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예수가 30년의 숨은 생활을 마치고 공적 활동을 개시하면서 외친 것은 회개하여라.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꼬 1,15)는 것이다.
마르꼬 복음 사가는 예수의 설교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하여 보고 하고있는 셈이
다.
우리가 황금율이라는 산상설교 중 진복팔단을 보면 8가지 행복 중에 첫째 조항과
마지막 조항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물론 2번째까지의 모든 내용이 하느
님 나라의 내용이지만 첫째 조항과 여덟번째 조항에서는 명시적으로 하느님 나라
의 내용이지만 첫째 조항과 여덟번째 조항에서는 명시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언
급하고 있다.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옳
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태5,10)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바꾸어 부른다.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앟으려는 관습에 기인한다. 마태오의
하늘 나라는 마르꼬나 루까의 하느님 나라와 동의어이다.
** 문제점**
요한이 선포한 것도 하느님 나라였는데 거기에다 예수님께서는 세례까지 받으셨
으니 예수님이 요한의 추종자가 아니었느냐?라는 질문도 나올 수 있다.
예수님은 요한을 문제시하지 않는다.여인중에 난 사람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
고 말하니…,
예수의 세례사건을 기록한 이유는 제자들이 쓸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 이것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작아져야 하고 당신은 커져야 합니다.
세례를 받고 물위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사랑하는 ….
이런 표헌은 예수님이 요한한테 세례받은 부담스런 상황르 어떻게 역전시킬수 있
을까하는데서 삽입된 것으로 본다.즉 이 표현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요한 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심지어는 요한이 태중에서 예순님을 알아보고
기뻐 뛰놀았다고 말함
즉 부활 이후 신앙이 예수님을 참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이런 사상이 나옴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처지:
대부분은 하루 종일 장터에 서성이며 일꾼으로 써줄 포도밭 주인을 기다리는 하
루 품싹꾼들처럼 하루 끼니를 거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와 요한의 하느님 나라의 차이점
당시 요한이 많은 사람들로 부터 추종 받은 이유는 바로 세례다.세례는 그 당
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그랬는
데 이런 율법을 지킨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야 가능했다. 하루 벌
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
은 죄인이며 이렇게 의인과 죄인이 구별된 상황에서 구원 받을 사람들은 결정되
어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는데 그것을 세례를 받으면 구원이 가능하다
것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사람이 몰려들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
서 세례운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을 따른는 이들에게 입문 예식으로 세
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근본 차이점은 요한의 하느님 나라는 광야에서 고행과 속죄의 참회를 요
구하고 보복적 성격을 띤 하느님의 나라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심판으로서 이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행업,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선물로 이해되
었다. 하느님은 자녀에게 기꺼이 모든 것을 주는 아버지로 소개된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심판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사랑이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백성들에 대한 태도는
종교 의식적으로 부정한 사람들과 기꺼이 사귀고(세리,죄인,창녀들..)
안식일 법을 고의로 위반하고
정결례를 폐지한다.
이것은 거의 확실한 사건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악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런데 분명한 것은 계급투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여기서 세리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 소외된 계층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세리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사람들이었지만 사회적으
로는 가난한(소외된)계층이었다.그들을 매판 자본주의의 앞잡이로 봄
그리고 안식일 법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계명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기에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와 대립되었던 것이다.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기준을
두었다. 율법학자들은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지만 예수님이 말하는 하느님은 의인
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비를…….
예수님은 세상을 도피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창조물이기에 사람들 가운데 사셨
다.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전부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가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가르치는 방식이 특이했고,구체
적이었고,대중적,서민적,직접적이었고,청중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언급했다는 것
을 잘 알수있다.

우선 예수가 30년의 숨은 생활을 마치고 공적 활동을 개시하면서 외친 것은 회개하여라.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꼬 1,15)는 것이다.
마르꼬 복음 사가는 예수의 설교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하여 보고 하고있는 셈이
다.
우리가 황금율이라는 산상설교 중 진복팔단을 보면 8가지 행복 중에 첫째 조항과
마지막 조항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물론 2번째까지의 모든 내용이 하느
님 나라의 내용이지만 첫째 조항과 여덟번째 조항에서는 명시적으로 하느님 나라
의 내용이지만 첫째 조항과 여덟번째 조항에서는 명시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언
급하고 있다.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옳
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태5,10)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바꾸어 부른다.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앟으려는 관습에 기인한다. 마태오의
하늘 나라는 마르꼬나 루까의 하느님 나라와 동의어이다.
** 문제점**
요한이 선포한 것도 하느님 나라였는데 거기에다 예수님께서는 세례까지 받으셨
으니 예수님이 요한의 추종자가 아니었느냐?라는 질문도 나올 수 있다.
예수님은 요한을 문제시하지 않는다.여인중에 난 사람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
고 말하니…,
예수의 세례사건을 기록한 이유는 제자들이 쓸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 이것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작아져야 하고 당신은 커져야 합니다.
세례를 받고 물위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사랑하는 ….
이런 표헌은 예수님이 요한한테 세례받은 부담스런 상황르 어떻게 역전시킬수 있
을까하는데서 삽입된 것으로 본다.즉 이 표현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요한 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심지어는 요한이 태중에서 예순님을 알아보고
기뻐 뛰놀았다고 말함
즉 부활 이후 신앙이 예수님을 참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이런 사상이 나옴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처지:
대부분은 하루 종일 장터에 서성이며 일꾼으로 써줄 포도밭 주인을 기다리는 하
루 품싹꾼들처럼 하루 끼니를 거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와 요한의 하느님 나라의 차이점
당시 요한이 많은 사람들로 부터 추종 받은 이유는 바로 세례다.세례는 그 당
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그랬는
데 이런 율법을 지킨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야 가능했다. 하루 벌
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
은 죄인이며 이렇게 의인과 죄인이 구별된 상황에서 구원 받을 사람들은 결정되
어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는데 그것을 세례를 받으면 구원이 가능하다
것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사람이 몰려들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
서 세례운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을 따른는 이들에게 입문 예식으로 세
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근본 차이점은 요한의 하느님 나라는 광야에서 고행과 속죄의 참회를 요
구하고 보복적 성격을 띤 하느님의 나라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심판으로서 이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행업,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선물로 이해되
었다. 하느님은 자녀에게 기꺼이 모든 것을 주는 아버지로 소개된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심판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사랑이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백성들에 대한 태도는
종교 의식적으로 부정한 사람들과 기꺼이 사귀고(세리,죄인,창녀들..)
안식일 법을 고의로 위반하고
정결례를 폐지한다.
이것은 거의 확실한 사건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악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런데 분명한 것은 계급투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여기서 세리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 소외된 계층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세리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사람들이었지만 사회적으
로는 가난한(소외된)계층이었다.그들을 매판 자본주의의 앞잡이로 봄
그리고 안식일 법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계명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기에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와 대립되었던 것이다.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기준을
두었다. 율법학자들은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지만 예수님이 말하는 하느님은 의인
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비를…….
예수님은 세상을 도피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창조물이기에 사람들 가운데 사셨
다.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전부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가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가르치는 방식이 특이했고,구체
적이었고,대중적,서민적,직접적이었고,청중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언급했다는 것
을 잘 알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