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아켈라오가 자기 친족들을 많이 데리고 로마로 갔으나 거기서 안티파테르에 의해 가이사 앞에 고소당하자 니콜라스가 자기를 잘 변호해주어 재판에서 고소자를 이길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1. 아켈라오가 로마로 출발하다
아켈라오는 왕궁[㈜ 혹은 추측컨대 \’왕국\’.]과 가정의 모든 권한을 빌립(Philip)에게 일임하고, 그의 모친과[㈜ 말다케(Malthace).] 친구들인 포플라스(Poplas)와[㈜ 고대.17권. 9:3(219)에는 프톨라스(Ptollas)로 불리워지고 있음.] 톨레미(Ptolemy),[㈜ 헤롯의 절친한 친구이자 행정관. 전쟁. 1권. 24:2, 33:8(443, 667), 2권. 2:3(21).] 그리고 니콜라스(Nicolaus)와[㈜ 다메섹 출신, 헤롯의 또 다른 친구이자 역사가로서 요세푸스의 이 곳에서의 글은 그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해변으로 떠났다. 그의 일행 가운데는 살로메와[㈜ 헤롯의 누이.] 그녀의 아들들은 물론 죽은 헤롯왕의 조카들과 사위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는데,그 들은 겉으로는 왕위 계승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아켈라오의 요구를 받고 그를 지원하기 위해 동행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지난번 성전에서 자행된 불법적인 사태에 대하여 그를 비난하기 위해서 함께 동행하는 것이었다.
2. 행정장관 사비누스가 돈에 매수됨
아켈라오 일행이 가이사랴(Caesarea)에 도착했을 때 수리아(Syria)의 행정장관인 사비누스(Sabinus)가 마중나왔다.[㈜ 고대. 7권. 9:3(221)에는 보다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황제의 지방 재정 담당관리라고 상술됨.] 그는 헤롯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유대로 오는 중에 수리아의 총독인 바루스에게[㈜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퀸틸리우스 바루스(전쟁.1권. 31:5 (617)).] 만류되어 가이사랴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이는 아켈라오가 톨레미를 바루스에게 보내어 간청하기를 사비누스가 취하려는 행동을 못하게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사비누스는 가이사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바루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헤롯왕이 소장했던 보물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성채도 둘러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비누스가 꽤했던 계획에 방해물이었던 바루스가 안디옥(Antioch)으로 돌아가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오기 전에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질서 유지를 위하여 군단급의 부대를 주둔시켰다. (전쟁.2권. 3:1(40)).] 아켈라오 역시 로마로 떠나자 그는 곧바로 예루살렘에 뛰어 올라가 왕궁을 장악해 버렸다.또 그는 성채들도 장악하기 위하여 각 성채의 지배자들과 왕의 파견관리들을 소집해서 왕의 재산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켈라오의 명령에 복종하는 각 성채의 지배자들은 아켈라오보다 가이사의 명령에 더 충실하게 복종을 해야 한다고 고백하면서 사비누스에 굴하지 않고 신의를 굳게 지켜 재산을 보호했다.
3. 왕위 계승의 도전자인 안디바
한편 왕위를 계승하려는 또 한 사람이 로마로 출발했으니 그는 바로 안디바(Antipas)이다. 그는 헤롯왕이 유언장에 자기를 지명했다고 하면서 나중에 수정 삽입된 부분보다 더 실효성이크다고 주장했다.[㈜ 전쟁.1권. 32:7 (646).] 그는 살로메뿐 아니라 로마에 아켈라오와 함께 출발한 일행 중에도 아켈라오의 많은 친척들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큰 힘을 얻었다. 그래서 안디바는 모친과[㈜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항해를 했던 말다케. 전쟁. 2권. 2:1(14).] 니콜라스의 형제이며, 헤롯에게서 가장 높이 신임받고 영향력이큰 톨레미와 함께 떠났다. 그러나 안디바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은 대단히 달변가인 이레나이우스(Irenaeus)였다. 이러한 배경을 믿고 그는 형인 아켈라오의 권리나 헤롯왕의 유언중에 추가된 부분에서 아켈라오에게 복종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마에 도착하자 아켈라오를 백안시하던 친척들은 안디바를지지한다고 전달해 왔다. 최종적인 그들의 목표는 어느 누구의지배도 아닌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만을 받길 원했으나, 만일 로마가 반대할 경우에는 차선책으로 안디바를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4. 로마에서의 경쟁자들
이러한 의도에서 사비누스는 가이사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 아켈라오를 비난하는 한편 안디바는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또 살로메와 그녀의 친구들도 가이사에게 고소장을 만들어 제소했다.그후 아켈라오도 자신의 당위성을 요약해서 정리한 서신을[㈜ 다른 판에서는 \'(공개적인) 설명.\’] 톨레미를 통해 부친의 인장반지와 서신(유언장)과 함께 가이사에게 보냈다. 이에 가이사는 양측의 주장을 서면을 통해 읽었고,그외에도 헤롯의 자녀들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유대왕국이 넓고일년 수입이 대단히 많은 것 등 여러 가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또 가이사는 바루스와 사비누스가 이 일에 관해서 보낸 서신을 읽은 후 로마에 있는 주요 인사들 앞에서 제소자들이 말할 기회를 주도록 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 맨 앞좌석에는 카이우스(Caius)가 앉았는데, 그는 아그립바(Agrippa)의 아들과 가이사의 딸 율리아(Julia)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가이사가 양자로 입양한 사람이다.
5. 살로메의 아들 안티파테르가 아켈라오를 고소하다
곧, 살로메(Salome)의 아들이자, 아켈라오(Archelaus)의 반대파 중 가장 유능한 변사(辯士)인 안티파테르(Antipter)가아켈라오의 고소인으로 일어서서 변론을 시작했다. \”아켈라오가 겉으로 볼 때는 이제사 왕위를 청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미 오랫동안 왕으로서 행동했습니다. 아켈라오는 당시 폐하가(Caesar)가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것을 단지 이용하고 있었고, 계승에 관한 폐하의 결정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그는 왕관을 머리에 쓰지도 않았으면서 당당하게 왕위에 앉아 백성들에게 왕으로 행세하였으며, 마음대로 군대의 계급을 바꾸고, 승진시켰으며, 백성들이 주권자로 행세하는 그에게 요구했던 모든 소청들을 들어주었고, 그의 아버지가 심각한 범죄 때문에 감옥에 보냈던 자들을 석방시킨 것을보면 그가 이미 왕으로 행세한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짓을 했으면서도, 그가 이미 실제적으로는 사용해 왔던 왕권을 폐하께 간청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폐하를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칭호(titles)를 주는 자로 만들고 있는것입니다. 제가 아켈라오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더 깊은 이유는 아켈라오는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아침에는 자기 아버지를 위하는 척하고, 낮에는 슬픈 표정을 하면서, 밤에는 방탕할 정도로술을 마시는 등 위선적인 태도까지 취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의 민중 폭동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 백성들이 분노해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변론의 요점을 계속해서 이야기 하면서,성전 주변에서 아켈라오에게 학살된 많은 유대인들과 축제 때문에 성전에 와서 희생 제물을 드릴 때 오히려 자기 자신들이 희생되었던 불쌍한 백성들의 참사를 강하게 강조하였다.[㈜ 참).눅13:1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의 피에다 섞은데 대한 고소.] 이제까지아무리 무자비한 적군이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였다 해도 이보다 더 많이 성전에 시체가 쌍인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켈라오의 부친이 그를 왕위에 옹립시키려는 생각조차 갖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의 부친이 아켈라오의 이러한 만행을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친은 신체보다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는 날까지도 유언장에 누구의 이름을자기의 계승자로 기록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그는 건강한 육체와 올바른 정신으로 있을 때 기초했던 유언장에 지정된 그 계승자에게서는 어떤 결함도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무효인 결정에 대해 어떤 사람이 압력을 가한다 해도아켈라오는 불법적으로 취임선서를 전국에 선언해 버릴 것입니다. 폐하께 왕위를 받기 전에도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일단 왕위를 받고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6. 다메섹의 니콜라스가 변호하다
이러한 투로 자세히 설명하고, 대부분의 관계자들을 자기가한 고소의 각 항목에 대한 증인으로 내세운 후 안티파테르는 자기의 변론을 끝맺는다. 그때 아켈라오를 변호하는 니콜라스(Nicolas)가 일어났다. 그는 성전에서 있었던 학살은 어쩔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때 숨진 사람들은 왕궁의 적일 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조정자이신 가이사의 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켈라오에게 씌워진 다른 혐의 사실에 대해서, 그는 아켈라오의 고소인들은 그들 스스로 아켈라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유언장은 무엇보다도 가이사가 계승을 승인하는 자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자기 권력을 세계의 지배자(가이사)에게 양도할 만큼 건전한 사람은 상속자를 선택하는 데있어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권력을 수여하는 자의선택에서 보여준 현명함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선택함에 있어 올바르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아구스도의 당황
자기 편인 니콜라스가 그의 변론을 완전히 마치자, 아켈라오는 앞으로 나아가서, 말 없이 가이사 앞에 무릎을 끓었다. 이에황제는 아켈라오가 그 부친을 계승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암시를 주었으나, 최종적인 결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보한 채 그를 다정하게 일으켜 세웠다. 회의를 끝낸 후에가이사는 유언장에 기록된 이들 중의 한 명을 계승자로 임명해야할지, 아니면 이 가문의 많은 식구들의 후원이 필요하므로 아들을 모두에게 통치권을 분할하여 줄 것인가에 대해 오늘 들었던 것과 함께 깊이 숙고하며 하루를 보냈다.

제 2 장
아켈라오가 자기 친족들을 많이 데리고 로마로 갔으나 거기서 안티파테르에 의해 가이사 앞에 고소당하자 니콜라스가 자기를 잘 변호해주어 재판에서 고소자를 이길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1. 아켈라오가 로마로 출발하다
아켈라오는 왕궁[㈜ 혹은 추측컨대 ‘왕국’.]과 가정의 모든 권한을 빌립(Philip)에게 일임하고, 그의 모친과[㈜ 말다케(Malthace).] 친구들인 포플라스(Poplas)와[㈜ 고대.17권. 9:3(219)에는 프톨라스(Ptollas)로 불리워지고 있음.] 톨레미(Ptolemy),[㈜ 헤롯의 절친한 친구이자 행정관. 전쟁. 1권. 24:2, 33:8(443, 667), 2권. 2:3(21).] 그리고 니콜라스(Nicolaus)와[㈜ 다메섹 출신, 헤롯의 또 다른 친구이자 역사가로서 요세푸스의 이 곳에서의 글은 그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해변으로 떠났다. 그의 일행 가운데는 살로메와[㈜ 헤롯의 누이.] 그녀의 아들들은 물론 죽은 헤롯왕의 조카들과 사위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는데,그 들은 겉으로는 왕위 계승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아켈라오의 요구를 받고 그를 지원하기 위해 동행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지난번 성전에서 자행된 불법적인 사태에 대하여 그를 비난하기 위해서 함께 동행하는 것이었다.
2. 행정장관 사비누스가 돈에 매수됨
아켈라오 일행이 가이사랴(Caesarea)에 도착했을 때 수리아(Syria)의 행정장관인 사비누스(Sabinus)가 마중나왔다.[㈜ 고대. 7권. 9:3(221)에는 보다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황제의 지방 재정 담당관리라고 상술됨.] 그는 헤롯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유대로 오는 중에 수리아의 총독인 바루스에게[㈜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퀸틸리우스 바루스(전쟁.1권. 31:5 (617)).] 만류되어 가이사랴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이는 아켈라오가 톨레미를 바루스에게 보내어 간청하기를 사비누스가 취하려는 행동을 못하게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사비누스는 가이사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바루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헤롯왕이 소장했던 보물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성채도 둘러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비누스가 꽤했던 계획에 방해물이었던 바루스가 안디옥(Antioch)으로 돌아가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오기 전에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질서 유지를 위하여 군단급의 부대를 주둔시켰다. (전쟁.2권. 3:1(40)).] 아켈라오 역시 로마로 떠나자 그는 곧바로 예루살렘에 뛰어 올라가 왕궁을 장악해 버렸다.또 그는 성채들도 장악하기 위하여 각 성채의 지배자들과 왕의 파견관리들을 소집해서 왕의 재산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켈라오의 명령에 복종하는 각 성채의 지배자들은 아켈라오보다 가이사의 명령에 더 충실하게 복종을 해야 한다고 고백하면서 사비누스에 굴하지 않고 신의를 굳게 지켜 재산을 보호했다.
3. 왕위 계승의 도전자인 안디바
한편 왕위를 계승하려는 또 한 사람이 로마로 출발했으니 그는 바로 안디바(Antipas)이다. 그는 헤롯왕이 유언장에 자기를 지명했다고 하면서 나중에 수정 삽입된 부분보다 더 실효성이크다고 주장했다.[㈜ 전쟁.1권. 32:7 (646).] 그는 살로메뿐 아니라 로마에 아켈라오와 함께 출발한 일행 중에도 아켈라오의 많은 친척들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큰 힘을 얻었다. 그래서 안디바는 모친과[㈜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항해를 했던 말다케. 전쟁. 2권. 2:1(14).] 니콜라스의 형제이며, 헤롯에게서 가장 높이 신임받고 영향력이큰 톨레미와 함께 떠났다. 그러나 안디바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은 대단히 달변가인 이레나이우스(Irenaeus)였다. 이러한 배경을 믿고 그는 형인 아켈라오의 권리나 헤롯왕의 유언중에 추가된 부분에서 아켈라오에게 복종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마에 도착하자 아켈라오를 백안시하던 친척들은 안디바를지지한다고 전달해 왔다. 최종적인 그들의 목표는 어느 누구의지배도 아닌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만을 받길 원했으나, 만일 로마가 반대할 경우에는 차선책으로 안디바를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4. 로마에서의 경쟁자들
이러한 의도에서 사비누스는 가이사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 아켈라오를 비난하는 한편 안디바는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또 살로메와 그녀의 친구들도 가이사에게 고소장을 만들어 제소했다.그후 아켈라오도 자신의 당위성을 요약해서 정리한 서신을[㈜ 다른 판에서는 ‘(공개적인) 설명.’] 톨레미를 통해 부친의 인장반지와 서신(유언장)과 함께 가이사에게 보냈다. 이에 가이사는 양측의 주장을 서면을 통해 읽었고,그외에도 헤롯의 자녀들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유대왕국이 넓고일년 수입이 대단히 많은 것 등 여러 가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또 가이사는 바루스와 사비누스가 이 일에 관해서 보낸 서신을 읽은 후 로마에 있는 주요 인사들 앞에서 제소자들이 말할 기회를 주도록 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 맨 앞좌석에는 카이우스(Caius)가 앉았는데, 그는 아그립바(Agrippa)의 아들과 가이사의 딸 율리아(Julia)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가이사가 양자로 입양한 사람이다.
5. 살로메의 아들 안티파테르가 아켈라오를 고소하다
곧, 살로메(Salome)의 아들이자, 아켈라오(Archelaus)의 반대파 중 가장 유능한 변사(辯士)인 안티파테르(Antipter)가아켈라오의 고소인으로 일어서서 변론을 시작했다. “아켈라오가 겉으로 볼 때는 이제사 왕위를 청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미 오랫동안 왕으로서 행동했습니다. 아켈라오는 당시 폐하가(Caesar)가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것을 단지 이용하고 있었고, 계승에 관한 폐하의 결정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그는 왕관을 머리에 쓰지도 않았으면서 당당하게 왕위에 앉아 백성들에게 왕으로 행세하였으며, 마음대로 군대의 계급을 바꾸고, 승진시켰으며, 백성들이 주권자로 행세하는 그에게 요구했던 모든 소청들을 들어주었고, 그의 아버지가 심각한 범죄 때문에 감옥에 보냈던 자들을 석방시킨 것을보면 그가 이미 왕으로 행세한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짓을 했으면서도, 그가 이미 실제적으로는 사용해 왔던 왕권을 폐하께 간청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폐하를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칭호(titles)를 주는 자로 만들고 있는것입니다. 제가 아켈라오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더 깊은 이유는 아켈라오는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아침에는 자기 아버지를 위하는 척하고, 낮에는 슬픈 표정을 하면서, 밤에는 방탕할 정도로술을 마시는 등 위선적인 태도까지 취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의 민중 폭동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 백성들이 분노해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변론의 요점을 계속해서 이야기 하면서,성전 주변에서 아켈라오에게 학살된 많은 유대인들과 축제 때문에 성전에 와서 희생 제물을 드릴 때 오히려 자기 자신들이 희생되었던 불쌍한 백성들의 참사를 강하게 강조하였다.[㈜ 참).눅13:1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의 피에다 섞은데 대한 고소.] 이제까지아무리 무자비한 적군이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였다 해도 이보다 더 많이 성전에 시체가 쌍인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켈라오의 부친이 그를 왕위에 옹립시키려는 생각조차 갖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의 부친이 아켈라오의 이러한 만행을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친은 신체보다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는 날까지도 유언장에 누구의 이름을자기의 계승자로 기록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그는 건강한 육체와 올바른 정신으로 있을 때 기초했던 유언장에 지정된 그 계승자에게서는 어떤 결함도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무효인 결정에 대해 어떤 사람이 압력을 가한다 해도아켈라오는 불법적으로 취임선서를 전국에 선언해 버릴 것입니다. 폐하께 왕위를 받기 전에도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일단 왕위를 받고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6. 다메섹의 니콜라스가 변호하다
이러한 투로 자세히 설명하고, 대부분의 관계자들을 자기가한 고소의 각 항목에 대한 증인으로 내세운 후 안티파테르는 자기의 변론을 끝맺는다. 그때 아켈라오를 변호하는 니콜라스(Nicolas)가 일어났다. 그는 성전에서 있었던 학살은 어쩔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때 숨진 사람들은 왕궁의 적일 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조정자이신 가이사의 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켈라오에게 씌워진 다른 혐의 사실에 대해서, 그는 아켈라오의 고소인들은 그들 스스로 아켈라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유언장은 무엇보다도 가이사가 계승을 승인하는 자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자기 권력을 세계의 지배자(가이사)에게 양도할 만큼 건전한 사람은 상속자를 선택하는 데있어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권력을 수여하는 자의선택에서 보여준 현명함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선택함에 있어 올바르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아구스도의 당황
자기 편인 니콜라스가 그의 변론을 완전히 마치자, 아켈라오는 앞으로 나아가서, 말 없이 가이사 앞에 무릎을 끓었다. 이에황제는 아켈라오가 그 부친을 계승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암시를 주었으나, 최종적인 결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보한 채 그를 다정하게 일으켜 세웠다. 회의를 끝낸 후에가이사는 유언장에 기록된 이들 중의 한 명을 계승자로 임명해야할지, 아니면 이 가문의 많은 식구들의 후원이 필요하므로 아들을 모두에게 통치권을 분할하여 줄 것인가에 대해 오늘 들었던 것과 함께 깊이 숙고하며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