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말

1. 들어가는 말
神學(Theologia)이란 말마디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신에 대한 학문(thos-logos)이란 뜻이다. 그런데 신에 대한 논의는 세상과 인간을 배제하고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신,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항상 세상과 인간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셨다(출애급 사건). 또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신론의 출현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멸시한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인간 개개인도 대부분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에서 신을 찾거나 거부한다. 이런 점을 살펴본다면 신에 대한 말은 구조적으로 인간의 현실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얘기하자면 현재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현대 세계는 ‘세속화’(Secularization)와 ‘해방‘(emancipation)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서구의 근대의 역사과정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전제한다. 17,18세기에 시작된 근대의 역사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쥐게되었다. 온갖 중요한 인간 생활의 영역이 교회의 영향권에서 물러나 인간의 직접 책임과 지배 아래 놓였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은 그야말로 “세속화” 되었다. “맹목적으로 신봉되던 권위와 부당한 지배에 대항한 인간의 자결(自決)”이란 의미로서의 “해방”은 “자연계의 강요와 사회적 강압, 그리고 아직 자기 정체를 발견하지 못한 인간 자신의 내적 강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서구 근대의 배경을 이루는 사상적 특징을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앙에 대해서 이성의 우위, 신학에 대해서 (인간에게로 전향한) 철학의 우위, 은총에 대한 자연(자연과학, 자연철학, 자연종교)의 우위, 교회에 대해 점점 더 세속화된 세상의 우위”를, 한마디로 그리스도교에 대항한 세속적 인본주의를 우위에 두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종교를 배제한 근대의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복리와 행복을 기치로 세우고 기술의 혁신과 정치-사회적 혁명이라는 두 가지 대표적인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세속적 인본주의가 인간의 복리를 위해서 노력한 결과는 지대하다. 기술 혁신으로 인해서 기아와 각종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많은 불편을 덜어주었다. 또한 정치-사회적 혁명으로 인해서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 노동운동에 대한 의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장미빛은 아니었다. 세속적 인본주의가 인간을 위해 기여한 것이 많았지만 폐해도 적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 그 양면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주로 서방세계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는데 “발전 이데올로기”, 즉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이상적인 인간 사회를 달성한다는 신념은 발전의 긍정적, 부정적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 오늘날 더 이상 흔들림이 없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가 없다. 발전이념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결과를 수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기술문명에 대한 불안은 일반화된 상태이다. 참조: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31.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전과 근대적 ‘세력들’, 즉 한계와 책임을 외면한 막강한 능력의 과학, 인간을 지배하고 종속시키는 막대한 기술체계,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자연을 파괴하는 산업, 사회 정의를 소홀히 여기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의해서 해방이 아니라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근대의 세속적 인본주의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사회-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도 무너졌다. 사회-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인 조건을 퇴치하고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맑스주의가 상당히 큰 인본주의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선포한 사회의 인간화는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실현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는 폭력과 억압 속에서 비인간화를 낳았는데, 이로써 무력에 의한 정치-사회적 혁명이 저절로 인간적인 사회를 이룩한다는 이념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참조: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32-37.
이렇게 볼 때 인간화를 내걸고 그리스도교에 도전하던 세속적 인본주의 스스로가 다시 인간의 이름으로 도전을 받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와같이 유사(類似) 종교의 역할을 하던 근대의 중요한 이념들이 흔들리게 되면서 사상적으로 방향 상실의 상황이 나타났지만, 다른 한편에서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종교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근대 후기 이래로 포이어바흐(L.Feuerbach), 맑스(K.Marx), 프로이드(S.Freud)는 종교가 결국은 소멸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지만, 포이어바흐는 신이 인간의 투사된, 실체화된 영상이라는 투사설(投射說, Projektionstheorie)을 내세우면서 무신론적인 인본주의를 통한 종교의 폐지를 예고하였다; 맑스는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통해서 기득권 유지에 이바지하는 위안으로써의 종교가 소멸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프로이드는 종교가 환상이고 신경증의 발로이며 심리적인 미숙함이라고 간주하면서 무신론적 과학을 통해서 병리적 현상으로써의 종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참조: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283-290, 324-339, 384-400).
세속적 인본주의가 위기에 처한 현재의 상황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전세계적으로 종교에 대한 새로운 개방성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New Age’) 또한 그 동안 신과 종교의 문제를 도외시하였던 다양한 과학분야와 이념체계 안에서 삶과 고통, 죽음 그리고 가치와 기준에 대한 질문, 그와 필연적으로 결부되는 윤리와 종교에 대한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는 현상들을 발견된다.
맑스-레닌주의는 60-70년대에 인간 삶의 의미와 죄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와 함께 종교의 잠재적 의미가 새삼 노출되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에서는 그 자체의 방법론을 절대시하는 주장을 상대화하기 시작했고, 차츰 책임성있는 과학-기술 행동에 대한 의식이 자리하면서 윤리에 대한 문제, 또 그에 내포된 의미, 가치, 종교의 문제가 제기되었다(핵문제, 생명과학, 복제인간). 심층심리학은 인간 정신의 자기발견과 치유를 위한 종교의 적극적인 의의를 발견하였다. 근래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종교심의 쇠퇴와 현대의 전형적인 노이로제인 방향상실, 규범상실, 의미상실의 증가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참조: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439-447.

이렇게 과학과 기술, 산업이라는 근대의 대표적인 세력들이 더 이상 절대시되지 않고, 근대사상에서는 도외시되었던 종교에 대한 새로운 수용적 자세가 형성되는 새로운 상황(‘post-modern’)을 직시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진정한 인간화를 위해서 진정한 초월자와의 연관이 요구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실상 진정한 초월자와의 연결없이 진정한 인간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최근세사에서 뚜렷히 드러났다: 독일의 나치정권과 같이 ‘민족’과 ‘인종’을, 공산주의와 같이 ‘인민’, ‘노동계급’, ‘당’이라는 유한한 세계내적 요소들을 절대화하는 경우에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전체주의적으로 지배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초월자의 존재, 즉 종교의 역할을 재고할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된다고 하겠다.
종교를 거부하고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려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른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해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느님 신앙을 배척한 세속적 인본주의의 실패는 곧바로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공산주의의 몰락이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하느님 신앙이 인간의 행복과 복리를 저해하지 않고 오히려 보탬이 된다는 것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어야만 현대인들은 그리스도교에 마음을 개방할 것이다. 더구나 세속적 인본주의의 출현은 그리스도교가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한 잘못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책무는 더욱 무겁다고 하겠다.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핵심 신앙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분명 현대 세계에 어떤 대안(代案)으로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교에서 선포하는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보증이고 근거라고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이상의 고찰은 서구의 사상 변천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는 사상적으로 서구와는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서 서유럽에서처럼 무신론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근래에 와서 종교의 성장속도가 둔화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종교 인구는 늘어가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명백하게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할지 몰라도 적어도 무신론이 사회 전반에 걸친 현상이 된 적은 없다고 하겠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할 자세를 어느 정도는 다 갖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무신론이라기 보다는 기복신앙과 이기적 신앙 태도라고 하겠다. 종교의 이름으로 오직 자신과 자신의 일족의 재산 증식과 건강함, 편안함만을 찾으려는 이기적인 태도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당장의 필요 때문에 종교를 찾고, 그 필요를 충족해 줄 수 있다면 이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바꾸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유럽의 무신론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듯이 잘못된 신앙 태도와 무신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잘못된 신앙의 다음 단계는 무신론이다. 왜냐하면 무신론의 형성과정에서 보듯이 종교의 이름으로 개인적, 사회적으로 잘못이 거듭되면 아예 하느님 신앙과 종교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의 사상적 흐름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 안에 뿌리 깊이 자리하는 기복신앙의 무조건적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다. 거듭되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 거의 불가피하게 생겨난 것이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은 신앙을 갖기 위한 출발점은 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한 발자욱 더 나아가서 타인도 생각하면서 자신을 쪼개 줄 수 있는 성숙한 신앙 태도로 나가느냐에 있다고 하겠다. 이런 성숙한 신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하느님 신앙이 요구된다. 올바른 하느님 신앙은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전수된다. 그런데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실천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선포하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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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머리말: 하느님을 거론 하는데 있어서의 오늘의 상황

    본래 신학이란 Theos Logos, 즉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다. 오늘날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가 가능 신,삼위일론
    한지 의문시된다. 우리는 자주 심한 고통을 체험할 때,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시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는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의 존재’를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본다.
    마틴 부버의 「유대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어느 해박한 계몽주의자가 베르디체에베라는 랍비의 명성
    을 듣고 그를 찿아갔다. 평소와 같이 논쟁을 벌여 자기 신앙이 옳
    다고 내세울 그의 뒤진 논거를 가차없이 갈파할 속셈이었다. 사제
    의 거실에 들어서보니 사제는 깊이 사색에 잠겨 책을 들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찿아 온 손님을 본 척도 않고서, 한참을 그
    러다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더니 방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힐끗 쳐
    다 보면서 ‘그렇지만 혹시 옳을 지도 모르지’하였다. 찿아간 학자
    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어 보았으나 별 수 없었다. 무릎이 와들와들
    떨리는 것이었다. 사제의 모습이 그토록 두렵게 보이고 그의 말 한마
    디가 그렇게 무섭게 들렸다. 그러자 레위 이사악 랍비는 그를 정면
    으로 대하고 차분한 말로, ‘이사람. 자네와 함께 말씨름을 한 율
    법대가들의 말도 자네에게는 모두 허사였네. 자네는 헤어질 때마다
    그들의 말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나. 자네에게는 그들도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여기 있소> 하고 대령할 수 없었고, 나도 그렇게 할
    재간은 없네, 그렇더라도 좀 더 생각를 해보게. 이 사람아, 혹시
    옳을 지도 모르니까‘하였다. 계몽주의자는 맞서보려고 속으로 안
    간힘을 다해 보았으나 매번 <혹시>라는 무서운 말에 부딪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스도 신앙」이라는 책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요셉 랏씽어 추기경은 신자나 무신론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자기에게 진실을 감추지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제 나름대로 <의혹>과 더불어 신앙을 지니고, <의혹>과 더불어 불신을 지니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신자에게는 의혹을 무릎쓰고 믿음이 있으며, 불신자에게는 의혹을 통해서 의혹이라는 형태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좀더 쉽게 풀이하자면, 우리네 처럼 신자들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혹시 계시지 않으면 어쩌나’, ‘혹시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 마련이고, 아무리 무신론자들이라도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장담을 할지라도 ‘혹시 하느님은 계시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각에 따라 하느님은 존재하기도 하고, 부재하기도 한 것인가? 그러나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 철학자가 있다. Gianvattista Vico(1688-1744)라는 이태리 철학자는 [Verum est ens]라는 스콜라 신학의 공식에 맞서서 [Verum quia factum]이라는 공식을 내 세웠다. 다시말해 <존재가 진리다>라는 것을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라고 바꾼 것이다. 이런 사상은 인문주의자들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궁극적인 신비에 관해 회의를 느끼고, 인간 자신이 만든 것들,사상, 문학, 역사…등만이 인간의 진리탐구에 적합한 대상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관심과 촛점은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옮겨졌다. 현대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Verum est faciendum] (진리란 인간이 이제부터 만들어 내야 할 것)이라는 정식의 생활관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태를 인도의 철학자요, 정치가인 사베팔리 라다 크리슈난(S. Radhakrishnan 1888-1969)은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를 들었다. 체험이나 감각은 주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역시 그 기준과 정식이 다를 수 있다. 일찌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용된 것은 수용한 것에 따라 담긴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학문은 객관성을 요구한다. 신학역시 하나의 학문으로서 여러가지 기준을 내세워 객관화를 시도한다. 성서, 교부들의 가르침, 교회의 선언, 신학자들의 의견등을 제시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세계에 발맞추어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하여 제시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느님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믿었던 순진성은 오늘날 상실되어 버렸다. 이제 과거처럼 교회의 권위에 승복하지 않을 뿐더러, 전통보다는 진보를 택하고 있다. 오늘의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이름짓고 있는 바, 현실을 제대로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오늘의 상황를 키에르케골의 「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이란 이야기로 비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덴마크를 순회하던 어느 곡마단이 있었다. 어느날 공연중에 화재가 발생했다. 단장을 관중앞에 나설 차례가 되어 준비를 다끝낸 광대를 이웃마을에 지원을 청하러 보냈다. 추수가 끝난 전답에 불씨가 옮아 번졌다가는 그 마을에도 불이 번질 위험이 있었다. 광대는 바빼 그 마을로 뛰어가 마을 사람에게 곡예장의 진화작업을 호소했다. 그러난 마을 사람들은 광대의 이러한 호소를 구경꾼을 끌어들이려는 기발한 수법으로만 생각하고 손뼉을 치며 요절하는 것이었다. 광대에게는 울 일이었지 웃을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이 농담도 계교도 아니라고, 진정이라고 애걸하면 설득할 수록 웃어대기만 했고, 연극 한번 그럴싸하게 잘 한다고 흥겨워 할 뿐이었디. 결국 불길을 번져서 손을 쓸 겨를도 없이 곡예장은 물론 마을까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하느님을 알려 주려는 우리 신앙인들의 처지가 마치 이 광대와 같지 않느냐는 것이다.”목사가 설교한다“는 식으로 뻔한 것으로 전제하는 오늘날의 실정에서 하느님을 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광대야 옷을 벗고 분장을 지우면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예수쟁이」, 「천주학쟁이」라는 분장을 지우고 무신론자들과 같은 입장에 선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여지지도 않는다. 실제로 사신신학, 해방신학, 노동신학, 여성신학 등의 몸부림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심각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
    2000년전 성 금요일 오후의 군중처럼,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살리는구나.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구하여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고 말고”라는 식으로, 이 시대도 우리에게서 징표나 기적을 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으로 이끌게 된 원인은 여러가지다. 우선 종교의 비신화화 작업일 것이다. 이미 창세기는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 태양도, 달도, 별들도 더 이상 신령한 것이 못되며, 단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밝히면서, 고대 희랍이나 로마 신화에서 볼 수있는 신화화한 것들의 껍질을 벗겨냈다. 그럼에도 최근까지 샤마니즘이 이어져 왔다. 해에다가도 빌고, 달에게도 비는 일이 아주 최근까지였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그런일을 하지 않는다. 또 병이 낫도록 기적을 기대한다든지, 여름철 가뭄 때문에 기우제를 드리는 일도 멈추었다. 과거에 알지 못한 신비에 대한 미봉책으로 등장시키던 하느님을, 현대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신비가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를 더 이상 하느님으로 구멍 메꿈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신비로 남지만 언젠가는 인간의 과학과 기술이 밝혀내리라는 희망하에 하느님을 완전히 치워버렸다. 하느님의 자리에 인간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상황을 이끌게 한 주 원인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출현한 무신론이다. 무신론은 후에 좀더 언급할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G.하센 휫틀은 “현대 신학의 위기는 인격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체험이 존재하지 않는데 기인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전통신학이 하느님에 대해서 논할 때 우리의 체험과 상관없이 다루었다는 것이다. 창조자이신 하느님,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 선하신 하느님, 완벽하신 하느님 도대체 그분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과 연관없이 순수 형이상학적 추론으로 증명된 하느님은 비록 존재한다 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으로 해서 개신교 신학은 일찌기 인간의 감정 쪽으로 신학을 전환했다. 하지만 실제로 인식 능력으로서의 이성을 무시할 때 신학은 학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순수 이성의 중재에 의지했던 과거의 스콜라 신학의 전철을 되밟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의 과제는 그만큼 복잡 다단해졌다. 과거 하느님을 논하던 학문으로서의 신론의 신학이 성서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조직신학으로 발전하고 그 갈래가 많아졌다.
    또 하나의 이유는 18세기 계몽주의가 “권위에 복종하기 보다는 그대의 이성을 따르라”는 기치아래 인간이 주관적인 자신의 이성 내지는 자신의 판단에 가치의 지준을 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현대 인간은 ‘전통’이라는 자리에 ‘진보’라는 이념을 내세우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로만 지향한다. 과거의 전통은 자기 발전의 길로 터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의무감만을 준다 여기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신앙의 학문, 신학, 특히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보았다. 본래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는 비가시성의 성격을 지닌데다가, 2000년 이상의 과거지사의 역사적인 거리감이 겹쳐져 있고, 더우기 우리 동양인에겐 교회의 신앙이 발생하고, 정립된 장소가 서구라는 또 한겹의 어려움이 놓여있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은 그야말로 하나의 도약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논할 근거가 있다면,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한계없는 갈망 내재는 희망이다. ‘왜 우주는, 또 인간은 존재하는가?’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봉착할 때 새롭게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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