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적 차원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기초로 해서 그 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무 죄없이 십자가에 버려졌다는 것을 체험한 예수는 어찌 보면 죄에 대한 이중의 부정이 나타나고 바로 그것은 죄인에 대한 받아들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구원에 대한 긍정적인 ‘예’하는 대답이 나타나고 있다. 십자가 사건에 이미 현존하는 하느님 자신의 긍정적인 대답,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졌고 예수는 죽음 안에 버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죄인인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긍정적인 ‘예’하는 대답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에게 말하는 하느님의 긍정적인 대답과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즉 일치된 면을 나타낸다. 구원의 사건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미 그분을, 죄인 전체를 받아들이는 그런 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은 십자가 사건 안에 이미 함축된 구원이 표현, 하느님의 수락의 ‘예’하는 대답의 표현이다.
그러나 부활을 단순히 십자가의 의미 안에만 제한시키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부활은 그 자체로 십자가에 드러난 모든 것을 수락하고 포용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실을 내포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현실과는 다르다. 이렇게 볼 때 부활사건 안에서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살펴보기는 보다 쉽게 여겨진다.
부활은 먼저 죽은이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킨 하느님 아버지의 종말적 행위를 나타낸다. egeireih(일으키다), anasthanein(일어나다‘자동사,타동사) 이 두 동사는 비유적 의미(잠에서 깨어나다)를 갖고 있으면서, 성서 밖의 희랍 문화권 안에서 혹은 유대 문화권 안에서 그 문화권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내포하면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성서 밖의 희랍 문화권에서는 삶에로 돌아올 죽은이들을 가리켰고, 유대 맥락에서 볼 때는 죽은이들의 부활을 가리킨다. 예수 부활에 대한 확인은 종말적 사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부활은 하느님 아버지의 종말적 행위이고 따라서 부활 자체는 종말적 사건들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예수는 부활한 첫번째 분임을 1고린 15,20에서 확인한다. 부활은 현재의 삶에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더 이상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하는 또다른 영원한 삶에로의 통과를 의미한다. 때문에 신약성서는 예수부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아버지가 아들을 부활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삼위일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은 죽은이들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느님이시다.
수난과 부활에 있어 삼위일체적인 면과 수난과 부활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다. 올리브 동산에서, 십자가의 버려짐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치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부활 안에서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제시하고 있고, 아들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발현 안에서 아들의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아버지로부터 기인하는 당신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어찌 보면 아버지의 종말적 사건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 부활은 이렇게 하느님의 결정적인 종말적 행위이고, 이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가 드러난다. 하느님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모든 것을 통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당신의 주권 안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
빠스카 신앙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근원적인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치, 삼위일체적인 면을 통해서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즉 우리의 모든 원인,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죽음의 상황 하에서도 불가능할 것이 없다.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빠스카 신비의 삼위일체적 차원이 어떻게 구원경륜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가? 성령에 대해서 볼 때 아버지로부터, 아들로부터 성령은 기인한다. 특히 성령은 구원 경륜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인 빠스카 신비의 결실이다(특히 이런 면에 있어서 스킬레벡스의 저서 ꡔ하느님과 만남의 성사 그리스도ꡕ 참조). 즉 아버지와 내적으로 완전히 일치되어 있고 아버지에게 완전히 속해 있는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 발생 원칙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육화의 경륜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죽을 때까지 인간의 존재를 자유로운 사랑과 순조의 행위로써 실현하였을 때, 즉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을 때 성령 발생의 원칙으로 드러날 수 있다.
현양된 그리스도, 인간 예수가 성령의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삶 안에서, 육화에서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를 전제로 하고 그것이 성취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령의 공통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육화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아버지의 뜻과 완전히 일치되어 구원이 사건이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그런 면에서 성취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볼 때 성신강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하고, 죽으시고 부활한 빠스카 신비의 결실이다. 특히 성신강림을 통해 사도들이 활동하고 교회의 사명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사명을 받기 전에, 성령의 은혜를 받기 전에 전제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신앙이고 그리스도 안에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형식상으로 어떤 예식을 통해서 그런 것이 수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인간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가능할 지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불가능하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더군다나 성령의 내림은 빠스카의 날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인식의 질서 안에서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 구원경륜적인 삼위일체에 의해서 인식된다. 즉 인식의 질서 안에서의 내재적인 삼위일체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해서 알게 된다. 빠스카 신비의 삼위일체를 언급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사건이다. 부활의 사건, 특히 예수 안에서 볼 때 발현 안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인식하는 것이다. 발현이 현상 안에 함축된 자료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힌 분과 부활하신 분과의 정체성, 지속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죽음에서 부활에로의 통과는 어떤 소멸의 상태에서 현양의 상태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과가 십자가의 죽음과 고통이 극복되는 아주 순간적인 과정이라고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즉 하느님의 긍정적인 대답, ‘예’하는 대답이 이미 십자가 안에 현존해 있다면 부활한 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부활하신 것이다. 요한 복음 안에서 이런 것을 나타내고 있다. 부활하신 분 안에 못자국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토마 앞에 발현하였을 때, “네 눈으로 보고 네 손가락을 넣어 보아라”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현세의 삶과 영생의 비교가 나타난다. 현순간의 고통들은 미래 영광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바오로는 로마 8,18에서 얘기하고 있다. 죽음은 단순히 첫 순간에 사라져 없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 자체로 고통을 제거하고 부활을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요한 12,24 “낟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다면 홀로 남아 있게 된다. 죽는다면 많은 결실을 맺는다.” 이런 내재적 관계 때문에 예수는 1베드 2,23에 “모욕을 당하면서도 모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이제 당신을 모욕한 사람들 위에 복수를 하는, 댓가만을 지불하는, 이제 부활함으로써 그 역할이 완전히 바뀌고 그런 대립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부활을 통해서 가시관이 승리의 화관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막의 유혹에서 악마가 유혹했던 그 사실이 이제 결정적으로 실현된다는 의미에서 해석될 수가 없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예수가 소유하고 있는 나라 그 나라는 당신이 고통을 당하면서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부활 현실 안에 삽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이 극복된 방법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삼위일체적인 전망 안에서 아들에 대해 말할 때 케노시스에서부터 현양에로 향하는 통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고찰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와 죽음과의 연결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이런 면이 중요한 것은 종말적 심판에 대한 언급이 있을 때 주어지게 된다. 이 세상에 다시 온 천하를 심판하러 오실 분 그분을 다른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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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적 차원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기초로 해서 그 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무 죄없이 십자가에 버려졌다는 것을 체험한 예수는 어찌 보면 죄에 대한 이중의 부정이 나타나고 바로 그것은 죄인에 대한 받아들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구원에 대한 긍정적인 ‘예’하는 대답이 나타나고 있다. 십자가 사건에 이미 현존하는 하느님 자신의 긍정적인 대답,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졌고 예수는 죽음 안에 버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죄인인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긍정적인 ‘예’하는 대답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에게 말하는 하느님의 긍정적인 대답과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즉 일치된 면을 나타낸다. 구원의 사건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미 그분을, 죄인 전체를 받아들이는 그런 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은 십자가 사건 안에 이미 함축된 구원이 표현, 하느님의 수락의 ‘예’하는 대답의 표현이다.
    그러나 부활을 단순히 십자가의 의미 안에만 제한시키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부활은 그 자체로 십자가에 드러난 모든 것을 수락하고 포용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실을 내포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현실과는 다르다. 이렇게 볼 때 부활사건 안에서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살펴보기는 보다 쉽게 여겨진다.
    부활은 먼저 죽은이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킨 하느님 아버지의 종말적 행위를 나타낸다. egeireih(일으키다), anasthanein(일어나다‘자동사,타동사) 이 두 동사는 비유적 의미(잠에서 깨어나다)를 갖고 있으면서, 성서 밖의 희랍 문화권 안에서 혹은 유대 문화권 안에서 그 문화권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내포하면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성서 밖의 희랍 문화권에서는 삶에로 돌아올 죽은이들을 가리켰고, 유대 맥락에서 볼 때는 죽은이들의 부활을 가리킨다. 예수 부활에 대한 확인은 종말적 사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부활은 하느님 아버지의 종말적 행위이고 따라서 부활 자체는 종말적 사건들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예수는 부활한 첫번째 분임을 1고린 15,20에서 확인한다. 부활은 현재의 삶에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더 이상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하는 또다른 영원한 삶에로의 통과를 의미한다. 때문에 신약성서는 예수부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아버지가 아들을 부활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삼위일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은 죽은이들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느님이시다.
    수난과 부활에 있어 삼위일체적인 면과 수난과 부활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다. 올리브 동산에서, 십자가의 버려짐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치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부활 안에서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제시하고 있고, 아들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발현 안에서 아들의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아버지로부터 기인하는 당신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어찌 보면 아버지의 종말적 사건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 부활은 이렇게 하느님의 결정적인 종말적 행위이고, 이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가 드러난다. 하느님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모든 것을 통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당신의 주권 안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
    빠스카 신앙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근원적인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치, 삼위일체적인 면을 통해서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즉 우리의 모든 원인,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죽음의 상황 하에서도 불가능할 것이 없다.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빠스카 신비의 삼위일체적 차원이 어떻게 구원경륜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가? 성령에 대해서 볼 때 아버지로부터, 아들로부터 성령은 기인한다. 특히 성령은 구원 경륜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인 빠스카 신비의 결실이다(특히 이런 면에 있어서 스킬레벡스의 저서 ꡔ하느님과 만남의 성사 그리스도ꡕ 참조). 즉 아버지와 내적으로 완전히 일치되어 있고 아버지에게 완전히 속해 있는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 발생 원칙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육화의 경륜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죽을 때까지 인간의 존재를 자유로운 사랑과 순조의 행위로써 실현하였을 때, 즉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을 때 성령 발생의 원칙으로 드러날 수 있다.
    현양된 그리스도, 인간 예수가 성령의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삶 안에서, 육화에서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를 전제로 하고 그것이 성취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령의 공통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육화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아버지의 뜻과 완전히 일치되어 구원이 사건이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그런 면에서 성취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볼 때 성신강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하고, 죽으시고 부활한 빠스카 신비의 결실이다. 특히 성신강림을 통해 사도들이 활동하고 교회의 사명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사명을 받기 전에, 성령의 은혜를 받기 전에 전제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신앙이고 그리스도 안에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형식상으로 어떤 예식을 통해서 그런 것이 수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인간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가능할 지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불가능하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더군다나 성령의 내림은 빠스카의 날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인식의 질서 안에서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 구원경륜적인 삼위일체에 의해서 인식된다. 즉 인식의 질서 안에서의 내재적인 삼위일체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해서 알게 된다. 빠스카 신비의 삼위일체를 언급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사건이다. 부활의 사건, 특히 예수 안에서 볼 때 발현 안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인식하는 것이다. 발현이 현상 안에 함축된 자료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힌 분과 부활하신 분과의 정체성, 지속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죽음에서 부활에로의 통과는 어떤 소멸의 상태에서 현양의 상태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과가 십자가의 죽음과 고통이 극복되는 아주 순간적인 과정이라고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즉 하느님의 긍정적인 대답, ‘예’하는 대답이 이미 십자가 안에 현존해 있다면 부활한 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부활하신 것이다. 요한 복음 안에서 이런 것을 나타내고 있다. 부활하신 분 안에 못자국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토마 앞에 발현하였을 때, “네 눈으로 보고 네 손가락을 넣어 보아라”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현세의 삶과 영생의 비교가 나타난다. 현순간의 고통들은 미래 영광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바오로는 로마 8,18에서 얘기하고 있다. 죽음은 단순히 첫 순간에 사라져 없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 자체로 고통을 제거하고 부활을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요한 12,24 “낟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다면 홀로 남아 있게 된다. 죽는다면 많은 결실을 맺는다.” 이런 내재적 관계 때문에 예수는 1베드 2,23에 “모욕을 당하면서도 모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이제 당신을 모욕한 사람들 위에 복수를 하는, 댓가만을 지불하는, 이제 부활함으로써 그 역할이 완전히 바뀌고 그런 대립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부활을 통해서 가시관이 승리의 화관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막의 유혹에서 악마가 유혹했던 그 사실이 이제 결정적으로 실현된다는 의미에서 해석될 수가 없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예수가 소유하고 있는 나라 그 나라는 당신이 고통을 당하면서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부활 현실 안에 삽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이 극복된 방법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삼위일체적인 전망 안에서 아들에 대해 말할 때 케노시스에서부터 현양에로 향하는 통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고찰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와 죽음과의 연결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이런 면이 중요한 것은 종말적 심판에 대한 언급이 있을 때 주어지게 된다. 이 세상에 다시 온 천하를 심판하러 오실 분 그분을 다른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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