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권 11장 베스파시안이 급히 로마로 떠나자 비텔리우스가 정복하며 학살한 것과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것에 대하여

 


제 11 장



베스파시안이 급히 로마로 떠나자 비텔리우스가 정복하며 학살한 것과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것에 대하여



1. 베스파시안이 무키아누스에게 군대를 주어 이달리야로 보내다



 베스파시안은 사절단들에게 답변을 하고 권력의 자리를 각자능력과 처지에 맞게 적절히 잘 분배한 후 안디옥(Antioch)으로 왔다. 거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지에 대해 논의하면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것보다 오히려 로마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그를 확실하게 지지하고 있었으나 반면 로마는 비텔리우스에 의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무키아누스를 이달리야로 보내면서 상당히 많은 기병과 보병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전쟁.3권. 8:9 (401).] 그러나무키아누스는 한 겨울이어서 해상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 따라서 그는 갑바도기아 (Cappadogia)와 프리기아 (Phrygia)를 통해 육로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본도(Pontus)로부터 온 함대를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모이도록 명령함. 타키투스. 위의 책.]



2. [안토니우스를 만난 카이키나는 부하들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함]



 한편 모에샤에 있었던 제 3군단 사령관 안토니우스 프리무스(Antonius Primus)[㈜ 후에는 무키아누스(Mucianus)의 대적 안토니우스 프리무스(M. Antonius Primus)는 요세푸스가 말한대로 모이샤(Moesia)에서가 아니라 파노니아(Pannonia)의 7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다(타키투스 \’박물학\’ ii : 86). 그러나 그는 3군단 (Gallica)이 반역의 선두에 있었으므로 모이샤의 군단과 연합하였다.]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서둘러 비텔레우스를 치러 갔다. 비텔리우스는 카이키나 알레에누스(Caecina Alienus)에게 막강한 군대를 주고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를 막게했다. 카이키나는 오토를 살해한 이유로 해서 비텔리우스의 많은 신임을 받고 있었다.[㈜ 즉 갈리아 카살피나. 본도의 북쪽 이달리야(Italy).] 카이키나는 급히 서둘러 로마를 떠나 행군하였고, 골(Gaul)[㈜ 즉 갈리아 카살피나. 본도의 북쪽 이달리야(Italy).]에 있는 크레모나(Cremona)주위에서 안토니우스와 만났다. 크레모나는 이달리야 변경지역에 있는 도시였다. 카이키나는 적들의 숫자가 많고 전투대열로 잘 정돈된 것을 보고 감히 그들과 싸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후퇴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군대를 안토니우스에게 넘겨주리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타키투스는 \’박물학\’ ii.99와 iii.13 이하에서 더 풍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백부장과 그의 장중에 있던 사령관들을 불러 모아서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할 것을설득했다. 그는 비텔리우스를 깍아내리고 베스파시안의 권력을 칭송하였다.[㈜ \”그는 베스파시안(Vespasianus)의 일부 탁월성과 힘을 칭송한다…. 그러나 비텔리우스(Vitellius)의 모든 것은 파멸 상태에 있다\”(타키투스. \’박물학\’ iii. 13).] \”비텔리우스는 이름만 황제이며, 베스파시안은 황제와 같은 실질적인 큰 권력을 가지고 있소. 싸워서 패배하느니 보다 위험을 피하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되므로 여러분들은 아예 싸우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좋겠소. 게다가 베스파시안은 우리들의 도움없이도 정권을 차지할 수 있는 반면 비텔리우스는 지금의 황제자리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항복하자는것이오.\”



3. [베스파시안은 카이키나를 따뜻하게 영접함]



 카이키나는 이 말을 하고 온갖 말로 그들을 설득시켜 그의 제안을 수락하게 만들었다. 즉 카이키나와 그의 군대는 비텔리우스를 배신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했으며, 비텔리우스가 복수하러 오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칼을 뽑아들고 카이키나를 죽이기 위해 공격했다. 만일 지휘관들이 무릎을 끓고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지 않았다면, 병사들은 카이키나를 죽였을 것이다.[㈜ 타키투스에 없는 상술(詳述). 타키투스는 군인들이 카에키나(Caecina)를 묶고 다른 지도자들을 택했다고만 설명한다.(\’박물학\’.iii. 14). ] 병사들은 지휘관들의 간청으로 그를 죽이지는 않고 결박하여 반역자로 비텔리우스에게 보내려고 하였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 소식을 듣자그는 곧 부하들을 소집하고 무장시켜 반역한 자들을 공격하기위해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전투대열을 가다듬고 얼마 동안은 저항을 했으나 곧 무너져 크레모나로 도망갔다. 프리무스는 기병을 거느리고 크레모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차단하고 포위해서 크레모나 성벽 앞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크레모나 시로 도피한 나머지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도시도 약탈하게했다.

 많은 주민들 뿐 아니라 장사하는 많은 이방인들도[㈜ 축제가 되면 그 식민지는 항상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부로 풍부한 모습이었다. 온 도시가 며칠동안 온통 푹 빠져 있었다.(타키투스. 역사서. iii. 22이하).] 죽였다. 30,200명 가량의 비텔리우스 군대가 모두 죽었고, 한편 안토니우스는 모에샤에서 함께 온 병사들은 40,500명 가량을 잃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키나를 풀어주고 베스파시안에게 보내면서 승리 소식을 전했다. 그리하여 카이키나는 베스파시안에게 영접받고, 이런 뜻밖의 융숭한 대접으로 그의 반역이라는 오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4. 쥬피터의 신전에서 싸우다



 한편 안토니우스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사비누스(Sabinus)는[㈜ 598각주. 타키투스 \’박물학\’, iii. 64이하에서 그 이야기가 풍부하게 다루어져 있다. 사비누스(Sabinus)는 퇴위할 준비가 되있던 비텔리우스(Vitellius)와 상황들을 협상하려고 했으나 비텔리우스 추종자들은 이것을 방해했다. 그래서 그들과 사비누스(Sabinus)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생긴 마찰은 사비누스의 추종자들을 캐피톨(Capitol)에 있는 쥬피터신전으로 그들을 몰아붙였다.] 로마에서 용기를 내어 밤에 경비하는 보병대를[㈜ 일곱 개의 야간 경비 군단은 일종의 소방 여단으로 아구스도(Augustus)에 의해 창설되었다. (Suet. \’Aug\’. 30 ; Dion Cass. 55 : 26).] 모아서 한밤에 로마를 장악했다 [주후 69년 12월 18일].

 날이 새자[㈜ \”밤의 끝에\” 비텔리아누스 추종자들의 부주의와 폭우에 대한 경계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비누스(Sabinus)는 자녀들과 도미티안(Domitian)을 생환시켰으며 그의 추종자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타키투스. 역사서. iii. 69).] 많은 주요인사들이 그에게 왔는데 그중 그의 조카 도미티안(Domitian)도 있었는데, 도미티안의 대범한 용기가 이번 사비누스의 정권 탈취에 큰 힘으로 작용을 했던 것이다. 반면 비텔리우스는 프리무스에 대해선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사비누스와 함께 반역을 일으킨 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했다. 비텔리우스는 천성이 야만적이고 귀족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어 그와 함께 온 군대 일부를 보내 로마 신전(Cap-itol)에 대항해 싸우게 했다. 신전에서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결국 게르만에서 온 비텔리우스 병사들이 상대방에 비해 너무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언덕을 점령했다.[㈜ 타키투스의 \’박물학\’ iii. 70이하의 더 풍부한 자료에 따르면 군인들은 비텔리우스(Vitellius)의 명령없이 행동했다.] 그곳에서 도미티안과 로마의 다른 주요인물들은 가까스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풋나기로 변장된 도미티안(Domitian).타키투스 역사서. iii. 74.] 나머지 병사들은 완전히 박살 났으며, 사비누스는 비텔리우스에게 끌려가 살해당했다. 비텔리우스의 병사들은 신전의 장식물들을 약탈하고 불질렀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입성하다. 12월 20일]



 그러나 그 다음날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비텔리우스의 군대와 접전하였다. 세곳에서 전투를[㈜ 안토니우스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진격했다. 한 부대는 플라미니아 도로(Via flaminia)를 따라서, 또 한 부대는 살라리아(Via Salaria)도로를 따라 콜린에 게이트(Colline Gate)까지 그리고 다른 한 부대는 티버(Tiber)둑을 따라 진격했다. (타키투스. 역사서. 3:82).]한 끝에 비텔리우스 군대는 모두 전멸당했다.[㈜ 타키투스. \’박물학\’ iii. 84.] 마지막이 온 줄 알고 비텔리우스는 전보다 더 화려하고 호사스런 식사를 하고 술에 취한 채 궁전에서 나왔다가 붙잡히어서 주민들에게 끌려다니며 온갖 수모를 당하다 로마 한 가운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탈출을 시도한 후에 궁전에 숨어있다가 도망하려 했으나 게모니안(Gemonian)층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후 시체는 티버(Tiber까지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타키투스 iii. 84이하, Suet. \’Vitell\’. 17).] 결국 8개월 5일간의[㈜ 4월 17일부터 12월21일까지 (혹은 20일).] 통치를 끝으로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도 로마제국이 그의 사치와 호사스러움을 감당할 수없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살해된 자들은 5천 명도 넘는다. 이전쟁은 아펠라이우스(Appellaeus)월 3일에 시작했다.



 [무키아누스가 로마에 입성하다. 12월 2일 혹은 21일]



 그 다음날 무키아누스가 군대와 함께 로마로 들어가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하들에게 살상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군사들이 계속 집을 약탈했으며, 비텔리우스의 병사들과 많은 주민들도 함께 죽였기 때문이다.[㈜ 참). 타키투스, \’박물학\’. iv. 1,2.] 안토니우스의 군사들은 당파심 때문에 주민들도 비텔리우스 편으로 생각하고, 적과 주민을 구별하지 않고 경솔하게 살상했기 때문이다. 그후 안토니우스는 도미티안을 그의 아버지가 올 때까지 지도자로 주민들 앞에 내세웠다. 그래서 공포심에서 벗어난 백성들은 그들의 황제로서 베스파시안을 받아들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그의 황제취임과 비델리우스의 파멸을 축하하는 축제를 몇일 동안 지켰다.



  5.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베스파시안



 베스파시안이 알렉산드리아로 왔을 때 이 기쁜 소식이 로마에서 전해졌고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친선 사절단들이[㈜ 볼로게수스(Vologesus)왕으로부터 온 40,000명의 파르티안(Parthian)기병을 거느린 한명을 포위하여(타키투스. \’박물학\’. iv. 51).] 그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러 속속 몰려들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가까이에 있는 도시 중에서 가장 큼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오는 많은 사람들을 맞아들이기에는 너무 좁았다. 이제 완전히 베스파시안의 위치가 견고해지고 로마의 국정이 어지러움에서 평안을 되찾자, 베스파시안은 유대에 점령되지 않고 남아 있던 도시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겨울이 거의 끝났고, 알렉산드리아의 문제들도 해결되었기 때문에 급히 서둘러 로마로 갔으며,[㈜ 그는 도미티안의 행동에 대한 별로 달갑지 않은 보고를 받았다. (타키투스. \’박물학\’. iv. 51).] 그의 아들 티투스를 정예의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보냈다. 티투스는 니고볼리(Nicopolis)까지[㈜ 안토니우스(M.Antonius)의 최후 패배의 현장에 알렉산드리아 점령을 기념하여 주전 24년 아구스도(Augustus)가 세웠다. 이것은 그 도시의 동쪽으로(요세푸스에 의하면)2.5마일쯤 되거나(스트라보에 의하면)3.5마일 되는 곳에 있는 해안에 위치하고 있었다.(strabo. xvii. 795, Dion. Cass. ii. 18).] 걸어서 행군하였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20퍼얼롱[㈜ 스트라보(Strabo)에 의하면 \’30\’.]의 거리였다.그곳에서 티투스는 그의 군대를 몇 척의 전함에 태우고 멘데시안 지역(Mendesian)을[㈜ 멘데스(Mendes)를 수도로 하고 있는 갑(山甲).] 따라[㈜ 혹은 \’보다 위에\’.] 나일(Nile)강으로 항해 해[㈜ 혹은 \’위로 가로질러\’ (나일강위로가 아니라 나일강을 통하여 : dia; tou\’ Neivlou, not ajna; to\’n Nei\’lon ) 즉, 그는 Delta 지역을 가로질러 갔으며 그리고 그 길의 한 부분은 운하 옆에 있었을 것이다.] 드무이스(Thmuis)시[㈜ Tmai(Smith and Bartholomew. \’성지지도\'(Atlas of Holy Land) 7번지도)혹은 Tell-Ibu es-Salam, 즉 멘데스의 남서쪽.]까지 갔다. 드무이스에서 하선하여 행군했으며, 타니스(Tanis)라는[㈜ San. Thmuis 서편 약 20마일 떨어진 구약성경에 나오는 소안임.] 작은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날 티투스의 행선지는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po-lis)였고,[㈜ Heracleopolis Parva. 즉 지금 멘짤레(Menzaleh)호수로 덮여진 장소임.] 셋째날은 펠루시움(Pelusium)이었다.[㈜ Tell Farama 일명 Teneh(성경에 나오는 Sin, 겔 30:15). 전쟁.610.] 펠루시움에서 그는 이틀동안 군대를 휴식시키고 3일째 펠루시움에서 나일강 어귀를 통과했다. 그후 그는 사막을 지나 계속 진군하여 카시안 제우스(Casian Zeus) 신전[㈜ 몬스카시우스(Mons Casius)의 정상 근처에 있으며, 시르보니스(Sirbonis)호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사암(沙岩)지역인 제우스 암몬(Zeus Ammon)의 신전. 폼페이 무덤이 그 언덕 옆에 있음(Strabo. 17:760).]에서 진을 쳤으며, 그 다음날은 오스트라키네(Ostracine)에서 진을 쳤다. 오스트라키네는 물이 없었다.[㈜ 불확실함.] 그곳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서 물을 길어와 사용했다. 그후 티투스는 리노콜루라(Rhinocorura)에[㈜ 혹은 Rhinocolura. 애굽과 팔레스타인 경계에 있는 엘 아리쉬(El-Arish)이며 Wady el-Arish 즉 \’애굽의 강\’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경계를 표시한다]에 머물렀으며, 다시 네 번째 행선지인 라피아(Raphia)로[㈜ Refah : 폴리비우스 역시 이곳을 수리아 최초의 도시로 생각한다.]갔다. 라피아는 수리아의 변경에 있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행선지로 가사(Gaza)에서 진을 쳤고, 아스글론(Ascalon)을 거쳐 얌니아(Ja-mnia)와 욥바(Joppa)를 지나 가이사랴로 행군했다. 티투스는 가이사랴에 그의 다른 모든 병력을 집결하도록 결정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TN-catholicdictionary-C2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제 4권 11장 베스파시안이 급히 로마로 떠나자 비텔리우스가 정복하며 학살한 것과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1 장


    베스파시안이 급히 로마로 떠나자 비텔리우스가 정복하며 학살한 것과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것에 대하여


    1. 베스파시안이 무키아누스에게 군대를 주어 이달리야로 보내다


     베스파시안은 사절단들에게 답변을 하고 권력의 자리를 각자능력과 처지에 맞게 적절히 잘 분배한 후 안디옥(Antioch)으로 왔다. 거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지에 대해 논의하면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것보다 오히려 로마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그를 확실하게 지지하고 있었으나 반면 로마는 비텔리우스에 의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무키아누스를 이달리야로 보내면서 상당히 많은 기병과 보병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전쟁.3권. 8:9 (401).] 그러나무키아누스는 한 겨울이어서 해상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 따라서 그는 갑바도기아 (Cappadogia)와 프리기아 (Phrygia)를 통해 육로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본도(Pontus)로부터 온 함대를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모이도록 명령함. 타키투스. 위의 책.]


    2. [안토니우스를 만난 카이키나는 부하들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함]


     한편 모에샤에 있었던 제 3군단 사령관 안토니우스 프리무스(Antonius Primus)[㈜ 후에는 무키아누스(Mucianus)의 대적 안토니우스 프리무스(M. Antonius Primus)는 요세푸스가 말한대로 모이샤(Moesia)에서가 아니라 파노니아(Pannonia)의 7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다(타키투스 ‘박물학’ ii : 86). 그러나 그는 3군단 (Gallica)이 반역의 선두에 있었으므로 모이샤의 군단과 연합하였다.]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서둘러 비텔레우스를 치러 갔다. 비텔리우스는 카이키나 알레에누스(Caecina Alienus)에게 막강한 군대를 주고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를 막게했다. 카이키나는 오토를 살해한 이유로 해서 비텔리우스의 많은 신임을 받고 있었다.[㈜ 즉 갈리아 카살피나. 본도의 북쪽 이달리야(Italy).] 카이키나는 급히 서둘러 로마를 떠나 행군하였고, 골(Gaul)[㈜ 즉 갈리아 카살피나. 본도의 북쪽 이달리야(Italy).]에 있는 크레모나(Cremona)주위에서 안토니우스와 만났다. 크레모나는 이달리야 변경지역에 있는 도시였다. 카이키나는 적들의 숫자가 많고 전투대열로 잘 정돈된 것을 보고 감히 그들과 싸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후퇴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군대를 안토니우스에게 넘겨주리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타키투스는 ‘박물학’ ii.99와 iii.13 이하에서 더 풍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백부장과 그의 장중에 있던 사령관들을 불러 모아서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할 것을설득했다. 그는 비텔리우스를 깍아내리고 베스파시안의 권력을 칭송하였다.[㈜ “그는 베스파시안(Vespasianus)의 일부 탁월성과 힘을 칭송한다…. 그러나 비텔리우스(Vitellius)의 모든 것은 파멸 상태에 있다”(타키투스. ‘박물학’ iii. 13).] “비텔리우스는 이름만 황제이며, 베스파시안은 황제와 같은 실질적인 큰 권력을 가지고 있소. 싸워서 패배하느니 보다 위험을 피하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되므로 여러분들은 아예 싸우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좋겠소. 게다가 베스파시안은 우리들의 도움없이도 정권을 차지할 수 있는 반면 비텔리우스는 지금의 황제자리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항복하자는것이오.”


    3. [베스파시안은 카이키나를 따뜻하게 영접함]


     카이키나는 이 말을 하고 온갖 말로 그들을 설득시켜 그의 제안을 수락하게 만들었다. 즉 카이키나와 그의 군대는 비텔리우스를 배신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했으며, 비텔리우스가 복수하러 오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칼을 뽑아들고 카이키나를 죽이기 위해 공격했다. 만일 지휘관들이 무릎을 끓고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지 않았다면, 병사들은 카이키나를 죽였을 것이다.[㈜ 타키투스에 없는 상술(詳述). 타키투스는 군인들이 카에키나(Caecina)를 묶고 다른 지도자들을 택했다고만 설명한다.(‘박물학’.iii. 14). ] 병사들은 지휘관들의 간청으로 그를 죽이지는 않고 결박하여 반역자로 비텔리우스에게 보내려고 하였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 소식을 듣자그는 곧 부하들을 소집하고 무장시켜 반역한 자들을 공격하기위해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전투대열을 가다듬고 얼마 동안은 저항을 했으나 곧 무너져 크레모나로 도망갔다. 프리무스는 기병을 거느리고 크레모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차단하고 포위해서 크레모나 성벽 앞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크레모나 시로 도피한 나머지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도시도 약탈하게했다.

     많은 주민들 뿐 아니라 장사하는 많은 이방인들도[㈜ 축제가 되면 그 식민지는 항상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부로 풍부한 모습이었다. 온 도시가 며칠동안 온통 푹 빠져 있었다.(타키투스. 역사서. iii. 22이하).] 죽였다. 30,200명 가량의 비텔리우스 군대가 모두 죽었고, 한편 안토니우스는 모에샤에서 함께 온 병사들은 40,500명 가량을 잃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키나를 풀어주고 베스파시안에게 보내면서 승리 소식을 전했다. 그리하여 카이키나는 베스파시안에게 영접받고, 이런 뜻밖의 융숭한 대접으로 그의 반역이라는 오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4. 쥬피터의 신전에서 싸우다


     한편 안토니우스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사비누스(Sabinus)는[㈜ 598각주. 타키투스 ‘박물학’, iii. 64이하에서 그 이야기가 풍부하게 다루어져 있다. 사비누스(Sabinus)는 퇴위할 준비가 되있던 비텔리우스(Vitellius)와 상황들을 협상하려고 했으나 비텔리우스 추종자들은 이것을 방해했다. 그래서 그들과 사비누스(Sabinus)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생긴 마찰은 사비누스의 추종자들을 캐피톨(Capitol)에 있는 쥬피터신전으로 그들을 몰아붙였다.] 로마에서 용기를 내어 밤에 경비하는 보병대를[㈜ 일곱 개의 야간 경비 군단은 일종의 소방 여단으로 아구스도(Augustus)에 의해 창설되었다. (Suet. ‘Aug’. 30 ; Dion Cass. 55 : 26).] 모아서 한밤에 로마를 장악했다 [주후 69년 12월 18일].

     날이 새자[㈜ “밤의 끝에” 비텔리아누스 추종자들의 부주의와 폭우에 대한 경계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비누스(Sabinus)는 자녀들과 도미티안(Domitian)을 생환시켰으며 그의 추종자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타키투스. 역사서. iii. 69).] 많은 주요인사들이 그에게 왔는데 그중 그의 조카 도미티안(Domitian)도 있었는데, 도미티안의 대범한 용기가 이번 사비누스의 정권 탈취에 큰 힘으로 작용을 했던 것이다. 반면 비텔리우스는 프리무스에 대해선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사비누스와 함께 반역을 일으킨 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했다. 비텔리우스는 천성이 야만적이고 귀족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어 그와 함께 온 군대 일부를 보내 로마 신전(Cap-itol)에 대항해 싸우게 했다. 신전에서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결국 게르만에서 온 비텔리우스 병사들이 상대방에 비해 너무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언덕을 점령했다.[㈜ 타키투스의 ‘박물학’ iii. 70이하의 더 풍부한 자료에 따르면 군인들은 비텔리우스(Vitellius)의 명령없이 행동했다.] 그곳에서 도미티안과 로마의 다른 주요인물들은 가까스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풋나기로 변장된 도미티안(Domitian).타키투스 역사서. iii. 74.] 나머지 병사들은 완전히 박살 났으며, 사비누스는 비텔리우스에게 끌려가 살해당했다. 비텔리우스의 병사들은 신전의 장식물들을 약탈하고 불질렀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입성하다. 12월 20일]


     그러나 그 다음날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비텔리우스의 군대와 접전하였다. 세곳에서 전투를[㈜ 안토니우스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진격했다. 한 부대는 플라미니아 도로(Via flaminia)를 따라서, 또 한 부대는 살라리아(Via Salaria)도로를 따라 콜린에 게이트(Colline Gate)까지 그리고 다른 한 부대는 티버(Tiber)둑을 따라 진격했다. (타키투스. 역사서. 3:82).]한 끝에 비텔리우스 군대는 모두 전멸당했다.[㈜ 타키투스. ‘박물학’ iii. 84.] 마지막이 온 줄 알고 비텔리우스는 전보다 더 화려하고 호사스런 식사를 하고 술에 취한 채 궁전에서 나왔다가 붙잡히어서 주민들에게 끌려다니며 온갖 수모를 당하다 로마 한 가운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탈출을 시도한 후에 궁전에 숨어있다가 도망하려 했으나 게모니안(Gemonian)층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후 시체는 티버(Tiber까지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타키투스 iii. 84이하, Suet. ‘Vitell’. 17).] 결국 8개월 5일간의[㈜ 4월 17일부터 12월21일까지 (혹은 20일).] 통치를 끝으로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도 로마제국이 그의 사치와 호사스러움을 감당할 수없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살해된 자들은 5천 명도 넘는다. 이전쟁은 아펠라이우스(Appellaeus)월 3일에 시작했다.


     [무키아누스가 로마에 입성하다. 12월 2일 혹은 21일]


     그 다음날 무키아누스가 군대와 함께 로마로 들어가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하들에게 살상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군사들이 계속 집을 약탈했으며, 비텔리우스의 병사들과 많은 주민들도 함께 죽였기 때문이다.[㈜ 참). 타키투스, ‘박물학’. iv. 1,2.] 안토니우스의 군사들은 당파심 때문에 주민들도 비텔리우스 편으로 생각하고, 적과 주민을 구별하지 않고 경솔하게 살상했기 때문이다. 그후 안토니우스는 도미티안을 그의 아버지가 올 때까지 지도자로 주민들 앞에 내세웠다. 그래서 공포심에서 벗어난 백성들은 그들의 황제로서 베스파시안을 받아들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그의 황제취임과 비델리우스의 파멸을 축하하는 축제를 몇일 동안 지켰다.


      5.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베스파시안


     베스파시안이 알렉산드리아로 왔을 때 이 기쁜 소식이 로마에서 전해졌고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친선 사절단들이[㈜ 볼로게수스(Vologesus)왕으로부터 온 40,000명의 파르티안(Parthian)기병을 거느린 한명을 포위하여(타키투스. ‘박물학’. iv. 51).] 그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러 속속 몰려들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가까이에 있는 도시 중에서 가장 큼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오는 많은 사람들을 맞아들이기에는 너무 좁았다. 이제 완전히 베스파시안의 위치가 견고해지고 로마의 국정이 어지러움에서 평안을 되찾자, 베스파시안은 유대에 점령되지 않고 남아 있던 도시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겨울이 거의 끝났고, 알렉산드리아의 문제들도 해결되었기 때문에 급히 서둘러 로마로 갔으며,[㈜ 그는 도미티안의 행동에 대한 별로 달갑지 않은 보고를 받았다. (타키투스. ‘박물학’. iv. 51).] 그의 아들 티투스를 정예의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보냈다. 티투스는 니고볼리(Nicopolis)까지[㈜ 안토니우스(M.Antonius)의 최후 패배의 현장에 알렉산드리아 점령을 기념하여 주전 24년 아구스도(Augustus)가 세웠다. 이것은 그 도시의 동쪽으로(요세푸스에 의하면)2.5마일쯤 되거나(스트라보에 의하면)3.5마일 되는 곳에 있는 해안에 위치하고 있었다.(strabo. xvii. 795, Dion. Cass. ii. 18).] 걸어서 행군하였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20퍼얼롱[㈜ 스트라보(Strabo)에 의하면 ’30’.]의 거리였다.그곳에서 티투스는 그의 군대를 몇 척의 전함에 태우고 멘데시안 지역(Mendesian)을[㈜ 멘데스(Mendes)를 수도로 하고 있는 갑(山甲).] 따라[㈜ 혹은 ‘보다 위에’.] 나일(Nile)강으로 항해 해[㈜ 혹은 ‘위로 가로질러’ (나일강위로가 아니라 나일강을 통하여 : dia; tou’ Neivlou, not ajna; to’n Nei’lon ) 즉, 그는 Delta 지역을 가로질러 갔으며 그리고 그 길의 한 부분은 운하 옆에 있었을 것이다.] 드무이스(Thmuis)시[㈜ Tmai(Smith and Bartholomew. ‘성지지도'(Atlas of Holy Land) 7번지도)혹은 Tell-Ibu es-Salam, 즉 멘데스의 남서쪽.]까지 갔다. 드무이스에서 하선하여 행군했으며, 타니스(Tanis)라는[㈜ San. Thmuis 서편 약 20마일 떨어진 구약성경에 나오는 소안임.] 작은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날 티투스의 행선지는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po-lis)였고,[㈜ Heracleopolis Parva. 즉 지금 멘짤레(Menzaleh)호수로 덮여진 장소임.] 셋째날은 펠루시움(Pelusium)이었다.[㈜ Tell Farama 일명 Teneh(성경에 나오는 Sin, 겔 30:15). 전쟁.610.] 펠루시움에서 그는 이틀동안 군대를 휴식시키고 3일째 펠루시움에서 나일강 어귀를 통과했다. 그후 그는 사막을 지나 계속 진군하여 카시안 제우스(Casian Zeus) 신전[㈜ 몬스카시우스(Mons Casius)의 정상 근처에 있으며, 시르보니스(Sirbonis)호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사암(沙岩)지역인 제우스 암몬(Zeus Ammon)의 신전. 폼페이 무덤이 그 언덕 옆에 있음(Strabo. 17:760).]에서 진을 쳤으며, 그 다음날은 오스트라키네(Ostracine)에서 진을 쳤다. 오스트라키네는 물이 없었다.[㈜ 불확실함.] 그곳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서 물을 길어와 사용했다. 그후 티투스는 리노콜루라(Rhinocorura)에[㈜ 혹은 Rhinocolura. 애굽과 팔레스타인 경계에 있는 엘 아리쉬(El-Arish)이며 Wady el-Arish 즉 ‘애굽의 강’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경계를 표시한다]에 머물렀으며, 다시 네 번째 행선지인 라피아(Raphia)로[㈜ Refah : 폴리비우스 역시 이곳을 수리아 최초의 도시로 생각한다.]갔다. 라피아는 수리아의 변경에 있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행선지로 가사(Gaza)에서 진을 쳤고, 아스글론(Ascalon)을 거쳐 얌니아(Ja-mnia)와 욥바(Joppa)를 지나 가이사랴로 행군했다. 티투스는 가이사랴에 그의 다른 모든 병력을 집결하도록 결정했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