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영(루까)

 

  이희영, 루까는 경기도 여주 온성(陽城) 사람으로 호는 추찬(秋餐)이며 그는 그림을 본래부터 잘 그렸던 화가였다.


  그가 41세였던 1797년 가을에 노론파의 중심인물이었던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됨으로써 1799년에 그는 「루까」라는 세례명으로 주문모 신부에 직접 영세를 받았다. 김건순(요사팟)과는 본래 7촌 되는 인척간엔 데다가 이희영의 가족이 오랫동안 김건순의 집에서 부쳐살고 있었는데 이희영 루까도 역시 노론 계통의 인물이었다. 김건순 요사팟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주문모 신부에게 오랫동안 교리를 듣고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고향인 여주로 돌아와서 친구들을 권화하여 입교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그에게서 교리를 들은 사람들은 이희영을 비롯하여 순교자 이중배(마르티노)와 원경도(요한)가 있었다.


  한편 강이천 같은 사람도 함께 교리를 듣고 입교할 의사가 있었지만 끝내 입교는 하지 않았었다.


  본래 이희영 루까가 입교한 뒤에 김건순, 강이천 등의 주도하에 소위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즉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은 원한을 씻기 위해 바다의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력을 기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7년에 이 계획이 탄로가 나서 김건순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강이천은 유배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주문모 야보고 신부는 이러한 세속적인 계획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대신에 참된 진리를 신봉하라고 권고하였다.


  이희영 루까는 입교하기로 결심한 뒤에 즉시 서울로 올라가 주신부를 만나서 자신이 천주교를 믿고 있음을 확실히 밝히고 세속적이 친구들을 멀리하고 앞서 계획하였던 「해도병마」계획 같은 것은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포기했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이희영 루까는 정광수(발라바), 홍익만(안토니오), 황사영(알렉산델)과 같은 열심한 교우들과 왕래하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일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더욱더 깊은 신심생활과 교중일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여주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가 교회일을 도운 것은 역시 그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화가로서의 재질로 성화를 그렸으며, 여러가지 상본 등을 그렸던 것이며 그러한 성화(聖畵)나 상본(像本)등을 그려서 교우들과 주문모 신부에게 돌렸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그림 한폭이 뒤늦게 발견되어 한국천주교회의 미술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즉 이희영 루까의 호인 「秋餐」이란 낙관이 선명한 가로 32㎝ 세로 1백 5㎝의 채색견본의 「쌍견도(雙犬圖)」로써 작가가 천주교 순교자라는 것 이외도 서양화 기법의 한국 전래를 가늠하는 사료적 가치도 높게 평가되는 그림이다.


  고목 아래 두 마리의 개가 있는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맹견도의 화법과도 흡사해 작자 미상인 이 「맹견도」역시 이희영 루까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壇園 金弘道)」의 작품으로까지 평가하고 있을 정도로 화법에 있어서음, 영(陰, 影) 표현이나 구도, 설채법(設彩法) 등이 뛰어나며 특히 그 당시에 있어서 이질적인 서양화의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맹견도는 당시 북경을 왕래하던 교우들이 서양화의 기법으로 익힌 천주교 교우들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맹견도와 흡사한 「쌍견도」가 최근에 발견되었는데 (1984년경) 이 쌍견도 역시 이희영 루까의 작품으로 정평이 나고 있다.


  조선왕조 순조실록에는 이희영 루까는 서양화의 절묘한 화가라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는데 ꡒ震案結考ꡓ ꡒ書畵微ꡓ등의 용어로 「이희영은 호가 추찬(秋餐)이며 온성 사람으로 순조 원년(1801년) 신유년에 사학 죄인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다.」고 인적 사항을 밝히고 글씨와 그림의 재주가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여 절등(絶等)했다고 그 기량을 평가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위창(偉滄) 오세창(吳世昌)은 「이희영이 석찬 정철조(鄭喆祚)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순조원년 신유년 봄에 천주교의 박해(옥사)가 일어나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처형되었으며 그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서학(西學)을 배우고 예수상본 3장을 그려 황사영에게 보낸 것이 탄로되어 자복한 것이며 그 조카 이현(李鉉 : 아오스딩)도 서교(西敎)로 형을 받고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희영 루까는 예수님 그림을 그리다가 순교한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는 그가 그린 예수님 그림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가 전하는 작품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은 「견도(犬圖) (숭전대학 박물관)」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가 서울로 이사한 후에는 전적으로 주문모 신부가 그를 교회일에 참석시키고 이희영 역시 온힘을 다 기울여서 기쁨에 넘쳐 교우들을 도우며 교회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보는 교우들은 그가 언제나 신앙생활과 신심활동을 할 때 즐거움이 얼굴에 넘치고 희망이 가득해서 일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나자 즉시 그의 이름이 발각되었으며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가서 그를 체포하였던 것이다.


  우선 포도청에 감금된 이희영 루까는 거의 한달 동안 갖은 형벌과 온갖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결코 배반한다는 말을 하거나 다른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지난 후에 주문모 신부, 김건순 등이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그도 의금부로 압송되어 여러차례 신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힘든 형벌을 용감하게 참아 받았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희영 루까는 포도청, 의금부 등에서 심한 형벌을 굳건하게 참아 받고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다가 드디어 1801년 3월 29일(양력 5월 11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으니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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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영(루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이희영, 루까는 경기도 여주 온성(陽城) 사람으로 호는 추찬(秋餐)이며 그는 그림을 본래부터 잘 그렸던 화가였다.

      그가 41세였던 1797년 가을에 노론파의 중심인물이었던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됨으로써 1799년에 그는 「루까」라는 세례명으로 주문모 신부에 직접 영세를 받았다. 김건순(요사팟)과는 본래 7촌 되는 인척간엔 데다가 이희영의 가족이 오랫동안 김건순의 집에서 부쳐살고 있었는데 이희영 루까도 역시 노론 계통의 인물이었다. 김건순 요사팟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주문모 신부에게 오랫동안 교리를 듣고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고향인 여주로 돌아와서 친구들을 권화하여 입교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그에게서 교리를 들은 사람들은 이희영을 비롯하여 순교자 이중배(마르티노)와 원경도(요한)가 있었다.

      한편 강이천 같은 사람도 함께 교리를 듣고 입교할 의사가 있었지만 끝내 입교는 하지 않았었다.

      본래 이희영 루까가 입교한 뒤에 김건순, 강이천 등의 주도하에 소위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즉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은 원한을 씻기 위해 바다의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력을 기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7년에 이 계획이 탄로가 나서 김건순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강이천은 유배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주문모 야보고 신부는 이러한 세속적인 계획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대신에 참된 진리를 신봉하라고 권고하였다.

      이희영 루까는 입교하기로 결심한 뒤에 즉시 서울로 올라가 주신부를 만나서 자신이 천주교를 믿고 있음을 확실히 밝히고 세속적이 친구들을 멀리하고 앞서 계획하였던 「해도병마」계획 같은 것은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포기했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이희영 루까는 정광수(발라바), 홍익만(안토니오), 황사영(알렉산델)과 같은 열심한 교우들과 왕래하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일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더욱더 깊은 신심생활과 교중일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여주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가 교회일을 도운 것은 역시 그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화가로서의 재질로 성화를 그렸으며, 여러가지 상본 등을 그렸던 것이며 그러한 성화(聖畵)나 상본(像本)등을 그려서 교우들과 주문모 신부에게 돌렸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그림 한폭이 뒤늦게 발견되어 한국천주교회의 미술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즉 이희영 루까의 호인 「秋餐」이란 낙관이 선명한 가로 32㎝ 세로 1백 5㎝의 채색견본의 「쌍견도(雙犬圖)」로써 작가가 천주교 순교자라는 것 이외도 서양화 기법의 한국 전래를 가늠하는 사료적 가치도 높게 평가되는 그림이다.

      고목 아래 두 마리의 개가 있는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맹견도의 화법과도 흡사해 작자 미상인 이 「맹견도」역시 이희영 루까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壇園 金弘道)」의 작품으로까지 평가하고 있을 정도로 화법에 있어서음, 영(陰, 影) 표현이나 구도, 설채법(設彩法) 등이 뛰어나며 특히 그 당시에 있어서 이질적인 서양화의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맹견도는 당시 북경을 왕래하던 교우들이 서양화의 기법으로 익힌 천주교 교우들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맹견도와 흡사한 「쌍견도」가 최근에 발견되었는데 (1984년경) 이 쌍견도 역시 이희영 루까의 작품으로 정평이 나고 있다.

      조선왕조 순조실록에는 이희영 루까는 서양화의 절묘한 화가라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는데 ꡒ震案結考ꡓ ꡒ書畵微ꡓ등의 용어로 「이희영은 호가 추찬(秋餐)이며 온성 사람으로 순조 원년(1801년) 신유년에 사학 죄인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다.」고 인적 사항을 밝히고 글씨와 그림의 재주가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여 절등(絶等)했다고 그 기량을 평가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위창(偉滄) 오세창(吳世昌)은 「이희영이 석찬 정철조(鄭喆祚)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순조원년 신유년 봄에 천주교의 박해(옥사)가 일어나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처형되었으며 그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서학(西學)을 배우고 예수상본 3장을 그려 황사영에게 보낸 것이 탄로되어 자복한 것이며 그 조카 이현(李鉉 : 아오스딩)도 서교(西敎)로 형을 받고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희영 루까는 예수님 그림을 그리다가 순교한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는 그가 그린 예수님 그림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가 전하는 작품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은 「견도(犬圖) (숭전대학 박물관)」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가 서울로 이사한 후에는 전적으로 주문모 신부가 그를 교회일에 참석시키고 이희영 역시 온힘을 다 기울여서 기쁨에 넘쳐 교우들을 도우며 교회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보는 교우들은 그가 언제나 신앙생활과 신심활동을 할 때 즐거움이 얼굴에 넘치고 희망이 가득해서 일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나자 즉시 그의 이름이 발각되었으며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가서 그를 체포하였던 것이다.

      우선 포도청에 감금된 이희영 루까는 거의 한달 동안 갖은 형벌과 온갖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결코 배반한다는 말을 하거나 다른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지난 후에 주문모 신부, 김건순 등이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그도 의금부로 압송되어 여러차례 신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힘든 형벌을 용감하게 참아 받았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희영 루까는 포도청, 의금부 등에서 심한 형벌을 굳건하게 참아 받고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다가 드디어 1801년 3월 29일(양력 5월 11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으니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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