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베스파시안이 로마에서 환영받은 것과 게르만인들이 로마에 반역했다가 진압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르마티아인들이 미시아를 공격하다 철수 압력을 받아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것에 대하여
1. 로마에서 베스파시안이 열렬한 환영을 받음
한편 가이사 티투스는 이달리야의 모든 도시들이 그의 부친베스파시안의 도착을 열렬하고 화려하게 영접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꼈으며, 이제껏 마음 조려오던 아버지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아주 만족스러워 하였다.전 이달리야 주민들은 베스파시안이 아직 이달리야에 도착하지않았는데도 마치 그가 이미 도착하기라도 한 듯이 마음 속 깊이베스파시안에게 존경심을 표했으며, 너무나 베스파시안을 학수고대했기 때문에 그가 온다는 기대가 마치 실제로 베스파시안이 도착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베스파시안에 대한 열정을 보여 주었다. 이 열정은 어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열정이었다. 한편 로마 원로원들도 통치자들이 계속 바뀌는 정권 교체의 참상을 겪은 것을 기억하고있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안 같은 인격이나 지적인 면에서의 원숙함과 전투의 공적으로 뛰어난 명성을 고루 갖춘 인물이 황제가된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하게 생각했다. 원로원들은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추대되는 것은 오직 그의 백성들의 복지와 안녕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로마 백성들 역시 내란으로인해 지쳐있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안이 오기만을 더욱 더 갈망하고 있었으며, 드디어 그들의 내란은 영원히 끝났다고 기대하면서 안전과 번영이 다시 찾아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무엇보다도 로마 병사들이 베스파시안을 주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병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베스파시안이 승리로 이끈전쟁의 뛰어난 공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다른 그전의 황제들의 비겁함과 전투 기술의 부족함을 이미 겪었기 때문에 이러한 굴욕스런 수치심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병사들은 베스파시안이면 그들을 이러한 수치심에서 건져내줄 수 있으며, 로마 군대에게 큰 영광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원로원이나 시민들이나 병사들 모두가베스파시안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는 가운데, 신분이 높은 고위인사들은 베스파시안을 기다리는 것에 안달이 나서 로마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서둘러 가서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려고하였다. 나머지 일반 시민들도 베스파시안을 맞이하는 것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무리를 지어 도시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시민들은 도시에 그냥 남아 있는 것보다 도시 밖으로 나가서 베스파시안을 기다리는 것이 더 좋고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도시 안에 남아 있는 자들보다 밖으로 나간 자들의수가 더 많았기 때문에, 도시가 처음으로 텅비게 되었다. 어쨌든 시민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베스파시안을 맞이하러 도시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도시 안에 남아있던 전체 시민들은 베스파시안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소식과 먼저 앞서 맞으러 갔던자들이 베스파시안이 상냥하게 모든 자들을 대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와 베스파시안을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베스파시안이 지나가자모여 있던 시민들은 기쁨에 겨웠으며, 온화한 베스파시안의 모습을 보자 온갖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를 \”은인\”이요 \”구원자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다운 황제\”라고 함성을 질렀다. 게다가 로마시 전체가 마치 신전인 것처럼 온통 꽃장식과 향기로가득찼다. 베스파시안은 그를 둘러 싸고 있는 많은 시민들 때문에 아주 힘들게 왕궁에 도착한 후에, 그의 가호신(家護神)들에게 그의 귀환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군중들은 축하 행사장에 갔으며 족속과 가문과 이웃별로 연회를 즐겼으며, 관제(灌祭)를 드리면서 신에게 베스파시안이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황제로 있어줄 것과 그의 아들과 후손들이 통치권을 잘 수호하고 도전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사실 로마는 이렇게 베스파시안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화려한 번영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2. 게르만인들과 골(Gaul)지방 거주민들의 반란
베스파시안이 로마로 돌아와 황제가 되기 전에, 다시 말하면그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있었고, 그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을 때 많은 게르만인들(theGermans)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인근 지역에 사는 골인들(the Gauls)도 게르만인들의 야심에 동참하여 그들과 공모한다면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큰 기대를 품고 반역을 일으켰다.[㈜ 이 반역의 이야기는 타키투스 \’박물학\'(H.N.), iv. 12-37, 54-79, v.14-26(여기에서 역사가 끝이 난다)에 의해 장황하게 서술된다. 지도자 Julius Civilis는 바타비아(Batavia)인들을 이끌어 라인(Rhine)강의 삼각주 지역을 점령했는데, 베스파시안을 위한 것으로 시작했으나 비텔리우스 패배 후에(주후 69년 10월)는 그 자신을 위한 처신으로 끝났다. 그의 골 동료이자 트레베리(Treveri)의 유명한 귀족이었던 Julius Classicus는 골을 제국(Imperium Galliarum)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바타비아인들과 골인들은 로마를 적대시하는 것이 공통 관심사였으며 지금까지 그들은 서로 협력했으나 Civilis는 골 제국(imperium Galliarum)과는 무관했다.\”(Bury)] 게르만인들이 이같은 반란을 일으켜서 전쟁을 선포하려고 한 이유는, 첫째로 올바른 판단력이 없어 실오라기같이 미약한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도 무조건 위험에 뛰어드는게르만인들의 국민성 때문이며,[㈜ 참). 타키투스(Tacitus)의 \’Germ.\’14의 기록을 보라.] 두 번째로는 로마인들 이외에는 아무도 게르만인들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유일한 그들의 정복자인 로마인들에 대한 증오심에서 반역을 꾀했던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대담하게 반역을 일으키게된 것은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게르만인들은 로마 제국이 계속적인 정권 교체로 인해 국내적으로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모든 지역들이 동요를 일으키고 흥분으로 들끓고 있다는 소식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게르만인들은 로마 제국의 내란과 알력다툼으로 인해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타키투스. \’Hist.\’ iv.54에는 적의 의기양양한 사기에 대하여 더 많은 이유를 첨가한다.] 따라서 반역의 음모를 품은 게르만인들은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이것은 게르만인 지휘관인 클라시쿠스(Classicus)와 키빌리스(Civilis)의 선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클라시쿠스와 키빌리스는 오래 전부터 반역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게르만인들에게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고, 기회가 주어지자 대범해져서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밝혔으며, 이에 반역을 열망하고 있던 백성들도 열정적으로 응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많은 게르만인들은 이미 반역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동조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치 신의 섭리의 인도하심처럼 베스파시안이 게르만 지역의 이전 지휘관인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우스(Petillius Cerealius)에게[㈜ 군대 장관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스(Q.Petilius Cerealis)는 베스파시안의 가까운 친척이며 원기 왕성하였으나 경솔한 사령관으로 주후 61년에 보아디케아(Boadicea)지배하에 있던 브리톤스(Britons)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69년 제국에 대한 베스파시안의 요구를 지지하면서 그는 로마의 성벽 아래에서 또 한번의 패배를 맛보았다. 게르만과 골(Gall)의 폭동을 진압하는데 성공했으며, 타키투스에 따르면 요세푸스가 본문에서 표현한 것같이 그는 그리 성급하지도 변화무쌍하지도 않았다. 주후 72-72년경에는 집정관의 사절로 브리튼(Britain)에 가서 브리간테스(Brigantes)족(Britain 북쪽 지파-역주)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며 아그리콜라(Agricola)의 인재들을 불러내었다(타키투스, \’Agr.\’ 8.17).] 서한을 보내 그에게 집정관 직을 수여하면서 브리튼(Britain)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해 출발하라고 지시하였다.[㈜ 타키투스는 게르만(German)에서 했던 이전의 명령이나 브리튼(Britain)으로 진출하는 이 중대한 시점에서 했던 지시들을 기록하지 않는다.] 이에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우스는 베스파시안이 지시한 곳으로 떠나는 중에 게르만인들의 반역 소식을들었다. 그는 게르만인 병력들이 집결했을 때 바로 그들을 공격했으며, 정정당당한 전투로 많은 게르만인들을 살해하였으며그들이 어리석은 미친 짓을 버리고 정신을 차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케레알리우스가 그렇게 신속하게 게르만 지역을 공격하러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게르만인들은 머지 않아 곧 처벌을 받게될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게르만인들의 반란소식이 로마에 전해지기가 무섭게, 이 소식을 들은 가이사 도미티안(Domitian Ca-esar)은 아직 어린 애숭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반란진압 책임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도미티안은 아버지 베스파시안의 용맹스러움을 타고 났으며, 어린 나이 답지 않게 훈련을 통해 용맹스러움을 가꾸어 왔기 때문에 게르만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행군을 감행하였다. 도미티안이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게르만인들은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에 휩싸였으며, 맞붙어 싸워 재난을 당하느니다시 옛날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더 이익이며, 공포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생각하고 로마군에 항복하여 도미티안의 자비를 구하였다. 따라서 도미티안은 골(Gaul)지방에서 모든 문제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해결하여 앞으로 다시는 이 지역에서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 후에 로마로 돌아왔다. 결국 도미티안은 이번 일로 어린 나이답지 않게 뛰어난 공훈을 세워 영광과 찬사를 한 몸에 받게 되었으며,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감탄의 칭찬을 듣게 된 것이다.[㈜ 플라비안스(Flavians)의 피보호민인 요세푸스는 이 출정에서 도미티안(Domitian)의 몫을 분명히 과장하고 있다. 타키투스, \’Hist.\’iv.85이하에는 다르게 이야기 한다. 도미티안이 무키아누스(Mucianus)와 함께 룩두눔(Lugdunum)에 도착했을 때 승리는 얻어진 것이다.; \”unde creditur Domitianus occultis ad Cerialem nuntiis fidem eius temptavisse, an praesenti sibi exercitum imperiumque traditurus foret.\” 나이든 관리들에게 무시당한 도미티안은 은둔생활로 물러났다.]
3. 사르마티아인(Sarmatians)들이 모에시아(Moesia) 지방을 공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앞서 언급한 게르만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때를 같이하여 로마인들에 대항하는 스구디아인(Scythian)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본문에 서술한 사건들에 대한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 같다. 타키투스, \’Hist.\’ iv.54에는 키빌리스(Civilis)를 반역에 가담시키려고 골인들을 선동하는 것의 하나로 침략의 소문이 있었다는 것만을 언급한다. : \”vulgato rumore a Sarmatis Dacisque Moesica ac Pannonica hiberna circumsederi ; paria de Britannis fingebatur.\” ] 스구디아인들을 사르마티아인들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아주 많은 숫자를 지닌 족속이었다. 이들은 몰래 이스테르강(the Ist-er)을[㈜ 다뉴브(The Danube).] 가로질러 강기슭 맞은 편으로 건너가서 로마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들의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어서 훨씬 더 사납고 세차게 로마 병사들을 살해할 수 있었다. 살해당한 로마 병사들 가운데에는 (파견) 집정관인 폰테이우스 아그립바(Fonteius Agrippa)도[㈜ 주후 69년에 아시아 지역의 총독. 그는 70년에 Moesia의 지휘권을 갖기 위해 소환되었다(타키투스. \’Hist.\’ iii. 46).] 있었으며 그는 사르마티아인들을 맞아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전사하였다. 사르마티아인들은 그후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전 영토를 황폐케 하였으며,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스파시안은 모에시아(Moesia)지역이 온통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에 루브리우스 갈루스(Rubrius Gallus)를 파견해 사르마티아인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곳은 비텔리우스(Vitellius)와 대적한 오토(Otho)전쟁에서 그가 점령했으며, 계속되는 사건들은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온다(\’박물학\’. ii.. 51.99).] 이에 루브리우스 갈루스는 계속되는 전투로 많은 사르마티아인들을 살해하였으며, 살아남은 사르마티아인들은 공포에 질려 다른 지방으로 도망하였다. 갈루스는 전투를 끝낸후에 더욱 강인한 병사들을 증원시켜 이 지역에 배치시킴으로써 사르마티아인들이 이스테르강을 절대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앞으로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대책을 강구하였다.

제 4 장
베스파시안이 로마에서 환영받은 것과 게르만인들이 로마에 반역했다가 진압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르마티아인들이 미시아를 공격하다 철수 압력을 받아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것에 대하여
1. 로마에서 베스파시안이 열렬한 환영을 받음
한편 가이사 티투스는 이달리야의 모든 도시들이 그의 부친베스파시안의 도착을 열렬하고 화려하게 영접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꼈으며, 이제껏 마음 조려오던 아버지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아주 만족스러워 하였다.전 이달리야 주민들은 베스파시안이 아직 이달리야에 도착하지않았는데도 마치 그가 이미 도착하기라도 한 듯이 마음 속 깊이베스파시안에게 존경심을 표했으며, 너무나 베스파시안을 학수고대했기 때문에 그가 온다는 기대가 마치 실제로 베스파시안이 도착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베스파시안에 대한 열정을 보여 주었다. 이 열정은 어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열정이었다. 한편 로마 원로원들도 통치자들이 계속 바뀌는 정권 교체의 참상을 겪은 것을 기억하고있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안 같은 인격이나 지적인 면에서의 원숙함과 전투의 공적으로 뛰어난 명성을 고루 갖춘 인물이 황제가된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하게 생각했다. 원로원들은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추대되는 것은 오직 그의 백성들의 복지와 안녕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로마 백성들 역시 내란으로인해 지쳐있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안이 오기만을 더욱 더 갈망하고 있었으며, 드디어 그들의 내란은 영원히 끝났다고 기대하면서 안전과 번영이 다시 찾아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무엇보다도 로마 병사들이 베스파시안을 주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병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베스파시안이 승리로 이끈전쟁의 뛰어난 공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다른 그전의 황제들의 비겁함과 전투 기술의 부족함을 이미 겪었기 때문에 이러한 굴욕스런 수치심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병사들은 베스파시안이면 그들을 이러한 수치심에서 건져내줄 수 있으며, 로마 군대에게 큰 영광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원로원이나 시민들이나 병사들 모두가베스파시안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는 가운데, 신분이 높은 고위인사들은 베스파시안을 기다리는 것에 안달이 나서 로마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서둘러 가서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려고하였다. 나머지 일반 시민들도 베스파시안을 맞이하는 것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무리를 지어 도시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시민들은 도시에 그냥 남아 있는 것보다 도시 밖으로 나가서 베스파시안을 기다리는 것이 더 좋고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도시 안에 남아 있는 자들보다 밖으로 나간 자들의수가 더 많았기 때문에, 도시가 처음으로 텅비게 되었다. 어쨌든 시민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베스파시안을 맞이하러 도시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도시 안에 남아있던 전체 시민들은 베스파시안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소식과 먼저 앞서 맞으러 갔던자들이 베스파시안이 상냥하게 모든 자들을 대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와 베스파시안을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베스파시안이 지나가자모여 있던 시민들은 기쁨에 겨웠으며, 온화한 베스파시안의 모습을 보자 온갖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를 “은인”이요 “구원자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다운 황제”라고 함성을 질렀다. 게다가 로마시 전체가 마치 신전인 것처럼 온통 꽃장식과 향기로가득찼다. 베스파시안은 그를 둘러 싸고 있는 많은 시민들 때문에 아주 힘들게 왕궁에 도착한 후에, 그의 가호신(家護神)들에게 그의 귀환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군중들은 축하 행사장에 갔으며 족속과 가문과 이웃별로 연회를 즐겼으며, 관제(灌祭)를 드리면서 신에게 베스파시안이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황제로 있어줄 것과 그의 아들과 후손들이 통치권을 잘 수호하고 도전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사실 로마는 이렇게 베스파시안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화려한 번영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2. 게르만인들과 골(Gaul)지방 거주민들의 반란
베스파시안이 로마로 돌아와 황제가 되기 전에, 다시 말하면그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있었고, 그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을 때 많은 게르만인들(theGermans)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인근 지역에 사는 골인들(the Gauls)도 게르만인들의 야심에 동참하여 그들과 공모한다면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큰 기대를 품고 반역을 일으켰다.[㈜ 이 반역의 이야기는 타키투스 ‘박물학'(H.N.), iv. 12-37, 54-79, v.14-26(여기에서 역사가 끝이 난다)에 의해 장황하게 서술된다. 지도자 Julius Civilis는 바타비아(Batavia)인들을 이끌어 라인(Rhine)강의 삼각주 지역을 점령했는데, 베스파시안을 위한 것으로 시작했으나 비텔리우스 패배 후에(주후 69년 10월)는 그 자신을 위한 처신으로 끝났다. 그의 골 동료이자 트레베리(Treveri)의 유명한 귀족이었던 Julius Classicus는 골을 제국(Imperium Galliarum)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바타비아인들과 골인들은 로마를 적대시하는 것이 공통 관심사였으며 지금까지 그들은 서로 협력했으나 Civilis는 골 제국(imperium Galliarum)과는 무관했다.”(Bury)] 게르만인들이 이같은 반란을 일으켜서 전쟁을 선포하려고 한 이유는, 첫째로 올바른 판단력이 없어 실오라기같이 미약한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도 무조건 위험에 뛰어드는게르만인들의 국민성 때문이며,[㈜ 참). 타키투스(Tacitus)의 ‘Germ.’14의 기록을 보라.] 두 번째로는 로마인들 이외에는 아무도 게르만인들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유일한 그들의 정복자인 로마인들에 대한 증오심에서 반역을 꾀했던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대담하게 반역을 일으키게된 것은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게르만인들은 로마 제국이 계속적인 정권 교체로 인해 국내적으로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모든 지역들이 동요를 일으키고 흥분으로 들끓고 있다는 소식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게르만인들은 로마 제국의 내란과 알력다툼으로 인해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타키투스. ‘Hist.’ iv.54에는 적의 의기양양한 사기에 대하여 더 많은 이유를 첨가한다.] 따라서 반역의 음모를 품은 게르만인들은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이것은 게르만인 지휘관인 클라시쿠스(Classicus)와 키빌리스(Civilis)의 선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클라시쿠스와 키빌리스는 오래 전부터 반역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게르만인들에게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고, 기회가 주어지자 대범해져서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밝혔으며, 이에 반역을 열망하고 있던 백성들도 열정적으로 응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많은 게르만인들은 이미 반역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동조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치 신의 섭리의 인도하심처럼 베스파시안이 게르만 지역의 이전 지휘관인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우스(Petillius Cerealius)에게[㈜ 군대 장관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스(Q.Petilius Cerealis)는 베스파시안의 가까운 친척이며 원기 왕성하였으나 경솔한 사령관으로 주후 61년에 보아디케아(Boadicea)지배하에 있던 브리톤스(Britons)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69년 제국에 대한 베스파시안의 요구를 지지하면서 그는 로마의 성벽 아래에서 또 한번의 패배를 맛보았다. 게르만과 골(Gall)의 폭동을 진압하는데 성공했으며, 타키투스에 따르면 요세푸스가 본문에서 표현한 것같이 그는 그리 성급하지도 변화무쌍하지도 않았다. 주후 72-72년경에는 집정관의 사절로 브리튼(Britain)에 가서 브리간테스(Brigantes)족(Britain 북쪽 지파-역주)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며 아그리콜라(Agricola)의 인재들을 불러내었다(타키투스, ‘Agr.’ 8.17).] 서한을 보내 그에게 집정관 직을 수여하면서 브리튼(Britain)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해 출발하라고 지시하였다.[㈜ 타키투스는 게르만(German)에서 했던 이전의 명령이나 브리튼(Britain)으로 진출하는 이 중대한 시점에서 했던 지시들을 기록하지 않는다.] 이에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우스는 베스파시안이 지시한 곳으로 떠나는 중에 게르만인들의 반역 소식을들었다. 그는 게르만인 병력들이 집결했을 때 바로 그들을 공격했으며, 정정당당한 전투로 많은 게르만인들을 살해하였으며그들이 어리석은 미친 짓을 버리고 정신을 차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케레알리우스가 그렇게 신속하게 게르만 지역을 공격하러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게르만인들은 머지 않아 곧 처벌을 받게될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게르만인들의 반란소식이 로마에 전해지기가 무섭게, 이 소식을 들은 가이사 도미티안(Domitian Ca-esar)은 아직 어린 애숭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반란진압 책임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도미티안은 아버지 베스파시안의 용맹스러움을 타고 났으며, 어린 나이 답지 않게 훈련을 통해 용맹스러움을 가꾸어 왔기 때문에 게르만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행군을 감행하였다. 도미티안이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게르만인들은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에 휩싸였으며, 맞붙어 싸워 재난을 당하느니다시 옛날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더 이익이며, 공포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생각하고 로마군에 항복하여 도미티안의 자비를 구하였다. 따라서 도미티안은 골(Gaul)지방에서 모든 문제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해결하여 앞으로 다시는 이 지역에서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 후에 로마로 돌아왔다. 결국 도미티안은 이번 일로 어린 나이답지 않게 뛰어난 공훈을 세워 영광과 찬사를 한 몸에 받게 되었으며,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감탄의 칭찬을 듣게 된 것이다.[㈜ 플라비안스(Flavians)의 피보호민인 요세푸스는 이 출정에서 도미티안(Domitian)의 몫을 분명히 과장하고 있다. 타키투스, ‘Hist.’iv.85이하에는 다르게 이야기 한다. 도미티안이 무키아누스(Mucianus)와 함께 룩두눔(Lugdunum)에 도착했을 때 승리는 얻어진 것이다.; “unde creditur Domitianus occultis ad Cerialem nuntiis fidem eius temptavisse, an praesenti sibi exercitum imperiumque traditurus foret.” 나이든 관리들에게 무시당한 도미티안은 은둔생활로 물러났다.]
3. 사르마티아인(Sarmatians)들이 모에시아(Moesia) 지방을 공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앞서 언급한 게르만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때를 같이하여 로마인들에 대항하는 스구디아인(Scythian)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본문에 서술한 사건들에 대한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 같다. 타키투스, ‘Hist.’ iv.54에는 키빌리스(Civilis)를 반역에 가담시키려고 골인들을 선동하는 것의 하나로 침략의 소문이 있었다는 것만을 언급한다. : “vulgato rumore a Sarmatis Dacisque Moesica ac Pannonica hiberna circumsederi ; paria de Britannis fingebatur.” ] 스구디아인들을 사르마티아인들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아주 많은 숫자를 지닌 족속이었다. 이들은 몰래 이스테르강(the Ist-er)을[㈜ 다뉴브(The Danube).] 가로질러 강기슭 맞은 편으로 건너가서 로마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들의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어서 훨씬 더 사납고 세차게 로마 병사들을 살해할 수 있었다. 살해당한 로마 병사들 가운데에는 (파견) 집정관인 폰테이우스 아그립바(Fonteius Agrippa)도[㈜ 주후 69년에 아시아 지역의 총독. 그는 70년에 Moesia의 지휘권을 갖기 위해 소환되었다(타키투스. ‘Hist.’ iii. 46).] 있었으며 그는 사르마티아인들을 맞아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전사하였다. 사르마티아인들은 그후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전 영토를 황폐케 하였으며,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스파시안은 모에시아(Moesia)지역이 온통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에 루브리우스 갈루스(Rubrius Gallus)를 파견해 사르마티아인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곳은 비텔리우스(Vitellius)와 대적한 오토(Otho)전쟁에서 그가 점령했으며, 계속되는 사건들은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온다(‘박물학’. ii.. 51.99).] 이에 루브리우스 갈루스는 계속되는 전투로 많은 사르마티아인들을 살해하였으며, 살아남은 사르마티아인들은 공포에 질려 다른 지방으로 도망하였다. 갈루스는 전투를 끝낸후에 더욱 강인한 병사들을 증원시켜 이 지역에 배치시킴으로써 사르마티아인들이 이스테르강을 절대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앞으로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대책을 강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