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권 제 10장 사비누스를 대항하여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바루스가 주동자들을 처벌한 것에 대하여

 


제 10 장




사비누스를 대항하여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바루스가 주동자들을 처벌한 것에 대하여




1. 바루스가 유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실패하다




[㈜ 10장=전쟁. 2권. 3 : 1-4(39-54), 4 : 1-3(55-65), 5 : 1-3(66-78).]




 이러한 문제들이 아직 결정되기 전에 아켈라오의 어머니인 말다케(Malthace)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수리아의 총독인 바루스로부터 유대인의 반역을 알리는 편지가 가이사에게도착했다. 아켈라오가 로마로 가고 난 후에 온 나라는 소요에빠져들었다. 그때 바루스가 그곳에 있으면서 소요의 주동자들을[㈜ 발췌문 여러 사본들에 나오는 \”병사들\”은 아마도 전와(轉訛)된 것일 것이다.] 잡아 벌을 줌으로써 소요의 대부분을 진압했다. 바루스는소요를 일으키기를 매우 좋아하는 유대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예루살렘에 1개 군단을 주둔시켜 놓고 그는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병력으로는 유대인들의 소요를 완전히 진압하지못하였다. 왜냐하면 바루스가 떠난 후, 그곳에 남아있던 가이사의 행정장관 사비누스가 자기의 노예와[㈜ \”자기의 노예들\”은 전쟁. 2권. 3 : 1(41)에서 온 것이다.] 그곳에 남아있는 군사들만 있으면 유대인들을 진압할 수 있다고 믿고 그들을 심히괴롭혔기 때문이다. 사비누스가 군대를 이용하여 그들을 무장시켜 개인 호위병으로[㈜ 헬라어 본문에는 \”창병(槍兵). 호위병의 상투적 의미는 이 본문에서 적절치 않 다.] 삼고 유대인들을 억압하고 민폐를 끼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사비누스가 돈을 좋아하고 탐욕이 심한 사람이었기에 성채(城砦)를 무력으로 탈취하고 왕의 재산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백성들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2. 오순절 때 로마인과 유대인들간의 싸움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Pentecost)이 다가오자[㈜ 주전 4년 5월 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단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뿐 아니라 사비누스의 광적인 행동과 그로부터받은 상처에 분개해서 모인 것이다. 그 중에는 갈릴리 사람, 이두매 사람, 여리고에서 온 사람,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는사람들도 많았다. 이 요단강 동편에서 온 군중들은 나머지 사람득과 합세하였는데, 사비누스를 향한 복수심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맹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 무리(bands)로 나누어서 다음과 같이 자리를 잡았다. 즉 한 무리는 경기장(Hippodrome)을[㈜ 고대. 15권. 8 : 1(268) 각주 232를 참고. 참).Perowne, p. 109 이하.] 장악했으며, 또 한 무리는 예루살렘 성전의북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는 동쪽 구역에 자리 잡았고,[㈜ 그 본문은 확실치 않음.] 나머지 한 무리는 왕궁이 있었던 예루살렘의 서쪽 지역을 점거하였다.[㈜ 참). Perowne, p.116-119.] 이러한 진형은 로마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할 수 있는진형이었다. 사비누스는 이 무리들의 숫자를 두려워했으며 죽음도 불사한 그들의 확고한 의지를 더욱더 두려워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매우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이에 사비누스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즉시 바루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바루스가 남겨놓은 군대가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고 전멸당할 위기에 쌓여 있습니다. \”사비누스는 헤롯이 파르디아인(Parthian)에게 죽음을 당한[㈜ 참). 전쟁. 5권. 4 : 3(166-169)와 각주 60, 61 ; 2권. 3 : 2(46). 1권. 21 : 9(418).] 그의 형인 파사엘(Phasael)을 기념하여 세운 파사엘[㈜ 그의 죽음에 관한 설명이 다르다 ; 참). 전쟁. 1권. 13 : 10(271)이하 ; 고대. 14권. 13 ; 10(367-369).] 요새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로마군인들에게 유대인들을 무찌르라고 신호만 보내고 자기 자신은 내려와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다른 사람을 앞세워 놓고 자기는 나서지 않는 비겁한 인물이었다.로마 병사들은 진지에서 물밀 듯 나와 유대인들과 격렬한 전투를벌였다. 그 전투에서 로마군들은 유대인들을 물리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단호한 의지를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유대인들은 동료들이 로마군에 의해 무참히 죽어 가는 것을 눈으로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전의 바깥 뜰에 있는 회랑까지 올라가서 싸웠다. 대접전은 계속되었고 유대인들은 로마군들에게 손으로, 혹은 훈련때 사용되던 투석기로 돌을 던지면서 싸웠다. 또한 화살 공격은 로마군에게 큰 손실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유대 궁사들은 로마군보다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서 활을 쏘아대었고, 또 그 솜씨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로마군도 유대인들을 향해활을 쏘기는 하였지만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했고 이에 유대인들은 더 사기가 충천하여 적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전투가 이와같은 양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자 큰 피해를 입은 로마군들은 유대인들이 올라가 있는 회랑에다가 은밀히 불을 놓았다. 이 불로 회랑은 순식간에 그 지붕까지 타버렸는데 회랑은 나무로 지어졌고더구나 역청과 밀랍으로 가득찼으며 거기에 있는 금은 밀랍으로[㈜ 발췌문은 실제로 \”역청과 밀랍\”을 부연한다. 밀랍의 유사한 사용은 플리니 (Pliny)의 \’박물학\'(nat. Hist.)xxi : 49에 의해 기술되었다.] 덧입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불길은 가장 고귀하고 우러러 보이던 거대한 건축물을 완전히 삼켜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붕 위까지타올랐기 때문에 그 위에 있던 사람들은 타죽고 말았다. 또 일부는그 지붕이 무너져서 죽게 되고 나머지 일부는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 유대인들 중에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살아남을 수 없게 되자 불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고, 칼로 자결한 사람들도 많았다. 용케도 그곳을 빠져나온 사람들이라 하지라도 무장하지 않은 맨 몸이었기 때문에 로마군에게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으며 그들의 사기는완전히 저하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분노와 격정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전투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죽음을 당했다. 로마군인들은 불길이 약한 틈을 타서 불속으로 뛰어들어 성스런 재물을 쌓아둔 보물단지를 들고 나왔다.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돈들은 군인들이 탈취해 갔으며 사비누스도 400달란트나 되는 보물을 손에 넣었다.[㈜ 참). 전쟁. 2권. 3 : 3(50)과 각주 25. 사비누스의 400달란트는 전리품의 일부 이다_). Thackeray는 투키디데스 vii : 85의 확실한 회고담에서 발견한다.]




 3. 로마인들이 성전에서 포위되다




 유대인들은 이 싸움에서 동족들이 무참히 죽어간 것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성물이 탈취된 것에 대해 한없이 슬퍼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호전적인 일부 유대인들은 왕궁을 포위하고 불을 놓아 안에 있는 모든 로마인들을 죽여 버리겠다고협박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그 대신 한시라도 빨리 사비누스와 함께 성밖으로 나오면 해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이에 사실상 왕의 군대의 대부분은 왕궁을 등졌다. 그러나 헤롯왕의 정예군대[㈜ 참). 전쟁. 2권. 3 : 4(52)(3천명의 세바스테인들, 즉 세바스테 군단의 군대들).] 300명을 지휘하던 루푸스(Rufus)와 그라투스(Gratus)는 로마군을 고수하였다. 루푸스가 지휘하던 1개기병부대도 역시 로마군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포위를 계속했고 성벽 아래를 파내는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자들에게는 지금이야말로 빼앗겼던 유대의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이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신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런데 사비누스는 그의 군대들과 함께 진심으로 항복할 마음도 있었으나 그가 유대인들에게저지른 해악(害惡)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 유대인들의 말을 믿지못했다. 그래서 사비누스는 유대인이 이와 같이 관대한 제안을해 오는데는 필시 무슨 흉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제의를 거절하기로 하였다. 그와 동시에 사비누스는 바루스가 곧 원군을 이끌고 오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버티어 보기로 하였다.




 4. 유대 전역에서 발생한 소요




 한편 유대지방에서는 수많은 소요가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소요를 일으킨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는 개인적인 이득을 보겠다는속셈으로 혹은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손에 무기를 들고행동하는 자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한 때는 헤롯에 충성했으나해산당한 2,000명의 병사들이 유대지방에 다시 모여 왕의 친위부대와 싸웠다. 이들을 통솔한 자는 헤롯의 사촌동생인 아키압(Achiab)이라는[㈜ 참). 위의 고대. 17권. 7 : 1(184)의 각주 111.] 사람이었는데 그는 적군에 의해 어느 고원지대의 평원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싸움에 노련한 그는적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후퇴하여 그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군사와 물자를 최대한 비축하였다.




 5. 에제키아스의 아들인 도적 유다




 갈릴리에 강도떼의 두목인 에제키아스(Ezekias)의 아들 유다[㈜ 참). 고대. 14권. 9 : 2(159)(=전쟁 1권. 10 : 5(204). 요세푸스(고대. 18권. 1 : 6(23)가 \”제4의 철학\”이라고 부른 유다(Judas)추종자들은 반드시 열심당 운동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 Foakes Jackson과 Lake판의 \’기독교의 기원\'(The Beginning of Christianity)1권, 부록을 참조하라. 행 5 : 37에서의 유다의 언급 은 사도행전 저자가 요세푸스를 자료원으로 알고 사용했는지의 여부에 관한 의 문사항을 내포한다 ; 참). Schurer, \”GJV\’ I : 566 ; C. S. C. Willams의 \’사도 행전\'(The Acts of the Apostles : 뉴욕, 1957), p.19-22.](Judas)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힘이 매우 장사여서 헤롯왕도 그를 체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었다. 이 유다가 갈릴리의 세포리스(Shepphoris)에서 자포자기한 사람들을 모은 후 그곳에 있는 왕궁을 습격하여 모든 무기들을\’탈취한 후 그 무기로 무장하고 모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는 사람을 살해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왕위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는데, 그는 선행을 함으로써 왕위를 얻으려 하지 않고 상상을 초월하여 박대함으로써 왕위를 강제로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6. 시몬의 반란




 한편 헤롯왕의 부하였던 시몬(Simon)은[㈜ 참). 전쟁. 2권. 4 :957-59); 타키투스에 의해 언급됨(\’Hist. \’ v.9).] 외모도 말쑥하고키도 훤칠하며 체구도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료들보다 훨씬 탁월했기 때문에 중요한 직책들을 많이 맡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스스로 왕관을 쓰고 왕이라고 할 정도로 교만해졌다. 그는 주변에 있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왕이 될 것을 추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여리고에 있는 왕궁에 불이 나자 그곳에 있던 재물을 약탈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유대의 여러 다른 지역에 있던 왕궁에 손수 불을 질러 그것을 전소시킨 후 부하들을 시켜 남아있는 것을 모조리 약탈해 오도록 하였다. 만일 그를 즉시 제지할 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이보다 더 많은 일들을 저질렀을 것이다. 로마군에 가담했던 그라투스(Gratus)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시몬과 싸웠다. 전투가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베레아(peraes)출신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인 시몬의 군사들은 능숙한 전투 기술보다는 용기로써 그라투스 군대와 싸웠으나 장비나 기술에서 뒤져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시몬은 목숨이라도 건져보겠다고 계곡을 따라 도망쳤으나그라투스가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요단강변이 아마다(Amatha)에[㈜ 본문은 확실치 않음. 참). 전쟁. 2권. 4 : 2(59) ; 고대. 18권. 2 : 1(27) ; 유세 비우스, \’Onom.\’ xlix : 12(수리아인들이 Beth-ramtha라고 부름). 탈무드 ; Yerus의 \’Shebit; ix : 2 ; \’Tosephta\'(Zuckermandel, p71, 23째줄)와 마찬가 지임. 이 곳은 El-Haman의 서쪽 2.5마일과 요르단의 동쪽에 있는 사해 상부의 북쪽 약 6마일에 있는 구약의 Beth-haram으로 현 지명은 El-Rome이다. 참). Abel. GP ii : 273 ;\’RB\’ 40(1931) ; \’Biblica\’ 14(1933), 401-405에 나오는 Alexis Mallon ; Simons의 \’Geograph cal and Topographical Texts of the O. T\’ p. 121이하] 있던 왕궁 역시 시몬을 추종하여 모였던 사람들의 일부에 의해서 불에 타 없어졌다. 이와같은 대소요가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백성들에게 질서를 부여해 줄 왕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 외국 병사들 마저도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하여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줌으로써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7. 아드롱게스의 반란




 아드롱게스(Athronge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기골이장대하고 손목 힘이 두드러지게 뛰어났지만 모든 사람에게 널리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목자라는 사실 외에는 가문으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특출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자는 만일 자기가 왕권을 획득한다면 그 왕권으로 극악무도한 횡포를 실컷 부리며 즐기는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열망하는 오만불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죽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에게는 4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한결같이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다. 아드롱게스는 자기가 왕권을 획득하는데 형제들의 그런 힘이 큰 보탬이[㈜ \”근원\”을 나타태는 특징인 어근들의 반복으로 볼 때 이 본문은 수긍이 간다 참). por!uvcein…provecma. ]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4형제는 그들의 소문을 듣고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을 주축으로 각각 사군(私軍)을 조직하여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들은 평시에는 각각 자기 부하들을 지휘 명령하였지만 그들에게 대항하는 적과 싸울 때는 아드롱게스에게 복종했으며 그를 위해 싸웠다. 아드롱게스는 스스로 왕이 된 후 의회를 구성하여 중대사에 대해토론하도록 하였지만 모든 안건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아드롱게스는 오랫동안 왕으로서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의 전횡(專橫)을막지 못했다. 아드롱게스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많은 로마군과왕의 군대를 살해했고 그들을 미워했다. 그들이 왕의 군대를 공격한 것은 그들이 헤롯의 집권하에서 권력을 믿고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요, 그들이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얼마전에 그들로부터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점점 잔인해졌고 어떠한 사람도 그러한 횡포를 피할 수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을 것 같으면 사람을 서슴없이 죽였고사람 죽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한번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 서북서 20마일 떨어진 곳. 후에 니고볼리(Nicopolis)로 지금의 암봐스 (\’Amwas)임. 참). 전쟁. 2권. 4 : 3(63)과 5 : 1(71)각주 39. 고대. 13권. 1 : 3(15)각주 16. 아벨(Abel)의 \’GP\’ii. 314-316, 빈센트(Vincent)와 아벨(Abel) 의 \’Emmaus, sa basilique et son histoire\'(Pairs, 1932).] 식량과 무기를 수송하던 로마군을 공격해서 그들을 인솔하던 백부장 아리우스(Arius)를 죽이고 정예보병 40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나머지 병사들은 죽어간 동료들을 뒤에 두고 도망하다가그들을 돕기 위해 출동한 왕의 군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아드롱게스의 4형제들은 오랫동안 그와같은 양상으로전쟁을 수행하여 로마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물론 자기들의 동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진압되고 말았는데 4형제 중 한 명은 그라투스와의 싸움에서, 또한 명은 톨레미에게 각각 패했으며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은 아켈라오에게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 한 명은 다른 형제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낙담했으며 그의 군대가 질병과 피곤으로 완전히 사기가 저하되어 자신이 살아남을 가망성이 없음을 깨닫고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아켈라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일은 그 후에 되어진 일이었다.




 8. 유대지방의 강도 행위




 이제 유대 땅에는 온통 강도떼들이 들끓었다. 그들 중 어떤 강도떼들은 자기들 중 한 명을 두목으로 뽑은 다음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그로 하여금 공공연히 백성들을 수탈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로마군에게도 어느 정도 타격을 주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더 오랫동안 큰 피해를 입혔다.




 9. 바루스가 조정하다




  [㈜ 고대. 17권. 10 : 9, 10(286-298)에 대해서 아벨, \’HP\’ I. 414, 각주 1을 참 조.]




 사비누스가 보낸 편지를 통해 지금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된 바루스는 예루살렘에 주둔시켰던 로마군 1개 군단이 걱정되었다. 나머지 2개 군단과(그때 거기에는 수리아에소속된 3개 군단이 있었다) 4개 기병부대, 그리고 왕들과 영주들이 보낸 원군을 유대에서 포위당한 로마군을 돕기 위해 현지로 급파했다. 바루스는 그 원정대가 급히 톨레마이스(Pto-lemais)로 가도록 명령했다. 바루스가 원정군을 이끌고 베리투스(Berytus)를[㈜ 고대. 16권. 10 : 8(344)각주 171.] 지날 때 시민들은 1,500명의 원군을 지원해주었으며 아라비아 페트라(Arabia Petra)의 왕이었던 아레타스(Aretas)도 헤롯에 대한 증오심과 또한 로마의 환심을 사기위해 보병과 기병을 포함해서 적지 않은 원조를 해주었다. 바루스는 모든 군대를 집결시켜 놓고 그 중 일부를 그의 아들과 친구의[㈜ 전쟁. 2권. 5 : 1(168)을 참조. \”그의 친구들 중 한명인 가이우스(Gaius).\”] 인솔하에 톨레미의 이웃에 있는 갈릴리에 파견하고 적들을 공격하여 세포리스(Sepphoris)를 함락하고 주민들을 노예로삼고 시가지를 불태웠다. 한편 전 군대를 동원하여 사마리아(Samaria)로 진격한 바루스는 사마리아만큼은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소요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루스는 톨레미에 속한 아루스(Arous)라는 마을에[㈜ 전쟁. 2 : 69를 참조. 네아폴리스(Neapolis)서남쪽 11마일 떨어진 지금의 하리 스(Hris)로 확인되어짐. 알브라이트(Albright), \’BASOR\’11, 10, 13과 아벨 (Abel), \’GP\’ ii. 251과 \’JPOS\’ 7(1927), 92 아비요나(Avi-Yonah), \’MP\’. p. 24 를 볼 것.] 진을 쳤는데 그 마을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헤롯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불로 태워버린 마을이었다. 그들은 이전에는 요새화되어 철옹성과 같이 튼튼했으나 지금은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약탈되고 방화되어 버린 삼포(Sampho)라는[㈜ 엠마오(Emmaus) 북동 7마일 떨어진 곳으로 지금의 사파(Saffa)임. 이곳은 두 강사이의 견고한 위치에 있다. 아벨(Abel), \’GP\’ ii : 448과 \’JPOS\’의 위에서 말 한 부분과 아비요나(Avi-Yonah), \’MP\’ p.6을 참고할 것.] 마을에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바루스는 엠마오의 주민들이 모두 달아나 버리자 그들에 대한 보복으로 엠마오를 불태워버리고 명령했다. 바루스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이때 예루살렘에서 진을 치면서 로마군을 포위했던 유대인들은 바루스군이 몰려온다는 소리를 듣고크게 놀라 포위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바루스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의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하자 유대인들은 그비난에 대해서 변명하기 시작했다. 즉 유대인들이 많이 모인 것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인 것이며, 로마군과 전쟁을 일으킨 것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외부인들의 성급함 때문이었으며, 유대인들은 로마군을 포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군과 함께 외부인들에게 포위당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때 바루스를 만나기 위해 간 사람들은 헤롯왕의 친사촌인 요셉(Joseph)과[㈜ 헤롯(Herod)의 형제 요셉(Joseph)의 아들로 그는 주전 38년에 여리고 (Jericho)전투에서 죽음. 참). 전쟁. 1권 17 : 1, 2(323-325) ; 고대. 14권. 15 : 10(448, 449), 18권. 5 : 4(134).] 군사들을 이끌고 로마군에 포위당했던 그라투스(Gratus)와 루푸스(Rufus)등이었다. 그러나 사비누스는 바루스 앞에 나타나지 않고 몰래 성밖으로 나가 항구로 갔다.




10. 바루스가 반역을 진압하다




 이에 바루스는 그의 병력의 일부를 지방으로 보내어 반역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색출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반역자들을 잡아바루스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다. 바루스는 죄가 무거운 자들은 처벌하게 하고 경미한 사람들은 풀어 주었다. 이때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한 사람은 2,000명이나 되었다. 바루스는 또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아레타스의[㈜ 라이나흐(Reinach)가 \’REJ\’의 56(1908), 124이하에서 추정한 것이지만 불란서 어 번역에서는 간과되었다. 참). 고대. 17권. 10 : 9(287, 290) ; 전쟁. 2권. 5 :3(76).] 군대들을 해산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무질서하게 행동하였을 뿐 아니라 바루스의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유익이된다면 서슴없이 약탈을 자행하곤 하였다. 또한 바루스는 10,000명의 유대인들이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체포하기위해 급히 출동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키압(Achiab)의충고를 따라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이에 바루스는 무리들의 반역죄를 용서해 주고 대신 몇명의 주동자만을 가이사에게 보냈는데 가이사는 그들의 대부분을 풀어주었다. 잡혀온 자 중에서 이소요에 가담했던 헤롯의 친척들은 모두 처형당했는데 그 까닭은 최소한의 의리도 없이 자신의 친척인 헤롯에게 대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가이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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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권 제 10장 사비누스를 대항하여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바루스가 주동자들을 처벌한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0 장


    사비누스를 대항하여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바루스가 주동자들을 처벌한 것에 대하여


    1. 바루스가 유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실패하다


    [㈜ 10장=전쟁. 2권. 3 : 1-4(39-54), 4 : 1-3(55-65), 5 : 1-3(66-78).]


     이러한 문제들이 아직 결정되기 전에 아켈라오의 어머니인 말다케(Malthace)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수리아의 총독인 바루스로부터 유대인의 반역을 알리는 편지가 가이사에게도착했다. 아켈라오가 로마로 가고 난 후에 온 나라는 소요에빠져들었다. 그때 바루스가 그곳에 있으면서 소요의 주동자들을[㈜ 발췌문 여러 사본들에 나오는 “병사들”은 아마도 전와(轉訛)된 것일 것이다.] 잡아 벌을 줌으로써 소요의 대부분을 진압했다. 바루스는소요를 일으키기를 매우 좋아하는 유대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예루살렘에 1개 군단을 주둔시켜 놓고 그는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병력으로는 유대인들의 소요를 완전히 진압하지못하였다. 왜냐하면 바루스가 떠난 후, 그곳에 남아있던 가이사의 행정장관 사비누스가 자기의 노예와[㈜ “자기의 노예들”은 전쟁. 2권. 3 : 1(41)에서 온 것이다.] 그곳에 남아있는 군사들만 있으면 유대인들을 진압할 수 있다고 믿고 그들을 심히괴롭혔기 때문이다. 사비누스가 군대를 이용하여 그들을 무장시켜 개인 호위병으로[㈜ 헬라어 본문에는 “창병(槍兵). 호위병의 상투적 의미는 이 본문에서 적절치 않 다.] 삼고 유대인들을 억압하고 민폐를 끼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사비누스가 돈을 좋아하고 탐욕이 심한 사람이었기에 성채(城砦)를 무력으로 탈취하고 왕의 재산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백성들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2. 오순절 때 로마인과 유대인들간의 싸움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Pentecost)이 다가오자[㈜ 주전 4년 5월 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단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뿐 아니라 사비누스의 광적인 행동과 그로부터받은 상처에 분개해서 모인 것이다. 그 중에는 갈릴리 사람, 이두매 사람, 여리고에서 온 사람,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는사람들도 많았다. 이 요단강 동편에서 온 군중들은 나머지 사람득과 합세하였는데, 사비누스를 향한 복수심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맹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 무리(bands)로 나누어서 다음과 같이 자리를 잡았다. 즉 한 무리는 경기장(Hippodrome)을[㈜ 고대. 15권. 8 : 1(268) 각주 232를 참고. 참).Perowne, p. 109 이하.] 장악했으며, 또 한 무리는 예루살렘 성전의북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는 동쪽 구역에 자리 잡았고,[㈜ 그 본문은 확실치 않음.] 나머지 한 무리는 왕궁이 있었던 예루살렘의 서쪽 지역을 점거하였다.[㈜ 참). Perowne, p.116-119.] 이러한 진형은 로마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할 수 있는진형이었다. 사비누스는 이 무리들의 숫자를 두려워했으며 죽음도 불사한 그들의 확고한 의지를 더욱더 두려워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매우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이에 사비누스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즉시 바루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바루스가 남겨놓은 군대가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고 전멸당할 위기에 쌓여 있습니다. “사비누스는 헤롯이 파르디아인(Parthian)에게 죽음을 당한[㈜ 참). 전쟁. 5권. 4 : 3(166-169)와 각주 60, 61 ; 2권. 3 : 2(46). 1권. 21 : 9(418).] 그의 형인 파사엘(Phasael)을 기념하여 세운 파사엘[㈜ 그의 죽음에 관한 설명이 다르다 ; 참). 전쟁. 1권. 13 : 10(271)이하 ; 고대. 14권. 13 ; 10(367-369).] 요새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로마군인들에게 유대인들을 무찌르라고 신호만 보내고 자기 자신은 내려와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다른 사람을 앞세워 놓고 자기는 나서지 않는 비겁한 인물이었다.로마 병사들은 진지에서 물밀 듯 나와 유대인들과 격렬한 전투를벌였다. 그 전투에서 로마군들은 유대인들을 물리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단호한 의지를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유대인들은 동료들이 로마군에 의해 무참히 죽어 가는 것을 눈으로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전의 바깥 뜰에 있는 회랑까지 올라가서 싸웠다. 대접전은 계속되었고 유대인들은 로마군들에게 손으로, 혹은 훈련때 사용되던 투석기로 돌을 던지면서 싸웠다. 또한 화살 공격은 로마군에게 큰 손실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유대 궁사들은 로마군보다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서 활을 쏘아대었고, 또 그 솜씨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로마군도 유대인들을 향해활을 쏘기는 하였지만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했고 이에 유대인들은 더 사기가 충천하여 적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전투가 이와같은 양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자 큰 피해를 입은 로마군들은 유대인들이 올라가 있는 회랑에다가 은밀히 불을 놓았다. 이 불로 회랑은 순식간에 그 지붕까지 타버렸는데 회랑은 나무로 지어졌고더구나 역청과 밀랍으로 가득찼으며 거기에 있는 금은 밀랍으로[㈜ 발췌문은 실제로 “역청과 밀랍”을 부연한다. 밀랍의 유사한 사용은 플리니 (Pliny)의 ‘박물학'(nat. Hist.)xxi : 49에 의해 기술되었다.] 덧입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불길은 가장 고귀하고 우러러 보이던 거대한 건축물을 완전히 삼켜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붕 위까지타올랐기 때문에 그 위에 있던 사람들은 타죽고 말았다. 또 일부는그 지붕이 무너져서 죽게 되고 나머지 일부는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 유대인들 중에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살아남을 수 없게 되자 불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고, 칼로 자결한 사람들도 많았다. 용케도 그곳을 빠져나온 사람들이라 하지라도 무장하지 않은 맨 몸이었기 때문에 로마군에게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으며 그들의 사기는완전히 저하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분노와 격정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전투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죽음을 당했다. 로마군인들은 불길이 약한 틈을 타서 불속으로 뛰어들어 성스런 재물을 쌓아둔 보물단지를 들고 나왔다.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돈들은 군인들이 탈취해 갔으며 사비누스도 400달란트나 되는 보물을 손에 넣었다.[㈜ 참). 전쟁. 2권. 3 : 3(50)과 각주 25. 사비누스의 400달란트는 전리품의 일부 이다_). Thackeray는 투키디데스 vii : 85의 확실한 회고담에서 발견한다.]


     3. 로마인들이 성전에서 포위되다


     유대인들은 이 싸움에서 동족들이 무참히 죽어간 것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성물이 탈취된 것에 대해 한없이 슬퍼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호전적인 일부 유대인들은 왕궁을 포위하고 불을 놓아 안에 있는 모든 로마인들을 죽여 버리겠다고협박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그 대신 한시라도 빨리 사비누스와 함께 성밖으로 나오면 해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이에 사실상 왕의 군대의 대부분은 왕궁을 등졌다. 그러나 헤롯왕의 정예군대[㈜ 참). 전쟁. 2권. 3 : 4(52)(3천명의 세바스테인들, 즉 세바스테 군단의 군대들).] 300명을 지휘하던 루푸스(Rufus)와 그라투스(Gratus)는 로마군을 고수하였다. 루푸스가 지휘하던 1개기병부대도 역시 로마군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포위를 계속했고 성벽 아래를 파내는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자들에게는 지금이야말로 빼앗겼던 유대의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이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신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런데 사비누스는 그의 군대들과 함께 진심으로 항복할 마음도 있었으나 그가 유대인들에게저지른 해악(害惡)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 유대인들의 말을 믿지못했다. 그래서 사비누스는 유대인이 이와 같이 관대한 제안을해 오는데는 필시 무슨 흉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제의를 거절하기로 하였다. 그와 동시에 사비누스는 바루스가 곧 원군을 이끌고 오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버티어 보기로 하였다.


     4. 유대 전역에서 발생한 소요


     한편 유대지방에서는 수많은 소요가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소요를 일으킨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는 개인적인 이득을 보겠다는속셈으로 혹은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손에 무기를 들고행동하는 자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한 때는 헤롯에 충성했으나해산당한 2,000명의 병사들이 유대지방에 다시 모여 왕의 친위부대와 싸웠다. 이들을 통솔한 자는 헤롯의 사촌동생인 아키압(Achiab)이라는[㈜ 참). 위의 고대. 17권. 7 : 1(184)의 각주 111.] 사람이었는데 그는 적군에 의해 어느 고원지대의 평원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싸움에 노련한 그는적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후퇴하여 그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군사와 물자를 최대한 비축하였다.


     5. 에제키아스의 아들인 도적 유다


     갈릴리에 강도떼의 두목인 에제키아스(Ezekias)의 아들 유다[㈜ 참). 고대. 14권. 9 : 2(159)(=전쟁 1권. 10 : 5(204). 요세푸스(고대. 18권. 1 : 6(23)가 “제4의 철학”이라고 부른 유다(Judas)추종자들은 반드시 열심당 운동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 Foakes Jackson과 Lake판의 ‘기독교의 기원'(The Beginning of Christianity)1권, 부록을 참조하라. 행 5 : 37에서의 유다의 언급 은 사도행전 저자가 요세푸스를 자료원으로 알고 사용했는지의 여부에 관한 의 문사항을 내포한다 ; 참). Schurer, “GJV’ I : 566 ; C. S. C. Willams의 ‘사도 행전'(The Acts of the Apostles : 뉴욕, 1957), p.19-22.](Judas)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힘이 매우 장사여서 헤롯왕도 그를 체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었다. 이 유다가 갈릴리의 세포리스(Shepphoris)에서 자포자기한 사람들을 모은 후 그곳에 있는 왕궁을 습격하여 모든 무기들을’탈취한 후 그 무기로 무장하고 모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는 사람을 살해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왕위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는데, 그는 선행을 함으로써 왕위를 얻으려 하지 않고 상상을 초월하여 박대함으로써 왕위를 강제로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6. 시몬의 반란


     한편 헤롯왕의 부하였던 시몬(Simon)은[㈜ 참). 전쟁. 2권. 4 :957-59); 타키투스에 의해 언급됨(‘Hist. ‘ v.9).] 외모도 말쑥하고키도 훤칠하며 체구도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료들보다 훨씬 탁월했기 때문에 중요한 직책들을 많이 맡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스스로 왕관을 쓰고 왕이라고 할 정도로 교만해졌다. 그는 주변에 있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왕이 될 것을 추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여리고에 있는 왕궁에 불이 나자 그곳에 있던 재물을 약탈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유대의 여러 다른 지역에 있던 왕궁에 손수 불을 질러 그것을 전소시킨 후 부하들을 시켜 남아있는 것을 모조리 약탈해 오도록 하였다. 만일 그를 즉시 제지할 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이보다 더 많은 일들을 저질렀을 것이다. 로마군에 가담했던 그라투스(Gratus)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시몬과 싸웠다. 전투가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베레아(peraes)출신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인 시몬의 군사들은 능숙한 전투 기술보다는 용기로써 그라투스 군대와 싸웠으나 장비나 기술에서 뒤져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시몬은 목숨이라도 건져보겠다고 계곡을 따라 도망쳤으나그라투스가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요단강변이 아마다(Amatha)에[㈜ 본문은 확실치 않음. 참). 전쟁. 2권. 4 : 2(59) ; 고대. 18권. 2 : 1(27) ; 유세 비우스, ‘Onom.’ xlix : 12(수리아인들이 Beth-ramtha라고 부름). 탈무드 ; Yerus의 ‘Shebit; ix : 2 ; ‘Tosephta'(Zuckermandel, p71, 23째줄)와 마찬가 지임. 이 곳은 El-Haman의 서쪽 2.5마일과 요르단의 동쪽에 있는 사해 상부의 북쪽 약 6마일에 있는 구약의 Beth-haram으로 현 지명은 El-Rome이다. 참). Abel. GP ii : 273 ;’RB’ 40(1931) ; ‘Biblica’ 14(1933), 401-405에 나오는 Alexis Mallon ; Simons의 ‘Geograph cal and Topographical Texts of the O. T’ p. 121이하] 있던 왕궁 역시 시몬을 추종하여 모였던 사람들의 일부에 의해서 불에 타 없어졌다. 이와같은 대소요가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백성들에게 질서를 부여해 줄 왕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 외국 병사들 마저도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하여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줌으로써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7. 아드롱게스의 반란


     아드롱게스(Athronge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기골이장대하고 손목 힘이 두드러지게 뛰어났지만 모든 사람에게 널리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목자라는 사실 외에는 가문으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특출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자는 만일 자기가 왕권을 획득한다면 그 왕권으로 극악무도한 횡포를 실컷 부리며 즐기는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열망하는 오만불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죽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에게는 4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한결같이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다. 아드롱게스는 자기가 왕권을 획득하는데 형제들의 그런 힘이 큰 보탬이[㈜ “근원”을 나타태는 특징인 어근들의 반복으로 볼 때 이 본문은 수긍이 간다 참). por!uvcein…provecma. ]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4형제는 그들의 소문을 듣고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을 주축으로 각각 사군(私軍)을 조직하여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들은 평시에는 각각 자기 부하들을 지휘 명령하였지만 그들에게 대항하는 적과 싸울 때는 아드롱게스에게 복종했으며 그를 위해 싸웠다. 아드롱게스는 스스로 왕이 된 후 의회를 구성하여 중대사에 대해토론하도록 하였지만 모든 안건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아드롱게스는 오랫동안 왕으로서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의 전횡(專橫)을막지 못했다. 아드롱게스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많은 로마군과왕의 군대를 살해했고 그들을 미워했다. 그들이 왕의 군대를 공격한 것은 그들이 헤롯의 집권하에서 권력을 믿고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요, 그들이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얼마전에 그들로부터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점점 잔인해졌고 어떠한 사람도 그러한 횡포를 피할 수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을 것 같으면 사람을 서슴없이 죽였고사람 죽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한번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 서북서 20마일 떨어진 곳. 후에 니고볼리(Nicopolis)로 지금의 암봐스 (‘Amwas)임. 참). 전쟁. 2권. 4 : 3(63)과 5 : 1(71)각주 39. 고대. 13권. 1 : 3(15)각주 16. 아벨(Abel)의 ‘GP’ii. 314-316, 빈센트(Vincent)와 아벨(Abel) 의 ‘Emmaus, sa basilique et son histoire'(Pairs, 1932).] 식량과 무기를 수송하던 로마군을 공격해서 그들을 인솔하던 백부장 아리우스(Arius)를 죽이고 정예보병 40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나머지 병사들은 죽어간 동료들을 뒤에 두고 도망하다가그들을 돕기 위해 출동한 왕의 군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아드롱게스의 4형제들은 오랫동안 그와같은 양상으로전쟁을 수행하여 로마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물론 자기들의 동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진압되고 말았는데 4형제 중 한 명은 그라투스와의 싸움에서, 또한 명은 톨레미에게 각각 패했으며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은 아켈라오에게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 한 명은 다른 형제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낙담했으며 그의 군대가 질병과 피곤으로 완전히 사기가 저하되어 자신이 살아남을 가망성이 없음을 깨닫고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아켈라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일은 그 후에 되어진 일이었다.


     8. 유대지방의 강도 행위


     이제 유대 땅에는 온통 강도떼들이 들끓었다. 그들 중 어떤 강도떼들은 자기들 중 한 명을 두목으로 뽑은 다음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그로 하여금 공공연히 백성들을 수탈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로마군에게도 어느 정도 타격을 주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더 오랫동안 큰 피해를 입혔다.


     9. 바루스가 조정하다


      [㈜ 고대. 17권. 10 : 9, 10(286-298)에 대해서 아벨, ‘HP’ I. 414, 각주 1을 참 조.]


     사비누스가 보낸 편지를 통해 지금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된 바루스는 예루살렘에 주둔시켰던 로마군 1개 군단이 걱정되었다. 나머지 2개 군단과(그때 거기에는 수리아에소속된 3개 군단이 있었다) 4개 기병부대, 그리고 왕들과 영주들이 보낸 원군을 유대에서 포위당한 로마군을 돕기 위해 현지로 급파했다. 바루스는 그 원정대가 급히 톨레마이스(Pto-lemais)로 가도록 명령했다. 바루스가 원정군을 이끌고 베리투스(Berytus)를[㈜ 고대. 16권. 10 : 8(344)각주 171.] 지날 때 시민들은 1,500명의 원군을 지원해주었으며 아라비아 페트라(Arabia Petra)의 왕이었던 아레타스(Aretas)도 헤롯에 대한 증오심과 또한 로마의 환심을 사기위해 보병과 기병을 포함해서 적지 않은 원조를 해주었다. 바루스는 모든 군대를 집결시켜 놓고 그 중 일부를 그의 아들과 친구의[㈜ 전쟁. 2권. 5 : 1(168)을 참조. “그의 친구들 중 한명인 가이우스(Gaius).”] 인솔하에 톨레미의 이웃에 있는 갈릴리에 파견하고 적들을 공격하여 세포리스(Sepphoris)를 함락하고 주민들을 노예로삼고 시가지를 불태웠다. 한편 전 군대를 동원하여 사마리아(Samaria)로 진격한 바루스는 사마리아만큼은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소요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루스는 톨레미에 속한 아루스(Arous)라는 마을에[㈜ 전쟁. 2 : 69를 참조. 네아폴리스(Neapolis)서남쪽 11마일 떨어진 지금의 하리 스(Hris)로 확인되어짐. 알브라이트(Albright), ‘BASOR’11, 10, 13과 아벨 (Abel), ‘GP’ ii. 251과 ‘JPOS’ 7(1927), 92 아비요나(Avi-Yonah), ‘MP’. p. 24 를 볼 것.] 진을 쳤는데 그 마을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헤롯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불로 태워버린 마을이었다. 그들은 이전에는 요새화되어 철옹성과 같이 튼튼했으나 지금은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약탈되고 방화되어 버린 삼포(Sampho)라는[㈜ 엠마오(Emmaus) 북동 7마일 떨어진 곳으로 지금의 사파(Saffa)임. 이곳은 두 강사이의 견고한 위치에 있다. 아벨(Abel), ‘GP’ ii : 448과 ‘JPOS’의 위에서 말 한 부분과 아비요나(Avi-Yonah), ‘MP’ p.6을 참고할 것.] 마을에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바루스는 엠마오의 주민들이 모두 달아나 버리자 그들에 대한 보복으로 엠마오를 불태워버리고 명령했다. 바루스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이때 예루살렘에서 진을 치면서 로마군을 포위했던 유대인들은 바루스군이 몰려온다는 소리를 듣고크게 놀라 포위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바루스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의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하자 유대인들은 그비난에 대해서 변명하기 시작했다. 즉 유대인들이 많이 모인 것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인 것이며, 로마군과 전쟁을 일으킨 것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외부인들의 성급함 때문이었으며, 유대인들은 로마군을 포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군과 함께 외부인들에게 포위당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때 바루스를 만나기 위해 간 사람들은 헤롯왕의 친사촌인 요셉(Joseph)과[㈜ 헤롯(Herod)의 형제 요셉(Joseph)의 아들로 그는 주전 38년에 여리고 (Jericho)전투에서 죽음. 참). 전쟁. 1권 17 : 1, 2(323-325) ; 고대. 14권. 15 : 10(448, 449), 18권. 5 : 4(134).] 군사들을 이끌고 로마군에 포위당했던 그라투스(Gratus)와 루푸스(Rufus)등이었다. 그러나 사비누스는 바루스 앞에 나타나지 않고 몰래 성밖으로 나가 항구로 갔다.


    10. 바루스가 반역을 진압하다


     이에 바루스는 그의 병력의 일부를 지방으로 보내어 반역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색출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반역자들을 잡아바루스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다. 바루스는 죄가 무거운 자들은 처벌하게 하고 경미한 사람들은 풀어 주었다. 이때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한 사람은 2,000명이나 되었다. 바루스는 또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아레타스의[㈜ 라이나흐(Reinach)가 ‘REJ’의 56(1908), 124이하에서 추정한 것이지만 불란서 어 번역에서는 간과되었다. 참). 고대. 17권. 10 : 9(287, 290) ; 전쟁. 2권. 5 :3(76).] 군대들을 해산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무질서하게 행동하였을 뿐 아니라 바루스의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유익이된다면 서슴없이 약탈을 자행하곤 하였다. 또한 바루스는 10,000명의 유대인들이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체포하기위해 급히 출동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키압(Achiab)의충고를 따라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이에 바루스는 무리들의 반역죄를 용서해 주고 대신 몇명의 주동자만을 가이사에게 보냈는데 가이사는 그들의 대부분을 풀어주었다. 잡혀온 자 중에서 이소요에 가담했던 헤롯의 친척들은 모두 처형당했는데 그 까닭은 최소한의 의리도 없이 자신의 친척인 헤롯에게 대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가이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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