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제 7장 베스파시안은 가바라 시를 점령한 후 요타파타로 진군하여 오랫동안 포위 공격한 후 그 도시를 한 변절자의 배신으로 점령한 것에 대하여

 


제 7 장



베스파시안은 가바라 시를 점령한 후 요타파타로 진군하여 오랫동안 포위 공격한 후 그 도시를 한 변절자의 배신으로 점령한 것에 대하여



1. 베스파시안이 가바라(Gabara)를 장악하고 파괴시킴



 베스파시안의 첫 목표물은 가바라 시였다. 그는 첫 공격으로 도시를 장악했는데 거기에는 전투할 만한 투사가 없다는 것을알았다. 도시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로마군들은 어린이나 장정이나 가리지 않고 모든 남자들을 죽였는데 유대국에 대한 증오와 케스티우스가 당한 모욕을 되씹었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안은 도시를 불지른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인근 모든 부락과 마을들을 불태웠다. 어떤 마을은 사람들이 다 도망하고 한명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어떤 마을에는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베스파시안은 남아있는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2. 요세푸스가 모종의 지시들을 담은 편지를 예루살렘에 보냄



 요세푸스가 디베랴로 피난해 가자 그 도시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디베랴 사람들은 그가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면 절대 도망해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하게 그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는 유대인의 운명이 파국을 향하고 있다고 예견했고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굴복하여 구원얻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로마의 용서를 바라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버리고 그에게 맡겨진 명령권을 수치스럽게 포기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권력자들에게 사건의 상황을 정확히 적어 편지를 보내기로 결정했으며,적군의 병력을 과장해서 겁먹게 하거나 과소평가해서 겁없이 뛰어들게 하지 않도록 정확한 상황을 그대로 적었다. 편지 내용에는 또한 권력자들이 화평을 원한다면 지체없이 결과를 알려줄것과 계속 전쟁하기를 원한다면 로마군을 대항할 만한 병력을 그에게 보내달라는 것으로 급히 전령에게 주어 예루살렘에 급파했다.



3. 요세푸스의 요타파타 입성으로 침체된 유대인의 사기가 올라감



 베스파시안은 적들의 강력한 근거지였던 요타파타에 적들이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타파타를 정복하고 싶어졌다. 그는보병과 기병을 각각 한 부대씩 보내어 먼저 갈 길을 평탄케 하고 돌 많은 산길을 고르게 했다. 이것은 보병이나 산을 타는 부대에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가바라(Gabara)로부터 요타파타(Jotapata)까지의 거리는 약40스타디온으로 자서.45(234)에서는 다소 적은 수치로 표시하였다 : 정남(正南) 쪽 6마일의 거리임.] 4일만에 그들의 임무가 완수되었고 넓은 길이 그들의 군대를 위해 마련되었다. 5일째 되는날은 아르테미시우스 달(the month Artemisius) 21일 [주후 67년][㈜ 이 숫자에 대해서는 다소 미심쩍다. 요타파타가 47일간의 공성(攻城)후(316) 파네무스(Panemus)(전쟁.3권 7;36(339)) 첫째날에 싸움을 하였다는 주장과 조화되기는 어렵다. 니이제(Niese)의 계산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우스(Artemisius)의 21일은 주후 67년 6월 8일 이다.]인데 요세푸스는 디베랴를 급히 떠나 요타파타로 들어갔다. 그가 도착하자 침체되기만 했었던 유대인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그런데 어떤 망할 자가 베스파시안에게 가서 장군(요세푸스)의 이동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고 베스파시안이 그 도시를 빨리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요타파타가 함락되고 요세푸스를 생포할 수만 있다면 모든 유대를 장악하기 쉬울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베스파시안은 이 소식을 듣고, 적들 중에 가장 슬기롭다고 이름난 요세푸스가 제 발로 감옥과 같은 요타파타로 들어간 것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곧 플라키두스와 뛰어난 힘과 능력의 소유자인 십부장 아이부티우스(Aebutius)에게[㈜ 아그립바(Agrippa)의 통치시, Aebutius는 전쟁의 초기단계에 대평원의 감시를 맡았고 요세푸스와 만났다(자서. 24(114)이하) : 그의 이전의 요세푸스와의 면식은 확실히 이러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1,000명의 기병을 주어 그 곳을 포위하고 요세푸스가 몰래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주어 급파하였다.



 4. [베스파시안이 요타파타를 2중 3중으로 포위함]



 베스파시안은 다음날 그들을 따라 그의 군대를 총동원해 저녁까지 행군한 결과 요타파타 바로 앞에 도착했다. 베스파시안은그의 군대를 도시 북쪽까지 끌고가서, 가능한 한 적들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협박이 될 만큼 선명하게 보이는 위치를 찾아서 시에서 7퍼얼롱 되는 언덕에 진을 쳤다. 사실 그 광경은 유대인들에게 즉시로 효과가 있었는데, 아무도 감히 성벽 밖으로 나와 모험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로마군은 행군을 마친후에 즉각적인 공격을 하려고 준비하지 않고, 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 없게 보병의 전초선을 2중으로 하고 그 외부로 기병을 3중으로 하여 요타파타를 포위했다. 이런 전술은 도망갈 희망이 없어진 유대인에게 더욱 용감한 행동을 하게끔 하였다. 전쟁에서 궁지에 몰리면 필요한 만큼 그 사기가 올라가는 것이다.



 5. 요타파타에서의 첫 접전



 다음날 공격이 가해졌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성 밖에서 로마군과 마주보는 곳에 진쳤다.[㈜ 유대인들은 그 공성(攻城) 초기에 성벽 밖에 진영을 친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단지 적에 대해 그들의 근거를 마련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궁수들과 투석하는 자들과 그의 모든 출중한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적들을 쏘아 대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보병과 함께 수고를 덜들이고도 성벽을 오를 수 있는 곳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요세푸스는 요타파타의 운명이 기울어지려는 것에 놀라서 전 유대인을이끌고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로마군에 맞서 몸을 던져 방어했고, 용감무쌍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피해도 입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절망으로 대담해진 반면 로마군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더 분발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기술적으로 훈련받았고 강력한 반면 유대인들은 그 무모함을 방패로 삼고[㈜ 구절 qravso\” ovplixein(무장할 용기)은 요세푸스에 있어서 다른 회상을 주는 연극인 소포클레스(Sophocles). \’El.\’995이하에서 발췌됨. 참) yuch\’\” ajfei\’n(인색하지 않는 영혼) 전쟁.3권. 7:18(212),Soph. \’El.\’980.] 패기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았다. 전투는 종일 계속되었고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 전투로 로마군 중 13명이 전사했고 많은 부상병이 생겼다. 유대인은 17명이 전사했고 600명이 부상했다.



 6. [첫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유대인들이 끝까지 방어에 힘씀]



 다음날 로마군이 공격했을 때 유대인은 새롭게 공격을 시작했고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것은 전날의 예기치 않았던 성공적인 방어에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군들은 곧바로 승리하지 못한 것을 패배로 생각했기 때문에 수치심에서 전날보다 더 필사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래서 로마군은 5일 동안이나 끊임없이 공격하였고 요타파타에 주둔하고 있는 자들도 더욱기를 쓰고 방어하며 반격하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군의 위력에 의해 위압당하지 않았으며, 로마군은 그들의 목표물이 지금 함락되지 않은 것에 대해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7. 요타파타의 지형



 요타파타는[㈜ 현지명 Jefat(예파트), 탈묻경의 요다파드(Jodaphath)(미쉬나에 따르면 고도(古都)였으며 여호수아(Joshua) 시대 이후에 성벽을 축조했다) :아소키스(Asochis) 고원 북쪽에 있는 언덕에, 가바라(Gabara)와 세포리스(Sepphoris)의 중간 지점에 있다.] 3면이 눈으로 보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골짜기로 에워싸인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었다. 그 도시의 북쪽으로만 산의 돌출부가 경사져 있기 때문에 접근이 가능했다. 그러나 요세푸스도 역시 점령했던 산을 적이 빼앗지 못하도록 도시를 요새화할 때 이쪽 면을 성벽으로 둘러쌌다. 더구나 그 곳은 다른 산들로 둘러싸여서 어느 정도 적당한 곳에 올라 와야만 보일 수 있게 가려져 있었다.



8. 포위 공격의 시작



 베스파시안은 그 휘하의 병력들이 지형의 특징과 유대인의 단호한 결단과 맞서 싸우려면 더욱 더 용감하게 공격하는 길뿐이라고 결심했다. 따라서 그는 장교들을 소집하고 전략을 짰다. 그는 접근이 가능한 성벽과 마주보는 곳에 토성을 쌓기로결정했다. 이에 전 군대가 필요한 물자를 구하러 나갔다. 그래서 마을 주변의 재목들이 있는 산림들이 모두 벌거벗게 되었고많은 돌들이 모아졌다. 그리고 한 부대의 병사들은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이나 돌들을 막기 위해 벼랑 위에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토성 쌓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방어했는데 이것은 방벽에 있는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한편 다른 병사들은 부근의 작은 언덕들을 허물어서 동료들에게 계속 흙을 공급하였다. 한 사람도 게으름 피우는 일없이 이렇게 3가지 일로 분담했다. 그러는 동안 유대인들은 적의 방공호에 온갖 종류의 발사 무기들을 퍼부어댔으므로 적진을 뚫기까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방어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커서[㈜ 혹은 \”연속적인\”] 적들이 일하는 것들을 막을 만큼 공포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9. [베스파시안은 우수한 공격형 무기를 총동원함]



 베스파시안은 모두 160개나 되는 공격 무기를[㈜ 베게티우스(Vegetius) ii : 25에서는 그 당시 (4세기 말) 한 군단에 55대의 노포(弩砲)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스파시안의 3개 군단의 병력에 165대의 이러한 병기가 있었을 것이다.(라이나흐).] 동원하여 요타파타 주위에 배치하고 성벽을 수비하고 있는 자들에게 발사 명령을 내렸다. 일제 사격으로 인한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발사기(the catapults)에서 창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투석기(the sto-ne-projectors)에서는 한 달란트의[㈜ 만일 아틱(Attic) 상업 표준치수를 적용하면 약 Hundredweight- (112파운드(영), 100파운드(10)-역자주)의 3/4.] 무게가 나가는 돌멩이들이 발사되었고, 그밖에 불과 창들의 공격도 있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성벽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공격이 쏟아지는 사정거리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 떼의 아랍 궁수들과 투창수, 투석들도 동시에 일제 사격을 하여 공격력이 보강되었다. 그러나유대인들은 성벽에서 방어하는 것이 저지당하긴 했어도 가만히있지는 않았다. 유대인들은 패거리로 유격대를 짜서 습격하였는데, 적들의 방어벽을 부수고 토성을 쌓는 작업을 하고 있는 로마군을 기습해서 공격했다. 그리고 로마군을 살해하고 토성을 파괴하고 울타리들과 장애물에 불을 질렀다. 결국 베스파시안은 토성이 서로 떨어져 있어 토성과 토성 사이의 빈틈이 유대인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피해의 원인임을 깨닫고 여러 방공호를 통합하여 한꺼번에 군대로 막았으므로 더 이상 유대인들에 의한 피해는 줄어들었다.



10. 요세푸스는 성벽을 높이 쌓음



 토성이 점점 높아져서 맞붙어 싸울 수 있는 높이가 되었다. 요세푸스는 요타파타를 구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큰 어려움을 당할 것으로 생각하고 석공들을 소집하여 성벽을 높이 쌓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석공들은 창과 돌이 많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축조가 불가능하다고 항의하자 요세푸스는 그들을 위해 다음의 보호 조치를 고안해냈다. 그의 명령에따라 성벽에 방책들이 세워졌고 그 위에 금방 벗긴 소의 가죽을 펼쳐 덮어서 공격 무기를 통해 날라오는 돌들이 거기에 맞고 떨어지게 하거나 빗나가게 하였으며, 습기가 있었으므로 로마군이 던진 횃불도 꺼져버렸다.[㈜ 라이나흐는 이러한 방어 방법이 로마군에게 알려졌음을 보여주는 베게티우스 iv : 15의 구절을 인용한다.] 건축자들은 이 차단된 장막 아래에서 안전하게 밤낮 일을 했으므로 20규빗 높이까지 성벽을 쌓아올리고, 거기다 많은 망대들을 세우고 전체를 단단한 흉벽(胸壁)으로 만들었다. 이미 이곳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실망하였다. 요세푸스가 고안한 것들과 주민들의 악착스러움은 로마군들을 당황케 했다.



 11. [요타파타 주민의 대담성에 자극을 받은 베스파시안이 전쟁을 그치게 함]



 베스파시안은 이 전략의 기민성과 요타파타 주민들의 대담성에 자극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쌓은 새로운 요새는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었고, 로마인에 대항하는 공격을 다시 시작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그들은 포위자들과 싸우러 와서 닥치는대로 무엇이나 약탈하고 로마군이 만든 막사에[㈜ 즉 전쟁. 3권 7:9(170)에 묘사된 방법에 의해 보호되었던 제방과는 명확히 다르다(라이나흐).] 불을 질렀다. 베스파시안은 마침내 그의 군대에게 전쟁을 그치라고 명했고,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곳을 봉쇄하여 그 도시를 굶어죽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식량을 차단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자비를 호소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남아서 대항하다 굶어죽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는 이렇게 해서 얼마 동안 기간을둔 후에 공격을 하면 지친 적들을 공격하기 때문에 쉽게 이길 수있다는 계산까지 했다. 따라서 그는 그 도시의 모든 출입구를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했다.



12. [베스파시안의 새로운 전략으로 주민들이 식수난에 허덕임]



 포위된 자들은 식량과 소금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필수품들은 넉넉했으나 식수가 부족했다. 도시 안에는 샘이 없었으므로 주민들은 빗물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도대체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는데 포위당한 계절이 공교롭게도 바로 여름이었다. 그들은 단지 기갈을 생각만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기 소침하였고, 마치식수가 깡그리 바닥난 것처럼 이미 약이 올라 있었다. 요세푸스는 도시에 다른 필수품들이 풍부한 것과 유대인들의 용감한 정신을 보고 로마군이 오랫동안 공격을 지연시키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정량의 식수만을 주민들에게 공급했다. 주민들은 이공급 체계를 실제적인 결핍보다 더 힘들게 생각했다. 자유에 대한억압은 불만이 늘어가게 할 뿐이었다. 마치 그들이 이미 극도의 기갈 상태에 다다른 것처럼 절망 상태에 빠져들었다. 로마군들이 그 곤경을 모르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유대인들이 한 곳에 모여서물을 조금씩 분배받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로마군들은 그곳에 창을[㈜ 헬라어 \”속사포\”(전쟁. 3권. 5:2(80)).] 던져서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다.



13. [베스파시안의 작전을 요세푸스가 역이용함]



 베스파시안은 오래지 않아 물탱크에서 물이 바닥나고 도시는 투항하리라고 기대했다. 요세푸스는 이 기대를 꺾기 위해 많은 물에 적셔진 옷들을 전쟁터 주변에 걸어놓아 한순간 모든 성벽에서 갑자기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로마군들은 마실 것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같이 물을 소비하는 광경을 보고 낙심하며 경악했다. 베스파시안은 기근으로 그곳을 약하게 하려고 했던 생각을 버리고 전투 체제로 전환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바라는 바로 그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과 도시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했기 때문에 기근과 기갈로 죽어가기 보다는 싸우다가 죽기를 원했다.



 14. 식량 공급을 위해 경비가 소홀한 협곡을 이용함



 이 전략후에 요세푸스 자신은 풍부한 물을 얻으려고 다른 고안을 해냈다. 서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서 통과하기 매우 어려운 협곡이 있었는데 그곳은 적들이 보초를 소홀히 하는 곳이었다. 요세푸스는 이 길을 따라 그의 부하 몇 명을 보내 도시 밖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요세푸스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생필품들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성 안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비축할 수 있었다. 전령들은 혹시 밤에 보초들의 눈에 띄게 될경우 개로 착각하도록 하기 위해 네 발로 기고 등에는 가죽을 쓰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다. 나중에 보초들은 이 계략을 알아차리고 협곡을 막았다.



 15. 요세푸스는 도피에 대해 궁리함



 요세푸스는 요타파타가 오래 지탱할 수 없고, 거기 남아있다면 자신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도시의 유력한 인사들과도망할 방법을 숙고했다. 주민들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를 둘러싸고 자기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면서 그들은 요세푸스만을 의지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가 남는 것이 그 도시를 구할 수 있는 한 가지 희망이라고 주장했다. 그들 모두는요세푸스가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전쟁할 마음을 먹었으니그들이 포로로 잡혀 적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요세푸스는 그들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버리고 적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마치 고요할 때 배를 탔다가 폭풍우가 휘몰아치자 배를 버리는 것과 같은 무가치한 일이며, 그가 있었기에 용기를 가진 이 도시를 그가 가버리면 침몰되고 더이상 적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다고 말하였다.



 16. 저지된 요세푸스의 의도



 요세푸스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도피하려던 것을 감추고 그가 심사숙고하여 떠나기로 한 것은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는 또한 자기가 이 도시 안에 있으면 주민들이 아직은 안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자신이 아무도움이 못되고, 만일 도시가 함락된다면 주민들과 함께 아무 의미없이 함께 죽게 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이 포위망을 한번 뚫고 나가게 된다면 외부에서주민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데, 다시 말해 곧바로 갈릴리인들을 모아 로마군을 공격하여 로마군을 사방으로 분산시키게 함으로써 요타파타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기가 그들 옆에 있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며 로마군들은 요세푸스를 포로로잡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보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로마군을 자극하는 효과밖에 되지 않으며, 반면 요세푸스가 도망했다는 것을 로마군들이 알면 그들은 공격의 열기를 상당히 완화시킬 것이라고 주민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세푸스의 말에도 군중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더 열심히 그에게 달라붙을 뿐이었다. 아이들, 노인, 여인들은 젖먹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모두들 요세푸스 앞에 통곡했다. 그들은 요세푸스의 발을 붙들고 그에게 울면서 호소하기를[㈜ e!ivconto kai; meta; kwkutw\’n : 호머. \’일리아드\’ xxii.408(Hector를 애도함)의 회상. 자서. 42(210) 이하에 유사한 사건이 있다.] 남아서 운명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들 모두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안전한 것을 시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생각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요세푸스가 그곳에 함께 있어 주면 그들은 어떤 재해도 그들에게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 [요세푸스는 주민들과 함께 남기로 하고 명예를 위해 희생할 것을 다짐함]



 요세푸스는 그가 굴복한다면 별 일이 없겠지만 그들의 요청을 반대한다면 그를 감금하는 조처가 취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주민들은 떠나려 해도 주민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동정으로 크게 동요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남기로 하고 비장한 각오로 이렇게 말했다.[㈜ 참).전쟁. 3권. 7:5(153).] \”구원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지금이야말로 바로 싸움을 시작할 때입니다. 명예를 위해 그리고 후손들에게 확실히 기억될 영광스러운 업적을 위해, 생명을 희생하는것이야말로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러한 자신의 말에 맞는 행동을 보이면서 그의 용사들과 함께 공격해나갔고 보초들을 분산시키면서 토성 위에 설치한 가죽장막을 찢고, 만들어 놓은 것들에 불을 지르면서 로마군의 진영을 뚫고 들어갔다. 이렇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밤낮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



 18. [베스파시안은 로마군에게 죽기를 각오한 사람과는 싸우지 말 것을 지시함]



 이 공격으로 로마군은 고생했는데 유대인 앞에서 도망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유대인들이 후퇴할 때는 자신들의 무기의 무게들로 인해 추적하는 것도 방해받았다. 반면 유대인들은 항상 적들이 보복하기 전에 해를 입히고 도시 안으로 가서 숨는 기습 작전을 폈다. 이런 것들을 보고 베스파시안은 병사들에게 이런 기습 공격들을 피하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과는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실망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 그리고 상대자가 없이 격렬하게 싸우는 것은 연료없이 타오르는 불길같이 곧꺼지고 말 것이다. 그밖에도 우리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못지 않게 안전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싸움 그 자체가 아니라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안은 이렇게 말한 후 아랍의 궁수들, 수리아의 투창수들과 투석수들만으로 유대인의 공격을 격퇴시켰으며 많은투창, 투석기들을 계속해 사용하였다. 장비들에 의한 격렬한 공격을 받은 유대인들은 낙담했지만 로마군들의 투척 무기의 사정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들에게 무섭게 돌진해 들어가 사력을 다해 싸웠으며, 생명과 손발 등의 사지를 아낌없이 바치며[㈜ 전쟁. 3권. 7:5(153)의 각주와 함께 Soph. \’El\’. 980의 yuch\’\” afeidhvsante(아낌없는 사람의 생명)를 참고.] 동료들이 모두 기진맥진할 때까지 한 마음이 되어 사력을 다해 대항하였다.



19. 공성 망치가 동원됨



 포위 기간이 길어지고 적들이 기습 공격을 계속 감행하자 베스파시안은 위치가 역전되어 그 자신이 포위된 것같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토성이 성벽에 가까워지자 베스파시안은 공성망치(ram)를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배의 돛대처럼 생긴 큰 기둥에 양의 머리 형태로 된 큰 쇠망치를 달아놓은 기구였다. 이것은중간 지점에 기둥의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줄로 연결되어 땅에 고정된 기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선 많은 병사들이 그 망치를뒤로 잡아당겼다가 힘껏 밀면 망치가 앞으로 돌진하며 돌출된 쇠머리 부분이 벽을 난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성망치로 벽을 공격하면 처음에는 충격을 견뎌낸다 할지라도 계속적인 공격에는 아무리 강하고 두꺼운 벽이라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급히 요타파타를 장악하고 싶어했던 베스파시안이 공성망치를사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베스파시안은 오랫동안 봉쇄를 하면서유대군과 맞서 싸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에 로마군들은공성 무기들을 앞으로 가져와서 그 무기들을 그들이 치려고 하는 성벽에 난타할 수 있는 위치에서 이 기계들을 가동시켰다. 거기에 궁수들과 투석수들도 동시에 공격에 가담하였다. 한편 이런 로마군들의 열기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다른 부대는 공성망치를 가져오고 그들 자신과 무기들을 안전하게 보호할가죽으로 덮어씌운 긴 덮개를 설치했다. 그들 자신과 무기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가죽으로 덮어씌운 공성망치로 한번 치자 성벽이 흔들거렸으며 이에 도시 안에 있던 자들은 이미 도시가 장악된 것처럼 날카로운 함성들을 질러댔다.



 20. 로마군의 공성망치의 대응책으로 유대인들은 공격 무기에 불을 지름



 요세푸스는 계속해서 같은 곳을 치게 되면 성벽이 곧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그 기구의 위력을 마비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는 자루에[㈜ 자루는 로마군에 의해 사용됨(라이나흐에 의해 인용됨 Veget. iv :23).] 왕겨를 가득 담아 망치가 때때로[㈜ 혹은 \”계속적으로\”] 치는 것이 보이는 곳에 줄로 달아 내려놓게 했다. 그러면그것이 받는 충격을 완화시켜 강타하는 위력을 없애거나 망치의 머리가 빗나가게 만들었다. 이것은 로마군들에게 큰 방해 요소가되었다. 로마군들이 장비를 돌릴 때마다 치는 곳 바로 밑에 유대인들이 주머니들을 놓아두는 것으로 응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타파타의 성벽은 로마군들이 자루에 달린 줄을 끊거나 긴 장대줄에 갈고리를 달아 주머니를 제거할 때까지는 공격으로 인한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군이 방해물 제거에 성공하자 이 공성 장비는[㈜ 여기서 공성망치로 사용된 ejlevpoli\”는 원래는 데메트리웃그(Demetrius)에 의해 발명된 포병과 보병을 수송하기 위하여 몇 층으로 된 이동식 망대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그 효력을 다시 회복했으며 새로 지은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요세푸스와 그의 동료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불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는 대로 마른 나무를 주워 모아 세 부대로 나누어 로마군을 공격하였으며 공성 무기와 나무로 만든 무기고들과 토성 버팀목에다 불을 질렀다.[㈜ ayavmenoi : 참). 전쟁. 3권. 7:22(234)의 ajravmenoi pu\’r pavlin, 그 의미인 \”불을 켜다\”는 대개 능동태 ajvptein으로 표현되고 중간태로는 (건물에) \”불을 지르다\”로 사용된다.] 로마군들은 화염에 싸인 장비들을 구해낼 수 없었으며 적의 대담함에 멍해져서, 그들이 구할 장비들이 화염에 휩싸이는 것에 아연할 뿐이었다. 마른 불쏘시개에다 역청(bitumem)과 수지(pitch), 유황을 발랐기 때문에 불은 생각보다 더 빨리 사방에서 타올랐다. 로마군들이 그렇게 열심히 공들여 세워놓은 것들은한 시간도 안되어 타버렸던 것이다.



 21. 유대인 영웅들



 이런 상황에서 기억될 만한 특출한 유대인이 있다. 그는 갈릴리 사바(Saba) 출신으로 사메아스(Sameas)의 아들인 엘르아살(Eleazar)이다. 그는 성벽에서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서 망치의 머리 부분을 쳐부술 만큼 온힘을 다해 세게 던졌다. 그리고 뛰어 내려가 적진에서 이 망치를 가지고 성벽 위로 침착하게 올라왔다 그런데 내내 적들의 표적이 되어 무장하지 않은 몸에 화살이 5개나 꽂혔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고 성벽을 기어올라 모든 적들이 그의 용감함을 볼 수 있는 곳에 섰다. 그러나 그는 부상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면서 망치의 머리를 손에 든 채 고꾸라졌다. 그 다음으로 용감했던 사람들로는 갈릴리인으로서 루마(Ruma)[㈜ 지금은 루마(Rumah)라고 하는 곳이며 아소키스 평원의 남쪽에 있는 요타파타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이다.] 출신인 두 형제 네티라스(Net-iran)와 빌립(Philip)이었다. 이들은 제10군단을 향해 돌진해서 로마인들의 전열을 부수어 접전 중이던 군인들이 도망할 정도로 맹렬한 기세로 기습을 가했다.



 22. [베스파시안이 작은 상처를 입고 로마군들은 동요함]



 이러한 용맹스러운 자들에 힘입어 요세푸스와 나머지 백성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습격하여 한 때 패주시켰던 적이 있는[㈜ 전쟁. 3권. 7:21(233).] 제5군단과 제10군단의 장비들과 진영과 토성들에 불을 질렀다.그러자 다른 군단들은 급히 그들의 장비와 불에 잘 타는 모든 물건들을 보이지 않게 숨겼다. 저녁이 되자 로마군들은 전에 강타해서 파괴된 성벽에 망치를 다시 갖다 놓았다. 그때 성벽에 서있던 유대인 보초 한 사람이 맨발로 뛰어나와 베스파시안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사정거리 밖에 있어서 약간의 상처만 입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로마군들이 큰 동요를 일으켰는데, 이는 베스파시안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그가 피흘리는 것을 보고 갑자기 놀랐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곧전 군대에 퍼졌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포위를 풀고 놀라움과 공포에 떨면서 장군에게 몰려들었다. 먼저 티투스가 아버지에 대해 크게 걱정하면서 그곳에 왔다. 그런데 로마의 병사들은 그들의 대장을 아끼는 마음과 그 아들의 비통한 표정 때문에 더욱 혼란이 가중될 뿐이었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아들의 고통을 달래고 군대의 동요를 진정시키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그의 생명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고통에서 벗어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이전보다 더맹렬하게 유대인을 공격하라고 군인들을 격려하였다. 로마 병사들은 우선 그의 장군의 원수를 갚는 것에 용감해졌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성벽을 향해 돌진해 갔다.



23. 저녁에 맹렬한 로마군의 공격을 받음



 요세푸스와 부하들은 투석기에서 쏟아지는 억수같은 공격을 받아 쓰러지면서도 여전히 밀려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무로된 은신처 밑에서 공성 망치를 사용하는 로마 병사들에 대항하여 요세푸스 일당들은 철제 무기로[㈜ 대개는 \’검(劍)의 날\’ : 여기서는 아마도 쇠 화살촉을 의미할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 iv.123).]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그들의 노력은 별로 효과가 없었고 숫자는 계속 줄어가기만 했다. 요세푸스 일당은 적을 볼 수 없는 반면 적들은 그들을 볼 수있었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횃불의 불빛 때문에 대낮처럼 밝아서 적들에게 눈에 띄는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유대인들은 멀리 있어서 보이지 않는 투창 장비들을 피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속사포(速射砲, quick-firer)에서[㈜ 전쟁. 3권. 5:2 (80).] 쏟아지는 창과 돌은 전열(全列)을 쓰러뜨리는 무기였고, 장비에서 쏘아대는 무수히 많은 돌들은[㈜ 즉 liqobovlon(투석기), 라틴어의 ballista(노포), 전쟁.3권. 5:2(80) 라이나흐는 그 무기를 또 다른 형태의 투석기(onager)의 일종으로 본다. 그러나 후기까지 발명되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 성벽에 날아와서 망대의 모서리들을 부쉈다. 참으로 돌들이 얼마나 강하게 쏟아지는지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일들은 이 장비들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성벽에서 요세푸스 옆에 서있던 한 사람은 돌에 맞아 투석기에서 3퍼얼롱 되는 거리까지 목이 날아갔다. 또 낮에 임신한 여인이 집에서 막 나오다 배에 돌이 맞았는데 자궁 속에 있던 아이가 반퍼얼롱이나 날아갔다.[㈜ 요세푸스는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이 투석기들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한 이 장비들은 대단한 소리를 내서 더욱 놀라게 했고 창들이 내는 요란한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라이나흐와 마찬가지로 foberwvtero\”foBero;\”이나 foberwvtato\”로 수정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벽에서 연달아 떨어지는 소리도 있었다. 성읍안에는 죽어가는 희생자들의 신음소리와 합하여 여인들이 공포에 질려 찢어지는 듯한 괴성들이 흘러나왔다. 모든 전장(戰場)주변에는 피가 흐르고 시체더미는 성벽 꼭대기까지 올라갈 만큼쌓였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메아리는 가공(可恐)할 만한 소음을 더하기까지 했다. 간단히 말해 그날 밤보다 더 무시무시한 적은없었던 것 같다. 요타파타(Jotapata)를 수비했던 많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어갔고 부상당했다. 아침이 될 때까지도 성벽을 지키고 싸우기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기계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로마군이 성벽을 오를 통로를 놓기 전에 유대인들은그들의 인력과 무기로 틈을 막고 수비를 계속하였다.



24. 성벽을 오르기 위한 준비



 베스파시안은 밤새 싸워서 지친 병사들에게 약간의 휴식을 준다음, 동이 튼 후 바로 마지막 공격을 하러 군사들을 소집했다.그는 틈을 막고 있는 수비자들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그는 가장 용감한 기병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고, 성벽 허술한 부분의 맞은 편에 3분대로(three divisions) 정렬시켰다.[㈜ 또는 \”세길 깊이(Three deep).\”] 그들은갑옷으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무장하고 창을 꽂고 성벽을 오르는 통로가 놓일 때, 처음 그 성읍으로 들어갈 사람들이었다. 베스파시안은 이들 뒤에 보병들을 두고 성읍이 장악됐을 때 한명도 도망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라이나흐가 제안한 것처럼 전쟁. 3권. 7:24 (255)는 삽입구로 생각된다. 그리고 전투의 순서에 있어서는 전쟁. 3권. 7:24 (256)은 전쟁.3권. 7:24(254) 이후에 직접 따라온다.] 나머지 기병들은 성벽 맞은 편 구릉을 따라 배치시켰다. 또한 후미에는 궁수들을 둥글게 배치하여 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지시했으며, 투석병들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다른 부대들에게는 사다리를 가져와서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벽에 그 사다리를 대 놓도록 했다. 이렇게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허물어진 곳의 수비를 그만두게 될 것이고 남은 자들은 쏟아지는 창의 공격에 압도당하여 공격하기를 포기할 것이다.



25. 요세푸스의 군사 배치



 요세푸스는 그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거기서 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성벽의 견고한 부분에는 지치고 늙은 사람으로 방어하게 하고 손상된 부분에는 부하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 그 자신을 그의 위치에서 싸우게 하려고 각 군에서 추첨으로 뽑은[㈜ 전쟁. 3권. 7:26 (263). 참). (h&elacen)] 6명을 지휘하였다.[㈜ 의미는 조금 의심스럽다. 이 지휘관들은 전쟁.3권. 9:27(270)에 언급된 provmacoi이 있다.] 그는 그의 부하들에게 로마군단이 함성을 지르면 공포에 질리지 않도록 귀를 막고, 창들이 날아오면 무릎 끓고 방패로 몸을 막고, 궁수들의 화살통이 빌 때까지 잠시 물러나 있도록 지시하였고 통로가 만들어지는 순간 뛰어나가 자신들이 가진 장비로써 적과 싸우라고 했다.[㈜ \”기사(engineer)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다 \”(Hamlet, Ⅲ. iv).] 그리고 계속 지시하기를 \”여러분 모두는 고향을 구원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도시가 함락되어,복수하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싸우시오. 적의 손에 노인들이 학살되고 아이들과 여인들도 그런 운명에 곧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해보시오. 이런 위협적인 재난을 생각함으로써 분노를 침입자들에게 터뜨립시다.\”



 26. [요세푸스는 전사(戰士)들의 사기를 위해 여인들을 집에 가둠]



 그렇게 해서 그는 두 부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전투 능력이 없는 무리들인 부녀자와 아이들이 부대가 3중으로 도시를 싼 것을 보았다. 로마군들은 싸움을 위해 처음부터 세워놓은 감시병들을 아직 이동시키지 않고 있었다.[㈜ 전쟁.3권. 7:4(148).] 더욱이 성벽의 밑에는 칼을 든 적들이 있었고, 그들 위에 산등성이에는 무기로 번득였고,더 위쪽으로는 아랍 궁수들의 화살이 여전히 성읍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들은 크게 소리지르며 마치 종말이 이미 임한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요세푸스는 여인들이 울어서 전사(戰士)들의 마음을 약하게 할까봐 여인들을 위협하여 집에 감금했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자기가 맡고 있는 성벽이 허술한 곳으로 가서 사다리를 어느 부분에 가져다 놨는지 상관하지 않고 숨을 죽이고 화살이 쏟아지는 것을 기다렸다.



27. 통로에서의 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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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권 제 7장 베스파시안은 가바라 시를 점령한 후 요타파타로 진군하여 오랫동안 포위 공격한 후 그 도시를 한 변절자의 배신으로 점령한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7 장


    베스파시안은 가바라 시를 점령한 후 요타파타로 진군하여 오랫동안 포위 공격한 후 그 도시를 한 변절자의 배신으로 점령한 것에 대하여


    1. 베스파시안이 가바라(Gabara)를 장악하고 파괴시킴


     베스파시안의 첫 목표물은 가바라 시였다. 그는 첫 공격으로 도시를 장악했는데 거기에는 전투할 만한 투사가 없다는 것을알았다. 도시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로마군들은 어린이나 장정이나 가리지 않고 모든 남자들을 죽였는데 유대국에 대한 증오와 케스티우스가 당한 모욕을 되씹었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안은 도시를 불지른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인근 모든 부락과 마을들을 불태웠다. 어떤 마을은 사람들이 다 도망하고 한명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어떤 마을에는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베스파시안은 남아있는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2. 요세푸스가 모종의 지시들을 담은 편지를 예루살렘에 보냄


     요세푸스가 디베랴로 피난해 가자 그 도시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디베랴 사람들은 그가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면 절대 도망해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하게 그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는 유대인의 운명이 파국을 향하고 있다고 예견했고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굴복하여 구원얻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로마의 용서를 바라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버리고 그에게 맡겨진 명령권을 수치스럽게 포기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권력자들에게 사건의 상황을 정확히 적어 편지를 보내기로 결정했으며,적군의 병력을 과장해서 겁먹게 하거나 과소평가해서 겁없이 뛰어들게 하지 않도록 정확한 상황을 그대로 적었다. 편지 내용에는 또한 권력자들이 화평을 원한다면 지체없이 결과를 알려줄것과 계속 전쟁하기를 원한다면 로마군을 대항할 만한 병력을 그에게 보내달라는 것으로 급히 전령에게 주어 예루살렘에 급파했다.


    3. 요세푸스의 요타파타 입성으로 침체된 유대인의 사기가 올라감


     베스파시안은 적들의 강력한 근거지였던 요타파타에 적들이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타파타를 정복하고 싶어졌다. 그는보병과 기병을 각각 한 부대씩 보내어 먼저 갈 길을 평탄케 하고 돌 많은 산길을 고르게 했다. 이것은 보병이나 산을 타는 부대에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가바라(Gabara)로부터 요타파타(Jotapata)까지의 거리는 약40스타디온으로 자서.45(234)에서는 다소 적은 수치로 표시하였다 : 정남(正南) 쪽 6마일의 거리임.] 4일만에 그들의 임무가 완수되었고 넓은 길이 그들의 군대를 위해 마련되었다. 5일째 되는날은 아르테미시우스 달(the month Artemisius) 21일 [주후 67년][㈜ 이 숫자에 대해서는 다소 미심쩍다. 요타파타가 47일간의 공성(攻城)후(316) 파네무스(Panemus)(전쟁.3권 7;36(339)) 첫째날에 싸움을 하였다는 주장과 조화되기는 어렵다. 니이제(Niese)의 계산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우스(Artemisius)의 21일은 주후 67년 6월 8일 이다.]인데 요세푸스는 디베랴를 급히 떠나 요타파타로 들어갔다. 그가 도착하자 침체되기만 했었던 유대인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그런데 어떤 망할 자가 베스파시안에게 가서 장군(요세푸스)의 이동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고 베스파시안이 그 도시를 빨리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요타파타가 함락되고 요세푸스를 생포할 수만 있다면 모든 유대를 장악하기 쉬울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베스파시안은 이 소식을 듣고, 적들 중에 가장 슬기롭다고 이름난 요세푸스가 제 발로 감옥과 같은 요타파타로 들어간 것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곧 플라키두스와 뛰어난 힘과 능력의 소유자인 십부장 아이부티우스(Aebutius)에게[㈜ 아그립바(Agrippa)의 통치시, Aebutius는 전쟁의 초기단계에 대평원의 감시를 맡았고 요세푸스와 만났다(자서. 24(114)이하) : 그의 이전의 요세푸스와의 면식은 확실히 이러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1,000명의 기병을 주어 그 곳을 포위하고 요세푸스가 몰래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주어 급파하였다.


     4. [베스파시안이 요타파타를 2중 3중으로 포위함]


     베스파시안은 다음날 그들을 따라 그의 군대를 총동원해 저녁까지 행군한 결과 요타파타 바로 앞에 도착했다. 베스파시안은그의 군대를 도시 북쪽까지 끌고가서, 가능한 한 적들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협박이 될 만큼 선명하게 보이는 위치를 찾아서 시에서 7퍼얼롱 되는 언덕에 진을 쳤다. 사실 그 광경은 유대인들에게 즉시로 효과가 있었는데, 아무도 감히 성벽 밖으로 나와 모험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로마군은 행군을 마친후에 즉각적인 공격을 하려고 준비하지 않고, 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 없게 보병의 전초선을 2중으로 하고 그 외부로 기병을 3중으로 하여 요타파타를 포위했다. 이런 전술은 도망갈 희망이 없어진 유대인에게 더욱 용감한 행동을 하게끔 하였다. 전쟁에서 궁지에 몰리면 필요한 만큼 그 사기가 올라가는 것이다.


     5. 요타파타에서의 첫 접전


     다음날 공격이 가해졌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성 밖에서 로마군과 마주보는 곳에 진쳤다.[㈜ 유대인들은 그 공성(攻城) 초기에 성벽 밖에 진영을 친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단지 적에 대해 그들의 근거를 마련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궁수들과 투석하는 자들과 그의 모든 출중한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적들을 쏘아 대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보병과 함께 수고를 덜들이고도 성벽을 오를 수 있는 곳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요세푸스는 요타파타의 운명이 기울어지려는 것에 놀라서 전 유대인을이끌고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로마군에 맞서 몸을 던져 방어했고, 용감무쌍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피해도 입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절망으로 대담해진 반면 로마군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더 분발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기술적으로 훈련받았고 강력한 반면 유대인들은 그 무모함을 방패로 삼고[㈜ 구절 qravso” ovplixein(무장할 용기)은 요세푸스에 있어서 다른 회상을 주는 연극인 소포클레스(Sophocles). ‘El.’995이하에서 발췌됨. 참) yuch'” ajfei’n(인색하지 않는 영혼) 전쟁.3권. 7:18(212),Soph. ‘El.’980.] 패기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았다. 전투는 종일 계속되었고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 전투로 로마군 중 13명이 전사했고 많은 부상병이 생겼다. 유대인은 17명이 전사했고 600명이 부상했다.


     6. [첫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유대인들이 끝까지 방어에 힘씀]


     다음날 로마군이 공격했을 때 유대인은 새롭게 공격을 시작했고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것은 전날의 예기치 않았던 성공적인 방어에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군들은 곧바로 승리하지 못한 것을 패배로 생각했기 때문에 수치심에서 전날보다 더 필사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래서 로마군은 5일 동안이나 끊임없이 공격하였고 요타파타에 주둔하고 있는 자들도 더욱기를 쓰고 방어하며 반격하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군의 위력에 의해 위압당하지 않았으며, 로마군은 그들의 목표물이 지금 함락되지 않은 것에 대해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7. 요타파타의 지형


     요타파타는[㈜ 현지명 Jefat(예파트), 탈묻경의 요다파드(Jodaphath)(미쉬나에 따르면 고도(古都)였으며 여호수아(Joshua) 시대 이후에 성벽을 축조했다) :아소키스(Asochis) 고원 북쪽에 있는 언덕에, 가바라(Gabara)와 세포리스(Sepphoris)의 중간 지점에 있다.] 3면이 눈으로 보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골짜기로 에워싸인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었다. 그 도시의 북쪽으로만 산의 돌출부가 경사져 있기 때문에 접근이 가능했다. 그러나 요세푸스도 역시 점령했던 산을 적이 빼앗지 못하도록 도시를 요새화할 때 이쪽 면을 성벽으로 둘러쌌다. 더구나 그 곳은 다른 산들로 둘러싸여서 어느 정도 적당한 곳에 올라 와야만 보일 수 있게 가려져 있었다.


    8. 포위 공격의 시작


     베스파시안은 그 휘하의 병력들이 지형의 특징과 유대인의 단호한 결단과 맞서 싸우려면 더욱 더 용감하게 공격하는 길뿐이라고 결심했다. 따라서 그는 장교들을 소집하고 전략을 짰다. 그는 접근이 가능한 성벽과 마주보는 곳에 토성을 쌓기로결정했다. 이에 전 군대가 필요한 물자를 구하러 나갔다. 그래서 마을 주변의 재목들이 있는 산림들이 모두 벌거벗게 되었고많은 돌들이 모아졌다. 그리고 한 부대의 병사들은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이나 돌들을 막기 위해 벼랑 위에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토성 쌓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방어했는데 이것은 방벽에 있는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한편 다른 병사들은 부근의 작은 언덕들을 허물어서 동료들에게 계속 흙을 공급하였다. 한 사람도 게으름 피우는 일없이 이렇게 3가지 일로 분담했다. 그러는 동안 유대인들은 적의 방공호에 온갖 종류의 발사 무기들을 퍼부어댔으므로 적진을 뚫기까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방어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커서[㈜ 혹은 “연속적인”] 적들이 일하는 것들을 막을 만큼 공포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9. [베스파시안은 우수한 공격형 무기를 총동원함]


     베스파시안은 모두 160개나 되는 공격 무기를[㈜ 베게티우스(Vegetius) ii : 25에서는 그 당시 (4세기 말) 한 군단에 55대의 노포(弩砲)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스파시안의 3개 군단의 병력에 165대의 이러한 병기가 있었을 것이다.(라이나흐).] 동원하여 요타파타 주위에 배치하고 성벽을 수비하고 있는 자들에게 발사 명령을 내렸다. 일제 사격으로 인한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발사기(the catapults)에서 창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투석기(the sto-ne-projectors)에서는 한 달란트의[㈜ 만일 아틱(Attic) 상업 표준치수를 적용하면 약 Hundredweight- (112파운드(영), 100파운드(10)-역자주)의 3/4.] 무게가 나가는 돌멩이들이 발사되었고, 그밖에 불과 창들의 공격도 있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성벽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공격이 쏟아지는 사정거리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 떼의 아랍 궁수들과 투창수, 투석들도 동시에 일제 사격을 하여 공격력이 보강되었다. 그러나유대인들은 성벽에서 방어하는 것이 저지당하긴 했어도 가만히있지는 않았다. 유대인들은 패거리로 유격대를 짜서 습격하였는데, 적들의 방어벽을 부수고 토성을 쌓는 작업을 하고 있는 로마군을 기습해서 공격했다. 그리고 로마군을 살해하고 토성을 파괴하고 울타리들과 장애물에 불을 질렀다. 결국 베스파시안은 토성이 서로 떨어져 있어 토성과 토성 사이의 빈틈이 유대인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피해의 원인임을 깨닫고 여러 방공호를 통합하여 한꺼번에 군대로 막았으므로 더 이상 유대인들에 의한 피해는 줄어들었다.


    10. 요세푸스는 성벽을 높이 쌓음


     토성이 점점 높아져서 맞붙어 싸울 수 있는 높이가 되었다. 요세푸스는 요타파타를 구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큰 어려움을 당할 것으로 생각하고 석공들을 소집하여 성벽을 높이 쌓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석공들은 창과 돌이 많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축조가 불가능하다고 항의하자 요세푸스는 그들을 위해 다음의 보호 조치를 고안해냈다. 그의 명령에따라 성벽에 방책들이 세워졌고 그 위에 금방 벗긴 소의 가죽을 펼쳐 덮어서 공격 무기를 통해 날라오는 돌들이 거기에 맞고 떨어지게 하거나 빗나가게 하였으며, 습기가 있었으므로 로마군이 던진 횃불도 꺼져버렸다.[㈜ 라이나흐는 이러한 방어 방법이 로마군에게 알려졌음을 보여주는 베게티우스 iv : 15의 구절을 인용한다.] 건축자들은 이 차단된 장막 아래에서 안전하게 밤낮 일을 했으므로 20규빗 높이까지 성벽을 쌓아올리고, 거기다 많은 망대들을 세우고 전체를 단단한 흉벽(胸壁)으로 만들었다. 이미 이곳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실망하였다. 요세푸스가 고안한 것들과 주민들의 악착스러움은 로마군들을 당황케 했다.


     11. [요타파타 주민의 대담성에 자극을 받은 베스파시안이 전쟁을 그치게 함]


     베스파시안은 이 전략의 기민성과 요타파타 주민들의 대담성에 자극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쌓은 새로운 요새는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었고, 로마인에 대항하는 공격을 다시 시작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그들은 포위자들과 싸우러 와서 닥치는대로 무엇이나 약탈하고 로마군이 만든 막사에[㈜ 즉 전쟁. 3권 7:9(170)에 묘사된 방법에 의해 보호되었던 제방과는 명확히 다르다(라이나흐).] 불을 질렀다. 베스파시안은 마침내 그의 군대에게 전쟁을 그치라고 명했고,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곳을 봉쇄하여 그 도시를 굶어죽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식량을 차단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자비를 호소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남아서 대항하다 굶어죽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는 이렇게 해서 얼마 동안 기간을둔 후에 공격을 하면 지친 적들을 공격하기 때문에 쉽게 이길 수있다는 계산까지 했다. 따라서 그는 그 도시의 모든 출입구를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했다.


    12. [베스파시안의 새로운 전략으로 주민들이 식수난에 허덕임]


     포위된 자들은 식량과 소금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필수품들은 넉넉했으나 식수가 부족했다. 도시 안에는 샘이 없었으므로 주민들은 빗물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도대체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는데 포위당한 계절이 공교롭게도 바로 여름이었다. 그들은 단지 기갈을 생각만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기 소침하였고, 마치식수가 깡그리 바닥난 것처럼 이미 약이 올라 있었다. 요세푸스는 도시에 다른 필수품들이 풍부한 것과 유대인들의 용감한 정신을 보고 로마군이 오랫동안 공격을 지연시키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정량의 식수만을 주민들에게 공급했다. 주민들은 이공급 체계를 실제적인 결핍보다 더 힘들게 생각했다. 자유에 대한억압은 불만이 늘어가게 할 뿐이었다. 마치 그들이 이미 극도의 기갈 상태에 다다른 것처럼 절망 상태에 빠져들었다. 로마군들이 그 곤경을 모르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유대인들이 한 곳에 모여서물을 조금씩 분배받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로마군들은 그곳에 창을[㈜ 헬라어 “속사포”(전쟁. 3권. 5:2(80)).] 던져서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다.


    13. [베스파시안의 작전을 요세푸스가 역이용함]


     베스파시안은 오래지 않아 물탱크에서 물이 바닥나고 도시는 투항하리라고 기대했다. 요세푸스는 이 기대를 꺾기 위해 많은 물에 적셔진 옷들을 전쟁터 주변에 걸어놓아 한순간 모든 성벽에서 갑자기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로마군들은 마실 것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같이 물을 소비하는 광경을 보고 낙심하며 경악했다. 베스파시안은 기근으로 그곳을 약하게 하려고 했던 생각을 버리고 전투 체제로 전환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바라는 바로 그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과 도시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했기 때문에 기근과 기갈로 죽어가기 보다는 싸우다가 죽기를 원했다.


     14. 식량 공급을 위해 경비가 소홀한 협곡을 이용함


     이 전략후에 요세푸스 자신은 풍부한 물을 얻으려고 다른 고안을 해냈다. 서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서 통과하기 매우 어려운 협곡이 있었는데 그곳은 적들이 보초를 소홀히 하는 곳이었다. 요세푸스는 이 길을 따라 그의 부하 몇 명을 보내 도시 밖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요세푸스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생필품들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성 안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비축할 수 있었다. 전령들은 혹시 밤에 보초들의 눈에 띄게 될경우 개로 착각하도록 하기 위해 네 발로 기고 등에는 가죽을 쓰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다. 나중에 보초들은 이 계략을 알아차리고 협곡을 막았다.


     15. 요세푸스는 도피에 대해 궁리함


     요세푸스는 요타파타가 오래 지탱할 수 없고, 거기 남아있다면 자신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도시의 유력한 인사들과도망할 방법을 숙고했다. 주민들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를 둘러싸고 자기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면서 그들은 요세푸스만을 의지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가 남는 것이 그 도시를 구할 수 있는 한 가지 희망이라고 주장했다. 그들 모두는요세푸스가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전쟁할 마음을 먹었으니그들이 포로로 잡혀 적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요세푸스는 그들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버리고 적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마치 고요할 때 배를 탔다가 폭풍우가 휘몰아치자 배를 버리는 것과 같은 무가치한 일이며, 그가 있었기에 용기를 가진 이 도시를 그가 가버리면 침몰되고 더이상 적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다고 말하였다.


     16. 저지된 요세푸스의 의도


     요세푸스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도피하려던 것을 감추고 그가 심사숙고하여 떠나기로 한 것은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는 또한 자기가 이 도시 안에 있으면 주민들이 아직은 안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자신이 아무도움이 못되고, 만일 도시가 함락된다면 주민들과 함께 아무 의미없이 함께 죽게 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이 포위망을 한번 뚫고 나가게 된다면 외부에서주민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데, 다시 말해 곧바로 갈릴리인들을 모아 로마군을 공격하여 로마군을 사방으로 분산시키게 함으로써 요타파타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기가 그들 옆에 있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며 로마군들은 요세푸스를 포로로잡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보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로마군을 자극하는 효과밖에 되지 않으며, 반면 요세푸스가 도망했다는 것을 로마군들이 알면 그들은 공격의 열기를 상당히 완화시킬 것이라고 주민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세푸스의 말에도 군중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더 열심히 그에게 달라붙을 뿐이었다. 아이들, 노인, 여인들은 젖먹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모두들 요세푸스 앞에 통곡했다. 그들은 요세푸스의 발을 붙들고 그에게 울면서 호소하기를[㈜ e!ivconto kai; meta; kwkutw’n : 호머. ‘일리아드’ xxii.408(Hector를 애도함)의 회상. 자서. 42(210) 이하에 유사한 사건이 있다.] 남아서 운명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들 모두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안전한 것을 시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생각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요세푸스가 그곳에 함께 있어 주면 그들은 어떤 재해도 그들에게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 [요세푸스는 주민들과 함께 남기로 하고 명예를 위해 희생할 것을 다짐함]


     요세푸스는 그가 굴복한다면 별 일이 없겠지만 그들의 요청을 반대한다면 그를 감금하는 조처가 취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주민들은 떠나려 해도 주민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동정으로 크게 동요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남기로 하고 비장한 각오로 이렇게 말했다.[㈜ 참).전쟁. 3권. 7:5(153).] “구원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지금이야말로 바로 싸움을 시작할 때입니다. 명예를 위해 그리고 후손들에게 확실히 기억될 영광스러운 업적을 위해, 생명을 희생하는것이야말로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러한 자신의 말에 맞는 행동을 보이면서 그의 용사들과 함께 공격해나갔고 보초들을 분산시키면서 토성 위에 설치한 가죽장막을 찢고, 만들어 놓은 것들에 불을 지르면서 로마군의 진영을 뚫고 들어갔다. 이렇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밤낮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


     18. [베스파시안은 로마군에게 죽기를 각오한 사람과는 싸우지 말 것을 지시함]


     이 공격으로 로마군은 고생했는데 유대인 앞에서 도망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유대인들이 후퇴할 때는 자신들의 무기의 무게들로 인해 추적하는 것도 방해받았다. 반면 유대인들은 항상 적들이 보복하기 전에 해를 입히고 도시 안으로 가서 숨는 기습 작전을 폈다. 이런 것들을 보고 베스파시안은 병사들에게 이런 기습 공격들을 피하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과는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실망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 그리고 상대자가 없이 격렬하게 싸우는 것은 연료없이 타오르는 불길같이 곧꺼지고 말 것이다. 그밖에도 우리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못지 않게 안전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싸움 그 자체가 아니라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안은 이렇게 말한 후 아랍의 궁수들, 수리아의 투창수들과 투석수들만으로 유대인의 공격을 격퇴시켰으며 많은투창, 투석기들을 계속해 사용하였다. 장비들에 의한 격렬한 공격을 받은 유대인들은 낙담했지만 로마군들의 투척 무기의 사정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들에게 무섭게 돌진해 들어가 사력을 다해 싸웠으며, 생명과 손발 등의 사지를 아낌없이 바치며[㈜ 전쟁. 3권. 7:5(153)의 각주와 함께 Soph. ‘El’. 980의 yuch'” afeidhvsante(아낌없는 사람의 생명)를 참고.] 동료들이 모두 기진맥진할 때까지 한 마음이 되어 사력을 다해 대항하였다.


    19. 공성 망치가 동원됨


     포위 기간이 길어지고 적들이 기습 공격을 계속 감행하자 베스파시안은 위치가 역전되어 그 자신이 포위된 것같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토성이 성벽에 가까워지자 베스파시안은 공성망치(ram)를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배의 돛대처럼 생긴 큰 기둥에 양의 머리 형태로 된 큰 쇠망치를 달아놓은 기구였다. 이것은중간 지점에 기둥의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줄로 연결되어 땅에 고정된 기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선 많은 병사들이 그 망치를뒤로 잡아당겼다가 힘껏 밀면 망치가 앞으로 돌진하며 돌출된 쇠머리 부분이 벽을 난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성망치로 벽을 공격하면 처음에는 충격을 견뎌낸다 할지라도 계속적인 공격에는 아무리 강하고 두꺼운 벽이라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급히 요타파타를 장악하고 싶어했던 베스파시안이 공성망치를사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베스파시안은 오랫동안 봉쇄를 하면서유대군과 맞서 싸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에 로마군들은공성 무기들을 앞으로 가져와서 그 무기들을 그들이 치려고 하는 성벽에 난타할 수 있는 위치에서 이 기계들을 가동시켰다. 거기에 궁수들과 투석수들도 동시에 공격에 가담하였다. 한편 이런 로마군들의 열기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다른 부대는 공성망치를 가져오고 그들 자신과 무기들을 안전하게 보호할가죽으로 덮어씌운 긴 덮개를 설치했다. 그들 자신과 무기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가죽으로 덮어씌운 공성망치로 한번 치자 성벽이 흔들거렸으며 이에 도시 안에 있던 자들은 이미 도시가 장악된 것처럼 날카로운 함성들을 질러댔다.


     20. 로마군의 공성망치의 대응책으로 유대인들은 공격 무기에 불을 지름


     요세푸스는 계속해서 같은 곳을 치게 되면 성벽이 곧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그 기구의 위력을 마비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는 자루에[㈜ 자루는 로마군에 의해 사용됨(라이나흐에 의해 인용됨 Veget. iv :23).] 왕겨를 가득 담아 망치가 때때로[㈜ 혹은 “계속적으로”] 치는 것이 보이는 곳에 줄로 달아 내려놓게 했다. 그러면그것이 받는 충격을 완화시켜 강타하는 위력을 없애거나 망치의 머리가 빗나가게 만들었다. 이것은 로마군들에게 큰 방해 요소가되었다. 로마군들이 장비를 돌릴 때마다 치는 곳 바로 밑에 유대인들이 주머니들을 놓아두는 것으로 응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타파타의 성벽은 로마군들이 자루에 달린 줄을 끊거나 긴 장대줄에 갈고리를 달아 주머니를 제거할 때까지는 공격으로 인한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군이 방해물 제거에 성공하자 이 공성 장비는[㈜ 여기서 공성망치로 사용된 ejlevpoli”는 원래는 데메트리웃그(Demetrius)에 의해 발명된 포병과 보병을 수송하기 위하여 몇 층으로 된 이동식 망대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그 효력을 다시 회복했으며 새로 지은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요세푸스와 그의 동료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불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는 대로 마른 나무를 주워 모아 세 부대로 나누어 로마군을 공격하였으며 공성 무기와 나무로 만든 무기고들과 토성 버팀목에다 불을 질렀다.[㈜ ayavmenoi : 참). 전쟁. 3권. 7:22(234)의 ajravmenoi pu’r pavlin, 그 의미인 “불을 켜다”는 대개 능동태 ajvptein으로 표현되고 중간태로는 (건물에) “불을 지르다”로 사용된다.] 로마군들은 화염에 싸인 장비들을 구해낼 수 없었으며 적의 대담함에 멍해져서, 그들이 구할 장비들이 화염에 휩싸이는 것에 아연할 뿐이었다. 마른 불쏘시개에다 역청(bitumem)과 수지(pitch), 유황을 발랐기 때문에 불은 생각보다 더 빨리 사방에서 타올랐다. 로마군들이 그렇게 열심히 공들여 세워놓은 것들은한 시간도 안되어 타버렸던 것이다.


     21. 유대인 영웅들


     이런 상황에서 기억될 만한 특출한 유대인이 있다. 그는 갈릴리 사바(Saba) 출신으로 사메아스(Sameas)의 아들인 엘르아살(Eleazar)이다. 그는 성벽에서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서 망치의 머리 부분을 쳐부술 만큼 온힘을 다해 세게 던졌다. 그리고 뛰어 내려가 적진에서 이 망치를 가지고 성벽 위로 침착하게 올라왔다 그런데 내내 적들의 표적이 되어 무장하지 않은 몸에 화살이 5개나 꽂혔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고 성벽을 기어올라 모든 적들이 그의 용감함을 볼 수 있는 곳에 섰다. 그러나 그는 부상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면서 망치의 머리를 손에 든 채 고꾸라졌다. 그 다음으로 용감했던 사람들로는 갈릴리인으로서 루마(Ruma)[㈜ 지금은 루마(Rumah)라고 하는 곳이며 아소키스 평원의 남쪽에 있는 요타파타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이다.] 출신인 두 형제 네티라스(Net-iran)와 빌립(Philip)이었다. 이들은 제10군단을 향해 돌진해서 로마인들의 전열을 부수어 접전 중이던 군인들이 도망할 정도로 맹렬한 기세로 기습을 가했다.


     22. [베스파시안이 작은 상처를 입고 로마군들은 동요함]


     이러한 용맹스러운 자들에 힘입어 요세푸스와 나머지 백성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습격하여 한 때 패주시켰던 적이 있는[㈜ 전쟁. 3권. 7:21(233).] 제5군단과 제10군단의 장비들과 진영과 토성들에 불을 질렀다.그러자 다른 군단들은 급히 그들의 장비와 불에 잘 타는 모든 물건들을 보이지 않게 숨겼다. 저녁이 되자 로마군들은 전에 강타해서 파괴된 성벽에 망치를 다시 갖다 놓았다. 그때 성벽에 서있던 유대인 보초 한 사람이 맨발로 뛰어나와 베스파시안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사정거리 밖에 있어서 약간의 상처만 입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로마군들이 큰 동요를 일으켰는데, 이는 베스파시안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그가 피흘리는 것을 보고 갑자기 놀랐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곧전 군대에 퍼졌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포위를 풀고 놀라움과 공포에 떨면서 장군에게 몰려들었다. 먼저 티투스가 아버지에 대해 크게 걱정하면서 그곳에 왔다. 그런데 로마의 병사들은 그들의 대장을 아끼는 마음과 그 아들의 비통한 표정 때문에 더욱 혼란이 가중될 뿐이었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아들의 고통을 달래고 군대의 동요를 진정시키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그의 생명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고통에서 벗어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이전보다 더맹렬하게 유대인을 공격하라고 군인들을 격려하였다. 로마 병사들은 우선 그의 장군의 원수를 갚는 것에 용감해졌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성벽을 향해 돌진해 갔다.


    23. 저녁에 맹렬한 로마군의 공격을 받음


     요세푸스와 부하들은 투석기에서 쏟아지는 억수같은 공격을 받아 쓰러지면서도 여전히 밀려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무로된 은신처 밑에서 공성 망치를 사용하는 로마 병사들에 대항하여 요세푸스 일당들은 철제 무기로[㈜ 대개는 ‘검(劍)의 날’ : 여기서는 아마도 쇠 화살촉을 의미할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 iv.123).]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그들의 노력은 별로 효과가 없었고 숫자는 계속 줄어가기만 했다. 요세푸스 일당은 적을 볼 수 없는 반면 적들은 그들을 볼 수있었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횃불의 불빛 때문에 대낮처럼 밝아서 적들에게 눈에 띄는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유대인들은 멀리 있어서 보이지 않는 투창 장비들을 피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속사포(速射砲, quick-firer)에서[㈜ 전쟁. 3권. 5:2 (80).] 쏟아지는 창과 돌은 전열(全列)을 쓰러뜨리는 무기였고, 장비에서 쏘아대는 무수히 많은 돌들은[㈜ 즉 liqobovlon(투석기), 라틴어의 ballista(노포), 전쟁.3권. 5:2(80) 라이나흐는 그 무기를 또 다른 형태의 투석기(onager)의 일종으로 본다. 그러나 후기까지 발명되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 성벽에 날아와서 망대의 모서리들을 부쉈다. 참으로 돌들이 얼마나 강하게 쏟아지는지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일들은 이 장비들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성벽에서 요세푸스 옆에 서있던 한 사람은 돌에 맞아 투석기에서 3퍼얼롱 되는 거리까지 목이 날아갔다. 또 낮에 임신한 여인이 집에서 막 나오다 배에 돌이 맞았는데 자궁 속에 있던 아이가 반퍼얼롱이나 날아갔다.[㈜ 요세푸스는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이 투석기들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한 이 장비들은 대단한 소리를 내서 더욱 놀라게 했고 창들이 내는 요란한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라이나흐와 마찬가지로 foberwvtero”foBero;”이나 foberwvtato”로 수정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벽에서 연달아 떨어지는 소리도 있었다. 성읍안에는 죽어가는 희생자들의 신음소리와 합하여 여인들이 공포에 질려 찢어지는 듯한 괴성들이 흘러나왔다. 모든 전장(戰場)주변에는 피가 흐르고 시체더미는 성벽 꼭대기까지 올라갈 만큼쌓였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메아리는 가공(可恐)할 만한 소음을 더하기까지 했다. 간단히 말해 그날 밤보다 더 무시무시한 적은없었던 것 같다. 요타파타(Jotapata)를 수비했던 많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어갔고 부상당했다. 아침이 될 때까지도 성벽을 지키고 싸우기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기계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로마군이 성벽을 오를 통로를 놓기 전에 유대인들은그들의 인력과 무기로 틈을 막고 수비를 계속하였다.


    24. 성벽을 오르기 위한 준비


     베스파시안은 밤새 싸워서 지친 병사들에게 약간의 휴식을 준다음, 동이 튼 후 바로 마지막 공격을 하러 군사들을 소집했다.그는 틈을 막고 있는 수비자들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그는 가장 용감한 기병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고, 성벽 허술한 부분의 맞은 편에 3분대로(three divisions) 정렬시켰다.[㈜ 또는 “세길 깊이(Three deep).”] 그들은갑옷으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무장하고 창을 꽂고 성벽을 오르는 통로가 놓일 때, 처음 그 성읍으로 들어갈 사람들이었다. 베스파시안은 이들 뒤에 보병들을 두고 성읍이 장악됐을 때 한명도 도망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라이나흐가 제안한 것처럼 전쟁. 3권. 7:24 (255)는 삽입구로 생각된다. 그리고 전투의 순서에 있어서는 전쟁. 3권. 7:24 (256)은 전쟁.3권. 7:24(254) 이후에 직접 따라온다.] 나머지 기병들은 성벽 맞은 편 구릉을 따라 배치시켰다. 또한 후미에는 궁수들을 둥글게 배치하여 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지시했으며, 투석병들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다른 부대들에게는 사다리를 가져와서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벽에 그 사다리를 대 놓도록 했다. 이렇게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허물어진 곳의 수비를 그만두게 될 것이고 남은 자들은 쏟아지는 창의 공격에 압도당하여 공격하기를 포기할 것이다.


    25. 요세푸스의 군사 배치


     요세푸스는 그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거기서 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성벽의 견고한 부분에는 지치고 늙은 사람으로 방어하게 하고 손상된 부분에는 부하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 그 자신을 그의 위치에서 싸우게 하려고 각 군에서 추첨으로 뽑은[㈜ 전쟁. 3권. 7:26 (263). 참). (h&elacen)] 6명을 지휘하였다.[㈜ 의미는 조금 의심스럽다. 이 지휘관들은 전쟁.3권. 9:27(270)에 언급된 provmacoi이 있다.] 그는 그의 부하들에게 로마군단이 함성을 지르면 공포에 질리지 않도록 귀를 막고, 창들이 날아오면 무릎 끓고 방패로 몸을 막고, 궁수들의 화살통이 빌 때까지 잠시 물러나 있도록 지시하였고 통로가 만들어지는 순간 뛰어나가 자신들이 가진 장비로써 적과 싸우라고 했다.[㈜ “기사(engineer)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다 “(Hamlet, Ⅲ. iv).] 그리고 계속 지시하기를 “여러분 모두는 고향을 구원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도시가 함락되어,복수하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싸우시오. 적의 손에 노인들이 학살되고 아이들과 여인들도 그런 운명에 곧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해보시오. 이런 위협적인 재난을 생각함으로써 분노를 침입자들에게 터뜨립시다.”


     26. [요세푸스는 전사(戰士)들의 사기를 위해 여인들을 집에 가둠]


     그렇게 해서 그는 두 부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전투 능력이 없는 무리들인 부녀자와 아이들이 부대가 3중으로 도시를 싼 것을 보았다. 로마군들은 싸움을 위해 처음부터 세워놓은 감시병들을 아직 이동시키지 않고 있었다.[㈜ 전쟁.3권. 7:4(148).] 더욱이 성벽의 밑에는 칼을 든 적들이 있었고, 그들 위에 산등성이에는 무기로 번득였고,더 위쪽으로는 아랍 궁수들의 화살이 여전히 성읍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들은 크게 소리지르며 마치 종말이 이미 임한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요세푸스는 여인들이 울어서 전사(戰士)들의 마음을 약하게 할까봐 여인들을 위협하여 집에 감금했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자기가 맡고 있는 성벽이 허술한 곳으로 가서 사다리를 어느 부분에 가져다 놨는지 상관하지 않고 숨을 죽이고 화살이 쏟아지는 것을 기다렸다.


    27. 통로에서의 접전


     그때 모든 군단의 나팔수들이 동시에 나팔을 불었고 군대들은 크게 소리를 질러댔으며 신호에 맞춰 사방에서 햇빛을 차단할만큼 많은 화살들이 쏟아졌다. 요세푸스의 부하들은 요세푸스의 명령을 기억하고 함성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틀어막았으며 일제사격으로부터 그들의 몸을 막았다. 그리고 로마군이 성벽에 걸친 사다리 위로 올라오기 전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공격했다. 곧뒤이어 올라온 적들과 접전(接戰)이 벌어졌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상당한 강인함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재난에 처해있으면서도, 위험한 것을 상관치 않고 싸우는 용감한 로마군에 못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누구도 자신이 죽거나 적을 죽일 때까지 로마인과의 투쟁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계속되는 전투에 점점 지쳐갔으며, 좋은 전사(戰士)들을 보충할 수 없었다.[㈜ 전쟁. 3권. 7:25(258)을 보라.] 반면 로마 전열(戰列)에서는 새로운 병사들로 전투에 지친 병사들을 교체시켰다. 왜냐하면 한 부대가 뒤로 물러나고 다른 부대가 계속해서 그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위로는 방패로 막으면서 서로 사기를 북돋워 주고, 방패 고리를 만들어 연결하여 맞서 대항할 수 없는 형태를 만들었는데,[㈜ 군인들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방패로 위를 막고 연결시킨 대형(the testudo formation : 참). 전쟁. 19:5(537)).] 많은 병사들이 한 몸처럼 되어서 유대인들을 밀어붙여 성벽 위로기어오르기도 하였다.


    28. 로마군에게 끓는 기름을 부음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요세푸스는 부득이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다. – 절망중에 자극받으면 묘안이 떠오르는 법이다. – 요세푸스는 로마군이 지붕처럼 해서 막은 방패 위에 끓는 기름을 쏟아 부으라고 지시했다. 그의 부하들은 끓는 기름을 준비하여 곧 사방에서 많은 기름을 로마군에게 쏟아 부었다. 펄펄 끓고 있는 기름을 갖다 부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로마군의 대열(formation)이 부숴졌는데, 로마군은 화상을 입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성벽에서 곤두박질해 굴러 떨어졌다. 기름이 계속해서 갑옷 속으로 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몸에 스며들면서, 화상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본래 액체의 특성상 열을 빨리 흡수해서 천천히 식어가는 지방의 특성 때문이었다. 흉갑(胸甲)과 투구는 그들에게 방해가 될 뿐이었고 끓는 기름에서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사다리에서 굴러 떨어져 고통으로 몸부리치며 괴로워할 뿐이었다. 또한 도망하려던 사람들은 공격하기 위해 앞으로 밀어대는 동료들에 의해 봉쇄되었으므로 뒤쫓아 온 유대인들의 쉽게 표적이 되기도 했다.


     29. [유대인의 전략에 로마군이 패하고 퇴각함]


     그러나 로마군들은 이런 와중에도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었는데 유대인들도 지략이 뛰어났다. 로마군들은 동료들이 기름으로 흠뻑적셔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기름을 퍼붓고 있는 자들에게 달려들었고, 앞에서 돌진해 나가는 것을 늦추는 사람을 비난하였다. 반면 유대인들은 적들이 쇄도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통로의 판(gangway-plank) 위에 삶은 호로파(fenugreek : 콩과 식물)를 쏟아 붓는 제2의 묘책을 생각해 냈다.[㈜ Foenum Graecum : 라이나흐는 이 식물이 6-7월에 정확하게 꽃을 피운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로마군이 미끄러져 넘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 사람도 앞뒤로 갈 수 없을 뿐더러 서 있지도 못했다. 어떤 이는 통로 위에 넘어져 등뼈가 부러지거나 아래로 굴러 떨어져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토성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기다렸던 유대인의 창에 찔려 죽었다. 로마 군인들이 이렇게 밀려나자 유대인들은 접전에서 벗어나 활로 싸울 수 있었다. 로마군은 이 공격으로 손실을 많이 입었으며 저녁이 되자 장군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로마군은 사상자를 많이 냈는데 요타파타를 수비하고있는 자들은 6명만 죽었지만, 300명이 넘는 부상자들은 성읍으로 데려왔다. 이 전투는 다이시우스 달 20일에[㈜ 주후 67년 7월8일 (니이제의 계산).] 일어났었다[주후 67년].


     30. 베스파시안이 일어나서 토성을 요새화하다


     처음에 베스파시안은 최근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의 군대를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사들의 침울한 분위기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에게 겉에 철판을 덮은 50피이트 높이의 망대 3개를세우라고 명령하였다. 망대의 외부를 철판으로 덮으라고 지시한이유는 그 무게로 인해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에도 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스파시안은 토성 위에 이망대를 세우고 망대 위에 간단한 투석기와 투창기를 장치해 놓고 투창수와 궁수와 건장한 투석수들을 배치하였다. 이 부대는 망대 꼭대기에 있어서 흉벽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은 성벽 위에서 뻔히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유대인들은그들의 머리로 향해 오는 사격들을 피할 방법이 없었고, 보이지않는 적을 공격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높은 망대에 손으로 던진 창이 미치지 못하며 철판으로 덮여서 불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성벽을 포기하고 다시 사다리로 올라와 유대인을 공격하는 로마군들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요타파타는 지탱되었지만 날마다 수비자들은 줄어 들어갔고, 적들에게 보복할 힘이 없어 자신들을 위태한 궁지에 몰아넣고 있을 뿐 결정적인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31. 야파가 트라얀과 티투스에 의해 포위당하다


     이러는 중에 베스파시안은 제10군단의 사령관인 트라얀(Tra-jan)을[㈜ 그 이름의 미래 황제의 아버지.] 기병 1,000명, 보병 2,000명과 함께 요타파타 근처 도시인 야파(Japha)로 파견했다.[㈜ 구약의 야비아(Japhia : 수 19:12), 현재는 야파(Yafa), 이는 요타파타(Jotapata)의 약10마일 남쪽이고, 나사렛(Nazareth)의 2마일 남서쪽에 있다. 여기는 “도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요세푸스의 본영(자서.52. (270)).] 그곳은 인근 도시인 요타파타의 놀라운 저항에 용기를 얻어 폭동이 있었던 곳이었다. 트라얀은 그 도시가 자연적으로 견고한 입지 조건을 가진데다가 성벽이이중으로 보호되어 있어 공격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대담하게도 그와 교전(交戰)을 각오하고 성에서 나왔다. 트라얀은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 약간의 저항이 있은 후에 유대인들을 퇴각시키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첫번째 성벽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로마군은유대인들을 바싹 뒤쫓아 왔다. 그러나 도망하는 유대인들은 두번째 성벽으로 달려들었을 때 적들도 동시에 성안으로 떠밀고 들어올까 두려워하여 그들의 동료 시민들이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밖에 많이 있었는데도 문을 닫았다. 이렇게 불쌍한 갈릴리인을 로마군의 손에 넘겨준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셨다.즉, 그 도시의 사람들을 몰아내고 흉악한 적들에게 넘겨주어 마지막 한 사람까지 근절시키게 한 것은 하느님이 하신 것이다. 야파 주민들은 떼로 몰려가 성문을 두들기면서 또는 보초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에 들여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이것도 헛수고였다. 그렇게 간청하는 동안 그들은 살해당했다. 그래서 첫 번째 성문이 로마군들에 의해 닫혀졌고 두번째 성문이 그들의 동료들에 의해 닫혀졌다. 두 장벽 사이에 함께 뒤섞이고 갇혀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죽거나 동료들의 창에 찔려 쓰러져 갔으며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방어할 마음도 갖지 못한 채 로마군에 의해 엄청난 수가 죽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스스로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적에 대한 공포와 그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동료들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어가서 로마군이 아닌 자기 민족들을 저주하면서 12,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트라얀은 그 도시에 싸울 만한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며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공포로 마비되다시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을 장악하는 것은 그의 장군을 위해 유보해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승리로 이끌기 위해 베스파시안에게 전갈을 보내 그의 아들 티투스(Titus)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참). 암몬의 랍바(Rabbah)를 공격할 때 다윗에게 한 요압(Joab)의 메시지. 삼하 12:26 이하 ; 이 정중한 말은 유대인과 로마인들에게 일상적인 것이다.] 이에 장군은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아들과 함께 500명의 기병과 1,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지원군을 보냈다. 티투스는 급히 야파로 진격해 와서 그의 군대를 전투 체제로 정렬시켜 좌측 진영에는 트라얀을 배치하고우측 진영은 자신이 지휘하여 공격을 하도록 했다. 병사들이성벽 사방에 사다리를 가져다 놓자마자 갈릴리인들은 진영에서잠시 수비를 하다가 곧 그 곳을 포기했다. 한편 티투스의 군사들은 성벽에 기어올라 곧 그 성읍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벽안에 있는 주민들은 병사들과 필사적으로 접전을 벌였다. 건장한사람들은 좁은 통로에서 로마군을 습격했고, 집에 있는 여인네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이건 그들을 향해 내던졌는데 이러한 접전은 6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은 전투력이 있는 전사(戰士)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나머지 주민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옥내외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그러므로 유아들을 제외하고 남자는 한명도 없었고, 로마군은 이 아이들을 부녀자들과 같이 노예로 팔았다. 그 도시에서 지난 번 전투의 희생자와 합해서 총 15,000명이죽었으며, 2,130명은 포로로 잡혔다. 갈릴리인에게 이런 재난이있었던 날은 다이시우스(Daesius)달 25일이었다.[㈜ 주후 67년 7월 13일.(Niese의 계산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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