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사제 직무의 조건
4.4.1. 공동체적인 사람
현행 교회법에서는 서품 후보자가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지향이 올바르며 합당한 지식을 갖추고 평판이 좋으며 품행이 바르고 덕행이 있으며 또한 받을 성품에 합당한 신체적 및 심리적 기타 자격들”(교회법 1029조)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런 개인적인 조건 외에도 사제 직무 자체에 의해서 요구되는 조건은 공동체성이다. 우리는 사제의 직무를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근거해서 설명하였다: 사제는 복음을 신자들에게 공적으로 선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화합하고 일치하도록 이끌며, 일치의 표징과 보장으로서 일치의 성사인 성찬례를 거행하는 사목자이다. 그러므로 사제가 이러한 목적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스퍼의 지적은 합당하다고 하겠다: “이 직무를 맡기 위해서는 독자적이며, 성숙하고 열심한 사람이어야 하고”, “사람들과의 접촉, 대화 능력을 갖추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행복을 염려할 줄 알고, 한 공동체를 맡아서 자유롭게 이끌 수 있는 인간적인 소질이 있어야 한다”1). 사제는 개인적인 열성, 성숙과 함께 다른 이들과 더불어 대화하면서 일체감을 이룰 수 있는 공동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지연, 학연, 빈부, 남녀의 차이를 극대화하여서 갈등과 분열이 심한 곳이다. 또 다른 생각과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싫어하고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회일수록 사제는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각자를 존중해주면서 복음 정신 안에서 화합하고 일치하도록 이끄는 공동체적인 사람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2)
그러나 이런 공동체 지도자로서의 임무의 기준은 복음이 되어야 한다. “교회 건설에 있어서 사제는 주의 모범을 따라 모든 사람을 섬세한 친절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대로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적 생활과 교리가 요구하는 대로 사람들을 응대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그들을 충고도 해야 한다” (사제직무 6항). 즉 사제는 ‘정치가’들처럼 국민들의 원의와 취향에 좌우되서는 안되고, 복음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이 복음 정신에서 벗어날 때에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교회는 민주주의의 좋은 점들을 충분히 수용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는 것이 신자들의 견해와 원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소위 “민주 절대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3). 또한 사제는 복음을 기준으로 공동체를 사목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선포하고 행동하셨던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소외 받고 무력한 사람, ‘변두리 인생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참조: 사제직무 6항). 즉 사제는 ‘기업가’들처럼 최대의 이익을 위해서 효용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내쳐버려서는 안된다.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일치와 화합은 흔히 세속의 단체가 그러하듯이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 잘못한 사람을 도태시키는 방식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런 사람들에게도 자리와 목소리를 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일치와 화합이다.
공동체와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성사집전자로서의 사제의 모습이 새롭게 부각될 수 있다. 사제는 세례, 견진성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스스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돕고, 성체성사의 집전으로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그리고 서로 간에 일치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이끌고, 병자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영신적으로 병든 이들을 회복시켜 다시 교회 공동체 안으로 이끈다. 즉 성사집행을 그저 개인적인 차원의 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와의 연관 속에서 본다면 더욱 의미가 살아난다고 하겠다.
현재 사제 직무의 조건으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점은 두 가지 제한 조건이다: 가톨릭 교회는 오로지 남자와 미혼자만을 서품하는 관습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4.4.2. 기혼자의 서품
기혼자가 사제로 사품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교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교회법과 적합성에 관한 차원이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에 대해서 언급하시지만 (마태 19,11-12) 모든 제자들에게 의무로 규정하신 것이 아니었고, 신약성서 사도후대에는 교회직무자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이 늘 강조되었다(1디모 3,2; 3,12; 2디모 2,24; 디도 1,6). 즉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독신제와 사제직의 연결은 천년 이상의 역사가 흐른 다음에 규율로 이루어진 것이다. 1123년의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암시적으로,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 카논 6조와 7조에서 온 교회의 사제들의 의무로 명문화 되었다. 그러나 그 前史는 4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에 걸친다: 독신계율은 성찬례를 거행하는 전날에는 부부관계를 금하는 금욕계율에서부터 자라나서 금욕계율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4세기 말부터 성찬례가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거행되자 기혼사제들은 결과적으로 영구적 금욕을 해야만 했다4). 사제의 의무독신제는 오직 로마-가톨릭 교회에 해당되고, 또 여기에서도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동방 가톨릭은 사제직와 혼인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의무적인 독신제가 사제 직무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교회법의 문제라는 것과 더구나 동방교회의 기혼사제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제들이 있다는 것은 교도권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사제직무 16항). 현재에 논란이 되는 것은 사제의 의무독신제가 과연 현재의 교회 상황에 적합한가 하는 점이다. 적합하다고 보는 편에서는 그리스도론적, 종말론적 그리고 실천적인 이유를 내세운다. 무엇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견해가 그렇다: “독신 생활은 많은 점에서 사제직에 적합하다… 천국을 위하여 지키는 동정 혹은 독신 때문에 사제는 새롭고 숭고한 이유로써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갈림없는 마음으로 보다 쉽게 주님과 일치하여,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하여 보다 자유롭게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대한 봉사에 몸을 바치고 주의 나라와 초자연적 갱생 사업에 쉽게 봉사(한다)… 이로써 사제는 부활한 자녀들이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들지 않는 미래의 세계를 신앙과 사랑으로 이미 현존케 하여 미리 생생하게 보여 준다”. (사제직무 16항).5)
사제성소와 독신제를 의무적으로 묶어 놓은 것을 반대하며 자유로이 독신을 선택할 것을 주장하는 편은 공의회의 논거를 비판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처한 위급함, 즉 사제부족으로 성찬례를 포기해야하는 점을 지적한다: 교회 공동체는 성찬례를 거행할 권리가 있고, 성찬례를 거행할 권리가 사제 독신제보다는 앞선다6). 여기에 인간학적인 논거도 추가될 수 있다: 성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변화된 점, 결혼과 가정문제에 대해 기혼자가 더 큰 자격이 있는 점, 자유롭게 자기를 규정하는 요구가 커지고 있는 점등이다. 그러므로 근래에 들어서 서부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 신학자, 지역 공의회는 “검증된 사람들” (viri probati) 즉 가정을 갖고 있으면서 나이도 들고 경험도 풍부하며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서품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의 상황에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독신제가 사제직에 적합하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여건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경제적인 구조상 사제가 가정을 갖는다면 가정과 관련한 경제적 문제에 막대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분명 사목 생활에 적지 않은 지장을 줄 우려가 있다. 교구사제가 청빈서원을 하지는 않지만 물질에 매여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물질에 매이지 않는 단순,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거의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독신제는 분명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신이 성공적인 사제직 수행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에 대한 적합한 조건일 뿐이다. 적합한 조건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제 개인의 노력은 물론 본당(수도) 공동체의 협력이 있어야만 한다.
4.4.3. 여성 사제직 허용에 관해서
여성을 사제로 서품할 수 있느냐하는 토론은 사제의 의무독신제보다는 교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바울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하느님의 자녀됨은 사회적인 모든 차별, 즉 여자와 남자, 그리스인과 유대인, 종과 자유인 (갈라 3,28)의 차별을 없앤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 관계가 형성이 됬다는 말인데, 이러한 것은 결국에는 그리스도 교회의 직무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 질문은 상당히 급박하게 다가오는데, 왜냐하면 현재 (수백년간 고정된 역할 속에서 생각해 온 것과는 반대로) 남녀의 역활에 심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공공의 삶에서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이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비가톨릭의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여성 서품의 실천이 증가되는 상황이다. 이런 실천은 “한 가지 性에 제한되어 있을 경우에 안수받은 직무로서의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깊은 신학적 확신에서” 이루어졌고, 이렇게 실천하는 교회에서 체험한 바는 여성들에 의해 수행된 교회 직무도 “남성의 직무만큼 성령에 의해 완전히 축복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BEM 문서 18항, 해설). 이로써 여성의 서품에 대한 질문은 로마-가톨릭 교회에게 교회 일치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실천에 대한 질문이 된다.
독일의 교구시노드 (1972-1975)에서는 여성들의 부제직 서품에 대해 상세하게 토론을 벌렸다. 鑑定을 맡았던 교의신학자들(Yves Congar, Peter Hünermann, Herbert Vorgrimler)은 교의적으로 가능하다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이 공의회는 “여성의 부제직 문제를 오늘날의 신학적인 인식 수준에 적합하게 검토하고, 현재의 사목적인 상황에 직면해서 여성들을 부제직에 서품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기를” 교황께 청하였다 (Gemeinsame Synode, Dienste 7.1.3).
교회 교도권에서 여성 사제 서품을 반대하는 대부분의 이유들은 신앙교리성성이 1976년 10월 15일자로 발표한 문서 <Inter insigniores>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문서는 인용하기를: (1) 전통: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성들에게 유효하게 사제, 주교품을 수여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어본 적이 없다” (DH 4590).
(2)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행동: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열두사도 중에 여성을 뽑으신 일이 없다” (DH 4592). 그리고 여성들이 신약의 공동체에서 높이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디에서도 (유다 이스가리옷을 대신한 선거에서도) 열두 사도단에 가입되지 않았다 (DH 4594).
(3) 두가지 관습적인 논거: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리해야 한다. 이 대리는 성사적인 표징성 때문에 남자가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그의 봉사자 사이에 요구되는 자연적인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그리스도 스스로가 한 남자였고 남자로 머물렀다. …육화한 말씀의 성별은 남성이다” (DH 4600 이하). 두번째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신부의 상징으로 표현하는데, 사제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기 때문에 남성이어야 한다.
신앙교리성성의 문헌은 이상의 논거로 현재의 실천을 정당화한다: “교회는 교회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대한 충실성에서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허락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본다” (Inter insigniores, 서문). 그러나 이 문서는 문서의 내용이 교의적으로 분명하게 구속력이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신학적 토론의 여지는 계속 남아있다고 하겠다.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은 이 논거에 대해서 몇가지 질의를 제기한다.
(1) 전통에서 지금까지 여성의 서품에 관해서 교도권적으로 전혀 확정된 것이 없다함은 교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교회사는 (모든 면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복음의 자극을 사회적으로 서서히 구체화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한 예로 노예제도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과 자유인의 차별이 근본적으로 극복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적인 확신 (참조. 갈라 3,28:필레 16)을 늦게서야 실천한 것이 아닌가? 여성의 공개적인 지도자의 직무에로의 참여가 증가일로에 있는데, 이는 모든 인간이 같은 품위를 지니고 있다는 복음 내용이 늦게 열매을 맺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교회 내에서도 구조적인 변화를 위한 시기가 다 되어서 원천적인 복음의 자극을 이제 성사적으로, 가시적인 모습으로 실현해야 하지 않는가?
(2) 예수께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열두 사도들은 우선 새로운 이스라엘을 모으려는 움직임의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오늘날 성서학계의 일치된 의견이다: 열두 사도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대표한다. 열두 사도는 신약성서에서 <사도들>의 무리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로가 여인들을 “함께 일하는 자” (브리스카), “봉사자” (페베)라고 하고 “사도들” (유니아) (로마 16,1.3.7.)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3) 관습적인 논거에 대해: 그리스도는 단지 (혹은 좀 더 낫게) 여자보다는 남자를 통해서 대리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로 신학적으로 밑받침될 수 있는가?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결정적인 구원의 신비는 로고스(Logos)가 인간이 되었다는 (“육신”: 요한 1,14)데에 있고, 이 인간의 성별은 큰 의미가 없다. 굳이 말한다면 이스라엘에 속하였다는 것이 오히려 큰 의미가 있다 (예를 들자면: 마태 1,1-17; 루가 1,54 이하; 2,4; 로마 1,3; 갈라 4,4).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도 가능하다고 할 때, 그러면 그 대리성이 꼭 남성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는가? 같은 논리가 신랑-신부의 상징에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성별의 역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별에, 사랑하기에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일치하려는 데에, 배우자가 충실하지 못함에도 충실한 데에 신랑-신부 상징의 촛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 결혼 관계에 대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적 이해에서 – 이러한 행동이 과연 여자보다는 남자에 의해서 더 잘 표현된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한국의 경우, 여성이 오히려 이 상징에 더 상응한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결론적으로 신학적으로 엄밀히 얘기하면 여성의 사제 서품을 반대할 명확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성 사제직을 허용한 교회 (성공회)의 경우 교회 분열의 위험이 상당히 심각하게 대두된다 (94년 2월 어느 날의 신문 보도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400여명의 성공회 사제들과 주교들이 이 문제 때문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한다). 여성 사제직 때문에 교회가 분열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망인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 어떤 새로운 제도가 아무리 신학적으로 하자가 없다해도 그로 인해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인 일치가 심각히 위협을 받는다면, 적어도 그 실행의 시기를 늦추어야 할 것이다.
사제 독신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된다. 적어도 한국과 같이 사제직과 독신제를 등식으로 보는 신자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준비없는 독신제의 자유화는 큰 혼란과 더불어 교회 분열의 위험까지 있다. 이 또한 교회 내의 일치를 위협하는 일이다. 물론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사제 독신제의 해제가 교회의 분열을 감수할 정도로 절대적인 진리의 문제인가?
사제 독신제의 자유화와 여성 사제직의 허용, 두 경우 다 교회 공동체 전체(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의식의 전환이 앞서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사제직과 독신제를 등식으로 보고, 독신제를 사제직의 핵심으로 보는 관점부터 시정되야 하리라7). 이론적으로는 사제직과 독신제를 결코 등식으로 보아서는 안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종교는 이성적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적 차원도 중요시 된다. 물론 신자들의 감성적 차원에 어쩔 수없이 따라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목자 자신과 신자들의 의식 변화나 시급하다고 하겠다. 우선 예외적으로나마 “검증된 사람들”(viri probati)을 서품하여서 특수사목에 종사하도록 해서 결혼한 사람도 훌륭하게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신자들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의 사제직을 하루 아침에 허용하기 보다는 우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실상 여성을 낮게보고 남성보다 열등하게 보는 경향은 가톨릭 내에도,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도 상당히 뿌리 깊게 박혀있다. 적어도 이런 의식을 변화하는 노력과 함께 여성에게 책임을 맡길 때 혼란을 극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4.4. 사제 직무의 조건
4.4.1. 공동체적인 사람
현행 교회법에서는 서품 후보자가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지향이 올바르며 합당한 지식을 갖추고 평판이 좋으며 품행이 바르고 덕행이 있으며 또한 받을 성품에 합당한 신체적 및 심리적 기타 자격들”(교회법 1029조)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런 개인적인 조건 외에도 사제 직무 자체에 의해서 요구되는 조건은 공동체성이다. 우리는 사제의 직무를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근거해서 설명하였다: 사제는 복음을 신자들에게 공적으로 선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화합하고 일치하도록 이끌며, 일치의 표징과 보장으로서 일치의 성사인 성찬례를 거행하는 사목자이다. 그러므로 사제가 이러한 목적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스퍼의 지적은 합당하다고 하겠다: “이 직무를 맡기 위해서는 독자적이며, 성숙하고 열심한 사람이어야 하고”, “사람들과의 접촉, 대화 능력을 갖추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행복을 염려할 줄 알고, 한 공동체를 맡아서 자유롭게 이끌 수 있는 인간적인 소질이 있어야 한다”1). 사제는 개인적인 열성, 성숙과 함께 다른 이들과 더불어 대화하면서 일체감을 이룰 수 있는 공동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지연, 학연, 빈부, 남녀의 차이를 극대화하여서 갈등과 분열이 심한 곳이다. 또 다른 생각과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싫어하고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회일수록 사제는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각자를 존중해주면서 복음 정신 안에서 화합하고 일치하도록 이끄는 공동체적인 사람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2)
그러나 이런 공동체 지도자로서의 임무의 기준은 복음이 되어야 한다. “교회 건설에 있어서 사제는 주의 모범을 따라 모든 사람을 섬세한 친절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대로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적 생활과 교리가 요구하는 대로 사람들을 응대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그들을 충고도 해야 한다” (사제직무 6항). 즉 사제는 ‘정치가’들처럼 국민들의 원의와 취향에 좌우되서는 안되고, 복음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이 복음 정신에서 벗어날 때에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교회는 민주주의의 좋은 점들을 충분히 수용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는 것이 신자들의 견해와 원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소위 “민주 절대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3). 또한 사제는 복음을 기준으로 공동체를 사목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선포하고 행동하셨던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소외 받고 무력한 사람, ‘변두리 인생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참조: 사제직무 6항). 즉 사제는 ‘기업가’들처럼 최대의 이익을 위해서 효용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내쳐버려서는 안된다.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일치와 화합은 흔히 세속의 단체가 그러하듯이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 잘못한 사람을 도태시키는 방식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런 사람들에게도 자리와 목소리를 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일치와 화합이다.
공동체와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성사집전자로서의 사제의 모습이 새롭게 부각될 수 있다. 사제는 세례, 견진성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스스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돕고, 성체성사의 집전으로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그리고 서로 간에 일치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이끌고, 병자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영신적으로 병든 이들을 회복시켜 다시 교회 공동체 안으로 이끈다. 즉 성사집행을 그저 개인적인 차원의 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와의 연관 속에서 본다면 더욱 의미가 살아난다고 하겠다.
현재 사제 직무의 조건으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점은 두 가지 제한 조건이다: 가톨릭 교회는 오로지 남자와 미혼자만을 서품하는 관습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4.4.2. 기혼자의 서품
기혼자가 사제로 사품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교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교회법과 적합성에 관한 차원이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에 대해서 언급하시지만 (마태 19,11-12) 모든 제자들에게 의무로 규정하신 것이 아니었고, 신약성서 사도후대에는 교회직무자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이 늘 강조되었다(1디모 3,2; 3,12; 2디모 2,24; 디도 1,6). 즉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독신제와 사제직의 연결은 천년 이상의 역사가 흐른 다음에 규율로 이루어진 것이다. 1123년의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암시적으로,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 카논 6조와 7조에서 온 교회의 사제들의 의무로 명문화 되었다. 그러나 그 前史는 4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에 걸친다: 독신계율은 성찬례를 거행하는 전날에는 부부관계를 금하는 금욕계율에서부터 자라나서 금욕계율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4세기 말부터 성찬례가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거행되자 기혼사제들은 결과적으로 영구적 금욕을 해야만 했다4). 사제의 의무독신제는 오직 로마-가톨릭 교회에 해당되고, 또 여기에서도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동방 가톨릭은 사제직와 혼인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의무적인 독신제가 사제 직무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교회법의 문제라는 것과 더구나 동방교회의 기혼사제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제들이 있다는 것은 교도권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사제직무 16항). 현재에 논란이 되는 것은 사제의 의무독신제가 과연 현재의 교회 상황에 적합한가 하는 점이다. 적합하다고 보는 편에서는 그리스도론적, 종말론적 그리고 실천적인 이유를 내세운다. 무엇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견해가 그렇다: “독신 생활은 많은 점에서 사제직에 적합하다… 천국을 위하여 지키는 동정 혹은 독신 때문에 사제는 새롭고 숭고한 이유로써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갈림없는 마음으로 보다 쉽게 주님과 일치하여,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하여 보다 자유롭게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대한 봉사에 몸을 바치고 주의 나라와 초자연적 갱생 사업에 쉽게 봉사(한다)… 이로써 사제는 부활한 자녀들이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들지 않는 미래의 세계를 신앙과 사랑으로 이미 현존케 하여 미리 생생하게 보여 준다”. (사제직무 16항).5)
사제성소와 독신제를 의무적으로 묶어 놓은 것을 반대하며 자유로이 독신을 선택할 것을 주장하는 편은 공의회의 논거를 비판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처한 위급함, 즉 사제부족으로 성찬례를 포기해야하는 점을 지적한다: 교회 공동체는 성찬례를 거행할 권리가 있고, 성찬례를 거행할 권리가 사제 독신제보다는 앞선다6). 여기에 인간학적인 논거도 추가될 수 있다: 성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변화된 점, 결혼과 가정문제에 대해 기혼자가 더 큰 자격이 있는 점, 자유롭게 자기를 규정하는 요구가 커지고 있는 점등이다. 그러므로 근래에 들어서 서부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 신학자, 지역 공의회는 “검증된 사람들” (viri probati) 즉 가정을 갖고 있으면서 나이도 들고 경험도 풍부하며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서품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의 상황에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독신제가 사제직에 적합하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여건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경제적인 구조상 사제가 가정을 갖는다면 가정과 관련한 경제적 문제에 막대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분명 사목 생활에 적지 않은 지장을 줄 우려가 있다. 교구사제가 청빈서원을 하지는 않지만 물질에 매여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물질에 매이지 않는 단순,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거의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독신제는 분명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신이 성공적인 사제직 수행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에 대한 적합한 조건일 뿐이다. 적합한 조건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제 개인의 노력은 물론 본당(수도) 공동체의 협력이 있어야만 한다.
4.4.3. 여성 사제직 허용에 관해서
여성을 사제로 서품할 수 있느냐하는 토론은 사제의 의무독신제보다는 교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바울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하느님의 자녀됨은 사회적인 모든 차별, 즉 여자와 남자, 그리스인과 유대인, 종과 자유인 (갈라 3,28)의 차별을 없앤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 관계가 형성이 됬다는 말인데, 이러한 것은 결국에는 그리스도 교회의 직무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 질문은 상당히 급박하게 다가오는데, 왜냐하면 현재 (수백년간 고정된 역할 속에서 생각해 온 것과는 반대로) 남녀의 역활에 심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공공의 삶에서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이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비가톨릭의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여성 서품의 실천이 증가되는 상황이다. 이런 실천은 “한 가지 性에 제한되어 있을 경우에 안수받은 직무로서의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깊은 신학적 확신에서” 이루어졌고, 이렇게 실천하는 교회에서 체험한 바는 여성들에 의해 수행된 교회 직무도 “남성의 직무만큼 성령에 의해 완전히 축복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BEM 문서 18항, 해설). 이로써 여성의 서품에 대한 질문은 로마-가톨릭 교회에게 교회 일치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실천에 대한 질문이 된다.
독일의 교구시노드 (1972-1975)에서는 여성들의 부제직 서품에 대해 상세하게 토론을 벌렸다. 鑑定을 맡았던 교의신학자들(Yves Congar, Peter Hünermann, Herbert Vorgrimler)은 교의적으로 가능하다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이 공의회는 “여성의 부제직 문제를 오늘날의 신학적인 인식 수준에 적합하게 검토하고, 현재의 사목적인 상황에 직면해서 여성들을 부제직에 서품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기를” 교황께 청하였다 (Gemeinsame Synode, Dienste 7.1.3).
교회 교도권에서 여성 사제 서품을 반대하는 대부분의 이유들은 신앙교리성성이 1976년 10월 15일자로 발표한 문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문서는 인용하기를: (1) 전통: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성들에게 유효하게 사제, 주교품을 수여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어본 적이 없다” (DH 4590).
(2)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행동: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열두사도 중에 여성을 뽑으신 일이 없다” (DH 4592). 그리고 여성들이 신약의 공동체에서 높이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디에서도 (유다 이스가리옷을 대신한 선거에서도) 열두 사도단에 가입되지 않았다 (DH 4594).
(3) 두가지 관습적인 논거: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리해야 한다. 이 대리는 성사적인 표징성 때문에 남자가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그의 봉사자 사이에 요구되는 자연적인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그리스도 스스로가 한 남자였고 남자로 머물렀다. …육화한 말씀의 성별은 남성이다” (DH 4600 이하). 두번째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신부의 상징으로 표현하는데, 사제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기 때문에 남성이어야 한다.
신앙교리성성의 문헌은 이상의 논거로 현재의 실천을 정당화한다: “교회는 교회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대한 충실성에서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허락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본다” (Inter insigniores, 서문). 그러나 이 문서는 문서의 내용이 교의적으로 분명하게 구속력이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신학적 토론의 여지는 계속 남아있다고 하겠다.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은 이 논거에 대해서 몇가지 질의를 제기한다.
(1) 전통에서 지금까지 여성의 서품에 관해서 교도권적으로 전혀 확정된 것이 없다함은 교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교회사는 (모든 면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복음의 자극을 사회적으로 서서히 구체화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한 예로 노예제도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과 자유인의 차별이 근본적으로 극복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적인 확신 (참조. 갈라 3,28:필레 16)을 늦게서야 실천한 것이 아닌가? 여성의 공개적인 지도자의 직무에로의 참여가 증가일로에 있는데, 이는 모든 인간이 같은 품위를 지니고 있다는 복음 내용이 늦게 열매을 맺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교회 내에서도 구조적인 변화를 위한 시기가 다 되어서 원천적인 복음의 자극을 이제 성사적으로, 가시적인 모습으로 실현해야 하지 않는가?
(2) 예수께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열두 사도들은 우선 새로운 이스라엘을 모으려는 움직임의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오늘날 성서학계의 일치된 의견이다: 열두 사도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대표한다. 열두 사도는 신약성서에서 <사도들>의 무리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로가 여인들을 “함께 일하는 자” (브리스카), “봉사자” (페베)라고 하고 “사도들” (유니아) (로마 16,1.3.7.)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3) 관습적인 논거에 대해: 그리스도는 단지 (혹은 좀 더 낫게) 여자보다는 남자를 통해서 대리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로 신학적으로 밑받침될 수 있는가?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결정적인 구원의 신비는 로고스(Logos)가 인간이 되었다는 (“육신”: 요한 1,14)데에 있고, 이 인간의 성별은 큰 의미가 없다. 굳이 말한다면 이스라엘에 속하였다는 것이 오히려 큰 의미가 있다 (예를 들자면: 마태 1,1-17; 루가 1,54 이하; 2,4; 로마 1,3; 갈라 4,4).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도 가능하다고 할 때, 그러면 그 대리성이 꼭 남성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는가? 같은 논리가 신랑-신부의 상징에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성별의 역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별에, 사랑하기에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일치하려는 데에, 배우자가 충실하지 못함에도 충실한 데에 신랑-신부 상징의 촛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 결혼 관계에 대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적 이해에서 – 이러한 행동이 과연 여자보다는 남자에 의해서 더 잘 표현된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한국의 경우, 여성이 오히려 이 상징에 더 상응한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결론적으로 신학적으로 엄밀히 얘기하면 여성의 사제 서품을 반대할 명확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성 사제직을 허용한 교회 (성공회)의 경우 교회 분열의 위험이 상당히 심각하게 대두된다 (94년 2월 어느 날의 신문 보도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400여명의 성공회 사제들과 주교들이 이 문제 때문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한다). 여성 사제직 때문에 교회가 분열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망인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 어떤 새로운 제도가 아무리 신학적으로 하자가 없다해도 그로 인해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인 일치가 심각히 위협을 받는다면, 적어도 그 실행의 시기를 늦추어야 할 것이다.
사제 독신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된다. 적어도 한국과 같이 사제직과 독신제를 등식으로 보는 신자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준비없는 독신제의 자유화는 큰 혼란과 더불어 교회 분열의 위험까지 있다. 이 또한 교회 내의 일치를 위협하는 일이다. 물론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사제 독신제의 해제가 교회의 분열을 감수할 정도로 절대적인 진리의 문제인가?
사제 독신제의 자유화와 여성 사제직의 허용, 두 경우 다 교회 공동체 전체(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의식의 전환이 앞서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사제직과 독신제를 등식으로 보고, 독신제를 사제직의 핵심으로 보는 관점부터 시정되야 하리라7). 이론적으로는 사제직과 독신제를 결코 등식으로 보아서는 안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종교는 이성적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적 차원도 중요시 된다. 물론 신자들의 감성적 차원에 어쩔 수없이 따라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목자 자신과 신자들의 의식 변화나 시급하다고 하겠다. 우선 예외적으로나마 “검증된 사람들”(viri probati)을 서품하여서 특수사목에 종사하도록 해서 결혼한 사람도 훌륭하게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신자들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의 사제직을 하루 아침에 허용하기 보다는 우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실상 여성을 낮게보고 남성보다 열등하게 보는 경향은 가톨릭 내에도,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도 상당히 뿌리 깊게 박혀있다. 적어도 이런 의식을 변화하는 노력과 함께 여성에게 책임을 맡길 때 혼란을 극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