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제 2장 아스글론에서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학살된 것과 베스파시안이 톨레마이스로 온 것에 대하여

 


 제 2 장



아스글론에서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학살된 것과 베스파시안이 톨레마이스로 온 것에 대하여



1. 유대인들의 아스글론(Ascalon) 공격 실패



 유대인들은 기대치 않았던 성공을 하자 마치 행운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그들의 열기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먼 곳까지도 전쟁을 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정예 군사를 모으고 아스글론으로 나아갔다. 이곳은 오래된 도시로 예루살렘에서 520퍼얼롱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약 59마일(stade는 frulong보다 더 길다) ; 직선거리가 약 40마일 이상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거리만큼이나 그들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로는 Gaium과 같이 \’Legat\’ 205(Cohn)에서 화해할 수 없는 불화를 언급하고 있다 ; 유대인들은 최근에 그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전쟁.2권. 18:1 (460)). 독립이 된 것은 주전 104년 이후부터였다.] 제1차 공격 목표로 삼았다. 3명의 가장 유력한 인사가 이원정을 이끌었는데 그들은 페라이아의 니게르(Niger of Per-aea), 바벨론의 실라(Silas the Babylonian),[㈜ 이 두 사람은 케스티우스(Cestius)와의 첫 전투에서 명성을 떨쳤다. 2권. 19:2 (520) ; 니게르(Niger)는 이두매(Idumaea)의 총독이거나 전 총독이었다. 2권. 20:4 (566).] 에세네파 요한(John the Essene)이었다.[㈜ 최근에 유대 북서 지역 책임자(장군)로 임명되었다. 전쟁. 2권. 5(567).] 아스글론은 견고한 성벽을 가졌지만 수비대가 거의 없으며 안토니우스(Antonius) 휘하에 있는 수비대도 일개 보병대와 일개 기병대만으로[㈜ 보조 기병대.] 구성되었다.



 2. [실패하게 된 원인]



 유대인들은 빠른 속도로 걸음을 재촉해 마치 그들이 인근 기지에서 온 것처럼 그곳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유대인들의 공격기미를 알고 준비하고 있다가 그의 기병대를 데리고 나와 유대인들의 많은 수와 높은 사기에도 놀라지 않고 그들의첫 공격을 막아 그 성벽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유대인을 격퇴했다. 이것은 고참 대 신참, 기병대 보병, 잘 정렬된 부대와 넝마같이무질서한 부대가 싸우는 꼴이었고, 한쪽은 잘 훈련된 병사들로서 사령관의 최소한의 신호에도 절도있게 행동했지만, 다른 한쪽은 어떤 전술에서라기 보다는 개개인의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싸워보기도 전에 결정난 싸움이었고, 그래서 유대군은 곧 어려움이 봉착했다. 유대군의 맨 앞줄이 기병대로 인해 흩어지자 큰 혼란이 일어나서 성벽으로 계속 밀리게되어 후미에 있는 사람들과 엉클어져 도망하며, 자기 편에 의해밟혀 죽기도 하였다. 결국 전 군대가 기병대에 압도되어 평야로흩어졌다. 이곳은 아주 넓어서 기병대가 전투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이런 상황은 로마군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여 유대인들이 크게 살육당했다. 기병대가 말머리를 돌려 도망자들을따라와서 함께 헝클어져 도망하는 무리를 쳐부수어 그들을 많이 살해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어느 방향으로 도망을 치더라도 기병대들은 그들을 궁지로 몰아 말을 달리며 쉽게 겨냥할수 있는 표적들에 창을 던지며 유린했다. 유대인들은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큰 곤경 속에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음을 느껴야했고 반면 로마 군인들은 그들이 소수임에도 적의 숫자를 능가하는 확실한 승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그렇게 빨리 패배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운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속 싸웠다. 반면 로마군들은 그들의 승리에 박차를 가하면서 지칠 줄 몰랐다. 그래서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유대군의 전열에서 두 장군인 요한과 실라(Silas)를 포함하여 10,000명이 전사하였다. 남은 자들은 거의 모두 부상당한 채 살아남은 한 명의 장군인 니게르와 함께 이두매의 소읍인(a countrytown) 카알리스(Chaallis)로[㈜ 확인되지 않음.] 피하였다. 반면 로마군들은 이교전(交戰)에서 소수의 부상자만이 있었을 뿐 피해의 정도는 미미하였다.



 3. 아스글론에 대한 유대인의 두번째 공격이 격퇴되다



 그러나 그런 재난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전혀 분쇄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패주(敗走)하면서도 용기는 더욱 배가(倍加)되었다.그들은 발에 걸리는 시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에 있었던 대승리를 회상함으로써 두번째 재난으로 유혹되어 이끌려 들어갔다.또한 상처를 치료할 시간도 없이 그들은 모든 병력을 다시 소집하고 더 무섭고 더 강하게 아스글론을 습격하러 되돌아 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무경험과 낮은 전투력 때문에 이번에도 전번과 같이 패배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Antonius)는 통로에복병을 두고 유대인들이 이 덫에 무심결에 빠지게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기병대에 포위되어 8,000명 이상을 잃게 되었다. 니게르를 포함한 남은 자들은 도망하였는데 니게르는 퇴각 중에도 용감무쌍하게 활약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도 두드러졌는데 적이 심히 압박해오자 쫓겨서 벨세덱(Belzedek)이라는[㈜ 확인되지 않음.] 강력한 요새 지역으로 몰려 들어가야 했다. 안토니우스 군대는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에 그들의 힘을 허비할 수 없고, 적의 장군이며 가장 용감한 영웅을 살려 도망케할 수도 없어서 성벽에 불을 질렀다. 망대가 화염으로 휩싸이는것을 보자 로마군들은 니게르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고 믿고 기뻐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니게르는 망대에서 빠져나와 요새의구석에 있는 동굴에 숨어 있었다. 3일후 애통해 하며 장사지내기 위해 그의 시체를 찾던 친구들이 그들 밑에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무심코 들었다. 모든 유대인들은 그가 다시 나타나자 예기치 않았던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다가올 전투에 그들의 장군이 되게 하고자 남겨둔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루살렘 공성(攻城)시 열심당에 의해 살해됨(전쟁.4권. 6:1(359)).]



4. 베스파시안이 안디옥에서 톨레마이스로 올라가다



 베스파시안은 안디옥에서 그의 군사들을 움직였다. 그 도시는수리아의 수도이고 로마 세계의 도시 중에서 그 규모와 풍요에있어서 세번째[㈜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임을 의심할 자가 없었다. 이때 그는 아그립바왕이 그와 그의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베스파시안은 안디옥에서 톨레마이스(Ptolmais)로 진군했다. 갈릴리의 세포리스 주민들은 톨레마이스까지 베스파시안을 마중나왔다. 세포리스 주민들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막강한 로마에 대한 안목 때문에 베스파시안이 오기 전에 이미 카이세니우스 갈루스(Caesennius Gallus)와 서약하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로마군이 주둔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자서. 7(394)(세포리스(Sepphoris)는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에게 요청하여 주둔군을 얻었다)와 함께 전쟁.2권. 18:11(510)(카이세니우스(Caesennius)는 제12사단의 사령관이었다)를 참조.] 지금 그들은 최고사령관을 정중히 환영하면서 그들의 동족을 대항하여 적극적인원조를 하기로 그와 약속했다. 세포리스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베스파시안 장군은 유대인들이 습격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 대비하여 즉각 격퇴할 만한 기병대와 보병대를 주둔시켰다.그는 참으로 세포리스를 잃게 되면 임박한 전쟁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위험이 될거라고 생각하였다. 그 도시는 갈릴리의 가장 큰 도시였고 적지(敵地) 중 예외적으로 강한 위치에 있는 요새이므로 그는 전 성읍에 걸쳐 수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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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권 제 2장 아스글론에서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학살된 것과 베스파시안이 톨레마이스로 온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2 장


    아스글론에서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학살된 것과 베스파시안이 톨레마이스로 온 것에 대하여


    1. 유대인들의 아스글론(Ascalon) 공격 실패


     유대인들은 기대치 않았던 성공을 하자 마치 행운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그들의 열기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먼 곳까지도 전쟁을 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정예 군사를 모으고 아스글론으로 나아갔다. 이곳은 오래된 도시로 예루살렘에서 520퍼얼롱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약 59마일(stade는 frulong보다 더 길다) ; 직선거리가 약 40마일 이상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거리만큼이나 그들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로는 Gaium과 같이 ‘Legat’ 205(Cohn)에서 화해할 수 없는 불화를 언급하고 있다 ; 유대인들은 최근에 그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전쟁.2권. 18:1 (460)). 독립이 된 것은 주전 104년 이후부터였다.] 제1차 공격 목표로 삼았다. 3명의 가장 유력한 인사가 이원정을 이끌었는데 그들은 페라이아의 니게르(Niger of Per-aea), 바벨론의 실라(Silas the Babylonian),[㈜ 이 두 사람은 케스티우스(Cestius)와의 첫 전투에서 명성을 떨쳤다. 2권. 19:2 (520) ; 니게르(Niger)는 이두매(Idumaea)의 총독이거나 전 총독이었다. 2권. 20:4 (566).] 에세네파 요한(John the Essene)이었다.[㈜ 최근에 유대 북서 지역 책임자(장군)로 임명되었다. 전쟁. 2권. 5(567).] 아스글론은 견고한 성벽을 가졌지만 수비대가 거의 없으며 안토니우스(Antonius) 휘하에 있는 수비대도 일개 보병대와 일개 기병대만으로[㈜ 보조 기병대.] 구성되었다.


     2. [실패하게 된 원인]


     유대인들은 빠른 속도로 걸음을 재촉해 마치 그들이 인근 기지에서 온 것처럼 그곳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유대인들의 공격기미를 알고 준비하고 있다가 그의 기병대를 데리고 나와 유대인들의 많은 수와 높은 사기에도 놀라지 않고 그들의첫 공격을 막아 그 성벽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유대인을 격퇴했다. 이것은 고참 대 신참, 기병대 보병, 잘 정렬된 부대와 넝마같이무질서한 부대가 싸우는 꼴이었고, 한쪽은 잘 훈련된 병사들로서 사령관의 최소한의 신호에도 절도있게 행동했지만, 다른 한쪽은 어떤 전술에서라기 보다는 개개인의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싸워보기도 전에 결정난 싸움이었고, 그래서 유대군은 곧 어려움이 봉착했다. 유대군의 맨 앞줄이 기병대로 인해 흩어지자 큰 혼란이 일어나서 성벽으로 계속 밀리게되어 후미에 있는 사람들과 엉클어져 도망하며, 자기 편에 의해밟혀 죽기도 하였다. 결국 전 군대가 기병대에 압도되어 평야로흩어졌다. 이곳은 아주 넓어서 기병대가 전투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이런 상황은 로마군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여 유대인들이 크게 살육당했다. 기병대가 말머리를 돌려 도망자들을따라와서 함께 헝클어져 도망하는 무리를 쳐부수어 그들을 많이 살해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어느 방향으로 도망을 치더라도 기병대들은 그들을 궁지로 몰아 말을 달리며 쉽게 겨냥할수 있는 표적들에 창을 던지며 유린했다. 유대인들은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큰 곤경 속에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음을 느껴야했고 반면 로마 군인들은 그들이 소수임에도 적의 숫자를 능가하는 확실한 승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그렇게 빨리 패배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운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속 싸웠다. 반면 로마군들은 그들의 승리에 박차를 가하면서 지칠 줄 몰랐다. 그래서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유대군의 전열에서 두 장군인 요한과 실라(Silas)를 포함하여 10,000명이 전사하였다. 남은 자들은 거의 모두 부상당한 채 살아남은 한 명의 장군인 니게르와 함께 이두매의 소읍인(a countrytown) 카알리스(Chaallis)로[㈜ 확인되지 않음.] 피하였다. 반면 로마군들은 이교전(交戰)에서 소수의 부상자만이 있었을 뿐 피해의 정도는 미미하였다.


     3. 아스글론에 대한 유대인의 두번째 공격이 격퇴되다


     그러나 그런 재난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전혀 분쇄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패주(敗走)하면서도 용기는 더욱 배가(倍加)되었다.그들은 발에 걸리는 시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에 있었던 대승리를 회상함으로써 두번째 재난으로 유혹되어 이끌려 들어갔다.또한 상처를 치료할 시간도 없이 그들은 모든 병력을 다시 소집하고 더 무섭고 더 강하게 아스글론을 습격하러 되돌아 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무경험과 낮은 전투력 때문에 이번에도 전번과 같이 패배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Antonius)는 통로에복병을 두고 유대인들이 이 덫에 무심결에 빠지게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기병대에 포위되어 8,000명 이상을 잃게 되었다. 니게르를 포함한 남은 자들은 도망하였는데 니게르는 퇴각 중에도 용감무쌍하게 활약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도 두드러졌는데 적이 심히 압박해오자 쫓겨서 벨세덱(Belzedek)이라는[㈜ 확인되지 않음.] 강력한 요새 지역으로 몰려 들어가야 했다. 안토니우스 군대는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에 그들의 힘을 허비할 수 없고, 적의 장군이며 가장 용감한 영웅을 살려 도망케할 수도 없어서 성벽에 불을 질렀다. 망대가 화염으로 휩싸이는것을 보자 로마군들은 니게르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고 믿고 기뻐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니게르는 망대에서 빠져나와 요새의구석에 있는 동굴에 숨어 있었다. 3일후 애통해 하며 장사지내기 위해 그의 시체를 찾던 친구들이 그들 밑에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무심코 들었다. 모든 유대인들은 그가 다시 나타나자 예기치 않았던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다가올 전투에 그들의 장군이 되게 하고자 남겨둔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루살렘 공성(攻城)시 열심당에 의해 살해됨(전쟁.4권. 6:1(359)).]


    4. 베스파시안이 안디옥에서 톨레마이스로 올라가다


     베스파시안은 안디옥에서 그의 군사들을 움직였다. 그 도시는수리아의 수도이고 로마 세계의 도시 중에서 그 규모와 풍요에있어서 세번째[㈜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임을 의심할 자가 없었다. 이때 그는 아그립바왕이 그와 그의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베스파시안은 안디옥에서 톨레마이스(Ptolmais)로 진군했다. 갈릴리의 세포리스 주민들은 톨레마이스까지 베스파시안을 마중나왔다. 세포리스 주민들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막강한 로마에 대한 안목 때문에 베스파시안이 오기 전에 이미 카이세니우스 갈루스(Caesennius Gallus)와 서약하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로마군이 주둔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자서. 7(394)(세포리스(Sepphoris)는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에게 요청하여 주둔군을 얻었다)와 함께 전쟁.2권. 18:11(510)(카이세니우스(Caesennius)는 제12사단의 사령관이었다)를 참조.] 지금 그들은 최고사령관을 정중히 환영하면서 그들의 동족을 대항하여 적극적인원조를 하기로 그와 약속했다. 세포리스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베스파시안 장군은 유대인들이 습격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 대비하여 즉각 격퇴할 만한 기병대와 보병대를 주둔시켰다.그는 참으로 세포리스를 잃게 되면 임박한 전쟁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위험이 될거라고 생각하였다. 그 도시는 갈릴리의 가장 큰 도시였고 적지(敵地) 중 예외적으로 강한 위치에 있는 요새이므로 그는 전 성읍에 걸쳐 수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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