했던 나리이다. ②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혹은 실패로 이끄느냐의 결정적 기준이 된다. 그 분을 수락, 거부하는 거슨 구체적 행동에서이다.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람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③희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상을 주는 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역사 안에서의 체험을 통해 얻어 낸 결실이라는 것이다. 최후 심판관으로서의 예수의 모습도 역사안에서의 예수에 대한 체험을 통한 희망이다.

5)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심판은 이미 현재의 결단적 행위 안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적 전망을 그대로 보존한다 (Jn 12,48).

6) 전통 신학의 심판 이해
꠆ꠏꠏ 공심판 ; 모두가, 영혼 육신 모두가 심판 받는다.
ꠌꠏꠏ 사심판 ; 죽은 후에 영혼만이 심판 받는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러한 이해가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공심판과 동시에 개인에 대한 상벌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준다 (Rom 6,6). 그러나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개념과 같은 것은 아니다. 공사심판의 개념은 교부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개별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렇다면 사심판과 공심판 사이의 공백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교부들은 죽음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사심판과 공심파의 차이를 말한다. 이제 초기의 공심판에 대한 신앙은 사심판으로 이어지고 이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으로 나타난다. 중세기에 이르러는 오히려 사심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다. K.라너나 그레사키 같은 학자는 사공심판이 시대의 조루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심판과 공심판을 인정하면 ①인간의 영육의 결합을 인정하고 ②죽음을 통해 영육이 분리됨을 인정해야 한다. ③그러나 인간이 두번 심판받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공심판 자체나 사심판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공심판은 한 가지의 두 가지 측면이다.

7) 하느님의 다스림이 모든 인간의 구원의 대상인가?
역사가 환경조건에서 구별되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드러날 것인가?
하느님의 다스림은 실패할 수 도 있는가?
하느님의 다스림은 화해인가? 아니면 심판인가?
그리스도교 희망이 영원히 단죄된 인간이 있다는 것을 고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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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심 판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6. 심 판

    심판 신앙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찾은 것은 언제나 하느님이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고 하느님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상선벌악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색다른 체험(이방인의 지배, 의인의 고통,죽음 등)을 하면서 이제 상선벌악은 현재가 아니라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속에서 나타난다. 물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원수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도 심판하신다. 그 목적은 파멸이나 영원한 고통은 아니다.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은 구원에 대한 희망이고,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망이다. 즉 야훼의 날에는 단죄보다는 정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이는 역사에서 이루어질 사건(전쟁, 지배…)으로 간주되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새로와 질 것을 선호하신 까닭에 역사가 다시 올바른 길로 가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3) 신약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묵시적 기다림을 배경으로 선포된다.
    예수에 있어서도 묵시적 상징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위협의 근본적 동기는 외경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는 초대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완벽하게 느끼라는 초대이다. 이런 초대, 부르심은 결단의 상황에로 이끈다. 이를 거부하는 이는 하느님 나라에서 배제된다. 하느님의 심판이 가져왔다는 자각은 해방적 성격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관이다.
    이는 모든 사도들의 강론의 핵심이다. 모든 종말론적 선언들은 마지막의 사건에 대한 단순한 정보제공이다. 이는 역사안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결단의 기준으로, 희망으로 다루어진다. 예수가 심판관이란 의미는 ①마지막이 예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예수가 의도하고 예수가 설계했던 나리이다. ②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혹은 실패로 이끄느냐의 결정적 기준이 된다. 그 분을 수락, 거부하는 거슨 구체적 행동에서이다.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람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③희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상을 주는 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역사 안에서의 체험을 통해 얻어 낸 결실이라는 것이다. 최후 심판관으로서의 예수의 모습도 역사안에서의 예수에 대한 체험을 통한 희망이다.

    5)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심판은 이미 현재의 결단적 행위 안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적 전망을 그대로 보존한다 (Jn 12,48).

    6) 전통 신학의 심판 이해
    ꠆ꠏꠏ 공심판 ; 모두가, 영혼 육신 모두가 심판 받는다.
    ꠌꠏꠏ 사심판 ; 죽은 후에 영혼만이 심판 받는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러한 이해가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공심판과 동시에 개인에 대한 상벌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준다 (Rom 6,6). 그러나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개념과 같은 것은 아니다. 공사심판의 개념은 교부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개별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렇다면 사심판과 공심판 사이의 공백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교부들은 죽음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사심판과 공심파의 차이를 말한다. 이제 초기의 공심판에 대한 신앙은 사심판으로 이어지고 이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으로 나타난다. 중세기에 이르러는 오히려 사심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다. K.라너나 그레사키 같은 학자는 사공심판이 시대의 조루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심판과 공심판을 인정하면 ①인간의 영육의 결합을 인정하고 ②죽음을 통해 영육이 분리됨을 인정해야 한다. ③그러나 인간이 두번 심판받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공심판 자체나 사심판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공심판은 한 가지의 두 가지 측면이다.

    7) 하느님의 다스림이 모든 인간의 구원의 대상인가?
    역사가 환경조건에서 구별되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드러날 것인가?
    하느님의 다스림은 실패할 수 도 있는가?
    하느님의 다스림은 화해인가? 아니면 심판인가?
    그리스도교 희망이 영원히 단죄된 인간이 있다는 것을 고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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