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순교자들의 선교활동

1. 교회창설 당시의 선교활동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한문 교리서를 이벽이 받아 외딴집에 숨어서 이를 독파한 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라고 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벽의 이같은 사명의식은 곧 초기 한국교회 창설자들의 한결같은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직접 선교에 나섰을 때는 복음화 단계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면서도 천주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일으키는데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주변의 지식 계급층에 교리해설과 한문교리서를 주어서 신앙으로 인도하였고, 한편 한글 교리서와 요약 정리한 한문교리서를 저술하였는데 이벽의 “성교요지”, 정약용의 “주교요지”가 그것입니다. 문자를 깨치지 못한 시민대중을 위해서는 노래로서 교리를 익히도록 4.4조의 노래로 엮은 “천주가사”를 지어 전파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천주교회 초기 교인들은 자율적 학습으로 천주교 신앙에 도달하였고, 교회를 창설하는 이적을 이루었으며, 선교에 헌신하여 한국교회가 최초로 성직자 주문모 신부를 맞은 1785년까지 10년간 어려운 생활 속에서 4천명의 신자를 가진 교회로 발전시켜 놓았습니다.

2. 신유박해 전후의 선교활동
한국교회는 주문모 신부를 모신지 6년 후에 신유박해(1801)로 성직자를 잃었고 목자 없는 양떼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모진 박해를 겪으면서 열정적인 평신도 지도자의 활동으로 교세는 오히려 확장되었습니다.
신자들이 받은 박해는 을사추조 적발사건(1875년), 정미 박해서건(1787년), 신해 진산박해(1791년), 그리고 신유박해(1801년)까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교회 조직은 완전히 소멸되는 상태에 이르렀으나 신자들의 끈질긴 활동으로 천주교는 차츰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5. 한국교회 선교활동의 특징
1. 그리스도 공동체의 사회의식을 토대로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남인 소장파를 중심으로, 학벌로는 실학파와 이익의 학통을 잇는 근기학파였으며, 사회적으로는 권씨, 정씨, 이벽, 이승훈등 인척관계가 얽힌 가학적 배경에 신앙을 받아들여 적자와 서자, 양반과 천민, 남과 여, 빈부의 차별대우를 지양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입각한 새 가치관을 수립하는 사회집단으로 변모확대되었습니다.

2. 지하교회적 활동이었습니다.
유교적 집권세력하에서 천주교는 도전적 체계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하 교회의 활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선교는 생명을 건 혼신적인 용감한 활동이었습니다. 문서로, 노래로, 구두로, 권면과 표양으로 한국교회의 초기는 이렇게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3. 평신도 활동이었습니다.
성직자가 없었던 시기가 더 많았고, 있어도 드러내고 활동하지 못하던 시기가 대부분 이었으므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평신도들 자신이 교회를 지키고 육성하였으며, 신앙을 굳혀가는 교회로 발전시켰습니다.

4. 점조직 활동이었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점조직을 이루고 비밀리에 친지를 찾아가 전교를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철저한 신앙 실천자를 10명 내외로 뽑아 지도자로 활동하도록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이 회원의 신앙생활을 관리하는 한편, 전교의 책임도 맏게 하였으며, 모든 회는 직접 신부와 연결되게 조직하여 비밀이 유지되도록 운영하였습니다.

5. 선교활동은 전국적 활동이었습니다.
시작은 서울이었고, 곧이어 이존창이 내포지방에, 유항검이 전주지방에서 선교활동을하여 신유박해때는 이 두 지방만 하더라도 신자들이 1만에 달했습니다. 심한 박해를 피하여 전국적으로 흩어졌으며, 심산으로 숨어들어간 신자들이 경기도 야산지대, 강원도, 충청북도 심산지역, 충남의 야산지대, 태백산 유곡, 진안의 고원지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심산지대로 퍼져 흩어졌습니다. 이들의 생활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굽고, 산림에 의지하여 살았던 고달픈 생활이었으나,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 안에서 신앙을 격려해주고, 용기를 일깨우고, 신심을 불태워 주었습니다.

6. 진취적 선교활동이었습니다.
한분의 목자도 없이 교회를 창설하여 가까스로 모신 신부님이 순교한 후 북경 교구의 사정으로 사제파견이 어려워지자 지도자 정하상, 유진길은 천주교의 수위권자 교황에게 직접 청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쇄국 조선왕조 밑에서 이러한 외교 청원이 취해졌다는 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용기였습니다. 이런 감탄할 탄원이 북경 교회의 도움과 마카오 주재 교황청 동양경리부의 배려로 교황청과 이어졌고, 1831년 9월 9일에 드디어 새 역사를 맡는 조선교구 설정이라는 결정이 교황청으로부터 내려졌습니다.

6. 박해 후기의 선교활동
1. 조선 교구의 선교사 추세
조선교구 설정으로 인하여 임명된 교구장 부르기에르 주교는 끝내 입국을 못하고, 남만주 땅에서 선종하셨으며, 1835년 초에 모방 나신부의 입국, 1837년 2대 교구장 앵베르 범주교의 입국으로 한국교회느 교회법상 자치권이 성직자들에 의해 정상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39년 세성직자의 순교로 다시 6년간 성직자가 없는 가운데 평신도 지도자들의 활동이 이어졌고, 1845년 부제가 된 김대건 안드레아의 입국, 서품 그리고 3대 교구장의 입국으로 다시 사목체계가 바뀌었습니다.

2. 선교사들의 활동
조선교구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소박한 선교활동을 임기 웅변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생활에서 이들은 제약을 받고 있어 사제를 만나고 싶어하는 수 많은 교우들의 호소에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계속 여행하며 사목해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마침내 1836년부터 1942년 사이에 126명의 선교사가 파견되었으며, 그중 12명은 순교하였습니다. 그간 이 선교사들은 다각도로 한국교회의 선교에 정성을 들였는데 특기할 만한 것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방인사제 양성
1890년 뮈텔 민주교 시대의 교세는 서울, 인천, 원산, 부산등에서는 그 주변 10리 안의 선교활동이 보장되었었고, 1891년에 용산에 대신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2) 신자들의 전례생활
지식층보다는 서민층에 섞여 살면서 기초 교리의 교육과 전례의 의미를 주력하여 교육하였습니다.
3) 회장 중심의 공소 체제 생활
선교사들의 부족으로 정착이 불가능하여 여행하는 사목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공동체에 신자들의 영신생활을 주도해 나갈 책임자를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여 기초 교리교육, 신심생활유지 등을 맡겼습니다.
4) 여성활동의 지위향상
19세기 말에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입국하여 여성들과 어린이 들을 대상으로 교육에 주력하여 여성활동이 활발해지고, 여성의 지위도 향상되었습니다.

7. 선교활동의 문제점
1. 장기간의 박해로 직접적인 선교활동의 자세가 위축되었고, 다른 수도회나 선교회의 초청이 지연되었습니다.

2. 선교사들은 일반 사목에만 치중하고 특수 사목 분야를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즉 서민층이나 불우한 사람들에게 선교사들이 직접 물질적인 선물을 베푸는 식의 사목방법이 위주가 되었고, 교육사업과 같은 특수분야의 활동이 소흘하여 지도자 양성이 없었고, 이것은 공동체 전체의 성장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3. 선교사들이 얀세니즘과 피에티즘(극기, 고행위주의 신앙 생활)의 영향을 받아 신자들의 생활 전체를 엄격하게 통제하여 소극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자세로만 신앙생활을 지도하였습니다.

4. 조선 교회 전체가 오랜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을 받아온 끝에, 신앙생활을 내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짙었으므로 이는 가톨릭 교회가 일반인들의 현실 생활에 적극적인 가치를 제시하거나 큰 매력을 던져주지 못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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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1. 교회창설 당시의 선교활동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한문 교리서를 이벽이 받아 외딴집에 숨어서 이를 독파한 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라고 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벽의 이같은 사명의식은 곧 초기 한국교회 창설자들의 한결같은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직접 선교에 나섰을 때는 복음화 단계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면서도 천주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일으키는데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주변의 지식 계급층에 교리해설과 한문교리서를 주어서 신앙으로 인도하였고, 한편 한글 교리서와 요약 정리한 한문교리서를 저술하였는데 이벽의 “성교요지”, 정약용의 “주교요지”가 그것입니다. 문자를 깨치지 못한 시민대중을 위해서는 노래로서 교리를 익히도록 4.4조의 노래로 엮은 “천주가사”를 지어 전파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천주교회 초기 교인들은 자율적 학습으로 천주교 신앙에 도달하였고, 교회를 창설하는 이적을 이루었으며, 선교에 헌신하여 한국교회가 최초로 성직자 주문모 신부를 맞은 1785년까지 10년간 어려운 생활 속에서 4천명의 신자를 가진 교회로 발전시켜 놓았습니다.

    2. 신유박해 전후의 선교활동
    한국교회는 주문모 신부를 모신지 6년 후에 신유박해(1801)로 성직자를 잃었고 목자 없는 양떼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모진 박해를 겪으면서 열정적인 평신도 지도자의 활동으로 교세는 오히려 확장되었습니다.
    신자들이 받은 박해는 을사추조 적발사건(1875년), 정미 박해서건(1787년), 신해 진산박해(1791년), 그리고 신유박해(1801년)까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교회 조직은 완전히 소멸되는 상태에 이르렀으나 신자들의 끈질긴 활동으로 천주교는 차츰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5. 한국교회 선교활동의 특징
    1. 그리스도 공동체의 사회의식을 토대로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남인 소장파를 중심으로, 학벌로는 실학파와 이익의 학통을 잇는 근기학파였으며, 사회적으로는 권씨, 정씨, 이벽, 이승훈등 인척관계가 얽힌 가학적 배경에 신앙을 받아들여 적자와 서자, 양반과 천민, 남과 여, 빈부의 차별대우를 지양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입각한 새 가치관을 수립하는 사회집단으로 변모확대되었습니다.

    2. 지하교회적 활동이었습니다.
    유교적 집권세력하에서 천주교는 도전적 체계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하 교회의 활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선교는 생명을 건 혼신적인 용감한 활동이었습니다. 문서로, 노래로, 구두로, 권면과 표양으로 한국교회의 초기는 이렇게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3. 평신도 활동이었습니다.
    성직자가 없었던 시기가 더 많았고, 있어도 드러내고 활동하지 못하던 시기가 대부분 이었으므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평신도들 자신이 교회를 지키고 육성하였으며, 신앙을 굳혀가는 교회로 발전시켰습니다.

    4. 점조직 활동이었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점조직을 이루고 비밀리에 친지를 찾아가 전교를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철저한 신앙 실천자를 10명 내외로 뽑아 지도자로 활동하도록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이 회원의 신앙생활을 관리하는 한편, 전교의 책임도 맏게 하였으며, 모든 회는 직접 신부와 연결되게 조직하여 비밀이 유지되도록 운영하였습니다.

    5. 선교활동은 전국적 활동이었습니다.
    시작은 서울이었고, 곧이어 이존창이 내포지방에, 유항검이 전주지방에서 선교활동을하여 신유박해때는 이 두 지방만 하더라도 신자들이 1만에 달했습니다. 심한 박해를 피하여 전국적으로 흩어졌으며, 심산으로 숨어들어간 신자들이 경기도 야산지대, 강원도, 충청북도 심산지역, 충남의 야산지대, 태백산 유곡, 진안의 고원지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심산지대로 퍼져 흩어졌습니다. 이들의 생활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굽고, 산림에 의지하여 살았던 고달픈 생활이었으나,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 안에서 신앙을 격려해주고, 용기를 일깨우고, 신심을 불태워 주었습니다.

    6. 진취적 선교활동이었습니다.
    한분의 목자도 없이 교회를 창설하여 가까스로 모신 신부님이 순교한 후 북경 교구의 사정으로 사제파견이 어려워지자 지도자 정하상, 유진길은 천주교의 수위권자 교황에게 직접 청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쇄국 조선왕조 밑에서 이러한 외교 청원이 취해졌다는 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용기였습니다. 이런 감탄할 탄원이 북경 교회의 도움과 마카오 주재 교황청 동양경리부의 배려로 교황청과 이어졌고, 1831년 9월 9일에 드디어 새 역사를 맡는 조선교구 설정이라는 결정이 교황청으로부터 내려졌습니다.

    6. 박해 후기의 선교활동
    1. 조선 교구의 선교사 추세
    조선교구 설정으로 인하여 임명된 교구장 부르기에르 주교는 끝내 입국을 못하고, 남만주 땅에서 선종하셨으며, 1835년 초에 모방 나신부의 입국, 1837년 2대 교구장 앵베르 범주교의 입국으로 한국교회느 교회법상 자치권이 성직자들에 의해 정상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39년 세성직자의 순교로 다시 6년간 성직자가 없는 가운데 평신도 지도자들의 활동이 이어졌고, 1845년 부제가 된 김대건 안드레아의 입국, 서품 그리고 3대 교구장의 입국으로 다시 사목체계가 바뀌었습니다.

    2. 선교사들의 활동
    조선교구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소박한 선교활동을 임기 웅변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생활에서 이들은 제약을 받고 있어 사제를 만나고 싶어하는 수 많은 교우들의 호소에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계속 여행하며 사목해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마침내 1836년부터 1942년 사이에 126명의 선교사가 파견되었으며, 그중 12명은 순교하였습니다. 그간 이 선교사들은 다각도로 한국교회의 선교에 정성을 들였는데 특기할 만한 것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방인사제 양성
    1890년 뮈텔 민주교 시대의 교세는 서울, 인천, 원산, 부산등에서는 그 주변 10리 안의 선교활동이 보장되었었고, 1891년에 용산에 대신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2) 신자들의 전례생활
    지식층보다는 서민층에 섞여 살면서 기초 교리의 교육과 전례의 의미를 주력하여 교육하였습니다.
    3) 회장 중심의 공소 체제 생활
    선교사들의 부족으로 정착이 불가능하여 여행하는 사목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공동체에 신자들의 영신생활을 주도해 나갈 책임자를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여 기초 교리교육, 신심생활유지 등을 맡겼습니다.
    4) 여성활동의 지위향상
    19세기 말에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입국하여 여성들과 어린이 들을 대상으로 교육에 주력하여 여성활동이 활발해지고, 여성의 지위도 향상되었습니다.

    7. 선교활동의 문제점
    1. 장기간의 박해로 직접적인 선교활동의 자세가 위축되었고, 다른 수도회나 선교회의 초청이 지연되었습니다.

    2. 선교사들은 일반 사목에만 치중하고 특수 사목 분야를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즉 서민층이나 불우한 사람들에게 선교사들이 직접 물질적인 선물을 베푸는 식의 사목방법이 위주가 되었고, 교육사업과 같은 특수분야의 활동이 소흘하여 지도자 양성이 없었고, 이것은 공동체 전체의 성장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3. 선교사들이 얀세니즘과 피에티즘(극기, 고행위주의 신앙 생활)의 영향을 받아 신자들의 생활 전체를 엄격하게 통제하여 소극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자세로만 신앙생활을 지도하였습니다.

    4. 조선 교회 전체가 오랜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을 받아온 끝에, 신앙생활을 내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짙었으므로 이는 가톨릭 교회가 일반인들의 현실 생활에 적극적인 가치를 제시하거나 큰 매력을 던져주지 못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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