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0장 가이우스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라고 명령하자 이에 따라 페트로니우스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대하여

 


 제 10 장



가이우스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라고 명령하자 이에 따라 페트로니우스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대하여



1. 가이우스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울 것을 명령하다 [주후 40년]



 가이우스 황제의 인륜을 거스리는 오만은 끝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가 신으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그렇게 숭배받기를 원했으며 모든 나라의 저명인사들을 탄압했는데, 유대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페트로니우스를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하였다. 만일 유대인들이 저항할 경우에는 모두 죽이되, 살아 남은 자는 노예로 삼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계속 내려짐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세 부대를이끌고[㈜ 고대.18권. 8:2(262)에 보면 단 두개의 군단이 있었다고 나와 있다(그리고 필로의 Leg.ad Caium 31, 전쟁,2권. 11:72(207) \”그의 군대의 절반\” ; 그 당시 수리아에 4개 군단이 있었다.] 보조부대로 수리아인들과 함께 안디옥을 출발해서 유대를 향해 진군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설사 믿는 사람이 있다 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였다. 어쨌든 전쟁의 소문은 계속 퍼져나갔고 군대는 이미 톨레마이스에 도착해 있었다.



2. 톨레마이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물과 유리알과 같은 모래



 톨레마이스는 대평원(Great Plain)의 어귀에 세워진 갈릴리의 해안 도시였는데 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서 동으로는 약 60퍼얼롱 거리에 갈릴리인 지역이 있고, 남으로는 120퍼얼롱 거리에 갈멜(Carmel)이 있고, 북으로는 100퍼얼롱 거리에 그 지역주민들이 \”두로인의 사닥다리\”라 부르는 산맥이 놓여 있었다. 도시로부터 약 2퍼얼롱 떨어진 거리에 벨레우스라는[㈜ 타키투스의 글에는 벨루스(Belus)로 나와 있다.] 조그마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둑에는 멤논의 무덤이 있었고, 그가까이 약 100규빗 너비의 좀 특별한 지역이 있었다. 그곳은 유리알 같은 모래를 계속 만들어 내는 조그마한 웅덩이였다. 많은사람들이 배를 가져와서 웅덩이에서 그 모래를 퍼가면 바람에 의해서 모래로 다시 채워진다. 보통 모래가 흘러들지만, 일단 이곳 웅덩이로 들어오면 유리같은 물질로 바뀌었다. 더 신기한것은 그 웅덩이에서 유리같은 모래가 넘쳐서 웅덩이 밖으로 나오게되면, 다시 전과 같은 보통 모래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 곳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3. 페트로니우스가 가이사의 동상을 세우려 하다



 유대인들은 부인, 자녀 할 것 없이 모두 데리고 톨레마이스 평원에 모여 페트로니우스에게 조상들의 율법을 존중해 준다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간청했다. 수많은 군중들의 애원에 못이겨 그는 그 동상과 군대를 이끌고 톨레마이스를 떠나 갈릴리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모든 지도자급의 사람들과 함께 백성들을 디베랴로 불러 모았다. 그 곳에서그는 로마의 권력과 황제의 명령을 힘주어 말하면서 그들의 요구가 무모한 것임을 지적했다. 즉 모든 피지배 국가들이 그의 요구대로 각 도시에 자기네들의 신상과 나란히 가이사의 동상을 세웠기 때문에 유독 유대인만이 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반역에 해당하며 황제를 모욕하는 것으로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것이었다.



 4. [동상을 세우지 말 것을 요청하는 유대인의 애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줄 것을 호소하며, 자신들의 인간의 형상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이라도 성전이나 그 외의 어느 곳에도 세울 수 없다고 하자 페트로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도 역시 나의 주인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 법을 어기고 너희들을 그냥 둔다면 나는 죽게 될 것이지만 그 죽음은 정당한 것이 될 것이다. 너희들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건 나로 인한 것이아니라, 나를 보낸 자로 인한 것이다. 나 역시 너희들처럼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에 대해 백성들은 자기들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견뎌내겠다고 외쳐댔다. 백성들의 말을들은 후 페트로니우스는 이와 같이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가이사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루에 두 번씩 가이사와 로마인들을 위해 제사를 드려왔지만[㈜ 아피.2권. 6(77)을 각주와 함께 참조하라. 이 본문 구절로부터 우리는 황제를 위한 제물이 아침과 저녁으로 부분적으로 나뉘어 드려졌던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만일 그 동상을 꼭 세우겠다면, 먼저 유대인 모두를죽여 희생제사를 드려야 할 것이라며 부인과 자녀들까지 모두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비교할데 없는 강한 자기 종교에의 헌신과 단호한 결사적 태도에 페트로니우스는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동정심마저 느끼게 되었다.그래서 그는 결정을 유보하고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5. [페트로니우스가 동상을 세우지 않기로 결심하다]



 다음날 그는 귀족들과 개인적인 면담을 가진 후[㈜ 고대.18권. 8:3(269)이하. 이러한 후기의 회의는 디베랴(Tiberias)에서 개최되었다.] 백성들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이 처한 입장을 설명하면서 간청하기도 하고충고조로 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위협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으며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전 국토가 파종을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가 파종기였는데 백성들은 50일 동안을[㈜ 고대. 18권. 8:3(272)에 의하면 40일로 나와 있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페트로니우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결국 그는 백성들을 모아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낫겠다. 하느님이 도와서 내가 가이사를 설득할 수 있다면, 나와너희 모두는 살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가이사가 노를 발하면 차라리 이 많은 생명 대신 내가 죽겠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군대를 모아 톨레마이스를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서둘러서 유대 원정의 결과와 유대인들의 호소를 담은 소식을 가이사에게로 전했다. 또한 가이사가 유대 나라와 그 백성을 몰살시키고 싶지 않다면 그들의 율법을 보장해 주고 명령을 철회해야 할 것이라는,권고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가이우스는 명령 불복종으로 즉시페트로니우스를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전달하던 사람이 사나운 날씨로 인해 바다에서 석 달 동안이나 묶여 버렸다. 반면에 바로 그때 가이우스의 사망을 알리는다른 사신은 운좋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페트로니우스는 가이우스의 부음을 자신의 사형선고 소식보다 27일이나 먼저 접하게 되었다.[㈜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업무에 관한 설명에 있어서는 고대. 18권이 전쟁.2권보다 훨씬 더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행운의 강우(絳雨)와 유대인들을 대표하여 아그립바가 가이우스(Gaius)와 중재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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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 제 10장 가이우스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라고 명령하자 이에 따라 페트로니우스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0 장


    가이우스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라고 명령하자 이에 따라 페트로니우스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대하여


    1. 가이우스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울 것을 명령하다 [주후 40년]


     가이우스 황제의 인륜을 거스리는 오만은 끝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가 신으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그렇게 숭배받기를 원했으며 모든 나라의 저명인사들을 탄압했는데, 유대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페트로니우스를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하였다. 만일 유대인들이 저항할 경우에는 모두 죽이되, 살아 남은 자는 노예로 삼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계속 내려짐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세 부대를이끌고[㈜ 고대.18권. 8:2(262)에 보면 단 두개의 군단이 있었다고 나와 있다(그리고 필로의 Leg.ad Caium 31, 전쟁,2권. 11:72(207) “그의 군대의 절반” ; 그 당시 수리아에 4개 군단이 있었다.] 보조부대로 수리아인들과 함께 안디옥을 출발해서 유대를 향해 진군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설사 믿는 사람이 있다 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였다. 어쨌든 전쟁의 소문은 계속 퍼져나갔고 군대는 이미 톨레마이스에 도착해 있었다.


    2. 톨레마이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물과 유리알과 같은 모래


     톨레마이스는 대평원(Great Plain)의 어귀에 세워진 갈릴리의 해안 도시였는데 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서 동으로는 약 60퍼얼롱 거리에 갈릴리인 지역이 있고, 남으로는 120퍼얼롱 거리에 갈멜(Carmel)이 있고, 북으로는 100퍼얼롱 거리에 그 지역주민들이 “두로인의 사닥다리”라 부르는 산맥이 놓여 있었다. 도시로부터 약 2퍼얼롱 떨어진 거리에 벨레우스라는[㈜ 타키투스의 글에는 벨루스(Belus)로 나와 있다.] 조그마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둑에는 멤논의 무덤이 있었고, 그가까이 약 100규빗 너비의 좀 특별한 지역이 있었다. 그곳은 유리알 같은 모래를 계속 만들어 내는 조그마한 웅덩이였다. 많은사람들이 배를 가져와서 웅덩이에서 그 모래를 퍼가면 바람에 의해서 모래로 다시 채워진다. 보통 모래가 흘러들지만, 일단 이곳 웅덩이로 들어오면 유리같은 물질로 바뀌었다. 더 신기한것은 그 웅덩이에서 유리같은 모래가 넘쳐서 웅덩이 밖으로 나오게되면, 다시 전과 같은 보통 모래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 곳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3. 페트로니우스가 가이사의 동상을 세우려 하다


     유대인들은 부인, 자녀 할 것 없이 모두 데리고 톨레마이스 평원에 모여 페트로니우스에게 조상들의 율법을 존중해 준다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간청했다. 수많은 군중들의 애원에 못이겨 그는 그 동상과 군대를 이끌고 톨레마이스를 떠나 갈릴리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모든 지도자급의 사람들과 함께 백성들을 디베랴로 불러 모았다. 그 곳에서그는 로마의 권력과 황제의 명령을 힘주어 말하면서 그들의 요구가 무모한 것임을 지적했다. 즉 모든 피지배 국가들이 그의 요구대로 각 도시에 자기네들의 신상과 나란히 가이사의 동상을 세웠기 때문에 유독 유대인만이 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반역에 해당하며 황제를 모욕하는 것으로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것이었다.


     4. [동상을 세우지 말 것을 요청하는 유대인의 애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줄 것을 호소하며, 자신들의 인간의 형상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이라도 성전이나 그 외의 어느 곳에도 세울 수 없다고 하자 페트로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도 역시 나의 주인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 법을 어기고 너희들을 그냥 둔다면 나는 죽게 될 것이지만 그 죽음은 정당한 것이 될 것이다. 너희들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건 나로 인한 것이아니라, 나를 보낸 자로 인한 것이다. 나 역시 너희들처럼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에 대해 백성들은 자기들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견뎌내겠다고 외쳐댔다. 백성들의 말을들은 후 페트로니우스는 이와 같이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가이사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루에 두 번씩 가이사와 로마인들을 위해 제사를 드려왔지만[㈜ 아피.2권. 6(77)을 각주와 함께 참조하라. 이 본문 구절로부터 우리는 황제를 위한 제물이 아침과 저녁으로 부분적으로 나뉘어 드려졌던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만일 그 동상을 꼭 세우겠다면, 먼저 유대인 모두를죽여 희생제사를 드려야 할 것이라며 부인과 자녀들까지 모두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비교할데 없는 강한 자기 종교에의 헌신과 단호한 결사적 태도에 페트로니우스는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동정심마저 느끼게 되었다.그래서 그는 결정을 유보하고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5. [페트로니우스가 동상을 세우지 않기로 결심하다]


     다음날 그는 귀족들과 개인적인 면담을 가진 후[㈜ 고대.18권. 8:3(269)이하. 이러한 후기의 회의는 디베랴(Tiberias)에서 개최되었다.] 백성들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이 처한 입장을 설명하면서 간청하기도 하고충고조로 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위협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으며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전 국토가 파종을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가 파종기였는데 백성들은 50일 동안을[㈜ 고대. 18권. 8:3(272)에 의하면 40일로 나와 있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페트로니우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결국 그는 백성들을 모아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낫겠다. 하느님이 도와서 내가 가이사를 설득할 수 있다면, 나와너희 모두는 살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가이사가 노를 발하면 차라리 이 많은 생명 대신 내가 죽겠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군대를 모아 톨레마이스를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서둘러서 유대 원정의 결과와 유대인들의 호소를 담은 소식을 가이사에게로 전했다. 또한 가이사가 유대 나라와 그 백성을 몰살시키고 싶지 않다면 그들의 율법을 보장해 주고 명령을 철회해야 할 것이라는,권고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가이우스는 명령 불복종으로 즉시페트로니우스를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전달하던 사람이 사나운 날씨로 인해 바다에서 석 달 동안이나 묶여 버렸다. 반면에 바로 그때 가이우스의 사망을 알리는다른 사신은 운좋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페트로니우스는 가이우스의 부음을 자신의 사형선고 소식보다 27일이나 먼저 접하게 되었다.[㈜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업무에 관한 설명에 있어서는 고대. 18권이 전쟁.2권보다 훨씬 더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행운의 강우(絳雨)와 유대인들을 대표하여 아그립바가 가이우스(Gaius)와 중재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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