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권 32년 동안의 사건을 다룸
알렉산드라 여왕의 죽음부터 안티고누스의 죽음까지
제 1 장
아리스토불루스와 힐카누스가 왕권 때문에 싸웠지만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 되고 힐카누스는 서인(庶人)이 되기로 합의가 된 것과 조금 후에 힐카누스가 안티파테르의 설득을 아레타스에게로 도망한 것에 대하여
1. 제 14권의 서론
제13권에서 알렉산드라 여왕과 그녀의 죽음의 역사에 대해 언급했으므로, 이제 그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무지를 통해서나 기억의 오류를 통해서 어떠한 사건도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 게는 그것들이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의 관련성과 기록이 매력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휘의 적절한 취사선택과 배열에 의하여 이야기를 더욱 고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독자들은 상당한 정도의 만족과 즐거움을 가지고 정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이 주된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정확성이며[㈜ 다른 본문에는 \’정확히 한 후 말하다\’.] 또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모든 중요한 사실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의 의무에 대한 유사한 수칙에 관해서는 전쟁 1권. 서문(16), 고대. 1권. 서문(4)을 보라. 라이나흐(Reinach)는 요세푸스가 제14권에서 중요한 자료로서 다메섹의 니콜라스를 인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대. 17권. 206에서 계속됨). 그러나 요세푸스는 일부 주(註)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전 책에서는 자유롭게 니콜라스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 이 책의 마지막 권에 있는 참고자료에 관한 부록을 보라. 자세하지만 종종 사색적인 라쿠오이어(R. Laqueur)의 \’Der Judische Historiker Flavius Josephus\’ 1920, 128-221에 나오는 고대. 14권. 전쟁. 1권. 사이의 병행구 연구를 참고하라.]
2. 힐카누스 Ⅱ세와 아리스토불루스 Ⅱ세가 맺은 협정에 의하여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 되다
[㈜ 고대. 14권. (4-8)은 전쟁. 1권. (120-123)과 부분적으로 병행구를 이룬다.]
그런데 제177회 올림피아드 3년째 되던 해에 힐카누스가 왕권을[㈜ 다른 사본에는 \’대제사장\’, \”왕권\”(basileivan)은 전쟁. 1권. (120)과 다른 본문에서 보충되며 다음 주(註)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차지하였을 때 로마의 집정관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와 크레티쿠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퀸투스 메텔루스였다.[㈜ 올림피아드 해(年)와 집정관의 해(consular years)는 주전 70-69년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힐카누스가 왕권을 보장 받은 해는 알렉산드라가 죽기 2년전이었다. 또한 고대. 14권. (97)과 20권. (244)에서는 아리스토불루스가 3년 6개월간 통치한 것과 고대. 15권. (180)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사후 힐카누스가 3개월동안 왕이었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결국 두 왕위가 총 3년 9개월 지속되었다는 것인데, 주전 63년으로 거슬러 가서 생각해 보면 그때는 폼페이가 아리스토불루스의 통치를 마감했던 때이고 주전 67년에는 힐카누스가 등극하게 된다. 쉬너(Schurer)는 그의 책 i . 256 주 1에서 요세푸스는 여기에서 연대기 편람을 의존하여 본국의 전숭과 불일치한 연대기를 기록한다고 바르게 추정 한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신속하게 힐카누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고, 여리고지역의 전투에서 힐카누스의 많은 병사들이 그의 동생에게로 달아나 버렀다. 이 패배로 인하여 힐카누스는 성채로 도망하였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전에 말하였듯이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내와아이들이 그의 모친에 의하여 감금되어 있었다.[㈜ 고대. 13권. (426)] 그는 성전의경내에 피신해 있던 반대파의 사람들을 공격하여 포로로 잡았다.[㈜ 전쟁. 1권.(120)은 힐카누스가 아리토불루스 아내와 그의 자녀를 인질로 잡았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함.] 그리고 동생에게 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한 후에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 되고, 자신은 공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살며,또한 그의 소유 재산들을 향유하는데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적대 행위를 종식하였다.[㈜ 요세푸스는 이곳과 병행본문인 전쟁 1권. (121)에서 암시는 하지만 힐카누스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왕좌를 내준 것뿐 아니라 대제사장직을 물려준 것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특히 고대. 14권. 7). 그러나 고대. 14권.(41), (97)과 20권.(243, 244)에서 아리스토불루스가 힐카누스 대신 대제사장직에올랐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몇몇 학자들이 그렇듯이 주전 67년과 63년 사이에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직을 계속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BJPOS\’6(1939), 145-148에 나오는 샬리트(A.Schalit )의 글을 보라.] 이 협정은 성전의 됫뜰에서 이루어겼는데, 맹세와 서약에 의하여 이 협정을 인준하고 모든 백성들의 면전에서 서로가 서로를 포옹한 후에 아리스토불루스는 궁전으로, 힐카누스는 이제 일개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전쟁. 이 고대에 비해 힐카누스를 더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지적한 라쿠오이어(Laqueuer)는 이 약간의 차이가 헤롯 가문에 대한 요세푸스의 태도에 변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헤롯의 선조 안티파테르는 후에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해 힐카누스가 승리한 것의 원인이 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의 집으로 각각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3. 이두매인 안티파테르의 흥기
그러나 힐카누스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안티파테르라 불리는 이두매 인이었고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본성적으로 행동가요 분쟁을 조성하는 사람으로서 아리스토불루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힐카누스와의 친분관계 때문에 싸움을 벌이곤 했었다. 다메섹의 니콜라스는 안티파테르의 가족이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온 지도적인 유대인들에 속하였다고 말한다.[㈜ 저스틴 마터 (Justin Martyr)는 안티파테르가 아스글론인(Ascalonite)이라고 말한다(\’Dial. c. Tryph.\’52).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i 7. 11에서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는 안티파테르의 아버지 헤롯은 아스글론에 있는 아폴로 신전의 노예였고 안티파테르는 소년기에 이두매 강도들이 데려갔다고 한다. 다음 주를 참고하라.] 그러나 니콜라스는 운이 좋아 유대인의 왕이 되었던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롯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 말을 하였던 것이다. 헤롯에 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 고대. 15권과 전쟁. 1권.(123)에서 요세푸스는 안티파테르가 인종적으로는 이두매인이었으며 단순히 그의 조상, 부(富) 그리고 그밖의 다른 잇점들 때문에 지배 계층이 될 수 있었다고 맡하였다. 대헤롯과 그의 옹호자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에 대해 요세푸스의 달라진 태도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쉬러(Scurer) i. 292 주 3, 라쿠오이어(Laqueur) 136-139, 오토의 \’헤롯\’ pp.15, 17-18, 자코비 (Jacob y)의 \’FGH\’ii.381과 단편 96의 주석 p.255를 보라. 주석에서는 니콜라스가 실제로 헤롯의 바벨론의 유대인 조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안티파테르는 처음엔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었던 안티파스로 불렸던 것 같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에 따르면 안티파테르의 아버지는 헤롯이라고 불리웠다. 각주 10을 보라.] 알렉산더 대왕과[㈜ 얀네우스.] 그의 왕비는 안티파테르의 아버지 안티파스를 이두매 전 지역의 분봉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주변 아랍인들과 가사인들, 그리고 아스글론인들을 친구로 삼았으며, 또한 많은 선물을 줌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압도하였다고 하였다. 젊은 안티파테르는 아리스토불루스의 권력을[㈜ 헬라어 본문은 dunasteivan … dunasteuvonta\”. 이 절(111)에서는 어간이 비슷한 두 단어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 a[dikon … ajdivkw\”와 presbuvteron … presbei\’on 등.] 시샘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한 증오로 인하여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은밀한 대화들을 통하여 유력한유대인들을 자극하여 아리스토불루스를 반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리스토불루스가 그롯된 방법으로 힐카누스가 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형을 권좌에서 물아내고, 왕권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그가 쉬지않고 계속해서 힐카누스에게 전하였던 의견들이었다. 더구나 힐카누스가 몸을 피신하여 자기의 안전을도모하지 않는다면[㈜ 본문이 다소 수정되었다. 다른 사본에는 \’그를(아리스토불루스를)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그의 말대로 아리스토불루스가 권력을 차지하였을 때, 아리스토불루스의 친구들이 그에게 힐카누스를 은밀하게 제거하라고 충고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힐카누스는 이런 말들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원래 정직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므로 중상 모략을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무력함과 의지의 박약으로 인하여 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미천하고 나약하게 보였다. 그러나 실상 아리스토불루스는 정반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행동가였으며[㈜ 이 부분에 대한 투키디데스 조수의 to a[pragmon과 drasthvrio\”의 대조에 대해서 고대. 18권. 408의 각주를 보라.] 기민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4. 안티파테르가 힐카누스를 설득하여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항하여 아랍왕 아레타스로부터 도움을 청하게 하다]
[㈜ 고대. 14권.(14-19)의 부분은 부분적으로 전쟁. 1권.(124-126)과 병행 본문을 이룬다.]
그런데 힐카누스가 자기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안티파테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힐카누스 면전에서 아리스토불루스를 거짓된 비난들로 중상모략하기를 아리스토불루스가 힐카누스를 죽이고 싶어한다고 거짓 모함을 하였다. 이렇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는 마침내 힐카누스를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랍 왕인 아레타스에게로[㈜ 아레타스(Aretas) Ⅲ세. 참). 고대. 13권. (360) 각주 454.] 도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만약 힐카누스가 자기의 충고를 따른다면 그도 역시 자기의 맹우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힐카누스는 이것이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말에따라 아라비아가 유대에 접하여 있기 때문에 기꺼이 아레타스에게로 도피하였다.[㈜ 참). 고대 13권.(391) 각주.] 그러나 그는 먼저 안티파데르를 아랍왕에게로 보내어 자기가 탄원자로서 그에게 가게 될 때, 아레타스가 자신을 자기의 적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확약을 받아 오도록 하였다. 안티파테르는 이러한 분명한 확약을받아 온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힐카누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그는 야간에 힐카누스를 호위하여 그 도시를빠져나왔다. 상당한 거리를 여행한 후에 그는 힐카누스를 페트라라는 도시로 인도하였는데,[㈜ 페트라는 애루살렘으로부터 100마일 이상 떨어져 있다. 헬라도시들을 편리하게 살피 보려면 G.로빈슨(Robinson)의 \’고대 문명의 석관\'(The Sarcophagus of an Ancient Civilization), 1580을 참고하라.]그 도시는 아레타스의 궁전이있는 곳이었다. 얼마 후 왕의 아주 절친한 친구로서 안티파테르는 왕에게 힐카누스를 유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요청하였다. 그는 이 일을 매일같이 간단(間斷)없이 간청하고또한 선물들을 제공하여 마침내 아레타스를 설득하였다.[㈜ 전쟁. 1권. (124-126)얘 따르면 안티파테르는 또한 아첨도 잘하였다.] 거기다가 힐카누스 역시 왕에게 약속하기를 자기가 복권되어 왕위를차지하게 되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와서 자기 아버지 알렉산더가 아랍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지역과 12도시들을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전쟁.에 언급되지 않은)몇몇 도시들은 힐카누스 I세에 의해 포위되었다 어떤 이름들은 그 정확한 형태가 매우 의심스럽다. 참). 고대. 13권. 15 : . 4(395).] 이 도시들은 메다바(Medaba),[㈜ 참). 고대. 13권. (255).] 립바(Libba),[㈜ 다른 본문에는 \’리반트라\'(Libanthra) , \’리비아스\'(Livias) .)] 다발롯(Dabaoth),[㈜ 사본의 \’나발롯\'(NabaBoth), \’나발로\'(Naballo)에 대해 아벨(Abel)이 \’GP\’ii. 148에서 추정된 본문이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잠언의 벧 디블라다임(Beth Diblathalm)이다. 오늘날의 델라이랏(Deleilat)으로, 립바(Libba)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5마일 떨어진 곳.] 아라바다(Arabatha),[㈜ 다른 사본에는 \’라바다\'(Rabatha), \’발바다\'(Barbatha), \’다라바다\’ (Tharabatha) ; 성경의 랍밧 모압(Rabbath Moab)으로 오늘의 랍바 (Rabba). 사해로부터 동쪽과 그 중심으로 부터 남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져 있음.] 아갈라(Agalla),[㈜ 다른 사본에는 \’갈란(Galan)\’ 참). 고대. 13권.(397) 각주 541.] 아도네(Athone),[㈜ 28) 다른 사본에는 \’도네 (Thone)\’. 참). 고대. 13권. (39 각주 542.] 조아라(Zoara),[㈜ 참). 고대. 13권. (397) 각주 543.] 오로나인(Oronain),[㈜ 그 아래의 세 이름은 니이제(Niese)의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오로나인(Oronain)에 관해서는 고대. 13권. (397) 각주 540을 참조하라.] 고볼리스(Gobo1is),[㈜ 아벨의 \’GP\’ii. 148에 따르면 이것은 가발로스(Catalos)인데 오늘날의 엘 예발린(el-Jebalin)으로 조아라(Zoara)에서 동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 참). 고대. 2권. (6) 각주.] 아릿다(Arydda),[㈜ 사본들에는 \’사릿다\'(Sarydda), \’릿다\'(Rydda), \’마리사\’로 나와 있다. 아벨(Abel)은 이 아릿다를 네게브(Negeb) 근처의 나큽 엘 아루드(Naqb el-Arud)라고 추정한다.] 알루사(Alusa),[㈜ 다른 사본에는 룻사(Lussa)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의 칼라사(Khalasa) 지역인 엘루사(Elusa)는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성읍이었다.] 오립다(Orybda)[㈜ 다론 사본에는 오리바(Oryba). 아벨의 저서인 \’GP\’ii. 148에는 이 지점이 엘리사(Elisa)남동쪽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아브다(Abda)로 추정한다.] 였다.

제 14 권 32년 동안의 사건을 다룸
알렉산드라 여왕의 죽음부터 안티고누스의 죽음까지
제 1 장
아리스토불루스와 힐카누스가 왕권 때문에 싸웠지만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 되고 힐카누스는 서인(庶人)이 되기로 합의가 된 것과 조금 후에 힐카누스가 안티파테르의 설득을 아레타스에게로 도망한 것에 대하여
1. 제 14권의 서론
제13권에서 알렉산드라 여왕과 그녀의 죽음의 역사에 대해 언급했으므로, 이제 그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무지를 통해서나 기억의 오류를 통해서 어떠한 사건도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 게는 그것들이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의 관련성과 기록이 매력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휘의 적절한 취사선택과 배열에 의하여 이야기를 더욱 고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독자들은 상당한 정도의 만족과 즐거움을 가지고 정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이 주된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정확성이며[㈜ 다른 본문에는 ‘정확히 한 후 말하다’.] 또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모든 중요한 사실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의 의무에 대한 유사한 수칙에 관해서는 전쟁 1권. 서문(16), 고대. 1권. 서문(4)을 보라. 라이나흐(Reinach)는 요세푸스가 제14권에서 중요한 자료로서 다메섹의 니콜라스를 인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대. 17권. 206에서 계속됨). 그러나 요세푸스는 일부 주(註)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전 책에서는 자유롭게 니콜라스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 이 책의 마지막 권에 있는 참고자료에 관한 부록을 보라. 자세하지만 종종 사색적인 라쿠오이어(R. Laqueur)의 ‘Der Judische Historiker Flavius Josephus’ 1920, 128-221에 나오는 고대. 14권. 전쟁. 1권. 사이의 병행구 연구를 참고하라.]
2. 힐카누스 Ⅱ세와 아리스토불루스 Ⅱ세가 맺은 협정에 의하여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 되다
[㈜ 고대. 14권. (4-8)은 전쟁. 1권. (120-123)과 부분적으로 병행구를 이룬다.]
그런데 제177회 올림피아드 3년째 되던 해에 힐카누스가 왕권을[㈜ 다른 사본에는 ‘대제사장’, “왕권”(basileivan)은 전쟁. 1권. (120)과 다른 본문에서 보충되며 다음 주(註)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차지하였을 때 로마의 집정관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와 크레티쿠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퀸투스 메텔루스였다.[㈜ 올림피아드 해(年)와 집정관의 해(consular years)는 주전 70-69년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힐카누스가 왕권을 보장 받은 해는 알렉산드라가 죽기 2년전이었다. 또한 고대. 14권. (97)과 20권. (244)에서는 아리스토불루스가 3년 6개월간 통치한 것과 고대. 15권. (180)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사후 힐카누스가 3개월동안 왕이었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결국 두 왕위가 총 3년 9개월 지속되었다는 것인데, 주전 63년으로 거슬러 가서 생각해 보면 그때는 폼페이가 아리스토불루스의 통치를 마감했던 때이고 주전 67년에는 힐카누스가 등극하게 된다. 쉬너(Schurer)는 그의 책 i . 256 주 1에서 요세푸스는 여기에서 연대기 편람을 의존하여 본국의 전숭과 불일치한 연대기를 기록한다고 바르게 추정 한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신속하게 힐카누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고, 여리고지역의 전투에서 힐카누스의 많은 병사들이 그의 동생에게로 달아나 버렀다. 이 패배로 인하여 힐카누스는 성채로 도망하였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전에 말하였듯이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내와아이들이 그의 모친에 의하여 감금되어 있었다.[㈜ 고대. 13권. (426)] 그는 성전의경내에 피신해 있던 반대파의 사람들을 공격하여 포로로 잡았다.[㈜ 전쟁. 1권.(120)은 힐카누스가 아리토불루스 아내와 그의 자녀를 인질로 잡았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함.] 그리고 동생에게 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한 후에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 되고, 자신은 공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살며,또한 그의 소유 재산들을 향유하는데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적대 행위를 종식하였다.[㈜ 요세푸스는 이곳과 병행본문인 전쟁 1권. (121)에서 암시는 하지만 힐카누스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왕좌를 내준 것뿐 아니라 대제사장직을 물려준 것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특히 고대. 14권. 7). 그러나 고대. 14권.(41), (97)과 20권.(243, 244)에서 아리스토불루스가 힐카누스 대신 대제사장직에올랐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몇몇 학자들이 그렇듯이 주전 67년과 63년 사이에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직을 계속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BJPOS’6(1939), 145-148에 나오는 샬리트(A.Schalit )의 글을 보라.] 이 협정은 성전의 됫뜰에서 이루어겼는데, 맹세와 서약에 의하여 이 협정을 인준하고 모든 백성들의 면전에서 서로가 서로를 포옹한 후에 아리스토불루스는 궁전으로, 힐카누스는 이제 일개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전쟁. 이 고대에 비해 힐카누스를 더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지적한 라쿠오이어(Laqueuer)는 이 약간의 차이가 헤롯 가문에 대한 요세푸스의 태도에 변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헤롯의 선조 안티파테르는 후에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해 힐카누스가 승리한 것의 원인이 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의 집으로 각각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3. 이두매인 안티파테르의 흥기
그러나 힐카누스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안티파테르라 불리는 이두매 인이었고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본성적으로 행동가요 분쟁을 조성하는 사람으로서 아리스토불루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힐카누스와의 친분관계 때문에 싸움을 벌이곤 했었다. 다메섹의 니콜라스는 안티파테르의 가족이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온 지도적인 유대인들에 속하였다고 말한다.[㈜ 저스틴 마터 (Justin Martyr)는 안티파테르가 아스글론인(Ascalonite)이라고 말한다(‘Dial. c. Tryph.’52).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i 7. 11에서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는 안티파테르의 아버지 헤롯은 아스글론에 있는 아폴로 신전의 노예였고 안티파테르는 소년기에 이두매 강도들이 데려갔다고 한다. 다음 주를 참고하라.] 그러나 니콜라스는 운이 좋아 유대인의 왕이 되었던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롯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 말을 하였던 것이다. 헤롯에 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 고대. 15권과 전쟁. 1권.(123)에서 요세푸스는 안티파테르가 인종적으로는 이두매인이었으며 단순히 그의 조상, 부(富) 그리고 그밖의 다른 잇점들 때문에 지배 계층이 될 수 있었다고 맡하였다. 대헤롯과 그의 옹호자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에 대해 요세푸스의 달라진 태도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쉬러(Scurer) i. 292 주 3, 라쿠오이어(Laqueur) 136-139, 오토의 ‘헤롯’ pp.15, 17-18, 자코비 (Jacob y)의 ‘FGH’ii.381과 단편 96의 주석 p.255를 보라. 주석에서는 니콜라스가 실제로 헤롯의 바벨론의 유대인 조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안티파테르는 처음엔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었던 안티파스로 불렸던 것 같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에 따르면 안티파테르의 아버지는 헤롯이라고 불리웠다. 각주 10을 보라.] 알렉산더 대왕과[㈜ 얀네우스.] 그의 왕비는 안티파테르의 아버지 안티파스를 이두매 전 지역의 분봉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주변 아랍인들과 가사인들, 그리고 아스글론인들을 친구로 삼았으며, 또한 많은 선물을 줌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압도하였다고 하였다. 젊은 안티파테르는 아리스토불루스의 권력을[㈜ 헬라어 본문은 dunasteivan … dunasteuvonta”. 이 절(111)에서는 어간이 비슷한 두 단어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 a[dikon … ajdivkw”와 presbuvteron … presbei’on 등.] 시샘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한 증오로 인하여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은밀한 대화들을 통하여 유력한유대인들을 자극하여 아리스토불루스를 반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리스토불루스가 그롯된 방법으로 힐카누스가 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형을 권좌에서 물아내고, 왕권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그가 쉬지않고 계속해서 힐카누스에게 전하였던 의견들이었다. 더구나 힐카누스가 몸을 피신하여 자기의 안전을도모하지 않는다면[㈜ 본문이 다소 수정되었다. 다른 사본에는 ‘그를(아리스토불루스를)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그의 말대로 아리스토불루스가 권력을 차지하였을 때, 아리스토불루스의 친구들이 그에게 힐카누스를 은밀하게 제거하라고 충고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힐카누스는 이런 말들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원래 정직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므로 중상 모략을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무력함과 의지의 박약으로 인하여 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미천하고 나약하게 보였다. 그러나 실상 아리스토불루스는 정반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행동가였으며[㈜ 이 부분에 대한 투키디데스 조수의 to a[pragmon과 drasthvrio”의 대조에 대해서 고대. 18권. 408의 각주를 보라.] 기민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4. 안티파테르가 힐카누스를 설득하여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항하여 아랍왕 아레타스로부터 도움을 청하게 하다]
[㈜ 고대. 14권.(14-19)의 부분은 부분적으로 전쟁. 1권.(124-126)과 병행 본문을 이룬다.]
그런데 힐카누스가 자기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안티파테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힐카누스 면전에서 아리스토불루스를 거짓된 비난들로 중상모략하기를 아리스토불루스가 힐카누스를 죽이고 싶어한다고 거짓 모함을 하였다. 이렇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는 마침내 힐카누스를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랍 왕인 아레타스에게로[㈜ 아레타스(Aretas) Ⅲ세. 참). 고대. 13권. (360) 각주 454.] 도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만약 힐카누스가 자기의 충고를 따른다면 그도 역시 자기의 맹우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힐카누스는 이것이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말에따라 아라비아가 유대에 접하여 있기 때문에 기꺼이 아레타스에게로 도피하였다.[㈜ 참). 고대 13권.(391) 각주.] 그러나 그는 먼저 안티파데르를 아랍왕에게로 보내어 자기가 탄원자로서 그에게 가게 될 때, 아레타스가 자신을 자기의 적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확약을 받아 오도록 하였다. 안티파테르는 이러한 분명한 확약을받아 온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힐카누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그는 야간에 힐카누스를 호위하여 그 도시를빠져나왔다. 상당한 거리를 여행한 후에 그는 힐카누스를 페트라라는 도시로 인도하였는데,[㈜ 페트라는 애루살렘으로부터 100마일 이상 떨어져 있다. 헬라도시들을 편리하게 살피 보려면 G.로빈슨(Robinson)의 ‘고대 문명의 석관'(The Sarcophagus of an Ancient Civilization), 1580을 참고하라.]그 도시는 아레타스의 궁전이있는 곳이었다. 얼마 후 왕의 아주 절친한 친구로서 안티파테르는 왕에게 힐카누스를 유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요청하였다. 그는 이 일을 매일같이 간단(間斷)없이 간청하고또한 선물들을 제공하여 마침내 아레타스를 설득하였다.[㈜ 전쟁. 1권. (124-126)얘 따르면 안티파테르는 또한 아첨도 잘하였다.] 거기다가 힐카누스 역시 왕에게 약속하기를 자기가 복권되어 왕위를차지하게 되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와서 자기 아버지 알렉산더가 아랍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지역과 12도시들을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전쟁.에 언급되지 않은)몇몇 도시들은 힐카누스 I세에 의해 포위되었다 어떤 이름들은 그 정확한 형태가 매우 의심스럽다. 참). 고대. 13권. 15 : . 4(395).] 이 도시들은 메다바(Medaba),[㈜ 참). 고대. 13권. (255).] 립바(Libba),[㈜ 다른 본문에는 ‘리반트라'(Libanthra) , ‘리비아스'(Livias) .)] 다발롯(Dabaoth),[㈜ 사본의 ‘나발롯'(NabaBoth), ‘나발로'(Naballo)에 대해 아벨(Abel)이 ‘GP’ii. 148에서 추정된 본문이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잠언의 벧 디블라다임(Beth Diblathalm)이다. 오늘날의 델라이랏(Deleilat)으로, 립바(Libba)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5마일 떨어진 곳.] 아라바다(Arabatha),[㈜ 다른 사본에는 ‘라바다'(Rabatha), ‘발바다'(Barbatha), ‘다라바다’ (Tharabatha) ; 성경의 랍밧 모압(Rabbath Moab)으로 오늘의 랍바 (Rabba). 사해로부터 동쪽과 그 중심으로 부터 남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져 있음.] 아갈라(Agalla),[㈜ 다른 사본에는 ‘갈란(Galan)’ 참). 고대. 13권.(397) 각주 541.] 아도네(Athone),[㈜ 28) 다른 사본에는 ‘도네 (Thone)’. 참). 고대. 13권. (39 각주 542.] 조아라(Zoara),[㈜ 참). 고대. 13권. (397) 각주 543.] 오로나인(Oronain),[㈜ 그 아래의 세 이름은 니이제(Niese)의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오로나인(Oronain)에 관해서는 고대. 13권. (397) 각주 540을 참조하라.] 고볼리스(Gobo1is),[㈜ 아벨의 ‘GP’ii. 148에 따르면 이것은 가발로스(Catalos)인데 오늘날의 엘 예발린(el-Jebalin)으로 조아라(Zoara)에서 동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 참). 고대. 2권. (6) 각주.] 아릿다(Arydda),[㈜ 사본들에는 ‘사릿다'(Sarydda), ‘릿다'(Rydda), ‘마리사’로 나와 있다. 아벨(Abel)은 이 아릿다를 네게브(Negeb) 근처의 나큽 엘 아루드(Naqb el-Arud)라고 추정한다.] 알루사(Alusa),[㈜ 다른 사본에는 룻사(Lussa)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의 칼라사(Khalasa) 지역인 엘루사(Elusa)는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성읍이었다.] 오립다(Orybda)[㈜ 다론 사본에는 오리바(Oryba). 아벨의 저서인 ‘GP’ii. 148에는 이 지점이 엘리사(Elisa)남동쪽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아브다(Abda)로 추정한다.]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