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권 제 13장 클레오파트라가 상호 방위 동맹에 동의하자 알렉산더가 코엘레수리아로 진격하여 가사 시를 완전히 정복한 것과 자기를 반역하는 수만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또한 안티오쿠스 그리푸스 셀류쿠스 안티오주스 키지케누스, 안티오쿠스 피우스, 그

 


제 13 장



클레오파트라가 상호 방위 동맹에 동의하자 알렉산더가 코엘레수리아로 진격하여 가사 시를 완전히 정복한 것과 자기를 반역하는 수만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또한 안티오쿠스 그리푸스 셀류쿠스 안티오주스 키지케누스, 안티오쿠스 피우스, 그리고 기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1. 클레오파트라가 톨레미 라디루스를 수리아에서 떠나게 만들다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아들 톨레미가 힘을 키우고 있는 것과, 유대를 별다른 손실없이 파괴시킨 것과 가사(Gaza)가 계속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더이상 방관만해서 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반면 더욱 힘이 커진 톨레미는 그녀 가까이에 있으면서 애굽의 왕좌를 몹시 탐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유대인인 켈키아스와 아나니아를[㈜ 이런 유대 지휘관들에 대하여는 고대. 13권. 10 : 4(287)를 볼 것. ] 전군(全軍)의 지휘관으로 삼고 해군과 육군을 이끌고 그와 싸우기 위해 출군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재산중 반 이상과 손자들[㈜ Bevan(베반)은 \’Ptol. \’p330에서 \”이 손자들중 한명이 명백히 어린 톨레미 알렉산더(the young Ptolemy Alexander, Ptolemy X)이며 알렉산더 I세(Alexander 1, Ptolemy Ⅸ)의 한 아들이고 그외의 다른 이들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부쉐 레클레르크(Bouche-Leclercq)는 소테르(Soter)나 셀레네(Selene)의 아들들이라고 추측한다<참). 유스티누스(Justinus), xxxix. 4. 1>] 그리고 자신의 유언장을 안전을 위해 코스(Cos)로 보냈다. [㈜ 아스클레피우스(Asepius)성소에서. ] 그리고 난 후 그녀는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에게[㈜ 톨레미 Ⅸ세 ( Ptolemy Ⅸ). ] 커다란 함대를 이끌고 베니게를 향해[㈜ (\’베니게(Phoenicia)로\’) \”만약에 도주할 수 있다면\’란 異文은 설득력이 없다. ] 항해할 것을 명령하였다. 반면에 그녀 자신은[㈜ 본문은 약간 수정 하였다. ] 전군(全軍)을 이끌고 톨레마이스로 갔다. 그러나 그 주민들이 그녀를 받아주기를 거부하자, 그 도시를 공격하였다. 그러는 동안 톨레미는[㈜ 톨레미 Ⅷ세 소테르(Lathyrus). ] 수리아를 떠나 서둘러 애굽으로 갔다. [㈜ 그의 모친의 해군이 펠루시움(Pelusium)에서 그를 멈추게 하였다. 그는 즉시 구브로(Cyprus)로 되돌아 갔다(주전 약 102년), 참). 고대. 13권. 13 : 3(358). ] 왜냐하면 그는, 애굽에 군대가 없는 동안에 기습적으로 그곳의 재물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깨어지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의 두 지휘관 중 하나인 켈키아스가 코엘레수리 아에서 톨레미를 추적하는 동안 죽은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2. 클레오파트라가 유대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단념하도록 설득당하다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아들 톨레미의 시도에 대해 듣고, 또 애굽에 대한 그의 계획이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잘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군대의 일부를 보내어 그와 싸우게하여 그를나라 밖으로 몰아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금 애굽을 떠나 가사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톨레마이스에 있는 수비대를 포위 공격하여 그 수비대와 그 도시를 점령하였다. 한편 알렉산더는[㈜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많은 선물을 그녀에게 보냈다. [㈜ 다른 본문에는 \’그녀를 설득하였다. \’] 이것은 그가 톨레미에게 패하여 심한 고통을 겪은 후 충분 예상되어진 일이었다-왜냐하면 그에게는 이것보다 안전한 다른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의 몇몇 친구들은 그녀에게 이러한 선물들을 취하는 동시에 그의 나라로 쳐들어가서 점령해 버리자고 조언하였다. 그같이 많은 재원들이 한 사람 즉, 한사람의 유대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본문은 다소 수정되었다 : 여러 사본들은 \’선량한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부(富)가 한 사람에게 속하게 하려고\’라고 해서, 이는 명백히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만일 그녀가 한 동맹자에게서 그의 소유들을[㈜ 혹은 \’권위. \’] 빼앗는다면, 그녀는 불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와 반대로 조언하였다. \”특히 그 동맹자는 우리의혈족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은 바로 우리 모든 유대인들을 당신의 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 나니아의 권고로 인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더에게 나쁜 일을행치 않도록 설득당하였다. 그대신 그녀는 코엘레수리아에 있는스구도볼리 (Scythopolis)에서 그와 동맹을 맺었다.



3.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가사(Gaza)를 파괴하다



  [㈜ 고대. 13권. 13 : 3(356, 357)은 전쟁. 1권. 4 : 2(86,87)에 병행구가 있다.]



그후 톨레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앤 알렉산더는 즉시 코엘레 수리아로[㈜ 여기서는 요단강 저편(Transjordan)을 의미한다. 참). 고대. 11권. 2 : 1(25). ] 진군하여 열달 동안 공격한 후에 가다라(Gadara)를[㈜ 오늘날의 지명은 무케스(Mukes)로 야르묵(Yarmuk)과 요단강의합류 지점에서 동쪽으로 수 마일 떨어진 곳, 참). 고대. 12권. 5 : 3(136) 각주 154). ] 점령하였다. 그는 또한 요단강 너머에 있는 요새 중 가장강한 요새인 아마두스(Amathus)를[㈜ 오늘날의 지명은 텔 암마타(Tell Ammata)로, 얍복과 요단강의 합류 지점에서 북동쪽으로 수 마일 떨어진 곳으로 세겜(Schechem)과 같은 지역에 있다. ] 공격하였다. 그곳은 제 논(Zenon)의 아들인 데오도루스(Theodorus)가 최선을 다해서 방어하였으며, 또 그곳에는 가장 값진 보물들이 있는 곳이었다. 데오도루스는 유대인들을 잡자기 습격함으로써 그들 중 10,000명을 살육하였고 알렉산더의 군수품을 약탈하였다. [㈜ 전쟁. 1권. 4 : 2(87)에 따르면 그는 또한 그의 원래 영토를 회복하였다. ]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러한 실패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해안에 위 치하고 있는 도시들인 라피아(Raphia)와[㈜ 오늘날의 지명은 레파(Refa\’)로, 가사(Gaza)에서 남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곳으로 애굽과의 국경선에 인접해 있다. ] 안테돈(Anthedon)으로[㈜ 오늘날의 지명은 키르벳 티다(Khirbet Tida)로 아벨(Abel) ii : 245에 따르면 가사(Gaza)에서 북쪽으로 1마일 정도 떨어진 곳. ] 진군하였다. 안테돈은 나중에 혜롯왕(King Herod)이 아그리피아스(Agrippias)[㈜ 참). 전쟁. 1권. 7 : 3(146), 그곳에는 아그립페이온(Agrippeion)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 이름을 바꾼 곳인데, 이[㈜ \’영토\’라는 단어가 명백히 보충되어야 한다. ] 역시 강습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고대. 13권. 13 : 5(372)에 이르는 다음의 단락은 \’전쟁사\’에 어떤 병행구도 없다. ] 그는 톨레미가 가사에서 구브로로 그리고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가 애굽으로 후퇴한 것을알았을 때, 가사 사람들(the Gazaeans)에게 큰 분노를 터뜨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톨레미에게 와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의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여 그들의 영토를 노략하였다. 그러나 가사의 군대장관인아폴로도투스(Apollodotus)는 2,000명의 용병들과 10,000명의노예들을[㈜ (oijceviwn  okjketw\’n으로 읽음)라틴어 사본에는 Chamonard에 의해 채택된 \’시민들\’로 표시됨. ] 이끌고 야음을 틈타 유대인들의 진지를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그 밤에 그들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적에게 그들을 공격했던 사람은 톨레미였다고 믿게끔[㈜ dovkhsin paracovnte\” 는 투키디데스(Thucydidean)의 구절이다(Thuc. ii : 84. 1). ] 만들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 그렇게 믿은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유대인들은 그 일의 진상을 알자마자, 그들의 전(全) 병사들에게 알려 가사인들을 공격하여 그들 가운데 약 1,000명[㈜ 어떤 사본에는 \’2,000명. \’] 가량을살육하였다. 그러나 가사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끝까지 고수하였으며, 식량이 부족하고 또한 자기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들의 손에 잡히느니 차라리 어떠한 운명도 겪을 준비가 되어있었기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랍인들의 왕(the king of theArabs)인 아레타스(Aretas)가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다른 본문에는 \’열망\’] 기대 때문에 더욱 용기를[㈜ 대부분의 여러 사본들에는 \’그가 약속한 대로\’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나바타이아(Nabataean)왕 아레타스(Aretas) Ⅱ세와 힐카누스 Ⅱ세때 유대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아레타스 Ⅲ세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참). 고대. 14권. 1 : 4(14)이하. ] 얻었다. 그러나 원군이 오기 전에아폴로도투스가 먼저 암살을 당하였다. 왜냐하면 그 도시의 백성들이 그를 추앙하는 것을 질투한 그의 동생 리시마쿠스(Lys- imachus)가 그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 리시마쿠스는 군대를 하나로 합하였고,[㈜ 혹은 \’훈련된\’. ] 그 도시를 알렉산더에게 건네주었다.알렉산더는 그 도시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평화롭게 행하였다.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군사들을 가사인들 가운데 풀어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알아서 보복하라고 시켰다. 그러자 군사들은 두 패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가서 가사인들을죽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가사인들은 스스로 손에 무슨 무기든지 들고 유대인들에맞서 방어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이 죽임을 당한 수만큼 그들을죽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혼자 남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에 불을 놓아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고 태워버림으로써 적들이전리품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자녀들과 아내를 죽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녀들과 아내가 적들에게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그 도시의 의회원들 가운데 아폴로 신전안에 피해있는 사람은모두 500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회에 앉아있을 때에만 공격이 감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들을 거기에서 살육하였으며, 그 도시를 허물어뜨렸다. 알렉산더는 이공격에 1년을 소비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 고대. 13권. 13 : 3(358)에서 어떤 독자들은 가사(Gaza)에 대한 공격이 주전 약 102년 톨레미 라디루스와 클레오파트라 Ⅲ세가 팔레스틴에서 철수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 13권. 13 : 4 (365)에서 요세푸스는 공격의 종료와 주전 96년에 발생하였던 안티오쿠스 그리푸스(Antiochus Grypus)의 살해를 일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 저작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시 간에\”라는 표현은 모호한 시간을 표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Gaaa)가 점령당한 것은 주전 96년이라기 보다는 주전 100년경보다 더 가까운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



 4. 셀류키드인들(the Seleucids)의 동족상잔의 전쟁



 이때 쯤해서 그리푸스라 불리는 안티오쿠스는 헤라클레온 (Heracleon)이 꾸민 암살 음모에 의해 죽게 되었다. 그때 그는45세였으며 29년 간 통치하였다. [㈜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주전 125~4년경에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참). 쉬러(Schurer) I : 176. 그러나 안티오쿠스 그리푸스는 주전 122년경에 수리아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참). 고대. 13권. 10 : 1(272) 각주. 346). ] 그리고 그의 아들 셀류쿠스(Seleucus)가[㈜ 셀류쿠스 Ⅵ세 에피파네스 니카토르(Seleucus Ⅵ Epiphanes Nicalor). ]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기 아버지와 형제지간인 키지케누스와 전쟁을 벌였다. 셀류쿠스는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그를 붙잡아다 처형하였다. [㈜ 포르피리(Porphry)의 부록에 인용된 유세비우스\’연대기\’i : 260에 따르면 키지케누스(Cyzicenus)는 자기가 탄 말이 적진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그들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 그리나 그후 오래지 않아 유세베스(Eusebes, 경건한사람)라고 불리우는,[㈜ 안티오쿠스 X세 유세베스 필로파토르(Antiochus X Eusebes Philopator). ] 키지케누스의 아들인 안티오쿠스(Antlochus)가[㈜ 다시 말하면, 아들. ] 아라두스(Aradus)[㈜ 참). 라오디게아와 트리폴리(Tripolis)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수리아 해변. ] 에와서 그 왕관을 쓴 후에셀류쿠스와 전쟁을 벌였다. 안티오쿠스는 그 전쟁에서 승리를거둔 후, 그를[㈜ 다른 사본에는 복수형으로 쓰인 동사가 이 문장에서는 허드슨에 의해서 단수형으로 대치되었다. ] 전(全) 수리아에서 몰아내었다. 셀류쿠스는 길리기아로 도망하였으며,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에 이르렀을 때, 그는 다시 그곳 주민들로부터 돈을 강제로 거두려 하였다. 그러나 몹수에스티아 백성들은 이것에 분개하면서 그의 궁전을 블사르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그를 죽였다. [㈜ 참). 아피안(Appian). \’Syr. \’69, \’그는 경기장에서 화형되었다. \’포르피리(Porphyry), 유세비우스의 \’연대기\’ I : 262에는 궁전에서 화형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자결하였다. ] 그러다가 키지케누스의 아들인 안티오쿠스가[㈜ 안티도쿠스 \’세 에피파네스 필라델푸스(Philip Epiphanes Philadelphus). ] 수리아 전역을 다스리고 있는 동안에, 셀류쿠스의 형제인 안티오쿠스가 그에게 전쟁을 걸었으나, 전쟁에서 패하여 자신의 군대와 함께 처형을 당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형제인 빌립(Philip)이[㈜ 빌립 에피파네스 필라델푸스(Philip Epiphanes Philadelphus). ] 왕관을 쓰고 수리아의 일부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즉시 톨레미 라디루스는 크니두스(Cnidus)로부터 데메트리우스 아카이로스(Dem-etrius Akairos)라[㈜ 데메트리우스 Ⅲ세 데오스 필로파토르 소테르(Demetrius Ⅲ Theos Philopator Soter)에게는 유카이로스(Eukairos) 즉, \’시기를 잘 타는 자\’라는 별명이 있다. ] 불리는 자신의 네째[㈜ 한 사본에는 \’세째\’, 이것은 서기의 실수이거나 부당한 수정이다. ] 동생에게 사람을보내어 그를 다메섹(Damascus)에서 왕이 되게 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이 두 형제에게 용감히 맞섰으나[㈜ 키지케누스(Cyzicenus)의 아들, 안티오쿠스 Ⅹ세 유세베스 필로파토르(Antiochus Ⅹ Eusebes Philator). ] 곧 죽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파르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사메니아인들(the Samenians)의[㈜ 다른 본문에는 \’갈리에니(Galieni)\’, \’갈릴리인(Galilaeans)\’, \’갈라아데니안(Galadenians)\’, \’가미니(Gamini)\’라고 기술되어 있다. 사메니아인(the Samenians)들은 비잔티움의 스테파누스에 따르면 아랍족속이었다. ] 여왕인 라오디케(Laodice)를 도우러갔다가 용감하게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 아피안의 \’Syr. \’ 49, 70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유세베스(antiochus Eusebes)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Tigranes)에 의해 수리아로부터 추방되었다(주전 87년). 포르피리에 따르면 유세비우스의 \’연대기\’, I. 261. ] 그리하여 수리아는 다른 곳에서[㈜ 즉, 다른 역사가들에 의하여. 만일 dedhlwvkamen,\’우리가 언급하였다\’라는 읽기가 채택된다면, 그러한 문구는 요세푸스의 자료, 아마도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 언급된 바와 같이[㈜ 다른 본문에 는 \’우리가 언급했듯이. \’] 그 두 형제 즉, 데메트리우스와 빌립이 지배하게 되었다.





[㈜ 이곳에서부티 \’전쟁사\’의 병행구가 다시 시작된다. ]



 한편 알렉산더의 백성들은 그에 대해서 폭동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이 그에 대하여 분개하였기 때문이었다-그 절기의 축제[㈜\’전쟁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본문에서도 \’절기\’. 라틴어 사본에는\’장막절 절기\’로 기록되었다. \’절기(the festival)\’라는 말은 특히 장막절 절기를 암시하는 랍비적 히브리어 용어 헤 하그(he-\’\’g)와 정확히 일치한다. ] 때 알렉산더가 제단 곁에 서서 제사를 막 드리려는순간에 그들은 그에게 시트론(Citrons, 레몬 비슷한 식물)을 던졌다. 초막절때 모든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와 시트론 가지로만든 막대기를 가지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의 풍습이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 3권. 10 : 4(245). ]살펴본 바가 있다-그리고 그들은 그가 포로의 후손이며 또 거룩한 직무를 계속하며 제사를 드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대제사장으로서, 참). 고대. 13권. 10 : 4(292). ] 말로 그에게 모욕을 가하였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더는 그들 중에서 6,000명을 죽였으며, 또한 오직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뜰의 ) 안쪽끝에 이르기까지 제단과 성전의 주위에 나무로 된 울타리를[㈜ 요새에 관한 언급은 다소 혼란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이 요새(barrier, eivsion) 또는 qrigkov\”)는 요세푸스, 고대. 8권. 3 : 9(95)에 따르면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되었고, 헤롯 성전과 마찬가지로 두번째 성전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참). 전쟁. 5핀. 5 : 6(226). ] 설치해 놓았다. 이리하여 그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던 것이었다. 그는 또한 비시디아(Pisidia)와 길리기아의 용병들을 계속 보유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수리아와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수리아인들을 용병으로 사용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는모압(Moab)과 갈라디티스(Galaaditis)의 아랍인들을 굴복시킨후에, 그들에게 강제로 공물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아마두스를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데오도루스가 대담하게 그와싸우러 들판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아랍인들의 왕인 오베다스(Obedas)와의 전쟁에 열중하였다.그러다가 거칠고 험한 땅에서 복병을 만난 그는 수많은 낙타 기병들에 의해 가울라니스(Gaulanis)의[㈜ 다른 본문에는 \”가다라\”, \’카라드라(Charadra)\’로 나온다. 그 장소가 하나의 마을이었다는 사실은 \’가다학\'(Gadara)라는 읽기를 의심스럽게 한다. 다음 각주를 참조. ] 한 마을인 가라다(Ga-rada)[㈜ 쉬러(Schurer), 니이제(Niese),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전쟁사\’로부터 수정됨. ] 가까이에 있는 깊은 계곡으로 밀려나갔다. 그래서 그는자기 생명을 거의 구하기 어려웠으나, 겨우 도망쳐나와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러나 그때 그(유대) 민족은 패배하고 돌아오는 그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그 민족과 싸움을 벌여, 6년도채 못되어 유대인 50,000명 이상을 살육하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에 대해 적의를 그만 품어 달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동안에 일어났던 일들로 인하여 더욱 그를 미워하였다. 그래서 그가 백성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며 또 그들은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본문은 약간 수정되었다. ] 그들은 하나같이 소리 쳤다. \’자결하시오\’. 그리고 백성들은 데메트리우스 아카이로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도움을 구하며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 주전 88년경, 참). 쉬러(Schurer i . 282와 베반(Bevan), \’Sel\’2 : 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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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권 제 13장 클레오파트라가 상호 방위 동맹에 동의하자 알렉산더가 코엘레수리아로 진격하여 가사 시를 완전히 정복한 것과 자기를 반역하는 수만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또한 안티오쿠스 그리푸스 셀류쿠스 안티오주스 키지케누스, 안티오쿠스 피우스, 그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3 장


    클레오파트라가 상호 방위 동맹에 동의하자 알렉산더가 코엘레수리아로 진격하여 가사 시를 완전히 정복한 것과 자기를 반역하는 수만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또한 안티오쿠스 그리푸스 셀류쿠스 안티오주스 키지케누스, 안티오쿠스 피우스, 그리고 기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1. 클레오파트라가 톨레미 라디루스를 수리아에서 떠나게 만들다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아들 톨레미가 힘을 키우고 있는 것과, 유대를 별다른 손실없이 파괴시킨 것과 가사(Gaza)가 계속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더이상 방관만해서 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반면 더욱 힘이 커진 톨레미는 그녀 가까이에 있으면서 애굽의 왕좌를 몹시 탐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유대인인 켈키아스와 아나니아를[㈜ 이런 유대 지휘관들에 대하여는 고대. 13권. 10 : 4(287)를 볼 것. ] 전군(全軍)의 지휘관으로 삼고 해군과 육군을 이끌고 그와 싸우기 위해 출군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재산중 반 이상과 손자들[㈜ Bevan(베반)은 ‘Ptol. ‘p330에서 “이 손자들중 한명이 명백히 어린 톨레미 알렉산더(the young Ptolemy Alexander, Ptolemy X)이며 알렉산더 I세(Alexander 1, Ptolemy Ⅸ)의 한 아들이고 그외의 다른 이들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부쉐 레클레르크(Bouche-Leclercq)는 소테르(Soter)나 셀레네(Selene)의 아들들이라고 추측한다<참). 유스티누스(Justinus), xxxix. 4. 1>] 그리고 자신의 유언장을 안전을 위해 코스(Cos)로 보냈다. [㈜ 아스클레피우스(Asepius)성소에서. ] 그리고 난 후 그녀는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에게[㈜ 톨레미 Ⅸ세 ( Ptolemy Ⅸ). ] 커다란 함대를 이끌고 베니게를 향해[㈜ (‘베니게(Phoenicia)로’) “만약에 도주할 수 있다면’란 異文은 설득력이 없다. ] 항해할 것을 명령하였다. 반면에 그녀 자신은[㈜ 본문은 약간 수정 하였다. ] 전군(全軍)을 이끌고 톨레마이스로 갔다. 그러나 그 주민들이 그녀를 받아주기를 거부하자, 그 도시를 공격하였다. 그러는 동안 톨레미는[㈜ 톨레미 Ⅷ세 소테르(Lathyrus). ] 수리아를 떠나 서둘러 애굽으로 갔다. [㈜ 그의 모친의 해군이 펠루시움(Pelusium)에서 그를 멈추게 하였다. 그는 즉시 구브로(Cyprus)로 되돌아 갔다(주전 약 102년), 참). 고대. 13권. 13 : 3(358). ] 왜냐하면 그는, 애굽에 군대가 없는 동안에 기습적으로 그곳의 재물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깨어지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의 두 지휘관 중 하나인 켈키아스가 코엘레수리 아에서 톨레미를 추적하는 동안 죽은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2. 클레오파트라가 유대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단념하도록 설득당하다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아들 톨레미의 시도에 대해 듣고, 또 애굽에 대한 그의 계획이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잘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군대의 일부를 보내어 그와 싸우게하여 그를나라 밖으로 몰아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금 애굽을 떠나 가사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톨레마이스에 있는 수비대를 포위 공격하여 그 수비대와 그 도시를 점령하였다. 한편 알렉산더는[㈜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많은 선물을 그녀에게 보냈다. [㈜ 다른 본문에는 ‘그녀를 설득하였다. ‘] 이것은 그가 톨레미에게 패하여 심한 고통을 겪은 후 충분 예상되어진 일이었다-왜냐하면 그에게는 이것보다 안전한 다른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의 몇몇 친구들은 그녀에게 이러한 선물들을 취하는 동시에 그의 나라로 쳐들어가서 점령해 버리자고 조언하였다. 그같이 많은 재원들이 한 사람 즉, 한사람의 유대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본문은 다소 수정되었다 : 여러 사본들은 ‘선량한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부(富)가 한 사람에게 속하게 하려고’라고 해서, 이는 명백히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만일 그녀가 한 동맹자에게서 그의 소유들을[㈜ 혹은 ‘권위. ‘] 빼앗는다면, 그녀는 불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와 반대로 조언하였다. “특히 그 동맹자는 우리의혈족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은 바로 우리 모든 유대인들을 당신의 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 나니아의 권고로 인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더에게 나쁜 일을행치 않도록 설득당하였다. 그대신 그녀는 코엘레수리아에 있는스구도볼리 (Scythopolis)에서 그와 동맹을 맺었다.


    3.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가사(Gaza)를 파괴하다


      [㈜ 고대. 13권. 13 : 3(356, 357)은 전쟁. 1권. 4 : 2(86,87)에 병행구가 있다.]


    그후 톨레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앤 알렉산더는 즉시 코엘레 수리아로[㈜ 여기서는 요단강 저편(Transjordan)을 의미한다. 참). 고대. 11권. 2 : 1(25). ] 진군하여 열달 동안 공격한 후에 가다라(Gadara)를[㈜ 오늘날의 지명은 무케스(Mukes)로 야르묵(Yarmuk)과 요단강의합류 지점에서 동쪽으로 수 마일 떨어진 곳, 참). 고대. 12권. 5 : 3(136) 각주 154). ] 점령하였다. 그는 또한 요단강 너머에 있는 요새 중 가장강한 요새인 아마두스(Amathus)를[㈜ 오늘날의 지명은 텔 암마타(Tell Ammata)로, 얍복과 요단강의 합류 지점에서 북동쪽으로 수 마일 떨어진 곳으로 세겜(Schechem)과 같은 지역에 있다. ] 공격하였다. 그곳은 제 논(Zenon)의 아들인 데오도루스(Theodorus)가 최선을 다해서 방어하였으며, 또 그곳에는 가장 값진 보물들이 있는 곳이었다. 데오도루스는 유대인들을 잡자기 습격함으로써 그들 중 10,000명을 살육하였고 알렉산더의 군수품을 약탈하였다. [㈜ 전쟁. 1권. 4 : 2(87)에 따르면 그는 또한 그의 원래 영토를 회복하였다. ]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러한 실패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해안에 위 치하고 있는 도시들인 라피아(Raphia)와[㈜ 오늘날의 지명은 레파(Refa’)로, 가사(Gaza)에서 남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곳으로 애굽과의 국경선에 인접해 있다. ] 안테돈(Anthedon)으로[㈜ 오늘날의 지명은 키르벳 티다(Khirbet Tida)로 아벨(Abel) ii : 245에 따르면 가사(Gaza)에서 북쪽으로 1마일 정도 떨어진 곳. ] 진군하였다. 안테돈은 나중에 혜롯왕(King Herod)이 아그리피아스(Agrippias)[㈜ 참). 전쟁. 1권. 7 : 3(146), 그곳에는 아그립페이온(Agrippeion)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 이름을 바꾼 곳인데, 이[㈜ ‘영토’라는 단어가 명백히 보충되어야 한다. ] 역시 강습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고대. 13권. 13 : 5(372)에 이르는 다음의 단락은 ‘전쟁사’에 어떤 병행구도 없다. ] 그는 톨레미가 가사에서 구브로로 그리고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가 애굽으로 후퇴한 것을알았을 때, 가사 사람들(the Gazaeans)에게 큰 분노를 터뜨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톨레미에게 와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의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여 그들의 영토를 노략하였다. 그러나 가사의 군대장관인아폴로도투스(Apollodotus)는 2,000명의 용병들과 10,000명의노예들을[㈜ (oijceviwn  okjketw’n으로 읽음)라틴어 사본에는 Chamonard에 의해 채택된 ‘시민들’로 표시됨. ] 이끌고 야음을 틈타 유대인들의 진지를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그 밤에 그들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적에게 그들을 공격했던 사람은 톨레미였다고 믿게끔[㈜ dovkhsin paracovnte” 는 투키디데스(Thucydidean)의 구절이다(Thuc. ii : 84. 1). ] 만들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 그렇게 믿은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유대인들은 그 일의 진상을 알자마자, 그들의 전(全) 병사들에게 알려 가사인들을 공격하여 그들 가운데 약 1,000명[㈜ 어떤 사본에는 ‘2,000명. ‘] 가량을살육하였다. 그러나 가사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끝까지 고수하였으며, 식량이 부족하고 또한 자기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들의 손에 잡히느니 차라리 어떠한 운명도 겪을 준비가 되어있었기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랍인들의 왕(the king of theArabs)인 아레타스(Aretas)가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다른 본문에는 ‘열망’] 기대 때문에 더욱 용기를[㈜ 대부분의 여러 사본들에는 ‘그가 약속한 대로’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나바타이아(Nabataean)왕 아레타스(Aretas) Ⅱ세와 힐카누스 Ⅱ세때 유대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아레타스 Ⅲ세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참). 고대. 14권. 1 : 4(14)이하. ] 얻었다. 그러나 원군이 오기 전에아폴로도투스가 먼저 암살을 당하였다. 왜냐하면 그 도시의 백성들이 그를 추앙하는 것을 질투한 그의 동생 리시마쿠스(Lys- imachus)가 그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 리시마쿠스는 군대를 하나로 합하였고,[㈜ 혹은 ‘훈련된’. ] 그 도시를 알렉산더에게 건네주었다.알렉산더는 그 도시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평화롭게 행하였다.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군사들을 가사인들 가운데 풀어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알아서 보복하라고 시켰다. 그러자 군사들은 두 패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가서 가사인들을죽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가사인들은 스스로 손에 무슨 무기든지 들고 유대인들에맞서 방어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이 죽임을 당한 수만큼 그들을죽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혼자 남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에 불을 놓아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고 태워버림으로써 적들이전리품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자녀들과 아내를 죽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녀들과 아내가 적들에게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그 도시의 의회원들 가운데 아폴로 신전안에 피해있는 사람은모두 500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회에 앉아있을 때에만 공격이 감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들을 거기에서 살육하였으며, 그 도시를 허물어뜨렸다. 알렉산더는 이공격에 1년을 소비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 고대. 13권. 13 : 3(358)에서 어떤 독자들은 가사(Gaza)에 대한 공격이 주전 약 102년 톨레미 라디루스와 클레오파트라 Ⅲ세가 팔레스틴에서 철수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 13권. 13 : 4 (365)에서 요세푸스는 공격의 종료와 주전 96년에 발생하였던 안티오쿠스 그리푸스(Antiochus Grypus)의 살해를 일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 저작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시 간에”라는 표현은 모호한 시간을 표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Gaaa)가 점령당한 것은 주전 96년이라기 보다는 주전 100년경보다 더 가까운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


     4. 셀류키드인들(the Seleucids)의 동족상잔의 전쟁


     이때 쯤해서 그리푸스라 불리는 안티오쿠스는 헤라클레온 (Heracleon)이 꾸민 암살 음모에 의해 죽게 되었다. 그때 그는45세였으며 29년 간 통치하였다. [㈜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주전 125~4년경에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참). 쉬러(Schurer) I : 176. 그러나 안티오쿠스 그리푸스는 주전 122년경에 수리아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참). 고대. 13권. 10 : 1(272) 각주. 346). ] 그리고 그의 아들 셀류쿠스(Seleucus)가[㈜ 셀류쿠스 Ⅵ세 에피파네스 니카토르(Seleucus Ⅵ Epiphanes Nicalor). ]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기 아버지와 형제지간인 키지케누스와 전쟁을 벌였다. 셀류쿠스는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그를 붙잡아다 처형하였다. [㈜ 포르피리(Porphry)의 부록에 인용된 유세비우스’연대기’i : 260에 따르면 키지케누스(Cyzicenus)는 자기가 탄 말이 적진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그들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 그리나 그후 오래지 않아 유세베스(Eusebes, 경건한사람)라고 불리우는,[㈜ 안티오쿠스 X세 유세베스 필로파토르(Antiochus X Eusebes Philopator). ] 키지케누스의 아들인 안티오쿠스(Antlochus)가[㈜ 다시 말하면, 아들. ] 아라두스(Aradus)[㈜ 참). 라오디게아와 트리폴리(Tripolis)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수리아 해변. ] 에와서 그 왕관을 쓴 후에셀류쿠스와 전쟁을 벌였다. 안티오쿠스는 그 전쟁에서 승리를거둔 후, 그를[㈜ 다른 사본에는 복수형으로 쓰인 동사가 이 문장에서는 허드슨에 의해서 단수형으로 대치되었다. ] 전(全) 수리아에서 몰아내었다. 셀류쿠스는 길리기아로 도망하였으며,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에 이르렀을 때, 그는 다시 그곳 주민들로부터 돈을 강제로 거두려 하였다. 그러나 몹수에스티아 백성들은 이것에 분개하면서 그의 궁전을 블사르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그를 죽였다. [㈜ 참). 아피안(Appian). ‘Syr. ’69, ‘그는 경기장에서 화형되었다. ‘포르피리(Porphyry), 유세비우스의 ‘연대기’ I : 262에는 궁전에서 화형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자결하였다. ] 그러다가 키지케누스의 아들인 안티오쿠스가[㈜ 안티도쿠스 ‘세 에피파네스 필라델푸스(Philip Epiphanes Philadelphus). ] 수리아 전역을 다스리고 있는 동안에, 셀류쿠스의 형제인 안티오쿠스가 그에게 전쟁을 걸었으나, 전쟁에서 패하여 자신의 군대와 함께 처형을 당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형제인 빌립(Philip)이[㈜ 빌립 에피파네스 필라델푸스(Philip Epiphanes Philadelphus). ] 왕관을 쓰고 수리아의 일부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즉시 톨레미 라디루스는 크니두스(Cnidus)로부터 데메트리우스 아카이로스(Dem-etrius Akairos)라[㈜ 데메트리우스 Ⅲ세 데오스 필로파토르 소테르(Demetrius Ⅲ Theos Philopator Soter)에게는 유카이로스(Eukairos) 즉, ‘시기를 잘 타는 자’라는 별명이 있다. ] 불리는 자신의 네째[㈜ 한 사본에는 ‘세째’, 이것은 서기의 실수이거나 부당한 수정이다. ] 동생에게 사람을보내어 그를 다메섹(Damascus)에서 왕이 되게 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이 두 형제에게 용감히 맞섰으나[㈜ 키지케누스(Cyzicenus)의 아들, 안티오쿠스 Ⅹ세 유세베스 필로파토르(Antiochus Ⅹ Eusebes Philator). ] 곧 죽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파르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사메니아인들(the Samenians)의[㈜ 다른 본문에는 ‘갈리에니(Galieni)’, ‘갈릴리인(Galilaeans)’, ‘갈라아데니안(Galadenians)’, ‘가미니(Gamini)’라고 기술되어 있다. 사메니아인(the Samenians)들은 비잔티움의 스테파누스에 따르면 아랍족속이었다. ] 여왕인 라오디케(Laodice)를 도우러갔다가 용감하게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 아피안의 ‘Syr. ‘ 49, 70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유세베스(antiochus Eusebes)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Tigranes)에 의해 수리아로부터 추방되었다(주전 87년). 포르피리에 따르면 유세비우스의 ‘연대기’, I. 261. ] 그리하여 수리아는 다른 곳에서[㈜ 즉, 다른 역사가들에 의하여. 만일 dedhlwvkamen,’우리가 언급하였다’라는 읽기가 채택된다면, 그러한 문구는 요세푸스의 자료, 아마도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 언급된 바와 같이[㈜ 다른 본문에 는 ‘우리가 언급했듯이. ‘] 그 두 형제 즉, 데메트리우스와 빌립이 지배하게 되었다.



    [㈜ 이곳에서부티 ‘전쟁사’의 병행구가 다시 시작된다. ]


     한편 알렉산더의 백성들은 그에 대해서 폭동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이 그에 대하여 분개하였기 때문이었다-그 절기의 축제[㈜’전쟁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본문에서도 ‘절기’. 라틴어 사본에는’장막절 절기’로 기록되었다. ‘절기(the festival)’라는 말은 특히 장막절 절기를 암시하는 랍비적 히브리어 용어 헤 하그(he-”g)와 정확히 일치한다. ] 때 알렉산더가 제단 곁에 서서 제사를 막 드리려는순간에 그들은 그에게 시트론(Citrons, 레몬 비슷한 식물)을 던졌다. 초막절때 모든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와 시트론 가지로만든 막대기를 가지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의 풍습이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 3권. 10 : 4(245). ]살펴본 바가 있다-그리고 그들은 그가 포로의 후손이며 또 거룩한 직무를 계속하며 제사를 드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대제사장으로서, 참). 고대. 13권. 10 : 4(292). ] 말로 그에게 모욕을 가하였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더는 그들 중에서 6,000명을 죽였으며, 또한 오직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뜰의 ) 안쪽끝에 이르기까지 제단과 성전의 주위에 나무로 된 울타리를[㈜ 요새에 관한 언급은 다소 혼란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이 요새(barrier, eivsion) 또는 qrigkov”)는 요세푸스, 고대. 8권. 3 : 9(95)에 따르면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되었고, 헤롯 성전과 마찬가지로 두번째 성전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참). 전쟁. 5핀. 5 : 6(226). ] 설치해 놓았다. 이리하여 그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던 것이었다. 그는 또한 비시디아(Pisidia)와 길리기아의 용병들을 계속 보유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수리아와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수리아인들을 용병으로 사용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는모압(Moab)과 갈라디티스(Galaaditis)의 아랍인들을 굴복시킨후에, 그들에게 강제로 공물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아마두스를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데오도루스가 대담하게 그와싸우러 들판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아랍인들의 왕인 오베다스(Obedas)와의 전쟁에 열중하였다.그러다가 거칠고 험한 땅에서 복병을 만난 그는 수많은 낙타 기병들에 의해 가울라니스(Gaulanis)의[㈜ 다른 본문에는 “가다라”, ‘카라드라(Charadra)’로 나온다. 그 장소가 하나의 마을이었다는 사실은 ‘가다학'(Gadara)라는 읽기를 의심스럽게 한다. 다음 각주를 참조. ] 한 마을인 가라다(Ga-rada)[㈜ 쉬러(Schurer), 니이제(Niese),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전쟁사’로부터 수정됨. ] 가까이에 있는 깊은 계곡으로 밀려나갔다. 그래서 그는자기 생명을 거의 구하기 어려웠으나, 겨우 도망쳐나와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러나 그때 그(유대) 민족은 패배하고 돌아오는 그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그 민족과 싸움을 벌여, 6년도채 못되어 유대인 50,000명 이상을 살육하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에 대해 적의를 그만 품어 달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동안에 일어났던 일들로 인하여 더욱 그를 미워하였다. 그래서 그가 백성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며 또 그들은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본문은 약간 수정되었다. ] 그들은 하나같이 소리 쳤다. ‘자결하시오’. 그리고 백성들은 데메트리우스 아카이로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도움을 구하며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 주전 88년경, 참). 쉬러(Schurer i . 282와 베반(Bevan), ‘Sel’2 : 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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