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가난의 성서적 의미
가난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있어서 하나의 중심테마를 이룬다. 성서의 가난은 사회적 상황들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영적인 체험까지도 표현해주고 있다. 또한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자세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명해 주기도 한다.
여기서는 가난이 지닌 성서적 의미를 개략적으로 탐구해 보면서 그리스도론적 접근의 토대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1. 구약성서
구약성서에서는 구체적으로 ‘가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고, 가난한 이의 생활과 관련시켜 여러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하는 다양한 어휘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1. 가난에 대한 단어들
먼저 ‘에비온’(ןוֹיꔩꔟ)은 궁핍한 자, 빈궁한 자를 뜻한다. 이 단어는 ‘궁핍’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다른 단어들과 구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에비온’은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가난한 이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출애 23,11; 신명 65,7.9.11; 에 9,22; 욥 31,19; 시 132,15 이하 참조).1) 예를 들어, 땅주인은 6년 동안의 소출로 경작하지 않는 7년째되는 해 동안 살아갈 수 있지만, ‘에비온’(궁핍한 자)은 안식년에 묵고있는 땅에 야생으로 자라는 것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부도, 소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출애23,11이하 참조), 집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특히 시편 저자는 이들이 적들로 인해 궁핍해졌으며, 야훼 하느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기대한다(시 12,5-6).2)
두번째, ‘달’(לꕈ)은 약한 자를 뜻하며,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인 힘(잠언 10,15; 아모 2,7 참조)의 결핍을 뜻한다. 즉, 물질적으로 부족한 상태의 사람들과 천한 계급의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3) 특별히 이들은 송사(訟事)에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하는 ‘사회적으로 약한 자’로 지칭되고 있다(출애 23,1-9참조).4)
세번째, ‘아니’(יꗼꘝ)와 ‘아나우’(וꗺꘝ)가 있다. ‘아니’(יꗼꘝ)는 ‘가난한․약한․겸손한’을 뜻하며, ‘에비온’과 ‘달’과 병행되는 동의어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무능력과 비통함’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신명 24,14-15참조). 이 단어는 물질적인 결핍으로 곤경에 처한 자들(신명 15,11참조)을 가리키며, 이것은 물질적인 약탈 및 사회적 압제와 밀접한 관련하에서 사용되고 있다(이사 3,14; 에스 18,17참조).5) ‘아나우’(וꗺꘝ)는 대부분이 복수형인 ‘아나윔’(מיꕱꗺ꘥)으로 사용되는데, ‘겸손한, 온유한’를 뜻하며 경건한 자들의 도덕적․영적인 상태를 강조한다. 이 상태는 고난을 겪은 자의 겸손을 나타내며(민수 12,3참조), 그들은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때에 그들을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시 76,9; 147,9;147,6; 149,4참조).6)
1.2. 구약성서에서의 가난
‘에비온’(ןוֹיꔩꔟ : 궁핍한 자, 빈궁한 자)․‘달’(לꕈ : 약한 자)․‘아니’(יꗼꘝ : 가난한,약한,겸손한)와 ‘아나우’(וꗺꘝ :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는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발견되고 있다. 이 단어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소농민․목자․노예는 물론 사회적으로 보호받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과부․고아․이방인들 모두를 포함한다.”7)
따라서 지금까지 ‘가난’을 표현하는 구약성서의 개념들을 살펴본 결과, 그 의미가 물질적인 면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자․약한 자, 나아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까지도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아나윔’은 신약성서에서 더욱 종교적 성격을 띤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2. 신약성서8)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이라는 단어는 ‘가난한 이들’의 삶과 연관하에서 의미가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도 이해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대표적으로 ‘가난’과 관련되어 나오는 단어는 ‘페네스’(πἑνῃς)와 ‘프토코스’(πτωχὁς)이다. 전자는 ‘가난한, 궁핍한’을 뜻하지만 단지 2고린 9,9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후자는 ‘가난한, 빈곤한, 종교적으로 겸손한’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서 36회 사용되는 대부분의 단어는 ‘프토코스’(πτωχὁς)이며, 31-35회가 사용된다(특히, 마태 4-5회, 마르코 4-5회, 루가 10회 사용. 사도행전에서는 전무하다).”9) 이 단어는 원래 희랍세계에서 ‘구걸해야 하는 절대가난’을 의미했으나, 신약성서에서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까지도 포함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신약성서는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2.1.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10,17이하에서는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도록 도전적으로 요구하신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이는 자발적 가난이 필요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10) 그러나 “저자는 가난을 그 자체로 혹은 원칙적으로 찬양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11)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물질적 측면에서의 가난과 영적인 가난의 두가지 차원을 만날 수 있다. 먼저 최후심판 문맥(마태 25,31-40참조)에서 볼 수 있듯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예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소외당한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를 가장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복선언(마태 5,3이하)에서 ‘마음으로 가난한 이’의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순수하게 현세적인 희망들에서부터 순수한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아나윔의 경건성과 신앙심’의 충만한 폭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진복선언은 마태오의 우선적이고 표제적인 진술이다. 이렇게 볼 때, 가난에 대한 강조점은 물질적인 영역에서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 이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
루가 복음서에서는 선택적 가난의 측면에서, 하느님 나라만을 추구하기 위해 물질적 가난의 생활을 영위할 것을 말하고 있다(루가 14,33; 16,13참조). 이는 “사람들을 세상에 고정시켜 놓는 부에 따르는 위험성을 경고한 내용과 좋은 비교를 이루고 있다(6,24-25; 8,14; 12,15이하; 14,33; 16,10이하참조).”13) 또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선포됨을 말하고 있다(루가 6,20-21참조).
예수는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등과 같이 소외되고 무관심 속에 잊혀져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이르신다(루가 14,14참조). 루가 16,19이하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자이며, 부자는 자기 중심적 삶으로 인해 하느님과 분리됨을 말하고 있다. 특히 자캐오의 행동은 루가에게 모델이 되었고 자캐오를 호의적인 조명 안에서 등장케하는 원인이 되었다.14)
2.2. 바오로 서간
바오로는 물질적 가난이란 주제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추켜세우고 부자들을 무시하는 모양으로 가난한 이들과 부자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갈라 3,27).15) 물론, 바오로는 가난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다루는 단계를 제시하지만 그의 신학은 종말론적인 면이 강해서 ‘가난’이 주된 관심사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16) 하지만 그는 하느님 앞에 가난하게 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난한 삶이 인간들의 삶을 부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2고린 8,9; 6,3이하).
2.3.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재산공유에 대해 두 곳에서 보도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생활 양식이었다(사도 2,42-47; 4,32-35참조).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사도 2,44-45)은 초대 교회의 공동체 정신에 의하면 이상과 모범으로 비쳤던 것이다. 여기서 재산 공유란 각자의 소유권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협력한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재산을 교회 공동체에 바치는 것은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공동체 안의 가난한 이를 돕자는 것이었고, 그 추구하는 바는 이웃사랑이었다.17)
3. 가난에 대한 성서적 관점의 종합
가난을 불의와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라는 두 관점에서 본 구약성서의 입장은 신약에 와서 더 구체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구약에서의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인 필요와 사회적 힘이 약한 자들로서 나타났다. 이로써 구약성서는 가진 자의 횡포와 사회적 불의에 의해 가난이 발생함을 보여 주었고, 예언자들은 이들의 권익과 존엄성을 위해 불의에 대한 고발과 가난한 이에 대한 배려를 촉구하였다. 또한 의로우신 야훼 하느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의 메세지가 표현되기도 하였다. 물질이 궁핍했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영적인 성숙을 이루게 되는 바, 후기 유대 사상에서는 ‘하느님 앞에 겸손한, 그분께만 의지하는’ 영적인 가난개념이 발생하였고 이는 물질적인 가난의 개념을 심화시켰으며 신약의 ‘마음의 가난’개념의 토대가 되었다.
신약에서는 가난한 이들이란 구체적 인물임과 동시에 폭넓게 제시되고 있다. 즉 당시 사회에서 소외 받으며 인간이하의 생활에서 허덕이던 이들을 일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물질적인 도움을 갈구하는 비참한 사람들이며, 사회적으로 인간 존엄성이 짓밟히던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가난은 사회악이었고, 가난은 고통과 부조리를 조장하여 하느님의 정의 실현에 역행하고 있었던 것이다.”18) 예수는 이런 사람들의 벗이요, 스승이었다. 예수는 하느님 통치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하셨다. 이후 예수의 공동체인 초대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고, 재산의 공유와 친교를 통해서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이렇게 예수의 삶을 현재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이들이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실천적 삶은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 생활에서 그 효력이 유지되어야 할 삶의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성서적 고찰을 통해 본 가난한 이들은 인간존엄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며, 내적으로는 하느님 외에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둘 수 없는 자들이고, 외적으로는 이웃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느님께 개방되고 겸손한,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었다.

Ⅱ. 가난의 성서적 의미
가난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있어서 하나의 중심테마를 이룬다. 성서의 가난은 사회적 상황들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영적인 체험까지도 표현해주고 있다. 또한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자세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명해 주기도 한다.
여기서는 가난이 지닌 성서적 의미를 개략적으로 탐구해 보면서 그리스도론적 접근의 토대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1. 구약성서
구약성서에서는 구체적으로 ‘가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고, 가난한 이의 생활과 관련시켜 여러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하는 다양한 어휘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1. 가난에 대한 단어들
먼저 ‘에비온’(ןוֹיꔩꔟ)은 궁핍한 자, 빈궁한 자를 뜻한다. 이 단어는 ‘궁핍’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다른 단어들과 구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에비온’은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가난한 이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출애 23,11; 신명 65,7.9.11; 에 9,22; 욥 31,19; 시 132,15 이하 참조).1) 예를 들어, 땅주인은 6년 동안의 소출로 경작하지 않는 7년째되는 해 동안 살아갈 수 있지만, ‘에비온’(궁핍한 자)은 안식년에 묵고있는 땅에 야생으로 자라는 것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부도, 소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출애23,11이하 참조), 집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특히 시편 저자는 이들이 적들로 인해 궁핍해졌으며, 야훼 하느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기대한다(시 12,5-6).2)
두번째, ‘달’(לꕈ)은 약한 자를 뜻하며,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인 힘(잠언 10,15; 아모 2,7 참조)의 결핍을 뜻한다. 즉, 물질적으로 부족한 상태의 사람들과 천한 계급의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3) 특별히 이들은 송사(訟事)에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하는 ‘사회적으로 약한 자’로 지칭되고 있다(출애 23,1-9참조).4)
세번째, ‘아니’(יꗼꘝ)와 ‘아나우’(וꗺꘝ)가 있다. ‘아니’(יꗼꘝ)는 ‘가난한․약한․겸손한’을 뜻하며, ‘에비온’과 ‘달’과 병행되는 동의어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무능력과 비통함’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신명 24,14-15참조). 이 단어는 물질적인 결핍으로 곤경에 처한 자들(신명 15,11참조)을 가리키며, 이것은 물질적인 약탈 및 사회적 압제와 밀접한 관련하에서 사용되고 있다(이사 3,14; 에스 18,17참조).5) ‘아나우’(וꗺꘝ)는 대부분이 복수형인 ‘아나윔’(מיꕱꗺ꘥)으로 사용되는데, ‘겸손한, 온유한’를 뜻하며 경건한 자들의 도덕적․영적인 상태를 강조한다. 이 상태는 고난을 겪은 자의 겸손을 나타내며(민수 12,3참조), 그들은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때에 그들을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시 76,9; 147,9;147,6; 149,4참조).6)
1.2. 구약성서에서의 가난
‘에비온’(ןוֹיꔩꔟ : 궁핍한 자, 빈궁한 자)․‘달’(לꕈ : 약한 자)․‘아니’(יꗼꘝ : 가난한,약한,겸손한)와 ‘아나우’(וꗺꘝ :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는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발견되고 있다. 이 단어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소농민․목자․노예는 물론 사회적으로 보호받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과부․고아․이방인들 모두를 포함한다.”7)
따라서 지금까지 ‘가난’을 표현하는 구약성서의 개념들을 살펴본 결과, 그 의미가 물질적인 면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자․약한 자, 나아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까지도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아나윔’은 신약성서에서 더욱 종교적 성격을 띤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2. 신약성서8)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이라는 단어는 ‘가난한 이들’의 삶과 연관하에서 의미가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도 이해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대표적으로 ‘가난’과 관련되어 나오는 단어는 ‘페네스’(πἑνῃς)와 ‘프토코스’(πτωχὁς)이다. 전자는 ‘가난한, 궁핍한’을 뜻하지만 단지 2고린 9,9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후자는 ‘가난한, 빈곤한, 종교적으로 겸손한’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서 36회 사용되는 대부분의 단어는 ‘프토코스’(πτωχὁς)이며, 31-35회가 사용된다(특히, 마태 4-5회, 마르코 4-5회, 루가 10회 사용. 사도행전에서는 전무하다).”9) 이 단어는 원래 희랍세계에서 ‘구걸해야 하는 절대가난’을 의미했으나, 신약성서에서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까지도 포함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신약성서는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2.1.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10,17이하에서는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도록 도전적으로 요구하신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이는 자발적 가난이 필요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10) 그러나 “저자는 가난을 그 자체로 혹은 원칙적으로 찬양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11)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물질적 측면에서의 가난과 영적인 가난의 두가지 차원을 만날 수 있다. 먼저 최후심판 문맥(마태 25,31-40참조)에서 볼 수 있듯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예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소외당한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를 가장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복선언(마태 5,3이하)에서 ‘마음으로 가난한 이’의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순수하게 현세적인 희망들에서부터 순수한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아나윔의 경건성과 신앙심’의 충만한 폭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진복선언은 마태오의 우선적이고 표제적인 진술이다. 이렇게 볼 때, 가난에 대한 강조점은 물질적인 영역에서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 이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
루가 복음서에서는 선택적 가난의 측면에서, 하느님 나라만을 추구하기 위해 물질적 가난의 생활을 영위할 것을 말하고 있다(루가 14,33; 16,13참조). 이는 “사람들을 세상에 고정시켜 놓는 부에 따르는 위험성을 경고한 내용과 좋은 비교를 이루고 있다(6,24-25; 8,14; 12,15이하; 14,33; 16,10이하참조).”13) 또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선포됨을 말하고 있다(루가 6,20-21참조).
예수는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등과 같이 소외되고 무관심 속에 잊혀져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이르신다(루가 14,14참조). 루가 16,19이하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자이며, 부자는 자기 중심적 삶으로 인해 하느님과 분리됨을 말하고 있다. 특히 자캐오의 행동은 루가에게 모델이 되었고 자캐오를 호의적인 조명 안에서 등장케하는 원인이 되었다.14)
2.2. 바오로 서간
바오로는 물질적 가난이란 주제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추켜세우고 부자들을 무시하는 모양으로 가난한 이들과 부자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갈라 3,27).15) 물론, 바오로는 가난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다루는 단계를 제시하지만 그의 신학은 종말론적인 면이 강해서 ‘가난’이 주된 관심사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16) 하지만 그는 하느님 앞에 가난하게 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난한 삶이 인간들의 삶을 부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2고린 8,9; 6,3이하).
2.3.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재산공유에 대해 두 곳에서 보도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생활 양식이었다(사도 2,42-47; 4,32-35참조).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사도 2,44-45)은 초대 교회의 공동체 정신에 의하면 이상과 모범으로 비쳤던 것이다. 여기서 재산 공유란 각자의 소유권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협력한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재산을 교회 공동체에 바치는 것은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공동체 안의 가난한 이를 돕자는 것이었고, 그 추구하는 바는 이웃사랑이었다.17)
3. 가난에 대한 성서적 관점의 종합
가난을 불의와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라는 두 관점에서 본 구약성서의 입장은 신약에 와서 더 구체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구약에서의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인 필요와 사회적 힘이 약한 자들로서 나타났다. 이로써 구약성서는 가진 자의 횡포와 사회적 불의에 의해 가난이 발생함을 보여 주었고, 예언자들은 이들의 권익과 존엄성을 위해 불의에 대한 고발과 가난한 이에 대한 배려를 촉구하였다. 또한 의로우신 야훼 하느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의 메세지가 표현되기도 하였다. 물질이 궁핍했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영적인 성숙을 이루게 되는 바, 후기 유대 사상에서는 ‘하느님 앞에 겸손한, 그분께만 의지하는’ 영적인 가난개념이 발생하였고 이는 물질적인 가난의 개념을 심화시켰으며 신약의 ‘마음의 가난’개념의 토대가 되었다.
신약에서는 가난한 이들이란 구체적 인물임과 동시에 폭넓게 제시되고 있다. 즉 당시 사회에서 소외 받으며 인간이하의 생활에서 허덕이던 이들을 일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물질적인 도움을 갈구하는 비참한 사람들이며, 사회적으로 인간 존엄성이 짓밟히던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가난은 사회악이었고, 가난은 고통과 부조리를 조장하여 하느님의 정의 실현에 역행하고 있었던 것이다.”18) 예수는 이런 사람들의 벗이요, 스승이었다. 예수는 하느님 통치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하셨다. 이후 예수의 공동체인 초대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고, 재산의 공유와 친교를 통해서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이렇게 예수의 삶을 현재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이들이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실천적 삶은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 생활에서 그 효력이 유지되어야 할 삶의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성서적 고찰을 통해 본 가난한 이들은 인간존엄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며, 내적으로는 하느님 외에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둘 수 없는 자들이고, 외적으로는 이웃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느님께 개방되고 겸손한,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