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온 반박문 서문

 


1. 요세푸스의 생애



 「자서전」에는 저자의 생(生)이 불필요하리만큼 잡다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저술은 단지 6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쓰여진 까닭 \’유대전쟁사\’나 그 밖의 다른 \’유대교대사\’를 통해 보충될 필요가 있으므로 여기에서 그 중요한 사실을 간단히 요약해 보고자 한다.

  마티아스의 아들이 요세푸스(Joseph ben Mattias)는 제사장의 아들로, 어머니쪽이 왕족의 혈통을 지녔으며 가이우스〈Gai-us, 칼리굴라 (Caligula)〉가 즉위한 해인 주후 (A.D.)37-38년에 태어났다. 바로 그 전해에 본디오 빌라도(Pontus Pilate)가 유대에서 소환당하고 헤롯 아그립바 Ⅰ세(Herod Agrippa Ⅰ)가 구금에서 풀려나 유대왕국을 새 황제로 임명 받았다. 요세푸스가 어렸을 때 칼리굴라 (Caligula)가 성전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던 일로 인해 팔레스틴(Palestine)에서 반역을 일으킬 뻔했는데 가까스로 그것을 막을 수 있었던 사건(주후40-41)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조숙하여 일찍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나이 14세때 많은 학식있는 율법학자들(Rabbis)이 조언을 듣기 위해 그에게로 몰려 들었다고 하며, 16세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바리새파(Pharisees)와 평생을 함께 하였다.  요세푸스가 청년 시절인 26~27세경에 로마에 간 것은 한가지 큰 사건 때문이었다.  즉 그해에 로마에 대화재가 있었고,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그의 로마 도착보다 먼저 일어났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기독교로 개종했는지에 대해서는 그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유추할수는 없다. 다만 요세푸스의 이 로마행의 내면적인 중요한 동기는 로마로 호송된 유대 제사장들의 석방이라는 표면적인 목적을 넘어선 것이며, 이것은 쓸데없는 억측일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이 로마 방문이 그로 하여금 로마가 천하무적임을 지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로 돌아온 그는 동족이 로마에 반기를 들고자 모의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무리를 진정시키려고 노격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에 수리아의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는 곧바로 유대로 진격하였다. 그런데 66년 가을에 예루살렘을 거의 정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유도 없이 철수하다가, 벧호론 (Bethhoron)의 좁은 골짜기에서 갈루스가 거느린 로마 군대는 어이없이 참패하였다. 따라서 그는 전투를 재개하려고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요세푸스는 29세의 젊은 제사장으로서 비록 자격미달 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2명과 함께 갈릴리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요세푸스의 자서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후66-67년 갈릴리에서 일어난 반란의 배경설명에 대해서 우리는그의 견해를 완전히 따를 수는 없으며 요세푸스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정책이나 목적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 기간에 대한 두가지 주장이 있는데 서로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에서 여러 가지가 상충된다. 「자서전」에서 우리는 작가의 경쟁자인 유대인 역사가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요세푸스의 입장을 대할 수 있다. 그와 경쟁적인 입장에 잇었던 역사가는 로마군과의 전쟁에 대해 그 원인이 요세푸스와 갈릴리인들의 폭동 때문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자서. 65(340)〉 「유대전쟁사」에서 우리는 요세푸스가 로마의 비호 아래 그 책을 쓰고 있다는 간략한 진술을 읽을 수 있다. 「유대전쟁사」에서는 요세푸스가 처음부터 갈릴리의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전쟁.2권(568)〉 .자서전에서는 그의 임무가 주전론자(主戰論者)들에게 무기를 버리도록 설득하는 겄아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자서전」7(29)CP77〉.최근에 라쿠오이어(Laquer)라는 사람이 이러한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제안을 했지만 그 작품은 차라리 공상적이라 해야 옳다. 그는 요세푸스가 초인(ultra vires)으로 갈릴리의 최고지휘관으로 행동했다고 강조하면서 바로 이점 때문에 기스칼라(Gischala) 출신의 요한이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시도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어쨌든, 요세푸스는 로마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려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아마 서로타협점을 찾아 전쟁을 피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빨리 진행되었으며 요세푸스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는 쪽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Vespasian)이 안디옥(Antioch)에서 진격해 오자 결국 요타파타(Jot-apata)의 요새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버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로마군의 47일간의 포위공격으로 도시는 로마의 수중으로 떨어졌고(67년 7월) 요세푸스는 은신처에서 그의 친구들에 의해 살해될 뻔했던 상황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후에 로마군에 생포되었다. 또한 그는 베스파시안(Vespasian)이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않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유대전쟁사」3권에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로마에서의 그의 삶은 안락하고 평안한 생활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68년에서 69년 동안 장기 중단되었는데 그 까닭은 (Nero)가 죽고 계속해서 3명의 황제가 바뀌는 혼란기였기 때문이었다. 69년 7월에 베스파시안의 군대는 스스로 법률을 만들어 베스파시안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새로 황제가 된 베스파시안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가 황제로 즉위할 것을 예언한 요세푸스를 석방한 일이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까지 수행했으며 티투스(Titus)와 함께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예루살렘에서의 요세푸스의 임무는 통역자와 중재인으로 지속적인 교량 역할을 하는것이었다. 따라서 요세푸스는 유대인과 로마군 양쪽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즉 유대인들로 부터는 몹시도 미움을 사게 되었고, 로마군에게는 그가 언제 로마군을 반역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샀다.

  예루살렘의 함락 후(주후70) 그가 로마에서 살 때 플라비안황제들(Flavian Emperors)에게서 여러 가지의 특권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의 사저(Priuata aedes)에서 기거하면서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베스파시안〔자서. 76(423) :수에토니우스 \’Vesp\’18〕이 만든 \’로마 시민권 목록\'(civil list)에 제일 먼저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Ves-pasian)과 티투스(Titus)의 승리를 목격했고, 네로(Nero)의 통치때에는 대화재의 잿더미 속에서 로마가 새롭게 재건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콜로세움(Colosseum)과 베스파시안과 티투스 광장(Fora)과 평화의 신전(the Temple of Peace)이 새로 건설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요세푸스는 유대인들로부터는 미움을 계속해서 받았으나 베스파시안의 총애는 물론 도미티안이 황제가 될 때까지 게속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적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날짜는 알 수 없으나, 포티우스(Photius)에 의하면 주후 100년에 죽은 아그립바 Ⅱ세〔자서.65(359)〕보다 오래 살았다고 전한다. 유세비우스(Eusebius)\’교회사\’ ⅲ. 9)에 의하면 그의 동상이 로마에 세워졌으며 그의 저술들이 공공 도서관에 보관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가정생활은 부부간에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3번은 결혼을 했는데 한 부인은 그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다른 부인과는 이혼을 했다〈자서. 75(415),76(426)이하〉.



 2. 주요 작품들



  로마에서 요세푸스는 안락한 삶을 영위하면서 4권의 역사책을 저술하였다. 「유대전쟁사(Jewish War)」,「유대고대사(An-tiquities」,「자서전(the life)」, 그리고 「아피온반박문(AgainstApion)이 그것이다.

  그중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가 가장 주목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충분히 이야기 되어야 될 것은 요세푸스가 유대전쟁사를 단번에 저술했던 사실이다. 그리고 첫번째의(잃어버린)초안은 상부 수리아(Upper Syria) 사람들을 위해 아람어(Ara-maic)로 저술되었다〔전쟁 1권1:1(3)〕. 이 저술은 베스파시안이 전에 거주했던 궁전 안에서 작성되었고, 아마도 황제 후원에 의해 일종의 성명서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반란을 일으키려는동족의 경거망동한 자들을 향한 경고로 만들어진 저술이기도 하다. 두 번째 사본은 의심할 것도 없이 초안이 아닌 완벽한 형태로 헬라어 조수의 도움으로 헬라어로 제작되어 베스파시안 치세 말년 주후 75와 79년 사이에 발간되었다.

 약 16년이 경과한 후에 그의 다음 작품, 「유대고대사the An-tiquities)」가 주후 93-94년에 발간되었다. 이 사이의 기간은이 대작들(magnum opus)을 쓰기 위한 자료들을 모으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의 작품에 대한 교정에 오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미티안은 학문에는 반대세력이었으며 특히 역사가들의 위치는 불확실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타키투스(Tacitus), 플리니(Pliny), 쥬베날(Juvenal)과 같은 저숙가들은 도미티안의 치세 동안 침묵하며지낸 작가들이다. 총애해 주던 황제가 죽은 후 요세푸스는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를 만나게 된다. 에바브로디도는 문법학자이며, 거대한 도서관의 소유자였으며 호머(Homer)에 대한 저숙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요세푸스는 에바브로디도에게 자신의 말년의 작품들을 모두 헌정했다.

  이 「유대고대사」의 끝부분 20권 12 : 1(267)이하에서 요세푸스는 앞으로 두가지 학문적 연구를 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 두가지란 유대민족의 전쟁에 대한 설명과 전쟁후의 역사이며,또 다른 한가지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율법에 관하여 다룸과 동시에 율법이 허용하는 것은 무엇 무엇이며 금하는 것들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4권으로 책을 낼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출판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부분인 \”관습과 그 원인에 관하여\”라는 저술은 4권이라는 책의 권수까지 언급한 것과 「유대고대사」안에 암시되어진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그의 마음 속에 부분적으로 구체적인 형태로 초안이 잡혔을 것이다. 유세비우스(Eusbius)「교회사」ⅲ. 10이 요세푸스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과 마카비 4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3. 그외의 작품들



  이 책에 포함된 두 개의 소작들은 작가가 마지막으로 저술한 것이다. 역자(1)는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했는데 그것은 아마 자서전이 먼저 위치하는 것이 순서상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하바드판은 \’자서전\’과 \’아피온반박문\’이 1권으로 편집되어있다. -역자(2)주) 더우기 최근에는 자서전의 저작연대에 대한의문이 재개되었으며 만약 아래에 언급한 라쿠오이어(Laq-ueur)의 학설이 옳다고 한다면 이 자서전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아피온반박문」과「자서전」은 서로 알맞게 조화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저술들은 2세기초 트라얀(Trajan) 황제 치하에서 저자가 63세를 넘은 노년기에 발행되어졌다. 「자서전」은 주후100년 아그립바 Ⅱ세가 죽은 후에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와견줄만한 다른 전쟁사의 출현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서. (359)〕2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피온 반박문」Con-tra Apionem)은 94년 기록된 「유대고대사」보다 훨씬 후에 「유대고대사」를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아피.1권1(1),10(54):2권31(287)〕. 그러나「아피온 반박문」에는 유대전쟁사를 다루고 있는 달른 역사가들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비록 요세푸스가 이 책에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요세푸스의 중요한 공격대상의 인물은 유스투스임이 분명하며 이 유스투스는 「자서전」에서도 언급되어진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피온 반박문」은 2세기 초에나 기록되어 쓰여졌을 것이라 추측되는 것이다.「아피온반박문」과 「자서전」은 보기드문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두 저서에서 우리는 요세푸스의 최악의 상태와 최고의 상태를 볼 수 있다. 「아피온반박문」과「자서전은 둘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하나는 자신에 대한 변증 (apologiapro vita)이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progerite sua) 저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배열과 방법은 같은 사람이 동시대에 제작한 것이라고 추측하기에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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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1. 요세푸스의 생애


     「자서전」에는 저자의 생(生)이 불필요하리만큼 잡다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저술은 단지 6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쓰여진 까닭 ‘유대전쟁사’나 그 밖의 다른 ‘유대교대사’를 통해 보충될 필요가 있으므로 여기에서 그 중요한 사실을 간단히 요약해 보고자 한다.

      마티아스의 아들이 요세푸스(Joseph ben Mattias)는 제사장의 아들로, 어머니쪽이 왕족의 혈통을 지녔으며 가이우스〈Gai-us, 칼리굴라 (Caligula)〉가 즉위한 해인 주후 (A.D.)37-38년에 태어났다. 바로 그 전해에 본디오 빌라도(Pontus Pilate)가 유대에서 소환당하고 헤롯 아그립바 Ⅰ세(Herod Agrippa Ⅰ)가 구금에서 풀려나 유대왕국을 새 황제로 임명 받았다. 요세푸스가 어렸을 때 칼리굴라 (Caligula)가 성전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던 일로 인해 팔레스틴(Palestine)에서 반역을 일으킬 뻔했는데 가까스로 그것을 막을 수 있었던 사건(주후40-41)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조숙하여 일찍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나이 14세때 많은 학식있는 율법학자들(Rabbis)이 조언을 듣기 위해 그에게로 몰려 들었다고 하며, 16세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바리새파(Pharisees)와 평생을 함께 하였다.  요세푸스가 청년 시절인 26~27세경에 로마에 간 것은 한가지 큰 사건 때문이었다.  즉 그해에 로마에 대화재가 있었고,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그의 로마 도착보다 먼저 일어났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기독교로 개종했는지에 대해서는 그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유추할수는 없다. 다만 요세푸스의 이 로마행의 내면적인 중요한 동기는 로마로 호송된 유대 제사장들의 석방이라는 표면적인 목적을 넘어선 것이며, 이것은 쓸데없는 억측일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이 로마 방문이 그로 하여금 로마가 천하무적임을 지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로 돌아온 그는 동족이 로마에 반기를 들고자 모의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무리를 진정시키려고 노격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에 수리아의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는 곧바로 유대로 진격하였다. 그런데 66년 가을에 예루살렘을 거의 정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유도 없이 철수하다가, 벧호론 (Bethhoron)의 좁은 골짜기에서 갈루스가 거느린 로마 군대는 어이없이 참패하였다. 따라서 그는 전투를 재개하려고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요세푸스는 29세의 젊은 제사장으로서 비록 자격미달 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2명과 함께 갈릴리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요세푸스의 자서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후66-67년 갈릴리에서 일어난 반란의 배경설명에 대해서 우리는그의 견해를 완전히 따를 수는 없으며 요세푸스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정책이나 목적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 기간에 대한 두가지 주장이 있는데 서로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에서 여러 가지가 상충된다. 「자서전」에서 우리는 작가의 경쟁자인 유대인 역사가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요세푸스의 입장을 대할 수 있다. 그와 경쟁적인 입장에 잇었던 역사가는 로마군과의 전쟁에 대해 그 원인이 요세푸스와 갈릴리인들의 폭동 때문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자서. 65(340)〉 「유대전쟁사」에서 우리는 요세푸스가 로마의 비호 아래 그 책을 쓰고 있다는 간략한 진술을 읽을 수 있다. 「유대전쟁사」에서는 요세푸스가 처음부터 갈릴리의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전쟁.2권(568)〉 .자서전에서는 그의 임무가 주전론자(主戰論者)들에게 무기를 버리도록 설득하는 겄아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자서전」7(29)CP77〉.최근에 라쿠오이어(Laquer)라는 사람이 이러한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제안을 했지만 그 작품은 차라리 공상적이라 해야 옳다. 그는 요세푸스가 초인(ultra vires)으로 갈릴리의 최고지휘관으로 행동했다고 강조하면서 바로 이점 때문에 기스칼라(Gischala) 출신의 요한이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시도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어쨌든, 요세푸스는 로마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려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아마 서로타협점을 찾아 전쟁을 피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빨리 진행되었으며 요세푸스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는 쪽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Vespasian)이 안디옥(Antioch)에서 진격해 오자 결국 요타파타(Jot-apata)의 요새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버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로마군의 47일간의 포위공격으로 도시는 로마의 수중으로 떨어졌고(67년 7월) 요세푸스는 은신처에서 그의 친구들에 의해 살해될 뻔했던 상황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후에 로마군에 생포되었다. 또한 그는 베스파시안(Vespasian)이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않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유대전쟁사」3권에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로마에서의 그의 삶은 안락하고 평안한 생활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68년에서 69년 동안 장기 중단되었는데 그 까닭은 (Nero)가 죽고 계속해서 3명의 황제가 바뀌는 혼란기였기 때문이었다. 69년 7월에 베스파시안의 군대는 스스로 법률을 만들어 베스파시안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새로 황제가 된 베스파시안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가 황제로 즉위할 것을 예언한 요세푸스를 석방한 일이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까지 수행했으며 티투스(Titus)와 함께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예루살렘에서의 요세푸스의 임무는 통역자와 중재인으로 지속적인 교량 역할을 하는것이었다. 따라서 요세푸스는 유대인과 로마군 양쪽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즉 유대인들로 부터는 몹시도 미움을 사게 되었고, 로마군에게는 그가 언제 로마군을 반역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샀다.

      예루살렘의 함락 후(주후70) 그가 로마에서 살 때 플라비안황제들(Flavian Emperors)에게서 여러 가지의 특권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의 사저(Priuata aedes)에서 기거하면서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베스파시안〔자서. 76(423) :수에토니우스 ‘Vesp’18〕이 만든 ‘로마 시민권 목록'(civil list)에 제일 먼저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Ves-pasian)과 티투스(Titus)의 승리를 목격했고, 네로(Nero)의 통치때에는 대화재의 잿더미 속에서 로마가 새롭게 재건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콜로세움(Colosseum)과 베스파시안과 티투스 광장(Fora)과 평화의 신전(the Temple of Peace)이 새로 건설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요세푸스는 유대인들로부터는 미움을 계속해서 받았으나 베스파시안의 총애는 물론 도미티안이 황제가 될 때까지 게속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적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날짜는 알 수 없으나, 포티우스(Photius)에 의하면 주후 100년에 죽은 아그립바 Ⅱ세〔자서.65(359)〕보다 오래 살았다고 전한다. 유세비우스(Eusebius)’교회사’ ⅲ. 9)에 의하면 그의 동상이 로마에 세워졌으며 그의 저술들이 공공 도서관에 보관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가정생활은 부부간에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3번은 결혼을 했는데 한 부인은 그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다른 부인과는 이혼을 했다〈자서. 75(415),76(426)이하〉.


     2. 주요 작품들


      로마에서 요세푸스는 안락한 삶을 영위하면서 4권의 역사책을 저술하였다. 「유대전쟁사(Jewish War)」,「유대고대사(An-tiquities」,「자서전(the life)」, 그리고 「아피온반박문(AgainstApion)이 그것이다.

      그중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가 가장 주목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충분히 이야기 되어야 될 것은 요세푸스가 유대전쟁사를 단번에 저술했던 사실이다. 그리고 첫번째의(잃어버린)초안은 상부 수리아(Upper Syria) 사람들을 위해 아람어(Ara-maic)로 저술되었다〔전쟁 1권1:1(3)〕. 이 저술은 베스파시안이 전에 거주했던 궁전 안에서 작성되었고, 아마도 황제 후원에 의해 일종의 성명서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반란을 일으키려는동족의 경거망동한 자들을 향한 경고로 만들어진 저술이기도 하다. 두 번째 사본은 의심할 것도 없이 초안이 아닌 완벽한 형태로 헬라어 조수의 도움으로 헬라어로 제작되어 베스파시안 치세 말년 주후 75와 79년 사이에 발간되었다.

     약 16년이 경과한 후에 그의 다음 작품, 「유대고대사the An-tiquities)」가 주후 93-94년에 발간되었다. 이 사이의 기간은이 대작들(magnum opus)을 쓰기 위한 자료들을 모으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의 작품에 대한 교정에 오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미티안은 학문에는 반대세력이었으며 특히 역사가들의 위치는 불확실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타키투스(Tacitus), 플리니(Pliny), 쥬베날(Juvenal)과 같은 저숙가들은 도미티안의 치세 동안 침묵하며지낸 작가들이다. 총애해 주던 황제가 죽은 후 요세푸스는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를 만나게 된다. 에바브로디도는 문법학자이며, 거대한 도서관의 소유자였으며 호머(Homer)에 대한 저숙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요세푸스는 에바브로디도에게 자신의 말년의 작품들을 모두 헌정했다.

      이 「유대고대사」의 끝부분 20권 12 : 1(267)이하에서 요세푸스는 앞으로 두가지 학문적 연구를 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 두가지란 유대민족의 전쟁에 대한 설명과 전쟁후의 역사이며,또 다른 한가지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율법에 관하여 다룸과 동시에 율법이 허용하는 것은 무엇 무엇이며 금하는 것들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4권으로 책을 낼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출판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부분인 “관습과 그 원인에 관하여”라는 저술은 4권이라는 책의 권수까지 언급한 것과 「유대고대사」안에 암시되어진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그의 마음 속에 부분적으로 구체적인 형태로 초안이 잡혔을 것이다. 유세비우스(Eusbius)「교회사」ⅲ. 10이 요세푸스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과 마카비 4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3. 그외의 작품들


      이 책에 포함된 두 개의 소작들은 작가가 마지막으로 저술한 것이다. 역자(1)는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했는데 그것은 아마 자서전이 먼저 위치하는 것이 순서상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하바드판은 ‘자서전’과 ‘아피온반박문’이 1권으로 편집되어있다. -역자(2)주) 더우기 최근에는 자서전의 저작연대에 대한의문이 재개되었으며 만약 아래에 언급한 라쿠오이어(Laq-ueur)의 학설이 옳다고 한다면 이 자서전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아피온반박문」과「자서전」은 서로 알맞게 조화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저술들은 2세기초 트라얀(Trajan) 황제 치하에서 저자가 63세를 넘은 노년기에 발행되어졌다. 「자서전」은 주후100년 아그립바 Ⅱ세가 죽은 후에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와견줄만한 다른 전쟁사의 출현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서. (359)〕2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피온 반박문」Con-tra Apionem)은 94년 기록된 「유대고대사」보다 훨씬 후에 「유대고대사」를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아피.1권1(1),10(54):2권31(287)〕. 그러나「아피온 반박문」에는 유대전쟁사를 다루고 있는 달른 역사가들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비록 요세푸스가 이 책에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요세푸스의 중요한 공격대상의 인물은 유스투스임이 분명하며 이 유스투스는 「자서전」에서도 언급되어진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피온 반박문」은 2세기 초에나 기록되어 쓰여졌을 것이라 추측되는 것이다.「아피온반박문」과 「자서전」은 보기드문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두 저서에서 우리는 요세푸스의 최악의 상태와 최고의 상태를 볼 수 있다. 「아피온반박문」과「자서전은 둘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하나는 자신에 대한 변증 (apologiapro vita)이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progerite sua) 저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배열과 방법은 같은 사람이 동시대에 제작한 것이라고 추측하기에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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