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권 제 7장 크랏수스가 유대에 와서 성전을 약탈하고 파르티아인을 공격하다 도리어 자신과 군대가 전멸된 것과 카시우스가 수리아를 점령하고 파르티아인들의 세력확장을 막고 유대로 올라간 것에 대하여

 


제 7 장



크랏수스가 유대에 와서 성전을 약탈하고 파르티아인을 공격하다 도리어 자신과 군대가 전멸된 것과 카시우스가 수리아를 점령하고 파르티아인들의 세력확장을 막고 유대로 올라간 것에 대하여



 1. 크랏수스가 가비니우스를 계승한 후 예루살렘의 성전을 약탈하다



  파르티아를 정복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크랏수스는 그에 앞서 유대를 침공하여 성전을 약탈하였는데 특히 폼페이가 남겨   두었던 2,000달란트에 상당하는 돈을 가져가 버렸다. 더우기 8,000달란트나 되는[㈜ 즉 금(金)은 8,000달란트의 은(銀)의 가치가 있다고 라이나흐(Reinach)는 주장한다.] 성전의 모든 금들을 빼내어 가려는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그는 또한 300미나(minae)나 되는 순금박 들보도 빼어 가버렸다. 1미나는 2.5파운드에 해당하는[㈜ 이 곳을 제외하고는 미나(Mina)에 관한 유일한 언급이 되어있는 고대. 2권.(33)에서 요세푸스는 히브리의 세겔(Shekel)과 미나를 막연히 동일시  한다.] 무게이다. 이 들보를 빼서 크랏수스에게 건네 주었던 인물은 성전에서 돈을[㈜ 다른 본문에는 \’보석들.\’] 경비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던 제사장 엘르아살(Eleasar)이었다. 그는 의롭고 선한 인물이었던 까닭에 악한 의도로 이런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 휘장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었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휘장은 들보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임무를 그가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그는 크란수스가 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성전의 모든 장식품을 보고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사장  인 엘르아살이 준 것으로 만족할 것이며 그것 이외에는 다른 아  무것도 성소로부터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받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속전(贖錢)으로서 그에게 이 금들보를 건네  주었던 것이다. 그 금들보를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적어   도 수만 드라크마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을 것이다. 이 금들보는  텅빈 나무들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엘르아살 외에는 아무도 아 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크랏수스는 성전에 속한 것은 다른 아무  것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받은 이후에 이 약속을  어기고 성전에 있는 금을 다 빼 앗아 갔다.



2. 흩어진 유대인들(Diaspora)의 재산과 영향력



  우리 성전에 그토록 많은 재산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유대인들과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 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교도(異敎徒)로 반 개종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아시아인들과 유럽인들까지도 하느님께예물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매우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는 투키디데스의 용어들(Thuc. ii.41. 4)이다.] 허영심에 들떠 이토록 많은 돈이 성전에 있었다고 떠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를 입증해 주는 증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특히 갑바도기아의 스트라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드리다데스는[㈜ 미드리다테스 Ⅵ세 유파토르(Mithridates ⅥEupator). 그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주전 88년 로마군들을 물리쳤다.] 코 스(Cos)로 사람을 보내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모아 놓은 돈과 유대인 소유의 800달란트를 빼앗았다.\’ 유대인은 하느님께 속한 돈 이외에는 공금이 없다. 이 돈은 미드리다테스를 두려워한 나머지 아시아의 유대인이 코스(Cos)로 옳긴 돈임이 분명하다.[㈜ 애굽의 클레오파트라 Ⅲ세와 주전 102년 코스(Cos)에 있는 금전저장소에 관하여는 고대. 13권.(349)를 보라. 라이나흐는 이 800달란트를 그녀의 유대장군들인 켈키아스(Chelkias)와 아나니아(Ananias)가 동시에 맡겼다고 추정한다. 이 총액은 소아시아의 유대인의 기부금으로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빌리히(Willrich)는 \’Urkunder-falschung\’p.74에서 톨레미 라디후스(Ptolemy Lathyrus)를 두려워하여 돈을 갖고 간 사람은 애굽의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하며 또한 주전 88년에 있었던 실제 상황을 간과함으로써 요세푸스를 비난한다. 스트라보는 그 800달란트가 다른 기간에 왔던 것으로 생각한다(그렇지 않으면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유대인들이 맡겼던 돈\’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또한 충 800달란트라는 것은 많은 선물로 이뤄진 흩어진 유대인에게서 나온 성전 기부금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신빙성이 없다. 참). Heichelheim\’Rom. Syria\’p.74. 그러나 요세푸스가 800대 신 80달란트라고 했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J. Cohen의 \’Judaica et Aegyptiaca\’1941. PP.60-64를 보라.] 왜냐하면 강한 요새와 성전이 있는 유대의 유대인이 돈을 코스로 보낼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은 미 드리다테스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보냈을리도 만무한 것이다. 스트라보는 술라(Sulla)가 미드리다테스와 싸우 기 위해 헬라로 들어 가면서 유대인들이 구레네(Cyrene)에서[㈜ 왕인 톨레미 Ⅶ세 피스큰(Ptolemy Ⅶ Physcon)이 주전 96년에 죽자 그 뒤를 계승한 구레네(Cyrene)의 마지막 왕인 사생아 톨레미 아피온(Ptolemy  Apion)은 그의 왕국을 로마에게 이전해 주었다. 로마인들은 수년 동 안 이 정부를 구레네의 헬라 도시들로 남겨놓았다. 따라서 주전 74년까지 이 지역은 로마의 영토가 되지 못했다. 주전 87(86)년 겨울에 술라는 루쿨루스를 명령을 다시 수행하라고 구레네에 보낸다. 플루타르크\’Lucullus 2\’에 따르면 구레네는 \’계속되는 학정과 전쟁으로\’ 시달려왔다고 한다. 유대인은 언급되지 않는다. 플루타르크에 나오는 구문은 스트라보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되며 (Jacoby, \’FGH\’ii . C. p.294에서는 본문에서 플루타르크가 스트라보에 근거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스트라보 역시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를 이용한다(참). 쉬러 i . 42). 요세푸스의 본문에는 원래 유대인의 반란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니이제의 생각대로 우연히 빠졌거나 혹은 야코비의 생각대로 요세푸스의 설명에 유대인의 봉기가 첨가되었을 것이다. 전자를 받아들이면 구레네의 유대인들은 헬라 위정자들이 베푼 시민의 위치에 불만족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으킨 반역을 친압하라고 루쿨루스(Lucullus)에게 명령하는 장면에서 다시 이 사실을 이와 같이 증명해 주고 있다. \’구레네에는서민, 농부, 이방인, 유대인의 네 계급이 있었다.[㈜ 이 번역본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록.]  현재에는 유대인이 안 들어간 도시가 없다.[㈜ 다른 본문에는 과거완료형시제로 되어 있다. 이 인용문에서 시제가 바뀐것을 볼때 이 문장과 그 이후로는 스트라보가 술라(Sullla)의 시기에 관하여가 아닌 그 자신의 시기, 즉 아구스도의 시대에 관하며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 Bousset-eressman, \’Die Religion des Judentu-ms\’, p.67, 주 1을 보라.] 이 유대족을 받아 들이지 않은곳, 즉 이들이 차지 하지 않은[㈜ 혹은 라이나흐(\’Tests\’, p.92)나 샤모나르(Chamonard)가 번역한 대로\’지배력을 나타내지 못한\’.]곳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찾아 볼래야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같은 지배자의[㈜ 즉 톨레미 왕가. 참). 각주 172.] 통치자의 통치를 받는 애굽과 구레네는 물론 그 외의 여러 나라들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다수의 유대인들을 보호하면서 그들과 함께 번영을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유대국과 동일한 율법을[㈜ 본문과 의미가 불분명함. 라이나흐(Reinach)는 suntavgmata, 즉 \’식민지\’로 번역했지만 이 또한 의심스럽다. 아마도\’\”계급\’혹은 \’직제\’를 의미하는 듯하다.]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유대인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곳을 유대인지역[㈜ 본문이 다소 수정됨.]으로 할당 받게 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자치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참). 아피. 2권(33-36).] 그리고 마치 한 주권 국가의[㈜ 이 말은 아구스도가 \’지배자\’라는 용어를 \’원로원\’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쓰였을 것이 틀림 없다. 참). 필로(Philo), \’In Flaccum\’74이하.] 수령과 같이 백성들을 통치하고, 계약이나 법령과 같은 업무를 감독하며, 소송 사건을 재판하는 등의 임무를 지닌 그들 고유의 통치 제도를 갖게 되었다. 애굽에 있던 이 유대 자치국은 매우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대 나라는 애굽에서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은 원래 애굽인들이었다. 출애굽 해서도 애굽의 인접국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이 다소 불확실하다. 요세푸스가 아피. 1권.(104), (223), (278), 2권.(28)등에서 논박하였던 유대인들의 애굽에서의 기원에 관한 이와 같은 주장이 여기에서 허용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꽤 정확하게 스트라보Strara)를 인용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또한 구레네까지도 이주해 들어갔다. 구레네는 유대뿐만 아니라 애굽의 왕국과도 밀접한 이웃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애굽 왕국에 속한 지역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와 같은 인구이동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 이상이 스트라보가 기록한 내용이었다.



  3. 크랏수스는 파르티아에서 살해되고 카시우스가 유대를 침공하다



  한편 크랏수스는 그가 바라던 대로 모든 일들을 다 처리하고 나  서 파르티아를 향해 행군해 갔지만, 다른 곳에서도[㈜ 다른 역사가들의 기록. 크랏수스는 주전 53년 봄에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카르하이(Carrhae)근처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그는 사망했다.] 언급하고  있듯이 그는 그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크랏수스의 재판관을 했던 카시우스 롱기누스(C. Cassius Longinus).] 로마에서 탈출한 곳에 수리아를 점령하였다. [㈜ 카시우스는 주전 53년에서 51년까지 수리아를 다스렸다.]   그리고는 크랏수스에 대한 전승의 결과로 수리아를 침공하였던 파로티아의 군대를 저지하였다. 카시우스는 두로(Tyre)로 돌아   온 후에 다시 유대를 침략하였으며[㈜ 요세푸스가(혹은 그의 자료) 여기에서 말하는 \’유대\'(Judaea)란 팔레스틴의 유대 영토를 의미함. 타리카이아이는 물론 갈릴리에 위치한다.] 이 곳에서 그는 다시 타리  카이아이(Tarichaeae)를 공격하여 그 곳을 순식간에 점령하고그곳에 있던 약 30,000명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아리스토불투스의 주도하에 이뤄졌던 반란에 끊임없이 가세하였던 페이돌라우스(Peitholaus)를 살해하였는데 아리스토불루스의 이러한 반란의 배후에는 안티파테르의 조종이 있었다,안티파테르는 그 당시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며 이두매인들로부터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그는 또한[㈜ 본문이 다소 불확실하다. 여기에서 안티파테르를 처음으로 도입하는 것은 요세푸스의 새로운 자료인 듯하다.] 유명한 아랍 가문 출신의 딸인 키프로스(Cypros)를[㈜ 다른 본문에는 다른 전쟁. 의 사본들과 같이 \’키프리스\'(Cypris)로 나와 있다.] 아내로 맞았다. 안티파테르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두었다. 아들은 파사엘(Phasael)과 후에 왕이 되었던 헤롯(Herod)과 요셉(Joseph)과 페로라스(Phero-ras)였으며 딸의 이름은 살로메(Salome)였다. 안티파테르는 주변의 실력자들과 친선을 맺으며 상호 우의를 두텁게 했다. 그는특히 아라비아의 왕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였으며 아리스토불루스와[㈜ 참). (14)이하.] 전쟁을 할 때에는 자녀들을 그에게 맡겼다. 한편 카시우스는 적과 맞서서 싸우기 위하여 진영을 옮겨 유브라데 장까지진군하였다. 이에 관하여는 다른 역사가들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4. 가이사가 아리스토볼루스를 석방하고 그를 수리아에  있는 폼페이 군사들과 싸우러 보냈으나 그곳에서



  얼마 후, 폼페이와 원로원 의원들이 이오니아 바다를 건너 도망한 후에 가이사(Caesar)가 로마의 지배자가 되자[㈜ 주전 49년 1월.] 그는 아리스토불루스를 석방한 후 2개 군단을 지휘하게 하고 수리아로보내[㈜ 이러한 진술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x1i. 18. 1의 내용에서 확인된다.] 그 곳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블루스는 가이사가 부여해 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하고 폼페이 지지 세력의 손에 의하여 독살되고 말았다. 이에 가이사의 지지자들이 그를 장사지냈다.[㈜ 꿀속에다 시체를 보관한 사실은 헤로도투스 I. 198에 언급되어 있다(바벨론 사람들 중에). 또한 플리니의 \’박물학\'(Hist. Nat.) xiv. 13(허드슨이 인용함), 바벨론 탈무드의 \’Baba Bathra\’3b를 참조하라.]  그의 시신은 안토니(Anthony)가 후에 유대로 보내어 왕의 묘실에 장사 지낼 때까지 오랫동안 꿀로 방부 처리를 한 채로 있었다. 로마에 반역을 꾀한 죄로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알렉산더를 처형하라는 폼페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스키피오(Scipio)는[㈜ 폼페이의 장인이자 주전 49-48년의 수리아 총독이었던 메텔루스 스키피오(Q. Metellus Scipio).] 그의 머리를 베어 죽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알렉산더는 안디옥(Antioch)에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제와 누이들은 톨레미(Ptolemy)에 의해 보호를 받았는데 톨레미는 리바누스(Lib-anus) 산기슭의 방백이었던 멘나이우스,(Mennaeus)의 아들이었다.[㈜ 참). 각주 58.]  그는 아들인 필리피온(Philpion)을 아스글론(Ask-elon)에 있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내에게 보내어 그녀의 아들인 안티고누스(Antigonus)와 딸들을 자기에게 보내어 달라고요청하였다. 딸들 카운데는 알렉산드라(Alexandra)라는 딸이있는데 필리피온이 그녀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톨레미는 아들 팔리피온을 죽이고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그녀의 형제들을 돌보아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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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권 제 7장 크랏수스가 유대에 와서 성전을 약탈하고 파르티아인을 공격하다 도리어 자신과 군대가 전멸된 것과 카시우스가 수리아를 점령하고 파르티아인들의 세력확장을 막고 유대로 올라간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7 장


    크랏수스가 유대에 와서 성전을 약탈하고 파르티아인을 공격하다 도리어 자신과 군대가 전멸된 것과 카시우스가 수리아를 점령하고 파르티아인들의 세력확장을 막고 유대로 올라간 것에 대하여


     1. 크랏수스가 가비니우스를 계승한 후 예루살렘의 성전을 약탈하다


      파르티아를 정복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크랏수스는 그에 앞서 유대를 침공하여 성전을 약탈하였는데 특히 폼페이가 남겨   두었던 2,000달란트에 상당하는 돈을 가져가 버렸다. 더우기 8,000달란트나 되는[㈜ 즉 금(金)은 8,000달란트의 은(銀)의 가치가 있다고 라이나흐(Reinach)는 주장한다.] 성전의 모든 금들을 빼내어 가려는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그는 또한 300미나(minae)나 되는 순금박 들보도 빼어 가버렸다. 1미나는 2.5파운드에 해당하는[㈜ 이 곳을 제외하고는 미나(Mina)에 관한 유일한 언급이 되어있는 고대. 2권.(33)에서 요세푸스는 히브리의 세겔(Shekel)과 미나를 막연히 동일시  한다.] 무게이다. 이 들보를 빼서 크랏수스에게 건네 주었던 인물은 성전에서 돈을[㈜ 다른 본문에는 ‘보석들.’] 경비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던 제사장 엘르아살(Eleasar)이었다. 그는 의롭고 선한 인물이었던 까닭에 악한 의도로 이런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 휘장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었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휘장은 들보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임무를 그가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그는 크란수스가 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성전의 모든 장식품을 보고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사장  인 엘르아살이 준 것으로 만족할 것이며 그것 이외에는 다른 아  무것도 성소로부터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받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속전(贖錢)으로서 그에게 이 금들보를 건네  주었던 것이다. 그 금들보를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적어   도 수만 드라크마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을 것이다. 이 금들보는  텅빈 나무들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엘르아살 외에는 아무도 아 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크랏수스는 성전에 속한 것은 다른 아무  것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받은 이후에 이 약속을  어기고 성전에 있는 금을 다 빼 앗아 갔다.


    2. 흩어진 유대인들(Diaspora)의 재산과 영향력


      우리 성전에 그토록 많은 재산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유대인들과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 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교도(異敎徒)로 반 개종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아시아인들과 유럽인들까지도 하느님께예물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매우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는 투키디데스의 용어들(Thuc. ii.41. 4)이다.] 허영심에 들떠 이토록 많은 돈이 성전에 있었다고 떠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를 입증해 주는 증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특히 갑바도기아의 스트라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드리다데스는[㈜ 미드리다테스 Ⅵ세 유파토르(Mithridates ⅥEupator). 그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주전 88년 로마군들을 물리쳤다.] 코 스(Cos)로 사람을 보내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모아 놓은 돈과 유대인 소유의 800달란트를 빼앗았다.’ 유대인은 하느님께 속한 돈 이외에는 공금이 없다. 이 돈은 미드리다테스를 두려워한 나머지 아시아의 유대인이 코스(Cos)로 옳긴 돈임이 분명하다.[㈜ 애굽의 클레오파트라 Ⅲ세와 주전 102년 코스(Cos)에 있는 금전저장소에 관하여는 고대. 13권.(349)를 보라. 라이나흐는 이 800달란트를 그녀의 유대장군들인 켈키아스(Chelkias)와 아나니아(Ananias)가 동시에 맡겼다고 추정한다. 이 총액은 소아시아의 유대인의 기부금으로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빌리히(Willrich)는 ‘Urkunder-falschung’p.74에서 톨레미 라디후스(Ptolemy Lathyrus)를 두려워하여 돈을 갖고 간 사람은 애굽의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하며 또한 주전 88년에 있었던 실제 상황을 간과함으로써 요세푸스를 비난한다. 스트라보는 그 800달란트가 다른 기간에 왔던 것으로 생각한다(그렇지 않으면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유대인들이 맡겼던 돈’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또한 충 800달란트라는 것은 많은 선물로 이뤄진 흩어진 유대인에게서 나온 성전 기부금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신빙성이 없다. 참). Heichelheim’Rom. Syria’p.74. 그러나 요세푸스가 800대 신 80달란트라고 했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J. Cohen의 ‘Judaica et Aegyptiaca’1941. PP.60-64를 보라.] 왜냐하면 강한 요새와 성전이 있는 유대의 유대인이 돈을 코스로 보낼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은 미 드리다테스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보냈을리도 만무한 것이다. 스트라보는 술라(Sulla)가 미드리다테스와 싸우 기 위해 헬라로 들어 가면서 유대인들이 구레네(Cyrene)에서[㈜ 왕인 톨레미 Ⅶ세 피스큰(Ptolemy Ⅶ Physcon)이 주전 96년에 죽자 그 뒤를 계승한 구레네(Cyrene)의 마지막 왕인 사생아 톨레미 아피온(Ptolemy  Apion)은 그의 왕국을 로마에게 이전해 주었다. 로마인들은 수년 동 안 이 정부를 구레네의 헬라 도시들로 남겨놓았다. 따라서 주전 74년까지 이 지역은 로마의 영토가 되지 못했다. 주전 87(86)년 겨울에 술라는 루쿨루스를 명령을 다시 수행하라고 구레네에 보낸다. 플루타르크’Lucullus 2’에 따르면 구레네는 ‘계속되는 학정과 전쟁으로’ 시달려왔다고 한다. 유대인은 언급되지 않는다. 플루타르크에 나오는 구문은 스트라보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되며 (Jacoby, ‘FGH’ii . C. p.294에서는 본문에서 플루타르크가 스트라보에 근거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스트라보 역시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를 이용한다(참). 쉬러 i . 42). 요세푸스의 본문에는 원래 유대인의 반란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니이제의 생각대로 우연히 빠졌거나 혹은 야코비의 생각대로 요세푸스의 설명에 유대인의 봉기가 첨가되었을 것이다. 전자를 받아들이면 구레네의 유대인들은 헬라 위정자들이 베푼 시민의 위치에 불만족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으킨 반역을 친압하라고 루쿨루스(Lucullus)에게 명령하는 장면에서 다시 이 사실을 이와 같이 증명해 주고 있다. ‘구레네에는서민, 농부, 이방인, 유대인의 네 계급이 있었다.[㈜ 이 번역본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록.]  현재에는 유대인이 안 들어간 도시가 없다.[㈜ 다른 본문에는 과거완료형시제로 되어 있다. 이 인용문에서 시제가 바뀐것을 볼때 이 문장과 그 이후로는 스트라보가 술라(Sullla)의 시기에 관하여가 아닌 그 자신의 시기, 즉 아구스도의 시대에 관하며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 Bousset-eressman, ‘Die Religion des Judentu-ms’, p.67, 주 1을 보라.] 이 유대족을 받아 들이지 않은곳, 즉 이들이 차지 하지 않은[㈜ 혹은 라이나흐(‘Tests’, p.92)나 샤모나르(Chamonard)가 번역한 대로’지배력을 나타내지 못한’.]곳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찾아 볼래야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같은 지배자의[㈜ 즉 톨레미 왕가. 참). 각주 172.] 통치자의 통치를 받는 애굽과 구레네는 물론 그 외의 여러 나라들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다수의 유대인들을 보호하면서 그들과 함께 번영을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유대국과 동일한 율법을[㈜ 본문과 의미가 불분명함. 라이나흐(Reinach)는 suntavgmata, 즉 ‘식민지’로 번역했지만 이 또한 의심스럽다. 아마도'”계급’혹은 ‘직제’를 의미하는 듯하다.]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유대인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곳을 유대인지역[㈜ 본문이 다소 수정됨.]으로 할당 받게 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자치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참). 아피. 2권(33-36).] 그리고 마치 한 주권 국가의[㈜ 이 말은 아구스도가 ‘지배자’라는 용어를 ‘원로원’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쓰였을 것이 틀림 없다. 참). 필로(Philo), ‘In Flaccum’74이하.] 수령과 같이 백성들을 통치하고, 계약이나 법령과 같은 업무를 감독하며, 소송 사건을 재판하는 등의 임무를 지닌 그들 고유의 통치 제도를 갖게 되었다. 애굽에 있던 이 유대 자치국은 매우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대 나라는 애굽에서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은 원래 애굽인들이었다. 출애굽 해서도 애굽의 인접국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이 다소 불확실하다. 요세푸스가 아피. 1권.(104), (223), (278), 2권.(28)등에서 논박하였던 유대인들의 애굽에서의 기원에 관한 이와 같은 주장이 여기에서 허용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꽤 정확하게 스트라보Strara)를 인용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또한 구레네까지도 이주해 들어갔다. 구레네는 유대뿐만 아니라 애굽의 왕국과도 밀접한 이웃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애굽 왕국에 속한 지역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와 같은 인구이동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 이상이 스트라보가 기록한 내용이었다.


      3. 크랏수스는 파르티아에서 살해되고 카시우스가 유대를 침공하다


      한편 크랏수스는 그가 바라던 대로 모든 일들을 다 처리하고 나  서 파르티아를 향해 행군해 갔지만, 다른 곳에서도[㈜ 다른 역사가들의 기록. 크랏수스는 주전 53년 봄에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카르하이(Carrhae)근처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그는 사망했다.] 언급하고  있듯이 그는 그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크랏수스의 재판관을 했던 카시우스 롱기누스(C. Cassius Longinus).] 로마에서 탈출한 곳에 수리아를 점령하였다. [㈜ 카시우스는 주전 53년에서 51년까지 수리아를 다스렸다.]   그리고는 크랏수스에 대한 전승의 결과로 수리아를 침공하였던 파로티아의 군대를 저지하였다. 카시우스는 두로(Tyre)로 돌아   온 후에 다시 유대를 침략하였으며[㈜ 요세푸스가(혹은 그의 자료) 여기에서 말하는 ‘유대'(Judaea)란 팔레스틴의 유대 영토를 의미함. 타리카이아이는 물론 갈릴리에 위치한다.] 이 곳에서 그는 다시 타리  카이아이(Tarichaeae)를 공격하여 그 곳을 순식간에 점령하고그곳에 있던 약 30,000명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아리스토불투스의 주도하에 이뤄졌던 반란에 끊임없이 가세하였던 페이돌라우스(Peitholaus)를 살해하였는데 아리스토불루스의 이러한 반란의 배후에는 안티파테르의 조종이 있었다,안티파테르는 그 당시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며 이두매인들로부터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그는 또한[㈜ 본문이 다소 불확실하다. 여기에서 안티파테르를 처음으로 도입하는 것은 요세푸스의 새로운 자료인 듯하다.] 유명한 아랍 가문 출신의 딸인 키프로스(Cypros)를[㈜ 다른 본문에는 다른 전쟁. 의 사본들과 같이 ‘키프리스'(Cypris)로 나와 있다.] 아내로 맞았다. 안티파테르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두었다. 아들은 파사엘(Phasael)과 후에 왕이 되었던 헤롯(Herod)과 요셉(Joseph)과 페로라스(Phero-ras)였으며 딸의 이름은 살로메(Salome)였다. 안티파테르는 주변의 실력자들과 친선을 맺으며 상호 우의를 두텁게 했다. 그는특히 아라비아의 왕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였으며 아리스토불루스와[㈜ 참). (14)이하.] 전쟁을 할 때에는 자녀들을 그에게 맡겼다. 한편 카시우스는 적과 맞서서 싸우기 위하여 진영을 옮겨 유브라데 장까지진군하였다. 이에 관하여는 다른 역사가들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4. 가이사가 아리스토볼루스를 석방하고 그를 수리아에  있는 폼페이 군사들과 싸우러 보냈으나 그곳에서


      얼마 후, 폼페이와 원로원 의원들이 이오니아 바다를 건너 도망한 후에 가이사(Caesar)가 로마의 지배자가 되자[㈜ 주전 49년 1월.] 그는 아리스토불루스를 석방한 후 2개 군단을 지휘하게 하고 수리아로보내[㈜ 이러한 진술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x1i. 18. 1의 내용에서 확인된다.] 그 곳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블루스는 가이사가 부여해 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하고 폼페이 지지 세력의 손에 의하여 독살되고 말았다. 이에 가이사의 지지자들이 그를 장사지냈다.[㈜ 꿀속에다 시체를 보관한 사실은 헤로도투스 I. 198에 언급되어 있다(바벨론 사람들 중에). 또한 플리니의 ‘박물학'(Hist. Nat.) xiv. 13(허드슨이 인용함), 바벨론 탈무드의 ‘Baba Bathra’3b를 참조하라.]  그의 시신은 안토니(Anthony)가 후에 유대로 보내어 왕의 묘실에 장사 지낼 때까지 오랫동안 꿀로 방부 처리를 한 채로 있었다. 로마에 반역을 꾀한 죄로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알렉산더를 처형하라는 폼페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스키피오(Scipio)는[㈜ 폼페이의 장인이자 주전 49-48년의 수리아 총독이었던 메텔루스 스키피오(Q. Metellus Scipio).] 그의 머리를 베어 죽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알렉산더는 안디옥(Antioch)에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제와 누이들은 톨레미(Ptolemy)에 의해 보호를 받았는데 톨레미는 리바누스(Lib-anus) 산기슭의 방백이었던 멘나이우스,(Mennaeus)의 아들이었다.[㈜ 참). 각주 58.]  그는 아들인 필리피온(Philpion)을 아스글론(Ask-elon)에 있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내에게 보내어 그녀의 아들인 안티고누스(Antigonus)와 딸들을 자기에게 보내어 달라고요청하였다. 딸들 카운데는 알렉산드라(Alexandra)라는 딸이있는데 필리피온이 그녀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톨레미는 아들 팔리피온을 죽이고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그녀의 형제들을 돌보아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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