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이해의 역사적 개관-라틴 교부들(펠라지오)

 

5.4.2 펠라지오


        


        400년경 에이레에 태어나 주교로 활동하였다는 것 이외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펠라지오는 아우구스티노의 은총 이해와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당시 그는 이교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된 동기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스도교적 미래가 밝다는 점에서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인습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이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여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로 인한 선행적 실천을 강조하였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것 자체가 은총의 기초 형식이다. 물론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연적 능력이 손상되어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지만 인간은 항상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고, 점점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을 죄악으로 밀쳐내지도 않고 죄악 속에 내버려 두시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롭게,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닌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티노에 비해서 인간의 자유와 그 의지를 높이 평가하였다. 하느님이 명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한다고 보는 아우구스티노와 달리 펠라지오는 인간이란 하느님이 명하는 바를 행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당신 명하는 바를 실천하도록 은총을 주소서”라는 아우구스티노적 기도는 인간이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는 행위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두사람의 체험이 서로 다른데서 기인한다.


        펠라지오에게 예수의 계명, 지시, 모범, 가르침은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의 구체적 형식이다. 아우구스티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은총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은총이 부어질 때까지 이러한 것은 외적으로 머무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붕괴시킨다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하느님 은총의 절대적 힘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헛되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 될 만큼 인간의 권한 속에 하느님의 자비의 작용이 놓여있을 수 없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노와 다른 입장이었던 펠라지오 주교에게는 이따금 만사가 인간에 의해, 그의 자유에 의해 좌우되고 하느님의 역할이란 인간에게 필요한 보급 장비를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은총이란 외적인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인간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두 논쟁자에게 질문할 수 있다. 먼저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물을 수 있다. 만사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행사된다면, 하느님은 왜 모든 사람이 구원되도록 행하시지 않고,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은총을 베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방치하시는가? 이 문제는 아우구스티노의 예정론과도 깊은 관련을 지닌다. 또 펠라지오 주교에게 물을 수 있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란 그의 모범에 그치는 것인가? 하느님의 은총이란 모범적 제시에 불과한가? 사도 바울로의 “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선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비참함”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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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2 펠라지오

            

            400년경 에이레에 태어나 주교로 활동하였다는 것 이외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펠라지오는 아우구스티노의 은총 이해와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당시 그는 이교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된 동기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스도교적 미래가 밝다는 점에서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인습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이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여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로 인한 선행적 실천을 강조하였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것 자체가 은총의 기초 형식이다. 물론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연적 능력이 손상되어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지만 인간은 항상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고, 점점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을 죄악으로 밀쳐내지도 않고 죄악 속에 내버려 두시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롭게,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닌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티노에 비해서 인간의 자유와 그 의지를 높이 평가하였다. 하느님이 명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한다고 보는 아우구스티노와 달리 펠라지오는 인간이란 하느님이 명하는 바를 행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당신 명하는 바를 실천하도록 은총을 주소서”라는 아우구스티노적 기도는 인간이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는 행위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두사람의 체험이 서로 다른데서 기인한다.

            펠라지오에게 예수의 계명, 지시, 모범, 가르침은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의 구체적 형식이다. 아우구스티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은총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은총이 부어질 때까지 이러한 것은 외적으로 머무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붕괴시킨다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하느님 은총의 절대적 힘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헛되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 될 만큼 인간의 권한 속에 하느님의 자비의 작용이 놓여있을 수 없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노와 다른 입장이었던 펠라지오 주교에게는 이따금 만사가 인간에 의해, 그의 자유에 의해 좌우되고 하느님의 역할이란 인간에게 필요한 보급 장비를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은총이란 외적인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인간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두 논쟁자에게 질문할 수 있다. 먼저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물을 수 있다. 만사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행사된다면, 하느님은 왜 모든 사람이 구원되도록 행하시지 않고,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은총을 베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방치하시는가? 이 문제는 아우구스티노의 예정론과도 깊은 관련을 지닌다. 또 펠라지오 주교에게 물을 수 있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란 그의 모범에 그치는 것인가? 하느님의 은총이란 모범적 제시에 불과한가? 사도 바울로의 “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선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비참함”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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