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에르 필베르 모방 신부

 

삐에르 필베르 모방 신부


  1803년 9월 20일에 프랑스의 봣시라는 농촌에서 샤를르 모방과 까따린느 뒤슈맹의 아들로 태어난 삐에르는 어려서부터 선교사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 그는 비르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바이외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29년 5월 1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르 대제르 본당과 샤뒤부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2년 동안 사목활동에 헌신하던 중, 그의 꿈이었던 선교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허락을 교구장으로부터 받고, 1831년 11월 18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가 되기에 필요한 연수를 받았다. 그러나 선교사의 부족으로 연수기간이 단축되어 모방 신부는 1832년 3월에 르 아브르 항구를 떠나 마닐라를 거쳐 9월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는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소임을 받고 복건성(福建省)으로 향하는 배를 탔는데, 6명의 동승 선교사들 중에는 브뤼기애르 주교가 있었다. 복건지방에 이르러 1833년 3월 9일에 모방 신부는, 미지의 땅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떠나는 브뤼기애르 주교의 신앙심과 용기에 감명을 받아 조선 선교의 동참자가 되겠다고 청원하였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지자 그는 사천교구장인 폰따나 주교에게 선교지 변경을 신청하고 승낙을 받을 때까지 복건교구의 한 본당에서 성무를 수행하였다. 먼저 조선으로 떠난 브뤼기애르 주교와는 몽고 서만자나 국경 지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1833년 12월 중순에 이르러, 중국어도 모르는 모방 신부가, 안내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황제의 통행 허가증도 없이 파선을 당하면서 1834년 4월 1일에 북경에 입성하였을 때에 북경의 삐레스 주교는 깜짝 놀랐다.


  이러한 모방 신부의 행동은 조선 선교에 대한 그의 열성과 담대한 성격에서 나왔다.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국경 지방에 가서 자리를 잡고 나서 “조선 교우들이 오지 않을 때에는 지형을 살펴 스스로 잠입로를 개척하여 혼자서라도 들어가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조선 선교의 동료 회원인 쟈끄 오노레 샤스땅 신부에게 표명하였다.


  1834년 6월 8일에 그는 브뤼기애르 주교의 편지를 받고 교구장의 명령대로 몽고의 서만자(西灣子)로 떠났다. 이곳에서 모방 신부는 브뤼기애르 주교를 맞이하여 함께 1년 동안 지내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1835년 10월 17일에 브뤼기애르 주교는 조선 교우들과 약속한 국경 지방으로 떠났고 모방 신부는 남아서 자기 계획대로 조선에 입국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애르 주교가 여행 도중 10월 20일에 마가자(馬架子)라는 교우촌에서 병사하여 모방 신부 자신이 국경 지방으로 떠났다. 모방 신부는 마가자에서 브뤼기애르 주교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에 조선으로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는 떠나기 직전(11월 9일)에 파리 신학교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교사로서의 무능력과 무자격을 자인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에 위탁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선교활동과 조선 복음화의 성공을 위해서 여섯 대의 특별 미사를 봉헌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1836년 1월 12일에 모방 신부는 조선 교우들의 안내를 받아 중국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였다. 그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rsjsj 의주성에 이르러 담벼락 밑에 있는 작은 수문을 통해서 조선 잠입에 성공하였다. 모방 신부는 너무 오래 걸어서 발이 부르텄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중도에서 마중 나온 교우들이 갖고 온 말을 타고 한양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브뤼기애르 주교가 준 돈으로 조선 교우들이 마련한 집에 들어가 유 방제 신부와 교우들의 인사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우선 조선말을 배우는 데에 전력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교우들이 교리를 배우고 고해성사도 받기 원하여 한문을 아는 신자들에게는 글로 써 성사를 베풀었다. 한문을 모르는 이들은 남에게 부탁하여 죄목을 써 갖고 성사를 보았다. 이러한 신자들의 열성에 감명을 받은 모방 신부는 한문으로 성찰 약식을 작성하여 조선말로 번역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이 땅에서 부활 전야 예절을 거행하여 신자들에게 신앙적 감명을 주었다. 모방 신부는 처음에 한양에서 사목활동에 종사하다가 점차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17개소의 교우촌 사목 방문에 나서 270여 명(유아 영세 140명, 어른 보례 110명, 어린이 보례 22명)에게 성세성사를 베풀었고, 630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모방 신부는 각 지방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학식을 갖춘 유능한 신자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주일과 축일에 전례 모임을 개최하여 공동기도를 주재하고 교리 문답서, 복음 성서, 성인전을 낭독하고 해설하도록 지도하였다. 모방 신부는 지방 순회를 하는 동안에는 외교인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상복차림에 방갓을 쓰고 다녔다. 이러한 행동의 제한 때문에 그는 항구적 선교활동으로 조선의 복음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유 방제 신부가 추천한 젊은이들을 만나보았으나 사제로서의 능력과 자칠을 갖추지 못한 지망자라고 판단하여 다른 소년, 즉 최 양업(토마), 최 방제(프란치스꼬) 김 대건(안드레아) 등의 3명을 선발하여 유 신부가 귀국할 때에 중국을 통해서 마카오 신학교에 보냈다. 이때에 모방 신부는 효과 있는 선교를 위해서 샤스땅 신부를 영입하는 신자들을 동행케 하였다.


  이렇게 사목활동에 열중하던그는 열병에 걸려 빈사 상태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837년 1월에 샤스땅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후로 더욱 선교와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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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삐에르 필베르 모방 신부

      1803년 9월 20일에 프랑스의 봣시라는 농촌에서 샤를르 모방과 까따린느 뒤슈맹의 아들로 태어난 삐에르는 어려서부터 선교사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 그는 비르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바이외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29년 5월 1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르 대제르 본당과 샤뒤부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2년 동안 사목활동에 헌신하던 중, 그의 꿈이었던 선교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허락을 교구장으로부터 받고, 1831년 11월 18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가 되기에 필요한 연수를 받았다. 그러나 선교사의 부족으로 연수기간이 단축되어 모방 신부는 1832년 3월에 르 아브르 항구를 떠나 마닐라를 거쳐 9월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는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소임을 받고 복건성(福建省)으로 향하는 배를 탔는데, 6명의 동승 선교사들 중에는 브뤼기애르 주교가 있었다. 복건지방에 이르러 1833년 3월 9일에 모방 신부는, 미지의 땅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떠나는 브뤼기애르 주교의 신앙심과 용기에 감명을 받아 조선 선교의 동참자가 되겠다고 청원하였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지자 그는 사천교구장인 폰따나 주교에게 선교지 변경을 신청하고 승낙을 받을 때까지 복건교구의 한 본당에서 성무를 수행하였다. 먼저 조선으로 떠난 브뤼기애르 주교와는 몽고 서만자나 국경 지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1833년 12월 중순에 이르러, 중국어도 모르는 모방 신부가, 안내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황제의 통행 허가증도 없이 파선을 당하면서 1834년 4월 1일에 북경에 입성하였을 때에 북경의 삐레스 주교는 깜짝 놀랐다.

      이러한 모방 신부의 행동은 조선 선교에 대한 그의 열성과 담대한 성격에서 나왔다.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국경 지방에 가서 자리를 잡고 나서 “조선 교우들이 오지 않을 때에는 지형을 살펴 스스로 잠입로를 개척하여 혼자서라도 들어가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조선 선교의 동료 회원인 쟈끄 오노레 샤스땅 신부에게 표명하였다.

      1834년 6월 8일에 그는 브뤼기애르 주교의 편지를 받고 교구장의 명령대로 몽고의 서만자(西灣子)로 떠났다. 이곳에서 모방 신부는 브뤼기애르 주교를 맞이하여 함께 1년 동안 지내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1835년 10월 17일에 브뤼기애르 주교는 조선 교우들과 약속한 국경 지방으로 떠났고 모방 신부는 남아서 자기 계획대로 조선에 입국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애르 주교가 여행 도중 10월 20일에 마가자(馬架子)라는 교우촌에서 병사하여 모방 신부 자신이 국경 지방으로 떠났다. 모방 신부는 마가자에서 브뤼기애르 주교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에 조선으로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는 떠나기 직전(11월 9일)에 파리 신학교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교사로서의 무능력과 무자격을 자인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에 위탁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선교활동과 조선 복음화의 성공을 위해서 여섯 대의 특별 미사를 봉헌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1836년 1월 12일에 모방 신부는 조선 교우들의 안내를 받아 중국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였다. 그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rsjsj 의주성에 이르러 담벼락 밑에 있는 작은 수문을 통해서 조선 잠입에 성공하였다. 모방 신부는 너무 오래 걸어서 발이 부르텄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중도에서 마중 나온 교우들이 갖고 온 말을 타고 한양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브뤼기애르 주교가 준 돈으로 조선 교우들이 마련한 집에 들어가 유 방제 신부와 교우들의 인사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우선 조선말을 배우는 데에 전력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교우들이 교리를 배우고 고해성사도 받기 원하여 한문을 아는 신자들에게는 글로 써 성사를 베풀었다. 한문을 모르는 이들은 남에게 부탁하여 죄목을 써 갖고 성사를 보았다. 이러한 신자들의 열성에 감명을 받은 모방 신부는 한문으로 성찰 약식을 작성하여 조선말로 번역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이 땅에서 부활 전야 예절을 거행하여 신자들에게 신앙적 감명을 주었다. 모방 신부는 처음에 한양에서 사목활동에 종사하다가 점차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17개소의 교우촌 사목 방문에 나서 270여 명(유아 영세 140명, 어른 보례 110명, 어린이 보례 22명)에게 성세성사를 베풀었고, 630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모방 신부는 각 지방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학식을 갖춘 유능한 신자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주일과 축일에 전례 모임을 개최하여 공동기도를 주재하고 교리 문답서, 복음 성서, 성인전을 낭독하고 해설하도록 지도하였다. 모방 신부는 지방 순회를 하는 동안에는 외교인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상복차림에 방갓을 쓰고 다녔다. 이러한 행동의 제한 때문에 그는 항구적 선교활동으로 조선의 복음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유 방제 신부가 추천한 젊은이들을 만나보았으나 사제로서의 능력과 자칠을 갖추지 못한 지망자라고 판단하여 다른 소년, 즉 최 양업(토마), 최 방제(프란치스꼬) 김 대건(안드레아) 등의 3명을 선발하여 유 신부가 귀국할 때에 중국을 통해서 마카오 신학교에 보냈다. 이때에 모방 신부는 효과 있는 선교를 위해서 샤스땅 신부를 영입하는 신자들을 동행케 하였다.

      이렇게 사목활동에 열중하던그는 열병에 걸려 빈사 상태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837년 1월에 샤스땅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후로 더욱 선교와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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