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의 해방자 예수(1)

I. 가난한 이들의 해방자 예수
우리는 앞에서 가난하게 되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를 살펴보았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가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는 금욕자나 고행가는 아니었다. 그분은 부잣집에 초대받아 식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경건한 부인들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받아서 생활하기도 하셨다.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먹고 마시다고하여 ‘술보’, 먹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 처럼 계속해서 광야에서 사시지도 않으시고 세속에 대하여 개방적인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두고 철저한 가난을 취하셨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루가 22,42). 하느님의 뜻이란 인간과 인류의 “구원”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을 돕고 치유하고 해방하는 뜻, 즉 구원의지이다. 인간의 전면적 해방과 행복을 원하신다. Hans Küng, 앞의 책, 169면 참조.
따라서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몸소 가난한 사람이 된 것은 – 그런 죄스런 조건과 결과들을 몸소 취한 것은 – 가난과 가난의 조건들을 정당화시키거나 이상화시키면서 그런 조건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 아니다. Julio Lois, ꡔ해방신학의 구조와 논리ꡕ, 134-135 참조 ; 홍경완, 앞의 책, 26면에서 재인용.
한마디로 세상과 인간들의 “해방”(루가 4,19)을 위해서였다.
1. 메시아 희망
이스라엘은 선택된 백성, 계약의 백성이라고하는 자신들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들이 억압받았다고 하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하는가?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하는가?”(예레 12,1) 하는 질문이 그들의 종교적 양심을 괴롭혔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왕다운 정의를 베푸실 것이라는 신앙을 잃지는 않았다. 다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야훼의 정의와 배려가 채워질 메시아의 시대에, 즉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제2이사야가 독특한 방식으로 예언하고 있는 약속의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나라를 세우시는 그날이 오면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 천대받는 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이사 49,13)고 말하게 되라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신적인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펴실 것이며 억압받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며 박해자들에게 복수를 하시리라는 것이다. Dupont, “A Igreja e a Pobreza,” p.441 ff : Alvario Barreiro, 앞의 책, 57면에서 재인용.

주님의 영이 내게 내려셨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로다, 주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시력회복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 이 인용문에서 ‘해방개념을 주로 달것
’(또는 ‘자유’)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귀양살이에 묶여있는 포로들이나 이민족의 압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풀어준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여러 대목에서 루가는 이 단어를 죄인과 연결시켜 사용하고 있다. 루가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하느님께서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죄로 인해 가난해지고 억눌려 있고 소외된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는 것이다 : 정태현, 앞의 책, 61-62면.
하여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함이로다.(루가 4,18-19 참조 : 이사 61,1-2; 58,6).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인지 아니면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에 대한 대답으로 당신의 행동과 가르침의 의미를 그들에게 알리신다.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에게는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고 계셨다. 그분은 대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보고 들은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시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루가 7,21-22).
여기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고통받는 이들을 그들의 굴레에서 풀어주는 이 해방과 구제,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이 일이야말로 당신 사명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S. Galilea, 앞의 책, 28면.

행복선언중에서 처음에 나오는 세 가지 행복은 가난한 이들(모든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빼앗긴 사람들), 굶주린 이들(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수단을 빼앗긴 사람들), 그리고 우는 이들(경제적, 사회적 소외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선포된다. 뒤퐁에 따르면, 이들 세 구절은 나머지 다른 두 구절도 강조하는 바로 그 이사야서에 근거하여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예수가 기쁜 소식을 선포한 가난한 이들은 바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입장에서 빈곤한 그 사람들이며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억압당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는 무식꾼, 가난뱅이, 우는 자, 병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포로, 죄수, 불구자, 마귀들린 자, 꼴지, 채무자, 철부지, 죄인 등 여러 가지 표현들을 동원하여 ‘가난한 자들’을 묘사하신다. 이들은 한결같이 사회에서 버림받고 천대받고 잊혀진 상태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만을 기다리는 가련한 자들이다. 넓게 보아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백안시되던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소홀히 취급받던 여성들과 어린아이들고 ‘가난한 자들’의 범주에 속한다 : 정태현, 앞의 책, 55-56면.
이사야서 특히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자가 소개되는 61,1-2의 예언의 약속에 응답하면서, 처음의 세 행복선언은 예수의 가르침 중에 핵심을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을 그 사자와 동일시하면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라고 선포한다.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종언을 고하면서 하느님의 정의와 해방이 펼쳐지는 것이다. Dupont, Les pauvres etla pauvrete’ , 48-50 참조, S. Galilea, 앞의 책, 64-65면에서 재인용.

2. 해 방
예수께서 나자렛 회장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신 후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고 말씀하셨다. ‘성서의 말씀’이란온갖 종류의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을 심령화시켜서 알아듣거나 한없이 연기만 되는 어떤 미래나 멀고 먼 어떤 저 세상을 미끼로하여 이 가난한 삶들을 달래려 했다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확실히 잘못일 것이다. 예수에게는 구원의 때가 지금 벌써 나타나고 또한 실현되고 있으며 하나의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행복선언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에서 현재형 동사는 그들이 지금 하늘 나라를 체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의 뜻한다. 이 나라는 예수의 복음선포를 통해 현존하고 세말에 완전히 성취되는(4,7) 천상적 구원을 뜻한다(25,34). 하느님은 예수의 행복선언 안에서 이러한 천상 축복을 성취하기 시작하신다. 박영식, ꡔ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하여ꡕ, 바오로 딸, 1995, 27-28면.
또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예수가 이룬 표징들이 가리켜 주고 있다. 이러한 표징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영육을 포괄하는 전인간의 구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Walter Kasper, 앞의 책, 144면 참조.

(1) 병으로부터의 해방
질병은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왔고(창세 3,16-19 참조) 불충실한 하느님의 백성이 당할 저주의 주요한 형태 중 하나로 여겼다(신명 28,21-22.27-29.35). 예언자들은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마련하실 새 세상에는 병이 없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때에는 불구자도(이사 35,5-6) 눈물도 고통도(이사 25,8; 65,19) 없을 것이다. 고통받는 의인이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게 되면,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치유될 것이다(이사 53,4-5) X. 레옹-뒤푸르,, “병, 치유”항, 앞의 책, 204-206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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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께서 고통에 시달리는 군중 한가운데를 지나가시며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들을 치유하신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자, 사람들이 앓는 이들과 귀신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다. 그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갖가지 질병으로 앓고 있는 많은 이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그런데 그분은 귀신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마르 1,32-34).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이사 53,4; 마태 8,17 참조).
이러한 육체의 치유도 그 자체가 해방적인 것이 된다. 하느님과 친교가 회복되는 곳, 하느님의 다스림심이 세워지는 곳에 ‘사물들은 다시 제대로’되고 세상은 다시 온전하게 된다. 이 구원에 대해서 기적들은 이렇게 말해준다. 구원이란 어떤 심령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인간 전체에 관련되며 따라서 그의 육체성이라는 차원에 있어서도 그에게 직접 관련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지금 벌써 나타나기 시작한 구원의 표징들이다. 예수의 기적들은 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지는 육체적이며 현세적인 차원을 표현한다 : Walter Kasper, 앞의 책, 162면.
그러나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예수의 구제는 단순한 육체적인 치유를 초월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고통받는 이들이 사회 속에 통합되고 소외에서 벗어나도록 추진하신다. 그분의 치유 대상은 전형적으로 나병환자, 소경, 귀머거리,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예수의 말씀(루가 7,22)에서 열거된 병들을 자세히 살혀보면 또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의 병을 지닌 사람들은 그 병으로 인해서 외부 세계와의 관계도 단절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단절은 단지 신체적인 이유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질병들은 신체적인 병의 상태를 넘어 정신적인 측면에까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가져온다. 정신적 포로상태와 절름발이 상태, 고립과 자기 중심성을 이 질병들은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고쳐주심으로써 단순한 외적 질병의 치유뿐 아니라, 단절과 자기 중심성이란 내적인 병까지 함께 치유해 주신 것이다 : 홍경완, 앞의 책, 28면, 주52번.
이 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그분의 치유의 덕을 가장 많이 입는 사회적 범주에 속한다. S. Galilea, 앞의 책, 29면.

소경은 유다에서나 동방에서나 전통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인 결함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악으로도 간주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치유하실 즈음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요한 9,2). 위의 책, 30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하나가 병든 사람들, 신체 장애자들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나병환자는 더 심하게 사회로부터 소외 받았다. 송기득, ꡔ인간ꡕ, 한국신학연구소, 1989, 272면.
그래서 그들은 집으로부터, 동네로부터 쫓겨났으며 사회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차단은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사람 사이에 섞일 수 없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서도 제외되고 죄인으로써 취급을 받았다. 안병무, ꡔ갈릴래아의 예수ꡕ, 한국신학연구소, 1985, 157면.
그런데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한 후 그들을 자기가 소속한 집 또는 마을로 가라고 명령한다. 집을 떠나 헤매는 병자에게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욕구 이상 간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예수는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이들을 각자가 속했던 데로 복귀시킴으로써 그들이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주심으로써 그들을 육체적 불행에서 해방하셨을 뿐 아니라 사회적 굴레에서도 해방시켜주심으로써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구제였다! 예수의 치유는 모두가 불완전하였다. 그들이 수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질병 이외의 다른 속박에 묶여 있어야 했고 또한 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던 만큼 육체적인 치유로서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분의 치유는 총체적인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역시 불완전했다. 예수께서 베짜다 못가의 반신불수 병자를 낫게하신 후 하신 말씀에서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보시오, 당신은 건강한 (몸이) 되었소, 더는 죄를 짓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더욱 형편없게 될지도 모릅니다.”(요한 5,14)
모든 고통들을 당신 스스로 제거하고 당대의 문제되는 사회구조 전체를 해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기적과 치유가 지향하는 일차적 목표도 아니었다. S. Galilea, 앞의 책, 30-31 참조.

예수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소”라고 말씀하셨다. 병자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와 고통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고통은 죄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병자에게도 회개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는 언제나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나자렛에서 치유의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적을 무리하게 보여준다면 기적의 본래의 의미는 상실될 것이다. 중풍병자를 데려왔을 때, 예수는 그의 병에는 전혀 유의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분이 눈여겨보신 것은 그의 믿음이었다. 그분은 병자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병의 치유는 모든 일들 중 가장 마지막에 이루시는 일이었다(마르 2,1-12 참조). 악령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도(마르 9,23-25), 그리고 백인대장에게도(마태 8,8-10) 믿음을 보시고 치유가 이루어졌다. 치유된 예리고의 맹인에게는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마르 10,46-52참조) 라고 말씀하셨다. Walter Kasper는 신앙과 기적 사이의 연관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기적은 신앙으로 인도해 주게끔 이루어지며,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보고 그것을 하느님의 업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신앙을 전제한다. 기적은 신앙을 위한 표징이다 : Walter Kasper, 앞의 책, 166-167면 참조.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육체적 불행에서 구제하시는 과정에서(루가 5,17 이하)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이 죄를 구제하는 해방자로서 부여받은 신임장을 제시하신다. S. Galilea, 앞의 책, 30-31 참조.

(2) 죄로부터의 해방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예수의 주목을 끌었던 계층은 당시의 종교적․사회적 조건들에 의해서 구원의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세리와 창녀들이엇다.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과부들, 불의의 희생물이 된 가난한 자들은 그래도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하느님의 돌보심에 맡겨질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러나 죄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창녀와 세리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변호를 받지 못한 채 유대교의 경건주의자들의 증오와 배척과 멸시를 감수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바로 이들이 예수의 일차적인 선교 대상인 가난한 사람들의 맨앞열에 서 있는 사람들로서 그분의 특별한 주의를 끌었다. 정태현, 앞의 책, 55-56면.
예수께서는 죄인들, 곧 잃어버린 אטח는 표지 등을 “잃어버린”이라는 의미가 있다 : Kittel, Gerhard & Gerhard Friedrick, eds, ꡔ킷텔 단권 신약원어 신학사전ꡕ(Theological Dictinary of the New Testment), 요단출판사 번역위원회 옮김, 요단출판사, 1986, 53면.
자 등에 대한 해방의 소식을 ‘죄에서의 해방’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이외에 여러 가지 구체적이고 은유적인 표상들과 비유들을 통하여 선포하셨다. 그 중에서 죄인과 하느님, 죄와 해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 세 가지 비유가 루가 15장에 소개되어 있다. 정태현, 앞의 책, 62-63면 참조.
길 잃은 양의 비유(루가 15,4-7),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루가 15,8-10)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5,11-32)가 그것이다. 이 세가지 비유는 죄인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켰는지를 알 수 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 더 기뻐하는”(루가 15,7-10) 예수께서 죄인들을 가까이하고 그들의 친구가 된 것에대하여 비판하는 이들에게 “의사는 건강한 삶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잃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부르러 왔습니다.”(마르 2,17; 루가 5,31-3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에게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안히 가시오.”하고 말씀하셨다.(루가 7,36-50) 믿음이 실제로 이 여인의 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수의 설교를 듣고 죄많은 여인은 깊은 감동과 희망 속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값비싼 향액을 부어드리는 여인의 행위는 예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명백한 표시이다. 예수께서는 기쁜 소식에 대한 여인의 믿음과 믿음의 외적인 표시로 보여진 일련의 행위들이 여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음을 선언한다. 하느님께서 죄인을 구원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소식을 여인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온몸으로 했으니 구원이 그녀에게 틀림없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위의 책, 66면 참조.

이렇게 그분은 그들을 신앙과 회개에로 초대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이른바 ‘내적 해방’-그들의 죄와 이기심과 영적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하셨다. 예수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것이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실현하는 것이다. S. Galilea, 앞의 책, 30-31 참조.

우리가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엄청난 죄과를 하느님이 우리에게 탕감해 준다면, 우리로서도 우리 이웃사람들에게 그들의 적은 죄값을 탕감해 줄 수 있는 용의를 갖추어야 한다(마태 18,23-34). 하느님의 용서는 한없이 용서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준다(루가 17,3 이하) 언제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용의는 또한 하느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는 조건(마르 11,25; 마태 6,12)이며 그 척도(마르 4,24; 마태 7,2; 루가 6,38)이다. 구원은 자비로운 사람들에게 약속된다(마태 5,7). 일체를 능가하고 극복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작용력을 발휘하여, 우리로 하여금 동료 인간들을 받아들이고 편견과 사회적 편견과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며, 사람들 사이에 새롭고도 자유로운 소통을 트고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며 동고동락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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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해방자 예수(1)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I. 가난한 이들의 해방자 예수
    우리는 앞에서 가난하게 되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를 살펴보았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가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는 금욕자나 고행가는 아니었다. 그분은 부잣집에 초대받아 식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경건한 부인들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받아서 생활하기도 하셨다.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먹고 마시다고하여 ‘술보’, 먹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 처럼 계속해서 광야에서 사시지도 않으시고 세속에 대하여 개방적인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두고 철저한 가난을 취하셨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루가 22,42). 하느님의 뜻이란 인간과 인류의 “구원”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을 돕고 치유하고 해방하는 뜻, 즉 구원의지이다. 인간의 전면적 해방과 행복을 원하신다. Hans Küng, 앞의 책, 169면 참조.
    따라서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몸소 가난한 사람이 된 것은 – 그런 죄스런 조건과 결과들을 몸소 취한 것은 – 가난과 가난의 조건들을 정당화시키거나 이상화시키면서 그런 조건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 아니다. Julio Lois, ꡔ해방신학의 구조와 논리ꡕ, 134-135 참조 ; 홍경완, 앞의 책, 26면에서 재인용.
    한마디로 세상과 인간들의 “해방”(루가 4,19)을 위해서였다.
    1. 메시아 희망
    이스라엘은 선택된 백성, 계약의 백성이라고하는 자신들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들이 억압받았다고 하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하는가?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하는가?”(예레 12,1) 하는 질문이 그들의 종교적 양심을 괴롭혔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왕다운 정의를 베푸실 것이라는 신앙을 잃지는 않았다. 다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야훼의 정의와 배려가 채워질 메시아의 시대에, 즉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제2이사야가 독특한 방식으로 예언하고 있는 약속의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나라를 세우시는 그날이 오면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 천대받는 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이사 49,13)고 말하게 되라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신적인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펴실 것이며 억압받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며 박해자들에게 복수를 하시리라는 것이다. Dupont, “A Igreja e a Pobreza,” p.441 ff : Alvario Barreiro, 앞의 책, 57면에서 재인용.

    주님의 영이 내게 내려셨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로다, 주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시력회복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 이 인용문에서 ‘해방개념을 주로 달것
    ’(또는 ‘자유’)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귀양살이에 묶여있는 포로들이나 이민족의 압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풀어준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여러 대목에서 루가는 이 단어를 죄인과 연결시켜 사용하고 있다. 루가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하느님께서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죄로 인해 가난해지고 억눌려 있고 소외된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는 것이다 : 정태현, 앞의 책, 61-62면.
    하여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함이로다.(루가 4,18-19 참조 : 이사 61,1-2; 58,6).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인지 아니면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에 대한 대답으로 당신의 행동과 가르침의 의미를 그들에게 알리신다.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에게는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고 계셨다. 그분은 대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보고 들은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시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루가 7,21-22).
    여기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고통받는 이들을 그들의 굴레에서 풀어주는 이 해방과 구제,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이 일이야말로 당신 사명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S. Galilea, 앞의 책, 28면.

    행복선언중에서 처음에 나오는 세 가지 행복은 가난한 이들(모든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빼앗긴 사람들), 굶주린 이들(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수단을 빼앗긴 사람들), 그리고 우는 이들(경제적, 사회적 소외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선포된다. 뒤퐁에 따르면, 이들 세 구절은 나머지 다른 두 구절도 강조하는 바로 그 이사야서에 근거하여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예수가 기쁜 소식을 선포한 가난한 이들은 바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입장에서 빈곤한 그 사람들이며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억압당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는 무식꾼, 가난뱅이, 우는 자, 병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포로, 죄수, 불구자, 마귀들린 자, 꼴지, 채무자, 철부지, 죄인 등 여러 가지 표현들을 동원하여 ‘가난한 자들’을 묘사하신다. 이들은 한결같이 사회에서 버림받고 천대받고 잊혀진 상태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만을 기다리는 가련한 자들이다. 넓게 보아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백안시되던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소홀히 취급받던 여성들과 어린아이들고 ‘가난한 자들’의 범주에 속한다 : 정태현, 앞의 책, 55-56면.
    이사야서 특히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자가 소개되는 61,1-2의 예언의 약속에 응답하면서, 처음의 세 행복선언은 예수의 가르침 중에 핵심을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을 그 사자와 동일시하면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라고 선포한다.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종언을 고하면서 하느님의 정의와 해방이 펼쳐지는 것이다. Dupont, Les pauvres etla pauvrete’ , 48-50 참조, S. Galilea, 앞의 책, 64-65면에서 재인용.

    2. 해 방
    예수께서 나자렛 회장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신 후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고 말씀하셨다. ‘성서의 말씀’이란온갖 종류의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을 심령화시켜서 알아듣거나 한없이 연기만 되는 어떤 미래나 멀고 먼 어떤 저 세상을 미끼로하여 이 가난한 삶들을 달래려 했다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확실히 잘못일 것이다. 예수에게는 구원의 때가 지금 벌써 나타나고 또한 실현되고 있으며 하나의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행복선언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에서 현재형 동사는 그들이 지금 하늘 나라를 체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의 뜻한다. 이 나라는 예수의 복음선포를 통해 현존하고 세말에 완전히 성취되는(4,7) 천상적 구원을 뜻한다(25,34). 하느님은 예수의 행복선언 안에서 이러한 천상 축복을 성취하기 시작하신다. 박영식, ꡔ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하여ꡕ, 바오로 딸, 1995, 27-28면.
    또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예수가 이룬 표징들이 가리켜 주고 있다. 이러한 표징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영육을 포괄하는 전인간의 구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Walter Kasper, 앞의 책, 144면 참조.

    (1) 병으로부터의 해방
    질병은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왔고(창세 3,16-19 참조) 불충실한 하느님의 백성이 당할 저주의 주요한 형태 중 하나로 여겼다(신명 28,21-22.27-29.35). 예언자들은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마련하실 새 세상에는 병이 없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때에는 불구자도(이사 35,5-6) 눈물도 고통도(이사 25,8; 65,19) 없을 것이다. 고통받는 의인이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게 되면,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치유될 것이다(이사 53,4-5) X. 레옹-뒤푸르,, “병, 치유”항, 앞의 책, 204-206면 참조,
    .
    이제 예수께서 고통에 시달리는 군중 한가운데를 지나가시며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들을 치유하신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자, 사람들이 앓는 이들과 귀신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다. 그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갖가지 질병으로 앓고 있는 많은 이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그런데 그분은 귀신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마르 1,32-34).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이사 53,4; 마태 8,17 참조).
    이러한 육체의 치유도 그 자체가 해방적인 것이 된다. 하느님과 친교가 회복되는 곳, 하느님의 다스림심이 세워지는 곳에 ‘사물들은 다시 제대로’되고 세상은 다시 온전하게 된다. 이 구원에 대해서 기적들은 이렇게 말해준다. 구원이란 어떤 심령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인간 전체에 관련되며 따라서 그의 육체성이라는 차원에 있어서도 그에게 직접 관련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지금 벌써 나타나기 시작한 구원의 표징들이다. 예수의 기적들은 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지는 육체적이며 현세적인 차원을 표현한다 : Walter Kasper, 앞의 책, 162면.
    그러나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예수의 구제는 단순한 육체적인 치유를 초월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고통받는 이들이 사회 속에 통합되고 소외에서 벗어나도록 추진하신다. 그분의 치유 대상은 전형적으로 나병환자, 소경, 귀머거리,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예수의 말씀(루가 7,22)에서 열거된 병들을 자세히 살혀보면 또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의 병을 지닌 사람들은 그 병으로 인해서 외부 세계와의 관계도 단절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단절은 단지 신체적인 이유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질병들은 신체적인 병의 상태를 넘어 정신적인 측면에까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가져온다. 정신적 포로상태와 절름발이 상태, 고립과 자기 중심성을 이 질병들은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고쳐주심으로써 단순한 외적 질병의 치유뿐 아니라, 단절과 자기 중심성이란 내적인 병까지 함께 치유해 주신 것이다 : 홍경완, 앞의 책, 28면, 주52번.
    이 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그분의 치유의 덕을 가장 많이 입는 사회적 범주에 속한다. S. Galilea, 앞의 책, 29면.

    소경은 유다에서나 동방에서나 전통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인 결함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악으로도 간주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치유하실 즈음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요한 9,2). 위의 책, 30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하나가 병든 사람들, 신체 장애자들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나병환자는 더 심하게 사회로부터 소외 받았다. 송기득, ꡔ인간ꡕ, 한국신학연구소, 1989, 272면.
    그래서 그들은 집으로부터, 동네로부터 쫓겨났으며 사회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차단은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사람 사이에 섞일 수 없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서도 제외되고 죄인으로써 취급을 받았다. 안병무, ꡔ갈릴래아의 예수ꡕ, 한국신학연구소, 1985, 157면.
    그런데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한 후 그들을 자기가 소속한 집 또는 마을로 가라고 명령한다. 집을 떠나 헤매는 병자에게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욕구 이상 간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예수는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이들을 각자가 속했던 데로 복귀시킴으로써 그들이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주심으로써 그들을 육체적 불행에서 해방하셨을 뿐 아니라 사회적 굴레에서도 해방시켜주심으로써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구제였다! 예수의 치유는 모두가 불완전하였다. 그들이 수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질병 이외의 다른 속박에 묶여 있어야 했고 또한 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던 만큼 육체적인 치유로서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분의 치유는 총체적인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역시 불완전했다. 예수께서 베짜다 못가의 반신불수 병자를 낫게하신 후 하신 말씀에서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보시오, 당신은 건강한 (몸이) 되었소, 더는 죄를 짓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더욱 형편없게 될지도 모릅니다.”(요한 5,14)
    모든 고통들을 당신 스스로 제거하고 당대의 문제되는 사회구조 전체를 해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기적과 치유가 지향하는 일차적 목표도 아니었다. S. Galilea, 앞의 책, 30-31 참조.

    예수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소”라고 말씀하셨다. 병자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와 고통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고통은 죄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병자에게도 회개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는 언제나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나자렛에서 치유의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적을 무리하게 보여준다면 기적의 본래의 의미는 상실될 것이다. 중풍병자를 데려왔을 때, 예수는 그의 병에는 전혀 유의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분이 눈여겨보신 것은 그의 믿음이었다. 그분은 병자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병의 치유는 모든 일들 중 가장 마지막에 이루시는 일이었다(마르 2,1-12 참조). 악령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도(마르 9,23-25), 그리고 백인대장에게도(마태 8,8-10) 믿음을 보시고 치유가 이루어졌다. 치유된 예리고의 맹인에게는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마르 10,46-52참조) 라고 말씀하셨다. Walter Kasper는 신앙과 기적 사이의 연관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기적은 신앙으로 인도해 주게끔 이루어지며,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보고 그것을 하느님의 업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신앙을 전제한다. 기적은 신앙을 위한 표징이다 : Walter Kasper, 앞의 책, 166-167면 참조.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육체적 불행에서 구제하시는 과정에서(루가 5,17 이하)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이 죄를 구제하는 해방자로서 부여받은 신임장을 제시하신다. S. Galilea, 앞의 책, 30-31 참조.

    (2) 죄로부터의 해방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예수의 주목을 끌었던 계층은 당시의 종교적․사회적 조건들에 의해서 구원의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세리와 창녀들이엇다.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과부들, 불의의 희생물이 된 가난한 자들은 그래도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하느님의 돌보심에 맡겨질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러나 죄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창녀와 세리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변호를 받지 못한 채 유대교의 경건주의자들의 증오와 배척과 멸시를 감수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바로 이들이 예수의 일차적인 선교 대상인 가난한 사람들의 맨앞열에 서 있는 사람들로서 그분의 특별한 주의를 끌었다. 정태현, 앞의 책, 55-56면.
    예수께서는 죄인들, 곧 잃어버린 אטח는 표지 등을 “잃어버린”이라는 의미가 있다 : Kittel, Gerhard & Gerhard Friedrick, eds, ꡔ킷텔 단권 신약원어 신학사전ꡕ(Theological Dictinary of the New Testment), 요단출판사 번역위원회 옮김, 요단출판사, 1986, 53면.
    자 등에 대한 해방의 소식을 ‘죄에서의 해방’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이외에 여러 가지 구체적이고 은유적인 표상들과 비유들을 통하여 선포하셨다. 그 중에서 죄인과 하느님, 죄와 해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 세 가지 비유가 루가 15장에 소개되어 있다. 정태현, 앞의 책, 62-63면 참조.
    길 잃은 양의 비유(루가 15,4-7),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루가 15,8-10)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5,11-32)가 그것이다. 이 세가지 비유는 죄인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켰는지를 알 수 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 더 기뻐하는”(루가 15,7-10) 예수께서 죄인들을 가까이하고 그들의 친구가 된 것에대하여 비판하는 이들에게 “의사는 건강한 삶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잃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부르러 왔습니다.”(마르 2,17; 루가 5,31-3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에게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안히 가시오.”하고 말씀하셨다.(루가 7,36-50) 믿음이 실제로 이 여인의 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수의 설교를 듣고 죄많은 여인은 깊은 감동과 희망 속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값비싼 향액을 부어드리는 여인의 행위는 예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명백한 표시이다. 예수께서는 기쁜 소식에 대한 여인의 믿음과 믿음의 외적인 표시로 보여진 일련의 행위들이 여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음을 선언한다. 하느님께서 죄인을 구원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소식을 여인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온몸으로 했으니 구원이 그녀에게 틀림없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위의 책, 66면 참조.

    이렇게 그분은 그들을 신앙과 회개에로 초대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이른바 ‘내적 해방’-그들의 죄와 이기심과 영적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하셨다. 예수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것이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실현하는 것이다. S. Galilea, 앞의 책, 30-31 참조.

    우리가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엄청난 죄과를 하느님이 우리에게 탕감해 준다면, 우리로서도 우리 이웃사람들에게 그들의 적은 죄값을 탕감해 줄 수 있는 용의를 갖추어야 한다(마태 18,23-34). 하느님의 용서는 한없이 용서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준다(루가 17,3 이하) 언제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용의는 또한 하느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는 조건(마르 11,25; 마태 6,12)이며 그 척도(마르 4,24; 마태 7,2; 루가 6,38)이다. 구원은 자비로운 사람들에게 약속된다(마태 5,7). 일체를 능가하고 극복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작용력을 발휘하여, 우리로 하여금 동료 인간들을 받아들이고 편견과 사회적 편견과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며, 사람들 사이에 새롭고도 자유로운 소통을 트고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며 동고동락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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