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1-10아피온(Apion)에 대한 요세푸스의 반박과 유대인의 고대성

 

이피온 판박문




 제 1 권



아피온(Apion)에 대한 요세푸스의 반박과 유대인의 고대성





 1. 저술동기 및 계획,\’유대고대사\’에 대한 반유대(Antisemite) 비평들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 각하여! 저는 저의 저서인 \’유대고대사\’에서 그 책들을 숙독하는 독자들에게 우리 유대 민족이매우 훌륭한 고대사를 지니고 있으며 처음부터 독차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해 왔던 민족임을 분명하게 주지시켜 주었다고생각합니다. 또한 그 저서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어떻게 우리 민족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5,000년의[㈜ 고대. 1권. 서문(13)에 나오는 연대와 거의 똑같다.] 역사를 지녔으며, 그러한 사실들은 유대의 성경을 근거로 하여 제가 헬라어로 번역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과 우리에게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우리에게 퍼붓는 비판에는 귀기울여 들으면서도 제가 우리 나라의 고대사에 대해 쓴 것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헬라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역사가들이 공공연하게 언급한 것을 가치있게 고려하지 않은 사실을우리 민족이 비교적 후대에 생긴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악의를 품고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과오를 깨우쳐주기 위하여,많은 사람들의 무지를 시정하기 위하여, 더욱이 우리가 위대한 고대사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위하여 이러한 주제들을 간략히나마 서술해야 한다는 의무감을스스로 지니게 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의 증거를 제시해주기 위한 증인들은 진실성에 있어서나 모든 고대사에 관한 학문성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성과 명성을 지녔다고 헬라인들에 의해 평가받는 자들입니다. 저는 또한 우리를 비난하며 거짓으로기록했던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기록한 내용에 의해서 사실과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또한 왜 그러한 사건이 생겨났으며 헬라인들 중 그들의 역사에 우리 민족에 관해 언급을 한 역사가들이 많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우리의 역사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를 언급한 헬라의 역사가들을 모두 언급할 생각입니다.



 2. 헬라인은 골동품 수집가로서 적당하지 않음



 우선 저는 고대사를 연구하고자 할 때 우리가 오직 헬라인에게만 귀기울여야 하고 우리가 단지 헬라인에게서 온 진리만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 나라 것이나 다른 나라 것도 믿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헛된 편견에 미혹되지 않고 사실 그 자체로부터모든 진리를 연구하게 된다면 헬라인에게서 온 것이 아닐지라도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헬라인들에게 거의 모든 것들은 불과 얼마 전에 생긴 일들로[㈜ 1절과 2절에서 요세푸스는 플라톤의 저서\’Timaeus\’와 22B와C에 나온 내용, 즉 애굽의 사제가 헬라의 근대성에 관하여 위와 유사한 설명을 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보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겨우 엊그제 일어난 일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저는 헬라 도시들의 빌딩과 예술 발명품, 그리고 성문화된 법조문들에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역사 기술에 관한 관심은시작한 지 불과 얼마되지 않은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가장 오랜 전통과 최고(最古)의 기록들을 보존해 온 사람들은애굽인들과 갈대아, 베니게인들이라는 사실을 지금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그 가운데 유대인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잠깐빠뜨렸다). 이들 나라들이 대부분 주변 국가의 세력에 누려 파멸을 당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국가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특별히 발생했던 일을 빠뜨리지 않게 하려고 특별한 관심을 또한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신성하게 여기고 그들중의 지혜있는 최고의 위인들로 하여금 공공문서로 작성하도록하였습니다. 그러나 헬라인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수천번의 파괴로[㈜ 추측컨대 오기게스(Ogyges)와 듀칼리온(Deucalion) 등이 기록한 홍수이야기에 관한 것인 것 같다.] 인해 과거 활동들에 관한 기록들이 소실되어 버렸습니다.따라서 헬라인들은 항상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하기에 바빴고그들 모두는 각자의 삶에 있어서 새로운 창시자인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오늘날 사용하는 헬라문자를 알기 시작한 것도 뒤늦게 이뤄진 것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헬라문자의 기원을 고대문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문자들이 베니게인들(Phoenicians)과 카드무스(Cadmus)에게서[㈜ 참). 예를 들어 헤로도투스 ⅴ.58.] 배워온 것인양 이야기하지만 어느 한 사람도 시전이나 기념비의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지금껏 보존된 문자라고 증명하지 못합니다. 트로이 전쟁(Trojan campaign)에 참전한 사람들이 살던 때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기 때문에 헬라인들이 그들의 문자를[㈜ \’해로운 증거\’라는 구절의 해설에 논란이 있었음을 암시함(호머,\’일리아드\’Ⅵ.168) ; 벨레로폰(Bellerophon)의 죽음을 야기시키려는 전갈을 의미함. \”여러 가능성들이 조화를 이룬 단어들이란 몇몇 알파벳이나 음절로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아\”(Jebb \’Homer\’, 1887, p.112).]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심의 여지가 많습니다. 다만 가장 우수한 견해이자 진리에 근접한 사실은 그 당시에는 그들에게 현재의 문자 사용법이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트로이 함락 이후의 작품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호머의 시보다도 더 오래된헬라 문학 작품이 없습니다. 사실상 호머는 그의 시를 문자로 남기지 않았으며 단지 노래로 전해지다가 후에 기록되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호머의 시들이 여러 가지로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는 Wolf가 그의 획기적인 \’서문(Prolegomena)(1795)에서 인용했던 여러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한편 역사를 문자로 기록한 사람들에 관해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밀레도의 카드무스(Cadmus of Miletus), 아르고스의아쿠실라우스(Acusilaus of Argos), 그리고 아쿠실라우스에뒤이어 언급될 수 있는 여러 사람들로서 그들은 바사(Persia)가 헬라를 원정하기 불과 얼마 전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시로스(Syros)에서 태어난 페레키데스(Pherecydes)와 피타고라스(Pythagoras) 및 탈레스(Thales)와 같이 천상과[㈜ 즉, 천상에서의 신체현상] 신성의일을 취급하여 처음으로 철학을 소개한 사람들은 그들이 애굽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지식을 배웠다는 사실을이구동성으로 동의했습니다. 따라서 바로 이와 같은 문헌들이헬라인 중에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이 되어지는데 그럼에도 헬라인들은 그들의 저작이 진짜라고 주장하며 야단들입니다.



3. 헬라 역사가들간의 불일치



 따라서 헬라인들은 자신들만이 고대문화를 지닌 유일한 민족이며 고대사에 관하여 정확한 기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자만하며 뽑내는 것이 어떻게 타당한 일이겠습니까? 헬라 역사가들은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기록하였으며 단지 저자개인의 추측으로 사건을 기술하고 있음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책 내용을 두고 서로 논박하며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서로 다른 정반대의 설명을 하면서도 전혀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헬라인들 스스로가 저보다 더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제가 가르치려고 한다면 제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는 셈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꼭지적해 두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계보(genealogy)에[㈜ 족보 형태로 정리된 헬라의 기원에 관한 전승들] 관해서는 헬라니쿠스(Hellanicus)와[㈜ 주전 5세기경의 헤로도투스와 동시대 인물인 미틸레네] 아쿠실라우스(Acusilaus)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아쿠실라우스가 헤시오드(Hesiod)의 잘못을 교정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에포루스(Ephorus)기[㈜ 세기 후반부의 이소크라테스(Isocrates)의 문하생.] 헬라니쿠스(Hellanicus)의역사는 대부분 허위라는 사실을 밝혀 내자, 티마이우스(Tim-aeus)는[㈜ 주전 352~265까지 살았던 키르카, 그는 그의 조국인 시실리(Sicily)의 주전 264년까지의 역사에 대해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그는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폴리비우스(Polybius)에게 비난을 당하였다.] 에포루스가 허위임을 증명하고 이번에는 후대 역사가들이 티마이우스의 역사가 허위임을 드러내고 있고 그 후의 역사가들은 모두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역사가 거짓임을 증명하고 나서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마네토<Menetho ;아피. 1권. 14(73)>, 크테시아스(Ctesias), 스트라보(Strabo), 가짜 플루타르크(Pseudo-Plutarch)] 시실리아의 역사(The Sicilian History)에 관해 티마이우스(Timaeus)와 안티오쿠스(Antiochus)와[㈜ 시실리(주전 424년까지)와 이달리야의 역사들을 기록하였던 사람으로서 시라쿠세(Suracuse)출신. 필리스투스(Philistus)와 칼리아스(Callias) 또한 시라쿠세인이었다(4세기-3세기)] 필리티우스(Philiti-us)와 칼리아스(Callias)의 서술이 서로 다른 것은 어찌된 일이며, 아티데스(The Atthides)에[㈜ 아티카(Attica)에 관한 역사적, 지리적 저서들. 저자들로서는 필로코루스(Philochourus),데몬(Demon) 그리고 이스터(Ister)등이 있다.] 관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르기브인들(The Argive)에 관한 역사를 쓴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바사인들이 원정할 때의 역사나 거기서 행한 활동들에 관한 가장 유명한 사가들의 입장에서 조차 이처럼 큰 견해 차이가 있는데, 제가 특정 도시나 작은 소지역에 대해 더 이상 언급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실상, 당시의 활동에 관한 가장 정확한 역사를 우리에게 남겨준 투키디데스(Thucydides)마저도 그의 기록이 거짓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4. 불일치의 이유 – 헬라인들이 공적인 기록에 게으름



 이러한 역사가들의 커다란 견해 차이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거기에는 아주 그럴싸한 이유들이 많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이견들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언급하면서 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먼저 다루겠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헬라인들은 처음부터 당시의 활동들에관한 공적인 기록들을 보존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고대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려는 사람들에게 실수를 저지를 기회를 제공하고, 심지어 거짓말까지 하게 하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대의 원기록(原記錄)들을 헬라의 다른 도시국가들은 물론, 원주민인 양[㈜ \’토착민의, 고유의\’.] 행세하며 스스로 학문에 열중한다고 자처하던 아덴인들(Athenians)조차 소홀히여겼던 탓에 현존하는 기록들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말하기를 살인에 관한 드라콘(Dracon)의 법조문들이 문자기록으로 현존하는 공적 기록들 가운데 최고(最古)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드라콘은 독재자인 피시스트라트스(Pisistratus) 직전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대 문화를 그처럼 자랑하는 아르카디인들(Arcadians)에[㈜ 또한 토착적인 것으로 여겨짐(헤로도투스 ⅷ. 73)] 대해서는 특별히 더 말씀드릴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문자를 갖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 문자를 배움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5. 일치의 이유-헬라인들은 정확성보다 문장력을 더 중시



 그러므로 사실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거짓말하려는 사람들을 반박해 줄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줄 원기록(原記錄)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기록자들 간에 큰이견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견들의 첫 번째원인과 아울러 두 번째 원인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역사를 기술하기를 가장 열망하던 사람들이 진리 발견에 대해 그다지 열심을 내지 않았고 다만 그들이 하는 일이란 그들의 문제가좋다는 사실과 인류에게 감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떠한 주제의 글을 써야지 다른 경쟁자들을[㈜ 참). 고대. 1권. 서문(2)] 앞지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만 열중하였습니다. 어떤역사가는 신화만 서술하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역사가는 왕들이나 도시민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칭찬들을 많이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역사가는 명성을 얻는 방법으로 공문서나 혹은 공문서 기록자들을 흠잡기 일쑤였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사례들이그 어느 것보다도 진정한 역사에 대해 최대의 장애요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역사를 기술한 모든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이야기하며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의 역사가들은 같은 사실들을 각기 다르게 기록하면서도 진리를 밝히는데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쓴 기록으로 사람들이 믿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유대인인) 우리로서는 문장의 유창함이나 언어 구사에 관한 한 헬라인 기록자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고대 역사의 진실성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그들의 입장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유대에 관한 역사에 있어서는 전혀 그들의 것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6. 역사기록에 관한 유대인들의 관심



 애굽과 바벨론의 사람들이 태고(太古)로부터 기록을 남기는데 보였던 관심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기록을 남기는일에 애굽에서는 제사장들이 임명되었고 바벨론에서는 갈대아(Chaldaeans)인들이 전적으로 맡아 했습니다. 헬라에서는 일상적인 삶을 기록하거나 공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역사를 기술함에있어서도 헬라에 사는 베니게인들이 거의 다 기록했다는 사실은제가 굳이 증명하지 않더라도 모두 잘 아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조상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그러한 기록들을 남기는 데 있어서 결코 소홀하지 않았습니다(저는 지금우리 조상들이 제가 언급한 다른 민족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역사의기록을 대제사장이나 선지자들에게[㈜ 라이나흐(Reinach)의 말대로 요세푸스는 제 2성전 시기에 제사장들에 의해 족보가 보존된 사실과 구약성경을 기록하였던 전혀 다른 방식을 혼돈하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될 사실은 모세 오경 이후 구약의 역사서들은 히브리 정경의 두 번째 부분 혹은 선지서 부분에 포함되어졌으며 선지서의 저자들이 쓴 것들이라는 것이다.] 위탁했으며 그렇게 기록된 사실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까지 매우 정확하게 전승되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제가 지나치게 당돌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역사는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간략히 각하께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7. 문서 보관자의 선택 – 제사장의 결혼과 족보에 대한 정밀조사



 우리 조상들은 처음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성전예배에 참석하는 가장 뛰어난 제사장들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그들을 직업화하여 제사장의 혈통이 순수성을[㈜ 참). 레 21 : 7 이하.]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결혼할 때 여자의 재산과 명성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같은 종족 출신의[㈜ 레 21:14]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얻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의 아내를 자세히 조사해야 하며 공문서 보관소로부터[㈜ 참). 자서. 1.(3-6)\’공식적 기록\’으로부터 얻은 자기 가족의 계보.] 아내의 족보를 얻어야 하며 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또한 이러한 풍습은 유대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나타나는 일입니다. 심지어 애굽이나 바벨론, 혹은 기타 인간이 거주할수 있는 어떤 곳에서도 유대 제사장들의 결혼 계보는 철저히 지켜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먼 조상의 이름은 물론, 그들의 부모의 옛 이름들을 써서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증인에 관해서까지 표시하고 있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전쟁, 특히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나 폼페이 대왕(Pompey the great)이나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tilius Bar-us)의 침공 등 우리 시대에 발생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제사장들은 옛날 문서를 통해 새로운 족보를 작성하고 생존한 여인들의 환경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간 적이 있는 여인들은 이방인들과의[㈜ 참). 고대. 3권 12 : 2(276) : 8권. 12 : 1(292). 그러나 제사장인 요세푸스 자신은 포로와 결혼하였다. 자서. 75(414)] 관계를 의심케 되어 그들의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족보의 관리가 엄정히 되어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 유대 민족이 2000년[㈜ 참). 고대. 1권. 서문 : 20권. 10 : 1(227)] 동안이나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져 기록되어 온 대제사장들의 명단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 중 누구든지 이러한 규칙을 범하게 되면 그들은 제단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경배하는 다른 부분에도 참석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연하고도 매우 필수적으로 행하여졌는데 그것은 제사장이라고 해서 누구나 문서 기록자가 될 수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록된 사실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기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세부터의 역사를 기록했던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통해 사실을 배웠던 선지자들이며, 그들은 또한 당대의 일어난 것들을 매우 뚜렷한 문형으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8. 22권의 성경



 우리는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수많은 책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22권의 책이 있는데 이는 모두 거룩한 책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과거의 모든 역사적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5권은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거기에는 율법들과 율법전수자 모세가 죽기까지의 인류 기원의 전승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된 기간은 무려 3.000년이나 됩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은 후부터 아하수에로(Xerxes)에 이어 통치한 바사(Persia)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의[㈜ 아닥사스다(Artaxerxes) Ⅰ세(Longimanus)는 주전 465년에 아하수에로(Xerrxes)의 뒤를 이어 등극하였다. 요세푸스의 저술(고대. 11권. 6 : 1(184)이나 70인역에 보면 그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로 알려지로 있다. 그리고 그는\’13권의 책들\’ 중에서 연대적으로 가장 최근의 저술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통치까지의 역사에관해 말하자면, 모세 이후의 선지자들이 13권의[㈜ (1) 수 (2) 삿-룻 (3) 삼 (4) 왕 (5) 역 (6) 스+느 (7) 에 (8) 욥 (9) 사 (10)렘+애 (11) 겔 (12) 소선지서 (13) 단으로 추정됨.] 책에다 당대의 일어난 일들에 관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권의[㈜ (1) 시편 (2) 아가 (3) 잠언 (4) 전도서로 추정됨.] 책에는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인간 생활의 행위들에 대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역사는 아닥사스다의 통치 이후에 매우 특수하게 기록되어진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이전의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22권의 책들만큼 동등한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이후로는 선지자들이 정확한 계승을 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 성경을 존경해[㈜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 왔는지는 이미 지나간오랜 역사 동안 어느 누구도 감히 새로운 사실을 첨가하거나 거기에서 어떤 내용을 빼는 일이[㈜ 참). 신4:2\’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없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한 음절도 변화시킨 적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책들에 하느님의 교리가 담겨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주장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이 책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자세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많은 포로들이 번번히 율법과 또 율법을 담은 책에[㈜ 참. 아피. 2권. 30(219)] 거스리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기장에서 온갖 고난과 죽음을 견디어 내었던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에 반하여 헬라인들 가운데에는 그들이 지닌 모든 기록들이 모두 훼손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약간의 고난을 감수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책들을 마치 그것을 쓴 사람들의 의향에 동조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이야기 책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헬라 저자들은 고대의 기록자들에 관해서 한결같이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인정받는 오래전 역사가들조차 그들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사실들에 관한 자료를 관심을 가지고 충분히 알아내지도 못하면서 당돌하게도 그러한 사실들을 기록하는 모습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최근에 있었던 우리나라 전쟁이 좋은 예입니다. 사람들은 전쟁과 관련된 곳에 가보지도 않았으면서도, 또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러한 사건을 가까이에서 접해보지 않았으면서도 그 전쟁의 역사들을 기록하며 출판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소문만을 듣고도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혼란시키며 역사라는[㈜ 참). 전쟁. 1권. 서문. 디베랴의 유스투스가 쓴 적과의 전쟁사에 관하여는 자서. 65(336)이하를 보라. 여기에서 그는 헬라 저술가 들이 쓴 신빙성 없는 역사들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이름을 붙여 이러한 저작들을 만들어 냅니다.



9. \’유대전쟁사\’ 저자의 변증



 저는 유대와 로마간의 모든 전쟁(戰爭)에 관한 진실된 역사를이미 기록하였으며, 전쟁에서 일어난 특이한 사항들까지 관계되는 것이면 모두 문서로 기록하였습니다. 저는 갈릴리의 장군으로서 우리가 로마에 상대할 수 있는 한 맞서서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전쟁에서 로마 진영에[㈜ 전쟁. 3권. 8 : 9(408)] 붙잡혀 결국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때 베스파시안(Vespasian)과 티투스 황제 또한 저를 감금하고서 그들에게 끊임없이 시중들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결박당해 있었으나 후에 자유로운 몸으로 풀려났으며[㈜ 전쟁. 4권<10권. 1 : 2(7).> 10 : 7(622)이하.] 티투스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예루살렘을[㈜ 참. 전쟁. 4권. 11 : 5(658)] 정복하러 왔을 때 그의 수행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제가 모르는 것이라고는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로마 군대에서 일어난 것들을 모두 볼 수가 있었으며 그것을 신중히 기록하였습니다. 더구나(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가져온 정보들에 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저뿐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저는 로마에서 여가 시간을 가질 수있었는데, 그때 역사 기록을 위한 자료들이 준비되자 헬라어를 배우기 위해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이때를 이용하여 전쟁에 관한 역사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진실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최고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안과 티투스 황제에게[㈜ 참). 자서. 65(361) 이하] 호소하여 그분들로 하여금 증인으로 삼았으며, 또 그 책들을 그분들께 먼저 드렸고, 후에는그 전쟁에 참여한 바가 있는 많은 로마인들에게 드렸습니다. 또한 저는 헬라 철학을 이해하는 많은 유대인들에게도 그 책을 팔았습니다[㈜ (자서. 65.(362)에서) 이와 유사한 설명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아 그립바Ⅱ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증정본을 기증받은 것으로 이 름이 실려있다.] 그들 중에는 유명인사인 헤롯왕[㈜ 미상 ; 라이나후(Reinach)가 생각했던 대로 그는 전쟁 전에 죽었 던 칼키스(Chalcias)의 왕인 헤롯이 아니었다.] 율리우스 아켈라오(Julius Archelaus)와[㈜ 켈키아스(Chelcias)의 아들이자 아그립바Ⅱ세의 여동생인 마리암 메(Mariamme)의 남편 : 고대. 19. 9 : 1(355) : 20권. 7 : 1(140)] 우리의 아낌없는 칭송을 받아야 할 아그립바왕(King Agippa)도[㈜ 아그립바Ⅱ세]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모든 사람들은 제가 진실을 향해 가장 엄정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가 만일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무지해서 상황들을 잘못 설명하거나 어떤 사건들을 빠뜨리게 된다면 결코 그러한 저의 잘못을 못본체하거나 가만히 침묵을 지킬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10. 비판자에 대한 답변



 제가 역사에 관해 쓴 것을 중상 비방하거나 단지 코흘리개 소년이 학교에서 상을 받은 작문 정도로[㈜ 참). 투키디데스 ⅰ. 22. \”나의 역사는 들었다가 금방 잊어버릴 그러한 모조품이 아니라 영원한 재산이다.\”] 간주하는 참으로 나쁜 인간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 비난과 중상입니까? 따라서 역사를 진실하게 기록하기를 원한다면 누구든지 먼저는 스스로 정확하게 그 사건들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그 사건들과 자신이 직접 관련하든지 아니면 그 사건을 잘 알고있는 사람에 의해서 그 사건에 관한 정보를 잘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쓴 책들의 구성을 보자면 이러한 두가지 기준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말씀드린대로 유대의 거룩한 책(성경)으로부터[㈜ 참). 고대 1권. 서문 ; 20권. 12 : 1(261).\’유대고대사\'(전반부) 에서 요세푸스는 구약성경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부연 설명과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오래된 헬라어 번역본 인 70인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유대고대사\'(The an-tiquities)를 번역했는데, 이것은 제가 제사장 가문에서 났으며 그 책들에 들어 있는 철학을[㈜ 혹은\’연구\’,\’과학적 처리\’ : 요세푸스는 전통적인 주석 방법 (Halakoth,등)에 대한 지식을 다소 보여준다.] 제가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와의 전쟁 역사에 관하여서는 제가 이 전쟁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쟁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며 그 전쟁에서 계획되거나 행해진 것이면 어떤 것이든지 제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나의 기록들의 진실성에 대하여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오만스런 행동이겠습니까? 설사 그 사람들이 두 황제의[㈜ 참). 자서. 65(342, 358)] 회고록을 인용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들은 로마와 대적해 싸웠던 유대의 입장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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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권 1-10아피온(Apion)에 대한 요세푸스의 반박과 유대인의 고대성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이피온 판박문


     제 1 권


    아피온(Apion)에 대한 요세푸스의 반박과 유대인의 고대성



     1. 저술동기 및 계획,’유대고대사’에 대한 반유대(Antisemite) 비평들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 각하여! 저는 저의 저서인 ‘유대고대사’에서 그 책들을 숙독하는 독자들에게 우리 유대 민족이매우 훌륭한 고대사를 지니고 있으며 처음부터 독차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해 왔던 민족임을 분명하게 주지시켜 주었다고생각합니다. 또한 그 저서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어떻게 우리 민족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5,000년의[㈜ 고대. 1권. 서문(13)에 나오는 연대와 거의 똑같다.] 역사를 지녔으며, 그러한 사실들은 유대의 성경을 근거로 하여 제가 헬라어로 번역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과 우리에게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우리에게 퍼붓는 비판에는 귀기울여 들으면서도 제가 우리 나라의 고대사에 대해 쓴 것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헬라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역사가들이 공공연하게 언급한 것을 가치있게 고려하지 않은 사실을우리 민족이 비교적 후대에 생긴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악의를 품고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과오를 깨우쳐주기 위하여,많은 사람들의 무지를 시정하기 위하여, 더욱이 우리가 위대한 고대사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위하여 이러한 주제들을 간략히나마 서술해야 한다는 의무감을스스로 지니게 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의 증거를 제시해주기 위한 증인들은 진실성에 있어서나 모든 고대사에 관한 학문성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성과 명성을 지녔다고 헬라인들에 의해 평가받는 자들입니다. 저는 또한 우리를 비난하며 거짓으로기록했던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기록한 내용에 의해서 사실과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또한 왜 그러한 사건이 생겨났으며 헬라인들 중 그들의 역사에 우리 민족에 관해 언급을 한 역사가들이 많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우리의 역사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를 언급한 헬라의 역사가들을 모두 언급할 생각입니다.


     2. 헬라인은 골동품 수집가로서 적당하지 않음


     우선 저는 고대사를 연구하고자 할 때 우리가 오직 헬라인에게만 귀기울여야 하고 우리가 단지 헬라인에게서 온 진리만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 나라 것이나 다른 나라 것도 믿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헛된 편견에 미혹되지 않고 사실 그 자체로부터모든 진리를 연구하게 된다면 헬라인에게서 온 것이 아닐지라도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헬라인들에게 거의 모든 것들은 불과 얼마 전에 생긴 일들로[㈜ 1절과 2절에서 요세푸스는 플라톤의 저서’Timaeus’와 22B와C에 나온 내용, 즉 애굽의 사제가 헬라의 근대성에 관하여 위와 유사한 설명을 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보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겨우 엊그제 일어난 일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저는 헬라 도시들의 빌딩과 예술 발명품, 그리고 성문화된 법조문들에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역사 기술에 관한 관심은시작한 지 불과 얼마되지 않은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가장 오랜 전통과 최고(最古)의 기록들을 보존해 온 사람들은애굽인들과 갈대아, 베니게인들이라는 사실을 지금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그 가운데 유대인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잠깐빠뜨렸다). 이들 나라들이 대부분 주변 국가의 세력에 누려 파멸을 당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국가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특별히 발생했던 일을 빠뜨리지 않게 하려고 특별한 관심을 또한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신성하게 여기고 그들중의 지혜있는 최고의 위인들로 하여금 공공문서로 작성하도록하였습니다. 그러나 헬라인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수천번의 파괴로[㈜ 추측컨대 오기게스(Ogyges)와 듀칼리온(Deucalion) 등이 기록한 홍수이야기에 관한 것인 것 같다.] 인해 과거 활동들에 관한 기록들이 소실되어 버렸습니다.따라서 헬라인들은 항상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하기에 바빴고그들 모두는 각자의 삶에 있어서 새로운 창시자인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오늘날 사용하는 헬라문자를 알기 시작한 것도 뒤늦게 이뤄진 것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헬라문자의 기원을 고대문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문자들이 베니게인들(Phoenicians)과 카드무스(Cadmus)에게서[㈜ 참). 예를 들어 헤로도투스 ⅴ.58.] 배워온 것인양 이야기하지만 어느 한 사람도 시전이나 기념비의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지금껏 보존된 문자라고 증명하지 못합니다. 트로이 전쟁(Trojan campaign)에 참전한 사람들이 살던 때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기 때문에 헬라인들이 그들의 문자를[㈜ ‘해로운 증거’라는 구절의 해설에 논란이 있었음을 암시함(호머,’일리아드’Ⅵ.168) ; 벨레로폰(Bellerophon)의 죽음을 야기시키려는 전갈을 의미함. “여러 가능성들이 조화를 이룬 단어들이란 몇몇 알파벳이나 음절로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아”(Jebb ‘Homer’, 1887, p.112).]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심의 여지가 많습니다. 다만 가장 우수한 견해이자 진리에 근접한 사실은 그 당시에는 그들에게 현재의 문자 사용법이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트로이 함락 이후의 작품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호머의 시보다도 더 오래된헬라 문학 작품이 없습니다. 사실상 호머는 그의 시를 문자로 남기지 않았으며 단지 노래로 전해지다가 후에 기록되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호머의 시들이 여러 가지로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는 Wolf가 그의 획기적인 ‘서문(Prolegomena)(1795)에서 인용했던 여러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한편 역사를 문자로 기록한 사람들에 관해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밀레도의 카드무스(Cadmus of Miletus), 아르고스의아쿠실라우스(Acusilaus of Argos), 그리고 아쿠실라우스에뒤이어 언급될 수 있는 여러 사람들로서 그들은 바사(Persia)가 헬라를 원정하기 불과 얼마 전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시로스(Syros)에서 태어난 페레키데스(Pherecydes)와 피타고라스(Pythagoras) 및 탈레스(Thales)와 같이 천상과[㈜ 즉, 천상에서의 신체현상] 신성의일을 취급하여 처음으로 철학을 소개한 사람들은 그들이 애굽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지식을 배웠다는 사실을이구동성으로 동의했습니다. 따라서 바로 이와 같은 문헌들이헬라인 중에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이 되어지는데 그럼에도 헬라인들은 그들의 저작이 진짜라고 주장하며 야단들입니다.


    3. 헬라 역사가들간의 불일치


     따라서 헬라인들은 자신들만이 고대문화를 지닌 유일한 민족이며 고대사에 관하여 정확한 기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자만하며 뽑내는 것이 어떻게 타당한 일이겠습니까? 헬라 역사가들은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기록하였으며 단지 저자개인의 추측으로 사건을 기술하고 있음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책 내용을 두고 서로 논박하며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서로 다른 정반대의 설명을 하면서도 전혀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헬라인들 스스로가 저보다 더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제가 가르치려고 한다면 제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는 셈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꼭지적해 두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계보(genealogy)에[㈜ 족보 형태로 정리된 헬라의 기원에 관한 전승들] 관해서는 헬라니쿠스(Hellanicus)와[㈜ 주전 5세기경의 헤로도투스와 동시대 인물인 미틸레네] 아쿠실라우스(Acusilaus)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아쿠실라우스가 헤시오드(Hesiod)의 잘못을 교정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에포루스(Ephorus)기[㈜ 세기 후반부의 이소크라테스(Isocrates)의 문하생.] 헬라니쿠스(Hellanicus)의역사는 대부분 허위라는 사실을 밝혀 내자, 티마이우스(Tim-aeus)는[㈜ 주전 352~265까지 살았던 키르카, 그는 그의 조국인 시실리(Sicily)의 주전 264년까지의 역사에 대해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그는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폴리비우스(Polybius)에게 비난을 당하였다.] 에포루스가 허위임을 증명하고 이번에는 후대 역사가들이 티마이우스의 역사가 허위임을 드러내고 있고 그 후의 역사가들은 모두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역사가 거짓임을 증명하고 나서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마네토, 크테시아스(Ctesias), 스트라보(Strabo), 가짜 플루타르크(Pseudo-Plutarch)] 시실리아의 역사(The Sicilian History)에 관해 티마이우스(Timaeus)와 안티오쿠스(Antiochus)와[㈜ 시실리(주전 424년까지)와 이달리야의 역사들을 기록하였던 사람으로서 시라쿠세(Suracuse)출신. 필리스투스(Philistus)와 칼리아스(Callias) 또한 시라쿠세인이었다(4세기-3세기)] 필리티우스(Philiti-us)와 칼리아스(Callias)의 서술이 서로 다른 것은 어찌된 일이며, 아티데스(The Atthides)에[㈜ 아티카(Attica)에 관한 역사적, 지리적 저서들. 저자들로서는 필로코루스(Philochourus),데몬(Demon) 그리고 이스터(Ister)등이 있다.] 관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르기브인들(The Argive)에 관한 역사를 쓴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바사인들이 원정할 때의 역사나 거기서 행한 활동들에 관한 가장 유명한 사가들의 입장에서 조차 이처럼 큰 견해 차이가 있는데, 제가 특정 도시나 작은 소지역에 대해 더 이상 언급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실상, 당시의 활동에 관한 가장 정확한 역사를 우리에게 남겨준 투키디데스(Thucydides)마저도 그의 기록이 거짓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4. 불일치의 이유 – 헬라인들이 공적인 기록에 게으름


     이러한 역사가들의 커다란 견해 차이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거기에는 아주 그럴싸한 이유들이 많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이견들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언급하면서 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먼저 다루겠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헬라인들은 처음부터 당시의 활동들에관한 공적인 기록들을 보존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고대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려는 사람들에게 실수를 저지를 기회를 제공하고, 심지어 거짓말까지 하게 하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대의 원기록(原記錄)들을 헬라의 다른 도시국가들은 물론, 원주민인 양[㈜ ‘토착민의, 고유의’.] 행세하며 스스로 학문에 열중한다고 자처하던 아덴인들(Athenians)조차 소홀히여겼던 탓에 현존하는 기록들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말하기를 살인에 관한 드라콘(Dracon)의 법조문들이 문자기록으로 현존하는 공적 기록들 가운데 최고(最古)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드라콘은 독재자인 피시스트라트스(Pisistratus) 직전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대 문화를 그처럼 자랑하는 아르카디인들(Arcadians)에[㈜ 또한 토착적인 것으로 여겨짐(헤로도투스 ⅷ. 73)] 대해서는 특별히 더 말씀드릴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문자를 갖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 문자를 배움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5. 일치의 이유-헬라인들은 정확성보다 문장력을 더 중시


     그러므로 사실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거짓말하려는 사람들을 반박해 줄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줄 원기록(原記錄)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기록자들 간에 큰이견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견들의 첫 번째원인과 아울러 두 번째 원인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역사를 기술하기를 가장 열망하던 사람들이 진리 발견에 대해 그다지 열심을 내지 않았고 다만 그들이 하는 일이란 그들의 문제가좋다는 사실과 인류에게 감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떠한 주제의 글을 써야지 다른 경쟁자들을[㈜ 참). 고대. 1권. 서문(2)] 앞지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만 열중하였습니다. 어떤역사가는 신화만 서술하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역사가는 왕들이나 도시민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칭찬들을 많이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역사가는 명성을 얻는 방법으로 공문서나 혹은 공문서 기록자들을 흠잡기 일쑤였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사례들이그 어느 것보다도 진정한 역사에 대해 최대의 장애요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역사를 기술한 모든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이야기하며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의 역사가들은 같은 사실들을 각기 다르게 기록하면서도 진리를 밝히는데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쓴 기록으로 사람들이 믿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유대인인) 우리로서는 문장의 유창함이나 언어 구사에 관한 한 헬라인 기록자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고대 역사의 진실성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그들의 입장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유대에 관한 역사에 있어서는 전혀 그들의 것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6. 역사기록에 관한 유대인들의 관심


     애굽과 바벨론의 사람들이 태고(太古)로부터 기록을 남기는데 보였던 관심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기록을 남기는일에 애굽에서는 제사장들이 임명되었고 바벨론에서는 갈대아(Chaldaeans)인들이 전적으로 맡아 했습니다. 헬라에서는 일상적인 삶을 기록하거나 공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역사를 기술함에있어서도 헬라에 사는 베니게인들이 거의 다 기록했다는 사실은제가 굳이 증명하지 않더라도 모두 잘 아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조상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그러한 기록들을 남기는 데 있어서 결코 소홀하지 않았습니다(저는 지금우리 조상들이 제가 언급한 다른 민족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역사의기록을 대제사장이나 선지자들에게[㈜ 라이나흐(Reinach)의 말대로 요세푸스는 제 2성전 시기에 제사장들에 의해 족보가 보존된 사실과 구약성경을 기록하였던 전혀 다른 방식을 혼돈하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될 사실은 모세 오경 이후 구약의 역사서들은 히브리 정경의 두 번째 부분 혹은 선지서 부분에 포함되어졌으며 선지서의 저자들이 쓴 것들이라는 것이다.] 위탁했으며 그렇게 기록된 사실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까지 매우 정확하게 전승되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제가 지나치게 당돌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역사는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간략히 각하께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7. 문서 보관자의 선택 – 제사장의 결혼과 족보에 대한 정밀조사


     우리 조상들은 처음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성전예배에 참석하는 가장 뛰어난 제사장들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그들을 직업화하여 제사장의 혈통이 순수성을[㈜ 참). 레 21 : 7 이하.]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결혼할 때 여자의 재산과 명성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같은 종족 출신의[㈜ 레 21:14]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얻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의 아내를 자세히 조사해야 하며 공문서 보관소로부터[㈜ 참). 자서. 1.(3-6)’공식적 기록’으로부터 얻은 자기 가족의 계보.] 아내의 족보를 얻어야 하며 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또한 이러한 풍습은 유대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나타나는 일입니다. 심지어 애굽이나 바벨론, 혹은 기타 인간이 거주할수 있는 어떤 곳에서도 유대 제사장들의 결혼 계보는 철저히 지켜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먼 조상의 이름은 물론, 그들의 부모의 옛 이름들을 써서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증인에 관해서까지 표시하고 있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전쟁, 특히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나 폼페이 대왕(Pompey the great)이나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tilius Bar-us)의 침공 등 우리 시대에 발생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제사장들은 옛날 문서를 통해 새로운 족보를 작성하고 생존한 여인들의 환경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간 적이 있는 여인들은 이방인들과의[㈜ 참). 고대. 3권 12 : 2(276) : 8권. 12 : 1(292). 그러나 제사장인 요세푸스 자신은 포로와 결혼하였다. 자서. 75(414)] 관계를 의심케 되어 그들의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족보의 관리가 엄정히 되어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 유대 민족이 2000년[㈜ 참). 고대. 1권. 서문 : 20권. 10 : 1(227)] 동안이나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져 기록되어 온 대제사장들의 명단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 중 누구든지 이러한 규칙을 범하게 되면 그들은 제단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경배하는 다른 부분에도 참석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연하고도 매우 필수적으로 행하여졌는데 그것은 제사장이라고 해서 누구나 문서 기록자가 될 수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록된 사실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기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세부터의 역사를 기록했던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통해 사실을 배웠던 선지자들이며, 그들은 또한 당대의 일어난 것들을 매우 뚜렷한 문형으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8. 22권의 성경


     우리는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수많은 책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22권의 책이 있는데 이는 모두 거룩한 책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과거의 모든 역사적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5권은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거기에는 율법들과 율법전수자 모세가 죽기까지의 인류 기원의 전승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된 기간은 무려 3.000년이나 됩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은 후부터 아하수에로(Xerxes)에 이어 통치한 바사(Persia)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의[㈜ 아닥사스다(Artaxerxes) Ⅰ세(Longimanus)는 주전 465년에 아하수에로(Xerrxes)의 뒤를 이어 등극하였다. 요세푸스의 저술(고대. 11권. 6 : 1(184)이나 70인역에 보면 그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로 알려지로 있다. 그리고 그는’13권의 책들’ 중에서 연대적으로 가장 최근의 저술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통치까지의 역사에관해 말하자면, 모세 이후의 선지자들이 13권의[㈜ (1) 수 (2) 삿-룻 (3) 삼 (4) 왕 (5) 역 (6) 스+느 (7) 에 (8) 욥 (9) 사 (10)렘+애 (11) 겔 (12) 소선지서 (13) 단으로 추정됨.] 책에다 당대의 일어난 일들에 관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권의[㈜ (1) 시편 (2) 아가 (3) 잠언 (4) 전도서로 추정됨.] 책에는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인간 생활의 행위들에 대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역사는 아닥사스다의 통치 이후에 매우 특수하게 기록되어진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이전의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22권의 책들만큼 동등한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이후로는 선지자들이 정확한 계승을 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 성경을 존경해[㈜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 왔는지는 이미 지나간오랜 역사 동안 어느 누구도 감히 새로운 사실을 첨가하거나 거기에서 어떤 내용을 빼는 일이[㈜ 참). 신4:2’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없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한 음절도 변화시킨 적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책들에 하느님의 교리가 담겨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주장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이 책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자세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많은 포로들이 번번히 율법과 또 율법을 담은 책에[㈜ 참. 아피. 2권. 30(219)] 거스리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기장에서 온갖 고난과 죽음을 견디어 내었던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에 반하여 헬라인들 가운데에는 그들이 지닌 모든 기록들이 모두 훼손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약간의 고난을 감수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책들을 마치 그것을 쓴 사람들의 의향에 동조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이야기 책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헬라 저자들은 고대의 기록자들에 관해서 한결같이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인정받는 오래전 역사가들조차 그들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사실들에 관한 자료를 관심을 가지고 충분히 알아내지도 못하면서 당돌하게도 그러한 사실들을 기록하는 모습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최근에 있었던 우리나라 전쟁이 좋은 예입니다. 사람들은 전쟁과 관련된 곳에 가보지도 않았으면서도, 또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러한 사건을 가까이에서 접해보지 않았으면서도 그 전쟁의 역사들을 기록하며 출판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소문만을 듣고도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혼란시키며 역사라는[㈜ 참). 전쟁. 1권. 서문. 디베랴의 유스투스가 쓴 적과의 전쟁사에 관하여는 자서. 65(336)이하를 보라. 여기에서 그는 헬라 저술가 들이 쓴 신빙성 없는 역사들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이름을 붙여 이러한 저작들을 만들어 냅니다.


    9. ‘유대전쟁사’ 저자의 변증


     저는 유대와 로마간의 모든 전쟁(戰爭)에 관한 진실된 역사를이미 기록하였으며, 전쟁에서 일어난 특이한 사항들까지 관계되는 것이면 모두 문서로 기록하였습니다. 저는 갈릴리의 장군으로서 우리가 로마에 상대할 수 있는 한 맞서서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전쟁에서 로마 진영에[㈜ 전쟁. 3권. 8 : 9(408)] 붙잡혀 결국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때 베스파시안(Vespasian)과 티투스 황제 또한 저를 감금하고서 그들에게 끊임없이 시중들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결박당해 있었으나 후에 자유로운 몸으로 풀려났으며[㈜ 전쟁. 4권<10권. 1 : 2(7).> 10 : 7(622)이하.] 티투스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예루살렘을[㈜ 참. 전쟁. 4권. 11 : 5(658)] 정복하러 왔을 때 그의 수행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제가 모르는 것이라고는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로마 군대에서 일어난 것들을 모두 볼 수가 있었으며 그것을 신중히 기록하였습니다. 더구나(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가져온 정보들에 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저뿐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저는 로마에서 여가 시간을 가질 수있었는데, 그때 역사 기록을 위한 자료들이 준비되자 헬라어를 배우기 위해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이때를 이용하여 전쟁에 관한 역사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진실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최고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안과 티투스 황제에게[㈜ 참). 자서. 65(361) 이하] 호소하여 그분들로 하여금 증인으로 삼았으며, 또 그 책들을 그분들께 먼저 드렸고, 후에는그 전쟁에 참여한 바가 있는 많은 로마인들에게 드렸습니다. 또한 저는 헬라 철학을 이해하는 많은 유대인들에게도 그 책을 팔았습니다[㈜ (자서. 65.(362)에서) 이와 유사한 설명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아 그립바Ⅱ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증정본을 기증받은 것으로 이 름이 실려있다.] 그들 중에는 유명인사인 헤롯왕[㈜ 미상 ; 라이나후(Reinach)가 생각했던 대로 그는 전쟁 전에 죽었 던 칼키스(Chalcias)의 왕인 헤롯이 아니었다.] 율리우스 아켈라오(Julius Archelaus)와[㈜ 켈키아스(Chelcias)의 아들이자 아그립바Ⅱ세의 여동생인 마리암 메(Mariamme)의 남편 : 고대. 19. 9 : 1(355) : 20권. 7 : 1(140)] 우리의 아낌없는 칭송을 받아야 할 아그립바왕(King Agippa)도[㈜ 아그립바Ⅱ세]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모든 사람들은 제가 진실을 향해 가장 엄정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가 만일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무지해서 상황들을 잘못 설명하거나 어떤 사건들을 빠뜨리게 된다면 결코 그러한 저의 잘못을 못본체하거나 가만히 침묵을 지킬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10. 비판자에 대한 답변


     제가 역사에 관해 쓴 것을 중상 비방하거나 단지 코흘리개 소년이 학교에서 상을 받은 작문 정도로[㈜ 참). 투키디데스 ⅰ. 22. “나의 역사는 들었다가 금방 잊어버릴 그러한 모조품이 아니라 영원한 재산이다.”] 간주하는 참으로 나쁜 인간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 비난과 중상입니까? 따라서 역사를 진실하게 기록하기를 원한다면 누구든지 먼저는 스스로 정확하게 그 사건들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그 사건들과 자신이 직접 관련하든지 아니면 그 사건을 잘 알고있는 사람에 의해서 그 사건에 관한 정보를 잘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쓴 책들의 구성을 보자면 이러한 두가지 기준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말씀드린대로 유대의 거룩한 책(성경)으로부터[㈜ 참). 고대 1권. 서문 ; 20권. 12 : 1(261).’유대고대사'(전반부) 에서 요세푸스는 구약성경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부연 설명과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오래된 헬라어 번역본 인 70인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유대고대사'(The an-tiquities)를 번역했는데, 이것은 제가 제사장 가문에서 났으며 그 책들에 들어 있는 철학을[㈜ 혹은’연구’,’과학적 처리’ : 요세푸스는 전통적인 주석 방법 (Halakoth,등)에 대한 지식을 다소 보여준다.] 제가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와의 전쟁 역사에 관하여서는 제가 이 전쟁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쟁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며 그 전쟁에서 계획되거나 행해진 것이면 어떤 것이든지 제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나의 기록들의 진실성에 대하여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오만스런 행동이겠습니까? 설사 그 사람들이 두 황제의[㈜ 참). 자서. 65(342, 358)] 회고록을 인용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들은 로마와 대적해 싸웠던 유대의 입장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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