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6세 교황 Pius 6.

 289. 비오 6세 교황 Pius Ⅵ.  1775~1799

교황 클레멘스 14세 서거 후에 있었던 교황 선거는 거의 4개월이나 소요되었다. 1775년 2월 15일 조반니(Giovanni Angelo Conte Braschi)가 교황 – 비오 6세 – 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1717년 12월 25일 체세나(Cesena)에서 출생하였으며, 법률학을 공부하였다. 1758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766년 교황의 위임으로 교황청의 재정 담당관을 역임하였으며, 파탄 직전의 재정 상태를 다시금 원상 회복시켰다. 1773년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자신의 선임자들로부터 교황권의 추락이라는 어려운 유산을 물려받았다. 교황 비오 6세는 개인적으로는 신심이 돈독하고 다양한 학식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친인척 중용주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6세는 로마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지출하였다.


  교황 비오 6세의 재임 기간은 군주들의 절대주의라는 문제로 점철된 기간이다. 이 절대주의는 프랑스의 혁명과 계몽주의의 정신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경우 국가 교회의 이념이 지배하였다. 그 결과 황제 요제프 2세는 교회의 모든 사항에 관여하기를 원하였다. 1782년 말경 교황 비오 6세는 황제 요제프 2세와 이러한 사안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비엔나 여행을 계획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독일의 경우 교황의 권리에 대적하여 주교들의 권리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1785년 교황 비오 6세가 독일의 뮌헨에 교황 대사관을 설립하였을 때 쾰른, 트리어, 마인츠,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약화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황 대사관의 설립을 반대하였다. 이들 대주교들은 1786년 8월 이른바 ꡐ엠세르 협정ꡑ을 통해 로마에 대한 독일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개혁 프로그램에 합의하였다. 이 개혁 프로그램에는 교황의 칙서가 독일에서 효력을 얻기 위해서는 주교들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프랑스 혁명군의 진입과 세속화의 배경을 이루었고, 가톨릭 제후들의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789년에 발생하였던 프랑스 혁명은 교황 비오 6세 개인에게는 물론 프랑스의 교회에도 최악의 영향을 미쳤다. 오툉(Autun)의 주교 탈레랑(Talleyrand)의 제안에 따라 전체 교회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고, 수도회는 해산되었으며, 프랑스의 134개의 교구는 83개의 교구로 줄어들었다. 주교직과 본당 신부의 임명권은 국가에 이관되었다. 그리고 모든 본당 신부들은 국가의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서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이러한 처사를 비난하면서 서약을 이행한 본당 신부들에게는 성무 집행 중지의 처벌을 내린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서약을 한 사제들과 서약을 거부한 사제들 사이에는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였다. 프랑스 국가는 자신의 의지를 폭력적인 수단으로 관철시키고자 모색하였고, 그 일환으로 서약을 거부한 사제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1792년 파리에서는 3명의 주교와 300명의 사제들이 총살당하였고, 추방당한 4만명의 사제들은 유럽 각국으로 흩어졌다. 1791년 파리의 대주교 고벨(J. B. Gobel)은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 즉 자유, 평등, 이성을 추종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교회는 근절된 것처럼 보였다. 1796년 프랑스군은 로마 교회 국가를 점령하였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교황 비오 6세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해야만 했다. 아울러 귀중한 수서본과 예술품들을 양도해야만 했다.


  교황 비오 6세가 오스트리아와 나폴리와 동맹의 관계를 맺자 나폴레옹은 다시금 교회 국가를 침공하였다. 1798년 2월 15일 로마에서는 공화국이 세워졌고, 교황의 퇴위가 선언되었다. 베드로 대성전에서는 공화국의 복구를 기념하는 감사 미사가 봉헌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6세는 로마를 떠나기를 거부하였으나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시에나로 이송했다가 나중에는 피렌체의 카르타우세 수도원에 감금시켰다. 1799년, 그사이 병약해진 교황 비오 6세는 로마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들것에 실려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의 그르노블(Grenoble)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는 발랑스(Valence)로 이송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1799년 8월 29일 발랑스에서 서거하였다. 교황 비오 6세의 서거 후 교회는 근절된 것처럼 보였다. 아울러 교회는 물론 교황권을 위한 조종이 울려퍼진 것처럼 보였다. 교황 비오 6세가 서거한 해인 1799년 『교황좌와 교회의 승리』(Der Triumpb des Heiligen Stubles und der Kircbe uber die Neuerer)라는 저서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카말돌리 수도회에 속한 사제 마우로(Mauro Cappelari)였고, 마우로는 1831년 그레고리오 11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마우로는 이 저서에서 ꡒ교회와 교황권을 파괴하는 것보다 태양을 파괴하는 것이 더 쉽다ꡓ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교황권은 새롭게 상승 기류를 타기 시작하였고, 이 상승 기류는 후임자 비오 7세 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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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9. 비오 6세 교황 Pius Ⅵ.  1775~1799

    교황 클레멘스 14세 서거 후에 있었던 교황 선거는 거의 4개월이나 소요되었다. 1775년 2월 15일 조반니(Giovanni Angelo Conte Braschi)가 교황 – 비오 6세 – 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1717년 12월 25일 체세나(Cesena)에서 출생하였으며, 법률학을 공부하였다. 1758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766년 교황의 위임으로 교황청의 재정 담당관을 역임하였으며, 파탄 직전의 재정 상태를 다시금 원상 회복시켰다. 1773년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자신의 선임자들로부터 교황권의 추락이라는 어려운 유산을 물려받았다. 교황 비오 6세는 개인적으로는 신심이 돈독하고 다양한 학식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친인척 중용주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6세는 로마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지출하였다.

      교황 비오 6세의 재임 기간은 군주들의 절대주의라는 문제로 점철된 기간이다. 이 절대주의는 프랑스의 혁명과 계몽주의의 정신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경우 국가 교회의 이념이 지배하였다. 그 결과 황제 요제프 2세는 교회의 모든 사항에 관여하기를 원하였다. 1782년 말경 교황 비오 6세는 황제 요제프 2세와 이러한 사안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비엔나 여행을 계획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독일의 경우 교황의 권리에 대적하여 주교들의 권리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1785년 교황 비오 6세가 독일의 뮌헨에 교황 대사관을 설립하였을 때 쾰른, 트리어, 마인츠,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약화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황 대사관의 설립을 반대하였다. 이들 대주교들은 1786년 8월 이른바 ꡐ엠세르 협정ꡑ을 통해 로마에 대한 독일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개혁 프로그램에 합의하였다. 이 개혁 프로그램에는 교황의 칙서가 독일에서 효력을 얻기 위해서는 주교들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프랑스 혁명군의 진입과 세속화의 배경을 이루었고, 가톨릭 제후들의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789년에 발생하였던 프랑스 혁명은 교황 비오 6세 개인에게는 물론 프랑스의 교회에도 최악의 영향을 미쳤다. 오툉(Autun)의 주교 탈레랑(Talleyrand)의 제안에 따라 전체 교회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고, 수도회는 해산되었으며, 프랑스의 134개의 교구는 83개의 교구로 줄어들었다. 주교직과 본당 신부의 임명권은 국가에 이관되었다. 그리고 모든 본당 신부들은 국가의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서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이러한 처사를 비난하면서 서약을 이행한 본당 신부들에게는 성무 집행 중지의 처벌을 내린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서약을 한 사제들과 서약을 거부한 사제들 사이에는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였다. 프랑스 국가는 자신의 의지를 폭력적인 수단으로 관철시키고자 모색하였고, 그 일환으로 서약을 거부한 사제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1792년 파리에서는 3명의 주교와 300명의 사제들이 총살당하였고, 추방당한 4만명의 사제들은 유럽 각국으로 흩어졌다. 1791년 파리의 대주교 고벨(J. B. Gobel)은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 즉 자유, 평등, 이성을 추종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교회는 근절된 것처럼 보였다. 1796년 프랑스군은 로마 교회 국가를 점령하였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교황 비오 6세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해야만 했다. 아울러 귀중한 수서본과 예술품들을 양도해야만 했다.

      교황 비오 6세가 오스트리아와 나폴리와 동맹의 관계를 맺자 나폴레옹은 다시금 교회 국가를 침공하였다. 1798년 2월 15일 로마에서는 공화국이 세워졌고, 교황의 퇴위가 선언되었다. 베드로 대성전에서는 공화국의 복구를 기념하는 감사 미사가 봉헌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6세는 로마를 떠나기를 거부하였으나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시에나로 이송했다가 나중에는 피렌체의 카르타우세 수도원에 감금시켰다. 1799년, 그사이 병약해진 교황 비오 6세는 로마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들것에 실려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의 그르노블(Grenoble)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는 발랑스(Valence)로 이송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1799년 8월 29일 발랑스에서 서거하였다. 교황 비오 6세의 서거 후 교회는 근절된 것처럼 보였다. 아울러 교회는 물론 교황권을 위한 조종이 울려퍼진 것처럼 보였다. 교황 비오 6세가 서거한 해인 1799년 『교황좌와 교회의 승리』(Der Triumpb des Heiligen Stubles und der Kircbe uber die Neuerer)라는 저서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카말돌리 수도회에 속한 사제 마우로(Mauro Cappelari)였고, 마우로는 1831년 그레고리오 11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마우로는 이 저서에서 ꡒ교회와 교황권을 파괴하는 것보다 태양을 파괴하는 것이 더 쉽다ꡓ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교황권은 새롭게 상승 기류를 타기 시작하였고, 이 상승 기류는 후임자 비오 7세 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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