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
1.묵념
우리는 오늘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신앙의 선조들 걸어가신 길을 새겨보려고 이자리에 와 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이자리에서 순례의 길을 성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읍시다. 그리고 이 순례의 길에 들어서 있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지금까지 살아온 내 자신은 무엇을 향해서 살아왔던 것일까요? 매일 우리의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삶의 목표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 피로 축성된 땅이며,하느님의 은총이 두드러진 땅이며 또한 선조들이 목숨바쳐 신앙을 지켰던 그 자리에 와있습니다. 순교성인들은 이곳까지 모진 고문으로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순교의 영광을 안기 위하여 이곳에 오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피의 흔적도 ,신음소리도,은총의 표시도 아무것도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는 없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피내음을 맞고 ,선조들의 숨소리에귀를 귀울여 봅시다.그들은 무엇 때문에 인간의 상식을 버렸을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재산을 버리고 지위를 버리고 부모 형제를 버리고 처자식을 버리고 생명까지 버리게 하였을까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한 발걸음 발걸음마다 새겨진 수많은 번뇌와 고통과 떨림과 희망과 기쁨의 자국들. 우리는 그러한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곳에 이곳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아주 쉽게 이 자리에 서있지만 우리는 성인들의 그 피와 땀이 스며든 그 자국들을 느껴야만 합니다. 잠시 다섯분의 순교성인들을 생각하며 묵념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현세에서 박해도 받고,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누릴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2.시작성가: 가톨릭 성가 285장 “103위 순교 성인” 1-2절
3.성인 독서
“형리들이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나무토막에 머리를 대라고 하니, 그는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러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 망나니는 벌벌 떨며 감히 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감탄보다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므로 자신없는 손으로 첫번 칼질을 하였다. 목은 절반밖에 끊어지지 않았고, 아오스딩은 일어나, 보라는 듯이 크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첫번 자세로 돌아가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 (순교자 정 약종 아오스딩에 관한 기록 중)
4.성지설명
갈매못 성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오천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바닷가이다. 면소재지에서 얕으막한 고개를 넘어 방조제를 따라 내려가면 길 왼쪽 자갈밭에 순교성인인 다블뤼 安주교를 비롯한 오매뜨르 吳신부, 위앵 閔신부, 그리고 루가 황석두(黃錫斗), 요셉 장락소(張樂詔)등 다섯 치명자들을 기리는 순교복자비가 서 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병인년에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吳신부, 위앵 閔 신부, 황석두, 장낙소 회장 등 다섯 명이 칼을 받아 순교한 갈매못. 제4대 조선교구장인 베르뇌 장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安주교는 흥선 대원군을 만나보려던 일이 실패로 끝나자 내포로 돌아와 전교에 힘쓰던 중 뜻박에도 신부와 교우들을 마구잡아들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安주교가 대원군의 앞잡이 포졸들에 붙잡힌 것은 3월 11일이었다. 이날 안주교는 당진군 합덕읍 거들이 마을(현 구 합덕 본당 관내)에 있는 교우 李씨 집에서 黃루가와 함께 서울서 온 포졸들에 붙잡힌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吳신부는 수원 샘골에서, 閔신부는 합덕 세거리에서 각각 거들이로 찾아와 安주교와 함께 갇히는 몸이 됐다. 포졸들은 3월 14일 거들이를 떠나 3월 19일 서울에 도착, 네 분 성인을 의금부에 구류했다. 다음날부터 심한 고문과 문초가 시작됐으나 한국말을 잘하던 안주교는 어떤 물음에도 태연한 자세로 훌륭한 호교론을 폈다. 마침내 3월 23일 대원군은 안주교를 비롯한 두 분 신부와 黃루가의 사형을 임금에게 상소, 임금이 이를 허락해 사형이 확정되었다.
서울에서 사형이 확정된 성인들이 이곳 보령 수영까지 오게 된 것은 당시 궁정 안에 만연해 이있던 샤머니즘때문이었다. 당시 임금이 신병으로 누워 있는 데다 고종의 혼례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서울에서 피를 보면 좋지 않다는 무당의 진언에 따라 형장을 서울서 250리 떨어진 이곳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3월 6일 충북 제천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돼 있던 장요셉 일행에 합류, 다섯 성인은 모진 고문으로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걸어서 이곳 갈매못까지 온 것이 3월 29일 처형되기 하루 전이었다.
그 동안의 극심한 형벌로 상한 다리는 기름종이와 베로 감고, 머리에는 누런 고깔을 쓰고 붉은 포승을 어깨에 걸친 후 말을 타고 가는데 그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열심히 감사경을 외우는 한편, 기쁘게 노래를 부르게 되니, 이를 보고 포졸과 구경꾼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포졸들은 성인 일행을 바로 보령수영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구경시키려고 각처를 돌 생각이었으나 安주교가 예수님의 수난첨례일에 죽게 해 달라고 요청, 성 금요일인 3월 30일에 형을 받게 하기 위해 이날 도착한 것이다.
날이 밝은 3월 30일, 옥에서 끌려나온 안주교와 민신부, 오신부 그리고 황루가, 장요셉 등 다섯 분은 이 갈매못 형장에서 충청수사(水使)앞에 꿇어 앉았다. 수사 앞에서 형틀이 벌여 있었고 만일을 염려해 9명의 군인이 총을 들고 경비했다. 군인들은 安주교에게 “한국식으로 수사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했으나 안주교는 고개만 숙여 인사한 다음 효수를 당하게 되었다. 칼을 든 망나니는 안주교의 목에 첫칼을 내리친 뒤 50량으로 정해진 값을 5백량을 내라고 떼를 쓰며 집행을 늦추었다. 목이 반쯤 베어진 안주교의 온 몸이 한참동안 부르르 떨며 피를 흘렸다. 수사가 500량을 주기로 하자 망나니가 두번째 칼을 휘둘러 安주교는 48세의 나이로 천당의 진복을 얻게 되었다. 安주교에 이어서 吳신부도 두번째 칼에 피를 흘렸고 閔신부, 황루가, 장요셉은 각각 첫번쨰 칼날에 순교했다. 성인들이 치명하자 형리들은 성인들의 시신을 형장에 3일동안이나 버려 두었으나 그 많은 까마귀나 개들이 전혀 시신을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安주교와 吳신부, 閔신부, 장요셉의 시체는 그 자리에 매장되었다가 3개월 뒤 박해의 여파가 가라앉자 교우들이 이곳서 30여리 떨어진 부여 홍산땅에 안장했는데 그뒤 1882년 안주교와 두 신부의 유해는 일본 나가사끼로 옮겨졌다가 1894년 5월 22일 다시 서울 용산 신학교로 옮겨지고 1900년 9월 10일에 명동 주교좌 성당의 지하실에 모셔졌으며, 황루가의 유해는 사후 몇주일 뒤 배교한 그의 집안사람들이 찾아갔다. 이분들은 1986년 200주년 시성식에 모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5. 묵상(2-3분)
순교 선열들의 믿음을 생각해보면서 우리자신을 반성하고 작은 결심을 세운다.
6.순교자들께 드리는 기도
7.마침성가 : 가톨릭 성가 285장 “103위 순교 성인” 3절

-갈매못-
1.묵념
우리는 오늘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신앙의 선조들 걸어가신 길을 새겨보려고 이자리에 와 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이자리에서 순례의 길을 성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읍시다. 그리고 이 순례의 길에 들어서 있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지금까지 살아온 내 자신은 무엇을 향해서 살아왔던 것일까요? 매일 우리의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삶의 목표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 피로 축성된 땅이며,하느님의 은총이 두드러진 땅이며 또한 선조들이 목숨바쳐 신앙을 지켰던 그 자리에 와있습니다. 순교성인들은 이곳까지 모진 고문으로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순교의 영광을 안기 위하여 이곳에 오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피의 흔적도 ,신음소리도,은총의 표시도 아무것도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는 없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피내음을 맞고 ,선조들의 숨소리에귀를 귀울여 봅시다.그들은 무엇 때문에 인간의 상식을 버렸을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재산을 버리고 지위를 버리고 부모 형제를 버리고 처자식을 버리고 생명까지 버리게 하였을까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한 발걸음 발걸음마다 새겨진 수많은 번뇌와 고통과 떨림과 희망과 기쁨의 자국들. 우리는 그러한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곳에 이곳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아주 쉽게 이 자리에 서있지만 우리는 성인들의 그 피와 땀이 스며든 그 자국들을 느껴야만 합니다. 잠시 다섯분의 순교성인들을 생각하며 묵념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현세에서 박해도 받고,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누릴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2.시작성가: 가톨릭 성가 285장 “103위 순교 성인” 1-2절
3.성인 독서
“형리들이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나무토막에 머리를 대라고 하니, 그는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러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 망나니는 벌벌 떨며 감히 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감탄보다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므로 자신없는 손으로 첫번 칼질을 하였다. 목은 절반밖에 끊어지지 않았고, 아오스딩은 일어나, 보라는 듯이 크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첫번 자세로 돌아가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 (순교자 정 약종 아오스딩에 관한 기록 중)
4.성지설명
갈매못 성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오천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바닷가이다. 면소재지에서 얕으막한 고개를 넘어 방조제를 따라 내려가면 길 왼쪽 자갈밭에 순교성인인 다블뤼 安주교를 비롯한 오매뜨르 吳신부, 위앵 閔신부, 그리고 루가 황석두(黃錫斗), 요셉 장락소(張樂詔)등 다섯 치명자들을 기리는 순교복자비가 서 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병인년에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吳신부, 위앵 閔 신부, 황석두, 장낙소 회장 등 다섯 명이 칼을 받아 순교한 갈매못. 제4대 조선교구장인 베르뇌 장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安주교는 흥선 대원군을 만나보려던 일이 실패로 끝나자 내포로 돌아와 전교에 힘쓰던 중 뜻박에도 신부와 교우들을 마구잡아들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安주교가 대원군의 앞잡이 포졸들에 붙잡힌 것은 3월 11일이었다. 이날 안주교는 당진군 합덕읍 거들이 마을(현 구 합덕 본당 관내)에 있는 교우 李씨 집에서 黃루가와 함께 서울서 온 포졸들에 붙잡힌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吳신부는 수원 샘골에서, 閔신부는 합덕 세거리에서 각각 거들이로 찾아와 安주교와 함께 갇히는 몸이 됐다. 포졸들은 3월 14일 거들이를 떠나 3월 19일 서울에 도착, 네 분 성인을 의금부에 구류했다. 다음날부터 심한 고문과 문초가 시작됐으나 한국말을 잘하던 안주교는 어떤 물음에도 태연한 자세로 훌륭한 호교론을 폈다. 마침내 3월 23일 대원군은 안주교를 비롯한 두 분 신부와 黃루가의 사형을 임금에게 상소, 임금이 이를 허락해 사형이 확정되었다.
서울에서 사형이 확정된 성인들이 이곳 보령 수영까지 오게 된 것은 당시 궁정 안에 만연해 이있던 샤머니즘때문이었다. 당시 임금이 신병으로 누워 있는 데다 고종의 혼례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서울에서 피를 보면 좋지 않다는 무당의 진언에 따라 형장을 서울서 250리 떨어진 이곳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3월 6일 충북 제천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돼 있던 장요셉 일행에 합류, 다섯 성인은 모진 고문으로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걸어서 이곳 갈매못까지 온 것이 3월 29일 처형되기 하루 전이었다.
그 동안의 극심한 형벌로 상한 다리는 기름종이와 베로 감고, 머리에는 누런 고깔을 쓰고 붉은 포승을 어깨에 걸친 후 말을 타고 가는데 그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열심히 감사경을 외우는 한편, 기쁘게 노래를 부르게 되니, 이를 보고 포졸과 구경꾼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포졸들은 성인 일행을 바로 보령수영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구경시키려고 각처를 돌 생각이었으나 安주교가 예수님의 수난첨례일에 죽게 해 달라고 요청, 성 금요일인 3월 30일에 형을 받게 하기 위해 이날 도착한 것이다.
날이 밝은 3월 30일, 옥에서 끌려나온 안주교와 민신부, 오신부 그리고 황루가, 장요셉 등 다섯 분은 이 갈매못 형장에서 충청수사(水使)앞에 꿇어 앉았다. 수사 앞에서 형틀이 벌여 있었고 만일을 염려해 9명의 군인이 총을 들고 경비했다. 군인들은 安주교에게 “한국식으로 수사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했으나 안주교는 고개만 숙여 인사한 다음 효수를 당하게 되었다. 칼을 든 망나니는 안주교의 목에 첫칼을 내리친 뒤 50량으로 정해진 값을 5백량을 내라고 떼를 쓰며 집행을 늦추었다. 목이 반쯤 베어진 안주교의 온 몸이 한참동안 부르르 떨며 피를 흘렸다. 수사가 500량을 주기로 하자 망나니가 두번째 칼을 휘둘러 安주교는 48세의 나이로 천당의 진복을 얻게 되었다. 安주교에 이어서 吳신부도 두번째 칼에 피를 흘렸고 閔신부, 황루가, 장요셉은 각각 첫번쨰 칼날에 순교했다. 성인들이 치명하자 형리들은 성인들의 시신을 형장에 3일동안이나 버려 두었으나 그 많은 까마귀나 개들이 전혀 시신을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安주교와 吳신부, 閔신부, 장요셉의 시체는 그 자리에 매장되었다가 3개월 뒤 박해의 여파가 가라앉자 교우들이 이곳서 30여리 떨어진 부여 홍산땅에 안장했는데 그뒤 1882년 안주교와 두 신부의 유해는 일본 나가사끼로 옮겨졌다가 1894년 5월 22일 다시 서울 용산 신학교로 옮겨지고 1900년 9월 10일에 명동 주교좌 성당의 지하실에 모셔졌으며, 황루가의 유해는 사후 몇주일 뒤 배교한 그의 집안사람들이 찾아갔다. 이분들은 1986년 200주년 시성식에 모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5. 묵상(2-3분)
순교 선열들의 믿음을 생각해보면서 우리자신을 반성하고 작은 결심을 세운다.
6.순교자들께 드리는 기도
7.마침성가 : 가톨릭 성가 285장 “103위 순교 성인” 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