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동체와 평신도-소공동체 운동의 전망

 

4. 소공동체 운동의 전망




앞에서 살펴본 대로,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교회 쇄신의 산물이다. 중남미에서 시작된 기초 공동체는 전세계 교회로 퍼져나갔으며, 교황청도 이를 공식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화의 유효한 수단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에서도 박해 시대의 교우촌에 뿌리를 두고 소외된 이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소공동체 운동이 공식 교회로부터 인정받았으며 교구의 공식적 지원에 힘입어 각 본당에서도 실시됨으로써 교회적 완결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이는 2000년 이후 가톨릭 교회가 소공동체의 교회로 한국 사회 안에 자리잡을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이같은 낙관적인 전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소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자기 신원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인식이 선행해야 한다. 이를테면, 소공동체가 교회로서 자신이 곧 ‘구원의 성사’라는 신원을 인식해야 하고, 또한 자신의 소명은 세상에서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자기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르고 모범이신 마리아를 모방하여 따르겠다는 자세로 소공동체 운동을 펼쳐갈 때, 이러한 전망은 아름다운 소공동체 교회라는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펼쳐지는 소공동체 운동은 한국에 알맞는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적인 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문화 토양에는 공동체 정신이 스며 있는 부분도 있다는 점이 전망의 실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로 공동 노동의 형태인 두레와 품앗이를 들 수 있다. 이중에서도 두레1)는 협력의 합리성을 강조한 제도로서 그 저변에 구성원들의 능력에 대한 평등관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그 속성이나 이념이, 그리고 그 종류가 성별(남자 두레와 여자 두레), 발생의 전후(선생 두레와 제자 두레), 세력의 우열(형 두레와 아우 두레), 세대별(청년 두레와 장년 두레), 크기(큰 두레와 작은 두레)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현실을 고려하는 운영 형태가 한국에 맞는 소공동체 운동내지는 소공동체 운동의 토착화에 의미 있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소공동체를 통한 교회와 사회의 복음화를 실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드러난 장애와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장애 3가지와 한계 3가지를 들어 보기로 한다.


이순성 신부는 공동체로서 한국 천주교회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2) 첫째로 위계적 권위우선주의를 들었다. 성직 중심과 권위 의식에 젖어 있는 한국 성직계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대한 신도들의 피동적인 참여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지적하였다.3) 둘째 요인으로 엘리트 중심주의를 들었다. 선택된 사람들이 오직 성령의 권능에 의탁해서 살지 않고 진리의 독점, 타자 불신, 강요, 단죄를 능사로 함으로써 ‘자기폐쇄적 통제’ 또는 ‘색다르게 형성된 분파’로 보이는 이른바 반공동체적인 면을 보이지는 않는가 하고 지적하였다. 셋째 요인으로는 미화된 물질주의를 들었다. 단지 필요하다는 이유로 미화된 물질주의에 젖어 스스로 재물의 비축과 재산의 증식을 합리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은연중에 황금만능주의를 부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지적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드러난 3가지 한계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첫째, 소공동체 운동이 본당 위주의 사목 구조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한 소극적 대안으로서만 전개되는 면이 보인다. 그렇다면 그 장래를 낙관하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천명한 교회 쇄신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할 때에 비로소 소공동체 운동은 복음화의 적절하고 유효한 수단으로서 교회 안에 자리잡을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의 소공동체 운동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생활을 주축으로 하는 ‘사는 공동체’에 국한되어 있어서 직업 활동에 종사하는 남성 신자들과 점점 늘어나고 있는 취업 여성 신자들은 아직 참여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소공동체 운동이 ‘일하는 공동체’도 지향함으로써 이들도 포용할 수 있을 때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 뜻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의 교우촌이나 남미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기초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이바지한 데 비해서 중산층화된 한국 본당 사목 구조에서 이루어져 온 소공동체 운동은 그렇지 못하다는 근본적 한계를 보인다.4) 그렇다면 중산층이 대중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맞는 소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빈민 지역에서 전개되어 온 기초 공동체 운동과도 연대해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도 공헌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망 아래 누군가가 ‘할 수 있다’는 잠재적 가능성을 뛰어 넘어 ‘해야 한다’는 실천적 당위성으로 평신도를 이끌어낸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에 의해 마침내 평신도들이 촉발된다면, 그들이 몸담고 있는 소공동체는 친교로서의 교회, 삼위일체적 친교의 교회로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고 증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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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4. 소공동체 운동의 전망


    앞에서 살펴본 대로,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교회 쇄신의 산물이다. 중남미에서 시작된 기초 공동체는 전세계 교회로 퍼져나갔으며, 교황청도 이를 공식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화의 유효한 수단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에서도 박해 시대의 교우촌에 뿌리를 두고 소외된 이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소공동체 운동이 공식 교회로부터 인정받았으며 교구의 공식적 지원에 힘입어 각 본당에서도 실시됨으로써 교회적 완결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이는 2000년 이후 가톨릭 교회가 소공동체의 교회로 한국 사회 안에 자리잡을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이같은 낙관적인 전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소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자기 신원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인식이 선행해야 한다. 이를테면, 소공동체가 교회로서 자신이 곧 ‘구원의 성사’라는 신원을 인식해야 하고, 또한 자신의 소명은 세상에서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자기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르고 모범이신 마리아를 모방하여 따르겠다는 자세로 소공동체 운동을 펼쳐갈 때, 이러한 전망은 아름다운 소공동체 교회라는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펼쳐지는 소공동체 운동은 한국에 알맞는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적인 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문화 토양에는 공동체 정신이 스며 있는 부분도 있다는 점이 전망의 실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로 공동 노동의 형태인 두레와 품앗이를 들 수 있다. 이중에서도 두레1)는 협력의 합리성을 강조한 제도로서 그 저변에 구성원들의 능력에 대한 평등관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그 속성이나 이념이, 그리고 그 종류가 성별(남자 두레와 여자 두레), 발생의 전후(선생 두레와 제자 두레), 세력의 우열(형 두레와 아우 두레), 세대별(청년 두레와 장년 두레), 크기(큰 두레와 작은 두레)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현실을 고려하는 운영 형태가 한국에 맞는 소공동체 운동내지는 소공동체 운동의 토착화에 의미 있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소공동체를 통한 교회와 사회의 복음화를 실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드러난 장애와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장애 3가지와 한계 3가지를 들어 보기로 한다.

    이순성 신부는 공동체로서 한국 천주교회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2) 첫째로 위계적 권위우선주의를 들었다. 성직 중심과 권위 의식에 젖어 있는 한국 성직계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대한 신도들의 피동적인 참여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지적하였다.3) 둘째 요인으로 엘리트 중심주의를 들었다. 선택된 사람들이 오직 성령의 권능에 의탁해서 살지 않고 진리의 독점, 타자 불신, 강요, 단죄를 능사로 함으로써 ‘자기폐쇄적 통제’ 또는 ‘색다르게 형성된 분파’로 보이는 이른바 반공동체적인 면을 보이지는 않는가 하고 지적하였다. 셋째 요인으로는 미화된 물질주의를 들었다. 단지 필요하다는 이유로 미화된 물질주의에 젖어 스스로 재물의 비축과 재산의 증식을 합리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은연중에 황금만능주의를 부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지적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드러난 3가지 한계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첫째, 소공동체 운동이 본당 위주의 사목 구조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한 소극적 대안으로서만 전개되는 면이 보인다. 그렇다면 그 장래를 낙관하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천명한 교회 쇄신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할 때에 비로소 소공동체 운동은 복음화의 적절하고 유효한 수단으로서 교회 안에 자리잡을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의 소공동체 운동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생활을 주축으로 하는 ‘사는 공동체’에 국한되어 있어서 직업 활동에 종사하는 남성 신자들과 점점 늘어나고 있는 취업 여성 신자들은 아직 참여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소공동체 운동이 ‘일하는 공동체’도 지향함으로써 이들도 포용할 수 있을 때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 뜻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의 교우촌이나 남미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기초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이바지한 데 비해서 중산층화된 한국 본당 사목 구조에서 이루어져 온 소공동체 운동은 그렇지 못하다는 근본적 한계를 보인다.4) 그렇다면 중산층이 대중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맞는 소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빈민 지역에서 전개되어 온 기초 공동체 운동과도 연대해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도 공헌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망 아래 누군가가 ‘할 수 있다’는 잠재적 가능성을 뛰어 넘어 ‘해야 한다’는 실천적 당위성으로 평신도를 이끌어낸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에 의해 마침내 평신도들이 촉발된다면, 그들이 몸담고 있는 소공동체는 친교로서의 교회, 삼위일체적 친교의 교회로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고 증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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