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권 제 9장 유대와 수리아에 발생한 기근에 대하여, 그리고 헤롯이 다른 부인을 얻은 후 가이사랴와 그 밖의 헬라식 도시들을 재건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제 9 장



유대와 수리아에 발생한 기근에 대하여, 그리고 헤롯이 다른 부인을 얻은 후 가이사랴와 그 밖의 헬라식 도시들을 재건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1. 헤롯 당시 큰 기근과 재앙이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다.



  헤롯이 사마리아 시를 건설했던 바로 그 해 즉 헤롯 왕 13년 에[㈜ 이것은 주전 25(24)년경일 것이다. Schurer의 i : 366주 8에 따르면 사마리아 재건은 주전 27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9 : 1(299이하)는 원래 7 : 10(266) 뒤에 나오는 것이 바르며 \’같은 해\’라는 말은 사마리아 재건의 시기가 아니라 코스토바루스가 사형된 때일 것이다. Otto는 p.80에서 Schurer와 동일하며 고대. ] 하느님의 진노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사상 유례없는 큰 재앙이 유대 온 나라를 뒤덮었다. 그 재앙의 첫번째는 상당기간 동안 지속된 기근으로     15권. 9 : 1(299)이하는 앞선 부분<고대. 15권. 8: 1-5(267-298)>과는 다른 자료애서 나온다고 한다. 즉 그것은 익명의 유대인의 저작으로 고대. 15권. 9 : 1(299)이하는 고대. 15권. 7 : 10(266)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 그는 고대. 15권.7 : 10(266)을 반-헤롯적인 자료라고 생각하며 고대. 15권. 9 : 1(299)는 다메섹의 니콜라스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Otto는 니콜라스가 주전 25년의 사마리아 재건의 완성과 관계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다음 해에도 계속된 것이 분명하다. 고대. 15권. 9 : 2(307)을 보라.]  예전 같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힐 나무에서 그 열매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땅도 심히 메말라 식물이 고사하여 곡식의 낱알이 영그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번째 재앙은 이와 같은 기근의 결과, 식량의 부족으로 사람의 몸에 필요한 양분이 결핍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문자적인 뜻은 \’계속적으로 분배되었다\’.] 각종 질병이 난무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설상가상의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병을 고칠 만한 약품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영양실조와 질병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들조차도 점차 의욕을 잃어갔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단이라고는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그 해에 거두어  야 할 과실은 꿈도 못꾸게 되었고, 비상시를 대비하여 비축해 둔  식량도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당초 그들이 우려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비관적이었다. 그해에 먹을 양식을 거두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이듬해에 뿌릴 씨앗조차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Otto는 p.69-70에서 본문은 그 땅이 그 해에 두번째 수확을 내지 뭇했다고 한다. 문맥상 이 해석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Otto는 기근이 주전 25-24년이라기보다도 주전 26-25년 겨울에 시작되었다는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달리한다.] 이와 같이 한계상황에 맞부딪힌 그들을 새로운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이와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왕궁에 있는 헤롯은 헤롯대로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헤롯은 지금까지 매 해마다 땅에서 생산되는 산물 중 일부를 바치는 백성들의 세금으로 살아왔는데, 그 해에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받아낼 수 없는데 사마리아 시 건설에 과대지출하여 왕궁의 재정도 고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이와 같은 천재지변이 들어 어려움을 겪게되면 그 탓을 왕에게 돌리고 왕을 원망하는 것이 백성들의 일반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는 헤롯도 마찬가지였다.



 2. 헤롯이 기근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너그럽게 돌보아 주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헤롯은 그와 같은 위기를 타파할 묘안 을 궁리하였으나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나라에서 그들에게 곡식을 팔지도 않을 것이고, 만일에 비싼 값으로 곡식을 조금 판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 비싼 값을 지불하고 곡식을 살 만큼의 돈인 그의금고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본문이 약간 불확실함.] 헤롯은 그의 궁전에 박혀있는 금은으로 만든 여러가지 값나가는 장식물들을 떼어 내어 파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헤롯은 이 돈을 애굽에 보냈는데, 이 당시 애굽에는 가이사로 부터 파송된 페트로니우스(Petronius)가[㈜ 페트로니우스는 주전 24-21년에 애굽의 장관(Prefect)이었다. Arthur Stein의 \’로마 황제시대의 애굽총독들\'(Die Prafekten von Aegrpten in der romischen Kaiserzeit), (베른, 1950) p.17-18을 보라.] 총독으로 있었다. 그가 애굽의 총독으로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  로 피난하였는데, 헤롯 왕과 절친한 친구인 페트로니우스는 헤   롯의 백성들이 기근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곡식을 수출할 때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고, 그들과 함께 그곡식을 배로 실어 본국까지 운송해 줌으로써 헤롯의 백성이 기근에서 탈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항구에 도착하자 헤롯은 그들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와 맺은 우정 때문이라고 백성들에게 공언함으로써, 백성들이   지난 날 자신에게 품었던 적의를 해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들을 위해 선정(善政)을 베풀 것이라고 호언하며 자 신의 위세를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헤롯은 우선 자기 스스로 일  하여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자에게 적정량의 식량을 분배해 주었다.[㈜ 참). Jones의 p.88에는 \”애굽 곡물은 공적인 사용을 위해 비축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수출허가는 드물게 개인적으로 내주었다. 그러나 헤롯은 이 경우의 특별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나서 나이가 들거나 병들어 그들 스스로는 도저  히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위하여 미리 구운 빵을 배급해 주었다. 헤롯은 또한 그들이 기르던 가축이 기근으  로 인해 대부분 죽었거나 그나마 남아있는 가축들도 완전히 잡아먹어 양털이나 그밖에 옷감으로 사용할 물질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그 절대량이 부족한 의복문제를 포함하여 추운 날씨에도 건강상의 위험없이 무사히 날 수 있도록 그들의 겨우살이에도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백성들을 위한 생필품이 보급되자, 헤롯은 이웃 도시에도 도움의 손길을 뻗쳐 수리아 거주민에게는 곡식의 종자를 제공해 주었다. 이와 같은 헤롯의 너  그러운 행위는 때를 잘 타 결과적으로 그에게 큰 이익을 안겨 주었는데, 그 까닭은 그가 준 씨앗으로 농사를 지은 수리아에 큰 풍년이 들어 헤롯 백성 모두에게 공급할 수 있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추수때가 되자, 헤롯은 50,000명이 넘는 자기 백성들을 수리아로 보내 지금까지 동족을 도왔던 것처럼 똑같은 처지에 처해 있는 이웃나라를 도왔다. \’그리하여, 어려움을 당하여 헤롯에게 도움의 손길을 원한 사람치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개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부양해야 할국민이나 도시 흑은 가족이 너무 많아 어려움을 겪다가 헤롯에게 구조의 손길을 요청하여 그의 도움을 입지 않은 민족이나 도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헤롯이 인근 도시나 다른 민족에게 원조한 양을 계산해 보면, 타국에 원조한 곡량이 10,000코르(Kors) -1코르는 10아덴 메딤노이 (Attic medimnoi)[㈜ 요세푸스가 히브리 도량형을 델라 도량형으로 표기하는데 있어서 모순되는 것이 자주 나온다. 고대. 3권. 15 3(321)애서는 70코르(kor)가 아덴 도량형으로 41메딤노이(medimnoi)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는 1코르는 1 메딤노스(medimnos)의 약 4/7정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코르(kor)는 아덴 도량형으로는 약 7메딤노이에 해당된다.] 와 같다-였고 자국내 백성에게 원조된 곡물의 양은 80,000코르였다.유대 백성을 향한 헤롯의 이와 같은 선행과 시의적절한 관용은 유대인들에게 강한 호감을 왔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국가들 사이에도 널리 이야기되어 과거 제사의식이나 왕실의 규례문제로 유대인의 마음 속에 누적되었던 그에 대한 원성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고 주변국가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원조해 줌으로써 헤롯은 그에 상응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필요한 때 헤롯이 관용을 베푼 예들에 대해 고대. 15권. 10 : 4(365), 16권. 2 : 5(64))를 보라.] 그는 또한 외국의 여러 나라로부터 좋은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혹독하게 몰아 닥친 유대 땅의 기근이 헤롯의 명성을 널리 떨치게 해 준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예상치도 못했던 그의 자상함은 그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던 대중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여 초기 유대인들의 경험을 통해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던 헤롯에 대한 불신을 사라지게 했으며, 헤롯은 자기들이 곤핍할  때는 기꺼이 자기들을 보살펴 주는 인정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3. 헤롯이 예루살렘에 왕궁을 세우고 제사장 시몬의 딸과 결혼하다



  [㈜ 9 : 3-6(317-341)은 전쟁. 1권. 21\’1-8(402-415)와 부분적인 병행을 이룬다.]



  헤롯이 가이사에게 사람을 보내 보충병력으로서 그의 호위병중 500명을 선발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주전 25-24년.]. 이 사람들은 아일리우스 갈루스(Aelius Gallus)에게 매우 필요한 사람들이었는데그는 그들을 홍해로 인도하여 갔다.[㈜ 참). Stravo, xvi. 4, 23, p.780. 아일리우스 갈루스(Aelius Gallus)가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에 있는 사바인들(Saeans)을 치러 원정했었지만 이것에 실패한(쉬러의 i : 367주 9에 나음) 다른 고대 문헌들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liii . 29, 플리니의 \’박물학\’ (National History) vi. 28 : 160 이하, 안키라눔의 기념비(Monumentum Ancanum) v ; 18 이하 등이다. 현대의 기록에 관해서는 AH\’x. 248-252에 나오는 J. G. C. Anderson의 설명을 보라.] 그리고 헤롯은 그의 문제들이 해소되고 다시 번영을 누리게 되었을 때, 상부도시(theUpper City)[㈜ 이것은 헤롯의 성채이다. 더욱 자세한 것은 전쟁. 5권. 4 : 3, 4(156-183)에 나와 있다. 참). Abel의 \’알렉산드리아 정복에서 아랍의 침략에 이르는 팔레스틴의 역사\'(Histoire do la Palestine depuis la conquete d\’Alexandre jesqu\’a L\’invasion arabs) 파리, 1952년판의 i. 355-367을 보라. 이 곳은 상부 도시 (욥바 도로가 시작되는 근처)의 북서단에 있으며, 하스모네안 궁의 서쪽에 위치한다. 성전 경내의 북서단에 있는 안토니아와는 구별된다. 8 : 5(292) 주를 보라.]에 왕궁을 세웠다. 그는 그 안에다 놀라우리만치엄청나게 크고 높은 방을 건축하였는데, 많은 돈을 들여서 금과 각종 돌들과[㈜ 대리석일 것이다.] 아름다운 빛깔의 도료들을[㈜ 끝 부문의 분명한 뜻이 불확실함.] 사용하여 그 방들을 장식하였다. 각 방들은 매우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휴식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규모나 그 명칭이 매우 다양하였다.예를 들면 하나는 \’가이사의 방, 또 다른 하나는 \’아그립바의 방이라고 불렸다.[㈜ 아구스도와 M. 빕사니우스 아그립바.]  그는 그의 연정이 자극을 받게 되었을 때 재혼하였다. 그는 단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보에투스(Boethus)[㈜ 보에투스(Boethus)의 아들인<칸테라스(Kantheras)라 이름하는> 시몬과 혼동하지 않도록. 보에투스는 아그립바 재위시 대제사장이었다. 고대. 19권.6 : 2(297)을 보라.] 의 아들인 잘알려진 시몬(Simon)이라는 제사장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그 시대에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진 딸이 있었다.[㈜ 고대. 18권.5 : 4(136)과 전쟁. 1권,\’28 : 4(562)에 보면 마리암 (Ⅱ세)라고 이름부른다.] 예루살렘 성민들 사이에 그녀의 미모가 자주 회자되자, 첫째로 헤롯은 그가 들은 소문에 의해 흥분되었고, 그 다음엔 그녀를 보자 마자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녹아 버렸다. 그러나 그는 그가 난폭자요 독재자로 비난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 다. 그런데 시몬은 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또 함부로 다루기에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헤롯은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의 욕망을 성취했다. 즉 그와그의 딸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그들에게 매우 명예로운 작위들중의 하나를 주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파베스[㈜ 異文에는 \’Phoabis\’,\’Foavis\’,\’Faves\’, 고대. 18권.34(A사본)과 20권. 179(A 사본과 라틴어 사본)에 나오는 대로 Phiabi가 수정된 것이 분명하다. 히브리 형태인 Pi\’ahi는 미쉬나에 자주 등장한다. 참). 쉬러 ii : 216, 주 6.] (Phabes)의 아들인 예수를 신속히 제거하고 그 자리에 시몬을 임명하여 그의 딸과 결혼하였던 것이다.



4. 헤롯이 또 하나의 요새(헤로디온)를 건축하다.



  결혼식이 끝났을 때 헤롯은 그 지역에 또 하나의 요새를[㈜ 전쟁. 1권. 21 : 21(419)에는 Herodeion으로 나온다. 거기서 요세푸스는 이 이름을 가진 두개의 성채를 말하는데 하나는 아랍 변경의 언덕이 있는 곳에 있고(Clerment-Ganneau는 이곳과 마카이루스(Machaerus)를 동일시했는데, 옷토가 p.82에서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하나는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60 스타디온 되는 거리이다.] 건  설하였는데, 그 곳은 안티고누스(Antigonus) 재위 시(時)에[㈜ 참). 고대. 14권. 13 : 9(360).] 그가 추방당하여 유대인들은 패배시켰던 그 땅이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60스다디온(Stade)[㈜ 약 7마일. 이곳은 현 예벨 엘 -푸레이디스(Jebel el-Fureidis)이거나 베들레헴에서 남서쪽으로 약 4마일되는 프랭크 마운틴(Frank Mountain)으로  생각된다. 참). 쉬러의 i : 390주 66, 아벨의 \’팔레스틴의 지형\'(Geographic de la Palestine) ii : 348.] 떨어진 곳에 있는 그 요새는 자연적으로 견고했으며, 그러한 구조물을 세우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즉 그 곳에는 사람의 손 높이만큼 돋아났고 가슴 모양으로 둥그렇게 쌓여진 언덕이 적절하게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 요새는 중간 중간에 둥근 망대들을 끼고 있었는데, 이 망대들은 반듯하게 잘라진 200개의 돌들로 세워진 가파른 계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요새 안에는 신변보호 및 동시에 장식의목적으로 돈을 많이 들인 왕의 별장이 있었다. 그 언덕의 지하에는 그 지역에서는 귀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설치한 수로와[㈜ 수로(水路)는 울타스(Urtas)의 샘에서부터 뻗어있는데 그 곳은 베들레헴에서 에탐(Etam)에 이르는 도로상에 있다.] 그 물 때문에 다른 것들보다 가치 있어 보이는위락시설이 있었다. 그 평원의 언덕은 다른 집들을 위한 성채(acropolis)로 사용되었고, 평원에 곧 굴지의 도시가 세워졌다.



5. 이방도시에 헤롯이 준 선물



  헤롯은 그의 문제들이 그가 바라던 대로 잘 풀려나가자, 그 자 신의 왕국에서 소요가 일어나리라고는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그는 그의 신하들을 두 가지 방법으로 복종시켰는데, 즉 첫째 방법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는 무자비한 처벌을 가해 공포정치를 하였던 것이고, 둘째 방법은 위기가 일어날 때면 자상하게 그들 보호해주는 유화정책을 펴나갔던 것이다. 그는 또한 그의 신하들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강화하려는 듯, 스스로 자신의 외부에 보호막을 쳤다. 곧 그는 교묘하게 (유대)성읍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었고, 지방의 유력자들에게는 그들 각자에게 시기 적절한 훌륭한 선물을 주어 그에게 더욱 감사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데 그의 타고 난 관대함을 이용하였으며, 그의 입지는 그의 모든 일이 잘 풀려감으로써 탄탄해졌다. 그러나 그의 야심과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가이사에 대한 아첨으로 인해 그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어겼으며, 유대인들의 많은 규정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욕심은 유대 인의 영토가 아닌 곳에 성읍들과 신전들을 세우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이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헬라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우상과 조각품들을 숭배하는 일은 금지되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국 주변의 땅에다 이런 것들을 건립하였다.[㈜ 헤롯이 벨라 도시들에 준 선물들에 관해 전쟁. 1권. 21 ; 11, 12(422-428)에 나온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가 이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명령을 받아 하는 것이라고   둘러대었다.[㈜ 체리코버(A Tcherikover)는 \’에레스 이스라엘(Ere\’ Yi\’r,a : el) i (1951)101주 23(히브리어 판)에서 헤롯의 헬라화 정책은 헤롯이 유대 영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 헬라화를 강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친 마카비 시대의 대제사장 야손과 메넬라우스의 정책과는 다르다고 타당한 지적을 한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모국인 유대나라의 관습을 준수하는 것보다 가이사와 로마 사람들을 예우하고 드높이는 일에 더 열심이라고 말하여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체로 그는 자신의 관심사, 혹은 그의 통치기간 중  후대 사람들에게 보다 더 위대한 기념물을 남기는데 더 열심을 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성읍들의 재건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 역사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6. 헤롯이 가이사랴에 있는 스트라토 망대를 재건하다[㈜ 연이어 나오는 가이샤라에 대한 설명은 전쟁. 1권



  그리고 그가 성읍이 세워질 자리로는 최적지인, 일찌기 스트라토 망대(Strato\’s tower)라고 불렸던 해변가의 한 장소를 보았을 때, 그는 엄청난 규모의 공사 계획을 수립하고 일반적인 자재가 아닌 하얀 돌들을[㈜ 즉 대리석.] 사용하여 전 성읍에 걸쳐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그 성읍에다 매우 화려한 왕궁과[㈜ 혹은 \’궁전들.\’] 시민광장 피라이우스(Piraeus)[㈜ 전쟁. 1권. 21 : 5(410)애 보면 가이사랴항은 피라이우스(Piraeus)보다 더 크다.] 규모의 모든 공사중에 가장크고 가장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잘 보호된 항구와 부두 그리고 그 안쪽에 이차 정박장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공사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대규모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그 지역에서 자체 조달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외부에서 자재를 들여와 완성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성읍은 욥바(Joppa)와 도라(Dora) 사이의 애굽행 항로에 있는 베니게(Ph-oenicia)에 위치하고 있다. 이 두 성읍은 해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들로 가난한 항구들이었는데, 서북풍이 세차게 불면 바다에서 모래가 밀려와 해안에 쌓여 항상[㈜ 다론 본문에는 \”항상\”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배들이 부두에 자유로이드나들 수 없게 하였다.[㈜ 참). 라이펜버그(ReiBnberg)(p.159의 각주 상반부), p.21. \”모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조류(湖流)에 의해 침전되어 졌으며 강한 남서풍에 의해 내륙쪽으로 밀려 왔다\”라고 되어 있다.] 이리하여 항상 상인들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가 배를 불안정하게 정박시켜야 했다. 이러한불편을 해소하고자, 헤롯온 큰 배들도 해안 근처에 닻을 내릴 수있도록 공간을 충분히 확보한 둥근 항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해안선을 따라 20길(fathom) 깊이의 바다에 수많은 바위들을 빠뜨렸다. 이 바위들의 대부분은 길이가 50피트(feet), 넓이가 18피트 이상,[㈜ 전쟁. 1권.21 : 6(411)에서는 \”폭이 10피이트\”라고 되어 있다.] 높이는 9피트 정도였고, 그들 중 어떤 것은조금 더 켰고 어떤 것은 조금 더 작았다. 그가 장벽으로 바다에설치한 구조물은[㈜ 전쟁. 1권.21 : 6(412)에서는 \”방파제\”라고 되어 있다.] (넓이가) 200피트나 되었다. 그 장벽의 반쪽은 파도의 흐름을 마주보고 있어서, 모든 곳으로부터 오는 거센물줄기를 막아 흩뜨렸기 때문에 방파제라고 불렸던 것이다. 돌벽으로 지탱되고 있던 그 장벽의 반쪽 부분에는 가끔 망대들이   끼어들어 서 있었는데, 그 망대들 중 가장 크고 훌륭한 자태를   자랑하는 것은 드루수스(Drusus)라 불렸다. 그 이름은 젊어서죽은 가이사의 양자 드루수스의[㈜ 네로 글라우디오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는 아구스도의 아내였던 리비아(Livia)가 첫 남편이자 미래의 디베료 황제의 형제인 디베료 글라우디오 네로(Tibgerius Claudius Nero)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는 불과 나이 30에 게르마니(Germany)에서 급사(急死)하였다. 추측컨대 헤롯은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 그의 이름을 따라 이 탑의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본다.]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 안  쪽 구석에 선원들의 피난처로 쓰일 아치형의 공간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 휴식 공간(recess)들[㈜ Chamonard는 이를 \’피난처\'(d\’abris)로 번역한다.] 앞에는[㈜ 여기에 나오는 \”앞에는\”이란 말은 추측컨대 \’해안선을 따라서\’라는 뜻을 의미 한다.] 항구를 바라볼 수 있는 널다란 선창이 있었다. 이곳은 산보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  었다.[㈜ 본문이 불분명하다.] 항구의 입구는 북쪽을 향해 만들어 졌는데, 그 이유는북풍이 항상 최고의 괘적한 날씨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었다. 항  구 안쪽으로 들어오는 배들에서 왼쪽에 위치하는 둥근벽의 기초는, 물의 압력을 지탱할 넓고도 단단한 토대로써 쌓여진 돌들 위에 세워진[㈜ 흑은, 보다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쌓다\'(piled up)는 뜻이다. 異文에는 carried round로 기록됨.] 망대였다. 반면에 오른 쪽에는 왼편의 망대보다 큰 두개의 커다란 돌 장벽이 직각으로 맞물려 있었다. 이 원처럼 둥근 항구 안에는 가장 광택나는 들로 건축된 건물들이 줄을 지어서 있었고, 그들의 중간에는 가이사 신전[㈜ 엄격히 말하자면, 요세푸스가 바로 이 다음에서 지적한 것처럼, 로마와 아구스도를 위한 신전이었다.] 세워져 있는 구릉이 있었다. 이 곳은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의 안내자가 되었고,[㈜ 참). 라이펜버그의 인용된 작품<고대. 15권. 9  : 6(331)의 각주를 보라>, 23. \”거대한 공공 건물(가로, 세로 약 100미터씩)의 윤곽은 오늘날의 유대인 정착촌의 바로 동쪽에 있는 언덕에서 보면 식별할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 형태의 상(像)과 가이사의 동상이 그 곳에 세워져있었다. 그 성 자체는 가이사랴(Caesarea)라고 불리는데, 건축용 자재로 보나 건축상으로 보나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리고 이 성읍 아래에 있는 지하도와 하수도는[㈜ 이러한 것들의 유적에 관하여는 라이펜버그가 언급한 적이 없다. 발굴 결과 나타난 도수관(導水管)은 아마도 요세푸스의 시대 이후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본다.] 위에 있는 건축물못지 않게 노력을 들여 건축되었다. 이들 중 몇몇은 한 지점으로부터 항구와 바다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거리로 뻗어 있으며 대각선 통로가 이들 모두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빗물과 쓰레기와 분뇨가 신속히 바다로 빠져나가게 하였다. 그리고 바다로부터 유입된 물은 도시 전체를 통과하여 흘러들어 지하로부터 갑자기 분출되기도 하였다. 헤롯은 또한 성읍안에 돌로 된[㈜ 다른 본문에는 \”돌로 만든\”이란 말은 생략되어 있다.] 극장을 세웠고, 뒤쪽으로 더 나아간[㈜ 여기에 나오는 \”뒤쪽으로 더 나아간\”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지만 다음의 각주를 보라.] 항구의 남쪽에는 바다를쉽게 바라볼 수 있고 군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원형 경기장을 건설하였다.[㈜ 참). 라이펜버그, 인용된 작품<고대. 15권. 9 : 6(331)>. \”현재 항구 남쪽에 있는 건물은 원형경기장(amphitheatre)이 아니라 극장(theatre)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원형경기장\’에서 \’극장\’으로 수정되어야 하고 또 이 문장이 역(逆)으로 고쳐져야 한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는 관점을 가정할 때 이것은 극장만이 정확한 것이다.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원형경기장도 경기장(hippodrome)도 마땅치않다.\” 또한 고대. 16권. 5 : 71(136)에 관한 기술을 보라.] 이제 이 도시는 12년이[㈜ 고대. 16권. 5 : 1(136)에 따르면 가이사랴의 재건은 10년이 소요되었으며 헤롯이 집정한지 28년(주넞 10-9년)에 완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건설 공사를 시작한 연도는 주전 2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역사(役事) 기간이 \’12년\”이란 본문의 기록은 다양한 이유로 인해 지지받는다. 그러므로 재건을 시작한 것은 주전 22년이다. Schurer I, 368 이하와 Otto의 책 p.70을 보라.] 걸려 완공되었다. 헤롯은 공사 진행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공사 비용을 충당할 충분한 재원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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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권 제 9장 유대와 수리아에 발생한 기근에 대하여, 그리고 헤롯이 다른 부인을 얻은 후 가이사랴와 그 밖의 헬라식 도시들을 재건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9 장


    유대와 수리아에 발생한 기근에 대하여, 그리고 헤롯이 다른 부인을 얻은 후 가이사랴와 그 밖의 헬라식 도시들을 재건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1. 헤롯 당시 큰 기근과 재앙이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다.


      헤롯이 사마리아 시를 건설했던 바로 그 해 즉 헤롯 왕 13년 에[㈜ 이것은 주전 25(24)년경일 것이다. Schurer의 i : 366주 8에 따르면 사마리아 재건은 주전 27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9 : 1(299이하)는 원래 7 : 10(266) 뒤에 나오는 것이 바르며 ‘같은 해’라는 말은 사마리아 재건의 시기가 아니라 코스토바루스가 사형된 때일 것이다. Otto는 p.80에서 Schurer와 동일하며 고대. ] 하느님의 진노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사상 유례없는 큰 재앙이 유대 온 나라를 뒤덮었다. 그 재앙의 첫번째는 상당기간 동안 지속된 기근으로     15권. 9 : 1(299)이하는 앞선 부분<고대. 15권. 8: 1-5(267-298)>과는 다른 자료애서 나온다고 한다. 즉 그것은 익명의 유대인의 저작으로 고대. 15권. 9 : 1(299)이하는 고대. 15권. 7 : 10(266)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 그는 고대. 15권.7 : 10(266)을 반-헤롯적인 자료라고 생각하며 고대. 15권. 9 : 1(299)는 다메섹의 니콜라스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Otto는 니콜라스가 주전 25년의 사마리아 재건의 완성과 관계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다음 해에도 계속된 것이 분명하다. 고대. 15권. 9 : 2(307)을 보라.]  예전 같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힐 나무에서 그 열매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땅도 심히 메말라 식물이 고사하여 곡식의 낱알이 영그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번째 재앙은 이와 같은 기근의 결과, 식량의 부족으로 사람의 몸에 필요한 양분이 결핍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문자적인 뜻은 ‘계속적으로 분배되었다’.] 각종 질병이 난무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설상가상의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병을 고칠 만한 약품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영양실조와 질병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들조차도 점차 의욕을 잃어갔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단이라고는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그 해에 거두어  야 할 과실은 꿈도 못꾸게 되었고, 비상시를 대비하여 비축해 둔  식량도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당초 그들이 우려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비관적이었다. 그해에 먹을 양식을 거두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이듬해에 뿌릴 씨앗조차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Otto는 p.69-70에서 본문은 그 땅이 그 해에 두번째 수확을 내지 뭇했다고 한다. 문맥상 이 해석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Otto는 기근이 주전 25-24년이라기보다도 주전 26-25년 겨울에 시작되었다는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달리한다.] 이와 같이 한계상황에 맞부딪힌 그들을 새로운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이와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왕궁에 있는 헤롯은 헤롯대로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헤롯은 지금까지 매 해마다 땅에서 생산되는 산물 중 일부를 바치는 백성들의 세금으로 살아왔는데, 그 해에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받아낼 수 없는데 사마리아 시 건설에 과대지출하여 왕궁의 재정도 고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이와 같은 천재지변이 들어 어려움을 겪게되면 그 탓을 왕에게 돌리고 왕을 원망하는 것이 백성들의 일반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는 헤롯도 마찬가지였다.


     2. 헤롯이 기근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너그럽게 돌보아 주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헤롯은 그와 같은 위기를 타파할 묘안 을 궁리하였으나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나라에서 그들에게 곡식을 팔지도 않을 것이고, 만일에 비싼 값으로 곡식을 조금 판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 비싼 값을 지불하고 곡식을 살 만큼의 돈인 그의금고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본문이 약간 불확실함.] 헤롯은 그의 궁전에 박혀있는 금은으로 만든 여러가지 값나가는 장식물들을 떼어 내어 파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헤롯은 이 돈을 애굽에 보냈는데, 이 당시 애굽에는 가이사로 부터 파송된 페트로니우스(Petronius)가[㈜ 페트로니우스는 주전 24-21년에 애굽의 장관(Prefect)이었다. Arthur Stein의 ‘로마 황제시대의 애굽총독들'(Die Prafekten von Aegrpten in der romischen Kaiserzeit), (베른, 1950) p.17-18을 보라.] 총독으로 있었다. 그가 애굽의 총독으로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  로 피난하였는데, 헤롯 왕과 절친한 친구인 페트로니우스는 헤   롯의 백성들이 기근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곡식을 수출할 때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고, 그들과 함께 그곡식을 배로 실어 본국까지 운송해 줌으로써 헤롯의 백성이 기근에서 탈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항구에 도착하자 헤롯은 그들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와 맺은 우정 때문이라고 백성들에게 공언함으로써, 백성들이   지난 날 자신에게 품었던 적의를 해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들을 위해 선정(善政)을 베풀 것이라고 호언하며 자 신의 위세를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헤롯은 우선 자기 스스로 일  하여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자에게 적정량의 식량을 분배해 주었다.[㈜ 참). Jones의 p.88에는 “애굽 곡물은 공적인 사용을 위해 비축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수출허가는 드물게 개인적으로 내주었다. 그러나 헤롯은 이 경우의 특별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나서 나이가 들거나 병들어 그들 스스로는 도저  히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위하여 미리 구운 빵을 배급해 주었다. 헤롯은 또한 그들이 기르던 가축이 기근으  로 인해 대부분 죽었거나 그나마 남아있는 가축들도 완전히 잡아먹어 양털이나 그밖에 옷감으로 사용할 물질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그 절대량이 부족한 의복문제를 포함하여 추운 날씨에도 건강상의 위험없이 무사히 날 수 있도록 그들의 겨우살이에도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백성들을 위한 생필품이 보급되자, 헤롯은 이웃 도시에도 도움의 손길을 뻗쳐 수리아 거주민에게는 곡식의 종자를 제공해 주었다. 이와 같은 헤롯의 너  그러운 행위는 때를 잘 타 결과적으로 그에게 큰 이익을 안겨 주었는데, 그 까닭은 그가 준 씨앗으로 농사를 지은 수리아에 큰 풍년이 들어 헤롯 백성 모두에게 공급할 수 있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추수때가 되자, 헤롯은 50,000명이 넘는 자기 백성들을 수리아로 보내 지금까지 동족을 도왔던 것처럼 똑같은 처지에 처해 있는 이웃나라를 도왔다. ‘그리하여, 어려움을 당하여 헤롯에게 도움의 손길을 원한 사람치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개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부양해야 할국민이나 도시 흑은 가족이 너무 많아 어려움을 겪다가 헤롯에게 구조의 손길을 요청하여 그의 도움을 입지 않은 민족이나 도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헤롯이 인근 도시나 다른 민족에게 원조한 양을 계산해 보면, 타국에 원조한 곡량이 10,000코르(Kors) -1코르는 10아덴 메딤노이 (Attic medimnoi)[㈜ 요세푸스가 히브리 도량형을 델라 도량형으로 표기하는데 있어서 모순되는 것이 자주 나온다. 고대. 3권. 15 3(321)애서는 70코르(kor)가 아덴 도량형으로 41메딤노이(medimnoi)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는 1코르는 1 메딤노스(medimnos)의 약 4/7정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코르(kor)는 아덴 도량형으로는 약 7메딤노이에 해당된다.] 와 같다-였고 자국내 백성에게 원조된 곡물의 양은 80,000코르였다.유대 백성을 향한 헤롯의 이와 같은 선행과 시의적절한 관용은 유대인들에게 강한 호감을 왔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국가들 사이에도 널리 이야기되어 과거 제사의식이나 왕실의 규례문제로 유대인의 마음 속에 누적되었던 그에 대한 원성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고 주변국가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원조해 줌으로써 헤롯은 그에 상응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필요한 때 헤롯이 관용을 베푼 예들에 대해 고대. 15권. 10 : 4(365), 16권. 2 : 5(64))를 보라.] 그는 또한 외국의 여러 나라로부터 좋은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혹독하게 몰아 닥친 유대 땅의 기근이 헤롯의 명성을 널리 떨치게 해 준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예상치도 못했던 그의 자상함은 그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던 대중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여 초기 유대인들의 경험을 통해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던 헤롯에 대한 불신을 사라지게 했으며, 헤롯은 자기들이 곤핍할  때는 기꺼이 자기들을 보살펴 주는 인정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3. 헤롯이 예루살렘에 왕궁을 세우고 제사장 시몬의 딸과 결혼하다


      [㈜ 9 : 3-6(317-341)은 전쟁. 1권. 21’1-8(402-415)와 부분적인 병행을 이룬다.]


      헤롯이 가이사에게 사람을 보내 보충병력으로서 그의 호위병중 500명을 선발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주전 25-24년.]. 이 사람들은 아일리우스 갈루스(Aelius Gallus)에게 매우 필요한 사람들이었는데그는 그들을 홍해로 인도하여 갔다.[㈜ 참). Stravo, xvi. 4, 23, p.780. 아일리우스 갈루스(Aelius Gallus)가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에 있는 사바인들(Saeans)을 치러 원정했었지만 이것에 실패한(쉬러의 i : 367주 9에 나음) 다른 고대 문헌들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liii . 29, 플리니의 ‘박물학’ (National History) vi. 28 : 160 이하, 안키라눔의 기념비(Monumentum Ancanum) v ; 18 이하 등이다. 현대의 기록에 관해서는 AH’x. 248-252에 나오는 J. G. C. Anderson의 설명을 보라.] 그리고 헤롯은 그의 문제들이 해소되고 다시 번영을 누리게 되었을 때, 상부도시(theUpper City)[㈜ 이것은 헤롯의 성채이다. 더욱 자세한 것은 전쟁. 5권. 4 : 3, 4(156-183)에 나와 있다. 참). Abel의 ‘알렉산드리아 정복에서 아랍의 침략에 이르는 팔레스틴의 역사'(Histoire do la Palestine depuis la conquete d’Alexandre jesqu’a L’invasion arabs) 파리, 1952년판의 i. 355-367을 보라. 이 곳은 상부 도시 (욥바 도로가 시작되는 근처)의 북서단에 있으며, 하스모네안 궁의 서쪽에 위치한다. 성전 경내의 북서단에 있는 안토니아와는 구별된다. 8 : 5(292) 주를 보라.]에 왕궁을 세웠다. 그는 그 안에다 놀라우리만치엄청나게 크고 높은 방을 건축하였는데, 많은 돈을 들여서 금과 각종 돌들과[㈜ 대리석일 것이다.] 아름다운 빛깔의 도료들을[㈜ 끝 부문의 분명한 뜻이 불확실함.] 사용하여 그 방들을 장식하였다. 각 방들은 매우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휴식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규모나 그 명칭이 매우 다양하였다.예를 들면 하나는 ‘가이사의 방, 또 다른 하나는 ‘아그립바의 방이라고 불렸다.[㈜ 아구스도와 M. 빕사니우스 아그립바.]  그는 그의 연정이 자극을 받게 되었을 때 재혼하였다. 그는 단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보에투스(Boethus)[㈜ 보에투스(Boethus)의 아들인<칸테라스(Kantheras)라 이름하는> 시몬과 혼동하지 않도록. 보에투스는 아그립바 재위시 대제사장이었다. 고대. 19권.6 : 2(297)을 보라.] 의 아들인 잘알려진 시몬(Simon)이라는 제사장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그 시대에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진 딸이 있었다.[㈜ 고대. 18권.5 : 4(136)과 전쟁. 1권,’28 : 4(562)에 보면 마리암 (Ⅱ세)라고 이름부른다.] 예루살렘 성민들 사이에 그녀의 미모가 자주 회자되자, 첫째로 헤롯은 그가 들은 소문에 의해 흥분되었고, 그 다음엔 그녀를 보자 마자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녹아 버렸다. 그러나 그는 그가 난폭자요 독재자로 비난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 다. 그런데 시몬은 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또 함부로 다루기에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헤롯은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의 욕망을 성취했다. 즉 그와그의 딸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그들에게 매우 명예로운 작위들중의 하나를 주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파베스[㈜ 異文에는 ‘Phoabis’,’Foavis’,’Faves’, 고대. 18권.34(A사본)과 20권. 179(A 사본과 라틴어 사본)에 나오는 대로 Phiabi가 수정된 것이 분명하다. 히브리 형태인 Pi’ahi는 미쉬나에 자주 등장한다. 참). 쉬러 ii : 216, 주 6.] (Phabes)의 아들인 예수를 신속히 제거하고 그 자리에 시몬을 임명하여 그의 딸과 결혼하였던 것이다.


    4. 헤롯이 또 하나의 요새(헤로디온)를 건축하다.


      결혼식이 끝났을 때 헤롯은 그 지역에 또 하나의 요새를[㈜ 전쟁. 1권. 21 : 21(419)에는 Herodeion으로 나온다. 거기서 요세푸스는 이 이름을 가진 두개의 성채를 말하는데 하나는 아랍 변경의 언덕이 있는 곳에 있고(Clerment-Ganneau는 이곳과 마카이루스(Machaerus)를 동일시했는데, 옷토가 p.82에서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하나는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60 스타디온 되는 거리이다.] 건  설하였는데, 그 곳은 안티고누스(Antigonus) 재위 시(時)에[㈜ 참). 고대. 14권. 13 : 9(360).] 그가 추방당하여 유대인들은 패배시켰던 그 땅이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60스다디온(Stade)[㈜ 약 7마일. 이곳은 현 예벨 엘 -푸레이디스(Jebel el-Fureidis)이거나 베들레헴에서 남서쪽으로 약 4마일되는 프랭크 마운틴(Frank Mountain)으로  생각된다. 참). 쉬러의 i : 390주 66, 아벨의 ‘팔레스틴의 지형'(Geographic de la Palestine) ii : 348.] 떨어진 곳에 있는 그 요새는 자연적으로 견고했으며, 그러한 구조물을 세우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즉 그 곳에는 사람의 손 높이만큼 돋아났고 가슴 모양으로 둥그렇게 쌓여진 언덕이 적절하게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 요새는 중간 중간에 둥근 망대들을 끼고 있었는데, 이 망대들은 반듯하게 잘라진 200개의 돌들로 세워진 가파른 계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요새 안에는 신변보호 및 동시에 장식의목적으로 돈을 많이 들인 왕의 별장이 있었다. 그 언덕의 지하에는 그 지역에서는 귀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설치한 수로와[㈜ 수로(水路)는 울타스(Urtas)의 샘에서부터 뻗어있는데 그 곳은 베들레헴에서 에탐(Etam)에 이르는 도로상에 있다.] 그 물 때문에 다른 것들보다 가치 있어 보이는위락시설이 있었다. 그 평원의 언덕은 다른 집들을 위한 성채(acropolis)로 사용되었고, 평원에 곧 굴지의 도시가 세워졌다.


    5. 이방도시에 헤롯이 준 선물


      헤롯은 그의 문제들이 그가 바라던 대로 잘 풀려나가자, 그 자 신의 왕국에서 소요가 일어나리라고는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그는 그의 신하들을 두 가지 방법으로 복종시켰는데, 즉 첫째 방법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는 무자비한 처벌을 가해 공포정치를 하였던 것이고, 둘째 방법은 위기가 일어날 때면 자상하게 그들 보호해주는 유화정책을 펴나갔던 것이다. 그는 또한 그의 신하들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강화하려는 듯, 스스로 자신의 외부에 보호막을 쳤다. 곧 그는 교묘하게 (유대)성읍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었고, 지방의 유력자들에게는 그들 각자에게 시기 적절한 훌륭한 선물을 주어 그에게 더욱 감사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데 그의 타고 난 관대함을 이용하였으며, 그의 입지는 그의 모든 일이 잘 풀려감으로써 탄탄해졌다. 그러나 그의 야심과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가이사에 대한 아첨으로 인해 그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어겼으며, 유대인들의 많은 규정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욕심은 유대 인의 영토가 아닌 곳에 성읍들과 신전들을 세우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이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헬라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우상과 조각품들을 숭배하는 일은 금지되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국 주변의 땅에다 이런 것들을 건립하였다.[㈜ 헤롯이 벨라 도시들에 준 선물들에 관해 전쟁. 1권. 21 ; 11, 12(422-428)에 나온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가 이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명령을 받아 하는 것이라고   둘러대었다.[㈜ 체리코버(A Tcherikover)는 ‘에레스 이스라엘(Ere’ Yi’r,a : el) i (1951)101주 23(히브리어 판)에서 헤롯의 헬라화 정책은 헤롯이 유대 영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 헬라화를 강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친 마카비 시대의 대제사장 야손과 메넬라우스의 정책과는 다르다고 타당한 지적을 한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모국인 유대나라의 관습을 준수하는 것보다 가이사와 로마 사람들을 예우하고 드높이는 일에 더 열심이라고 말하여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체로 그는 자신의 관심사, 혹은 그의 통치기간 중  후대 사람들에게 보다 더 위대한 기념물을 남기는데 더 열심을 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성읍들의 재건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 역사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6. 헤롯이 가이사랴에 있는 스트라토 망대를 재건하다[㈜ 연이어 나오는 가이샤라에 대한 설명은 전쟁. 1권


      그리고 그가 성읍이 세워질 자리로는 최적지인, 일찌기 스트라토 망대(Strato’s tower)라고 불렸던 해변가의 한 장소를 보았을 때, 그는 엄청난 규모의 공사 계획을 수립하고 일반적인 자재가 아닌 하얀 돌들을[㈜ 즉 대리석.] 사용하여 전 성읍에 걸쳐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그 성읍에다 매우 화려한 왕궁과[㈜ 혹은 ‘궁전들.’] 시민광장 피라이우스(Piraeus)[㈜ 전쟁. 1권. 21 : 5(410)애 보면 가이사랴항은 피라이우스(Piraeus)보다 더 크다.] 규모의 모든 공사중에 가장크고 가장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잘 보호된 항구와 부두 그리고 그 안쪽에 이차 정박장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공사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대규모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그 지역에서 자체 조달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외부에서 자재를 들여와 완성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성읍은 욥바(Joppa)와 도라(Dora) 사이의 애굽행 항로에 있는 베니게(Ph-oenicia)에 위치하고 있다. 이 두 성읍은 해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들로 가난한 항구들이었는데, 서북풍이 세차게 불면 바다에서 모래가 밀려와 해안에 쌓여 항상[㈜ 다론 본문에는 “항상”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배들이 부두에 자유로이드나들 수 없게 하였다.[㈜ 참). 라이펜버그(ReiBnberg)(p.159의 각주 상반부), p.21. “모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조류(湖流)에 의해 침전되어 졌으며 강한 남서풍에 의해 내륙쪽으로 밀려 왔다”라고 되어 있다.] 이리하여 항상 상인들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가 배를 불안정하게 정박시켜야 했다. 이러한불편을 해소하고자, 헤롯온 큰 배들도 해안 근처에 닻을 내릴 수있도록 공간을 충분히 확보한 둥근 항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해안선을 따라 20길(fathom) 깊이의 바다에 수많은 바위들을 빠뜨렸다. 이 바위들의 대부분은 길이가 50피트(feet), 넓이가 18피트 이상,[㈜ 전쟁. 1권.21 : 6(411)에서는 “폭이 10피이트”라고 되어 있다.] 높이는 9피트 정도였고, 그들 중 어떤 것은조금 더 켰고 어떤 것은 조금 더 작았다. 그가 장벽으로 바다에설치한 구조물은[㈜ 전쟁. 1권.21 : 6(412)에서는 “방파제”라고 되어 있다.] (넓이가) 200피트나 되었다. 그 장벽의 반쪽은 파도의 흐름을 마주보고 있어서, 모든 곳으로부터 오는 거센물줄기를 막아 흩뜨렸기 때문에 방파제라고 불렸던 것이다. 돌벽으로 지탱되고 있던 그 장벽의 반쪽 부분에는 가끔 망대들이   끼어들어 서 있었는데, 그 망대들 중 가장 크고 훌륭한 자태를   자랑하는 것은 드루수스(Drusus)라 불렸다. 그 이름은 젊어서죽은 가이사의 양자 드루수스의[㈜ 네로 글라우디오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는 아구스도의 아내였던 리비아(Livia)가 첫 남편이자 미래의 디베료 황제의 형제인 디베료 글라우디오 네로(Tibgerius Claudius Nero)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는 불과 나이 30에 게르마니(Germany)에서 급사(急死)하였다. 추측컨대 헤롯은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 그의 이름을 따라 이 탑의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본다.]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 안  쪽 구석에 선원들의 피난처로 쓰일 아치형의 공간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 휴식 공간(recess)들[㈜ Chamonard는 이를 ‘피난처'(d’abris)로 번역한다.] 앞에는[㈜ 여기에 나오는 “앞에는”이란 말은 추측컨대 ‘해안선을 따라서’라는 뜻을 의미 한다.] 항구를 바라볼 수 있는 널다란 선창이 있었다. 이곳은 산보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  었다.[㈜ 본문이 불분명하다.] 항구의 입구는 북쪽을 향해 만들어 졌는데, 그 이유는북풍이 항상 최고의 괘적한 날씨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었다. 항  구 안쪽으로 들어오는 배들에서 왼쪽에 위치하는 둥근벽의 기초는, 물의 압력을 지탱할 넓고도 단단한 토대로써 쌓여진 돌들 위에 세워진[㈜ 흑은, 보다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쌓다'(piled up)는 뜻이다. 異文에는 carried round로 기록됨.] 망대였다. 반면에 오른 쪽에는 왼편의 망대보다 큰 두개의 커다란 돌 장벽이 직각으로 맞물려 있었다. 이 원처럼 둥근 항구 안에는 가장 광택나는 들로 건축된 건물들이 줄을 지어서 있었고, 그들의 중간에는 가이사 신전[㈜ 엄격히 말하자면, 요세푸스가 바로 이 다음에서 지적한 것처럼, 로마와 아구스도를 위한 신전이었다.] 세워져 있는 구릉이 있었다. 이 곳은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의 안내자가 되었고,[㈜ 참). 라이펜버그의 인용된 작품<고대. 15권. 9  : 6(331)의 각주를 보라>, 23. “거대한 공공 건물(가로, 세로 약 100미터씩)의 윤곽은 오늘날의 유대인 정착촌의 바로 동쪽에 있는 언덕에서 보면 식별할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 형태의 상(像)과 가이사의 동상이 그 곳에 세워져있었다. 그 성 자체는 가이사랴(Caesarea)라고 불리는데, 건축용 자재로 보나 건축상으로 보나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리고 이 성읍 아래에 있는 지하도와 하수도는[㈜ 이러한 것들의 유적에 관하여는 라이펜버그가 언급한 적이 없다. 발굴 결과 나타난 도수관(導水管)은 아마도 요세푸스의 시대 이후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본다.] 위에 있는 건축물못지 않게 노력을 들여 건축되었다. 이들 중 몇몇은 한 지점으로부터 항구와 바다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거리로 뻗어 있으며 대각선 통로가 이들 모두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빗물과 쓰레기와 분뇨가 신속히 바다로 빠져나가게 하였다. 그리고 바다로부터 유입된 물은 도시 전체를 통과하여 흘러들어 지하로부터 갑자기 분출되기도 하였다. 헤롯은 또한 성읍안에 돌로 된[㈜ 다른 본문에는 “돌로 만든”이란 말은 생략되어 있다.] 극장을 세웠고, 뒤쪽으로 더 나아간[㈜ 여기에 나오는 “뒤쪽으로 더 나아간”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지만 다음의 각주를 보라.] 항구의 남쪽에는 바다를쉽게 바라볼 수 있고 군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원형 경기장을 건설하였다.[㈜ 참). 라이펜버그, 인용된 작품<고대. 15권. 9 : 6(331)>. “현재 항구 남쪽에 있는 건물은 원형경기장(amphitheatre)이 아니라 극장(theatre)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원형경기장’에서 ‘극장’으로 수정되어야 하고 또 이 문장이 역(逆)으로 고쳐져야 한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는 관점을 가정할 때 이것은 극장만이 정확한 것이다.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원형경기장도 경기장(hippodrome)도 마땅치않다.” 또한 고대. 16권. 5 : 71(136)에 관한 기술을 보라.] 이제 이 도시는 12년이[㈜ 고대. 16권. 5 : 1(136)에 따르면 가이사랴의 재건은 10년이 소요되었으며 헤롯이 집정한지 28년(주넞 10-9년)에 완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건설 공사를 시작한 연도는 주전 2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역사(役事) 기간이 ’12년”이란 본문의 기록은 다양한 이유로 인해 지지받는다. 그러므로 재건을 시작한 것은 주전 22년이다. Schurer I, 368 이하와 Otto의 책 p.70을 보라.] 걸려 완공되었다. 헤롯은 공사 진행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공사 비용을 충당할 충분한 재원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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