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교난 – 박해

 

제주 교난


  임진왜란 시대에 제주도 선원인 김 복수라는 사람이 풍랑을 만나 안남국(安南國)에 표착하였다가 일본 사신을 따라 오오사까에 와서 유럽인들을 만나 천주교에 입교하고 교리서를 갖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1801년의 ‘신유대박해’중에 황 사영의 아내인 정 난주(마리아)가 유배형을 받아 제주도에서 관비 생활을 하였다. 1856년에 한국 선원이 풍랑을 만나 영국 선박에 구출되어 홍콩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휴양 중인 조선인 신학생(페낭 신학교 유학생)을 만나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펠닉스 삐에르(Felix Pierre)라고 알려진 그는 1858년에 귀국하여 페롱(Ferron : 權) 신부와 최 양업(토마스) 신부를 만나 교리서를 얻어 제주도로 귀향하여 그의 가족과 도민 등 6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1898년에 육지로 나와 영세한 양 베드로라는 제주도민이 고향에 돌아가 전교활동을 하다가 뮈뗄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1899년 5월 23일에 뮈뗄 주교는 제주도의 첫 선교사로서 뻬이네(Jean-Charles Peynet : ) 신부와 김 원영(金元永 :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를 파견하였다. 1년 후에 뻬이네 신부는 전라도 지방으로 전입되었고 라끄루(Marcel Lacrouts : )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1901년 5월에 무세(Jean-Germain Mousset : 文濟萬) 신부가 부임하였다.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신생 제주 교회는 1901년 부활절에 2백42명의 영세자와 7백여 명의 예비 신자들을 갖는 교세로 발전하였다.


  한편 당시 제주도에는 일본인 밀어업자(密漁業者)들이 제주 근해 허장에 침투하여 도민들의 생업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토착 관리들과 토호들은 일본 어업자들과 결탁하여 상무사라는 비밀 결사 단체를 조직하여 도민들을 착취하였고 중앙 정부에서는 봉세관을 파견하여 갖가지 세금을 징수하여 주민들의 반발은 격심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1899년 8월, 평안도 지방 출신의 강 봉헌(姜鳳憲)이 천주교인들을 징수관으로 채용함으로 도민들은 부당한 봉세관과 천주교를 동일시하여 민생고의 공동 원흉으로 간주하였다. 아울러 이 봉세관은 천주교에 국유지를 매매하여 교회 당국은 매입지에 있는 신목(神木)을 자르고 신당(神堂)을 파괴하였다. 이는 전통적 토착 신앙(무속)에 집착하여 있던 도민들의 반감을 불어일으켰다. 여기에 경제적 독점을 쟁취하려는 일본 어업자들이 서양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을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대정군(大靜郡)의 군수 채 구석(蔡龜錫)의 상무사를 조종하여 천주교에 대항케 하였다. 한편 상무사 간부들은 봉세관에게 경제적 이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1901년 5월 22일에 군민들을 충동, 규합하여 일본 어업자들이 제공한 무기를 갖고 봉세관의 처소인 제주성을 공격, 점령하였다. 그러나 라끄루 신부의 요청으로 6월 1일 제주도에 상륙한 프랑스 함대에 의해 소요는 끝났고, 정부에서 파견된 강화 전위대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이 소동 중에서 신자들은 재산을 약탈당하였고 5백여 명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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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교난 – 박해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주 교난

      임진왜란 시대에 제주도 선원인 김 복수라는 사람이 풍랑을 만나 안남국(安南國)에 표착하였다가 일본 사신을 따라 오오사까에 와서 유럽인들을 만나 천주교에 입교하고 교리서를 갖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1801년의 ‘신유대박해’중에 황 사영의 아내인 정 난주(마리아)가 유배형을 받아 제주도에서 관비 생활을 하였다. 1856년에 한국 선원이 풍랑을 만나 영국 선박에 구출되어 홍콩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휴양 중인 조선인 신학생(페낭 신학교 유학생)을 만나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펠닉스 삐에르(Felix Pierre)라고 알려진 그는 1858년에 귀국하여 페롱(Ferron : 權) 신부와 최 양업(토마스) 신부를 만나 교리서를 얻어 제주도로 귀향하여 그의 가족과 도민 등 6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1898년에 육지로 나와 영세한 양 베드로라는 제주도민이 고향에 돌아가 전교활동을 하다가 뮈뗄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1899년 5월 23일에 뮈뗄 주교는 제주도의 첫 선교사로서 뻬이네(Jean-Charles Peynet : ) 신부와 김 원영(金元永 :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를 파견하였다. 1년 후에 뻬이네 신부는 전라도 지방으로 전입되었고 라끄루(Marcel Lacrouts : )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1901년 5월에 무세(Jean-Germain Mousset : 文濟萬) 신부가 부임하였다.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신생 제주 교회는 1901년 부활절에 2백42명의 영세자와 7백여 명의 예비 신자들을 갖는 교세로 발전하였다.

      한편 당시 제주도에는 일본인 밀어업자(密漁業者)들이 제주 근해 허장에 침투하여 도민들의 생업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토착 관리들과 토호들은 일본 어업자들과 결탁하여 상무사라는 비밀 결사 단체를 조직하여 도민들을 착취하였고 중앙 정부에서는 봉세관을 파견하여 갖가지 세금을 징수하여 주민들의 반발은 격심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1899년 8월, 평안도 지방 출신의 강 봉헌(姜鳳憲)이 천주교인들을 징수관으로 채용함으로 도민들은 부당한 봉세관과 천주교를 동일시하여 민생고의 공동 원흉으로 간주하였다. 아울러 이 봉세관은 천주교에 국유지를 매매하여 교회 당국은 매입지에 있는 신목(神木)을 자르고 신당(神堂)을 파괴하였다. 이는 전통적 토착 신앙(무속)에 집착하여 있던 도민들의 반감을 불어일으켰다. 여기에 경제적 독점을 쟁취하려는 일본 어업자들이 서양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을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대정군(大靜郡)의 군수 채 구석(蔡龜錫)의 상무사를 조종하여 천주교에 대항케 하였다. 한편 상무사 간부들은 봉세관에게 경제적 이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1901년 5월 22일에 군민들을 충동, 규합하여 일본 어업자들이 제공한 무기를 갖고 봉세관의 처소인 제주성을 공격, 점령하였다. 그러나 라끄루 신부의 요청으로 6월 1일 제주도에 상륙한 프랑스 함대에 의해 소요는 끝났고, 정부에서 파견된 강화 전위대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이 소동 중에서 신자들은 재산을 약탈당하였고 5백여 명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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