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조직신학적 고찰(영성체)

 

4.1.4.  영성체: 그리스도와의 친교, 그리스도의 신비체와의 친교


성찬의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고 증진시킨다.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서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요한 6,56)고 말씀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찬양하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맺은 친교(koinonia=communio)가 아닙니까?”(1고린 10,16)하고 반문한다.


영성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증진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분은 이 성사가 ‘나를 먹는 이도 또한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요한 6,57)라고 말씀하신 분의 생명을 사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강화시키는 영혼들의 영적 양식으로(마태 26,26) 섭취되기를 원하셨고, 또한 우리의 매일의 잘못에서 해방시키고 치명적 죄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해독제와 같이 될 것을 원하셨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장차 올 우리의 영광과 영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한 담보물이 되기를 원하셨다”(DS 1638).


공의회에 의하면 성찬의 음식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친교를 이루시면서 우선 세례성사 때 받은 생명의 은총을 양육하고 강화시키신다.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라고 할 때, 은총의 강화란 이런 하느님의 자기 전달, 즉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더 강하게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1) 이런 하느님 현존 체험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며 미래에 그리스도와 함께할 영광에 대한 희망을 견고케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의회는 성체가 우리를 매일의 잘못에서 해방시키고, 큰죄에 빠지지 않게 해주며,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위한 담보물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좀더 적극적인 말한다면, 성체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그리스도와 좀더 같아지도록 한다. 그리스도와 같아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찾아나서고, 서로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실현하며,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에 일조를 하면서 예수를 추종하고, 평화와 화해에 헌신하고, 불의에 저항하며, 약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낯선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말한다.2)


이렇게 볼 때 성찬의 음식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형제, 자매들과의 친교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성찬의 공동체와의 친교를 하나로 본다. “우리가 찬양하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맺은 친교가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 맺는 친교가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16-17). 그래서 바오로는 교회의 공동체의 친교를 해친 성찬례 거행을 “주님의 몸과 피의 죄인”(1고린 11,17)이 되는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교회 공동체의 친교의 밀접함을 강조하였고, 중기 스콜라 신학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verum = 빵과 포도주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이 성사의 중간 효과(res et sacramentum)로,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Christi mysticum =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된 교회)가 성체성사의 본래적인 은총의 효과 (res sacramenti)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3) 피렌체 공의회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성사가 합당한 배령자의 영혼에 미치는 효과는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결합이다. 그리고 인간은 은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귀속되고 그의 지체와 결합됨으로써 이 성사의 합당한 배령자에게는 은총이 증가된다”(DS 1322). 트리엔트 공의회도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머리이신(1고린 11,3; 에페 5,23) 그 유일한 몸의 상징이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분열이 없다고 말할 수 있도록’(1고린 1,10 참조) 지체로서 우리가 그의 몸에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강한 유대로 밀착되기를 원하셨다”(DS 1638). 이런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이루게하는 성찬례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의 친교를 표현해주고 실현해준다고 말한다. 성체성사로써 “하느님 백성의 일치가 적절히 표시되고 기묘히 이루어지는 것이다”(교회헌장 11항).4)


이렇게 성찬의 음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는 사람은 그 삶이 변화되어야 하고, 이와 함께 교회공동체 전체의 모습이 변화되어야 한다. “나만을 찾는 이기적인 인간이 성령으로 가득찬 하느님의 자녀에로의 변화, 서로 분리된 여러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의 공동체에로의 변화, 죄인이 성자의 사랑에 의한 자기 봉헌에 ‘편입됨으로써’ 새롭게 성화되는 것이… 성찬례의 목적이고, 절정이요, 중심적 의미이다”.5) 성찬례를 통해서 교회공동체가 이렇게 변화된다면 세상에 대해서 사뭇 다른 삶의 모습, ‘對照社會’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하느님과의 친교, 인간 상호간의 친교를 실현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재산, 신분, 출신, 인종, 성별 등) 인해서 서로 반목, 대립하는 세상에 대해서 다른 삶을, 진정 인간에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징표가 된다.6)


물론 성찬을 통한 교회공동체의 친교는 신자들끼리만의 구원을 위한 폐쇄적인 형태가 되어서는 안되고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서 리마문서는 그리스도와 친교가 교회안의 형제 자매들의 친교에 머무르지 말고 세상에 대한 투신으로 이어질 것을 촉구한다. “성찬을 거행할 때면 하느님의 한 가족에 속하는 이들이, 곧 형제 자매들로 통하는 이들이 서로 화해와 나눔을 실천해 마땅하다. 아울러 사회, 경제, 정치 생활에 있어서도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마태 5,23-24; 1고린 10,16-17; 11,20-22; 갈라 3,28).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이상, 온갖 종류의 인종차별과 분리정책과 자유의 제한을 철저히 물리쳐야 한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은 성찬을 통해서 인간의 인격과 품위에 속속들이 작용하고 그것을 회복시킨다. 신앙인들은 성찬으로 세계사의 중심 과제와 연관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석하는 우리가 세계의 상황과 인간의 상태를 개선하는 역사적 과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순된 사람들이 된다. 하느님께서 인류사 안에 화해시키시면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화해에 역행하는 우리의 행위는 모순된다고 할 수밖에 없다”(리마문서 20항).




가톨릭 교회에서는 중세 때 신령성체(神領聖體) 교리가 형성되었다. 이 교리는 준비가 부족하거나 사정이 허락치 않아서 실제로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원의를 지닌다면 성체성사의 효과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제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사적 영성체와 성체를 받아 모시고자 하는 원의를 지니는 신령성체(Communio Eucharistiae spiritualiter)를 구분하면서(Sth. II, q.80a.1) “세례성사에서 세례가 가능하지 않을 경우 세례에 대한 원의가 이 성사의 효과를 보완하는 것처럼, 성체성사에 있어서도 성체에 대한 원의로써 이 성사의 효과를 이룰 수 있다”(Sth. III, q.73.a.3)고 말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 견해를 수용해서, “눈 앞에 놓인 성체를 영하고자 원하면서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갈라 5,6) 안에서 성체성사의 효과와 효용을 감지하는” 신령성체를 인정하였다(DS 1648).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회는 사제가 없어서 성찬례를 거행하지 못하고 단지 말씀의 전례만 거행할 경우, 병고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성찬례에 참석 못하는 경우, 혼인조당으로 지속적으로 성체을 영하지 못하는 경우 등에 신령성체를 권장하고 있다.




4.1.5. 다가올 완성의 전조(前兆)


성찬례를 통해서 이루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형제, 자매들간의 친교는 종말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미리 나타내 보이는 표지가 된다. 이미 구약성서에서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야훼 하느님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평화롭게 어우러지고 온갖 슬픔과 죽음이 사라지는 큰 잔치로 표현하였다(이사 25,60-61 참조). “성찬례는 천상의 영광을 미리 누리는 것”7)이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내림과 더불어 있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경축하고 선취하는 잔치이기도 하다(1고린 11,26; 마태 26,29)”.8)


그러나 성찬례를 통해서 선취되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을 앞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신약성서에서도 교회는 “오실 그분”(묵시 1,4)께 눈길을 돌렸고, “마라나 타 – 주여, 오소서!”(1고린 16,22) “오소서, 주 예수님!”(묵시 22,20)하고 기도하였다. 우리 또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청원하고, 믿는 모든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성찬기도 제3양식)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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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4.1.4.  영성체: 그리스도와의 친교, 그리스도의 신비체와의 친교

    성찬의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고 증진시킨다.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서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요한 6,56)고 말씀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찬양하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맺은 친교(koinonia=communio)가 아닙니까?”(1고린 10,16)하고 반문한다.

    영성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증진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분은 이 성사가 ‘나를 먹는 이도 또한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요한 6,57)라고 말씀하신 분의 생명을 사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강화시키는 영혼들의 영적 양식으로(마태 26,26) 섭취되기를 원하셨고, 또한 우리의 매일의 잘못에서 해방시키고 치명적 죄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해독제와 같이 될 것을 원하셨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장차 올 우리의 영광과 영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한 담보물이 되기를 원하셨다”(DS 1638).

    공의회에 의하면 성찬의 음식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친교를 이루시면서 우선 세례성사 때 받은 생명의 은총을 양육하고 강화시키신다.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라고 할 때, 은총의 강화란 이런 하느님의 자기 전달, 즉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더 강하게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1) 이런 하느님 현존 체험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며 미래에 그리스도와 함께할 영광에 대한 희망을 견고케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의회는 성체가 우리를 매일의 잘못에서 해방시키고, 큰죄에 빠지지 않게 해주며,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위한 담보물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좀더 적극적인 말한다면, 성체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그리스도와 좀더 같아지도록 한다. 그리스도와 같아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찾아나서고, 서로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실현하며,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에 일조를 하면서 예수를 추종하고, 평화와 화해에 헌신하고, 불의에 저항하며, 약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낯선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말한다.2)

    이렇게 볼 때 성찬의 음식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형제, 자매들과의 친교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성찬의 공동체와의 친교를 하나로 본다. “우리가 찬양하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맺은 친교가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 맺는 친교가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16-17). 그래서 바오로는 교회의 공동체의 친교를 해친 성찬례 거행을 “주님의 몸과 피의 죄인”(1고린 11,17)이 되는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교회 공동체의 친교의 밀접함을 강조하였고, 중기 스콜라 신학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verum = 빵과 포도주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이 성사의 중간 효과(res et sacramentum)로,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Christi mysticum =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된 교회)가 성체성사의 본래적인 은총의 효과 (res sacramenti)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3) 피렌체 공의회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성사가 합당한 배령자의 영혼에 미치는 효과는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결합이다. 그리고 인간은 은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귀속되고 그의 지체와 결합됨으로써 이 성사의 합당한 배령자에게는 은총이 증가된다”(DS 1322). 트리엔트 공의회도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머리이신(1고린 11,3; 에페 5,23) 그 유일한 몸의 상징이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분열이 없다고 말할 수 있도록’(1고린 1,10 참조) 지체로서 우리가 그의 몸에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강한 유대로 밀착되기를 원하셨다”(DS 1638). 이런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이루게하는 성찬례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의 친교를 표현해주고 실현해준다고 말한다. 성체성사로써 “하느님 백성의 일치가 적절히 표시되고 기묘히 이루어지는 것이다”(교회헌장 11항).4)

    이렇게 성찬의 음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는 사람은 그 삶이 변화되어야 하고, 이와 함께 교회공동체 전체의 모습이 변화되어야 한다. “나만을 찾는 이기적인 인간이 성령으로 가득찬 하느님의 자녀에로의 변화, 서로 분리된 여러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의 공동체에로의 변화, 죄인이 성자의 사랑에 의한 자기 봉헌에 ‘편입됨으로써’ 새롭게 성화되는 것이… 성찬례의 목적이고, 절정이요, 중심적 의미이다”.5) 성찬례를 통해서 교회공동체가 이렇게 변화된다면 세상에 대해서 사뭇 다른 삶의 모습, ‘對照社會’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하느님과의 친교, 인간 상호간의 친교를 실현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재산, 신분, 출신, 인종, 성별 등) 인해서 서로 반목, 대립하는 세상에 대해서 다른 삶을, 진정 인간에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징표가 된다.6)

    물론 성찬을 통한 교회공동체의 친교는 신자들끼리만의 구원을 위한 폐쇄적인 형태가 되어서는 안되고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서 리마문서는 그리스도와 친교가 교회안의 형제 자매들의 친교에 머무르지 말고 세상에 대한 투신으로 이어질 것을 촉구한다. “성찬을 거행할 때면 하느님의 한 가족에 속하는 이들이, 곧 형제 자매들로 통하는 이들이 서로 화해와 나눔을 실천해 마땅하다. 아울러 사회, 경제, 정치 생활에 있어서도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마태 5,23-24; 1고린 10,16-17; 11,20-22; 갈라 3,28).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이상, 온갖 종류의 인종차별과 분리정책과 자유의 제한을 철저히 물리쳐야 한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은 성찬을 통해서 인간의 인격과 품위에 속속들이 작용하고 그것을 회복시킨다. 신앙인들은 성찬으로 세계사의 중심 과제와 연관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석하는 우리가 세계의 상황과 인간의 상태를 개선하는 역사적 과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순된 사람들이 된다. 하느님께서 인류사 안에 화해시키시면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화해에 역행하는 우리의 행위는 모순된다고 할 수밖에 없다”(리마문서 20항).


    가톨릭 교회에서는 중세 때 신령성체(神領聖體) 교리가 형성되었다. 이 교리는 준비가 부족하거나 사정이 허락치 않아서 실제로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원의를 지닌다면 성체성사의 효과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제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사적 영성체와 성체를 받아 모시고자 하는 원의를 지니는 신령성체(Communio Eucharistiae spiritualiter)를 구분하면서(Sth. II, q.80a.1) “세례성사에서 세례가 가능하지 않을 경우 세례에 대한 원의가 이 성사의 효과를 보완하는 것처럼, 성체성사에 있어서도 성체에 대한 원의로써 이 성사의 효과를 이룰 수 있다”(Sth. III, q.73.a.3)고 말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 견해를 수용해서, “눈 앞에 놓인 성체를 영하고자 원하면서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갈라 5,6) 안에서 성체성사의 효과와 효용을 감지하는” 신령성체를 인정하였다(DS 1648).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회는 사제가 없어서 성찬례를 거행하지 못하고 단지 말씀의 전례만 거행할 경우, 병고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성찬례에 참석 못하는 경우, 혼인조당으로 지속적으로 성체을 영하지 못하는 경우 등에 신령성체를 권장하고 있다.


    4.1.5. 다가올 완성의 전조(前兆)

    성찬례를 통해서 이루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형제, 자매들간의 친교는 종말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미리 나타내 보이는 표지가 된다. 이미 구약성서에서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야훼 하느님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평화롭게 어우러지고 온갖 슬픔과 죽음이 사라지는 큰 잔치로 표현하였다(이사 25,60-61 참조). “성찬례는 천상의 영광을 미리 누리는 것”7)이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내림과 더불어 있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경축하고 선취하는 잔치이기도 하다(1고린 11,26; 마태 26,29)”.8)

    그러나 성찬례를 통해서 선취되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을 앞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신약성서에서도 교회는 “오실 그분”(묵시 1,4)께 눈길을 돌렸고, “마라나 타 – 주여, 오소서!”(1고린 16,22) “오소서, 주 예수님!”(묵시 22,20)하고 기도하였다. 우리 또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청원하고, 믿는 모든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성찬기도 제3양식)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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