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코린9,1-27 ; 사도의 본보기

 

사도의 본보기

1. 말씀읽기: 1코린9,1-27

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바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업적이 아닙니까?

2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사도직의 증표입니다.

3 나를 심판하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변론합니다. 4 우리는 먹고 마실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5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케파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6 또 나와 바르나바만 따로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없습니까? 7 자기가 비용을 대면서 군대에 복무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포도밭을 만들고서 그 열매를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양 떼를 치면서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8 내가 인간의 관례에 따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율법도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까? 9 사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에게 마음을 쓰시는 것입니까?

10 어쨌든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밭을 가는 이는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합니다.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뿌렸다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12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 우리야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13 성전에 봉직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양식을 얻고, 제단 일을 맡은 이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4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15 그러나 나는 그러한 권리를 하나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이런 말을 쓴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도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 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율법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말씀연구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그럴듯한 말솜씨로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주님께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주님께서 부여하신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 포기와 절제와 단련을 해야 합니다. 그 본보기를 바오로 사도가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본보기를 통하여 나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지, 나의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바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업적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당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셨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시며 당신 백성을 섬기셨습니다. 그렇게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주님을 위해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이 자유인이 아니란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자제했던 것입니다.

모든 자유의 사용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를 두고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 예수님의 공생활을 체험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나뵙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가 자기 자신의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하는 자유에 대한 주제와 결합되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자기 방어다. 그 당시의 선교 공동체들로부터 그 자신을 사도로서 생활 보장받는 것은 그가 가진 자유의 일부였을 것이다. 바울로가 자기에게 부여된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사도의 이와 같은 행동은 그가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는 확증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로는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서부터 주님을 알고 지내던 최초의 사도들의 무리에 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생을 두고 고통을 받아야 했다.

  열두 사도들은 서로서로가 그들 각자가 받은 성소에 대한 증인이 되어 주는 반면, 바울로는 사도직으로 불림을 받은 그 방법에 있어서 자기 혼자만이 가진 유일한 기준 이에 서 있었다. 그러나 고린토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바울로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입증할 다른 증거가 있었는데, 그것은 공동체의 존재였다. 그 당시 이미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던 고린토 공동체를 바울로가 창설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박할 수 없다. 사도라는 개념에 대하여 두 가지 면모를 들어 요약할 수 있다.





2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사도직의 증표1)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대리자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여러 교회를 설립한 설립자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교회의 설립자라는 것은 코린토 교회를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이들이 자신에게 “바오로는 사도가 아니다.”라는 시비에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3 나를 심판하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변론합니다. 4 우리는 먹고 마실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5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2)이나 케파3)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ꡒ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ꡓ라는 것은 자유와 권리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케파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라는 말 안에서 그 당시, 사도에게는 그 자신뿐 아니라 그와 동반하는 아내까지도 공동체에 의해 부양받을 권리가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사도와 바르나바는 선교여행을 하면서 공동체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천막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선교사명을 계속해서 수행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이 공동체의 부담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그 권리를 자유롭게 포기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일부 반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가 참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복음 전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공동체의 도움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필리피 공동체로부터는 예외적으로 물질적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의 정성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필리피4,15-18; 2코린11,8 참조).



6 또 나와 바르나바만 따로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없습니까?4)

7 자기가 비용을 대면서 군대에 복무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포도밭을 만들고서 그 열매를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양 떼를 치면서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음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예를 듭니다. 하나는 자기가 비용을 대면서 군복무를 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포도밭을 만들고서 그 열매를 따먹지 않는 사람이고, 세 번째는 양을 치면서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 세 가지의 경우, 일하는 사람은 역시 거기서 생계를 보장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그것마저도 포기하였습니다.



8 내가 인간의 관례에 따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율법도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까? 9 사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에게 마음을 쓰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런 당연한 것들이 문서상으로 나타나야 만이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자연법인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고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소에 대한 자연스러운 배려입니다. 건초 더미와 곡식 이삭이 바로 눈앞에 있고, 그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데, 만일 소로 하여금 가끔 한 입씩 먹을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한다면 너무도 잔인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황소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일한 이들이 당연히 상을 받게 된다는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니, 당연히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10 어쨌든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밭을 가는 이는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대한 대가로 어떤 물질적인 것을 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원한 것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고, 인간적인 위로나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반대자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사도가 아닌 사람이 복음을 선포하기에 물질적인 보상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고,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오로 사도는 참된 사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뿌렸다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영적인  씨를 뿌리고, 계속해서 그 일을 하기 위해 신자 공동체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사도들에게 베푸는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사도들로부터 받은 영적인 도움의 가치가 더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법칙이 영적인 영역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며 바울로는 공동체가 선교사나 사목자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있는 모든 것은 사실 그들이 그로부터 받은 것에 비해서 아주 미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자기 편의 권리가 오히려 우위에 놓여 있다는 상관관계를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이 언제나 세속적인 것보다 우이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울로는 ꡒ육적ꡓ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ꡒ물질적ꡓ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린토인들은 분명히 최근에



12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 우리야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이라는 말을 통해, 당시 코린토 교회에는 코린토 신자들의 마음을 현혹하여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다면 바오로 사도 일행도 당연히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13 성전에 봉직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양식을 얻고, 제단 일을 맡은 이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4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단에서 봉사하는 제관들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코린토에도 신전들이 있었고, 신전에서 일하는 제관들이 제단의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코린토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잡신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제관들도 그들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을 나누어 먹는데,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직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성전에서 양식을 얻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당연히 얻어먹을 자격이 있습니다(루카10,7).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참된 가치를 알 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더욱 극진히 대접하게 될 것입니다.



15 그러나 나는 그러한 권리를 하나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이런 말을 쓴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도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쳤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바오로 사도의 기쁨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 그 차제”가 바로 바오로 사도의 자랑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린토 공동체의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하고 있는 복음 선포를 “마치 대가를 받고 하는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그럴 마음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16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주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관리인은 흔히 종이었습니다. 종은 보수를 받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은 일을 할 경우에 보수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 자처했습니다(로마1,1; 갈라1,10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맡았기에 대가(보수)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 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맡겨진 직무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기에 자신의 자유의사와는 관계없이 직무를 맡고, 그것을 수행하여도 아무런 삯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자유인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도의 참된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받을 삯은 삯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서, 어떤 계산이나 이익 때문에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 때문에 주님께서 맡겨 주신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참된 사도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무를 수행하다보면 삯에 더 관심이 많이 갈 때가 있습니다. 차를 축성한다거나 집을 축성했을 때 아무런 사례나 선물을 하지 않으면 왠지 서운해집니다. 혼배를 하고 예물이나 선물을 하지 않으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을까?”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물질적으로 큰 선물을 하면 그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런데 바오로사도의 이 모습은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마음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들이 밀려오는 것은 내가 지금 누구의 일을 어떤 처지에서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독신이 더 이익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오롯이 자신을 봉헌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참된 자유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도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20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5)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이고, 바리사이였습니다. 동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먼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유다인으로서 유다인들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율법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지배하에 있지 않고, 은총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여행에서 티모테오와 동행하기 위해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티모테오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유다인들의 믿음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들을 상대로 한 선교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할례를 받지 않은 티모테오를 데리고 나타날 경우, 바오로 사도를 유다교의 배교자로 여기고 배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바오로 사도는 선교를 위해서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처럼 그렇게 유다 전통에 충실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율법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6)

하느님을 모르던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했고,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통하여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라고 이방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7)



그리고 “그리스도의 율법”은 바로 사랑의 계명(갈라 6,2; 로마13,8-10 참조)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셨고,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랑의 계명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아가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과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체험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시골 본당에 부임하셨는데, 농사철에는 신자들이 성당 미사에 나오지 못하자 신부님께서 직접 논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일을 하다가 잠시 쉬며 참을 먹을 때 논둑에서 미사를 봉헌해주시니,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신부님께서는 책 읽기를 통해서 선교를 하셨는데, 먼저 신자들에게 영적독서를 하고 돌려 볼 수 있도록 하니까, 신자들이 도서를 통해서 신앙을 더욱 키워나가게 되고, 또 선교를 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입교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신부님께서는 방문선교를 통하여 냉담자들을 회두시키고, 비신자들에게 다가가 입교시켰다고 합니다.



각자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를 하고, 신자들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바오로 사도의 그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그렇게 열정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도를 본받는 것이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8)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가 우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승리의 화관을 쓰기를 원하면서도 연습을 하지 않거나 방탕한 생활을 한다면, 결코 경기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썩어 없어질 화관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절제를 하는데, 영원히 썩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차지하려는 신앙인들이 절제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절제해야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들을 절제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방해서는 안 되고, 참된 가치를 위해서 필요 없는 것들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이 더욱 성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은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하나가 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목표가 없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고, 생각은 있지만 뜻이 없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것처럼 하는 권투”를 신앙인들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권투선수가 주먹을 뻗는 이유는 상대방을 쓰러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향하여 주먹을 뻗지 않고 허공을 향해서 주먹을 뻗는다면 그의 상대나 그의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도 모두 그의 어리석은 행동에 야유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리는 사람은 목표를 향해서 달려야 하고, 권투를 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향해서 주먹을 뻗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복음선포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담아주신 것을 전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의지를 굳게 단련시켜야 하고, 내 몸이 내 의지를 온전하게 따를 수 있도록 단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실격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게 되고, 그렇게 멸망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격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떤 직무를 부여받았는지를 늘 기억해야 하고, 언제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절제하고, 자신을 단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②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절제하고 있으며, 나 자신의 의지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4.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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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코린9,1-27 ; 사도의 본보기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사도의 본보기

    1. 말씀읽기: 1코린9,1-27

    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바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업적이 아닙니까?

    2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사도직의 증표입니다.

    3 나를 심판하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변론합니다. 4 우리는 먹고 마실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5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케파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6 또 나와 바르나바만 따로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없습니까? 7 자기가 비용을 대면서 군대에 복무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포도밭을 만들고서 그 열매를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양 떼를 치면서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8 내가 인간의 관례에 따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율법도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까? 9 사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에게 마음을 쓰시는 것입니까?

    10 어쨌든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밭을 가는 이는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합니다.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뿌렸다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12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 우리야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13 성전에 봉직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양식을 얻고, 제단 일을 맡은 이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4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15 그러나 나는 그러한 권리를 하나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이런 말을 쓴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도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 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율법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말씀연구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그럴듯한 말솜씨로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주님께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주님께서 부여하신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 포기와 절제와 단련을 해야 합니다. 그 본보기를 바오로 사도가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본보기를 통하여 나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지, 나의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바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업적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당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셨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시며 당신 백성을 섬기셨습니다. 그렇게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주님을 위해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이 자유인이 아니란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자제했던 것입니다.

    모든 자유의 사용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를 두고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 예수님의 공생활을 체험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나뵙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가 자기 자신의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하는 자유에 대한 주제와 결합되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자기 방어다. 그 당시의 선교 공동체들로부터 그 자신을 사도로서 생활 보장받는 것은 그가 가진 자유의 일부였을 것이다. 바울로가 자기에게 부여된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사도의 이와 같은 행동은 그가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는 확증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로는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서부터 주님을 알고 지내던 최초의 사도들의 무리에 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생을 두고 고통을 받아야 했다.

      열두 사도들은 서로서로가 그들 각자가 받은 성소에 대한 증인이 되어 주는 반면, 바울로는 사도직으로 불림을 받은 그 방법에 있어서 자기 혼자만이 가진 유일한 기준 이에 서 있었다. 그러나 고린토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바울로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입증할 다른 증거가 있었는데, 그것은 공동체의 존재였다. 그 당시 이미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던 고린토 공동체를 바울로가 창설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박할 수 없다. 사도라는 개념에 대하여 두 가지 면모를 들어 요약할 수 있다.



    2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사도직의 증표1)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대리자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여러 교회를 설립한 설립자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교회의 설립자라는 것은 코린토 교회를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이들이 자신에게 “바오로는 사도가 아니다.”라는 시비에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3 나를 심판하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변론합니다. 4 우리는 먹고 마실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5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2)이나 케파3)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ꡒ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ꡓ라는 것은 자유와 권리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케파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라는 말 안에서 그 당시, 사도에게는 그 자신뿐 아니라 그와 동반하는 아내까지도 공동체에 의해 부양받을 권리가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사도와 바르나바는 선교여행을 하면서 공동체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천막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선교사명을 계속해서 수행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이 공동체의 부담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그 권리를 자유롭게 포기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일부 반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가 참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복음 전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공동체의 도움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필리피 공동체로부터는 예외적으로 물질적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의 정성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필리피4,15-18; 2코린11,8 참조).


    6 또 나와 바르나바만 따로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없습니까?4)

    7 자기가 비용을 대면서 군대에 복무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포도밭을 만들고서 그 열매를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양 떼를 치면서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음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예를 듭니다. 하나는 자기가 비용을 대면서 군복무를 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포도밭을 만들고서 그 열매를 따먹지 않는 사람이고, 세 번째는 양을 치면서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 세 가지의 경우, 일하는 사람은 역시 거기서 생계를 보장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그것마저도 포기하였습니다.


    8 내가 인간의 관례에 따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율법도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까? 9 사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에게 마음을 쓰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런 당연한 것들이 문서상으로 나타나야 만이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자연법인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고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소에 대한 자연스러운 배려입니다. 건초 더미와 곡식 이삭이 바로 눈앞에 있고, 그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데, 만일 소로 하여금 가끔 한 입씩 먹을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한다면 너무도 잔인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황소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일한 이들이 당연히 상을 받게 된다는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니, 당연히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10 어쨌든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밭을 가는 이는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대한 대가로 어떤 물질적인 것을 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원한 것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고, 인간적인 위로나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반대자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사도가 아닌 사람이 복음을 선포하기에 물질적인 보상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고,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오로 사도는 참된 사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뿌렸다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영적인  씨를 뿌리고, 계속해서 그 일을 하기 위해 신자 공동체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사도들에게 베푸는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사도들로부터 받은 영적인 도움의 가치가 더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법칙이 영적인 영역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며 바울로는 공동체가 선교사나 사목자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있는 모든 것은 사실 그들이 그로부터 받은 것에 비해서 아주 미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자기 편의 권리가 오히려 우위에 놓여 있다는 상관관계를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이 언제나 세속적인 것보다 우이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울로는 ꡒ육적ꡓ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ꡒ물질적ꡓ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린토인들은 분명히 최근에


    12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 우리야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권리를 갖는다면”이라는 말을 통해, 당시 코린토 교회에는 코린토 신자들의 마음을 현혹하여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다면 바오로 사도 일행도 당연히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13 성전에 봉직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양식을 얻고, 제단 일을 맡은 이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4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단에서 봉사하는 제관들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코린토에도 신전들이 있었고, 신전에서 일하는 제관들이 제단의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코린토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잡신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제관들도 그들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을 나누어 먹는데,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직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성전에서 양식을 얻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당연히 얻어먹을 자격이 있습니다(루카10,7).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참된 가치를 알 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더욱 극진히 대접하게 될 것입니다.


    15 그러나 나는 그러한 권리를 하나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이런 말을 쓴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도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쳤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바오로 사도의 기쁨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 그 차제”가 바로 바오로 사도의 자랑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린토 공동체의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하고 있는 복음 선포를 “마치 대가를 받고 하는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그럴 마음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16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주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관리인은 흔히 종이었습니다. 종은 보수를 받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은 일을 할 경우에 보수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 자처했습니다(로마1,1; 갈라1,10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맡았기에 대가(보수)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 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맡겨진 직무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기에 자신의 자유의사와는 관계없이 직무를 맡고, 그것을 수행하여도 아무런 삯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자유인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도의 참된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받을 삯은 삯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서, 어떤 계산이나 이익 때문에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 때문에 주님께서 맡겨 주신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참된 사도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무를 수행하다보면 삯에 더 관심이 많이 갈 때가 있습니다. 차를 축성한다거나 집을 축성했을 때 아무런 사례나 선물을 하지 않으면 왠지 서운해집니다. 혼배를 하고 예물이나 선물을 하지 않으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을까?”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물질적으로 큰 선물을 하면 그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런데 바오로사도의 이 모습은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마음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들이 밀려오는 것은 내가 지금 누구의 일을 어떤 처지에서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독신이 더 이익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오롯이 자신을 봉헌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참된 자유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도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20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5)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이고, 바리사이였습니다. 동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먼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유다인으로서 유다인들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율법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지배하에 있지 않고, 은총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여행에서 티모테오와 동행하기 위해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티모테오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유다인들의 믿음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들을 상대로 한 선교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할례를 받지 않은 티모테오를 데리고 나타날 경우, 바오로 사도를 유다교의 배교자로 여기고 배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바오로 사도는 선교를 위해서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처럼 그렇게 유다 전통에 충실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율법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6)

    하느님을 모르던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했고,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통하여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라고 이방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7)


    그리고 “그리스도의 율법”은 바로 사랑의 계명(갈라 6,2; 로마13,8-10 참조)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셨고,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랑의 계명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아가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과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체험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시골 본당에 부임하셨는데, 농사철에는 신자들이 성당 미사에 나오지 못하자 신부님께서 직접 논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일을 하다가 잠시 쉬며 참을 먹을 때 논둑에서 미사를 봉헌해주시니,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신부님께서는 책 읽기를 통해서 선교를 하셨는데, 먼저 신자들에게 영적독서를 하고 돌려 볼 수 있도록 하니까, 신자들이 도서를 통해서 신앙을 더욱 키워나가게 되고, 또 선교를 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입교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신부님께서는 방문선교를 통하여 냉담자들을 회두시키고, 비신자들에게 다가가 입교시켰다고 합니다.


    각자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를 하고, 신자들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바오로 사도의 그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그렇게 열정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도를 본받는 것이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8)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가 우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승리의 화관을 쓰기를 원하면서도 연습을 하지 않거나 방탕한 생활을 한다면, 결코 경기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썩어 없어질 화관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절제를 하는데, 영원히 썩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차지하려는 신앙인들이 절제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절제해야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들을 절제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방해서는 안 되고, 참된 가치를 위해서 필요 없는 것들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이 더욱 성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은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하나가 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목표가 없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고, 생각은 있지만 뜻이 없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것처럼 하는 권투”를 신앙인들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권투선수가 주먹을 뻗는 이유는 상대방을 쓰러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향하여 주먹을 뻗지 않고 허공을 향해서 주먹을 뻗는다면 그의 상대나 그의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도 모두 그의 어리석은 행동에 야유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리는 사람은 목표를 향해서 달려야 하고, 권투를 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향해서 주먹을 뻗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복음선포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담아주신 것을 전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의지를 굳게 단련시켜야 하고, 내 몸이 내 의지를 온전하게 따를 수 있도록 단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실격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게 되고, 그렇게 멸망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격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떤 직무를 부여받았는지를 늘 기억해야 하고, 언제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절제하고, 자신을 단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②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절제하고 있으며, 나 자신의 의지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4.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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