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가톨릭 교회(2)

 

19세기의 가톨릭 교회(2)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공의회 개최 배경 :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1864년 12월 8일에 처음으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21명의 로마 주재 추기경들에게 비밀히 의견을 타진하였다. 이 중에서 2명의 추기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교황의 계획을 찬성하였다. 그런데 찬성하는 추기경 가운데, 여섯 명이 정치적 면에서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걱정을 드러냈고 두 명의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전통적 신앙으로 내려오던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도 정의되어 교회의 공식적 결정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교황은 유럽과 가톨릭 동방 교회의 주교들에게도 공의회 소집의 계획을 알려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반응의 동기는 당시에 교회 안에서 거론되고 있는 학설들이 전통 신앙에 위험한 경계에 달하여 신학적 정리가 필요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1860년 이후에 민족주의적 통일운동의 결과로 신생 이딸리아가 로마시를 제외하고서 교황령을 점령하였고, 교황권의 영향력에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교회는 교황청의 권한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었다.


공의회의 준비 과정 :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교황 비오 9세는 1868년 3월 9일에 추기들로 구성된 준비위원회를 두어 공의회의 의제를 설정하는 데 착수하였다. 3개월 후인 1868년 6월 29일에 비오 9세는 칙서를 통해서 ꡒ1869년 12월 8일에 로마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ꡓ고 공고하였다. 아울러 공의회에서 다룰 의제를 다섯 가지 즉 신앙 교리, 교회 규율, 수도회, 외방 선교,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으로 규정하여 각 의제의 초안을 준비하는 분과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열리기도 전에 교회 안에서 의견이 양분되었다. 대다수의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18세기의 갈리아주의의 반교회사상(5월호 참조)과 프랑스 대혁명의 반동으로 19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교황권의 지상주의를 제창한 ꡐ울트라본타니즘ꡑ의 영향을 받아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소수의 자유주의파 신학자들과 독일, 오스트리아,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이 정의의 선포가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이미 1868년 2월 6일자의 ꡐ치빌타카톨리카ꡑ라는 예수회의 잡지는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정의와 그 신조화를 요구하는 논문을 실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이며 교회 사가인 될린거(1799-1890)는 익명으로 신문에 논문을 기고하여,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지권이 정의되는 것에 반대, 역사적 사실(교황 호노리오 1세의 이단 승인)을 들어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유럽 국가의 일부 통치자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교리는 중세기적 교회의 국가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여 공의회에서 이 교리를 신조로 규정하는 데서 파생되는 중대 결과를 경고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교황은 1869년 11월 27일에 칙서를 통해 공의회의 일정을 알리고 의제 결정권은 교황에게 속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공의회의 의안을 준비하는 4개 위원회의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물론 교황의 무류지권 문제는 공의회의 의제로 선택되지 않았지만 자유주의파들이 위원회의 구성에서 제외됨으로써 이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의회의 진행 과정 : 우선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리위원회에서 합리주의, 유물론, 자연주의, 범신론 등의 오류를 반대하여 초안한 신앙 문제(창조주, 계시, 신앙, 신앙과 이성)를 심의 개정했다. 교황은 1870년 4월 24일에 계시와 신앙에 관한 교의적인 헌장 ꡐ하느님의 아들ꡑ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심의가 착수되었다. 무류지권을 지지하는 교부들은 4백여 명의 주교들의 서명을 받아, 이 문제를 의제로 선택하도록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교황의 무류지권과 수위권 문제는 공의회의 교부들을 양분시켰다. 반대파들은 원칙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이의가 없으나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치열한 찬반 논쟁이 7월 4일에 종결되고 무류지권에 대한 교회의 정의가 예비 투표(7월 13일)에서 가결되었다. 이 투표 후에 일부 주교들은 교황의 허가를 받고 최종 투표 전에 로마를 떠나 기권하였다. 7월 18일에 있었던 제4차 회기에서 찬성 533표, 반대 2표로 교회에 관한 헌장인 ꡐ영원한 목자ꡑ가 통과되었다.


이 정의가 선포된 다음 날인 7월 19일에 보불전쟁(1870-1871)이 발발하여 신생 이딸리아로부터 교황청을 보호해 주던 프랑스 군대가 철수, 이딸리아 군대가 로마 시를 장악하여 교황은 1870년 10월 20일에 공의회를 연기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른 안건을 마무리지을 공의회는 끝내 속개되지 못하였다.


공의회의 결과 :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ꡐ영원한 목자ꡑ헌장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신조 선포로, 과거의 콘스탄스 공의회의 공의회 우위 사상에서 시작되어 18세기의 갈리아주의자들이 계속 주창하던 국교회 사상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ꡐ하느님의 아들ꡑ헌장은 20세기 초에 가톨릭 교회 안에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적 교리에 어긋하는 주장을 하는 ꡐ현대주의ꡑ의 교회 침입을 저지하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결과 외에 공의회는 일련의 불행한 사건을 초래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반대하여 교황청과의 정교협약을 파기했다. 독일의 주교들은 대부분 최종투표 전에 로마를 떠나 기권하였지만 무류지권에 대한 정의가 선포된 후에 공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였다. 이것은 될린거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파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870년에 본과 뮌헨 대학 신학자들을 위시하여 여러 곳에서 바티칸 공의회를 거부하는 서명 운동과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마침내 이 반대파는 1871년 9월에 뮌휀에서 집회를 갖고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참된 가톨릭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ꡐ고(古)가톨릭 교회ꡑ를 설립하여(뒬린거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음)전통적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1873년 6월에 브레슬라우 대학의 교회사 교수이며 학창인 라이켄스(1821-1896)가 네덜란드 데벤터의 얀센파 이단 주교인 헤르만 하이캄프에게 독일의 첫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로써 고(古)가톨릭 교회의 본 교구가 설정되었다.


이렇게 분리된 교회는 1874년에 비밀 고해, 금육제, 단식제 등을 개혁하고 1878년에 혼인의 불가해소성, 혼인 조당, 전례 축일, 사제의 독신 생활을 철폐하였다. 이 교회는 1054년 이전의 첫 7개의 공의회의 결정을 초기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였고, 반면에 트렌트 공의회와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이 교회는 1932년에 영국의 성공회와 완전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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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의 가톨릭 교회(2)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공의회 개최 배경 :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1864년 12월 8일에 처음으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21명의 로마 주재 추기경들에게 비밀히 의견을 타진하였다. 이 중에서 2명의 추기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교황의 계획을 찬성하였다. 그런데 찬성하는 추기경 가운데, 여섯 명이 정치적 면에서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걱정을 드러냈고 두 명의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전통적 신앙으로 내려오던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도 정의되어 교회의 공식적 결정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교황은 유럽과 가톨릭 동방 교회의 주교들에게도 공의회 소집의 계획을 알려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반응의 동기는 당시에 교회 안에서 거론되고 있는 학설들이 전통 신앙에 위험한 경계에 달하여 신학적 정리가 필요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1860년 이후에 민족주의적 통일운동의 결과로 신생 이딸리아가 로마시를 제외하고서 교황령을 점령하였고, 교황권의 영향력에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교회는 교황청의 권한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었다.

    공의회의 준비 과정 :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교황 비오 9세는 1868년 3월 9일에 추기들로 구성된 준비위원회를 두어 공의회의 의제를 설정하는 데 착수하였다. 3개월 후인 1868년 6월 29일에 비오 9세는 칙서를 통해서 ꡒ1869년 12월 8일에 로마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ꡓ고 공고하였다. 아울러 공의회에서 다룰 의제를 다섯 가지 즉 신앙 교리, 교회 규율, 수도회, 외방 선교,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으로 규정하여 각 의제의 초안을 준비하는 분과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열리기도 전에 교회 안에서 의견이 양분되었다. 대다수의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18세기의 갈리아주의의 반교회사상(5월호 참조)과 프랑스 대혁명의 반동으로 19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교황권의 지상주의를 제창한 ꡐ울트라본타니즘ꡑ의 영향을 받아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소수의 자유주의파 신학자들과 독일, 오스트리아,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이 정의의 선포가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이미 1868년 2월 6일자의 ꡐ치빌타카톨리카ꡑ라는 예수회의 잡지는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정의와 그 신조화를 요구하는 논문을 실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이며 교회 사가인 될린거(1799-1890)는 익명으로 신문에 논문을 기고하여,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지권이 정의되는 것에 반대, 역사적 사실(교황 호노리오 1세의 이단 승인)을 들어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유럽 국가의 일부 통치자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교리는 중세기적 교회의 국가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여 공의회에서 이 교리를 신조로 규정하는 데서 파생되는 중대 결과를 경고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교황은 1869년 11월 27일에 칙서를 통해 공의회의 일정을 알리고 의제 결정권은 교황에게 속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공의회의 의안을 준비하는 4개 위원회의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물론 교황의 무류지권 문제는 공의회의 의제로 선택되지 않았지만 자유주의파들이 위원회의 구성에서 제외됨으로써 이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의회의 진행 과정 : 우선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리위원회에서 합리주의, 유물론, 자연주의, 범신론 등의 오류를 반대하여 초안한 신앙 문제(창조주, 계시, 신앙, 신앙과 이성)를 심의 개정했다. 교황은 1870년 4월 24일에 계시와 신앙에 관한 교의적인 헌장 ꡐ하느님의 아들ꡑ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심의가 착수되었다. 무류지권을 지지하는 교부들은 4백여 명의 주교들의 서명을 받아, 이 문제를 의제로 선택하도록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교황의 무류지권과 수위권 문제는 공의회의 교부들을 양분시켰다. 반대파들은 원칙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이의가 없으나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치열한 찬반 논쟁이 7월 4일에 종결되고 무류지권에 대한 교회의 정의가 예비 투표(7월 13일)에서 가결되었다. 이 투표 후에 일부 주교들은 교황의 허가를 받고 최종 투표 전에 로마를 떠나 기권하였다. 7월 18일에 있었던 제4차 회기에서 찬성 533표, 반대 2표로 교회에 관한 헌장인 ꡐ영원한 목자ꡑ가 통과되었다.

    이 정의가 선포된 다음 날인 7월 19일에 보불전쟁(1870-1871)이 발발하여 신생 이딸리아로부터 교황청을 보호해 주던 프랑스 군대가 철수, 이딸리아 군대가 로마 시를 장악하여 교황은 1870년 10월 20일에 공의회를 연기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른 안건을 마무리지을 공의회는 끝내 속개되지 못하였다.

    공의회의 결과 :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ꡐ영원한 목자ꡑ헌장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신조 선포로, 과거의 콘스탄스 공의회의 공의회 우위 사상에서 시작되어 18세기의 갈리아주의자들이 계속 주창하던 국교회 사상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ꡐ하느님의 아들ꡑ헌장은 20세기 초에 가톨릭 교회 안에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적 교리에 어긋하는 주장을 하는 ꡐ현대주의ꡑ의 교회 침입을 저지하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결과 외에 공의회는 일련의 불행한 사건을 초래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반대하여 교황청과의 정교협약을 파기했다. 독일의 주교들은 대부분 최종투표 전에 로마를 떠나 기권하였지만 무류지권에 대한 정의가 선포된 후에 공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였다. 이것은 될린거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파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870년에 본과 뮌헨 대학 신학자들을 위시하여 여러 곳에서 바티칸 공의회를 거부하는 서명 운동과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마침내 이 반대파는 1871년 9월에 뮌휀에서 집회를 갖고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참된 가톨릭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ꡐ고(古)가톨릭 교회ꡑ를 설립하여(뒬린거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음)전통적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1873년 6월에 브레슬라우 대학의 교회사 교수이며 학창인 라이켄스(1821-1896)가 네덜란드 데벤터의 얀센파 이단 주교인 헤르만 하이캄프에게 독일의 첫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로써 고(古)가톨릭 교회의 본 교구가 설정되었다.

    이렇게 분리된 교회는 1874년에 비밀 고해, 금육제, 단식제 등을 개혁하고 1878년에 혼인의 불가해소성, 혼인 조당, 전례 축일, 사제의 독신 생활을 철폐하였다. 이 교회는 1054년 이전의 첫 7개의 공의회의 결정을 초기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였고, 반면에 트렌트 공의회와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이 교회는 1932년에 영국의 성공회와 완전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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