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가톨릭 교회(2)

 

현대의 가톨릭 교회(2)




20세기의 교황


비오 11세(1922-1929) : 1879년에 신부가 된 비오 11세는 신학교의 교사, 밀라노와 바티칸의 도서관 책임자, 외교관 등의 경력을 거쳐서 1921년에 밀라노교구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활동 단체인 ꡐ가톨릭 활동ꡑ으로 교황은 이 가톨릭 운동에 대해 ꡐ교회의 교계적, 사도직에 평신도의 협력과 참여ꡑ라는 전통적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러한 평신도의 사도직은 모든 가톨릭 신자의 의무인 애덕의 실천이라고 규정하면서 기도와 희생은 넓은 의미의 ꡐ가톨릭 활동ꡑ이며,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파하는 노력은 엄밀한 의미의 ꡐ가톨릭 활동ꡑ이라고 구분하였다.


비오 11세의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교회 안에서는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되었으며, ꡐ평신도 신학ꡑ이 정립되었고 점차로 성직자 위주의 교회에서 평신도가 함께 연대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전환기에 들어섰다.


그리고 교황은 지방교회에서 ꡐ가톨릭 활동ꡑ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많은 국가와 종교협약을 체결하였고 국가 통치자가 ꡐ가톨릭 활동ꡑ에 제재를 가하려고 하였을 때에는 과감하게 투쟁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특히 평신도 사도직 활동단체의 하나인, 근로자로 구성된 ꡐ가톨릭노동청년회ꡑ 창립에 깊은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외에도 교회 내정에 있어서 비오 11세는 여러 회칙을 통해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강조하였고, 부당한 피임을 단죄하였다. 또한 그는 레오 13세의 「노동헌장」반포 40주년을 맞이하여 가톨릭 교회의 사회 이론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재천명하는 회칙을 반포하였다(1931).


국제 문제에 있어서 비오 11세는 실리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럽에서 독재자들(뭇솔리니와 히틀러)이 출현하는 데 길을 열어 주었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선익을 위해서 지방교회의 가톨릭 정당들을 희생시키면서 유럽의 독재자들과 타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비오 11세는 이딸리아에서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으로 혼란해진 국가에 확고한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 강력한 통치자의 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베니또 뭇솔리니(1883-1945)를 선택하였다. 훗날에 독재자로 변한 그를 권좌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교황은 이딸리아의 가톨릭 국민당에 대한 바티칸의 지지를 철회하였다. 그 보답으로 교황은 뭇솔리니와 라테라노 조약과 종교협약을 체결하였다(1929년 2월 11일).


이로써 50여 년 동안 교회와 이딸리아 정부 사이에 쟁점의 대상이었던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교회는 이딸리아 지역의 교황령에 대해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고 그 영토권을 포기하였으며 로마를 수도로 하는 이딸리아를 국가로 승인하였다. 그리고 이딸리아 정부는 바티칸 시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그 자주권을 인정하였고, 가톨릭 교회를 유일한 국교로 정하였으며 가톨릭 교리를 학교교육에 있어 종교 과목의 기준으로 삼았고 비정치적 단체로서 ꡐ가톨릭 활동ꡑ의 자유활동을 보장받았다.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허위술책으로 정치와 종교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였다. 독일의 주교들은 1931년에 히틀러의 민족사회당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2년 후에 권력을 잡게 된 히틀러는 국회에서 모든 종교(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권위를 존중할 것을 약속하면서 국가와 교회가 독일의 정치, 윤리적 정화를 위해 함께 협력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세력이 정면 충돌을 하든지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였다.


여기서 가톨릭 중앙당은 히틀러가 요구하는 협력의 진설성에 대해서 의심을 품으면서도 그의 장래 정치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이 독재자에게 비상권을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데 동의하였다. 며칠 후에 독일 주교들은 히틀러와 그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단죄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비오 11세는 독일의 가톨릭 교회의 권리와 종교활동이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종교협약을 체결하였다(1933. 7.21).


그러나 비오 11세가 교회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채택한 정책은 독재자들이 약속을 실천하지 않았을 때에 단호한 대응으로 바뀌었다. 이딸리아에서 뭇솔리니가 ꡐ가톨릭 활동ꡑ을 억압하려고 하였을 때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후퇴시켰다. 또한 독일의 히틀러가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제한하려고 교회 단체와 청년 조직의 금지, 종교교육의 철폐, 교회 언론의 탄압, 설교 금지, 성직자와 평신도의 체포, 가톨릭대학과 신학부의 폐교 등 교회에 호전적 태도를 보였을 때에도 세계가 놀랄 만한 회칙을 반포하여(1937) 독재자에게 도전하였다.


교황의 회칙은 나찌즘에 정면 충돌하여 비난한 것으로 바티칸이 반포한 단죄 중의 가장 큰 문헌이다. 이 문헌은 독일에 숨어 들어가 1937년 3월 성지주일에 성당에서 낭독되었다. 교황은 회칙에서 나찌스의 거짓 술책을 폭로하고 새로운 이교사상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나찌스 당국은 공공연하게 교회를 탄압하고 성직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여기서 비오 11세는 뭇솔리니와 히틀러의 반(反)교회 정책과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여 폭탄적인 회칙을 준비하던 중 1939년 2월 10일에 서거하였다.


비오 12세(1939-1958) : 비오 12세는 1899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교황청의 국무성에 들어가(1901) 관료생활과 외교관 활동을 통해서 정치적인 식견을 넓혔다. 1931년에 추기경으로 승진되면서 국무성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동안에 교황 특사로 유럽과 아프리카의 국제성체대회에 참석하면서 국제적 인물이 되었다.


비오 12세는 교황청의 국무성 장관이 교황에 선출되지 않았던 관례를 깨뜨리고 교황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개인적으로 고매한 성품의 신심 깊은 신앙인의 인상을 일반 대중에게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위기에 처하여 있는 세계 안에서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유능한 정치가 및 외교관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오 12세의 교황 대관식이 있은지(1939년 3월) 2주일 후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였다. 이 침략 행위는 세계를 전쟁 직전으로 이끌고 갔으며 여기서 교황은 전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1939년 성탄절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5개항의 평화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모든 국가는 각국가의 생존권과 자주권을 인정할 것. 둘째, 각 국가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참된 무장해제를 실천할 것. 세째, 평화수호를 위한 국제 기구를 설치할 것. 네째, 소수 민족의 권리를 승인할 것. 다섯째, 국가 안에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을 도입할 것.


비오 12세는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히틀러 정부의 전복을 위해 저항하는 독일의 지하운동 단체와 연합군의 동맹을 결성하는 데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전쟁 당사국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나찌즘을 공산주의 이상으로 싫어하였다. 동시에 그는 독일 민족과 문화를 사랑하여 전쟁 후에는 독일인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는 평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공산국가인 러시아가 득세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러시아의 완전한 승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평화협상에 노력하였다. 그는 반(反)나찌주의자였고 반(反)공산주의자였다.


비오 12세는 교회 내정에 있어서 많은 회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의 단합을 요구하였고, 성서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강조하면서 가톨릭 학자들에게 성서 비판 방법을 자유롭게 적용하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그는 전례에 있어서 모국어 사용에 호감을 표시하였고, 성 토요일의 부활전야 빠스카 예절을 부활시키면서 성주간 예절을 개혁한 동시에, 토요일 특전미사를 도입하면서 공심제를 완화하였다. 교황은 많은 비(非)이딸리아인 추기경들을 선임하였으나 교황지상주의와 교황청 중심의 교회 행정을 펴나가면서 지방교회 주교들의 권한을 희생시켜 많은 반발을 받았다.


그의 보수주의적 자세는 교회의 현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신학이나 교회 행정의 개혁시도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비오 12세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에 대한 교리를 결정, 반포하였고 동방 정교회들과 관계 개선을 이룩하는 데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에 있어서 비오 12세가 비난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황이 나찌스와 유대인에 대한 만행에 대해 침묵을 지킨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가 히틀러의 죄악을 항의하게 되면 더 야만적인 행위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교회에 대한 잔인한 보복 행위를 염려하였다. 또한 교황은 그의 항의가 신경질적인 히틀러에게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상, 로마에서 5천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교황청에 소속된 수도원에 피신하여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가 많은 이에게는 잘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가장 올바른 양심을 지닌 인물로서 침묵을 지킨 것 때문에 더욱 큰 고민 속에 지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잘못한다면 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나치게 외교적인 생각만 하고 중립을 지킨 처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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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가톨릭 교회(2)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현대의 가톨릭 교회(2)


    20세기의 교황

    비오 11세(1922-1929) : 1879년에 신부가 된 비오 11세는 신학교의 교사, 밀라노와 바티칸의 도서관 책임자, 외교관 등의 경력을 거쳐서 1921년에 밀라노교구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활동 단체인 ꡐ가톨릭 활동ꡑ으로 교황은 이 가톨릭 운동에 대해 ꡐ교회의 교계적, 사도직에 평신도의 협력과 참여ꡑ라는 전통적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러한 평신도의 사도직은 모든 가톨릭 신자의 의무인 애덕의 실천이라고 규정하면서 기도와 희생은 넓은 의미의 ꡐ가톨릭 활동ꡑ이며,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파하는 노력은 엄밀한 의미의 ꡐ가톨릭 활동ꡑ이라고 구분하였다.

    비오 11세의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교회 안에서는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되었으며, ꡐ평신도 신학ꡑ이 정립되었고 점차로 성직자 위주의 교회에서 평신도가 함께 연대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전환기에 들어섰다.

    그리고 교황은 지방교회에서 ꡐ가톨릭 활동ꡑ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많은 국가와 종교협약을 체결하였고 국가 통치자가 ꡐ가톨릭 활동ꡑ에 제재를 가하려고 하였을 때에는 과감하게 투쟁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특히 평신도 사도직 활동단체의 하나인, 근로자로 구성된 ꡐ가톨릭노동청년회ꡑ 창립에 깊은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외에도 교회 내정에 있어서 비오 11세는 여러 회칙을 통해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강조하였고, 부당한 피임을 단죄하였다. 또한 그는 레오 13세의 「노동헌장」반포 40주년을 맞이하여 가톨릭 교회의 사회 이론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재천명하는 회칙을 반포하였다(1931).

    국제 문제에 있어서 비오 11세는 실리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럽에서 독재자들(뭇솔리니와 히틀러)이 출현하는 데 길을 열어 주었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선익을 위해서 지방교회의 가톨릭 정당들을 희생시키면서 유럽의 독재자들과 타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비오 11세는 이딸리아에서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으로 혼란해진 국가에 확고한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 강력한 통치자의 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베니또 뭇솔리니(1883-1945)를 선택하였다. 훗날에 독재자로 변한 그를 권좌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교황은 이딸리아의 가톨릭 국민당에 대한 바티칸의 지지를 철회하였다. 그 보답으로 교황은 뭇솔리니와 라테라노 조약과 종교협약을 체결하였다(1929년 2월 11일).

    이로써 50여 년 동안 교회와 이딸리아 정부 사이에 쟁점의 대상이었던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교회는 이딸리아 지역의 교황령에 대해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고 그 영토권을 포기하였으며 로마를 수도로 하는 이딸리아를 국가로 승인하였다. 그리고 이딸리아 정부는 바티칸 시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그 자주권을 인정하였고, 가톨릭 교회를 유일한 국교로 정하였으며 가톨릭 교리를 학교교육에 있어 종교 과목의 기준으로 삼았고 비정치적 단체로서 ꡐ가톨릭 활동ꡑ의 자유활동을 보장받았다.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허위술책으로 정치와 종교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였다. 독일의 주교들은 1931년에 히틀러의 민족사회당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2년 후에 권력을 잡게 된 히틀러는 국회에서 모든 종교(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권위를 존중할 것을 약속하면서 국가와 교회가 독일의 정치, 윤리적 정화를 위해 함께 협력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세력이 정면 충돌을 하든지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였다.

    여기서 가톨릭 중앙당은 히틀러가 요구하는 협력의 진설성에 대해서 의심을 품으면서도 그의 장래 정치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이 독재자에게 비상권을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데 동의하였다. 며칠 후에 독일 주교들은 히틀러와 그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단죄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비오 11세는 독일의 가톨릭 교회의 권리와 종교활동이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종교협약을 체결하였다(1933. 7.21).

    그러나 비오 11세가 교회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채택한 정책은 독재자들이 약속을 실천하지 않았을 때에 단호한 대응으로 바뀌었다. 이딸리아에서 뭇솔리니가 ꡐ가톨릭 활동ꡑ을 억압하려고 하였을 때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후퇴시켰다. 또한 독일의 히틀러가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제한하려고 교회 단체와 청년 조직의 금지, 종교교육의 철폐, 교회 언론의 탄압, 설교 금지, 성직자와 평신도의 체포, 가톨릭대학과 신학부의 폐교 등 교회에 호전적 태도를 보였을 때에도 세계가 놀랄 만한 회칙을 반포하여(1937) 독재자에게 도전하였다.

    교황의 회칙은 나찌즘에 정면 충돌하여 비난한 것으로 바티칸이 반포한 단죄 중의 가장 큰 문헌이다. 이 문헌은 독일에 숨어 들어가 1937년 3월 성지주일에 성당에서 낭독되었다. 교황은 회칙에서 나찌스의 거짓 술책을 폭로하고 새로운 이교사상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나찌스 당국은 공공연하게 교회를 탄압하고 성직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여기서 비오 11세는 뭇솔리니와 히틀러의 반(反)교회 정책과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여 폭탄적인 회칙을 준비하던 중 1939년 2월 10일에 서거하였다.

    비오 12세(1939-1958) : 비오 12세는 1899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교황청의 국무성에 들어가(1901) 관료생활과 외교관 활동을 통해서 정치적인 식견을 넓혔다. 1931년에 추기경으로 승진되면서 국무성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동안에 교황 특사로 유럽과 아프리카의 국제성체대회에 참석하면서 국제적 인물이 되었다.

    비오 12세는 교황청의 국무성 장관이 교황에 선출되지 않았던 관례를 깨뜨리고 교황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개인적으로 고매한 성품의 신심 깊은 신앙인의 인상을 일반 대중에게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위기에 처하여 있는 세계 안에서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유능한 정치가 및 외교관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오 12세의 교황 대관식이 있은지(1939년 3월) 2주일 후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였다. 이 침략 행위는 세계를 전쟁 직전으로 이끌고 갔으며 여기서 교황은 전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1939년 성탄절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5개항의 평화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모든 국가는 각국가의 생존권과 자주권을 인정할 것. 둘째, 각 국가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참된 무장해제를 실천할 것. 세째, 평화수호를 위한 국제 기구를 설치할 것. 네째, 소수 민족의 권리를 승인할 것. 다섯째, 국가 안에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을 도입할 것.

    비오 12세는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히틀러 정부의 전복을 위해 저항하는 독일의 지하운동 단체와 연합군의 동맹을 결성하는 데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전쟁 당사국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나찌즘을 공산주의 이상으로 싫어하였다. 동시에 그는 독일 민족과 문화를 사랑하여 전쟁 후에는 독일인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는 평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공산국가인 러시아가 득세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러시아의 완전한 승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평화협상에 노력하였다. 그는 반(反)나찌주의자였고 반(反)공산주의자였다.

    비오 12세는 교회 내정에 있어서 많은 회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의 단합을 요구하였고, 성서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강조하면서 가톨릭 학자들에게 성서 비판 방법을 자유롭게 적용하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그는 전례에 있어서 모국어 사용에 호감을 표시하였고, 성 토요일의 부활전야 빠스카 예절을 부활시키면서 성주간 예절을 개혁한 동시에, 토요일 특전미사를 도입하면서 공심제를 완화하였다. 교황은 많은 비(非)이딸리아인 추기경들을 선임하였으나 교황지상주의와 교황청 중심의 교회 행정을 펴나가면서 지방교회 주교들의 권한을 희생시켜 많은 반발을 받았다.

    그의 보수주의적 자세는 교회의 현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신학이나 교회 행정의 개혁시도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비오 12세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에 대한 교리를 결정, 반포하였고 동방 정교회들과 관계 개선을 이룩하는 데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에 있어서 비오 12세가 비난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황이 나찌스와 유대인에 대한 만행에 대해 침묵을 지킨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가 히틀러의 죄악을 항의하게 되면 더 야만적인 행위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교회에 대한 잔인한 보복 행위를 염려하였다. 또한 교황은 그의 항의가 신경질적인 히틀러에게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상, 로마에서 5천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교황청에 소속된 수도원에 피신하여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가 많은 이에게는 잘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가장 올바른 양심을 지닌 인물로서 침묵을 지킨 것 때문에 더욱 큰 고민 속에 지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잘못한다면 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나치게 외교적인 생각만 하고 중립을 지킨 처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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