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제2부

종말론 제2부

II. 개인의 완성
1.들어가는 말
세상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내용으로 하는 집단적 종말론 다음에 인간 개개인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다루는 개별적 종말론이 따르게 된다. 마지막에는 두 노선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종말론에 대한 오늘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제1부의 “들어가는 말”을 참조할 것.

2. 성서적 근거
2.1. 삶(생명)에로의 집중
초기 이스라엘에서는 개인의 희망은 민족을 위한 희망과 접합되어 있었다. 이는 이미 아브라함에 내린 약속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창세 12,1-3; 13,14-17; 15,1-5). 전통적인 희망의 내용인 땅, 후손, 하느님의 배려는 민족의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고, 동시에 아브라함의 미래도 그 안에 간직되어 있다. 집단, 부족, 민족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의 생동적인 관계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결정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를 갈망하고 간청한다: (1) 공동체 안에서 오래 사는 것, (2) 죽음을 넘어선 미래를 의미하는 수많은 자손의 보유, (3) 낯선 땅이 아니라 “조상들 곁에” 묻히는 것으로서,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의 지속적인 일치를 상징한다. 이것이 채워지면 그 삶은 완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인생의 근본적인 한계인 죽음 그 자체가 슬픔의 근거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 미완인 채로 중단된) 때이른 죽음, (미래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후손 없는 죽음, (자기 백성과의 단절을 뜻하는) 낯선 땅에서 묻히는 것은 비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 자기 백성의 삶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아픈 것, 판결을 받아서 자기 백성에게서 제외되는 것도 똑같이 나쁘게 여겨졌다.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원의 배경에는 자주 이런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예를 들어서 시편 88,5-7; 116,3). 삶과 죽음의 결정적인 경계선은 육체적인 생존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고, 죽음은 공동체에서 배척되는 것을 뜻한다.
구약성서의 초기 저자들은 죽음 이후의 개인의 운명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예식이 없었는데, 이는 인접국인 에집트와 비교할 때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이다. 죽은 이을 주문을 외어서 불러 내는 것이 가끔 실행되었는데(1사무 28,3-25; 2열왕 21,6; 이사 8,19), 이는 분명히 하느님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배척되었다(신명 18,11-12; 1사무 28,3.9).

2.2. “셰올”에 대한 상상
이스라엘에서는 인접국들, 특히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와 비슷하게 지하에 있는 죽음의 세계인 “셰올”(Scheol)에 대한 상상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구약성서 내에서 하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생각하고 살아가는 데에 바탕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셰올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희망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이들은 지하에서 거의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이 맥이 없는 삶을 유지한다. 셰올은 소름이 끼치는 곳(이사 14,9-11), 망각의 장소(시편 88,13)로서 하느님의 손길이 닿지 않고(시편 88,6), 그분의 기적과 신의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시편 88,12-13)이다. 셰올에 있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산 이들의 공동체에서 잘려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되는 표상들이 병존(並存)해 있다: (1) 셰올로 내려가는 것은 망각과 관계의 단절 속에 잠긴다는 의미이다. (2) 죽어서 조상들과 합치된다는 것은 백성의 공동체 안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것은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무력함을 표현하고, 두 번째는 선조들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특별한 희망을 표현한다.

2.3. 지속적인 하느님과의 친교(시편 73)
바빌론 유대 이후에 불의와 부당함을 겪으면서 그리고 많은 유다인들의 디아스포라 상황에 직면해서 개인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된다. 이 세상의 삶에서 장수(長壽)와 때이른 죽음, 부와 가난, 행복과 불행이 공정하지 않게 분배된다는 체험이 강하게 의식 속에 들어오게 된다. 의인은 잘되고 악인은 나쁘게 된다(예를 들어서 시편 1편과 37편)는 옛 지혜의 가르침은 더 이상 맞아들어가지 않는 듯하다. 이런 불안한 체험은 하느님의 능력과 신의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이 질문은 신앙이 이 세상 삶의 경계를 돌파하기에 이르른다.
시편 73편에서 저자는 자신이 마음을 맑게 가졌지만 매일 매일 고통을 받아야 하는 반면에 악인은 건강하고 기름진 몸으로 행복에 가득차서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하느님이 모를 것이라고 겁없이 주장한다고 탄식한다. 시편 저자에게는 세상이 온통 하느님의 정의에 반대되는 일로 가득 찬 듯 보인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그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는 깨달음이 선사된다. 즉 악인들의 행복은 허왕된 꿈과 같고, 그들은 “미끄러운 길”(18)에 서 있다. 악인들은 “순식간에 멸망해버리지만”(19), 의인은 하느님께로부터 보존되고 받아들여진다.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주셨나이다… 훗날 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리이다”(23-24). 그러나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실지에 대한 상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단지 하느님께서 “훗날” 함께 계실 것에 대한 신뢰, 그리고 악인들은 멸망하고 의인들은 “그분 곁에” 함께 하리라는 것에 대한 신뢰만 있을 뿐이다.

2.4. 부활 신앙의 전조(前兆)? (에제 37; 호세 6; 이사 25)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라버린 사람의 뼈가 다시 살이 붙어서 살아나고, 무덤이 열리며 하느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기운을 불어 넣어 소생케 하는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 파멸해서 유배살이를 하면서 절망 속에 굳어버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영을 통해서 새로운 삶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에레 37,1-14). 그러나 이 텍스트는 한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쇠락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증거해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쉽사리 이 텍스트를 마지막 날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과 연결짓게 된다. 이에 대한 내적인 논리는 하느님께 신뢰하는 데에 있다. 즉 당신의 영을 통해서 망해버린 백성을 깊은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주신 하느님께서 개개 인간도 죽음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이렇게 마른 뼈들이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는 에제키엘의 환시에 원래의 의도를 뛰어넘는 내용이 부여된다. 이렇게 희망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은 자라나게 된다.
비슷한 것이 호세 6,2에 적용된다.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살려 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 즉 그들이 윤리적인 타락과 그로 인한 불행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에게서 이 문장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형성된 개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것, 예를 들어서 1고린 15,4에서 “성경(말씀)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지시고…”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신앙 전개의 일관성을 증언해준다고 하겠다.
이른바 “이사야 묵시록”(이사 24-27)에서 (아직 엄격한 의미에서 묵시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무명의 저자는 종말을 시온 산에서 열리는 풍성한 잔치의 표상으로 묘사한다. 즉 야훼께서 왕으로서의 당신의 다스림이 궁극적으로 확립된 것을 기념해서 시온 산에로 모든 백성들을 초대하신다(25,6-8). 이 잔치에서 모든 백성들은 그때까지 그들을 가리우던 “보자기”(눈이 멀음 혹은 슬픔?)를 벗게 되고, 역사에서 자주 굴욕을 당하던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 앞에서 복권되며,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이사 25,8). 그러나 어떻게 죽음이 없어질 것인가, 즉 사람이 더 이상 죽지 않는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세움으로써, 혹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림으로써 죽음이 없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불분명한 채로 머물러 있다.
이 대목에서는 에제 37,1-14과 호세 6,2과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즉 이 대목은 부활의 표상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나중에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 부활 신앙에 전형적 특색인 개인적 요소는 특별히 8절 후반부에 분명히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또한 개인적인 측면이 보편적인 측면과 연결되는 점이 눈에 띈다. 즉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해당된다는 것인데, 이는 나중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에 특색이기도 하다. 특별히 주목할만한 것은 죽음의 퇴치가 하느님의 통치가 이룩되는 것의 일부분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승리는 야훼의 무제한적 다스림에 포함된 것이라고 하겠다.

2.5. 후기 구약성서에 나타난 개인 차원의 미래의 희망
2.5.1. 묵시문학적 부활 희망(이사 26; 다니 12)
이사야 묵시록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도래하기를 청하는 기도(이사 26,7-21)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19). 이는 묵시문학적 부활 신앙에 대한 아주 초기의 증언이라고 하겠다. (가까이 다가온) 심판을 죽은 이들의 부활과 연결시킨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성서학적으로 19절이 개인의 부활을 뜻하는 것인지, 혹은 에제 37,1-14처럼 이스라엘의 재건을 표상적으로 표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히브리 성서에서 개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유일하게 다니엘서 12장 2절뿐이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기원전 175-164)의 공포정치 하에서 저술된 다니엘서는 마지막 시대의 고난, 마침내 있을 의인의 구원, 일반적인 보복을 예고하면서, 이와 관련해서 부활을 언급한다.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 시대의 급전환, 부활 그리고 심판은 함께 연결되어 있다. 누가 “대중”에 속하는지, 이스라엘 사람 모두 아니면 이방인들의 일부까지도 포함하는지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의인뿐 아니라 죄인도 깨어난다는 점이다. 이점에 있어서 다니엘서는 이사 26,19과 그리고 다음의 텍스트와 차이가 난다.
2.5.2. 순교자를 위한 정의(마카베오 후서)
기원전 60년 이후 그리스어로 저술된 마카베오 후서는 7장에서 율법을 어기기 보다는 고문받아 죽는 것을 택한 한 어머니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극도의 억압과 박해의 상황에서 하느님의 신의와 능력에 대한 신앙은 부활과 새롭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으로 발전한다. 하느님의 왕권이라는 주제는 창조신학적으로 강화된다. “사람이 출생할 때에 그 모양을 만들어 주시고 만물을 형성하신 창조주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2마카 7,23). 부활 신앙은 (고문으로 훼손된) 육신의 원상회복(11.23)와 도살자가 갈라놓은 가족간의 유대의 회복(29)을 포함한다. 범죄자들에게는 부활이 없고 오직 심판만 있을 뿐이다(14.35-37). 그러나 시대의 급변화가 곧 있으리라는 기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다니엘서 12장의 묵시문학적 상상과는 차이가 난다고 하겠다.
마카베오 후서 12장에서는 부활 신앙과 관련해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언급된다. 저자는 유다가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모금한 돈을 속죄의 제사에 써 달라고 예루살렘에 보낸 것을 다음과 해설한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43-44).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나는 논쟁적 분위기는 모두가 부활 신앙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5.3. 불멸성(지혜서)
지혜서에서는 또 다른 희망의 표상이 발견된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그리스 영역의 디아스포라(알렉산드리아/ 에집트)에서 형성된 지혜서는 그리스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많은 표현들은 영육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플라톤적 인간론을 상기시킨다. “썩어 없어질 육체는 영혼을 내리누르고…”(지혜 9,15). 그러나 지혜서의 저자가 대면한 문제는 옛날부터 내려온 문제, 예를 들어서 시편 49편과 73편의 작가들을 괴롭히던 문제, 악인들의 강함과 의인들의 무력함이라는 모순이었다. 또한 지혜서가 이런 체험에도 불구하고 지니는 희망도 시편 73,23-24가 암시하는 노선에 놓여있다. “의인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의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불멸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안에서 살 것이다”(지혜 3,1-4.9). 희망은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 또 묵시문학에서처럼 희망은 심판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3,7-8; 4,20-5,23). 그러나 시편 49편과 73편과는 달리 죽음 이후에 있을 복된 미래가 더욱 명확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다니엘서 12장과 마카베오 후서 7장과는 달리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생각은 여기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불멸”(2,23)과 “불사(不死)”(3,4)에 대해서 언급된다. 주목할만 한 점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 세상의 삶에 희망을 집중하였지만, 지혜서에서는 다른 곳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이다: 오래 사는 것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3,17; 4,7.8.13), 후손이나 후손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3,13-14; 4,1.3). 지혜서는 죽음 저편의 삶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곳은 “의인이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는”(3,1) 곳으로서,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던 것과는 달리 “악의 소굴에서 빼내어져”(4,13) “평화를 누리는”(3,3) 곳이다. 이렇게 자주 내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전체적인 관심을저 세상으로 옮겨 놓도록 유도한다. 지혜서 전체의 맥락이 이런 것을 교정하지만, 그러나 그 영향은 그리스도교에까지 미치게 된다.

2.6. 회의(懷疑)와 단념(전도서)
그러나 불의와 유한성의 체험은 이스라엘에서 항상 죽음을 넘어선 희망으로 유도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세상과 인생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전도서가 있다. “설교자”는 인간의 삶이 유한하고 전망이 없음을 거듭 거듭 숙고한다. 즉 그는 균형을 잡는 정의나 매혹적인 마지막 목표가 없다고 본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동물과 사람은 같은 운명을 겪을 뿐이다. “다 같은 데로 가는 것을!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 가는 것을!”(3,20).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 가고 짐승의 숨은 땅 속으로 내려 간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해서 전도서의 저자는 “누가 장담하랴!”(3,21)고 물으면서 회의적으로 반응한다. 전도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건을 규정하신다고,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 가도록 만드셨다”(3,11)고 믿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헛되고”, 어디에서도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내세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 오직 제한적인 행복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전도서의 대답은: “그러니 네 몫의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술을 마시며 기뻐하여라… 하늘 아래서 허락받은 덧없는 인생을 애인과 함께 끝날까지 즐기며 살도록 하여라. 이것이야말로 하늘 아래서 수도하며 살아 있는 동안 네가 누릴 몫이다”(9,7-9).

2.7.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안에서의 죽은 이들의 부활
2.7.1. 예수 동시대의 상황
예수 시대의 유다교에서는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경향들이 있었다. 예수의 복음 선포와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데에 특별히 중요한 것은 묵시문학적 부활희망과 그에 대한 반박이다.
성서 이외의 문학에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상상이 넓게 전개되고 채색되었다. 그 배경을 이루는 것은 보통 마지막 시대의 큰 환란이다. 묵시문학에 전형적이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땅이 열리고, 바위가 쪼개진다. 죽은 이들이 무덤이나 혹은 지하 세계에서 나온다. 마지막 시대에 아직 살아있는 이들은 죽은 이들을 알아본다. 모든 이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서 모일 것이다. 육신은 변화된다. 의인은 영광스럽게 보이고, 시간이 그들을 더 이상 늙게 하지 못하며, “천사와 같고 별과 같다”(syrBar 51,10). 악인들을 흉칙한 모습을 보인다.
묵시문학 내에서 죽은 모든 이들이 부활할 것인지 혹은 오직 의인들만 부활할 것이지에 대한 견해는 일치하지 않는다. 또 피안의 “장소”에 대한 진술도 여러 가지이다.
예수의 주변에서 바리사이파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긍정하였지만,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사두가이파는 이를 거부하였다. 신약성서 내에서는 이 논쟁의 흔적이 예수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마르 12,18-27)에서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바오로가 공개적으로 심문받는 대목(사도 23,6-9)에서 발견된다.
2.7.2.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묵시문학가나 바리사이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기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 부활은 의인은 물론 죄인에게도 해당된다. 부활에 대한 신앙이 부각되고 문제시되어 나타나는 것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논리를 전개한다. 모세의 율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을 수가 없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자식을 낳으려고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여인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 그 여인은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 12,23). 부활 신앙은 성서를 거스르는 것이든지(왜냐하면 나중에 한 사람이 여러 배우자를 지니지 않게 되기 위해서 두 번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오니까!), 아니면 불합리한 것이 된다.
부활이 단순히 지금까지의 삶을 연장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논리에는 사실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그 전제를 공격한다. “사람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들지도 않고 시집가지도 않으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게 된다”(마르 12,25). 그 당시 유다인의 상상에 의하면 천사는 죽지 않고 그래서 결혼이나 후손 출산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능력”(마르 12,24)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질책한다. “그리고 죽은 이들에 관해서, 그들이 일으켜진다는 사실을 두고 모세의 책 가시덤불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느지 읽어 보지 못했습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마르 12,26-27). 예수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모세로 돌아가서 출애 3,6을 인용한다. 하지만 예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은 단지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죽은 이들은 그분 능력의 범위에 더 이상 속하지 앟는다고 생각하는 반면, 예수는 하느님의 상을 계속 발전시킨 이들의 편에 서있다. 마지막 시간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믿음은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능력에 대한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출애 3,6은 본시 하느님이 모세에게 당신 정체를 밝히시는 자기 소개다. 풀이하면 나는 너의 죽은 선조들이 섬긴 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는 본시 부활사상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오면 선조들은 이미 하늘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있으며(루가 16,22-31) 장차 부활해서는 더욱 행복하게 되리라는 사상이 널리 퍼저 있었다(마태 8,11-12 = 루가 13,28-29). 이와 같은 사상적 맥락에서 출애 3,6을 다시 해석한다면 하느님은 당신을 섬긴 선조들을 명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능력으로’(24절) 살려 거느르시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성서의 하느님은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27절)”. 정양모 역주,『마르코 복음서』, 분도출판사, 1981, 138-139.

2.7.3. 하느님 나라 선포 안에서의 위치
예수가 선포한 새로운 점이란 하느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세상 종말이나 개개인이 죽은 후에나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에는 죽음의 무력화는 물론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세상의 세력들(보지 못함, 듣지 못함, 말 못함, 나병, 신체의 마비, 마귀들림, 죄)에서의 해방과 인간다운 삶(오관을 사용하고, 똑바로 걸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용서하고 친교를 이루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 나라의 내용을 이루고,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열두 제자의 파견 명령(마태 10,7-8)에는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오”는 것외에도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나병환자들을 깨끗이해 주고 귀신들을 쫒아내시오”는 것이 함께 있다. 그러나 이 전체는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말하며 선포하시오”라는 표제(表題) 하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 설교의 중심적인 주제는 여기서 지금 시작하고 효력을 드러내는 하느님 나라이다. 그리고 죽음에서의 해방은 이 선포의 한 요소이다. 이 요소는 다른 요소들과의 관련 안에서, 즉 해방되고 해방시키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과의 관련 속에서 볼 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그 당시 묵시묵학에서 내세를 상세하게 묘사한 것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2.8. 죽음에 대한 승리(바오로)
부활에 대한 희망은 바오로에게서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보다는 더 큰 범위를 차지하게 된다. 바리사이파에 소속되어 있던 바오로는 그들로부터 부활희망을 전수받는다. 하지만 이 희망은 우선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 종속되어 있다. 바오로는 초기에는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의 재림과 그의 결정적인 다스림을 기대하였기에, 부활에 대한 생각은 바오로에게 그렇게 중요한 주제가 아닌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도전을 받으면서 부활의 선포가 바오로에게 중요하게 되었다. 두 가지 도전이란 테살로니카 교회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이 주님의 재림 전에 죽어가는 것과 고린토 교회에서 나타난 세상과 역사를 배제한 구원 이해이다.
2.8.1. 주님의 재림에 참여하기 위한 부활
테살로니타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종말임박 사상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공동체는 주님께서 곧 오시리라고 희망하였다. 그런데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체험하기 못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재림의 희망에서 제외된 것인가? 이에 대해서 바오로는 1테살 4,13-18에서 대답한다. “주님이 내림하실 때까지 남아 있을 우리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결코 앞지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야 남아 있는 우리 산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동시에 주님을 마중하기 위해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이끌려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15-17). 그리스도의 재림을 체험하고, 주님을 만나 그와 함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이 남아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이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중요하게 된다.
2.8.2. 육신의 부활
고린토 교회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명백하게 고백하면서도 “죽은 자들의 부활은 없다”(1고린 15,12)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의 배경에는 열광적이고 유심론(唯心論)적인 신앙 해석, 혹은 과도하게 현재에 집중하는 구원관, 즉 역사는 별 소용이 없다고 천명하고 구원을 아주 내면화시켜서 육신성(肉身性)을 제외하는 구원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현재성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구원에는 무조건 역사의 원성과 육신까지도 포함한 전체 인간의 구원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육신과 역사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존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서 동시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선포되고 있는데도 여러분 가운데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고린 15,12-13).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의 존립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실상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14).
바오로는 예수의 부활을 근거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예수의 부활이 모든 이의 부활 가능성을 증명하는 한 “사건”이라는 식으로) 단지 한 사건에서 일반적인 것을 논리적으로 결론짓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의 역사를 열었는데, 이 역사는 하느님께 적대적인 모든 세력이 정복될 때 비로소 목표에 이르른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의 내림 때에 그분께 속할 사람들입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일체의 지배와 일체의 권력과 일체의 권세를 쳐없고 나서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릴 것입니다…마지막으로 없어질 원수는 죽음입니다”(23-24.26). 이런 역사적 희망을 삭제하는 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34) 사람이다. 이렇게 바오로는 개인의 부활을 강조하게 되지만 오늘날 자주 대하게 되는 좁은 신앙 의식, 즉 죽은 다음에 개인의 영생을 그리스도교 종말 희망의 중심 내용으로 삼고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가 현재 효력을 발휘하는 역사를 거의 잊어버린 그런 신앙 의식과는 분명 차이가 난다고 하겠다. 바오로에게는 예수와 함께 시작되고 그의 재림으로서 완성되는 하느님의 다스림,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고리 15,28)이 되시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고, 개인의 부활도 이 안에서 고찰되었다.
1고린 15,35-58에서 바오로는 부활한 사람들의 육신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죽은 이들이 과연 어떤 몸으로 부활할 것이냐는 회의적인 물음에 바오로는 여러 가지 비유로 대답한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산다, 씨알은 밀이나 그밖의 곡식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아주 다른 모습의 다양한 생물(인간, 가축, 새, 고기)이지만 생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태양, 달, 별들은 같은 빛의 여러 다양한 형태이다(36-41 참조). 바오로에 의하면 이런 사물들이 다양한 모습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동일성이 있듯이, 부활 이후에도 지금의 육신적 실존과는 아주 다르지만 그래도 그와 동일한 어떤 육신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래의 육신은 현재의 육신과는 달리 불멸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육신은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 다른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 “마지막 나팔(소리)에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사실 나팔소리가 나고, 그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일으켜질 것이고 우리도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이(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52-53).
바오로는 “입는다”는 말을 고린토 후서에서 계속 발전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그 장막을) 벗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덧입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2고린 5,4). 다른 말로 바꾸면: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현재의 삶을 미래의 아주 다른 삶을 위해서 간단히 폐기하고 내버려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지양되어서 불멸의 새로운 삶 안으로 변화되어 들어가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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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제2부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종말론 제2부

    II. 개인의 완성
    1.들어가는 말
    세상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내용으로 하는 집단적 종말론 다음에 인간 개개인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다루는 개별적 종말론이 따르게 된다. 마지막에는 두 노선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종말론에 대한 오늘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제1부의 “들어가는 말”을 참조할 것.

    2. 성서적 근거
    2.1. 삶(생명)에로의 집중
    초기 이스라엘에서는 개인의 희망은 민족을 위한 희망과 접합되어 있었다. 이는 이미 아브라함에 내린 약속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창세 12,1-3; 13,14-17; 15,1-5). 전통적인 희망의 내용인 땅, 후손, 하느님의 배려는 민족의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고, 동시에 아브라함의 미래도 그 안에 간직되어 있다. 집단, 부족, 민족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의 생동적인 관계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결정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를 갈망하고 간청한다: (1) 공동체 안에서 오래 사는 것, (2) 죽음을 넘어선 미래를 의미하는 수많은 자손의 보유, (3) 낯선 땅이 아니라 “조상들 곁에” 묻히는 것으로서,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의 지속적인 일치를 상징한다. 이것이 채워지면 그 삶은 완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인생의 근본적인 한계인 죽음 그 자체가 슬픔의 근거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 미완인 채로 중단된) 때이른 죽음, (미래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후손 없는 죽음, (자기 백성과의 단절을 뜻하는) 낯선 땅에서 묻히는 것은 비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 자기 백성의 삶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아픈 것, 판결을 받아서 자기 백성에게서 제외되는 것도 똑같이 나쁘게 여겨졌다.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원의 배경에는 자주 이런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예를 들어서 시편 88,5-7; 116,3). 삶과 죽음의 결정적인 경계선은 육체적인 생존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고, 죽음은 공동체에서 배척되는 것을 뜻한다.
    구약성서의 초기 저자들은 죽음 이후의 개인의 운명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예식이 없었는데, 이는 인접국인 에집트와 비교할 때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이다. 죽은 이을 주문을 외어서 불러 내는 것이 가끔 실행되었는데(1사무 28,3-25; 2열왕 21,6; 이사 8,19), 이는 분명히 하느님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배척되었다(신명 18,11-12; 1사무 28,3.9).

    2.2. “셰올”에 대한 상상
    이스라엘에서는 인접국들, 특히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와 비슷하게 지하에 있는 죽음의 세계인 “셰올”(Scheol)에 대한 상상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구약성서 내에서 하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생각하고 살아가는 데에 바탕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셰올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희망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이들은 지하에서 거의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이 맥이 없는 삶을 유지한다. 셰올은 소름이 끼치는 곳(이사 14,9-11), 망각의 장소(시편 88,13)로서 하느님의 손길이 닿지 않고(시편 88,6), 그분의 기적과 신의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시편 88,12-13)이다. 셰올에 있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산 이들의 공동체에서 잘려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되는 표상들이 병존(並存)해 있다: (1) 셰올로 내려가는 것은 망각과 관계의 단절 속에 잠긴다는 의미이다. (2) 죽어서 조상들과 합치된다는 것은 백성의 공동체 안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것은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무력함을 표현하고, 두 번째는 선조들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특별한 희망을 표현한다.

    2.3. 지속적인 하느님과의 친교(시편 73)
    바빌론 유대 이후에 불의와 부당함을 겪으면서 그리고 많은 유다인들의 디아스포라 상황에 직면해서 개인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된다. 이 세상의 삶에서 장수(長壽)와 때이른 죽음, 부와 가난, 행복과 불행이 공정하지 않게 분배된다는 체험이 강하게 의식 속에 들어오게 된다. 의인은 잘되고 악인은 나쁘게 된다(예를 들어서 시편 1편과 37편)는 옛 지혜의 가르침은 더 이상 맞아들어가지 않는 듯하다. 이런 불안한 체험은 하느님의 능력과 신의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이 질문은 신앙이 이 세상 삶의 경계를 돌파하기에 이르른다.
    시편 73편에서 저자는 자신이 마음을 맑게 가졌지만 매일 매일 고통을 받아야 하는 반면에 악인은 건강하고 기름진 몸으로 행복에 가득차서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하느님이 모를 것이라고 겁없이 주장한다고 탄식한다. 시편 저자에게는 세상이 온통 하느님의 정의에 반대되는 일로 가득 찬 듯 보인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그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는 깨달음이 선사된다. 즉 악인들의 행복은 허왕된 꿈과 같고, 그들은 “미끄러운 길”(18)에 서 있다. 악인들은 “순식간에 멸망해버리지만”(19), 의인은 하느님께로부터 보존되고 받아들여진다.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주셨나이다… 훗날 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리이다”(23-24). 그러나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실지에 대한 상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단지 하느님께서 “훗날” 함께 계실 것에 대한 신뢰, 그리고 악인들은 멸망하고 의인들은 “그분 곁에” 함께 하리라는 것에 대한 신뢰만 있을 뿐이다.

    2.4. 부활 신앙의 전조(前兆)? (에제 37; 호세 6; 이사 25)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라버린 사람의 뼈가 다시 살이 붙어서 살아나고, 무덤이 열리며 하느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기운을 불어 넣어 소생케 하는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 파멸해서 유배살이를 하면서 절망 속에 굳어버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영을 통해서 새로운 삶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에레 37,1-14). 그러나 이 텍스트는 한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쇠락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증거해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쉽사리 이 텍스트를 마지막 날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과 연결짓게 된다. 이에 대한 내적인 논리는 하느님께 신뢰하는 데에 있다. 즉 당신의 영을 통해서 망해버린 백성을 깊은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주신 하느님께서 개개 인간도 죽음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이렇게 마른 뼈들이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는 에제키엘의 환시에 원래의 의도를 뛰어넘는 내용이 부여된다. 이렇게 희망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은 자라나게 된다.
    비슷한 것이 호세 6,2에 적용된다.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살려 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 즉 그들이 윤리적인 타락과 그로 인한 불행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에게서 이 문장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형성된 개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것, 예를 들어서 1고린 15,4에서 “성경(말씀)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지시고…”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신앙 전개의 일관성을 증언해준다고 하겠다.
    이른바 “이사야 묵시록”(이사 24-27)에서 (아직 엄격한 의미에서 묵시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무명의 저자는 종말을 시온 산에서 열리는 풍성한 잔치의 표상으로 묘사한다. 즉 야훼께서 왕으로서의 당신의 다스림이 궁극적으로 확립된 것을 기념해서 시온 산에로 모든 백성들을 초대하신다(25,6-8). 이 잔치에서 모든 백성들은 그때까지 그들을 가리우던 “보자기”(눈이 멀음 혹은 슬픔?)를 벗게 되고, 역사에서 자주 굴욕을 당하던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 앞에서 복권되며,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이사 25,8). 그러나 어떻게 죽음이 없어질 것인가, 즉 사람이 더 이상 죽지 않는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세움으로써, 혹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림으로써 죽음이 없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불분명한 채로 머물러 있다.
    이 대목에서는 에제 37,1-14과 호세 6,2과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즉 이 대목은 부활의 표상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나중에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 부활 신앙에 전형적 특색인 개인적 요소는 특별히 8절 후반부에 분명히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또한 개인적인 측면이 보편적인 측면과 연결되는 점이 눈에 띈다. 즉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해당된다는 것인데, 이는 나중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에 특색이기도 하다. 특별히 주목할만한 것은 죽음의 퇴치가 하느님의 통치가 이룩되는 것의 일부분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승리는 야훼의 무제한적 다스림에 포함된 것이라고 하겠다.

    2.5. 후기 구약성서에 나타난 개인 차원의 미래의 희망
    2.5.1. 묵시문학적 부활 희망(이사 26; 다니 12)
    이사야 묵시록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도래하기를 청하는 기도(이사 26,7-21)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19). 이는 묵시문학적 부활 신앙에 대한 아주 초기의 증언이라고 하겠다. (가까이 다가온) 심판을 죽은 이들의 부활과 연결시킨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성서학적으로 19절이 개인의 부활을 뜻하는 것인지, 혹은 에제 37,1-14처럼 이스라엘의 재건을 표상적으로 표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히브리 성서에서 개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유일하게 다니엘서 12장 2절뿐이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기원전 175-164)의 공포정치 하에서 저술된 다니엘서는 마지막 시대의 고난, 마침내 있을 의인의 구원, 일반적인 보복을 예고하면서, 이와 관련해서 부활을 언급한다.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 시대의 급전환, 부활 그리고 심판은 함께 연결되어 있다. 누가 “대중”에 속하는지, 이스라엘 사람 모두 아니면 이방인들의 일부까지도 포함하는지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의인뿐 아니라 죄인도 깨어난다는 점이다. 이점에 있어서 다니엘서는 이사 26,19과 그리고 다음의 텍스트와 차이가 난다.
    2.5.2. 순교자를 위한 정의(마카베오 후서)
    기원전 60년 이후 그리스어로 저술된 마카베오 후서는 7장에서 율법을 어기기 보다는 고문받아 죽는 것을 택한 한 어머니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극도의 억압과 박해의 상황에서 하느님의 신의와 능력에 대한 신앙은 부활과 새롭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으로 발전한다. 하느님의 왕권이라는 주제는 창조신학적으로 강화된다. “사람이 출생할 때에 그 모양을 만들어 주시고 만물을 형성하신 창조주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2마카 7,23). 부활 신앙은 (고문으로 훼손된) 육신의 원상회복(11.23)와 도살자가 갈라놓은 가족간의 유대의 회복(29)을 포함한다. 범죄자들에게는 부활이 없고 오직 심판만 있을 뿐이다(14.35-37). 그러나 시대의 급변화가 곧 있으리라는 기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다니엘서 12장의 묵시문학적 상상과는 차이가 난다고 하겠다.
    마카베오 후서 12장에서는 부활 신앙과 관련해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언급된다. 저자는 유다가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모금한 돈을 속죄의 제사에 써 달라고 예루살렘에 보낸 것을 다음과 해설한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43-44).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나는 논쟁적 분위기는 모두가 부활 신앙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5.3. 불멸성(지혜서)
    지혜서에서는 또 다른 희망의 표상이 발견된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그리스 영역의 디아스포라(알렉산드리아/ 에집트)에서 형성된 지혜서는 그리스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많은 표현들은 영육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플라톤적 인간론을 상기시킨다. “썩어 없어질 육체는 영혼을 내리누르고…”(지혜 9,15). 그러나 지혜서의 저자가 대면한 문제는 옛날부터 내려온 문제, 예를 들어서 시편 49편과 73편의 작가들을 괴롭히던 문제, 악인들의 강함과 의인들의 무력함이라는 모순이었다. 또한 지혜서가 이런 체험에도 불구하고 지니는 희망도 시편 73,23-24가 암시하는 노선에 놓여있다. “의인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의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불멸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안에서 살 것이다”(지혜 3,1-4.9). 희망은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 또 묵시문학에서처럼 희망은 심판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3,7-8; 4,20-5,23). 그러나 시편 49편과 73편과는 달리 죽음 이후에 있을 복된 미래가 더욱 명확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다니엘서 12장과 마카베오 후서 7장과는 달리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생각은 여기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불멸”(2,23)과 “불사(不死)”(3,4)에 대해서 언급된다. 주목할만 한 점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 세상의 삶에 희망을 집중하였지만, 지혜서에서는 다른 곳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이다: 오래 사는 것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3,17; 4,7.8.13), 후손이나 후손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3,13-14; 4,1.3). 지혜서는 죽음 저편의 삶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곳은 “의인이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는”(3,1) 곳으로서,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던 것과는 달리 “악의 소굴에서 빼내어져”(4,13) “평화를 누리는”(3,3) 곳이다. 이렇게 자주 내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전체적인 관심을저 세상으로 옮겨 놓도록 유도한다. 지혜서 전체의 맥락이 이런 것을 교정하지만, 그러나 그 영향은 그리스도교에까지 미치게 된다.

    2.6. 회의(懷疑)와 단념(전도서)
    그러나 불의와 유한성의 체험은 이스라엘에서 항상 죽음을 넘어선 희망으로 유도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세상과 인생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전도서가 있다. “설교자”는 인간의 삶이 유한하고 전망이 없음을 거듭 거듭 숙고한다. 즉 그는 균형을 잡는 정의나 매혹적인 마지막 목표가 없다고 본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동물과 사람은 같은 운명을 겪을 뿐이다. “다 같은 데로 가는 것을!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 가는 것을!”(3,20).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 가고 짐승의 숨은 땅 속으로 내려 간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해서 전도서의 저자는 “누가 장담하랴!”(3,21)고 물으면서 회의적으로 반응한다. 전도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건을 규정하신다고,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 가도록 만드셨다”(3,11)고 믿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헛되고”, 어디에서도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내세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 오직 제한적인 행복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전도서의 대답은: “그러니 네 몫의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술을 마시며 기뻐하여라… 하늘 아래서 허락받은 덧없는 인생을 애인과 함께 끝날까지 즐기며 살도록 하여라. 이것이야말로 하늘 아래서 수도하며 살아 있는 동안 네가 누릴 몫이다”(9,7-9).

    2.7.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안에서의 죽은 이들의 부활
    2.7.1. 예수 동시대의 상황
    예수 시대의 유다교에서는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경향들이 있었다. 예수의 복음 선포와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데에 특별히 중요한 것은 묵시문학적 부활희망과 그에 대한 반박이다.
    성서 이외의 문학에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상상이 넓게 전개되고 채색되었다. 그 배경을 이루는 것은 보통 마지막 시대의 큰 환란이다. 묵시문학에 전형적이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땅이 열리고, 바위가 쪼개진다. 죽은 이들이 무덤이나 혹은 지하 세계에서 나온다. 마지막 시대에 아직 살아있는 이들은 죽은 이들을 알아본다. 모든 이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서 모일 것이다. 육신은 변화된다. 의인은 영광스럽게 보이고, 시간이 그들을 더 이상 늙게 하지 못하며, “천사와 같고 별과 같다”(syrBar 51,10). 악인들을 흉칙한 모습을 보인다.
    묵시문학 내에서 죽은 모든 이들이 부활할 것인지 혹은 오직 의인들만 부활할 것이지에 대한 견해는 일치하지 않는다. 또 피안의 “장소”에 대한 진술도 여러 가지이다.
    예수의 주변에서 바리사이파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긍정하였지만,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사두가이파는 이를 거부하였다. 신약성서 내에서는 이 논쟁의 흔적이 예수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마르 12,18-27)에서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바오로가 공개적으로 심문받는 대목(사도 23,6-9)에서 발견된다.
    2.7.2.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묵시문학가나 바리사이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기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 부활은 의인은 물론 죄인에게도 해당된다. 부활에 대한 신앙이 부각되고 문제시되어 나타나는 것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논리를 전개한다. 모세의 율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을 수가 없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자식을 낳으려고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여인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 그 여인은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 12,23). 부활 신앙은 성서를 거스르는 것이든지(왜냐하면 나중에 한 사람이 여러 배우자를 지니지 않게 되기 위해서 두 번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오니까!), 아니면 불합리한 것이 된다.
    부활이 단순히 지금까지의 삶을 연장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논리에는 사실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그 전제를 공격한다. “사람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들지도 않고 시집가지도 않으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게 된다”(마르 12,25). 그 당시 유다인의 상상에 의하면 천사는 죽지 않고 그래서 결혼이나 후손 출산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능력”(마르 12,24)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질책한다. “그리고 죽은 이들에 관해서, 그들이 일으켜진다는 사실을 두고 모세의 책 가시덤불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느지 읽어 보지 못했습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마르 12,26-27). 예수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모세로 돌아가서 출애 3,6을 인용한다. 하지만 예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은 단지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죽은 이들은 그분 능력의 범위에 더 이상 속하지 앟는다고 생각하는 반면, 예수는 하느님의 상을 계속 발전시킨 이들의 편에 서있다. 마지막 시간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믿음은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능력에 대한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출애 3,6은 본시 하느님이 모세에게 당신 정체를 밝히시는 자기 소개다. 풀이하면 나는 너의 죽은 선조들이 섬긴 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는 본시 부활사상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오면 선조들은 이미 하늘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있으며(루가 16,22-31) 장차 부활해서는 더욱 행복하게 되리라는 사상이 널리 퍼저 있었다(마태 8,11-12 = 루가 13,28-29). 이와 같은 사상적 맥락에서 출애 3,6을 다시 해석한다면 하느님은 당신을 섬긴 선조들을 명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능력으로’(24절) 살려 거느르시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성서의 하느님은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27절)”. 정양모 역주,『마르코 복음서』, 분도출판사, 1981, 138-139.

    2.7.3. 하느님 나라 선포 안에서의 위치
    예수가 선포한 새로운 점이란 하느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세상 종말이나 개개인이 죽은 후에나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에는 죽음의 무력화는 물론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세상의 세력들(보지 못함, 듣지 못함, 말 못함, 나병, 신체의 마비, 마귀들림, 죄)에서의 해방과 인간다운 삶(오관을 사용하고, 똑바로 걸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용서하고 친교를 이루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 나라의 내용을 이루고,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열두 제자의 파견 명령(마태 10,7-8)에는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오”는 것외에도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나병환자들을 깨끗이해 주고 귀신들을 쫒아내시오”는 것이 함께 있다. 그러나 이 전체는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말하며 선포하시오”라는 표제(表題) 하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 설교의 중심적인 주제는 여기서 지금 시작하고 효력을 드러내는 하느님 나라이다. 그리고 죽음에서의 해방은 이 선포의 한 요소이다. 이 요소는 다른 요소들과의 관련 안에서, 즉 해방되고 해방시키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과의 관련 속에서 볼 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그 당시 묵시묵학에서 내세를 상세하게 묘사한 것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2.8. 죽음에 대한 승리(바오로)
    부활에 대한 희망은 바오로에게서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보다는 더 큰 범위를 차지하게 된다. 바리사이파에 소속되어 있던 바오로는 그들로부터 부활희망을 전수받는다. 하지만 이 희망은 우선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 종속되어 있다. 바오로는 초기에는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의 재림과 그의 결정적인 다스림을 기대하였기에, 부활에 대한 생각은 바오로에게 그렇게 중요한 주제가 아닌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도전을 받으면서 부활의 선포가 바오로에게 중요하게 되었다. 두 가지 도전이란 테살로니카 교회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이 주님의 재림 전에 죽어가는 것과 고린토 교회에서 나타난 세상과 역사를 배제한 구원 이해이다.
    2.8.1. 주님의 재림에 참여하기 위한 부활
    테살로니타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종말임박 사상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공동체는 주님께서 곧 오시리라고 희망하였다. 그런데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체험하기 못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재림의 희망에서 제외된 것인가? 이에 대해서 바오로는 1테살 4,13-18에서 대답한다. “주님이 내림하실 때까지 남아 있을 우리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결코 앞지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야 남아 있는 우리 산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동시에 주님을 마중하기 위해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이끌려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15-17). 그리스도의 재림을 체험하고, 주님을 만나 그와 함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이 남아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이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중요하게 된다.
    2.8.2. 육신의 부활
    고린토 교회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명백하게 고백하면서도 “죽은 자들의 부활은 없다”(1고린 15,12)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의 배경에는 열광적이고 유심론(唯心論)적인 신앙 해석, 혹은 과도하게 현재에 집중하는 구원관, 즉 역사는 별 소용이 없다고 천명하고 구원을 아주 내면화시켜서 육신성(肉身性)을 제외하는 구원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현재성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구원에는 무조건 역사의 원성과 육신까지도 포함한 전체 인간의 구원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육신과 역사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존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서 동시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선포되고 있는데도 여러분 가운데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고린 15,12-13).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의 존립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실상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14).
    바오로는 예수의 부활을 근거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예수의 부활이 모든 이의 부활 가능성을 증명하는 한 “사건”이라는 식으로) 단지 한 사건에서 일반적인 것을 논리적으로 결론짓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의 역사를 열었는데, 이 역사는 하느님께 적대적인 모든 세력이 정복될 때 비로소 목표에 이르른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의 내림 때에 그분께 속할 사람들입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일체의 지배와 일체의 권력과 일체의 권세를 쳐없고 나서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릴 것입니다…마지막으로 없어질 원수는 죽음입니다”(23-24.26). 이런 역사적 희망을 삭제하는 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34) 사람이다. 이렇게 바오로는 개인의 부활을 강조하게 되지만 오늘날 자주 대하게 되는 좁은 신앙 의식, 즉 죽은 다음에 개인의 영생을 그리스도교 종말 희망의 중심 내용으로 삼고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가 현재 효력을 발휘하는 역사를 거의 잊어버린 그런 신앙 의식과는 분명 차이가 난다고 하겠다. 바오로에게는 예수와 함께 시작되고 그의 재림으로서 완성되는 하느님의 다스림,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고리 15,28)이 되시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고, 개인의 부활도 이 안에서 고찰되었다.
    1고린 15,35-58에서 바오로는 부활한 사람들의 육신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죽은 이들이 과연 어떤 몸으로 부활할 것이냐는 회의적인 물음에 바오로는 여러 가지 비유로 대답한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산다, 씨알은 밀이나 그밖의 곡식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아주 다른 모습의 다양한 생물(인간, 가축, 새, 고기)이지만 생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태양, 달, 별들은 같은 빛의 여러 다양한 형태이다(36-41 참조). 바오로에 의하면 이런 사물들이 다양한 모습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동일성이 있듯이, 부활 이후에도 지금의 육신적 실존과는 아주 다르지만 그래도 그와 동일한 어떤 육신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래의 육신은 현재의 육신과는 달리 불멸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육신은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 다른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 “마지막 나팔(소리)에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사실 나팔소리가 나고, 그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일으켜질 것이고 우리도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이(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52-53).
    바오로는 “입는다”는 말을 고린토 후서에서 계속 발전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그 장막을) 벗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덧입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2고린 5,4). 다른 말로 바꾸면: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현재의 삶을 미래의 아주 다른 삶을 위해서 간단히 폐기하고 내버려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지양되어서 불멸의 새로운 삶 안으로 변화되어 들어가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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