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권 제 3장 글라우디오가 체포되어 집에서 끌려나가 진영으로 가게 된 것과 원로원이 그에게 사절을 보낸 것에 대하여

 


제 3 장



글라우디오가 체포되어 집에서 끌려나가 진영으로 가게 된 것과 원로원이 그에게 사절을 보낸 것에 대하여



 1. 숨어있던 글라우디오가 집정관 호위병에 의해 발견되어진 경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글라우디오는 가이우스로부터 권좌를 빼앗기고 쫓겨났다. 궁정은 가이우스의 죽음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기 때문에 글라우디오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그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경계할 어떤 이유도 없었지만 좁다란 곳으로 잠적하여 숨었다.글라우디오는 사생활에 있어서 온화하게 처신하였고 행한 일에만족하였다. 그는 학문,[㈜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3\’, \’글라우디오 41\’과 디오의 1ix 2. 1은 그가 소년기부터 문학에 열중하였고 몇 개의 역사작품을 썼다고 언급하였다.] 특히 헬라어에 전념했으며[㈜ 황제가 된 후 헬라의 사신들에게 종종 헬라어로 답하는 것, 법정에서 호머를 인용하는 것과 20권의 에투루스카(Etrusca) 역사와 8권의 카르타고 역사를 헬라어로 기록하는 것과 글라우디오가 헬라어를 선호하였음을 보여준다(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42\’).] 분란을가져오는 어떤 종류의 행위도 철저히 삼갔다. 군중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병사들은 격노하여 왕궁을 날뛰었다. 그리고황제의 시신을 지키는 병사들도 시민득과 같이 두려움과 혼란에빠졌다. 집정관 호위병인 정예부대는 후속 조치에 대해 논쟁하게 되었다. 병사들은 가이우스 황제가 살해당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복수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병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하였다. 심지어 게르만병사들도 공익(公益)을 증진시키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잔악성을 채우기 위하여 가이우스 황제 살해자들을 앙갚음하는데 관여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로 인해 글라우디오는 불안하였고 특히그는 아스프레나스(Asprenas)와 다른 자들의 머리가 달린 광경을 보고 신변의 안전에 신경을 썼다. 몇 걸음만에 도달할 수 있는 우묵한 곳에 자신을 최대한 어두움 속으로 숨겼다.[㈜ 혹은 \”어둠 속에 감추다.\”] 왕궁경비병중의 한명인 그라투스(Gratus)는 글라우디오를 보았지만 희미한 빛 속에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그의 모습을 잘 볼 수는 없었다. 글라우디오는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라투스는 다가갔고 글라우디오는 물러날 것을 요청했지만[㈜ 혹은 \”물러나게 하려고 하였다.\”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10에 따르면 \”글라우디오는 공포로 인해 운이 좋았다\”고 언급되고 있으며, 디오의 1x. 1. 2-4는 또한 글라우디오가 끌려가서 억지로 황제가 된 것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확증하고 있다.] 오히려 그라투스는달려들어 그를 잡았다. 그가 글라우디오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그라투스는 동료들에게 \”여기에 게르마니쿠스가[㈜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1\’은 게르만에서의 그의 승리로 인해 글라우디오의 부친 드루수스(Drusus)에게 돌아간 영예 가운데 하나인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이 자신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계시다. 이분을 황제로 모시자\”라고 소리질렀다. 글라우디오는 병사들이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하자 가이우스를 살해한 것처럼 자기도 처형할까 두려워하여 그는 병사들을 결코 성나게 하지 않았으며 이번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상시시키면서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라투스는 웃으면서 그의 오른팔을 잡고 말하기를 \”목숨을 보존하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거두시고 로마제국을 차지할 큰 계획을 세우십시오. 신들께서는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서 제국을 가이우스로부터 취하여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가셔서 당신의 몫인 선조들의 왕관을 수락하십시오.\” 그라투스는 글라우디오를 수행했는데 글라우디오는 그라투스가 한말이 두렵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2. [병사들이 글라우디오를 황제라고 호칭하다]



 많은 경호병사들이 그라투스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다급히 끌려오는 글라우디오를 보았을 때 처형당하여 끌려오는 줄로알고서 안색이 변한 채 맞이하였다.[㈜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10\’에서는 그를 보았던 사람들이 마치 무죄한 사람이 서둘러 처형당하는 것처럼 그를 동정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글라우디오는 일생 동안 공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을 피하였으며 가이우스 통치시 작은 위험도 겪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집정관에게 통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호병사들은 더욱더 모여들었고 무리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글라우디오는 힘이 약하여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글라우디오가 사로잡히자 그를 떠 메고 오는 자들조차 글라우디오를 내버려둔채 도망을 치고 말았다. 경호병사들은 왕궁-이 왕궁이 정착지로서는 로마시의 제일 첫 번 지역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참). 바로(Varo) \’Ling. Lat\’. I. 7.]-의공터로 와서는 보물창고에[㈜ 문자적으로는 \”공공건물,\” 고대. 13권. 9 : 2(265, 266)과 16권. 6 : 2(164)에서는 공공 보고(寶庫)로 부른다.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10\’은 그가 밤을 지낸 집정관 진영으로 결국 갔다고 언급한다.] 도달했는데 그곳에는 그의 형제인 게르마니쿠스의 인기 때문에 글라우디오를 보자 크게 기뻐하였고 그를 황제로 선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게르마니쿠스는 많은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명성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병사들은 원로원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로[㈜ 문자적으로는 \”그 문제의 실행 불가능\”을 뜻함.]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정권이 다시 일개 통치자의 손으로 넘어가면 자신을위하여 왕권을 장악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글라우디오는 병사들의 동의와 지원으로 왕권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글라우디오는충분하게 하사(下賜)함으로써 병사들의 그러한 조력에 대하여 성의를 표시하려고 하였다.



 3. [원로원과 시민들의 견해차이와 원로원이 글라우디오에게 사절을 보냄]



 병사들은 서로간에 자신들의 견해를 나누었으며 심중에 있는생각을 숙고하였다. 그리고는 각 진영에 그러한 생각을 알렸다.병사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러한 조처를 환영하였다. 병사들은 글라우디오 주위로 몰려들어 그를 들것에 태우고 진영으로 향하였다. 시민들과 원로원의 견해에는 차이가 있었다. 원로원은 그 전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하였고 열망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재자의 오만함으로 자신들에게 부과된 노예상태를 벗어날 기회를 오랜만에 얻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시민들은 원로원을 시샘하여 제동을 걸고 자신들을 글라우디오의 황제 옹립을 크게 기뻐하며 글라우디오의 황제 즉위로 폼페이(Pompey)시대때 일어난 것과 같은 내란(內亂)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생각하였다.[㈜ 주전 49-46년.] 글라우디오가 병사들에 의해 진영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원로원 의원들 중 몇 명의 우수한 사람들을 글라우디오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였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여서는 안되오.[㈜ 디오의 1x. 1, 4와 유사함.] 일개인으로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국가 기구의 법에 따라서 원로원에 굴복해야 하오. 이전의 독재자들이 로마를 얼마나 유린했으며 가이우스 황제의 압제로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했는지 기억해 주기 바라오. 그대 또한 다른 독재자들에 의해 오만방자하게 집행된 독재의 잔인함을 혐오하므로 스스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 말고 조국에 대항하여 폭력을 자행하지 않기를 바라오.만일 그대가 우리의 의견에 동조하여 이전의 훌륭한 품행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자유시민들은 그대에게 영예를 부여할 것이오. 만일 그대가 법에 복종한다면 백성으로서나 통치자로서나 간에 덕행(德行)에 대하여 갈채를 받을 것이오. 그러나만일 그대가 무모하여 가이우스의 죽음으로부터 어떤 교훈도 배우지 못한다면 원로원 의원들은 그러한 행위를 좌시(坐視)하지만 않을 것이오. 원로원은 수많은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무기도 아주 충분하며 병사들로 대체할 수많은 노예들이 있소. 신들께서 표명한 희망과 번영은 큰 자산이오. 그리고 신들께서는 도덕적이고 정신적 가치를 상실하지 않고 승리하고자 애쓰는 사람들 즉나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만을 후원해 주실 것이오.\”



4. [사절들의 진언]



 사신 베리니우스(Veranius)와[㈜ 퀸투스 베라니우스(Quintus Veranius)는 41년에 호민관, 49년에 루기아(Lycia 혹은 Lycia Pamphylia)의 총독, 집정관, 58년에 영국의 총독이 되었고 바로 그 해에 거기에서 죽었다(타키투스, \’Agr. 14\’와 \’연대기\’ xiv. 29) 든(A.E.Gordon)에 의해 자세히 논의된 새로운 비문으로부터(\”주후 49년의 집정관 퀸투스 라니우스,\’ 켈리포니아 대학출판사 고전 고고학 ii : 5, 1952, pp.231-241) 고황제 글라우디오가 Veranius의 집정관직의 임명과 관련이 있음과, 그 해 동안에 그가 점관(卜占官)으로 임명되어 지방 집정관의 서열에 올랐음을 보여 준다.] 브로쿠스(Brocchus)는[㈜ 여러 사본들에서의 철자가 다양함 : Bronchus, Brouchos, Broschus, Brochus, Bracchus, 그는 다른 식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음. 다양한 철자들 중에 Brocchus만이 실제로 비문에서 발견된다.] 호민관으로서 서신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무릎을 꿇고서 로마가 전쟁과 재난에 결코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글라우디오에게 간청하였다. 그들은 글라우디오가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것과 집정관들이 그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그들이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만일 정권 장악하기를 원하신다면 원로원으로부터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서 정권을 장악하신다면 더욱 경사스럽고 보다 행복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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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권 제 3장 글라우디오가 체포되어 집에서 끌려나가 진영으로 가게 된 것과 원로원이 그에게 사절을 보낸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3 장


    글라우디오가 체포되어 집에서 끌려나가 진영으로 가게 된 것과 원로원이 그에게 사절을 보낸 것에 대하여


     1. 숨어있던 글라우디오가 집정관 호위병에 의해 발견되어진 경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글라우디오는 가이우스로부터 권좌를 빼앗기고 쫓겨났다. 궁정은 가이우스의 죽음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기 때문에 글라우디오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그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경계할 어떤 이유도 없었지만 좁다란 곳으로 잠적하여 숨었다.글라우디오는 사생활에 있어서 온화하게 처신하였고 행한 일에만족하였다. 그는 학문,[㈜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3’, ‘글라우디오 41’과 디오의 1ix 2. 1은 그가 소년기부터 문학에 열중하였고 몇 개의 역사작품을 썼다고 언급하였다.] 특히 헬라어에 전념했으며[㈜ 황제가 된 후 헬라의 사신들에게 종종 헬라어로 답하는 것, 법정에서 호머를 인용하는 것과 20권의 에투루스카(Etrusca) 역사와 8권의 카르타고 역사를 헬라어로 기록하는 것과 글라우디오가 헬라어를 선호하였음을 보여준다(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42’).] 분란을가져오는 어떤 종류의 행위도 철저히 삼갔다. 군중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병사들은 격노하여 왕궁을 날뛰었다. 그리고황제의 시신을 지키는 병사들도 시민득과 같이 두려움과 혼란에빠졌다. 집정관 호위병인 정예부대는 후속 조치에 대해 논쟁하게 되었다. 병사들은 가이우스 황제가 살해당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복수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병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하였다. 심지어 게르만병사들도 공익(公益)을 증진시키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잔악성을 채우기 위하여 가이우스 황제 살해자들을 앙갚음하는데 관여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로 인해 글라우디오는 불안하였고 특히그는 아스프레나스(Asprenas)와 다른 자들의 머리가 달린 광경을 보고 신변의 안전에 신경을 썼다. 몇 걸음만에 도달할 수 있는 우묵한 곳에 자신을 최대한 어두움 속으로 숨겼다.[㈜ 혹은 “어둠 속에 감추다.”] 왕궁경비병중의 한명인 그라투스(Gratus)는 글라우디오를 보았지만 희미한 빛 속에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그의 모습을 잘 볼 수는 없었다. 글라우디오는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라투스는 다가갔고 글라우디오는 물러날 것을 요청했지만[㈜ 혹은 “물러나게 하려고 하였다.”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10에 따르면 “글라우디오는 공포로 인해 운이 좋았다”고 언급되고 있으며, 디오의 1x. 1. 2-4는 또한 글라우디오가 끌려가서 억지로 황제가 된 것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확증하고 있다.] 오히려 그라투스는달려들어 그를 잡았다. 그가 글라우디오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그라투스는 동료들에게 “여기에 게르마니쿠스가[㈜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1’은 게르만에서의 그의 승리로 인해 글라우디오의 부친 드루수스(Drusus)에게 돌아간 영예 가운데 하나인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이 자신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계시다. 이분을 황제로 모시자”라고 소리질렀다. 글라우디오는 병사들이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하자 가이우스를 살해한 것처럼 자기도 처형할까 두려워하여 그는 병사들을 결코 성나게 하지 않았으며 이번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상시시키면서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라투스는 웃으면서 그의 오른팔을 잡고 말하기를 “목숨을 보존하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거두시고 로마제국을 차지할 큰 계획을 세우십시오. 신들께서는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서 제국을 가이우스로부터 취하여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가셔서 당신의 몫인 선조들의 왕관을 수락하십시오.” 그라투스는 글라우디오를 수행했는데 글라우디오는 그라투스가 한말이 두렵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2. [병사들이 글라우디오를 황제라고 호칭하다]


     많은 경호병사들이 그라투스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다급히 끌려오는 글라우디오를 보았을 때 처형당하여 끌려오는 줄로알고서 안색이 변한 채 맞이하였다.[㈜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10’에서는 그를 보았던 사람들이 마치 무죄한 사람이 서둘러 처형당하는 것처럼 그를 동정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글라우디오는 일생 동안 공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을 피하였으며 가이우스 통치시 작은 위험도 겪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집정관에게 통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호병사들은 더욱더 모여들었고 무리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글라우디오는 힘이 약하여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글라우디오가 사로잡히자 그를 떠 메고 오는 자들조차 글라우디오를 내버려둔채 도망을 치고 말았다. 경호병사들은 왕궁-이 왕궁이 정착지로서는 로마시의 제일 첫 번 지역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참). 바로(Varo) ‘Ling. Lat’. I. 7.]-의공터로 와서는 보물창고에[㈜ 문자적으로는 “공공건물,” 고대. 13권. 9 : 2(265, 266)과 16권. 6 : 2(164)에서는 공공 보고(寶庫)로 부른다.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10’은 그가 밤을 지낸 집정관 진영으로 결국 갔다고 언급한다.] 도달했는데 그곳에는 그의 형제인 게르마니쿠스의 인기 때문에 글라우디오를 보자 크게 기뻐하였고 그를 황제로 선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게르마니쿠스는 많은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명성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병사들은 원로원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로[㈜ 문자적으로는 “그 문제의 실행 불가능”을 뜻함.]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정권이 다시 일개 통치자의 손으로 넘어가면 자신을위하여 왕권을 장악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글라우디오는 병사들의 동의와 지원으로 왕권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글라우디오는충분하게 하사(下賜)함으로써 병사들의 그러한 조력에 대하여 성의를 표시하려고 하였다.


     3. [원로원과 시민들의 견해차이와 원로원이 글라우디오에게 사절을 보냄]


     병사들은 서로간에 자신들의 견해를 나누었으며 심중에 있는생각을 숙고하였다. 그리고는 각 진영에 그러한 생각을 알렸다.병사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러한 조처를 환영하였다. 병사들은 글라우디오 주위로 몰려들어 그를 들것에 태우고 진영으로 향하였다. 시민들과 원로원의 견해에는 차이가 있었다. 원로원은 그 전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하였고 열망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재자의 오만함으로 자신들에게 부과된 노예상태를 벗어날 기회를 오랜만에 얻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시민들은 원로원을 시샘하여 제동을 걸고 자신들을 글라우디오의 황제 옹립을 크게 기뻐하며 글라우디오의 황제 즉위로 폼페이(Pompey)시대때 일어난 것과 같은 내란(內亂)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생각하였다.[㈜ 주전 49-46년.] 글라우디오가 병사들에 의해 진영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원로원 의원들 중 몇 명의 우수한 사람들을 글라우디오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였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여서는 안되오.[㈜ 디오의 1x. 1, 4와 유사함.] 일개인으로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국가 기구의 법에 따라서 원로원에 굴복해야 하오. 이전의 독재자들이 로마를 얼마나 유린했으며 가이우스 황제의 압제로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했는지 기억해 주기 바라오. 그대 또한 다른 독재자들에 의해 오만방자하게 집행된 독재의 잔인함을 혐오하므로 스스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 말고 조국에 대항하여 폭력을 자행하지 않기를 바라오.만일 그대가 우리의 의견에 동조하여 이전의 훌륭한 품행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자유시민들은 그대에게 영예를 부여할 것이오. 만일 그대가 법에 복종한다면 백성으로서나 통치자로서나 간에 덕행(德行)에 대하여 갈채를 받을 것이오. 그러나만일 그대가 무모하여 가이우스의 죽음으로부터 어떤 교훈도 배우지 못한다면 원로원 의원들은 그러한 행위를 좌시(坐視)하지만 않을 것이오. 원로원은 수많은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무기도 아주 충분하며 병사들로 대체할 수많은 노예들이 있소. 신들께서 표명한 희망과 번영은 큰 자산이오. 그리고 신들께서는 도덕적이고 정신적 가치를 상실하지 않고 승리하고자 애쓰는 사람들 즉나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만을 후원해 주실 것이오.”


    4. [사절들의 진언]


     사신 베리니우스(Veranius)와[㈜ 퀸투스 베라니우스(Quintus Veranius)는 41년에 호민관, 49년에 루기아(Lycia 혹은 Lycia Pamphylia)의 총독, 집정관, 58년에 영국의 총독이 되었고 바로 그 해에 거기에서 죽었다(타키투스, ‘Agr. 14’와 ‘연대기’ xiv. 29) 든(A.E.Gordon)에 의해 자세히 논의된 새로운 비문으로부터(“주후 49년의 집정관 퀸투스 라니우스,’ 켈리포니아 대학출판사 고전 고고학 ii : 5, 1952, pp.231-241) 고황제 글라우디오가 Veranius의 집정관직의 임명과 관련이 있음과, 그 해 동안에 그가 점관(卜占官)으로 임명되어 지방 집정관의 서열에 올랐음을 보여 준다.] 브로쿠스(Brocchus)는[㈜ 여러 사본들에서의 철자가 다양함 : Bronchus, Brouchos, Broschus, Brochus, Bracchus, 그는 다른 식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음. 다양한 철자들 중에 Brocchus만이 실제로 비문에서 발견된다.] 호민관으로서 서신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무릎을 꿇고서 로마가 전쟁과 재난에 결코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글라우디오에게 간청하였다. 그들은 글라우디오가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것과 집정관들이 그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그들이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만일 정권 장악하기를 원하신다면 원로원으로부터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서 정권을 장악하신다면 더욱 경사스럽고 보다 행복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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