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1장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성전을 약탈했는지 또한 마카비 가(家)의 마티아스와 유다의 공적에 대하여, 그리고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제 1 권 167년간의 사건을 다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때부터 대헤롯의 죽음까지



 제 1 장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성전을 약탈했는지 또한 마카비 가(家)의 마티아스와 유다의 공적에 대하여, 그리고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1.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손에 넣은 후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금하다



 에피파네스라 불리는 안티오쿠스(Antiochus)가 수리아의 전지역에 관한 문제로 톨레미(Ptolemy) Ⅵ세와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유대의 유력자들 사이에서도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그들은 정권을 획득하려고 서로 다투고 있었고, 유력자들은 저마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귀족들에게 복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제사장 중의 하나인 오니아스(Onias)가 득세한 다음토비아스(Tobias)의 아들들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추방하였다.오니아스에 의해 쫒겨난 이들은 안티오쿠스에게로 달려가 자기들의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안티오쿠스 왕은 이전부터 유대를 침공할 마음이 있었던 차에 이런 요청을 받자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대군을 이끌고 유대를 침공해서 무력으로 유대 도시를 장악한 후 톨레미 왕가에 협조했던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자기 병사들로 하여금 무자비하게 약탈을 자행하도록 명했다〔주전 약 170년〕.

 \’안티오쿠스는 스스로 성전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매일 계속 드리게 되어 있는 속죄제를[㈜ 문자 그대로 \”번제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이라는 헬라어는 다른 곳에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에게 드리는 제물이라는 의미로 쓰임.] 3년 6개월 동안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 오니아스는 톨레미에게 도망하여 헬리오폴리스의 노메(nome)에 위치한 장소를 그로부터 하사받았는데, 거기에다 오니아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한 성전을 건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 후에 더 상세히 말하려고 한다.[㈜ 전쟁.7권. 10 : 2(421)]



2. 종교 박해

 안티오쿠스는 예기치 못하게 예루살렘 도시를 장악하고 그 곳에서 많은 사람을 죽인 것과 약탈한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자신의 극악한 열정에 도취되고 성을 포위 공격할 때 당한 고통을 기억하고는 어린아이에게 행하던 할례를 금지시키고 돼지고기로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유대인의 율법을 어기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그들 중 가장 유력한 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박키데스(Bacchides)는[㈜ Bacchides의 언급은 라이나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대 착오이다. 그는 수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났다. 고대.12권. 10 : 2(393), 마카비 1서 7: 8] 요새를지키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이런 악한 명령에 그 자신의 악한 성품이 보태져서 온갖 종류의 극악한 행위들을 자행했다. 그는 유대인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을 한 사람씩 고문하는가 하면, 유대의 도시를 파괴해 버리겠다고 공공연히 으름장을 놓았다. 마침내 극악한 박키데스의 행위는 불쌍한 박해 피해자들로 하여금스스로 복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3. 마티아스의 등장



 이 일은 아사모나이우스의 아들이며 모딘(Modin)이라는 마 을에 살고 있던 제사장 중의 하나인 마티아스(Mattias)가[㈜ 마타디아스(Mattathias)(마카비 1서).] 자신의 다섯 아들이 포함된 가족과 함께 무장하고 단검으로 박키데스를[㈜ 고대.12권.6:2(270)에 따르자면 Apelles : 이 관리의 이름은 마카비1서 2:25에는 나오지 않는다.]찔러 죽였던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에 그는 적군의많은 수비대를 두려워하여 산으로 도망했는데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이에 마티아스는 용기를 얻고 산에서 내려와 안티오쿠스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안티오쿠스 군대를 쳐부순 후, 그들을 유대에서 내쫓아 버렸다. 마티아스는 이 일로 정권을 손에 쥐게 되었고 백성들이 추대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맏아들인 유다(Judas)[㈜ 마카비1서. 2:4에 의하면 유다(Judas)는 다섯아들 중에서 셋째 아들이었다.]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사망했다〔주전 약 167년〕.



4. 유다 마카베오의 업적



 유다는 안티오쿠스가 조용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아니하고자기 나라 군대를 모았다. 그리고 로마와 동맹을 맺었으며,(로마와 동맹을 맺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또 하나의 시대 착오 : 마카비1서의 기록들이 신빙성 있는 것이라면 로마와의 조약은 데케트리우스(주전162-150년) 시대에 폐기되었다.] 에피파네스가[㈜ 혹은 그의 장군이었던 리시아스(Lysias)와 고르기아스(Grogias)(마카비1서).] 두번째로 유대를 침공했을 때 그를 유대 밖으로 물리침으로 에피파네스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런 커다란 승리로 득의 만만한 유다는 예루살렘 시에 있던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지금까지 그는 이 수비대까지는 물리치지는 못했었다. 그 엘르아살이 안티오쿠스가 탔을 것이라 생각하고 공격한 셀류키드의 전투 코끼리.(외경:마카비1서 6:28-63;마카비2서 13:1-23) 그래서 유다는 이 수비대를 상부 도시에서 축출하여 아크라(Acr-a)라고 알려진 하부 도시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주전 16년].

 그리고 유다는 성전을 장악하여 성전 전체를 깨끗이 청소했으며 주위로 돌아가며 담을 축조했고 거룩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그릇들을 새로 장만하여 전에 쓰던 것들과 대치하였다. 이전에있던 그릇들은 신성모독에 쓰여졌던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유다는 또 하나의 제단을 만들어서 희생제사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각주13)을 보라] 이리하여 도시가 거룩한 율법을 다시 회복했을 그 무렵 안티오쿠스가 사망했다 [주전164년]. 그래서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가 왕국을 이어 받았으나, 그 또한 유대인들을 증오하기는 부친 안티오쿠스와 마찬가지였다.



 5. 〔유다의 동생 엘르아살의 죽음〕



 그래서 안티오쿠스는 보병 50,000명, 기병 5,000명 그리고 80마리의 코끼리를 집결시켜서 유대를 통과하여 산간지방으로 진격했다.[㈜ 코끼리들의 전투에 관하여는 마카비서 6:28 이하에 따로 설명이 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후기의 저술에 이 부분을 사용하였다.(고대.7권).] 안티오쿠스는 벧수론(Bethsuron)이라고 불리는 작은 도시를 점령했고,[㈜ 마카비1서 6:50〈고대.12권.9:5(376)〉에 의하면, Bethsuron은 전쟁이 끝나고서도 탈취당하지 않았다.] 벧자카리아(Bethzacharia)라고 불리는길목이 매우 좁은 곳에서 유다는 안티오쿠스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접전하기 전에 유다의 동생인 엘르아살(Ele-azar)은 커다란 가마와[㈜ 헬라어 \”망대.\”]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한 금으로 만든갑옷을 입힌 가장 큰 코끼리 한 마리를 발견하고, 안티오쿠스가 그 코끼리 위에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군대보다 앞서 전력으로 질주하여 적군을 헤치며 코끼리에게 접근하였다. 그러나코끼리는 너무 키가 컸기 때문에 왕이 탔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그 코끼리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엘르아살은 마침내 자신의 무기로 코끼리의 배를 찌르고 코끼리와 그 위에 타고 있던자도 쓰러뜨린 후 자신은 그 밑에 깔려 압사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평소 생명보다 영광을 더 소중히 여겼던 엘르아살에에게는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코끼리를 타고 있던 자는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코끼리를 타고 있던 자가 안티오쿠스였더라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전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우기 위해 생명을 포기하였다는 비판은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엘르아살의 형 유다는 이런 비보를 접하고 전쟁에 대한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유대인들이 한동안 용감히 싸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안티오쿠스의 군대는 수적으로도 우세할 뿐만아니라 운까지도 겹쳐 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에 유다의 많은 부하들이 죽임을 당했고, 유다는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고프나 지방(provinece of Gorphna)으로[㈜ 유대에 속한 11개의 지역들 중의 하나(전쟁. 3권. 3:5(55)):고대. 12권 9:5(375)에 의하면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퇴각하여 공격을 준비하였다.]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식량이 부족해 잠깐 머무르다 그 곳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예루살렘을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수비대를 남겨두었다. 그러나 나머지 군대는 수리아의 겨울 진영(winter – quarters)으로 철수시켰다.



 6. 〔유다 마카베오의 죽음〕



 안티오쿠스가 떠난 후 유다는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모여들었으므로 바쁘게 움직여서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다시 모아 아케다사(Acedasa)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안티오쿠스의[㈜ 엄격히 말하자면 데메트리우스의 장군인 니카노르(Nacanor). 1마카베오 7 : 39이하] 군대와 다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적들을 강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많은 적군을 살해했으나 마침내 유다 자신도 그 전투에서 죽고 말았다[㈜ 유다는 아(케)다사(A(ce)dasa)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엘라사(Elasa)(마카비1서 9:5)나 베르제도(Berzetho)(고대.12권.11 : 1(422))의 교전에서 살해되었다.]〔주전 161년〕. 그로부터 며칠 후 유다의 형 요한(John)도 안티오쿠스 일당의 음모에 걸려들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참).마카비1서 9:35이하. 고대.3권.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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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권 제 1장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성전을 약탈했는지 또한 마카비 가(家)의 마티아스와 유다의 공적에 대하여, 그리고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 권 167년간의 사건을 다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때부터 대헤롯의 죽음까지


     제 1 장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성전을 약탈했는지 또한 마카비 가(家)의 마티아스와 유다의 공적에 대하여, 그리고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1.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손에 넣은 후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금하다


     에피파네스라 불리는 안티오쿠스(Antiochus)가 수리아의 전지역에 관한 문제로 톨레미(Ptolemy) Ⅵ세와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유대의 유력자들 사이에서도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그들은 정권을 획득하려고 서로 다투고 있었고, 유력자들은 저마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귀족들에게 복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제사장 중의 하나인 오니아스(Onias)가 득세한 다음토비아스(Tobias)의 아들들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추방하였다.오니아스에 의해 쫒겨난 이들은 안티오쿠스에게로 달려가 자기들의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안티오쿠스 왕은 이전부터 유대를 침공할 마음이 있었던 차에 이런 요청을 받자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대군을 이끌고 유대를 침공해서 무력으로 유대 도시를 장악한 후 톨레미 왕가에 협조했던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자기 병사들로 하여금 무자비하게 약탈을 자행하도록 명했다〔주전 약 170년〕.

     ‘안티오쿠스는 스스로 성전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매일 계속 드리게 되어 있는 속죄제를[㈜ 문자 그대로 “번제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이라는 헬라어는 다른 곳에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에게 드리는 제물이라는 의미로 쓰임.] 3년 6개월 동안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 오니아스는 톨레미에게 도망하여 헬리오폴리스의 노메(nome)에 위치한 장소를 그로부터 하사받았는데, 거기에다 오니아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한 성전을 건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 후에 더 상세히 말하려고 한다.[㈜ 전쟁.7권. 10 : 2(421)]


    2. 종교 박해

     안티오쿠스는 예기치 못하게 예루살렘 도시를 장악하고 그 곳에서 많은 사람을 죽인 것과 약탈한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자신의 극악한 열정에 도취되고 성을 포위 공격할 때 당한 고통을 기억하고는 어린아이에게 행하던 할례를 금지시키고 돼지고기로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유대인의 율법을 어기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그들 중 가장 유력한 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박키데스(Bacchides)는[㈜ Bacchides의 언급은 라이나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대 착오이다. 그는 수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났다. 고대.12권. 10 : 2(393), 마카비 1서 7: 8] 요새를지키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이런 악한 명령에 그 자신의 악한 성품이 보태져서 온갖 종류의 극악한 행위들을 자행했다. 그는 유대인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을 한 사람씩 고문하는가 하면, 유대의 도시를 파괴해 버리겠다고 공공연히 으름장을 놓았다. 마침내 극악한 박키데스의 행위는 불쌍한 박해 피해자들로 하여금스스로 복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3. 마티아스의 등장


     이 일은 아사모나이우스의 아들이며 모딘(Modin)이라는 마 을에 살고 있던 제사장 중의 하나인 마티아스(Mattias)가[㈜ 마타디아스(Mattathias)(마카비 1서).] 자신의 다섯 아들이 포함된 가족과 함께 무장하고 단검으로 박키데스를[㈜ 고대.12권.6:2(270)에 따르자면 Apelles : 이 관리의 이름은 마카비1서 2:25에는 나오지 않는다.]찔러 죽였던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에 그는 적군의많은 수비대를 두려워하여 산으로 도망했는데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이에 마티아스는 용기를 얻고 산에서 내려와 안티오쿠스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안티오쿠스 군대를 쳐부순 후, 그들을 유대에서 내쫓아 버렸다. 마티아스는 이 일로 정권을 손에 쥐게 되었고 백성들이 추대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맏아들인 유다(Judas)[㈜ 마카비1서. 2:4에 의하면 유다(Judas)는 다섯아들 중에서 셋째 아들이었다.]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사망했다〔주전 약 167년〕.


    4. 유다 마카베오의 업적


     유다는 안티오쿠스가 조용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아니하고자기 나라 군대를 모았다. 그리고 로마와 동맹을 맺었으며,(로마와 동맹을 맺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또 하나의 시대 착오 : 마카비1서의 기록들이 신빙성 있는 것이라면 로마와의 조약은 데케트리우스(주전162-150년) 시대에 폐기되었다.] 에피파네스가[㈜ 혹은 그의 장군이었던 리시아스(Lysias)와 고르기아스(Grogias)(마카비1서).] 두번째로 유대를 침공했을 때 그를 유대 밖으로 물리침으로 에피파네스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런 커다란 승리로 득의 만만한 유다는 예루살렘 시에 있던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지금까지 그는 이 수비대까지는 물리치지는 못했었다. 그 엘르아살이 안티오쿠스가 탔을 것이라 생각하고 공격한 셀류키드의 전투 코끼리.(외경:마카비1서 6:28-63;마카비2서 13:1-23) 그래서 유다는 이 수비대를 상부 도시에서 축출하여 아크라(Acr-a)라고 알려진 하부 도시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주전 16년].

     그리고 유다는 성전을 장악하여 성전 전체를 깨끗이 청소했으며 주위로 돌아가며 담을 축조했고 거룩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그릇들을 새로 장만하여 전에 쓰던 것들과 대치하였다. 이전에있던 그릇들은 신성모독에 쓰여졌던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유다는 또 하나의 제단을 만들어서 희생제사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각주13)을 보라] 이리하여 도시가 거룩한 율법을 다시 회복했을 그 무렵 안티오쿠스가 사망했다 [주전164년]. 그래서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가 왕국을 이어 받았으나, 그 또한 유대인들을 증오하기는 부친 안티오쿠스와 마찬가지였다.


     5. 〔유다의 동생 엘르아살의 죽음〕


     그래서 안티오쿠스는 보병 50,000명, 기병 5,000명 그리고 80마리의 코끼리를 집결시켜서 유대를 통과하여 산간지방으로 진격했다.[㈜ 코끼리들의 전투에 관하여는 마카비서 6:28 이하에 따로 설명이 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후기의 저술에 이 부분을 사용하였다.(고대.7권).] 안티오쿠스는 벧수론(Bethsuron)이라고 불리는 작은 도시를 점령했고,[㈜ 마카비1서 6:50〈고대.12권.9:5(376)〉에 의하면, Bethsuron은 전쟁이 끝나고서도 탈취당하지 않았다.] 벧자카리아(Bethzacharia)라고 불리는길목이 매우 좁은 곳에서 유다는 안티오쿠스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접전하기 전에 유다의 동생인 엘르아살(Ele-azar)은 커다란 가마와[㈜ 헬라어 “망대.”]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한 금으로 만든갑옷을 입힌 가장 큰 코끼리 한 마리를 발견하고, 안티오쿠스가 그 코끼리 위에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군대보다 앞서 전력으로 질주하여 적군을 헤치며 코끼리에게 접근하였다. 그러나코끼리는 너무 키가 컸기 때문에 왕이 탔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그 코끼리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엘르아살은 마침내 자신의 무기로 코끼리의 배를 찌르고 코끼리와 그 위에 타고 있던자도 쓰러뜨린 후 자신은 그 밑에 깔려 압사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평소 생명보다 영광을 더 소중히 여겼던 엘르아살에에게는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코끼리를 타고 있던 자는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코끼리를 타고 있던 자가 안티오쿠스였더라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전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우기 위해 생명을 포기하였다는 비판은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엘르아살의 형 유다는 이런 비보를 접하고 전쟁에 대한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유대인들이 한동안 용감히 싸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안티오쿠스의 군대는 수적으로도 우세할 뿐만아니라 운까지도 겹쳐 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에 유다의 많은 부하들이 죽임을 당했고, 유다는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고프나 지방(provinece of Gorphna)으로[㈜ 유대에 속한 11개의 지역들 중의 하나(전쟁. 3권. 3:5(55)):고대. 12권 9:5(375)에 의하면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퇴각하여 공격을 준비하였다.]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식량이 부족해 잠깐 머무르다 그 곳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예루살렘을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수비대를 남겨두었다. 그러나 나머지 군대는 수리아의 겨울 진영(winter – quarters)으로 철수시켰다.


     6. 〔유다 마카베오의 죽음〕


     안티오쿠스가 떠난 후 유다는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모여들었으므로 바쁘게 움직여서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다시 모아 아케다사(Acedasa)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안티오쿠스의[㈜ 엄격히 말하자면 데메트리우스의 장군인 니카노르(Nacanor). 1마카베오 7 : 39이하] 군대와 다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적들을 강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많은 적군을 살해했으나 마침내 유다 자신도 그 전투에서 죽고 말았다[㈜ 유다는 아(케)다사(A(ce)dasa)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엘라사(Elasa)(마카비1서 9:5)나 베르제도(Berzetho)(고대.12권.11 : 1(422))의 교전에서 살해되었다.]〔주전 161년〕. 그로부터 며칠 후 유다의 형 요한(John)도 안티오쿠스 일당의 음모에 걸려들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참).마카비1서 9:35이하. 고대.3권.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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