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해
가. 동시대 이해와의 대조점
우선 예수는, 열혈당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킴으로써 현세적, 민족적, 정치적인 하느님의 왕국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와는 다른 입장을 보인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루가 11,20)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자신의 인격과 행위에 하느님 나라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휘두르는 메시아가 아닌) 그가 봉사하는 메시아임을 다음과 같은 말들 속에서 보여준다. 즉 “사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45);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8,28) 또한 예수가 유대민족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현세의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러 온 줄로 생각하는 제자들의 오해를 시정해준다(참조: 마르 10,35-45).
둘째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는 유다인들의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생각과도 차이가 있다.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자신의 최고 권능의 행사로 나타난다”.1) 즉 인간의 윤리적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나라를 주셔야만 가능한 선물의 의미이다. 하느님 나라로 비유되는 잔치를 베풀어 초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참조: 마태 22,1-14). 인간은 다만 이 초대에 적극적인 자세로 응할 수 있다. 또한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윤리적 의무를 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부담스러운 것2)이 아니라 밭에 뭍힌 보물, 값진 진주를 발견한 기쁨 등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크나큰 기쁨으로 시작되는 나라이다.
세째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해는 묵시적 이해와도 차이가 있다. 묵시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시대는 현세의 악한 세대가 모두 끝나고 난 다음 새롭게 도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 또한 묵시주의자들이 세상 끝날이 언제 올 것인가를 계산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는 묵시문학적 계산을 거부한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하느님 나라는 지켜보는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보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루가 17,20 이하).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외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아들조차도 모릅니다”(마르 13,32)3)고 말한다.
나. 하느님 나라의 성격 – 신학적 성찰4)
A. 종말론적 성격
이스라엘은 역사를 거치면서 쓰라린 체험을 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주어진 현실과는 너무나도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정경 예언자’들의 출현 이래 이스라엘의 신앙의식 안에는 종말론적 경향이 점점 확산되어 간다. 과거의 출애굽과 같은 하느님의 모든 ‘구원위업’들이 미래에는 더욱 거창하게 재현되리라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임하리라는 희망은 먼 미래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예수는 이런 종말론적인 희망이 바로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선포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4이하). 더 나가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포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마태 12,28).
그러나 그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기대하고 간청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주의 기도 청원문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가 11,2; 마태 6,10)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지금 당장 시작된다는 언명들과 ‘하느님의 다스리심’의 도래는 곧 다가올 것이며 이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해야 한다는 언명들 사이의 긴장 관계는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종말론적 긴장관계의 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이론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멀지 않은 도래에 관해 말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이미’ 현재 안에 시작되어 작용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도 기다려야 할’ 종말론적인 희망의 대상인 채로 남아 있는 신비로운 실재였다고 말할 수 있다.5)
B. 신론적 성격
구약성서와 유대교 전통에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다스리심의 도래는 곧 하느님 자신이 오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느님의 완전한 주권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이 바로 종말론적 희망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6)
또한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오로지 하느님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의 나라는 종교적,윤리적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 투쟁을 통해 지상에 세울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도 아니며 묵시문학적으로 미리 계산해서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이며(마태 21,43; 루가 12,32) 사람들은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마태 25,34)
이상의 2가지 설명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신론적 성격이 드러난다.7) 즉 하느님 나라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느님과 관련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C. 구원론적 성격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이 세례자 요한에게는 위협적인 심판이었지만 예수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의 선포가 기쁜 소식 즉, 福音으로 표현된다(마르 1,14; 14,9; 마태 4,23; 9,35; 24,14; 루가 16,16). 예수의 행적에서 독창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라는 개념을 구원의 중심 개념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8)
예수는 나자렛에서의 첫 설교에서, 자신은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며, 눈 먼 이들을 보게 하고, 묶인 이들을 풀어주며, 마침내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보내어졌음을 이야기 한다(루가 4,18이하). 또한 예수는 그의 공생활 동안, 당시 사회에서 불경건한 자들(죄인들)로 천대받던 ‘세리나 창녀 혹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자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다. 이 불경건한 자들은 구원의 조건인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설사 알았다하더라도 지키지 못할 처지에 있었기에 이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울러 이들은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이런 이들과 함께 했으며 오히려 이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까지 이야기 한다(참조: 마태 21,31).
예수는 일체의 구원기대를 하느님 나라에의 참여라는 단 하나의 기대로 집약하고 있는데,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가 잘 표현해주듯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구원의 기쁜 소식 내용은 우선적으로 罪의 용서였다. 다시말하면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에 있으며, 그 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없는 사랑과 자비로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기쁨’에 있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들여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게된다.9) 아울러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인간을 끊임 없이 괴롭히는 악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루가 17,20이하). 예수의 기적들은 대부분 ‘병자 치유’나 ‘악령 축출’이었으며, 이는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수단이요 표지였음을 전제로 할 때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인간에 대한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2.4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해
가. 동시대 이해와의 대조점
우선 예수는, 열혈당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킴으로써 현세적, 민족적, 정치적인 하느님의 왕국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와는 다른 입장을 보인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루가 11,20)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자신의 인격과 행위에 하느님 나라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휘두르는 메시아가 아닌) 그가 봉사하는 메시아임을 다음과 같은 말들 속에서 보여준다. 즉 “사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45);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8,28) 또한 예수가 유대민족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현세의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러 온 줄로 생각하는 제자들의 오해를 시정해준다(참조: 마르 10,35-45).
둘째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는 유다인들의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생각과도 차이가 있다.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자신의 최고 권능의 행사로 나타난다”.1) 즉 인간의 윤리적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나라를 주셔야만 가능한 선물의 의미이다. 하느님 나라로 비유되는 잔치를 베풀어 초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참조: 마태 22,1-14). 인간은 다만 이 초대에 적극적인 자세로 응할 수 있다. 또한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윤리적 의무를 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부담스러운 것2)이 아니라 밭에 뭍힌 보물, 값진 진주를 발견한 기쁨 등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크나큰 기쁨으로 시작되는 나라이다.
세째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해는 묵시적 이해와도 차이가 있다. 묵시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시대는 현세의 악한 세대가 모두 끝나고 난 다음 새롭게 도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 또한 묵시주의자들이 세상 끝날이 언제 올 것인가를 계산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는 묵시문학적 계산을 거부한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하느님 나라는 지켜보는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보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루가 17,20 이하).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외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아들조차도 모릅니다”(마르 13,32)3)고 말한다.
나. 하느님 나라의 성격 – 신학적 성찰4)
A. 종말론적 성격
이스라엘은 역사를 거치면서 쓰라린 체험을 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주어진 현실과는 너무나도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정경 예언자’들의 출현 이래 이스라엘의 신앙의식 안에는 종말론적 경향이 점점 확산되어 간다. 과거의 출애굽과 같은 하느님의 모든 ‘구원위업’들이 미래에는 더욱 거창하게 재현되리라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임하리라는 희망은 먼 미래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예수는 이런 종말론적인 희망이 바로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선포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4이하). 더 나가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포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마태 12,28).
그러나 그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기대하고 간청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주의 기도 청원문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가 11,2; 마태 6,10)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지금 당장 시작된다는 언명들과 ‘하느님의 다스리심’의 도래는 곧 다가올 것이며 이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해야 한다는 언명들 사이의 긴장 관계는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종말론적 긴장관계의 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이론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멀지 않은 도래에 관해 말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이미’ 현재 안에 시작되어 작용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도 기다려야 할’ 종말론적인 희망의 대상인 채로 남아 있는 신비로운 실재였다고 말할 수 있다.5)
B. 신론적 성격
구약성서와 유대교 전통에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다스리심의 도래는 곧 하느님 자신이 오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느님의 완전한 주권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이 바로 종말론적 희망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6)
또한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오로지 하느님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의 나라는 종교적,윤리적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 투쟁을 통해 지상에 세울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도 아니며 묵시문학적으로 미리 계산해서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이며(마태 21,43; 루가 12,32) 사람들은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마태 25,34)
이상의 2가지 설명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신론적 성격이 드러난다.7) 즉 하느님 나라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느님과 관련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C. 구원론적 성격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이 세례자 요한에게는 위협적인 심판이었지만 예수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의 선포가 기쁜 소식 즉, 福音으로 표현된다(마르 1,14; 14,9; 마태 4,23; 9,35; 24,14; 루가 16,16). 예수의 행적에서 독창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라는 개념을 구원의 중심 개념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8)
예수는 나자렛에서의 첫 설교에서, 자신은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며, 눈 먼 이들을 보게 하고, 묶인 이들을 풀어주며, 마침내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보내어졌음을 이야기 한다(루가 4,18이하). 또한 예수는 그의 공생활 동안, 당시 사회에서 불경건한 자들(죄인들)로 천대받던 ‘세리나 창녀 혹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자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다. 이 불경건한 자들은 구원의 조건인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설사 알았다하더라도 지키지 못할 처지에 있었기에 이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울러 이들은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이런 이들과 함께 했으며 오히려 이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까지 이야기 한다(참조: 마태 21,31).
예수는 일체의 구원기대를 하느님 나라에의 참여라는 단 하나의 기대로 집약하고 있는데,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가 잘 표현해주듯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구원의 기쁜 소식 내용은 우선적으로 罪의 용서였다. 다시말하면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에 있으며, 그 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없는 사랑과 자비로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기쁨’에 있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들여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게된다.9) 아울러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인간을 끊임 없이 괴롭히는 악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루가 17,20이하). 예수의 기적들은 대부분 ‘병자 치유’나 ‘악령 축출’이었으며, 이는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수단이요 표지였음을 전제로 할 때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인간에 대한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