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권 제 11장 헤롯이 성전을 재건하여 전보다 더 높고 화려하게 했던 것, 그리고 그가 안토니아라고 명명한 망대에 대하여

 


제 11 장




헤롯이 성전을 재건하여 전보다 더 높고 화려하게 했던 것, 그리고 그가 안토니아라고 명명한 망대에 대하여




 1. 헤롯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려는 계획을 백성들에게 알림




  [㈜ 11장에서 성전을 짓는 연대에 관한 간단한 언급을 제외하고 전쟁. 1권과 병행되는 구절은 없다. 다음 각주 352를 볼 것. 그러나 전쟁. 5권. 5 : 1-6(184-227)에서 성전에 대한 부분적인 병행 묘사 부분은 있다.]




  헤롯이 왕이 된 지 18년이[㈜ 주전 37년경부터 계산하면 이것은 주전 20-19년이 된다. 전쟁. 1권. 12 : 1(401)에 따르면 헤롯은 그의 재위기간의 15년째 주전 23-22년에 성전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아마 쉬러(Schurer)는 I. 369 각주 12에서 제시한 대로 \’전쟁사\’에서 주어진 더 이른 연대가 예비적인 준비라고 언급하지만 오토(Otto)는 p.84 각주에서 \’고대사\’ 자체가 예비적인 준비라고 언급한다. 그래서 그는 \’전쟁사\’에 있는 \”15년째\”라는 단어가 잘못 쓰여진 것이라고 간주한다.] 되는 해에[㈜ 즉 주전 20년에 아구스도(augustus)의 수리아 방문 뒤. 고대. 15권. 10 : 3(325)를 볼 것.]–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이 끝난 후 – 이례적인 공사를 시작하였다. 주로 하느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즉, 헤롯(Herod)은 스룹바벨(Zerubbabel)이 세운 성전을 파괴하지 않았고 그것을 완전하게 다른 구조물로 대치시켜 버렸다.] 일인데 자비를 들여서 착공하였다. 이전 성전의 경내를 대폭 확장하고 성전의 높이를 크게 확대하여서 위풍도 당당해 보이게 세울 생각이었다. 사실이 정말 그렇지만, 이임무가 달성만 된다면 헤롯이 해 온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기억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롯은 백성들이 이렇게 커다란 공사를 하는 것에 대해 쉽게 지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헤롯은 먼저 백성들에게 연설을 통하여 전체 공사계획에 대해 말함으로써 백성들이 이 계획에 호의를 갖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헤롯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보위에 오르고 이룬 모든 사업들은 나의 백성들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새삼스레 언급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내가 세운 건축물들이 비록 나에게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안전보다는 적었을 것입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는 여러분의 요구대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건축물을 계속하여 세운 것도 나 자신을 보호하려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보다 잘되게 하기 위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예전에 한번도 없었던 번영의 상태로 유대국을 강대하게 만드신 하느님의 뜻에 의해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나라와 우리 도시 그리고 우리가 정복한 곳에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여 세운 다양한 건축물로 우리나라를 아름답게 했던 일에 관하여 내가 여러분들에게 언급한다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모험적인 계획은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으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바벨론(Babylon)으로부터 귀환하여 거룩한 하느님께 지어 바친 이 신전은 솔로몬(Solomon)에 의해 지어진 처음 성전보다 높이가 60규빗[㈜ 한 사본과 발췌본에는 \”7\”이라고 나온다. 요세푸스는 이미 스룹바벨(Zerubbabel)의 성전 높이를 60규빗(Cubit)이라고 말했다<참). 고대. 11권. 4 : 6(99) 이는 성경에 따른 것임>. 그러나 고대. 8권. 3 : 2(64)에서 그는 솔로몬 성전의 총 높이가 120규빗이라고 말했었다<대하 3 : 4에 따른 성전과 120규빗이라고 측정되는 현관문 사이의 혼동에 대해서는 고대. 8권. 3 : 2(64)를 볼 것>.] 모자랍니다. 바로 솔로몬이 지은 첫 성전이 지금 것보다더 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 조상들의[㈜ 문자적으로는 \’선조들\'(the fathers)이지만 바로 먼저 나오는 일인칭 복수 소유 대명사는 \’선조들\'(fathers)과 같이 쓰여지고 있다. 그래서 헤롯은 여기서 그 자신을 유대 국민으로 나타내고 있다.] 훌륭한 의무에 대하여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은 성전이 첫 성전보다 작았지만, 작은 것이 그들의 결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레스(Cyrus)와 히스타스페스(Hystaspes)의아들 다리오(Darius)가 성전의 규모를 미리 결정하였고, 우리조상들이 그들의 후손들과 후에는 마게도냐인들(Macedonia-ns)에게 복종함으로 해서 처음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성전의 규모처럼 복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지금 지배자로 여기 존재하고 있고, 평화의 시대도 오랜 동안 계속되었으며[㈜ 단지 다섯해 전에 헤롯은 그의 군대를 남방 아라비아(Arabia)에 있는 아랍족(Arabs)들과의 싸움에 로마인들을 돕기 위해 파병했었다. 고대. 15권. 9 : 3(317)을 볼 것. 명백하게 5년은 평화스러운 \’긴 시기\’로 간주된 것이 분명하다.] 부와 많은 양의 세입도 비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세계의 지배자들인 로마의 주요한 인물들도 나의 충실한 친구들입니다. 나는 이제 이전 시대에 중요성과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과되어 왔던 성전 재건을 추진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이라는 경건한 행동으로써, 하느님이 나에게 주셨던 은혜에 대한 우리 왕국의 선물을 하느님께 충실하게 보답하겠습니다.\”




 2. 헤롯의 성전 재건을 위한 준비




  이러한 헤롯의 말을 그의 연설을 통해 들은 백성들은 대부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의 진실 같지 않은 성전 재건 계획 발표는 백성들의 마음에 흥분을 일으키지 않았다. 도리어 헤롯이 성전을 완전히 새로 짓겠다고 하여 지금의 성전을 철거한후에 계획대로 완공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당황이 되었을 뿐이다. 이 위험이 유대인들에게 엄청나게 파급되어 대규모의 성전 재건공사의 착수가 달성되기는어려운 듯 보였다. 백성들(유대인들)은 왕이 그들에게 호언장담한 이 방법에 대하여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롯은 백성들에게 그 공사의 완성을 위해 소요되는 모든 물자의 사전 확보가 되기 전에는 지금의 성전을 헐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헤롯의 이 확언은 어긋나지 않았다. 헤롯은 돌을 운반하기 위해 마차 1,000대를 준비였고, 가장 숙련된 기술자 10,000명을 선발하였으며, 1000명의 제사장들을 위한 사제[㈜ 이본(異本)에는 \”일하는 자들의\”로 나와 있을 것이다.] 예복을 구입했다. 그리고 석공과 목공으로서 얼마간의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헤롯에 의해 이런 모든 준비들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후에 비로소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다.




 3. [재건된 성전의 모습]




   헤롯은 옛 건물을 헐고 그 위에 새 성전을 세워 길이가 100규빗[㈜ 폭의 측량은 무심결에 빠뜨려졌음이 명백하다. 전쟁. 5권. 5 : 4(207)에 따르면 길이와 길이 그 폭도 100규빗이었다.]이나 되고 높이가 전보다 20규빗 더 높은 성전을[㈜ 헤롯 성전의 고고학적인 것에 관해서는 달만(Dalman), 284-307을 볼 것. F. J. Hollis, \’The Archaeology of Herod\’s Temple : with a Commentary on the Tractate <Middoth>\'(London, 1934)와 J. Simons, \’Jerusalem in the Old Testament\'(Leiden, 1952) pp.381-436. Pere H. Vincent와 Pere A. M. Steve \’Jerusalem de l\’Ancien Testament,\’2-3권 (paris, 1956), pp.432-470. Watzinger, \’Denkmaler\’ ii. 33-46과 부록을 볼 것.] 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기초가 무너짐으로써 높이가 20규빗 줄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네로(Nero)시대에 다시 지으려고 했던 바로 그 20규빗이다.[㈜ 성소를 지탱해 주려고 한 아그립바 Ⅱ세(AgrippaⅡ)의 노력에 대하여는 전쟁. 5권. 1 : 5(36)을 참조. 이에 대해서는 로마와의 전쟁 발발로 중단되었다. 성소 자체의 높이는 전쟁. 5권. 3 : 13(215)에 따르면 60규빗이었다. (각주 355를 보라). 그러나 \”그 첫 번째 건물\”<아마 주랑(the Porch)을 의미하는 듯함>은 전쟁. 5권. 3 : 13(209)에 따르면 높이가 90규빗이었다. 요세푸스의 서로 다른 기사(記事)들에서 그 구조물의 확실한 모양을 얻기는 힘들다.] 성전은 돌로 만들어져 튼튼하였으며 희었다. 돌 하나의 길이는 25규빗이었고, 높이는 8규빗이었으며, 폭약 12규빗 정도였다.[㈜ 요세푸스는 전쟁. 5권. 4 : 1(224)에서 그 건축에 쓰인 돌들은 길이 45규빗, 높이 5규빗, 폭이 6규빗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초에 놓인 돌들은 전쟁. 5권. 13 : 10(189)에 따르면 40규빗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더이상 분리되지 않는 단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임). 이 모든 숫자들은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 돌들의 크기로 보아서 과장되어진 것처럼 보인다. 참). 달만(Calman), p.285.] 성전의 전체 구조는 마치 궁전의 주랑(柱廊)과 같았고 양쪽은 낮았으나 가운데 부분은 훨씬 높았다.그래서 이 성전은 먼 거리에 사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성전 맞은편에 사는 사람들과 성전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그랬다. 출입문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로 된 상인방들은 성전의 높이와 같았고, 헤롯은 알록달록한 걸개들을 걸어 성전을 치장하였는데, 그 걸개들은 기둥모양을 자주빛으로 짜놓은 것이었다.처마장식 아래의 이 기둥모양 위에는 기둥으로부터 금포도 열매의 가지가 뻗어 나와 있었다.[㈜ 태커래이(Thackeray)가 전쟁. 5권. 3 : 13(210)에 있는 병행구를 그의 주(註)에서 지적하였듯이 타키투스(Tacitus)의 \’Hist\’, v : 5는 성전에서 발견되어진 금으로 된 포도나무를 암시해 준다.] 이 성전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성전을 만드는데 사용된 값비싼 물자들과 그 규모 그리고 그 예술성에 감탄하였다. 헤롯은 커다란 주랑들을[㈜시몬스(Simons)는 \”Jerusalem in the Old Testament\'(Leiden, 1952), p.400<참). 각주 358>에서 성전 외곽 경계 지점에 있는 회랑들이 이것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회랑은 삼면이 이중의 회랑으로 되어 있고 남쪽에 있는 한 회랑은 삼중 회랑으로 되어 있다.] 성전 둘레에 쭉배치하였다. 헤롯은 그보다 앞선 어떤 사람들보다도 경비를 많이들여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렇게 값비싸게 성전을 장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양쪽의 주랑들은 견고한 벽에[㈜ 이 본문은 약간 모호함.] 의해 지탱되고 있었는데, 이 벽은 그전의 어떤 벽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훌륭한 벽이었다. 그리고 성전이 세워진 언덕은 바위가많은 언덕으로 예루살렘의 동부쪽으로 기울다가 산꼭대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언덕은 우리의 첫 번째 왕인 솔로몬이[㈜ 아마 이 본문을 \’우리의 왕 솔로몬 I 세\’로 고쳐 읽어야 한다.] 하느님께 지혜를 받은 바로 그 곳으로, 솔로몬은 산 정상의 둘레에성벽을 쌓았다. 이 언덕 아래쪽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헤롯은 이곳에 거대한 바위들을 가져와 납으로 바위들을 연결시켰다. 또한 그는 이 계곡을 더욱 깎고 다듬어서 이 위에 세울 정사각형의 거대한 구조물의 규모가 더욱  높아 보이도록 만들었고, 바위의 내부를 쇠로 고정시켜 연결부위가 영구히 고정되도록 하였다. 이 공사가 언덕의 꼭대기 부분까지 이루어지자, 헤롯은 계곡의 파인 부분을 메꾸어 산의 정상과 같은 높이로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 성전 주위의 성벽은 총 길이가 4스다디온(Sta-de)였고, 각 측면의 길이는 1스다디온(Stade)이었다.[㈜ l 스다디온(Stade)는 585-660피이트 사이다. 미쉬나(Mishnah) 논문 \’Middot\’, 2. 1에 따르면 성전 영역의 각 면(\”그 집의 산\’)은 500규빗이었다. 만약에 왕궁에서 사용되는 규빗(royal cubit)을 의미한다면 아마 이것은 각면이 약 850피이트가 될 것이다. 지금의 하람 에스-세리프(\’aram e\’-\’erif)는 추측컨대 고대 성전 지역을 포함하는데 홀리스(Hollis)의 \’The Archaeology of Her\’s Temple\’ : with a Commentary on the Tractate \’Middot\'(London, 1934), pp.260-261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남쪽 929피이트, 북쪽 1,041피이트, 동쪽 1,556피이트, 서쪽 1,596피이트이다.] 그리고이 성벽의 안쪽으로 언덕의 정상에는 또하나의 성벽이 있었는데, 안쪽 성벽의 동쪽 부분에는 이중의 회랑이 성벽의 길이만큼드리워져 있었다. 또한 이 이중 회랑은 성전문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어[㈜ 즉 서쪽으로, 혹은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연결되어 있었고, 그 전의 왕들도 이 회랑들은 치장하였었다.[㈜ 고대. 20권. 9 : 7(221)에서 요세푸스는 동쪽 회랑이 솔로몬 대왕의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참). Simon, \’Jerusalem in the Old Testament\'(Leiden, 1952), p.421, \”사실 우리가 아그립바(Agrippa) Ⅱ세까지 전수되어 온 거대한 규모의 솔로몬 시대의 어떤 구조물이라는 선험적인 지식을 배제한다 할지라도 그가 동쪽 현관을 재건했다는 유대인들의 제안은 헤롯(Herod)의 확장된 성전(iJerovn,히에론)의 동쪽 영역의 한 부분은 어쨌든 헤롯왕 자신에 의하여 건축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으며 그의 확장 계획에 포함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해준다.] 그리고 성전 주위에는 헤롯이 아랍에서 가져온 것과 다른 야만국[㈜ 여기서 \”야만인들\'(Barbarians)이란 이방인(gentiles)의 의미로 사용된다.] 등에서 빼앗아 헌납한 약탈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4. 대제사장의 제복이 성채(城砦)에 보관되다.




  성전의 북쪽에는[㈜ 즉 전체 성전 영역(지금의 하람 에스 세리프(\’aram e\’-\’erif)의 북서쪽에, 혹은 그 가까이에. 이것은 거의 전쟁. 5권. 4 : 3(238-246)에 묘사되어진 안토니아(Antionia) 헤롯 요새의 지역이다. 15권.(409), 15권.(292)와 각주<그리고 고대. 12권.(251)각주와 18권.(91)이하와 부록을 각각 참조할 것>.] 아주 견고하고 완전한 성채가 있었다. 이성채는 헤롯 이전의 아사모네안 왕가의 왕들과 대제사장들이 지은 것으로 그들은 이것을 요새(baris)라고[㈜ 히브리어로 Bira(요새, 성채). 이것은 주전 134년 경에 주거 지역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힐카누스 I 세(Hyrcanus I )에 의해 건립되었다.] 불렀다. 이곳에는대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할 때만 입는 제복이 보관되었다. 헤롯도 이 제복들을 이곳에 보관하였고, 헤롯이 죽은 후에는 디베료 가이사(Tiberius Caesar)때까지 로마인들의 관리하에 제복들이 이 요새에 보관되어 있었다. 한편, 수리아의 총독인 비텔리우스(Vitellius)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주후 36년. 좀더 정확한 기록은 고대. 18권. 4 : 3(90-95)에서 주어진다. 타키투스(Tacitus), \’연대기\'(Annals), vi : 32를 참조.] 백성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들이 베푼 호의에 무엇인가 보답해 주기를 원했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의 성제복을 자기들이 관리할 수 있도록 간청했고 비텔리우스는 이것에 관해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에게 부탁 서신을 써보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리하여 성제복은 아그립바 왕 때까지 유대인의 관리하에 보존되었다.[㈜ 아그립바 I 세(Agrippa I)로 주후 44년 봄에 죽었음. 앞의 고대. 15권. 10 : 2(350)과 그 각주들과 그리고 고대. 19권. 8 : 2(350)이하를 참조.] 그러나 그 후 수리아 총독인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와[㈜ 주후 45-50년.] 유대 집정관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가[㈜ 그는 글라우디오(Claudius) 때인 주후 44년에 파송되었으며 아마 약 2년 동안 공직에 머물렀던 것 같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제복들을 로마인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제복들을 안토니아 요새에 보관하도록 유대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글라우디오 가이사(Gla-udius Caesar)에게 청원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었는데, 그들이로마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아그립바 Ⅱ세를 만나 아그립바 Ⅱ세가[㈜ 아그립바 Ⅱ세(Agrippa Ⅱ, 주후 50-100년경)로 아그립바 I 세(Agrippa I )의 아들. 그의 통치에 관해서는 특히 고대. 20권과 전쟁. 2권과 \’자서전\’을 참조할 것.] 황제에게 간청하여, 그 당시 수리아의 총독[㈜ 헬라 용어는 라틴어의 Legatus Augusti pro praetore와 일치한다. 이 칭호는 집정관과 지방 총독에게 붙여진다. 그리고 아마 이는 그 고유 통치권 보다는 더 확장되어진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쉬러(Schurer), 1, p.333이하를 참조<Magie, \’로마법…\'(Roman Rule…), I. p.507>.] 비텔리우스는 그들이 대제사장들의 제복을 다시 관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전에는 제복 관리가 대제사장과 성전의 재무관(treasurers)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절기 전날에 재무관들이 로마 수비대 대장을 찾아가 그들의 인증(seal)을 보여주고 제복을 찾은 후, 절기가 끝나면 재무관들이 로마 수비대 대장에게 인증을 다시 보여주고 제복을 같은 장소에 반납하여 보관하였다. 이 작은 예를보더라도 유대인들이 후에 얼마나 로마인들에 의해 고초를 당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고대. 18권. 4 : 3(90-95)에서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대. 20권. 1 : 2(12)를 참조.] 한편, 이때 유대인의 왕 헤롯은 성전의 안전과 방어를 위해 이 요새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로마의 황제인 안토니(Antony)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요새의 이름을 안토니아 요새라고 불렀다.




  5. 성전문과 왕의 회랑




  성전의 서쪽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첫 번째 문은 계곡 가운데로 나있어 왕궁과 통하게 되어 있고,[㈜ 요세푸스가 전쟁. 5권.(140)에서 부르고 있듯이 이 티로포에온(Tyropoeon : \’치즈 만드는 자들\’이란 뜻) 계곡 너머 서쪽 지역이다. 이 계곡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그 도시를 대충 두 개의 지역으로 분할시킨다. 지금은 그 도시는 거의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다<시몬스(Simons)의 책 \’jerusalem in the Old Testament\’ p.37이하와 52이하를 참조>. 그 문은 고대에는 \”코포니우스\”(Coponius)로 알려졌는데 지금의 \’고리의 문\'(the Gate fo Chain)과 위치에 있어서 일치한다. 이 문은 십자군 전쟁(the Crusader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육교를 지지하는 구조물의 몇몇 아아치들(5-6세기경의 작품인지 확실치 않음)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차알스 윌슨 경(Sir Charles Wilson)의 발견 이후 \’윌슨의 아아치\'(wilson\’s Arch)로 알려져 있다. 문들에 대해서 Hollis, p.64와 Simons, p.405이하와 부록을 참조할 것.] 두개의 다른 문은 교외로 나가는 통로였고,[㈜ 즉 서쪽과 복서쪽 베제다(Bezetha), 첫 번째 북쪽 성벽의 북쪽 두 번째 북쪽 성벽에 의해 막혀져 있는데 이것은 헤롯에 의해 복구되었다(느 3장 참조). 그 문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네 번째 문은 도성의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즉 상부 도시(the Upper  City)로 서쪽과 남서쪽으로 뻗어 있음<참). 시몬스(Simons), p.424>. 아아치의 잔재와 그 문의 상(上)인방(lin ter)은 \’무어의 문 \'(Moor\’s Gate), \’예언자의 문\'(Gate of the Prophet, 모하메드 Mohammed), 혹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라 \’바클레이의 문\'(Barclay\’s Gate)으로 다양하게 알려졌는데 오늘날까지 볼 수 있으나 그 본 구조물은 묻혀 있다.] 여기에는 계곡까지 이르는 수많은 계단이 있었고 다시 언덕까지 오르는 계단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도성은[㈜ 이것은 아마 상부 도시와 하부 도시(남쪽과 남서쪽으로 뻗어있음)를 구성하고 있다. 그 계곡은 \’힌놈의 계곡\'(Valley of Hinnom) 혹은 \’게헨나\'(Genenna)이다.] 경기장 모양처럼 성전과 마주보고 있었으며 성전의 남쪽 부분과도성 사이에는 길은 협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쪽을 향해 있는네 번째 중앙에는 통로가 있었고, 그 위로 동쪽 계곡에서 서쪽 계곡으로 이어지는 3개의 통로를 가진 왕의 회랑(Royal Portico)이 있었다.[㈜ 즉 기드론 계곡(Kedron Valley)으로부터 티로포에온(Tyropoeon)까지임. 높은 탑 하나가 동쪽 편 끝에 있는데 초기 전승에 따르면 소위 \’첨탑\'(Pinnacle : 마 4 : 5-눅 4 : 9 참노)으로 알려져 있었다. 티로포에온(Tyropoeon)에 이르는 한 육교가 서편에 있었다. 후자가  몇 개의 흔적들은 주로 출구에 대한 것인데, 현존하여 있으며 지금의 서쪽 성벽의 하단부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로빈슨의 아아치\'(Robinson\’s Arch)인데 이는 유명한 19세기 고고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이란 발견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런데 이 회랑을 더 확장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회랑은 아주 독특한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곡이 너무 깊어서 누구도 계곡의 바닥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즉이 회랑의 높이가 워낙 높아서 회랑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생겨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회랑은4열로 된 기둥들이 떠 받치고 있었는데, 네 번째 열의 기둥들은돌로된 벽에 붙어 있었다.[㈜ 그 문의 현존하는 잔재물들<고대. 15권. 11 : 5(411)을 볼 것>은 정확하게 이 주위의 기둥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Clermont-Ganneau, I, p.254를 참조.]이 기둥들의 두께는 세명의 사람이팔을 뻗쳐 둘러 쌀 정도였고, 높이는 27피이트(feet)이며, 이 기둥들의 기반은 이중 나선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둥은 모두 162개나 되었다.  기둥의 머리조각은 코린트 양식(the Corinthian style)으로 장식되어 그 모습이 아주 장대하고 경탄할만한 장관을 이루었다. 회랑 아래 4열로 된 기둥들 사이로 3개의통로가 나 있었고 이 통로는 서로 나란히 같은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이 통로는 폭이 30피이트, 길이는 1스다디온[㈜ 약 600피트.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그 길이가 더 길다는 것을 지적하며 800피이트 혹은 그 이상이라고 측정했다. 칫수에 대하여는 Hollis, pp. 105-117과 582-607을 볼 것. 고고학과 요세푸스 저서를 잘 조화시키려면 \’ZDPV\’ 15(1892), 134-156에 나오는 F. Spiess의 글을 볼 것.] 높이는 50피이트나 되었다. 이중 가운데 통로의 폭은 양쪽보다 반이 더 넓었고, 높이는 두 배나 되어 양쪽보다 훨씬 높았다. 한편 이회랑의 지붕은 온갖 모양의 조각이 깊게 새겨진 목재 조각으로되어 있었다. 가운데 통로의 지붕은 매우 높았고, 전면(前面)의벽은[㈜ 혹은 \”벽의 전면.\” 이 의미와 곧 따라 나오는 헬라어의 의미가 모호하므로 다양한 해석으로 귀착하곤 한다.] 양끝이 평방(平枋)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들로 지탱되고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이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믿지 못하였고,본 사람들은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것은 첫 번째 뜰(first court)의 모습이었고,[㈜ 현대적인 명칭으로는 소위 \’이방인의 뜰\'(Court of Gentiles). 총면적은 약 35에이커, 혹은 144,000평방미터(Schick). 참). 홀리스(Hollis), p.105-122.]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몇 계단 올라가면 두 번째 뜰이 있었다.[㈜ 이 뜰(이스라엘의 뜰)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북으로 나 있는 벽으로 나뉘어 있는 동편의 부분은 \’여인들의 뜰\'(the Court of Women)로 알려졌다. 참). Hollis, p. 168이하., 167-192.] 이 두 번째 뜰은 돌로 된 난간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외국인출입시는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참). 고대. 12권. 3 : 4(145). 이 부분에 주전 200년 경의 안티오쿠스 치하의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현재 비명(碑銘)은 헬라어이고 한 개의 완판과 두 개의 단편적인 견본들이 알려져 있다. Clermonr – Ganneau가 1871년 완전한 사본을 발견하고 출판하였다.(\’PEF\’, p.132). \”성소 주변의 난간이나 제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방인은 아무도 없다. 잡히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으로써 저주받는다.\” 헬라 본문과 다른 자료에 대해서는 전쟁. 5권. (194) 각주를 보라. 이는 또한 라이나흐(Reinach)의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며 종종 재판된다. 1935년에 발견된 본문과 대 단편들에 관한 토론은 \’QDAP\’, 6(1936), 1-3에 나오는 J. H. Iliffe의 글을 보라. 참). Simons, p.300, Hollis, p. 157이하, ;JQR\’ 37(1946-1947), 387-405에 나오는 Bickermann의 글, 같은 책 38(1947-1948)의 Zeitlin의 주석. Bickermann은 자세한 참고 문헌 목록과 고대 병행에 관한 논평이 들어 있다. 참). 행21 : 26-30의 설명.] 이 안뜰의 남쪽과 북쪽에는 서로 간격이 일정한 3개의 문이 있었다.한편 해가 뜨는 쪽에는 아주 큰 문이 있었는데,[㈜ 고린도 지역에 있는 청동으로 되어 있는 \’니카노르\'(Nicanor)의 문. 그러나 가능성이 적은 추측이긴 하지만 이는 여인들의 뜰로 통하는 동문(東門)일 가능성도 있다. 이 동문에 관하여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언급된 바가 없다. 이에 대한 찬반론이 Hollis의 책(P.167-188)에 논평된다. 참). Simons의 책, p.405이하. 이 문은 또한 행 3 : 2에 나오는 미문(美門, the Beautiful Gate)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불확실한 것이다.] 이곳은 정결한 자들이 아내와 함께 통과하는 문이었다. 이 곳에는 거룩한 뜰(acred court)이 있어서 여자는 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세 번째 뜰이 있었다. 이 세 번째 뜰에 성전이 있었고 성전 앞에 하느님께 번제를드리는 제단이 있었다. 헤롯 왕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세 곳 뜰 어대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헤롯 왕은 회랑과 바깥뜰을 건축하는 것에 주력하여 이를 8년만에 완성하였다.




 6. [성전의 완성]




  성전 자체는[㈜ 즉, 내부 성소(고대. 15권. 11 : 5(419)). 돌 제단 곁에는 향로와 일곱 촛대. 진설병대. 그리고 지성소가 있었는데 이 지성소는 휘장에 의해 가리워져 있었다. 참). 20권. (219)이하, 전쟁. 5권.  5: 5(216-219). 슬라브어 역본에 나와 있는 첨가 사항에 관하여는 \’유대전쟁사\’의 부록을 참고하라.] 제사장에 의해 1년 6개월[㈜ 다른 본문에는 \”5개월\”(P사본). 건축 공사의 연대기에 관하여는 고대. 15권. 11 : 7(425) 각주 396을 참고할.]만에 완공되었다. 백성들은 매우 즐거워하였고, 성전이 그렇게 빨리 지어지게 된 것과 헤롯 왕에게 열성을 주신 것에[㈜ 고대. 15권. 11 : 1(380)에 의하면 헤롯왕이 집정한지 18년에 이루어진 사실. 그러나 이는 전쟁. 1권. 21 : 1(401)에 나오는 내용(15년)과는 불일치한다. 이 성전 공사, 혹은 이 공사를 위한 준비 작업은 주전 23년에서 22년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이 성전이 완공되었던 것은 주전 18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대부분의 사본에 나와 있는 나와 있는 이 말은 아마도 이전에 나와 있는 여격(與格)(하느님께)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드렸다. 그들은 성전이 재건된 것을 축하하며 기뻐했다.헤롯 왕은 수소 300마리를 제물로 바쳤고, 백성들도 성의껏 그들의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이 제물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수는 감히 측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편 이 성전 재건일과 항상 축제로 지켜오던 헤롯의 즉위 기념일이 겹치게 되어 축제에는 흥겨움이 흘러 넘쳤다.




 7. 안토니아로부터 시작되는 비밀통로




  헤롯을 위해 만든 비밀 지하통로가 있었는데, 이 통로는 안토니아 요새로부터 성전 안뜰의 동문(東門)에 이르게 만들어졌다. 헤롯은 이 통로 위에 망대를 세워 감시하게 한 후,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에는 자신이 안전하게 숨을 곳을 마련하였다. 한편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비가 낮에는 오지 않고 밤에만 내렸기 때문에 성전 건축에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선조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로서 지금까지 나타난 하느님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성전은 이러한 방법으로 재건되었다.[㈜ 고대. 20권. 9 : 7(219) 이하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신전이 집정관이었던 알비누스(Albinus) 주후 62-64년)의 시대까지도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는 설명은 종합 건물이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참). 아그립바 Ⅱ세의 휘하에서 진행된 공사에 관하여는 전쟁. 5권. 1 : 5(36-38)를 참조하라. 이 문제에 대해서는 Corbishley, \’JTS\’ 56(1937), 180의 각주를 참조할 것.]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TN-catholicdictionary3-C1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제 15권 제 11장 헤롯이 성전을 재건하여 전보다 더 높고 화려하게 했던 것, 그리고 그가 안토니아라고 명명한 망대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1 장


    헤롯이 성전을 재건하여 전보다 더 높고 화려하게 했던 것, 그리고 그가 안토니아라고 명명한 망대에 대하여


     1. 헤롯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려는 계획을 백성들에게 알림


      [㈜ 11장에서 성전을 짓는 연대에 관한 간단한 언급을 제외하고 전쟁. 1권과 병행되는 구절은 없다. 다음 각주 352를 볼 것. 그러나 전쟁. 5권. 5 : 1-6(184-227)에서 성전에 대한 부분적인 병행 묘사 부분은 있다.]


      헤롯이 왕이 된 지 18년이[㈜ 주전 37년경부터 계산하면 이것은 주전 20-19년이 된다. 전쟁. 1권. 12 : 1(401)에 따르면 헤롯은 그의 재위기간의 15년째 주전 23-22년에 성전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아마 쉬러(Schurer)는 I. 369 각주 12에서 제시한 대로 ‘전쟁사’에서 주어진 더 이른 연대가 예비적인 준비라고 언급하지만 오토(Otto)는 p.84 각주에서 ‘고대사’ 자체가 예비적인 준비라고 언급한다. 그래서 그는 ‘전쟁사’에 있는 “15년째”라는 단어가 잘못 쓰여진 것이라고 간주한다.] 되는 해에[㈜ 즉 주전 20년에 아구스도(augustus)의 수리아 방문 뒤. 고대. 15권. 10 : 3(325)를 볼 것.]–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이 끝난 후 – 이례적인 공사를 시작하였다. 주로 하느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즉, 헤롯(Herod)은 스룹바벨(Zerubbabel)이 세운 성전을 파괴하지 않았고 그것을 완전하게 다른 구조물로 대치시켜 버렸다.] 일인데 자비를 들여서 착공하였다. 이전 성전의 경내를 대폭 확장하고 성전의 높이를 크게 확대하여서 위풍도 당당해 보이게 세울 생각이었다. 사실이 정말 그렇지만, 이임무가 달성만 된다면 헤롯이 해 온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기억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롯은 백성들이 이렇게 커다란 공사를 하는 것에 대해 쉽게 지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헤롯은 먼저 백성들에게 연설을 통하여 전체 공사계획에 대해 말함으로써 백성들이 이 계획에 호의를 갖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헤롯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보위에 오르고 이룬 모든 사업들은 나의 백성들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새삼스레 언급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내가 세운 건축물들이 비록 나에게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안전보다는 적었을 것입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는 여러분의 요구대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건축물을 계속하여 세운 것도 나 자신을 보호하려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보다 잘되게 하기 위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예전에 한번도 없었던 번영의 상태로 유대국을 강대하게 만드신 하느님의 뜻에 의해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나라와 우리 도시 그리고 우리가 정복한 곳에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여 세운 다양한 건축물로 우리나라를 아름답게 했던 일에 관하여 내가 여러분들에게 언급한다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모험적인 계획은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으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바벨론(Babylon)으로부터 귀환하여 거룩한 하느님께 지어 바친 이 신전은 솔로몬(Solomon)에 의해 지어진 처음 성전보다 높이가 60규빗[㈜ 한 사본과 발췌본에는 “7”이라고 나온다. 요세푸스는 이미 스룹바벨(Zerubbabel)의 성전 높이를 60규빗(Cubit)이라고 말했다<참). 고대. 11권. 4 : 6(99) 이는 성경에 따른 것임>. 그러나 고대. 8권. 3 : 2(64)에서 그는 솔로몬 성전의 총 높이가 120규빗이라고 말했었다<대하 3 : 4에 따른 성전과 120규빗이라고 측정되는 현관문 사이의 혼동에 대해서는 고대. 8권. 3 : 2(64)를 볼 것>.] 모자랍니다. 바로 솔로몬이 지은 첫 성전이 지금 것보다더 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 조상들의[㈜ 문자적으로는 ‘선조들'(the fathers)이지만 바로 먼저 나오는 일인칭 복수 소유 대명사는 ‘선조들'(fathers)과 같이 쓰여지고 있다. 그래서 헤롯은 여기서 그 자신을 유대 국민으로 나타내고 있다.] 훌륭한 의무에 대하여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은 성전이 첫 성전보다 작았지만, 작은 것이 그들의 결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레스(Cyrus)와 히스타스페스(Hystaspes)의아들 다리오(Darius)가 성전의 규모를 미리 결정하였고, 우리조상들이 그들의 후손들과 후에는 마게도냐인들(Macedonia-ns)에게 복종함으로 해서 처음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성전의 규모처럼 복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지금 지배자로 여기 존재하고 있고, 평화의 시대도 오랜 동안 계속되었으며[㈜ 단지 다섯해 전에 헤롯은 그의 군대를 남방 아라비아(Arabia)에 있는 아랍족(Arabs)들과의 싸움에 로마인들을 돕기 위해 파병했었다. 고대. 15권. 9 : 3(317)을 볼 것. 명백하게 5년은 평화스러운 ‘긴 시기’로 간주된 것이 분명하다.] 부와 많은 양의 세입도 비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세계의 지배자들인 로마의 주요한 인물들도 나의 충실한 친구들입니다. 나는 이제 이전 시대에 중요성과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과되어 왔던 성전 재건을 추진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이라는 경건한 행동으로써, 하느님이 나에게 주셨던 은혜에 대한 우리 왕국의 선물을 하느님께 충실하게 보답하겠습니다.”


     2. 헤롯의 성전 재건을 위한 준비


      이러한 헤롯의 말을 그의 연설을 통해 들은 백성들은 대부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의 진실 같지 않은 성전 재건 계획 발표는 백성들의 마음에 흥분을 일으키지 않았다. 도리어 헤롯이 성전을 완전히 새로 짓겠다고 하여 지금의 성전을 철거한후에 계획대로 완공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당황이 되었을 뿐이다. 이 위험이 유대인들에게 엄청나게 파급되어 대규모의 성전 재건공사의 착수가 달성되기는어려운 듯 보였다. 백성들(유대인들)은 왕이 그들에게 호언장담한 이 방법에 대하여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롯은 백성들에게 그 공사의 완성을 위해 소요되는 모든 물자의 사전 확보가 되기 전에는 지금의 성전을 헐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헤롯의 이 확언은 어긋나지 않았다. 헤롯은 돌을 운반하기 위해 마차 1,000대를 준비였고, 가장 숙련된 기술자 10,000명을 선발하였으며, 1000명의 제사장들을 위한 사제[㈜ 이본(異本)에는 “일하는 자들의”로 나와 있을 것이다.] 예복을 구입했다. 그리고 석공과 목공으로서 얼마간의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헤롯에 의해 이런 모든 준비들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후에 비로소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다.


     3. [재건된 성전의 모습]


       헤롯은 옛 건물을 헐고 그 위에 새 성전을 세워 길이가 100규빗[㈜ 폭의 측량은 무심결에 빠뜨려졌음이 명백하다. 전쟁. 5권. 5 : 4(207)에 따르면 길이와 길이 그 폭도 100규빗이었다.]이나 되고 높이가 전보다 20규빗 더 높은 성전을[㈜ 헤롯 성전의 고고학적인 것에 관해서는 달만(Dalman), 284-307을 볼 것. F. J. Hollis, ‘The Archaeology of Herod’s Temple : with a Commentary on the Tractate ‘(London, 1934)와 J. Simons, ‘Jerusalem in the Old Testament'(Leiden, 1952) pp.381-436. Pere H. Vincent와 Pere A. M. Steve ‘Jerusalem de l’Ancien Testament,’2-3권 (paris, 1956), pp.432-470. Watzinger, ‘Denkmaler’ ii. 33-46과 부록을 볼 것.] 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기초가 무너짐으로써 높이가 20규빗 줄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네로(Nero)시대에 다시 지으려고 했던 바로 그 20규빗이다.[㈜ 성소를 지탱해 주려고 한 아그립바 Ⅱ세(AgrippaⅡ)의 노력에 대하여는 전쟁. 5권. 1 : 5(36)을 참조. 이에 대해서는 로마와의 전쟁 발발로 중단되었다. 성소 자체의 높이는 전쟁. 5권. 3 : 13(215)에 따르면 60규빗이었다. (각주 355를 보라). 그러나 “그 첫 번째 건물”<아마 주랑(the Porch)을 의미하는 듯함>은 전쟁. 5권. 3 : 13(209)에 따르면 높이가 90규빗이었다. 요세푸스의 서로 다른 기사(記事)들에서 그 구조물의 확실한 모양을 얻기는 힘들다.] 성전은 돌로 만들어져 튼튼하였으며 희었다. 돌 하나의 길이는 25규빗이었고, 높이는 8규빗이었으며, 폭약 12규빗 정도였다.[㈜ 요세푸스는 전쟁. 5권. 4 : 1(224)에서 그 건축에 쓰인 돌들은 길이 45규빗, 높이 5규빗, 폭이 6규빗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초에 놓인 돌들은 전쟁. 5권. 13 : 10(189)에 따르면 40규빗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더이상 분리되지 않는 단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임). 이 모든 숫자들은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 돌들의 크기로 보아서 과장되어진 것처럼 보인다. 참). 달만(Calman), p.285.] 성전의 전체 구조는 마치 궁전의 주랑(柱廊)과 같았고 양쪽은 낮았으나 가운데 부분은 훨씬 높았다.그래서 이 성전은 먼 거리에 사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성전 맞은편에 사는 사람들과 성전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그랬다. 출입문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로 된 상인방들은 성전의 높이와 같았고, 헤롯은 알록달록한 걸개들을 걸어 성전을 치장하였는데, 그 걸개들은 기둥모양을 자주빛으로 짜놓은 것이었다.처마장식 아래의 이 기둥모양 위에는 기둥으로부터 금포도 열매의 가지가 뻗어 나와 있었다.[㈜ 태커래이(Thackeray)가 전쟁. 5권. 3 : 13(210)에 있는 병행구를 그의 주(註)에서 지적하였듯이 타키투스(Tacitus)의 ‘Hist’, v : 5는 성전에서 발견되어진 금으로 된 포도나무를 암시해 준다.] 이 성전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성전을 만드는데 사용된 값비싼 물자들과 그 규모 그리고 그 예술성에 감탄하였다. 헤롯은 커다란 주랑들을[㈜시몬스(Simons)는 “Jerusalem in the Old Testament'(Leiden, 1952), p.400<참). 각주 358>에서 성전 외곽 경계 지점에 있는 회랑들이 이것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회랑은 삼면이 이중의 회랑으로 되어 있고 남쪽에 있는 한 회랑은 삼중 회랑으로 되어 있다.] 성전 둘레에 쭉배치하였다. 헤롯은 그보다 앞선 어떤 사람들보다도 경비를 많이들여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렇게 값비싸게 성전을 장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양쪽의 주랑들은 견고한 벽에[㈜ 이 본문은 약간 모호함.] 의해 지탱되고 있었는데, 이 벽은 그전의 어떤 벽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훌륭한 벽이었다. 그리고 성전이 세워진 언덕은 바위가많은 언덕으로 예루살렘의 동부쪽으로 기울다가 산꼭대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언덕은 우리의 첫 번째 왕인 솔로몬이[㈜ 아마 이 본문을 ‘우리의 왕 솔로몬 I 세’로 고쳐 읽어야 한다.] 하느님께 지혜를 받은 바로 그 곳으로, 솔로몬은 산 정상의 둘레에성벽을 쌓았다. 이 언덕 아래쪽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헤롯은 이곳에 거대한 바위들을 가져와 납으로 바위들을 연결시켰다. 또한 그는 이 계곡을 더욱 깎고 다듬어서 이 위에 세울 정사각형의 거대한 구조물의 규모가 더욱  높아 보이도록 만들었고, 바위의 내부를 쇠로 고정시켜 연결부위가 영구히 고정되도록 하였다. 이 공사가 언덕의 꼭대기 부분까지 이루어지자, 헤롯은 계곡의 파인 부분을 메꾸어 산의 정상과 같은 높이로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 성전 주위의 성벽은 총 길이가 4스다디온(Sta-de)였고, 각 측면의 길이는 1스다디온(Stade)이었다.[㈜ l 스다디온(Stade)는 585-660피이트 사이다. 미쉬나(Mishnah) 논문 ‘Middot’, 2. 1에 따르면 성전 영역의 각 면(“그 집의 산’)은 500규빗이었다. 만약에 왕궁에서 사용되는 규빗(royal cubit)을 의미한다면 아마 이것은 각면이 약 850피이트가 될 것이다. 지금의 하람 에스-세리프(‘aram e’-‘erif)는 추측컨대 고대 성전 지역을 포함하는데 홀리스(Hollis)의 ‘The Archaeology of Her’s Temple’ : with a Commentary on the Tractate ‘Middot'(London, 1934), pp.260-261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남쪽 929피이트, 북쪽 1,041피이트, 동쪽 1,556피이트, 서쪽 1,596피이트이다.] 그리고이 성벽의 안쪽으로 언덕의 정상에는 또하나의 성벽이 있었는데, 안쪽 성벽의 동쪽 부분에는 이중의 회랑이 성벽의 길이만큼드리워져 있었다. 또한 이 이중 회랑은 성전문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어[㈜ 즉 서쪽으로, 혹은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연결되어 있었고, 그 전의 왕들도 이 회랑들은 치장하였었다.[㈜ 고대. 20권. 9 : 7(221)에서 요세푸스는 동쪽 회랑이 솔로몬 대왕의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참). Simon, ‘Jerusalem in the Old Testament'(Leiden, 1952), p.421, “사실 우리가 아그립바(Agrippa) Ⅱ세까지 전수되어 온 거대한 규모의 솔로몬 시대의 어떤 구조물이라는 선험적인 지식을 배제한다 할지라도 그가 동쪽 현관을 재건했다는 유대인들의 제안은 헤롯(Herod)의 확장된 성전(iJerovn,히에론)의 동쪽 영역의 한 부분은 어쨌든 헤롯왕 자신에 의하여 건축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으며 그의 확장 계획에 포함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해준다.] 그리고 성전 주위에는 헤롯이 아랍에서 가져온 것과 다른 야만국[㈜ 여기서 “야만인들'(Barbarians)이란 이방인(gentiles)의 의미로 사용된다.] 등에서 빼앗아 헌납한 약탈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4. 대제사장의 제복이 성채(城砦)에 보관되다.


      성전의 북쪽에는[㈜ 즉 전체 성전 영역(지금의 하람 에스 세리프(‘aram e’-‘erif)의 북서쪽에, 혹은 그 가까이에. 이것은 거의 전쟁. 5권. 4 : 3(238-246)에 묘사되어진 안토니아(Antionia) 헤롯 요새의 지역이다. 15권.(409), 15권.(292)와 각주<그리고 고대. 12권.(251)각주와 18권.(91)이하와 부록을 각각 참조할 것>.] 아주 견고하고 완전한 성채가 있었다. 이성채는 헤롯 이전의 아사모네안 왕가의 왕들과 대제사장들이 지은 것으로 그들은 이것을 요새(baris)라고[㈜ 히브리어로 Bira(요새, 성채). 이것은 주전 134년 경에 주거 지역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힐카누스 I 세(Hyrcanus I )에 의해 건립되었다.] 불렀다. 이곳에는대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할 때만 입는 제복이 보관되었다. 헤롯도 이 제복들을 이곳에 보관하였고, 헤롯이 죽은 후에는 디베료 가이사(Tiberius Caesar)때까지 로마인들의 관리하에 제복들이 이 요새에 보관되어 있었다. 한편, 수리아의 총독인 비텔리우스(Vitellius)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주후 36년. 좀더 정확한 기록은 고대. 18권. 4 : 3(90-95)에서 주어진다. 타키투스(Tacitus), ‘연대기'(Annals), vi : 32를 참조.] 백성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들이 베푼 호의에 무엇인가 보답해 주기를 원했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의 성제복을 자기들이 관리할 수 있도록 간청했고 비텔리우스는 이것에 관해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에게 부탁 서신을 써보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리하여 성제복은 아그립바 왕 때까지 유대인의 관리하에 보존되었다.[㈜ 아그립바 I 세(Agrippa I)로 주후 44년 봄에 죽었음. 앞의 고대. 15권. 10 : 2(350)과 그 각주들과 그리고 고대. 19권. 8 : 2(350)이하를 참조.] 그러나 그 후 수리아 총독인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와[㈜ 주후 45-50년.] 유대 집정관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가[㈜ 그는 글라우디오(Claudius) 때인 주후 44년에 파송되었으며 아마 약 2년 동안 공직에 머물렀던 것 같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제복들을 로마인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제복들을 안토니아 요새에 보관하도록 유대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글라우디오 가이사(Gla-udius Caesar)에게 청원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었는데, 그들이로마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아그립바 Ⅱ세를 만나 아그립바 Ⅱ세가[㈜ 아그립바 Ⅱ세(Agrippa Ⅱ, 주후 50-100년경)로 아그립바 I 세(Agrippa I )의 아들. 그의 통치에 관해서는 특히 고대. 20권과 전쟁. 2권과 ‘자서전’을 참조할 것.] 황제에게 간청하여, 그 당시 수리아의 총독[㈜ 헬라 용어는 라틴어의 Legatus Augusti pro praetore와 일치한다. 이 칭호는 집정관과 지방 총독에게 붙여진다. 그리고 아마 이는 그 고유 통치권 보다는 더 확장되어진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쉬러(Schurer), 1, p.333이하를 참조.] 비텔리우스는 그들이 대제사장들의 제복을 다시 관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전에는 제복 관리가 대제사장과 성전의 재무관(treasurers)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절기 전날에 재무관들이 로마 수비대 대장을 찾아가 그들의 인증(seal)을 보여주고 제복을 찾은 후, 절기가 끝나면 재무관들이 로마 수비대 대장에게 인증을 다시 보여주고 제복을 같은 장소에 반납하여 보관하였다. 이 작은 예를보더라도 유대인들이 후에 얼마나 로마인들에 의해 고초를 당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고대. 18권. 4 : 3(90-95)에서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대. 20권. 1 : 2(12)를 참조.] 한편, 이때 유대인의 왕 헤롯은 성전의 안전과 방어를 위해 이 요새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로마의 황제인 안토니(Antony)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요새의 이름을 안토니아 요새라고 불렀다.


      5. 성전문과 왕의 회랑


      성전의 서쪽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첫 번째 문은 계곡 가운데로 나있어 왕궁과 통하게 되어 있고,[㈜ 요세푸스가 전쟁. 5권.(140)에서 부르고 있듯이 이 티로포에온(Tyropoeon : ‘치즈 만드는 자들’이란 뜻) 계곡 너머 서쪽 지역이다. 이 계곡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그 도시를 대충 두 개의 지역으로 분할시킨다. 지금은 그 도시는 거의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다<시몬스(Simons)의 책 'jerusalem in the Old Testament' p.37이하와 52이하를 참조>. 그 문은 고대에는 “코포니우스”(Coponius)로 알려졌는데 지금의 ‘고리의 문'(the Gate fo Chain)과 위치에 있어서 일치한다. 이 문은 십자군 전쟁(the Crusader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육교를 지지하는 구조물의 몇몇 아아치들(5-6세기경의 작품인지 확실치 않음)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차알스 윌슨 경(Sir Charles Wilson)의 발견 이후 ‘윌슨의 아아치'(wilson’s Arch)로 알려져 있다. 문들에 대해서 Hollis, p.64와 Simons, p.405이하와 부록을 참조할 것.] 두개의 다른 문은 교외로 나가는 통로였고,[㈜ 즉 서쪽과 복서쪽 베제다(Bezetha), 첫 번째 북쪽 성벽의 북쪽 두 번째 북쪽 성벽에 의해 막혀져 있는데 이것은 헤롯에 의해 복구되었다(느 3장 참조). 그 문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네 번째 문은 도성의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즉 상부 도시(the Upper  City)로 서쪽과 남서쪽으로 뻗어 있음<참). 시몬스(Simons), p.424>. 아아치의 잔재와 그 문의 상(上)인방(lin ter)은 ‘무어의 문 ‘(Moor’s Gate), ‘예언자의 문'(Gate of the Prophet, 모하메드 Mohammed), 혹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라 ‘바클레이의 문'(Barclay’s Gate)으로 다양하게 알려졌는데 오늘날까지 볼 수 있으나 그 본 구조물은 묻혀 있다.] 여기에는 계곡까지 이르는 수많은 계단이 있었고 다시 언덕까지 오르는 계단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도성은[㈜ 이것은 아마 상부 도시와 하부 도시(남쪽과 남서쪽으로 뻗어있음)를 구성하고 있다. 그 계곡은 ‘힌놈의 계곡'(Valley of Hinnom) 혹은 ‘게헨나'(Genenna)이다.] 경기장 모양처럼 성전과 마주보고 있었으며 성전의 남쪽 부분과도성 사이에는 길은 협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쪽을 향해 있는네 번째 중앙에는 통로가 있었고, 그 위로 동쪽 계곡에서 서쪽 계곡으로 이어지는 3개의 통로를 가진 왕의 회랑(Royal Portico)이 있었다.[㈜ 즉 기드론 계곡(Kedron Valley)으로부터 티로포에온(Tyropoeon)까지임. 높은 탑 하나가 동쪽 편 끝에 있는데 초기 전승에 따르면 소위 ‘첨탑'(Pinnacle : 마 4 : 5-눅 4 : 9 참노)으로 알려져 있었다. 티로포에온(Tyropoeon)에 이르는 한 육교가 서편에 있었다. 후자가  몇 개의 흔적들은 주로 출구에 대한 것인데, 현존하여 있으며 지금의 서쪽 성벽의 하단부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로빈슨의 아아치'(Robinson’s Arch)인데 이는 유명한 19세기 고고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이란 발견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런데 이 회랑을 더 확장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회랑은 아주 독특한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곡이 너무 깊어서 누구도 계곡의 바닥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즉이 회랑의 높이가 워낙 높아서 회랑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생겨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회랑은4열로 된 기둥들이 떠 받치고 있었는데, 네 번째 열의 기둥들은돌로된 벽에 붙어 있었다.[㈜ 그 문의 현존하는 잔재물들<고대. 15권. 11 : 5(411)을 볼 것>은 정확하게 이 주위의 기둥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Clermont-Ganneau, I, p.254를 참조.]이 기둥들의 두께는 세명의 사람이팔을 뻗쳐 둘러 쌀 정도였고, 높이는 27피이트(feet)이며, 이 기둥들의 기반은 이중 나선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둥은 모두 162개나 되었다.  기둥의 머리조각은 코린트 양식(the Corinthian style)으로 장식되어 그 모습이 아주 장대하고 경탄할만한 장관을 이루었다. 회랑 아래 4열로 된 기둥들 사이로 3개의통로가 나 있었고 이 통로는 서로 나란히 같은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이 통로는 폭이 30피이트, 길이는 1스다디온[㈜ 약 600피트.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그 길이가 더 길다는 것을 지적하며 800피이트 혹은 그 이상이라고 측정했다. 칫수에 대하여는 Hollis, pp. 105-117과 582-607을 볼 것. 고고학과 요세푸스 저서를 잘 조화시키려면 ‘ZDPV’ 15(1892), 134-156에 나오는 F. Spiess의 글을 볼 것.] 높이는 50피이트나 되었다. 이중 가운데 통로의 폭은 양쪽보다 반이 더 넓었고, 높이는 두 배나 되어 양쪽보다 훨씬 높았다. 한편 이회랑의 지붕은 온갖 모양의 조각이 깊게 새겨진 목재 조각으로되어 있었다. 가운데 통로의 지붕은 매우 높았고, 전면(前面)의벽은[㈜ 혹은 “벽의 전면.” 이 의미와 곧 따라 나오는 헬라어의 의미가 모호하므로 다양한 해석으로 귀착하곤 한다.] 양끝이 평방(平枋)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들로 지탱되고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이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믿지 못하였고,본 사람들은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것은 첫 번째 뜰(first court)의 모습이었고,[㈜ 현대적인 명칭으로는 소위 ‘이방인의 뜰'(Court of Gentiles). 총면적은 약 35에이커, 혹은 144,000평방미터(Schick). 참). 홀리스(Hollis), p.105-122.]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몇 계단 올라가면 두 번째 뜰이 있었다.[㈜ 이 뜰(이스라엘의 뜰)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북으로 나 있는 벽으로 나뉘어 있는 동편의 부분은 ‘여인들의 뜰'(the Court of Women)로 알려졌다. 참). Hollis, p. 168이하., 167-192.] 이 두 번째 뜰은 돌로 된 난간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외국인출입시는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참). 고대. 12권. 3 : 4(145). 이 부분에 주전 200년 경의 안티오쿠스 치하의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현재 비명(碑銘)은 헬라어이고 한 개의 완판과 두 개의 단편적인 견본들이 알려져 있다. Clermonr – Ganneau가 1871년 완전한 사본을 발견하고 출판하였다.(‘PEF’, p.132). “성소 주변의 난간이나 제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방인은 아무도 없다. 잡히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으로써 저주받는다.” 헬라 본문과 다른 자료에 대해서는 전쟁. 5권. (194) 각주를 보라. 이는 또한 라이나흐(Reinach)의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며 종종 재판된다. 1935년에 발견된 본문과 대 단편들에 관한 토론은 ‘QDAP’, 6(1936), 1-3에 나오는 J. H. Iliffe의 글을 보라. 참). Simons, p.300, Hollis, p. 157이하, ;JQR’ 37(1946-1947), 387-405에 나오는 Bickermann의 글, 같은 책 38(1947-1948)의 Zeitlin의 주석. Bickermann은 자세한 참고 문헌 목록과 고대 병행에 관한 논평이 들어 있다. 참). 행21 : 26-30의 설명.] 이 안뜰의 남쪽과 북쪽에는 서로 간격이 일정한 3개의 문이 있었다.한편 해가 뜨는 쪽에는 아주 큰 문이 있었는데,[㈜ 고린도 지역에 있는 청동으로 되어 있는 ‘니카노르'(Nicanor)의 문. 그러나 가능성이 적은 추측이긴 하지만 이는 여인들의 뜰로 통하는 동문(東門)일 가능성도 있다. 이 동문에 관하여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언급된 바가 없다. 이에 대한 찬반론이 Hollis의 책(P.167-188)에 논평된다. 참). Simons의 책, p.405이하. 이 문은 또한 행 3 : 2에 나오는 미문(美門, the Beautiful Gate)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불확실한 것이다.] 이곳은 정결한 자들이 아내와 함께 통과하는 문이었다. 이 곳에는 거룩한 뜰(acred court)이 있어서 여자는 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세 번째 뜰이 있었다. 이 세 번째 뜰에 성전이 있었고 성전 앞에 하느님께 번제를드리는 제단이 있었다. 헤롯 왕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세 곳 뜰 어대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헤롯 왕은 회랑과 바깥뜰을 건축하는 것에 주력하여 이를 8년만에 완성하였다.


     6. [성전의 완성]


      성전 자체는[㈜ 즉, 내부 성소(고대. 15권. 11 : 5(419)). 돌 제단 곁에는 향로와 일곱 촛대. 진설병대. 그리고 지성소가 있었는데 이 지성소는 휘장에 의해 가리워져 있었다. 참). 20권. (219)이하, 전쟁. 5권.  5: 5(216-219). 슬라브어 역본에 나와 있는 첨가 사항에 관하여는 ‘유대전쟁사’의 부록을 참고하라.] 제사장에 의해 1년 6개월[㈜ 다른 본문에는 “5개월”(P사본). 건축 공사의 연대기에 관하여는 고대. 15권. 11 : 7(425) 각주 396을 참고할.]만에 완공되었다. 백성들은 매우 즐거워하였고, 성전이 그렇게 빨리 지어지게 된 것과 헤롯 왕에게 열성을 주신 것에[㈜ 고대. 15권. 11 : 1(380)에 의하면 헤롯왕이 집정한지 18년에 이루어진 사실. 그러나 이는 전쟁. 1권. 21 : 1(401)에 나오는 내용(15년)과는 불일치한다. 이 성전 공사, 혹은 이 공사를 위한 준비 작업은 주전 23년에서 22년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이 성전이 완공되었던 것은 주전 18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대부분의 사본에 나와 있는 나와 있는 이 말은 아마도 이전에 나와 있는 여격(與格)(하느님께)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드렸다. 그들은 성전이 재건된 것을 축하하며 기뻐했다.헤롯 왕은 수소 300마리를 제물로 바쳤고, 백성들도 성의껏 그들의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이 제물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수는 감히 측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편 이 성전 재건일과 항상 축제로 지켜오던 헤롯의 즉위 기념일이 겹치게 되어 축제에는 흥겨움이 흘러 넘쳤다.


     7. 안토니아로부터 시작되는 비밀통로


      헤롯을 위해 만든 비밀 지하통로가 있었는데, 이 통로는 안토니아 요새로부터 성전 안뜰의 동문(東門)에 이르게 만들어졌다. 헤롯은 이 통로 위에 망대를 세워 감시하게 한 후,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에는 자신이 안전하게 숨을 곳을 마련하였다. 한편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비가 낮에는 오지 않고 밤에만 내렸기 때문에 성전 건축에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선조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로서 지금까지 나타난 하느님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성전은 이러한 방법으로 재건되었다.[㈜ 고대. 20권. 9 : 7(219) 이하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신전이 집정관이었던 알비누스(Albinus) 주후 62-64년)의 시대까지도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는 설명은 종합 건물이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참). 아그립바 Ⅱ세의 휘하에서 진행된 공사에 관하여는 전쟁. 5권. 1 : 5(36-38)를 참조하라. 이 문제에 대해서는 Corbishley, ‘JTS’ 56(1937), 180의 각주를 참조할 것.]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