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성서적 근거(1)

 

2.  성서적  근거




전통적으로 성체성사의 기원은 예수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거행하셨던 제자들과의 최후만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최후만찬은 예수 생애 동안의 있었던 크고 작은 수많은 식사공동체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상 식사공동체는 예수의 복음 선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예수의 식사공동체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의 식사공동체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2.1.    구약성서에서의 식사공동체


대다수의 문화권에서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양식을 섭취하는 식사 중에 그 양식을 주신 분, 즉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스라엘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가정에서 혹은 순례할 때에 천막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공동의 식사는,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빵을 쪼개면서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써 식사를 시작하고 함께 먹고 마신 후에 감사기도로 맺었다. 


이스라엘에서 종교축제일이나 가정 축제일에 흔히 거행하던 식사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1) 먼저 손을 씻고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포도주를 마시는 전식(前食)이 있고, 그 다음에 가장이나 주례가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후에 빵을 나누어 모든 참석자들이 다른 음식과 함께 먹는 본식(本食), 마지막으로 다시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포도주를 마시는 후식(後食)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식으로 들어갈 때 가장이나 주빈이 양손에 큰 빵덩어리를 들고 하느님께 다음과 같은 찬양기도를 드렸다. “우리 하느님이시요 세상의 임금님이시며 땅에서 빵을 생산하시는 주님, 찬양받으소서”(바빌론 탈뭇 브라콧 35a). 


종교 축제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마다 거행된 파스카 만찬이다. 이 만찬에서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야훼의 구원업적을 “기억”(zikkaron)하고 “찬양”(berakah)한다. 파스카 축제는 이미 출애급 이전에 유목민들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기 전에 거행하던 봄의 축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근동지역의 유목민들은 봄이 되면 겨우내 머물던 집을 떠나 다시 천막을 치며 유목생활을 시작하는데, 그 첫날 밤에 새끼양이나 어미양을 잡아 그 피를 천막의 말뚝에 뿌리든지 천막의 문지방이나 문설주에 바르던 관습을 지켰다. 이 의식은 그들의 집과 가축을 위협하는 악령을 쫒고, 그들의 신이 새로운 유목 여정을 돌보셔서 가축과 소출을 지켜 주시길 기원하며, 가족 또는 부족민끼리 공동식사를 나눔으로써 일치와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행해졌다. 여기에 가나안 농경민족의 축제 풍습인 누룩 넣지 않는 빵2)을 먹는 관습이 결합되었다. 가나안 땅에서는 3-4월은 보리 수확기로서, 햇보리를 수확하면서 한 해를 시작할 즈음에 새해 소출이 잘 되도록 빌며 못된 잡귀의 영향력을 없애려고 치루는 농경축제가 거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목민의 봄의 축제에 가나안 농경민족의 추수감사 축제가 결합되었는데, 여기에 다시 출애급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양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도살되고, 잡은 양고기와 누룩없는 빵으로 하는 식사는 집에서 혹은 예루살렘 순례자들의 경우는 천막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거행된다. 이 식사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감사하며 기억하는 데,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업적이 현존하게 된다. “가장은 파스카 양과 쓴 풀, 누룩없는 빵을 에집트에서의 첫번째 파스카 밤에 연결시켜서 설명하는데, 하느님은 당신 백성들이 행하는 이런 전례적인 기억을 통해서 자신의 업적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하고 지탱하는 사랑과 관심을 다시 활성화하고 현재화하신다. 하느님의 기억은 사랑하고 창조하는 기억으로써, 이는 역사를 규정하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구원 능력이 자신들을 항상 동반한다는 확신을 준다”3).


그래서 오늘날 유다인의 파스카 지침서에도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자신 스스로가 에집트에서 해방된 것처럼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다. […]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에게 이 모든 기적을 행하신 분에게 감사와 영예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는 우리를(!) 종살이에서 자유에로, 근심에서 기쁨으로, 슬픔에서 즐거움으로 이끌어 주셨다”(pec 10,5 bc).




파스카 만찬은 단지 기억을 통해서 과거의 구원사건을 현재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표(豫表)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 예언자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모든 민족을 위한 잔치로 묘사한다. “이 산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리시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은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이 산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이사 25,60-61).




2.2.   예수의 복음 선포 안에서의 식사공동체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자신의 사명으로 삼은 것은 흩어진 하느님 백성의 재건과 집결이었다.4)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제자의 선별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예수가 자신의 활동을 되돌이켜 보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 말도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암닭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식들을 모으려 했던가”(마태 23,37).


예수는 자신의 사명인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재건을 자주 (혼인)잔치에 비유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게 되리라”(마태 8,11; 참조: 마태 22, 1-14; 25,1-13). 그리고 예수는 자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자신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식사 공동체는 예수의 활동을 특징짓는 표시였다. 이것은 예수 시대의 사람들이 금욕적으로 살며 참회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과 구분하여 예수를 언급한 것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하고 말한다”(마태 11,18 이하).


한가지 특이함 점은, 예수는 제자들과 자신의 추종자들과만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도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이다. 근동 사람들에게 식탁의 공동체란 평화, 신의, 형제애, 용서를 의미하였고, 경건한 유다인들은 이 모든 것이 사람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유다교에서 식탁의 공동체는 하느님 앞에서의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이 공동체는 家長이 한 덩이의 빵에 찬미의 기도를 바친 다음에 식사에 참여한 사람 각자가 그 빵의 한 조각을 받아 먹음으로써 그 찬미의 기도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루어진다”.5) 그래서 당시에 경건하다는 이들은 죄인들과의 식사를 금기시하였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가 세리 레위의 집에서 많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투덜거린다.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2,16; 참조: 루가 15,2). 이런 불평에 대응해서 예수는 “나는 의인을 부르려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마르 2,17)고 대답한다. 이 말씀은 예수의 사명인 하느님 백성의 재건과 집결이 죄인들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동시에 죄인들과의 식사공동체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는 것이 나타난다. 용서는 무상으로 주어지면서 죄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제공된다. 무상으로 주어진 용서에 대한 유일한 조건은 너그러운 용서의 전달이다. 큰 용서를 받아 살아갈 수 있게 된 사람은 작은 용서를 거절해서는 안된다(참조: 마태 18,21-35).


그러나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하는 식사공동체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죄인들에게 용서를 선포한 예수의 행동은 전통적 도덕 규범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명기와 역대기에 분명히 명문화된 질서, 즉 율법에 충실하면 하느님의 상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확신이 무시된 것이다. 예수는 이런 반발에 대해 굽히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이는 급기야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서 드러난 것은 죄인에 대한 용서의 표징인 식사공동체는 투쟁과 위험 부담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스승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리석은 소망에 대해 예수는 고난의 잔(마르 10, 38과 병행귀절)이란 말로 대답하는데 이는 종말의 식사공동체는 투쟁과 희생이 없이 차지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구약성서에서 잔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님에게 술을 가득채워서 건내는 잔은 기쁨의 근원이 되고, 호의와 보살핌의 상징이 된다(시편 23,5). 그러나 사람을 마비시키고 감각을 둔하게 하는 술의 힘은 술잔을 무서운 멸망의 상징, “몸과 신세를 망치는 잔” (에제 23,33)이 되게 한다. 이렇게 해서 “진노의 잔”이라는 표상이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오는 심판의 말씀과 관련하여 언급된다(이사 51,17; 예레 25,15-29; 49,12; 에제 23,21-33; 묵시 14,10; 17,4; 18,6 등등). 여기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실현되는 두려운 운명에 대한 표상으로서 고난의 잔이라는 말마디가 연역된다 (마르 10,38; 14,36; 요한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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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성서적 근거(1)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2.  성서적  근거


    전통적으로 성체성사의 기원은 예수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거행하셨던 제자들과의 최후만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최후만찬은 예수 생애 동안의 있었던 크고 작은 수많은 식사공동체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상 식사공동체는 예수의 복음 선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예수의 식사공동체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의 식사공동체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2.1.    구약성서에서의 식사공동체

    대다수의 문화권에서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양식을 섭취하는 식사 중에 그 양식을 주신 분, 즉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스라엘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가정에서 혹은 순례할 때에 천막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공동의 식사는,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빵을 쪼개면서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써 식사를 시작하고 함께 먹고 마신 후에 감사기도로 맺었다. 

    이스라엘에서 종교축제일이나 가정 축제일에 흔히 거행하던 식사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1) 먼저 손을 씻고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포도주를 마시는 전식(前食)이 있고, 그 다음에 가장이나 주례가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후에 빵을 나누어 모든 참석자들이 다른 음식과 함께 먹는 본식(本食), 마지막으로 다시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포도주를 마시는 후식(後食)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식으로 들어갈 때 가장이나 주빈이 양손에 큰 빵덩어리를 들고 하느님께 다음과 같은 찬양기도를 드렸다. “우리 하느님이시요 세상의 임금님이시며 땅에서 빵을 생산하시는 주님, 찬양받으소서”(바빌론 탈뭇 브라콧 35a). 

    종교 축제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마다 거행된 파스카 만찬이다. 이 만찬에서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야훼의 구원업적을 “기억”(zikkaron)하고 “찬양”(berakah)한다. 파스카 축제는 이미 출애급 이전에 유목민들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기 전에 거행하던 봄의 축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근동지역의 유목민들은 봄이 되면 겨우내 머물던 집을 떠나 다시 천막을 치며 유목생활을 시작하는데, 그 첫날 밤에 새끼양이나 어미양을 잡아 그 피를 천막의 말뚝에 뿌리든지 천막의 문지방이나 문설주에 바르던 관습을 지켰다. 이 의식은 그들의 집과 가축을 위협하는 악령을 쫒고, 그들의 신이 새로운 유목 여정을 돌보셔서 가축과 소출을 지켜 주시길 기원하며, 가족 또는 부족민끼리 공동식사를 나눔으로써 일치와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행해졌다. 여기에 가나안 농경민족의 축제 풍습인 누룩 넣지 않는 빵2)을 먹는 관습이 결합되었다. 가나안 땅에서는 3-4월은 보리 수확기로서, 햇보리를 수확하면서 한 해를 시작할 즈음에 새해 소출이 잘 되도록 빌며 못된 잡귀의 영향력을 없애려고 치루는 농경축제가 거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목민의 봄의 축제에 가나안 농경민족의 추수감사 축제가 결합되었는데, 여기에 다시 출애급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양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도살되고, 잡은 양고기와 누룩없는 빵으로 하는 식사는 집에서 혹은 예루살렘 순례자들의 경우는 천막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거행된다. 이 식사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감사하며 기억하는 데,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업적이 현존하게 된다. “가장은 파스카 양과 쓴 풀, 누룩없는 빵을 에집트에서의 첫번째 파스카 밤에 연결시켜서 설명하는데, 하느님은 당신 백성들이 행하는 이런 전례적인 기억을 통해서 자신의 업적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하고 지탱하는 사랑과 관심을 다시 활성화하고 현재화하신다. 하느님의 기억은 사랑하고 창조하는 기억으로써, 이는 역사를 규정하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구원 능력이 자신들을 항상 동반한다는 확신을 준다”3).

    그래서 오늘날 유다인의 파스카 지침서에도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자신 스스로가 에집트에서 해방된 것처럼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다. […]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에게 이 모든 기적을 행하신 분에게 감사와 영예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는 우리를(!) 종살이에서 자유에로, 근심에서 기쁨으로, 슬픔에서 즐거움으로 이끌어 주셨다”(pec 10,5 bc).


    파스카 만찬은 단지 기억을 통해서 과거의 구원사건을 현재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표(豫表)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 예언자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모든 민족을 위한 잔치로 묘사한다. “이 산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리시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은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이 산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이사 25,60-61).


    2.2.   예수의 복음 선포 안에서의 식사공동체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자신의 사명으로 삼은 것은 흩어진 하느님 백성의 재건과 집결이었다.4)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제자의 선별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예수가 자신의 활동을 되돌이켜 보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 말도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암닭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식들을 모으려 했던가”(마태 23,37).

    예수는 자신의 사명인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재건을 자주 (혼인)잔치에 비유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게 되리라”(마태 8,11; 참조: 마태 22, 1-14; 25,1-13). 그리고 예수는 자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자신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식사 공동체는 예수의 활동을 특징짓는 표시였다. 이것은 예수 시대의 사람들이 금욕적으로 살며 참회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과 구분하여 예수를 언급한 것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하고 말한다”(마태 11,18 이하).

    한가지 특이함 점은, 예수는 제자들과 자신의 추종자들과만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도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이다. 근동 사람들에게 식탁의 공동체란 평화, 신의, 형제애, 용서를 의미하였고, 경건한 유다인들은 이 모든 것이 사람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유다교에서 식탁의 공동체는 하느님 앞에서의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이 공동체는 家長이 한 덩이의 빵에 찬미의 기도를 바친 다음에 식사에 참여한 사람 각자가 그 빵의 한 조각을 받아 먹음으로써 그 찬미의 기도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루어진다”.5) 그래서 당시에 경건하다는 이들은 죄인들과의 식사를 금기시하였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가 세리 레위의 집에서 많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투덜거린다.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2,16; 참조: 루가 15,2). 이런 불평에 대응해서 예수는 “나는 의인을 부르려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마르 2,17)고 대답한다. 이 말씀은 예수의 사명인 하느님 백성의 재건과 집결이 죄인들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동시에 죄인들과의 식사공동체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는 것이 나타난다. 용서는 무상으로 주어지면서 죄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제공된다. 무상으로 주어진 용서에 대한 유일한 조건은 너그러운 용서의 전달이다. 큰 용서를 받아 살아갈 수 있게 된 사람은 작은 용서를 거절해서는 안된다(참조: 마태 18,21-35).

    그러나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하는 식사공동체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죄인들에게 용서를 선포한 예수의 행동은 전통적 도덕 규범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명기와 역대기에 분명히 명문화된 질서, 즉 율법에 충실하면 하느님의 상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확신이 무시된 것이다. 예수는 이런 반발에 대해 굽히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이는 급기야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서 드러난 것은 죄인에 대한 용서의 표징인 식사공동체는 투쟁과 위험 부담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스승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리석은 소망에 대해 예수는 고난의 잔(마르 10, 38과 병행귀절)이란 말로 대답하는데 이는 종말의 식사공동체는 투쟁과 희생이 없이 차지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구약성서에서 잔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님에게 술을 가득채워서 건내는 잔은 기쁨의 근원이 되고, 호의와 보살핌의 상징이 된다(시편 23,5). 그러나 사람을 마비시키고 감각을 둔하게 하는 술의 힘은 술잔을 무서운 멸망의 상징, “몸과 신세를 망치는 잔” (에제 23,33)이 되게 한다. 이렇게 해서 “진노의 잔”이라는 표상이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오는 심판의 말씀과 관련하여 언급된다(이사 51,17; 예레 25,15-29; 49,12; 에제 23,21-33; 묵시 14,10; 17,4; 18,6 등등). 여기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실현되는 두려운 운명에 대한 표상으로서 고난의 잔이라는 말마디가 연역된다 (마르 10,38; 14,36; 요한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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