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1. 말씀읽기:루카 9,51-62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마태 8,19-22)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는 것은 예수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버릴 것은 버리고 따라야 합니다. 다 가지고는 못 따라갑니다. 버릴 것은 버리는 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기간을 정해 두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그 기간이 끝날 때가 다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생애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난과 죽음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고,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십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바라본다면 피하고 싶은 길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의 길을 바꿔놓지 못합니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음식과 숙소를 찾기 위해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북왕국에 아시리아 이곳저곳에서 이주해온 사람들과 남아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혼혈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가리짐 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요한4,9).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두 집단간에는 적대감에 찬 싸움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적대감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들의 예배소인 가리짐 산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자기네의 예배소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순례객들이 사마리아를 통과할 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민족이 힘이 약한 것을 탓해야지, 그리고 그 힘이 약해진 것은 바로 하느님을 섬기지 않은 데서 온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이들은 서로 싸우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일이 안 된 것은 나의 부족한 탓이지 결코 남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항상 남의 탓만 하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제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과 자신들을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거기에 알맞은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여기서 휘둘러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하여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을 없애버린 일(열왕기 하 1,10-14)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고난 받은, 모욕을 받는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십니다.
큰일입니다. 능력이 있다고, 힘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헤친다는 것. 당연히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참으로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니..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지 파괴하러 오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 또한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으며,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으시는 예수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과 자신들을 반기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벌을 내리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십니다. 그분은 구원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고 파괴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이를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분열하고 판단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상대방이 막고 있다면 돌아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굳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그것을 행할 필요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려 하심이 아니라 사마리아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함입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다 할지라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양보할 줄도 아는 그런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받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고백은 확고한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길이 가시밭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멀고 험난한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말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스승님이 가시는 길을 제가 갈 수 있도록 축복을 주십시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 착한 사람의 소망을 거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냉대와 반항을 각오해야 한다고 하시며 여우나 새의 비유를 드십니다. 짐승들조차도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나자렛에서도 배척을 당하셨고, 사마리아에서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이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을 함께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삼으려고 어떤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따르면 이 사람은 초대 교회에 명성이 있던 보조자 필립보였다고 합니다. 이 제자는 아버지를 묻으러 가게 해 달라고 청을 합니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중대한 의무였습니다. 시체를 만져 부정을 타는 일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사제나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친척들의 장례는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 의무를 진 사람은 율법의 다른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연기 요청은 대단히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을 죽음에서 생명에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예수님께 내맡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의 힘을 통하여 생명에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제자가 세속의 근심에 사로잡혀 온전히 예수님께로 향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거룩하고 중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위해 희생으로 바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 세속에 대한 모든 배려에서 벗어나야 하고 가족조차도 무시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완전히 세속에 죽지 않는다면 완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제자가 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선교라고 하는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쓰고, 그것을 모든 일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한 가지 일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권을 가지며 일각의 지체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선포하며 그들을 소생시키는 일은 죽은 자들의 시신을 묻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하였고, 두 번째 사람은 생명과 활력을 주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였지만 그 역시 한 가지 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요청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십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불렀을 때, 엘리사는 소를 잡아 쟁기를 부수어 대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세속에 대한 집착.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 연연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갖게 되는 가정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가정은 인간에게 거처를 제공합니다. 가정은 가족 안에서 누리는 안전을 의미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예수님의 삶이 내 삶이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에도 구애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죽임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 또한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자신의 것을 몰라준다하여 올바른 이를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내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나는 그에게 도움을 주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를 판단하고 단죄하고 몰아세우는 편입니까? 내가 모든 이의 일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내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신앙생활 하면서, 단체 활동 하면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1. 말씀읽기:루카 9,51-62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마태 8,19-22)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는 것은 예수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버릴 것은 버리고 따라야 합니다. 다 가지고는 못 따라갑니다. 버릴 것은 버리는 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기간을 정해 두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그 기간이 끝날 때가 다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생애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난과 죽음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고,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십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바라본다면 피하고 싶은 길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의 길을 바꿔놓지 못합니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음식과 숙소를 찾기 위해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북왕국에 아시리아 이곳저곳에서 이주해온 사람들과 남아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혼혈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가리짐 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요한4,9).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두 집단간에는 적대감에 찬 싸움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적대감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들의 예배소인 가리짐 산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자기네의 예배소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순례객들이 사마리아를 통과할 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민족이 힘이 약한 것을 탓해야지, 그리고 그 힘이 약해진 것은 바로 하느님을 섬기지 않은 데서 온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이들은 서로 싸우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일이 안 된 것은 나의 부족한 탓이지 결코 남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항상 남의 탓만 하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제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과 자신들을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거기에 알맞은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여기서 휘둘러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하여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을 없애버린 일(열왕기 하 1,10-14)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고난 받은, 모욕을 받는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십니다.
큰일입니다. 능력이 있다고, 힘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헤친다는 것. 당연히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참으로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니..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지 파괴하러 오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 또한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으며,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으시는 예수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과 자신들을 반기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벌을 내리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십니다. 그분은 구원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고 파괴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이를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분열하고 판단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상대방이 막고 있다면 돌아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굳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그것을 행할 필요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려 하심이 아니라 사마리아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함입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다 할지라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양보할 줄도 아는 그런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받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고백은 확고한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길이 가시밭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멀고 험난한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말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스승님이 가시는 길을 제가 갈 수 있도록 축복을 주십시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 착한 사람의 소망을 거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냉대와 반항을 각오해야 한다고 하시며 여우나 새의 비유를 드십니다. 짐승들조차도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나자렛에서도 배척을 당하셨고, 사마리아에서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이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을 함께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삼으려고 어떤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따르면 이 사람은 초대 교회에 명성이 있던 보조자 필립보였다고 합니다. 이 제자는 아버지를 묻으러 가게 해 달라고 청을 합니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중대한 의무였습니다. 시체를 만져 부정을 타는 일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사제나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친척들의 장례는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 의무를 진 사람은 율법의 다른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연기 요청은 대단히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을 죽음에서 생명에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예수님께 내맡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의 힘을 통하여 생명에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제자가 세속의 근심에 사로잡혀 온전히 예수님께로 향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거룩하고 중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위해 희생으로 바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 세속에 대한 모든 배려에서 벗어나야 하고 가족조차도 무시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완전히 세속에 죽지 않는다면 완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제자가 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선교라고 하는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쓰고, 그것을 모든 일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한 가지 일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권을 가지며 일각의 지체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선포하며 그들을 소생시키는 일은 죽은 자들의 시신을 묻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하였고, 두 번째 사람은 생명과 활력을 주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였지만 그 역시 한 가지 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요청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십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불렀을 때, 엘리사는 소를 잡아 쟁기를 부수어 대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세속에 대한 집착.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 연연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갖게 되는 가정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가정은 인간에게 거처를 제공합니다. 가정은 가족 안에서 누리는 안전을 의미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예수님의 삶이 내 삶이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에도 구애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죽임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 또한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자신의 것을 몰라준다하여 올바른 이를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내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나는 그에게 도움을 주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를 판단하고 단죄하고 몰아세우는 편입니까? 내가 모든 이의 일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내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신앙생활 하면서, 단체 활동 하면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