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20장 케스티우스가 네로에게 사절을 보낸 것과 다메섹인들이 그들 중에 사는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케스티우스를 쫓아가기를 (중단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의 방어를 위해 물자를 준비하고 군대에 많은 지휘관 자리를 만들고 특별히 이

 


제 20 장



케스티우스가 네로에게 사절을 보낸 것과 다메섹인들이 그들 중에 사는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케스티우스를 쫓아가기를 (중단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의 방어를 위해 물자를 준비하고 군대에 많은 지휘관 자리를 만들고 특별히 이 책의 저자인 요세푸스를 지휘관으로 세운 것과 요세푸스 행적에 관한 설명



1. 유력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포기함



 케스티우스가 이런 재난들을 당한 후에 유대의 유명인사들은 침몰해 가는 배를 버리듯이 예루살렘을 포기하였다. 코스토바루스(Costobarus)와 사울(Saul)은[㈜ 전쟁. 2권. 17:4(418).] 형제지간이었는데, 아그립바 왕의 군대 장관인 야키무스의 아들 빌립(Philip)과[㈜ 빌립(Philip)은 왕궁의 포위후 예루살렘으로 탈출했다(자서. 11 (46)이하).] 함께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케스티우스에게 갔다. 그러나 이때 왕궁에 갇혀있다가 그들과 같이 도망하지 못했던 안티파스(Antipas)가후에 반역자들에게 살해당한 것은 후에 살펴보자.[㈜ 전쟁. 4권. 3:4(140).] 한편 케스티우스는 자원한 사울과 그의 친구들을 아가야(Achaia)에 있는 네로에게 보내 그들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는 그 자신이 당할 어려움을 경감시키고자 전쟁 발발의 모든 책임을 플로루스에게 돌렸다.



 2.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



 그러는 동안 다메섹(Damascus) 주민들은 로마군의 패배 소식을 접하자 그들과 같이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살륙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메섹 주민들은 유대인들을 의심하여 그들을 살해하려고 공공 경기장에 한꺼번에 모이게 하고 오랫동안 가두어 두었다.이 일을 함에 있어 조그마한 장애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부인들에게까지 비밀로 했다. 대부분의 부인들이 유대종교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민들은 부인들에게 이일을 비밀로 하는 방법이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드디어 그들은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 유대인들이 갇혀 있는데다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한 시간내에 10,0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죽였던 것이다.



 3. [엘르아살이 교활한 수법으로 권한을 이어받음]



 한편 케스티우스를 따라 추격하던 유대인들은 추격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다. 그들은 로마 지지자들을 무력과설득으로써 그들과 합세하도록 하고 성전에 많은 수를 모아 놓고전쟁에 대비하여 많은 장군들을 임명하였다. 거기서 고리온(Gorion)의 아들 요셉(Joseph)과 대제사장 아나누스가[㈜ 전 대제사장. 아나누스(Ananus)의 아들인 아나누스(부친은 신약성경의 아나누스인 것 같다)는 사두개파로 아그립바Ⅱ세에 의해 대제사장에 임명되었고 석달후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James)를 처단한 그의 행위로 인해 면직되었다(고대.20권. 9:1.(197)이하). 그의 타고난 난폭한 성격은 유대전쟁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과는 이상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나누스는 열심당(Zealots)에 반하는 온건파의 지도자였고,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자 마자 페리클리스(Pericles, 아테네의 정치가(495?-429B.C)-역자 주)에 해당하는 찬사를 받았다(전쟁. 4권. 5:2(319)이하).] 예루살렘 안에 일어나는 특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 등의 모든 문제를 다스리는 지배자로 뽑혔다. 유대인들은 엘르아살(Eleazar)이 로마군과 케스티우스로부터 얻은 많은 돈과 탈취물, 또는 많은 공금의 횡령으로 재산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그 직분에 뽑지 않은 것은 부하들을 자신의 경호원처럼 생각하며, 또한 그의 태도에서 폭군의 기질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엘르아살의 돈을 원했으므로 엘르아살은교활한 수법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속였고 결국 백성들은 모든공무를 그의 권한으로 넘겨주었다.



 4. [전쟁을 대비해 유대 각 지역의 통치자를 선택함]



 유대인들은 또한 이두매(Idumea)를 통치할 다른 장군들도 뽑았는데 대제사장 중의 하나인 사피아스(Sapphias)의 아들 예수(Jesus)와 대제사장의[㈜ 이러한 이름의 대제사장은 알려지고 있지 않음 : 허드슨(Hudson)은 엘르아살(Eleazar)은 유대전쟁의 주된 책임자로써 이미 언급된 아나니아의 아들로 본다 (전쟁.2권. 17:2(409)).] 아들 엘르아살을 군대장관으로 선택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두매의 통치자로 니게르(Niger)를 임명했는데 그는 요단강 건너 페라이아(Peraea)에 속한 일족(一族)으로 페라이아인(Peraean)이라[㈜ 전쟁. 2권. 19:2 (520).] 불려졌다. 그는 앞에 거명한 장관들에게 복종해야 했다.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에도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몬의 아들 요셉을 여리고의 장군으로, 므낫세(Manasseh)를 페라이아의 장군으로, 에세네(Essene)파인 요한을 룻다(Lydda), 엠마오(Emmaus), 욥바(Joppa)와 더불어 담나(Thamna) 지역의 장군으로 임명하였다.[㈜즉, 그의 영토는 유대의 북쪽과 서쪽이었음 : Thamna는 에브라임(Ephraim) 산악지역에 있었다 ; 엠마오(Emmaus)에 관해서는 전쟁.2권. 5:1(71) 각주를 보라.]



 한편 마티아스(Mattias)의 아들인 요한(Hohn)은 고프나(Gophna)와 아크라베타(Acrabetta)의 소왕국의[㈜ 즉 유다의 북동쪽임.] 통치자로임명되었고, 마티아스(Matthias)의[㈜ 역사가. 그의 생애. 전쟁.2권. 2:5(29)에서 요세푸스는 자신의 임무가 아주 평화로운 것 – 불평불만자들을 무장 해제하는 것-이었다라고 전한다. 요세푸스는 자신에 관한 역사에 착수하여 직접 기술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의 성격과 문체상의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다. 요세푸스가 지금까지 고용한 유능한 조수(아피.1권.9(50)의 특성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아들 요세푸스(Josep-hus)는 양(兩)갈릴리의 통치자가 되었다. 가말라(Gamala)[㈜ 참).자서. 14(79).] 역시 그 지역 최강의 도시였는데 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5. 요세푸스가 갈릴리의 사법 조직을 만들다



 이에 모든 지도자들은 그들이 맡은 일을 열심히 그리고 신중을 기해서 처리했다. 갈릴리로 오게 된 요세푸스는 그곳 주민들의 호의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다면그는 다른 일을 잘못한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요세푸스는 유력인사들에게 그의 권력을 일부넘겨준다면 그들을 확실한 동료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유대인들 중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한다면 다수로부터 호의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가장 신중하고 나이가 지긋한 70인을 뽑아서 [㈜ 참). 자서. 14(79).]



 그들로 전 갈릴리를 통치하게 하고, 매 도시마다 재판관 7명을 두어 소규모 분쟁들을 해결하게 했다. 그러나 큰 문제나 생사에 관련된 것들은 요세푸스와 70인에게 가져오게 했다.



 6. 요세푸스가 그 지역을 강화하다



 또한 요세푸스가 백성들 사이의 문제에 관한 것들을 법률로써 해결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외부의 폭력에 대한 안전 조치를취하려 하였다. 그는 로마군이 갈릴리를 침입하리라는 것을 알자 요타파타(Jotapata), 베르사베(Bersabe), 셀라메(Selame),카파레코(Caphareccho), 야파(Japha), 시코프(Sigoph), 이타비리온(Itabyrion)이라고 불리는 산[㈜ 다볼산.] 타리카이아(Taricha-eae), 디베랴(Tiberias) 근처의 적당한 곳에 성벽을 구축했다.그는 또 하부 갈릴리(the Lower Galillee)에 위치한 게네사렛 호수(the lake of Gehnessar) 근처 동굴 주변에도 성벽을 쌓았다.그는 아카바로(Acchabaron) 바위라 불리는 암석 지역, 세프(Seph), 얌니드(Jamnith), 메로(Mero)뿐 아니라 상부 갈릴리지역 (the upper Galilee)도 성벽을 쌓았고,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지역의 셀류키아(Seleucia), 소가나이아(Sogana-ea), 가말라(Gamala)도[㈜ 이러한 요새 목록은 어떤 다른 본문과 함께 자서. 187 이하에서 반복되고 있음:\”동굴\”(caves)은 아르벨라(Arbela) 동굴로 여겨짐(전쟁.1권. 16:2 (304)이하를 보라).] 요새화 시켰다. 그러나 세포리스(Sepphoris)만큼은 주민들 스스로 성벽을 쌓으라고 했다. 이는그들이 부유하며 어떤 명령이 없어도 전투 준비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자서전<9(30)>에서 세포리스가 항상 친로마 성향을 보였다고 하는 기록과 상충된다 : 참). 전쟁.2권 18:11(511)(로마군들에게 베푼 환영사).] 요세푸스의 지시에 따라 레위의 아들인 요한이 성벽을 쌓은 기스칼라(Gischala)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와는 반대로 「자서전 (the Life」에서 요한은 요세푸tm의 적이며 요세푸스로부터 자문을 구하지도 않고서 기스칼라(Gischala)를 요새화 했다고 주장함(전쟁. 2권. 3:2 (45), 10:2(189) 이하).] 그러나 나머지 요새를 구축할 때는 그는 다른 일꾼들과 같이 노동했고, 거기에 필요한 명령들을 현지에서 내렸다. 그는또 갈릴리에서 군대를 소집했는데 100,000명 이상의 젊은이들로서 그들을 위해 요세푸스가 수집하고 준비했던 재래 무기들로무장시켰다.



7. 로마의 전술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군대를 훈련시키다



 그러나 다른 업무가 아직 남아있었다. 요세푸스는 로마 병력이 싸워 이기기 어렵고 명령 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을 지속적으로 훈련시켜야 그렇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부하들에게 가르치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명령 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은 장교들이 많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로마군의 방법대로 그의 군대를 더 많은 단위로 만들고많은 장교들을 임명하였다. 그는 또 병사들을 여러 계급으로 구분하고 십부장(decurion), 백부장(centurion), 천부장(tribu-nes)의 지도를 받게 했다. 요세푸스는 게다가 더 큰 부대의 장군들도 두었다. 그는 또한 병사들로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 방법,나팔소리에 의해 출동하고 퇴각하는 방법, 군대의 양익(兩翼)을확장하는 방법, 패배한 쪽을 지원하는 방법, 습격당한 곳의 수비에 가담하는 방법들을 가르쳤다. 그는 또 계속적으로 정신무장과 신체의 강인함에 관심을 두고 가르쳤다. 게다가 로마군인들은 신체적으로 강건하고 정신적으로 용감하여 이 두 면을 가지고 전투하며, 또 그들은 살 만한 모든 곳을 정복할 만큼 눈에 띄게 질서 정연하다고 요세푸스는 강조하였다. 그는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싸움이 일어나기 전일지라도 그들이 전쟁에서 준수해야 할 질서를 시험해 볼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깊이 빠져 있었던 죄악, 즉 도둑질, 강도질, 약탈, 동족을 사기치는 죄악들과 이익 때문에 가까운 친구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버렸는지 여부를 전쟁 직전이라도 시험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전사(戰士)들이선한 양심을 가졌을 때에 가장 승리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사생활이 악한 이들은 공격하는 적 뿐만 아니라 하느님 자신도그들의 적대자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8. 요세푸스는 계속하여 군사들을 훈계하였다



 한편으로 전쟁에 대비해 충분한 군사를 뽑았다. 즉 보병 60,000명,[㈜ 전쟁. 2권. 20:4(567)의 \”100,000명 이상\”과 대조해 보라 : 아마도 나머지 병사들은 아직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기병 350명과 그가 가장 신뢰하는 4,500명의 용병(?兵)이 있었고, 그의 호위병으로서 600명이 더 있었다. 각 도시들은 용병을 제외하고는 그의 나머지 군사들을 쉽게 유지해 나갔다. 각각의 도시는 그 주민들의 반을 군대에 보냈고 나머지 반은군인들을 위한 식량 수급을 위해서 남았다. 즉 장정의 반은 군역에 나머지 반은 부역에 동원되었는데 집에 남은 동료들이 보내주는 식량에 대한 대가로서 군역에 종사하는 자들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TN-catholicdictionary3-C2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제 2권 제 20장 케스티우스가 네로에게 사절을 보낸 것과 다메섹인들이 그들 중에 사는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케스티우스를 쫓아가기를 (중단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의 방어를 위해 물자를 준비하고 군대에 많은 지휘관 자리를 만들고 특별히 이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20 장


    케스티우스가 네로에게 사절을 보낸 것과 다메섹인들이 그들 중에 사는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케스티우스를 쫓아가기를 (중단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의 방어를 위해 물자를 준비하고 군대에 많은 지휘관 자리를 만들고 특별히 이 책의 저자인 요세푸스를 지휘관으로 세운 것과 요세푸스 행적에 관한 설명


    1. 유력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포기함


     케스티우스가 이런 재난들을 당한 후에 유대의 유명인사들은 침몰해 가는 배를 버리듯이 예루살렘을 포기하였다. 코스토바루스(Costobarus)와 사울(Saul)은[㈜ 전쟁. 2권. 17:4(418).] 형제지간이었는데, 아그립바 왕의 군대 장관인 야키무스의 아들 빌립(Philip)과[㈜ 빌립(Philip)은 왕궁의 포위후 예루살렘으로 탈출했다(자서. 11 (46)이하).] 함께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케스티우스에게 갔다. 그러나 이때 왕궁에 갇혀있다가 그들과 같이 도망하지 못했던 안티파스(Antipas)가후에 반역자들에게 살해당한 것은 후에 살펴보자.[㈜ 전쟁. 4권. 3:4(140).] 한편 케스티우스는 자원한 사울과 그의 친구들을 아가야(Achaia)에 있는 네로에게 보내 그들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는 그 자신이 당할 어려움을 경감시키고자 전쟁 발발의 모든 책임을 플로루스에게 돌렸다.


     2.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


     그러는 동안 다메섹(Damascus) 주민들은 로마군의 패배 소식을 접하자 그들과 같이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살륙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메섹 주민들은 유대인들을 의심하여 그들을 살해하려고 공공 경기장에 한꺼번에 모이게 하고 오랫동안 가두어 두었다.이 일을 함에 있어 조그마한 장애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부인들에게까지 비밀로 했다. 대부분의 부인들이 유대종교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민들은 부인들에게 이일을 비밀로 하는 방법이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드디어 그들은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 유대인들이 갇혀 있는데다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한 시간내에 10,0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죽였던 것이다.


     3. [엘르아살이 교활한 수법으로 권한을 이어받음]


     한편 케스티우스를 따라 추격하던 유대인들은 추격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다. 그들은 로마 지지자들을 무력과설득으로써 그들과 합세하도록 하고 성전에 많은 수를 모아 놓고전쟁에 대비하여 많은 장군들을 임명하였다. 거기서 고리온(Gorion)의 아들 요셉(Joseph)과 대제사장 아나누스가[㈜ 전 대제사장. 아나누스(Ananus)의 아들인 아나누스(부친은 신약성경의 아나누스인 것 같다)는 사두개파로 아그립바Ⅱ세에 의해 대제사장에 임명되었고 석달후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James)를 처단한 그의 행위로 인해 면직되었다(고대.20권. 9:1.(197)이하). 그의 타고난 난폭한 성격은 유대전쟁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과는 이상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나누스는 열심당(Zealots)에 반하는 온건파의 지도자였고,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자 마자 페리클리스(Pericles, 아테네의 정치가(495?-429B.C)-역자 주)에 해당하는 찬사를 받았다(전쟁. 4권. 5:2(319)이하).] 예루살렘 안에 일어나는 특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 등의 모든 문제를 다스리는 지배자로 뽑혔다. 유대인들은 엘르아살(Eleazar)이 로마군과 케스티우스로부터 얻은 많은 돈과 탈취물, 또는 많은 공금의 횡령으로 재산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그 직분에 뽑지 않은 것은 부하들을 자신의 경호원처럼 생각하며, 또한 그의 태도에서 폭군의 기질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엘르아살의 돈을 원했으므로 엘르아살은교활한 수법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속였고 결국 백성들은 모든공무를 그의 권한으로 넘겨주었다.


     4. [전쟁을 대비해 유대 각 지역의 통치자를 선택함]


     유대인들은 또한 이두매(Idumea)를 통치할 다른 장군들도 뽑았는데 대제사장 중의 하나인 사피아스(Sapphias)의 아들 예수(Jesus)와 대제사장의[㈜ 이러한 이름의 대제사장은 알려지고 있지 않음 : 허드슨(Hudson)은 엘르아살(Eleazar)은 유대전쟁의 주된 책임자로써 이미 언급된 아나니아의 아들로 본다 (전쟁.2권. 17:2(409)).] 아들 엘르아살을 군대장관으로 선택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두매의 통치자로 니게르(Niger)를 임명했는데 그는 요단강 건너 페라이아(Peraea)에 속한 일족(一族)으로 페라이아인(Peraean)이라[㈜ 전쟁. 2권. 19:2 (520).] 불려졌다. 그는 앞에 거명한 장관들에게 복종해야 했다.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에도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몬의 아들 요셉을 여리고의 장군으로, 므낫세(Manasseh)를 페라이아의 장군으로, 에세네(Essene)파인 요한을 룻다(Lydda), 엠마오(Emmaus), 욥바(Joppa)와 더불어 담나(Thamna) 지역의 장군으로 임명하였다.[㈜즉, 그의 영토는 유대의 북쪽과 서쪽이었음 : Thamna는 에브라임(Ephraim) 산악지역에 있었다 ; 엠마오(Emmaus)에 관해서는 전쟁.2권. 5:1(71) 각주를 보라.]


     한편 마티아스(Mattias)의 아들인 요한(Hohn)은 고프나(Gophna)와 아크라베타(Acrabetta)의 소왕국의[㈜ 즉 유다의 북동쪽임.] 통치자로임명되었고, 마티아스(Matthias)의[㈜ 역사가. 그의 생애. 전쟁.2권. 2:5(29)에서 요세푸스는 자신의 임무가 아주 평화로운 것 – 불평불만자들을 무장 해제하는 것-이었다라고 전한다. 요세푸스는 자신에 관한 역사에 착수하여 직접 기술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의 성격과 문체상의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다. 요세푸스가 지금까지 고용한 유능한 조수(아피.1권.9(50)의 특성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아들 요세푸스(Josep-hus)는 양(兩)갈릴리의 통치자가 되었다. 가말라(Gamala)[㈜ 참).자서. 14(79).] 역시 그 지역 최강의 도시였는데 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5. 요세푸스가 갈릴리의 사법 조직을 만들다


     이에 모든 지도자들은 그들이 맡은 일을 열심히 그리고 신중을 기해서 처리했다. 갈릴리로 오게 된 요세푸스는 그곳 주민들의 호의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다면그는 다른 일을 잘못한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요세푸스는 유력인사들에게 그의 권력을 일부넘겨준다면 그들을 확실한 동료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유대인들 중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한다면 다수로부터 호의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가장 신중하고 나이가 지긋한 70인을 뽑아서 [㈜ 참). 자서. 14(79).]


     그들로 전 갈릴리를 통치하게 하고, 매 도시마다 재판관 7명을 두어 소규모 분쟁들을 해결하게 했다. 그러나 큰 문제나 생사에 관련된 것들은 요세푸스와 70인에게 가져오게 했다.


     6. 요세푸스가 그 지역을 강화하다


     또한 요세푸스가 백성들 사이의 문제에 관한 것들을 법률로써 해결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외부의 폭력에 대한 안전 조치를취하려 하였다. 그는 로마군이 갈릴리를 침입하리라는 것을 알자 요타파타(Jotapata), 베르사베(Bersabe), 셀라메(Selame),카파레코(Caphareccho), 야파(Japha), 시코프(Sigoph), 이타비리온(Itabyrion)이라고 불리는 산[㈜ 다볼산.] 타리카이아(Taricha-eae), 디베랴(Tiberias) 근처의 적당한 곳에 성벽을 구축했다.그는 또 하부 갈릴리(the Lower Galillee)에 위치한 게네사렛 호수(the lake of Gehnessar) 근처 동굴 주변에도 성벽을 쌓았다.그는 아카바로(Acchabaron) 바위라 불리는 암석 지역, 세프(Seph), 얌니드(Jamnith), 메로(Mero)뿐 아니라 상부 갈릴리지역 (the upper Galilee)도 성벽을 쌓았고,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지역의 셀류키아(Seleucia), 소가나이아(Sogana-ea), 가말라(Gamala)도[㈜ 이러한 요새 목록은 어떤 다른 본문과 함께 자서. 187 이하에서 반복되고 있음:”동굴”(caves)은 아르벨라(Arbela) 동굴로 여겨짐(전쟁.1권. 16:2 (304)이하를 보라).] 요새화 시켰다. 그러나 세포리스(Sepphoris)만큼은 주민들 스스로 성벽을 쌓으라고 했다. 이는그들이 부유하며 어떤 명령이 없어도 전투 준비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자서전<9(30)>에서 세포리스가 항상 친로마 성향을 보였다고 하는 기록과 상충된다 : 참). 전쟁.2권 18:11(511)(로마군들에게 베푼 환영사).] 요세푸스의 지시에 따라 레위의 아들인 요한이 성벽을 쌓은 기스칼라(Gischala)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와는 반대로 「자서전 (the Life」에서 요한은 요세푸tm의 적이며 요세푸스로부터 자문을 구하지도 않고서 기스칼라(Gischala)를 요새화 했다고 주장함(전쟁. 2권. 3:2 (45), 10:2(189) 이하).] 그러나 나머지 요새를 구축할 때는 그는 다른 일꾼들과 같이 노동했고, 거기에 필요한 명령들을 현지에서 내렸다. 그는또 갈릴리에서 군대를 소집했는데 100,000명 이상의 젊은이들로서 그들을 위해 요세푸스가 수집하고 준비했던 재래 무기들로무장시켰다.


    7. 로마의 전술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군대를 훈련시키다


     그러나 다른 업무가 아직 남아있었다. 요세푸스는 로마 병력이 싸워 이기기 어렵고 명령 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을 지속적으로 훈련시켜야 그렇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부하들에게 가르치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명령 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은 장교들이 많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로마군의 방법대로 그의 군대를 더 많은 단위로 만들고많은 장교들을 임명하였다. 그는 또 병사들을 여러 계급으로 구분하고 십부장(decurion), 백부장(centurion), 천부장(tribu-nes)의 지도를 받게 했다. 요세푸스는 게다가 더 큰 부대의 장군들도 두었다. 그는 또한 병사들로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 방법,나팔소리에 의해 출동하고 퇴각하는 방법, 군대의 양익(兩翼)을확장하는 방법, 패배한 쪽을 지원하는 방법, 습격당한 곳의 수비에 가담하는 방법들을 가르쳤다. 그는 또 계속적으로 정신무장과 신체의 강인함에 관심을 두고 가르쳤다. 게다가 로마군인들은 신체적으로 강건하고 정신적으로 용감하여 이 두 면을 가지고 전투하며, 또 그들은 살 만한 모든 곳을 정복할 만큼 눈에 띄게 질서 정연하다고 요세푸스는 강조하였다. 그는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싸움이 일어나기 전일지라도 그들이 전쟁에서 준수해야 할 질서를 시험해 볼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깊이 빠져 있었던 죄악, 즉 도둑질, 강도질, 약탈, 동족을 사기치는 죄악들과 이익 때문에 가까운 친구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버렸는지 여부를 전쟁 직전이라도 시험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전사(戰士)들이선한 양심을 가졌을 때에 가장 승리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사생활이 악한 이들은 공격하는 적 뿐만 아니라 하느님 자신도그들의 적대자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8. 요세푸스는 계속하여 군사들을 훈계하였다


     한편으로 전쟁에 대비해 충분한 군사를 뽑았다. 즉 보병 60,000명,[㈜ 전쟁. 2권. 20:4(567)의 “100,000명 이상”과 대조해 보라 : 아마도 나머지 병사들은 아직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기병 350명과 그가 가장 신뢰하는 4,500명의 용병(?兵)이 있었고, 그의 호위병으로서 600명이 더 있었다. 각 도시들은 용병을 제외하고는 그의 나머지 군사들을 쉽게 유지해 나갔다. 각각의 도시는 그 주민들의 반을 군대에 보냈고 나머지 반은군인들을 위한 식량 수급을 위해서 남았다. 즉 장정의 반은 군역에 나머지 반은 부역에 동원되었는데 집에 남은 동료들이 보내주는 식량에 대한 대가로서 군역에 종사하는 자들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