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권 제 11장 박키데스가 다시 유다를 공격한 것과 유다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것에 대하여

 


제 11 장



박키데스가 다시 유다를 공격한 것과 유다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것에 대하여



1. 데메트리우스가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박키데스를 파견하다[마카비1서 9 : 1]



  데메트리우스는 니카노르가 전사하고 그의 군대가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박키데스에게[㈜ 마카비 1서는  \’그리고 알키무스\'(Alcimus)를 첨가한다. 요세푸스는 그가 앎키무스 죽음을 이미 기록했기 때문에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 참). 각주 524. ] 군대를 주어 유대를공격하도록 하였다. 박키데스는 안디옥을 출발하여 유대 나라에 도착하여 갈릴리 지역의 도시 아벨라(Arbela)에 진을 쳤다.[㈜ 마카비 1서에는 \’그들은 갈갈라(Galgala : 다른 본문에는\’Galaad\’ )로 가는 길로 행하였고, 아르벨라(A규딤)에 있는 마이살롯(Maisaloth)맞은 편에 진을 쳤다.\’따라서 요세푸스느 마이살롯을 생략하고 있으며 갈릴리와 유대를 동일하게 두었다. 아마도 전쟁. 1권에서처럼 \’유대 지역\'(Jewish territory)의 넓은  의미로 \’유대\'(Judaea)로 기록했을 것이다. 갈릴리에 있는 아르벨라(Arbea)는 자서. (188, 311)에서 언급한 것과동일한 지역으로 요세푸스가 묘사한 것과 같은 동굴 지역이다. 이는 갈릴리 바다의 서쪽 몇마일 그리고 막달라(Magdala)의 남서쪽과 디베랴의 북서쪽에 있는 현재의 일비드(Irbid)와 동일하다.] 이들은 아벨라의 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동굴을[㈜ 동굴은(앞의 주에서 보았듯이) 마카비 1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에워싼후에 이들을 포로로 잡아 예루살렘으로 신속히 떠났다.[㈜ 마카비 1서에는 이 사건이 셀류키드 제152년의 첫째달. 주전 161년 4월로 기록하고 있다.] 박키데스는 유다가 베르제토(Berzetho)라는[㈜ 다른 본문에는 발세토(Barzetho), 빌세토(Birzetho), 세토(Zetho)등 ; 마카비 1서에는 베레아(Berea), 이문에는 브엘삿(Beerzath), 베레팀(Berethiim). 이 장소는 고프나(Gophna : 현재 Jifna)의 북서쪽 약 2마일 그리고 예루살렘 북쪽 약 15마일에 있는 Bir ez-Zeit와 동일시 된다. 참). Schurer I. 222 주 36.] 마을에 진을 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20,000명의 보병과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와 싸우기 위해 나아갔다. 이에 맞서 싸워야하는 유다의 총병력은 1,000명에 불과하였다.[㈜ 다른 본문에는 \’2000\’: 마카비 1서에는 \’3,000명의 선택된 부하들\’, 유다는 1,000명 이상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만약 그들 대부분이 달아났다면(다음 본문을 보라). 800명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수많은 박키데스의 군이 밀려오는 것을 본 유다의 군사들은 겁에 질려[㈜ 다른 본문에는 \’박키데스(Bacchides)의 부하들은 두려워 했다.\’]  대열에서 이탈하여 단지 800명의 군사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는 군사들이 이탈하여 800명에 불과하였지만 적들이 곧 공격하여 오고 더이상 다시 군대를 소집할 시간이 없자 이들을 이끌고 박키데스와 전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마카비1서 9 : 7]. 그리하여 그는 군사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우자고 격려하면서, 최소한[㈜ 본문에 ge(최소한)라고 나온다.] 전투에 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대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니 잠시동안 후퇴하여 군대를 더 소집한 후에[㈜ 다른 본문에는 \’그들이 부하들을 소집했을 때.\’] 적과 대항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등을 적에게 보이며 도망가는 비겁한 꼴을 태양에게 보이지 않도록 합시다.[㈜ 요세푸스는 마카비 1서의 구절인 mhv moi gevnoito poih\’sai to; pra\’gma tou\’to, 즉 히브리 숙어로 \”하느님께서 금하셨다\”를 반영한 것을 고쳤다. ]비록 지금 이 순간이 목숨이 위태로운 위급한 상황일지라도, 그리고 전투중에 내가 전사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비겁하게 도망하여 이전에 세웠던 나의 명성에 먹칠을 하느니 차라리 용감히 싸워 나의 조국을 지킬 것이오.\”[㈜ 마카비 1서에는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용감히 죽읍시다, 그리고 우리의 명예를(또는 \”영광\”) 얼룩지게 하지 맙시다. \”] 그는 이렇게 말하여 군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



2. 박키데스가 베르제토에서 유다를 패배시키다[마카비1서9: 11]



   한편 박키데스는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전투대형으로 배치하였다. 그는 기병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경보병(light-armed tro-ops)과 궁수들을 본대의[㈜ 문자적으로 \”전체 방진 (方陣).\”] 정면에 배치하였으며 자신은 대형 오른편에 자리잡았다. 이와 같이 군대를 정렬시킨 후에 적진으으로 다가서면서 나팔수에게 공격신호를 울리라고 명령하였다. 이나팔소리와 함께 박키데스의 군대는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유다도 마찬가지로 전열을 정비한 후에 적과맞서 싸웠으며 양국의 군사들은 격렬하게 싸워 전투는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유다는 박키데스와 그의 정예부대가 공격대형의 오른쪽에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용감한 병사들을 이끌고 오른쪽을 공격하여 적의 견고한 대열을 깨뜨렸다. 그리고 나서 적의 중앙을 돌파하여 도망가는 적들을 아자(Aza)산까지[㈜ 다른 본문에는 에사(Eza), 가사라(Gazara) 산. 마카비 1서에는 eJws !Axwvtou o[rou\”,  \”아소도(Azotus)산까지\”. 이는 팔레스린 평지에 있는 아소투스(성경에는 아스돗, Ashdod)라고 할 수 없다. 미카일리스(Michaelis)는 오래전 마카비 1서에 있는 아소투스(=아소돗)가 히브리어 \’a\’doh h\’-h\’r, \”산의 비탈 \”의 오인이 라고 제안했다] 추격하였다. 그러나 이 때 다른 쪽에 있던 적들이 오른쪽 대열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유다를 앞뒤로 에워쌌다[㈜ 다른 본문에는 \”그들은 유다(Judas)를 포위하고 추격하였다. \”] (마카비 1서 9 :16]. 적들에게 포위되어 도망갈 수 없음을 안 유다는 그의 군사들과 함께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많은 적들을 살해하였으나 유다는 부상을 입고 쓰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에 그가 보여주었던 영광스런 모습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유다가 쓰러지자 그의 군사들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어 그들을 이끌어 줄 사람이 없게 되자 모두 뿔뿔이 도망갔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마카비 1서 (9 : 18), \”유다는 죽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의 간단한 진술을 부연하고 있다.]그후 유다의 형제인 시몬과 요나단은 휴전협정을 맺고 적들로부터 유다의 시신을 인수받아 모데인(Modeein)이라는[㈜ 다른 본문에 는 모데 에이 (Modeei), 모다이에이 (Modaiei) 참). 각주 309.] 마을로 왔다. 이들은 유다의 부친이 묻혀있는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백   성들은 유다의 죽음을 알고 여러날 동안 슬퍼하였으며 그를 추모하며 그의 법적을 기렸다. 유다의 최후는 이와 같았다. 그는 매우 용감하고 위대한[㈜ 추정된 다른 본문에는 \”대단히 용감한. \”] 투사였으며 부친 마타디아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동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전력을 바친 불굴의 용기를 가진 자였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해방시키고 마게도냐인들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위대하고 찬란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결국 그는 3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있다가 죽었다. [㈜ 참).각주520. 마지막 단락, (433-434)는 마카비 1서에 첨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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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제 11 장


    박키데스가 다시 유다를 공격한 것과 유다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것에 대하여


    1. 데메트리우스가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박키데스를 파견하다[마카비1서 9 : 1]


      데메트리우스는 니카노르가 전사하고 그의 군대가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박키데스에게[㈜ 마카비 1서는  ‘그리고 알키무스'(Alcimus)를 첨가한다. 요세푸스는 그가 앎키무스 죽음을 이미 기록했기 때문에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 참). 각주 524. ] 군대를 주어 유대를공격하도록 하였다. 박키데스는 안디옥을 출발하여 유대 나라에 도착하여 갈릴리 지역의 도시 아벨라(Arbela)에 진을 쳤다.[㈜ 마카비 1서에는 ‘그들은 갈갈라(Galgala : 다른 본문에는’Galaad’ )로 가는 길로 행하였고, 아르벨라(A규딤)에 있는 마이살롯(Maisaloth)맞은 편에 진을 쳤다.’따라서 요세푸스느 마이살롯을 생략하고 있으며 갈릴리와 유대를 동일하게 두었다. 아마도 전쟁. 1권에서처럼 ‘유대 지역'(Jewish territory)의 넓은  의미로 ‘유대'(Judaea)로 기록했을 것이다. 갈릴리에 있는 아르벨라(Arbea)는 자서. (188, 311)에서 언급한 것과동일한 지역으로 요세푸스가 묘사한 것과 같은 동굴 지역이다. 이는 갈릴리 바다의 서쪽 몇마일 그리고 막달라(Magdala)의 남서쪽과 디베랴의 북서쪽에 있는 현재의 일비드(Irbid)와 동일하다.] 이들은 아벨라의 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동굴을[㈜ 동굴은(앞의 주에서 보았듯이) 마카비 1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에워싼후에 이들을 포로로 잡아 예루살렘으로 신속히 떠났다.[㈜ 마카비 1서에는 이 사건이 셀류키드 제152년의 첫째달. 주전 161년 4월로 기록하고 있다.] 박키데스는 유다가 베르제토(Berzetho)라는[㈜ 다른 본문에는 발세토(Barzetho), 빌세토(Birzetho), 세토(Zetho)등 ; 마카비 1서에는 베레아(Berea), 이문에는 브엘삿(Beerzath), 베레팀(Berethiim). 이 장소는 고프나(Gophna : 현재 Jifna)의 북서쪽 약 2마일 그리고 예루살렘 북쪽 약 15마일에 있는 Bir ez-Zeit와 동일시 된다. 참). Schurer I. 222 주 36.] 마을에 진을 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20,000명의 보병과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와 싸우기 위해 나아갔다. 이에 맞서 싸워야하는 유다의 총병력은 1,000명에 불과하였다.[㈜ 다른 본문에는 ‘2000’: 마카비 1서에는 ‘3,000명의 선택된 부하들’, 유다는 1,000명 이상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만약 그들 대부분이 달아났다면(다음 본문을 보라). 800명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수많은 박키데스의 군이 밀려오는 것을 본 유다의 군사들은 겁에 질려[㈜ 다른 본문에는 ‘박키데스(Bacchides)의 부하들은 두려워 했다.’]  대열에서 이탈하여 단지 800명의 군사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는 군사들이 이탈하여 800명에 불과하였지만 적들이 곧 공격하여 오고 더이상 다시 군대를 소집할 시간이 없자 이들을 이끌고 박키데스와 전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마카비1서 9 : 7]. 그리하여 그는 군사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우자고 격려하면서, 최소한[㈜ 본문에 ge(최소한)라고 나온다.] 전투에 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대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니 잠시동안 후퇴하여 군대를 더 소집한 후에[㈜ 다른 본문에는 ‘그들이 부하들을 소집했을 때.’] 적과 대항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등을 적에게 보이며 도망가는 비겁한 꼴을 태양에게 보이지 않도록 합시다.[㈜ 요세푸스는 마카비 1서의 구절인 mhv moi gevnoito poih’sai to; pra’gma tou’to, 즉 히브리 숙어로 “하느님께서 금하셨다”를 반영한 것을 고쳤다. ]비록 지금 이 순간이 목숨이 위태로운 위급한 상황일지라도, 그리고 전투중에 내가 전사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비겁하게 도망하여 이전에 세웠던 나의 명성에 먹칠을 하느니 차라리 용감히 싸워 나의 조국을 지킬 것이오.”[㈜ 마카비 1서에는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용감히 죽읍시다, 그리고 우리의 명예를(또는 “영광”) 얼룩지게 하지 맙시다. “] 그는 이렇게 말하여 군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


    2. 박키데스가 베르제토에서 유다를 패배시키다[마카비1서9: 11]


       한편 박키데스는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전투대형으로 배치하였다. 그는 기병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경보병(light-armed tro-ops)과 궁수들을 본대의[㈜ 문자적으로 “전체 방진 (方陣).”] 정면에 배치하였으며 자신은 대형 오른편에 자리잡았다. 이와 같이 군대를 정렬시킨 후에 적진으으로 다가서면서 나팔수에게 공격신호를 울리라고 명령하였다. 이나팔소리와 함께 박키데스의 군대는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유다도 마찬가지로 전열을 정비한 후에 적과맞서 싸웠으며 양국의 군사들은 격렬하게 싸워 전투는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유다는 박키데스와 그의 정예부대가 공격대형의 오른쪽에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용감한 병사들을 이끌고 오른쪽을 공격하여 적의 견고한 대열을 깨뜨렸다. 그리고 나서 적의 중앙을 돌파하여 도망가는 적들을 아자(Aza)산까지[㈜ 다른 본문에는 에사(Eza), 가사라(Gazara) 산. 마카비 1서에는 eJws !Axwvtou o[rou”,  “아소도(Azotus)산까지”. 이는 팔레스린 평지에 있는 아소투스(성경에는 아스돗, Ashdod)라고 할 수 없다. 미카일리스(Michaelis)는 오래전 마카비 1서에 있는 아소투스(=아소돗)가 히브리어 ‘a’doh h’-h’r, “산의 비탈 “의 오인이 라고 제안했다] 추격하였다. 그러나 이 때 다른 쪽에 있던 적들이 오른쪽 대열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유다를 앞뒤로 에워쌌다[㈜ 다른 본문에는 “그들은 유다(Judas)를 포위하고 추격하였다. “] (마카비 1서 9 :16]. 적들에게 포위되어 도망갈 수 없음을 안 유다는 그의 군사들과 함께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많은 적들을 살해하였으나 유다는 부상을 입고 쓰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에 그가 보여주었던 영광스런 모습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유다가 쓰러지자 그의 군사들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어 그들을 이끌어 줄 사람이 없게 되자 모두 뿔뿔이 도망갔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마카비 1서 (9 : 18), “유다는 죽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의 간단한 진술을 부연하고 있다.]그후 유다의 형제인 시몬과 요나단은 휴전협정을 맺고 적들로부터 유다의 시신을 인수받아 모데인(Modeein)이라는[㈜ 다른 본문에 는 모데 에이 (Modeei), 모다이에이 (Modaiei) 참). 각주 309.] 마을로 왔다. 이들은 유다의 부친이 묻혀있는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백   성들은 유다의 죽음을 알고 여러날 동안 슬퍼하였으며 그를 추모하며 그의 법적을 기렸다. 유다의 최후는 이와 같았다. 그는 매우 용감하고 위대한[㈜ 추정된 다른 본문에는 “대단히 용감한. “] 투사였으며 부친 마타디아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동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전력을 바친 불굴의 용기를 가진 자였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해방시키고 마게도냐인들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위대하고 찬란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결국 그는 3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있다가 죽었다. [㈜ 참).각주520. 마지막 단락, (433-434)는 마카비 1서에 첨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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