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21-30 아피온(Apion)에 대한 요세푸스의 반박과 유대인의 고대성

 


 21. 유대와 베니게의 기록이 일치함



 이러한 설명들은 우리 유대의 문헌들에 나타난 진실한 역사와 내용이 일치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그의 재위 18년에[㈜ 왕하25:8과 렘52:12에 의하면 19년째에 느부사라단( Nebuzaradan)에 의해 성전에 소실되엇다고 기록되어 있다. 18년째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 도시가 점령되었다(렘52:29).] 우리 유대의 성전을 황폐화시켰으며 이에 우리 성전은 50년 동안이나[㈜ 시드가야 왕의 몰락(주전 587년)으로부터 고레스 왕 원년(주전 538년)의 칙령이 있기까지의 포로생활은 49년간 계속되었다. 렘 25:12의 70년은 (아피. 1권. 19(132)대략의 수치이다.] 버려진 채 남겨졌다. 그러나 고레스 왕의 통치 2년만에[㈜ 참). 스 3:8] 성전의 기초가 놓여졌으며, 다리오(Darius)왕 2년에[㈜ 참).스 4:24. 그러나 이 여대는 방해받던 사업이 재개된 시기를 나타낸다. 이 건물은 4년 이후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스6:15)] 다시 완성되었다.\” 저는 이제 베니게인들의 기록들을[㈜ 아마 에베소의 메난데르(Menader)지방으로부터.] 첨가시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갈대아 사람들의 기록만으로는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독자에게 충분히 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니게의 기록에 보면 그들의 몇몇 왕들의 연대기 표를 보게됩니다. \”느부갓네살은 그들의 왕 이도발(Ithogal)이[㈜ 이도발(Ithobal) Ⅱ세. 초기 왕의 이름은 아피. 권. 18(123)에 언 급됨.] 통치할때에 13년이나[㈜ 고대. 10권. 11:1(228)(필로스트라투스의 글을 근거로 함).] 두로(Tyre)를 공격하였다. 이도발이 죽자 그의 아들인 바알(Baal)이 10년간 통치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로재판관(Judges)들이 선임되어 다음에 기록하는 사람들이 백성을 다스렸다. 바슬레크(Baslech)의 아들인 에크니발(Eknibal)이 2개월간을, 아브다이우스(Abdaeus)의 아들 켈베스(Che-lbes)가 10개월간을, 대제사장인 아바르(Abbar)가 3개월간을 마틴과 게라스트라투스(Mythyn and Gerastratus)는 아브델리무스(Abdelimus)의 아들이며 6년간 재판관으로서 다스렸다.그 이후로 발라토르(Balator)가 1년간 다스렸으며 그가 죽자 그의 신하들이 바벨론에서 메르발(Merbal)을 모셔다가 왕이 되게하였는데 그는 4년간 통치하였다. 그가 죽은 후 백성들은 그의형제인 히롬(Hirom)을 데려다가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20년간 다스렸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고레스가 바사의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기간을 합산해 보면 총 기간은 54년 하고도 3개월이[㈜ 위에서 언급된 숫자의 총계는 55년 3개월이다.]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재위 7년째[㈜\’17 \’을 잘못 표기했을지 모름.] 되는 해에 두로를 호위하기 시작하였고, 바사 왕 고레스는 히람왕의 재위 14년째 되는 해에 바사 왕국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관해 갈대아와 두로인들의 기록은 우리 유대 민족의 기록과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산출된 증거들은 우리 유대민족의 고대성에 대해 분명하고도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가 됩니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는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22. 헬라의 증거



 그러나 한편 야만인들의 기록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단지 헬라사람들 외에 믿을 수 있는 가치는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의문점들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유대 민족을 알고 있었던 바로 헬라인 당사자들의 증거들을 좀더 제시하고, 또 그들 자신의 문서에서 유대에 관하여 언급해 왔던 헬라역사가들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주전 6세기경의 남부 이탈리야에 살던 크로토나(Crotona)와 우 호관계를 지녔던 유명한 사람] 아주 오랜 옛날 사모스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지혜나 경건심에 있어서 어떠한 철학자들보다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그는 우리 민족의 교리를 아는데 머무르지 않고 오래 전부터[㈜ ejkpleivstou는 고대. 15권. 7:4(233)에서 보면 일시적 의미로서 \’오래전 \’의 뜻으로 쓰임. 그러나 Whiston 번역판에 보면 \’매우 많은 양\’으로 되어 있다. 라이나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교리들을 추종하고 경배하는 사람이었음이 명백합니다. 그가 지은 저서가 현존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중에서 헤르미푸스(Hermippus)가[㈜ 주전 3세기경의 스미르나(Smyrna). 그는 철학자들과 또 다른 여 러 사람들의 자서전을 썼다.]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모든 종류의역사에 관해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헤르미푸스가 피타고라스에 관해 기록한 첫 번째 저서에서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피타고라스는 크로토나(Crotona) 태생의칼리폰(Calliphon)이라는 한 제자가 죽게 되자 그가 밤낮으로 칼리폰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나귀가 쓰러져 있는[㈜ 아마도 당나귀에 대한 유대 사이비 종교의 우화에 관하여 언급 하고 있음(민 22:27). 발람선지의 우화에 대한 암시.] 곳으로 지나가지 말라고 그가 분부해 줬다는 사실을 긍정하였다.또한 다시 목마르게[㈜ 문자적으로는\’목마름 \’으로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함. 라틴어 역에는 \’더러운\’으로 표기됨. 라이나흐는 \’맛없는\’으로 해석함.] 하는 물을 마시지 말 것이며 온갖 종류의비난받을[㈜ 참). 출 22:28, 레 19:16.] 일을 삼가라 당부하였음을 긍정하였다.\” 그 후에그는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유대인과 트라키아인(Tracians)의 교리를 계속적으로 실천하며 모방하였다.\” 실제로 말하면[㈜ 예를 들어 유세비우스, \’복음에의 준비\'(Preap. Evang.) ⅷ. 12, 664에 아리스토불루스가] 피타고라스가 유대의 많은 율법을 가져다가 자기네의 철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민족이 옛부터 여러 도시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사실상 어떤 사람들은 우리 유대의 여러 풍습을 따라 살았으며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도 여겼던 것입니다. 데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라는[㈜ 소요학파 학교의 지도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하생이자 후 계자. 그외 여러민족의 유럽들을 요약한 법률서적은 아리스토텔 레스의 저서 \’정치학\’의 부록으로 고안된 작품인 것 같다. 그 의 유대인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유세비우스, \’복음에의 준 비\’, ⅸ. 2, 404 A에 인용되어 있다.] 사람은 그의 \’율법\'(Laws)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같이 선언하였습니다. \”두로인들의 율법은 이질적인 맹세(For-eign oaths)를 백성들로 하여금 금하고 있다.\” 그는 몇가지 다른 율법들을 나열하다가 특별히 고르반(Corban)이라고 하는 맹세도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르반 맹세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고 유대인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히브리어에서 \’하느님께 드린바 되었다\'[㈜ 엄격히 말해서 고대. 4권. 4:4(73), 막 7:11에 해석된 대로 \’선 물\’을 뜻한다.\’금기된 \’이란 의미로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이며 서약을 동반한 맹세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 하면 고르반(Corban)은 마 23:16이나 라이트풋(Light foot)의 주 석에 나타난 것처럼 맹세를 뜻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되는 그러한 맹세였습니다.

 사실상 힐리카르나수스의 헤로도투스(Herodotus of Hallica-rnassus)는 유대 나라와 친숙하지는 않았으나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유대에 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콜키아인들(Colchians)에 관한 그의 두 번째 저서에서[㈜ 헤로도투스 ⅱ. 104 ; 요세푸스가 고대. 8권. 19:3(262)에서 나타 난 문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부위를 할례하였던 민족은 콜키아인들과 애굽인들, 그리고 에디오피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베니게인들과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수리아 사람들은[㈜ 만일 헤로도투스가 블레셋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실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시대 때에 할례를 받지 않 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유대인들을 지칭한 것이 이치 상 정당한 것이다.] 할례를 애굽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데르모돈강(Theriver Thermodon)과 파르데니우스(Parthenius)강[㈜ 소아시아의 강듶.] 근처에서 사는 수리아 사람들과 그들의 이웃인 마크론인들(Macro-nes)은[㈜ 본도(Pontus)에 있다.] 말하기를 그들은 이미 콜키아인들로부터 할례를 배웠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인류 가운데서 할례를 행한 유일한 백성들이었으며, 그들은 모두 애굽인들을 모방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애굽인과 에디오피아인 두 나라에 관한 한 나는 이들 중 어느 쪽이 다른 한쪽으로부터 할례를 받아들였는지 말할 수 없다.\” 위의 헤로도투스의 말에는 \”팔레스틴이 수리아인들이 할례를 행한다\”고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할례를 한 팔레스틴의 거주자들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유대에 대하여 말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고대의 시인인 코에릴루스(Choerilus)는[㈜ 사모스에 살고 있던 헤로도투스의 젊은 동년배 친구. 헬라와 바 사 전쟁에 관한 그의 몇몇 서사시 단편이 현존하고 있다.] 바사의 아하수에로(Xerxes)왕이 헬라를 원정할 때를 말하면서 우리 유대민족을 언급합니다. 원정을 지원한 나라들을 열거하면서 그는맨 마지막에다 우리나라 유대의 이름을 삽입하였습니다.

 \”이제 언뜻 보기에도 신기한 한 민족을 통과했다. 이상하게도그들은 입으로는 베니게 말을 사용하였으며 넓은 호수 근처의 솔리미아동산 (Solymian hills)에 거주하였으며, 그들은 머리를둥글게 깎았으며 빗지 않아 단정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의 피부는 마치 연기속에서 그을린 말머리 같이 생겼다.\”

 여기에서 말하는 솔리미아 동산이란 유대인이 거하는 지역을말하고 또한 넓은 호수도 역청질의(Bituminous) 호수가 수리아의[㈜ 요세푸스는 Solymi와 그의 파생어인Hierosolyma를 각각 유대인 과 예루살렘으로 일치시켜 생각하였다. 그리고 \’넓은 호수\’ (broad lake)를 사해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착상은 매우 훌륭 한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백성은 분명희 동부의 에디오피아 사람들을 말한다. 코에릴루스(Choerilus)는 호머의 \’오딧세 이\’ ⅴ. 283으로부터 \’솔리미아의 언덕들\’이란 말을 인용한다. (이 언덕들의 이름은 바로 \’에디오피아인들\’이란 낱말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이다). 그는 또한 아하수에로의 군대 목록에다 동부 에디오피아의 친구인 헤로도투스에 관하여 서로 서술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헤로도투스70). 이러한 사실은 서부 에디오피아 사람들의 기록인 \’단지 언어와 머리털에 있어서\’과는 다르다. 그들은\’곧은 머리카락 \’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의 머리에다가 말머리 가죽을 뒤집어 썼던\’사람들이며 그 말의 귀와 갈기를 달고 다녔다.: 자신들의 표현에 의하면 베니게인들이 원래 홍해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베니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헤로도투스 ⅶ. 89)-이 시인의 표 현으로는 이 \’넓은호수\’란 홍해를 가리킨다. 머리카락을 둥글 게 삭발하는 습관은 인근 아랍지역에서는 성행하였지만 유대인 들 사이에는 분명히 금지되어 있었다(레19:27, 참). 렘9:26)] 어떤 것보다 크고 넓은 호수이기 때문에 코에릴루스가여기서도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하층 계급의 헬라인들은 물론이고 철학적 지식의 진보를 이루어 최대의 존경을 받은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단지 아는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유대인에 관해 깨닫게 되면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제자로서 소요학파 가운데 누구 못지않은 인물인 클레아르쿠스(Cleardhus)는 그의 잠에 관한 저서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록한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세비우스 \’복음에의 준비\'(Preap. Evang.)] \”나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유대인과 나눈 대화를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그 유대인이 한 말을 되풀이 하자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네. 그러나 그가 한 말 가운데에는 기사(奇事)와 철학이 들어 있네. 히페로키데스(Hypero-chides)여, 자네가 쉽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 이제 자네가 볼때에는 다소 신기하고 꿈과 같은 일들을 이야기 하겠네.\” 그러자 히페로키데스는 겸손히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 \’저희 모두가 선생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듣기를 갈망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기를\”그렇기 때문에 수사학자(Rhetoricians)의 규칙을 따르는좋겠네. 따라서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느 나라의 출신인지를 알아 보도록 하겠네. 그리하여 우리 스승의 가르침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일세.\” 이때 히페로키데스는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좋을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이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였다). \”이 사람은 유대 태생으로서 코엘레수리아로부터 왔었네. 이 유대인들은 인도의 철학자들로부터[㈜ 클레아르쿠스(Clearchus)는 \’교육에 관하여\’라는 그의 저서에 서 동방박사의 후손인 인도 신비 수도자의 계보를 추적하였다. 또한 우리의 근거가 되는 인물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Diogenes Laeritus)는 \’몇몇 사람들은 유대인들도 동방박사들 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라고 덧붙인다. 메가스테네스 (Megasthenes)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과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 이 서로 교제했다고 한다(클레멘트. \’Strom\’ ⅰ. 15). 역자는 라이나흐(T. Reinach)의 주석을 인용하였다.] 유래한 자들로서 인도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칼라니(Calani)[㈜ 칼리누스(Calanus)는 알렉산더 대왕을 추종했다가 그의 군대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했던 사람의 이름이다(플루타르크. \’Alex.\’65등).]라고부르고 있는 반면에 수리아인들은 그들을 유대(Judaea)라고 부르고 있네. 그들은 이 이름을 그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이름을 따라 붙였는데 그 나라의 이름은 유대(Judaea)라고 불리우고 있네.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은 예루살렘(Hierualeme)인데 어색하기 짝이 없네. 그런데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자 높은 지역에서 바닷가 가까운 지역으로 내려와 마침내 언어에서뿐 아니라 영혼에 이르기까지 헬라 사람이되어 버렸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아시아에 있을 때[㈜ 주전 약 347-344경 그의 친구 헤르미아스(Hermias)와 함께 무 시아(Mysia)에 있는 아타르네우스(Atarneus)에서.] 그가 찾아온 바로 그곳에서 우리도 함께 있게 되었는데, 그때 그사람은 우리와 다른 철학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철학의재능을 시험해 보곤 했네. 그는 많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살아 왔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그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우리와 주고 받았네.\” 이상은 이 사실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설명한 내용을 클레아르쿠스가 전해준 것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유대 사람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놀라운 인내와 절제에 대해서도 특별히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에 관한 이러한 사실들을 더 상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클레아르쿠스의 책만으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기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클레아르쿠스의 저술의 주요 목적은 다른 데 있었으므로 그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본론에서 벗어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자요 활동가인 아브데라의 헤카타이우스(Hecataeus of Abdera)[㈜ 헤카타이우스(주전. 4-3세기)가 유대인들에 관하여 역사를 기록 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그 역사서가 독립본이든 애굽역 사의 일부로 기록된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유대의 묵시문학 들이 그의 저작인가에 대해선 불분명하다. 최근의 비평가들( T.Reinach, J. G. Muller)은 다음에 나오는 발췌문들은 모두 알 렉더와 그 뒤를 이은 4왕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으며 아주 공 정한 것으로 보인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젊은 시절에는 알렉산더 왕과 동시대에 살았으며, 후에는 라구스(Lagus)의아들인 톨레미(Ptolemy)와 동일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역사를 그저 부수적으로 기록하였다기보다 저서 전반에걸쳐 유대인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저는 이제까지 제가 대략적으로 언급했던 몇가지의 사실들을 언급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따라서 저는 먼저 헤카타이우스가 살았던 시대를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저서에는 가사(Gaza) 지방에서 벌어진 톨레미와 데메트리우스(Demetrius)의 전투를 기록하고 있는데 카스토르(Castor)의[㈜ 연대기에 관한 저서의저자. 대략 주전 2세기경의 인물] 역사서에 의하면 이 전투는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지 11년째 되는 해이자 117회 올림피아드대회가 열린 해에 벌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올림피아드에 대해서도 기록하면서 말하기를 \”이 올림피아드 대회때 톨레미는 가사에서 폴리오크레테스(Poliocretes)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격파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알렉산더 대왕은 114회 올림피아드 대회때 죽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알렉산더와 톨레미 시대에는 번영했었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헤카타이우스는 같은 의도로 다음과 같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톨레미는 가사 전투가 끝난 이후 수리아의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겸손함과좋은 인간성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따라 애굽으로 갔으며 그의 정사를 도와주려고 하였다.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유대의 대제사장인[㈜ (무관사) ajrciereuv\”를 \’대제사장\’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Ezekias\’는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당시의 대제사장은 분명 오니아스(Onias)였다(고대. 11권. 8:7(347).] 히스기야(Ezechias)라는 인물이 있었다.(이것은 헤카타이우스가 말한 것이다). 그는 대략 66세 가량의나이를 가진 자로서 그의 백성 중에서 상당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각이 있는 자였으며 연설을 감동적으로 하였으며 어느 누구보다 사건을 처리하는데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말하기를 유대의 제사장들이 땅의 소산의 십일조를 거둬들이고공공업무를 주관하였고 제사자의 총수는 약 1,500명이었다고 한다.\” 헤카타이우스는 이 히스기야라는 인물에 관해 두 번째 언급하면서 이처럼 말합니다. \”그는 우리와도 친밀했는데 이 높은지위를[㈜ 아피. 1권. 22(188)에 나오는 단어 kairoiv와 아피. 1 권.22(189)에 나오는 단어 \’이러한 영광\’의 정확한 뜻은 분명 치 않다(대제사장직이나 몇몇 특별한 직임이 그에게 톨레미 소테르에 의해 수여되었다).] 획득한 후 그의 친구들을 몇몇 모아놓고 그 사람들에게 [이민]의 유익에 대해서 [알려주는 글]을 읽어 주었다. 히스기야는 유대인의 주거생활과 정치체제에 대하여 애착심을 가지고 글을 기록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설명은 할 수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 헤카타이우스는 다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우리 유대인은 율법을 매우 존중히 여기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느니보다 차라리 참고 고통당하는 것을 원한다. 유대인은 인근 주변 국가들이나 유대를 찾아온 사람들로부터 나쁜 평판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바사(Persia)의 왕이나 총독들로부터 무자비하게도 잦은 침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단념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옷을 벗기우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극도로 처참한 죽음에 이를지라도 그들은어떤 민족보다도 더 용감하게 닥친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조상들이 물려준 종교를 거절하지 않았다.\” 헤카타이우스는 또한 유대민족의 율법에 대한 완강한 고집에 관하여 꽤많은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알렉산더가 바벨론에 있을 때였다. 그는 무너져 썩어 버린 벨 신전을 재건하려 하였다. [㈜ 이러한 계획은 Arrian \’Exped. Alex.\’ ⅶ.17과 Strago. ⅹⅥ . 1,5,738에 잘 증명되어 있다. 여가는 이에 관하여 Reinach의 글을 참조하였다.] 이에그의 모든 군사들에게 명하여 흙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직 유대인들만이 그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매를 맞으며 심지어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면서도 끝내 불복하였다. 마침내 왕은 그들을 용서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조용하게 살도록허락해 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마케도냐(Macedoni-an)사람들이 바벨론을 침입하여 [오래된]신전들과 제단들을 다시 세울 때 유대인들은 그 신전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들은 총독에게 많은 벌금을 물기도 했으나 때로는 용서를 받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였습니다.\” 이런 점으로 봐서 그들은 칭찬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그는 또한 유대 국민이 수가 많다는것에 관해서도 언급하였습니다. \”바사인들은[㈜ 헤카타이우스는 갈대아인을 바사인으로 착각함. 유대의 위조범 은 이러한 혼돈에 대해서 아무런 혐의가 없어야 했다(왜냐하면 여기에서 인용된 저자가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우리 국민들을 수만명씩이나 바벨론으로 이송하였으며, 또한 수리아에서생긴 폭동을 이유로 애굽과 베니게로 수만명을 옮겼다.\” 헤카타이우스는 그의 역사 저술에서 유대 국가의 넓이와 그 땅의 비옥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땅은 약3,000,000만 아루래(arourae)이며,[㈜ 아피. 1권. 13(86)의 각주를 보라.] 이 땅들은 주로 아주 양질의 비옥한 흙으로 되어 있고 각종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유대 나라는 결코 좁은 땅이 아니다.\” 헤카타이우스는 유대의 예루살렘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기를 매우 빼어난 도시구조를 지닌 매우큰 도시로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기록합니다.또한 그는 이 도시에 사는 많은 군중들에 관하여, 그리고 성전건축에 관하여서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유대나라에는[㈜ 요세푸스가 살던 시대에 갈리리만 해도 204개의 성읍과 마을이 있었다(자서. 45(235).] 여러 지역에 견고한 요새들과 마을들이 있다. 그런데 약 50스다디온(Stade)[㈜ 스다디온은 길이의 단위로서 퍼얼롱보다 약간 길다. 여기에서 50스다디온은 과장이다. 다른 곳에서는 40(유세비우스 ⅸ. 35에 티모카레스, 아리스테아스105), 33(전쟁. 5권. 4:3의 요세푸스), 27(유세비우스\’복음에의 준비\’36, 242에 수리아의 토지측량가) 스다디온으로 산정해 놓았다.] 정도의 둘레를 지닌 한 강한 도시가 있는데 대략 12,000,000명의 인구가 살고있다. 사람들은 이 도시를 예루살렘(Jerusalem)이라[㈜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 부르고있다. 이 도시의 중앙에는 한 개의 돌벽이 있는데 그 길이는 5플레드론(plethron)[㈜ 플레드론(plethron)은 100헬라 피트(약 98영국 피트 정도).] 정도이며, 넓이는 약 100규빗(cubits)[㈜ 이 또한 분명 과장된 표현이다. 60규빗이 고레스왕에 의해 제정 된 넓이이다(스6:3).] 정도이고 한쌍의 대문이 붙어 있는데 그 안에는 둘 다 금으로 되어있는 제단과 촛대가 있으며 그 안에는 사각형의 제단이 있다. 이제단은 깨지지 않은 흰돌로 만들어졌으며 각변의 길이가 20규빗에 놓이는 10규빗으로 되어 있다. 그 제단 바로 곁에는 큰 건축물이 잇는데 그 안에는 둘 다 금으로 되어 있는 제단과 촛대가있으며 2달란트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이 촛대 위에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은 빛이 밤낮으로 비췄다. 그 건물 안에는 어떤 형상이나 헌물도 놓여지지 않으며 어떤 식물이나 그와 유사한 어떤 것도 심겨있지 않다. 제사장들은 밤이나 낮이나 정결의식(Purification)을 행하며, 성전 안에 있는 동안 포도주를 절대로금했다.\”[㈜ 레 10:9, 겔 44:21, 참).아피. 2권. 8(108)] 더욱이 헤카타이우스는 우리 유대인들이 알렉산더왕을 따르는 외국인 지원부대이며 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후계자를 추종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헤카타이우스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그 또한 스스로 그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때 유대인 한 병사의 행동에 관하여 알게 된 사실들을 말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홍해(Red Sea)로 가고 있을 때 모솔라무스(Mosollamus)라는[㈜ 메슐람(Meshullam)의 헬라화된 형(스8;16).]

이름의 한 사람이 따라왔다. 그는 우리를 호위하는 유대 기병의한 사람인데 대단한 용기와 건장한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헬라인이나 야만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최고의 궁사(弓士)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를 지나가고 있을 때 한 점장이가 새 한 마리로 점을 치고 있다가 그들 행인들을 모두 제자리에 멈춰 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모솔라무스는 그들이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때 점장이는그에게 점괘를 알려 주는 새를 보여 주면서 말하였다. \”만일 새가 제자리에 서 있으면 당신들은 모두 제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새가 일어나 앞으로 날아가면 당신들은 앞쪽으로행진해야 합니다. 또한 새가 뒤쪽으로 날아가면 당신들은 다시되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모솔라무스는 대꾸를 하지않고 활을 꺼내 새를 향해 쏘았는데 결국 그 새는 화살에 맞아죽고 말았다. 따라서 점장이와 많은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그를저주했다. 그는 이렇게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불쌍한 친구들, 왜 이렇게 야단입니까?\” 그리고는 죽은 새를 집어들고 이어서 말했다. \”자기 앞일도 내다보지 못하는 새가 어떻게 우리가행진할 방향 정보를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미래를예견했다면 유대인인 이 모솔라무스가 그에게 활을 쏘아 죽일것이라는 것을 알고 무서워서 이곳으로 날아오지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면 헤카타이우스의 증거에 관해서는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해 더 상세한 것을 알기 원하거든 그의 저서를 구하여 보면 될 것입니다. 비록 아가르다르키데스(Aga-rtharchides)가[㈜ 다수의 역사, 자리에 관한 저서를 지은 저술가인 주전 2세기경의 크니도스(Cnidos). 특히 홍해에 관한 저서를 썼다.] 유대인의 단순성을 비웃는 듯한 표현을 했을지라도 유대인에 관한 언급을 한 이상 그에 관해서 다루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아가르다르키데스는 스트라토니케(Stratonice)가[㈜ 안티오쿠스 Ⅰ세의 딸인 스트라토니케는 마게도냐의 데메트리 우스 Ⅱ세와 결혼하였다. 주전 약 239년 경에 데메트리우스가 재혼을 하려하자 그녀는 조카인 셀류쿠스 Ⅱ세를 지원하려고 도망해 버렸다. Justin. 1에 나오는 설명과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어떻게 남편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버리고 마게도냐(Macedonia)로부터 수리아(Syria)로 왔는지, 그리고 셀류쿠스(Seleucus)왕이 그녀와 결혼해 주지 않자 그가 바벨론(Bal-ylon)지방에서 전투를 시작하고 있을 즈음 그녀가 어떻게 안디옥(Antioch)지방에서 폭동을 일으켰는지, 또한 셀류쿠스왕이돌아와 안디옥을 장악하게 되자 그녀가 어떻게 셀류키아(S디-eucia)로[㈜ 오론테스(Orontes) 어귀에 있는 수리아의 항구인 셀류키아 피에 리아(Seleucia Pieria).] 도망쳤는지, 그리고 즉시 배를 타고 도망할 수 있었는데 배를 타고 도망치지 말라고 하는 꿈을 따르기로 하다가 붙잡혀 결국 죽고 말았는지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아가르다르키데스가 이 이야기를 진술하면서 미신을 따르는 스트라토니케를 비웃는 내용과 함께 그는 우리 유대 민족에 관하여 이와 유사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대. 12권. 1:1(6)에 있는 요약 형태의 글에서 인용함.]\”유대인이라고 알려진 백성이 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이라는[㈜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요새화된 튼튼한 성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매 7일마다 하루씩안식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데 아무도 이 날에는 무기나 농사도구도 들지 않고 다른 공적인 봉사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들의 성소에서 손을 들고 저녁때까지 기도를 한다. 따라서 라구스(Lagus)의 아들 톨레미(Ptolemy)가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 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이 사람들은 이 미친 관습을 지키느라 결국 예루살렘을 지키지 못하고 이 못된 군주에게 내맡겨버리고 말았다.[㈜ 날짜 불분명함. 아피안(Appian)은 톨레미 Ⅰ세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에 관하여 언급한다(\’Syr.\’ 50).] 또한 그들의 율법에 따라 그들은 어리석은 짓을 자주 행했던 사실이 널리 알려진 바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을제외한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허황된 규칙들을 무시해야 한다는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과 같이 불확실한 이성으로는 무엇을 행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보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 한낱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아가르다르키데스는 기록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편견없이 생각하는사람들에겐 매우 위대한 일로 여겨질 것이며, 많은 찬사를 받을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민족과국가를 보존하기 이전에 율법을 엄수하며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신앙을 끊임없이 앞세우는 그들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23. 히에로니무스나 다른 사람들의 악의적인 침묵



 한편 어떤 역사가들은 유대민족에 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우리에 관해 아는 바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우리를 시기했거나, 혹은 다른 부정직한 이유때문입니다. 저는 몇가지 특수한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알렉산더의)후계자들의 역사 [History of(Alexantder\’s) Successors]를 기록했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라는[㈜ 주전 약 360-265년경의 드라키아(Thracia) 케르소나세 (Chersonese)에 살던 카르디아(Cardia)의. 그가 쓴 알렉산더 의 죽음으로부터 피루스(Pyrrhus)의 죽음까지의 분할통치 (Diadochi)의 시기에 관한 역사는 이 시기에 관한 유력한 것 이다. 그가 수리아인을 임명한 사건에 관하여는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사람이 있는데, 그는 헤카타이우스(Hecataeus)와 동시대에 살았으며 안티고누스(Antigonus)와[㈜\’애꾸눈 \’이란 별명이 있었다. 약 주전 381-301년 알렉산더의 장군이었으며 그의 사후에 아시아 지역의 군주였다.] 친구지간이었기 때문에 수리아(Syria)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헤카타이우스가 유대에 관한 전 역사를 기록했던 사실은 잘 알고 있는 반면 히에로니무스는 그가 유대 국경에 가까운 곳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에 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두 사람들의 시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 사람 헤카타이우스는 우리를 신중히 기억해 둘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 히에로니무스는 악의를 품은 나머지 분별력을 상실한 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앞서 말씀드렸던애굽인들과 베니게인들과 갈대아인들, 그리고 많은 헬라의 역사가들의 기록들을 통해서 유대민족이 고대성을 지녔다는 사실에대해서 충분한 증명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드린 여러 기록들 외에도 데오필루스(Theophilus), 데오도투스(Theodotus), 므나세아스(Mnaseas),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헤르모게네스(Hermogenes), 유헤메루스(Euthemerus),코논(Conon), 조피리온(Zopyrion),[㈜ 요세푸스는 이러한 이름들을 간접적인 정보를 통해 알게 되었 던 것 같다. 그러한 정보가 문헌상의 것이든 아니면 로마의 동 료 문필가들의 구두를 통해서 들은 것이든 간접적이었던 것으 로 추측된다. 라이나흐(Reinach)는 이들 모두가 알렉산더 폴리 히스토르(Alexander Polyhistor)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 두사람의 경우엔 이러한 생각이 가능하다. 데오 도투스[만일 시켐(Sichem)과 디나(Dinah)의 이야기에 관한 6보 시(六步詩)의 저자를 의미한다면]는 아마도 사마리아인일 것이 다. 므나세아스(Mnaseas)가 아피. 2권. 9(112)와 고대. 1권. 3:6(94)에 재언급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아마도 알렉산드 리아의 유명한 도서관원이었을 것이다 유헤메루스(Euhemerus) 는 그리스신화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외에도 많은 책들(나는 모든 헬라의 서적들을 낱낱이 밝히지 않았다)을 통해서 우리 유대국가에 대한 분명한 기록들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앞서 말씀드린 많은 저자들은 우리 유대민족의 아주 고대의 사실들에 관해서 많은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성서를 숙독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람들은 제가 언급하고자 하는유대의 고대성에 관해 입증을 해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 팔레레우스(Demetrius Phalereus),[㈜ 주전 345-283년경. 아덴의 연석가. 후에 톨레미 Ⅰ세의 치하에 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원이 됨. 이 모세오경의 헬라어본을 만드는데 역할을 담당했던 가짜 아리스테아스 (Pseudo-Aristeas)와 요세푸스에 의해 신임받음(고대. 2권. 46). 그러나 본문에서 그는 유대 역사가인 다른 데메트리우스와 혼 돈하는 것 같다.] 장로인 필로(Philo), 그리고 유폴레무스(,Eupolemus)와[㈜ 주전 2세기 경의 성경 주제들에 대한 유대 저술가들. 장로 필로 (Philo)는 서사시인, 유폴레무스(Eupolemus)는 역사가.] 같은 사람들은유대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다지 커다란 과오를 범하지는않았습니다. 유대의 성경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작은 실수들은 용서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4. 유대에 대한 비방



 제가 처음에 이 저서에서[㈜ 아피. 1권. 1(4)이하] 말씀드리려고 의도했던 것 중에말씀드리지 못한 한가지 특별한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향해 퍼부었던 주장과 비난들이 새빨간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이 스스로 제시한 증거를 역이용해서 그들의 억측을 공격하려는 것입니다.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백성들에 대해 악의를 품은 탓에이러한 자기 모순에 빠지는 법이라고 저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역사를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모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민족들의 품위를어떻게든지 격하시키려 애를 쓰면서 그 나라의 정치체제를 비난하려 합니다. 예를 들면 데오품푸스(Thepompus)는[㈜주전 378-300년경의 키오스(Chios) 출신. 이소크라테스 (Isocrates)의 문하생이자 예리한 역사가.] 아덴(Athene)시를 맹렬히 비난 하였으며,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아데나이우스(Athenaeus)가 그의 저서 \’라코니카\'(Laconica) ⅳ.139에 언급되어 있다. 주후 4세기에 아덴의 궤변가로 알려진 사실은 불분명한 것이다.] 라케다이몬(Lacedaemon)을 비난하였으며, \’삼두정치\'(Tripoliticus)를[㈜ \’세 나라의 책\’혹은\’ 세 수장(首長)의 책\'(trikavrano\”)으로 불리움. 작은 팜플렛 형식의 책으로서 아덴, 스파르타, 더베 등 의 나라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의 적인 람프사쿠스(Lampsacus) 의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에 의해 데오폼푸스의 명의로 출 간되다. 그는 데오폼푸스(Theopomus)의 문체를 교묘하게 모방 하여 그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파우사니우스 ⅵ. 18.3).] 쓴 저자(그는 몇몇 사람들이 추정하는 것처럼 데오폼푸스가 아님)는 더베(Thebes)시를 비난했던 경우를 들 수가 있습니다. 티마이우스(Timaeus)도[㈜ \’까다로운 사람\'(!Epitivmaio\” )이라는 별멍을 지니고 있다. 참).

 각주 11. ] 앞에 열거한 백성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을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악한 비평들은 주로 그들이 최고의 평판을 지닌 백성들과경쟁관계를 지닐 때 사용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시기심과 악 감정으로 이런 행동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이러한악평을 함으로써 그들의 명성이 높아질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어리석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묵인이 될지 몰라도 건전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라면그들이 지닌 엄청난 죄악성을 정죄하게 됩니다.



 25. 이런 비난은 사악한 애굽인들이 지어낸 것임



 그런데 우리 유대 민족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사람들은 애굽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지 몇몇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진리를 왜곡한 역사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다른 나라에서 애굽으로 왔다는 사실도 있는 그대로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출애굽을 한 과정에 관해서는 정확한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실제로 애굽인들이 유대 민족을시기하고 증오하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애굽을 통치했었기 때문이며,[㈜ 즉, 야곱의 12아들 중 하나인 요셉의 시대. 요세푸스는 분명히 힉소스(Hycsos)를 유대인의 조상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후 우리 민족은 출애굽하여 자기네 땅으로다시 되돌아 가서 그곳에서 번영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종교적으로 유대의 종교와 애굽의 종교가[㈜ 혹은 \’민족들.\’]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애굽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적대 감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이것은 유대의 거룩한 예배의 방식이 애굽의 율법에 따르는 방식보다 낫기 때문이며 유대의 신의 관념 또한 짐승을 섬기는 것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 지역마다 특징이 다르기는 하지만 동물신을[㈜ 참). 예를 들어 쥬베널(Juvenal), \’Sat.\’ⅹⅴ.과 아피. 2권. 6(65)] 섬기는 것은 매 한가지요 처음부터 신에관해 그토록 저급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 자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유대인이 지니고 있는 고상한 형식의 제사 형태를 본받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사람들이 유대의 제

도가 우월하다고 인정합니다. 그 때문에 애굽인들은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극도로 흥분한나머지 분별력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부 애굽인들은 애굽의 고대 기록과 심지어 자신들의 기록까지도 서슴없이반박할 만큼 어리석음과 광기의 극치에 도달해 버리고 말았던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욕심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상실하고만 것입니다.



 26. 마네토의 비방



 이제 저는 화제를 바꿔 이전에 제가 유대의 고대성에 대한 증인으로서 약간 다룬 바 있는[㈜ 아피. 1권. 14(73)] 애굽의 중요한 역사가들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마네토(Manetho)입니다. 그는 애굽의 거룩한 책들로부터 애굽의 역사(The Egyphian his-tory)를 번역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제하였습니다. 즉 \”유대 민족은 수만명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들어왔으며그곳의 거주민들을 정복하였다.\” 계속해서 서술합니다. \”유대는후에 그 나라에서 나와 유대라 불리우는 나라에 정착하였으며그곳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건설하였다.\” 이제까지의 말은 그가 고대의 문헌들을 인용한 것이지만 이제부터는 외국에 퍼져있는 유대에 관한 소문이나 낭설들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그리하여 마네토는 문둥병과 기타 질병에[㈜ 참)\’애굽의 종양\'<아마도 상피병(上皮炳)>, 신 28:27] 걸린 애굽인들이정죄되어 버림받고 유대인들과 함께 있다가 애굽을 떠났다는 터무니없는 사실을 끌어 들였습니다. 마네토는 이같은 거짓말을정당화하기 위해 아메노피스(Amenohis)라는 가공의[㈜ 문자적으로는 \’첨가함.\’] 왕을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왕은 가공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언급한 다른 왕들처럼 정확한 통치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음을 살펴볼수가 있습니다. 마네토는 이같이 가공의 왕을 설정한 후에 목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사건을 언급한 적이 언제 있었느냐는식으로 이 왕을 중심으로 거짓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비평은 불합리하다. 마네토는 애굽으로부터 2번의 추방을 명백히 구분한다. ①예루살렘을 창건했던 힉소스의 추방 사건. 아피. 1권. 13(85-90). ②나병환자 등이 오사르시프(=모세) 의 주도하에 추방한 사건. 오사르시프는 힉소스의 후예들과 함 께 돌아와 전국을 석권하였다, 아피. 1권. 26(232-250). 두 번째 의 추방사건을 주도한 아메노피스(Amenophis)의 신원은 불분 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요세푸스가 그를 \’가상의 인물\’로 칭하 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마네토는 이미 이전에도 아메노피스라 는 이름의 왕을 세 명이나 언급하였다, 아피. 1권. 15(95-97). 요세푸스는 그의 비평에도 불구하고518년간(=393+59+66)이라는 시간적 격차를 계산함으로써 그가 보다 후대의 아메노피느 Ⅳ 세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요세푸스의 계산법은 마네토 방법과도 같은 것 이다. 그러나 라이나흐는 마네토가 그를 아메노피스 Ⅲ세로 동 일시 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아피. 1권. 15(97)] 목자들이 애굽을 떠난 것은 이미 518년전의 테드모시스(Tethmosis)[㈜ 아피. 1권. 15(94) : = Thoummosis, 아피. 1권. 14(88).]왕 때의 일인데도 그것을 잊어 버린양 엉뚱한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마네토도 테드모시스왕 때 유대인들이떠났고 테드모시스를 이어 세도스(Sethos)와 헤르마이우스(Hermaeus),[㈜ 하르마이스(Harmais)라고 불리움. 아피. 1권. 15(98).] 두 형제 때까지 중간 왕들의 통치 기간이 393년이라고[㈜ 참). 차피. 1권. 16(103)] 고백은 하고 있습니다. 세도스는 애굽(Egyptus)이라고 부르며 헤르마이우스(Hermaeus)는 다나우스(Danau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네토는 또한 세도스(Sethos)가 헤르마이우스를 애굽에서 추방시키고 59년간 애굽을 다스렸으며, 그가죽자 장남인 람프세스(Rhampeses)가 66년간 왕위에 올랐음을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네토는 우리 유대의 조상들이 오랜 옛날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메노피스(Ame-nophis)라는 가공의 왕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이 왕은 선왕(先王)중의 한 사람인 오르(Or)와[㈜ 제 18대 왕조의 제왕, 아피. 1권. 15(96). 아마도 호루스 (Horus)신과 혼돈하고 있는 것 같다. 헤로도투스, ⅱ. 42는 애굽 에서 더베의 신 제우스(the Theban Zeus, Amun)의 환상을 보 기를 각광했던 헤라클레스에 관한 유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찬가지로 신들을 보기를 무척 바랐다. 또한 그는 그러한 자기 소원을자기와 같은 이름을 가진 파아피스(Paaphis)의[㈜분명 역사적인 인물, 즉 아메노데스(Amenothes혹은 Amenophis)를 지칭함. 그는 하리(Hapi)의 아들로서 아메노피스Ⅲ 세의 장관이었는데 비문을 곁들인 그의 조상(彫像)이 마리에테 (Mariette)에 의해 발견되었다.(Maspero, \’고대사\'(Hist. ancienne.),1987, ⅱ. 299, 448 ; 라이나후가 인용함).] 아들 아메노피스(Amenophis)에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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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권 21-30 아피온(Apion)에 대한 요세푸스의 반박과 유대인의 고대성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21. 유대와 베니게의 기록이 일치함


     이러한 설명들은 우리 유대의 문헌들에 나타난 진실한 역사와 내용이 일치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그의 재위 18년에[㈜ 왕하25:8과 렘52:12에 의하면 19년째에 느부사라단( Nebuzaradan)에 의해 성전에 소실되엇다고 기록되어 있다. 18년째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 도시가 점령되었다(렘52:29).] 우리 유대의 성전을 황폐화시켰으며 이에 우리 성전은 50년 동안이나[㈜ 시드가야 왕의 몰락(주전 587년)으로부터 고레스 왕 원년(주전 538년)의 칙령이 있기까지의 포로생활은 49년간 계속되었다. 렘 25:12의 70년은 (아피. 1권. 19(132)대략의 수치이다.] 버려진 채 남겨졌다. 그러나 고레스 왕의 통치 2년만에[㈜ 참). 스 3:8] 성전의 기초가 놓여졌으며, 다리오(Darius)왕 2년에[㈜ 참).스 4:24. 그러나 이 여대는 방해받던 사업이 재개된 시기를 나타낸다. 이 건물은 4년 이후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스6:15)] 다시 완성되었다.” 저는 이제 베니게인들의 기록들을[㈜ 아마 에베소의 메난데르(Menader)지방으로부터.] 첨가시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갈대아 사람들의 기록만으로는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독자에게 충분히 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니게의 기록에 보면 그들의 몇몇 왕들의 연대기 표를 보게됩니다. “느부갓네살은 그들의 왕 이도발(Ithogal)이[㈜ 이도발(Ithobal) Ⅱ세. 초기 왕의 이름은 아피. 권. 18(123)에 언 급됨.] 통치할때에 13년이나[㈜ 고대. 10권. 11:1(228)(필로스트라투스의 글을 근거로 함).] 두로(Tyre)를 공격하였다. 이도발이 죽자 그의 아들인 바알(Baal)이 10년간 통치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로재판관(Judges)들이 선임되어 다음에 기록하는 사람들이 백성을 다스렸다. 바슬레크(Baslech)의 아들인 에크니발(Eknibal)이 2개월간을, 아브다이우스(Abdaeus)의 아들 켈베스(Che-lbes)가 10개월간을, 대제사장인 아바르(Abbar)가 3개월간을 마틴과 게라스트라투스(Mythyn and Gerastratus)는 아브델리무스(Abdelimus)의 아들이며 6년간 재판관으로서 다스렸다.그 이후로 발라토르(Balator)가 1년간 다스렸으며 그가 죽자 그의 신하들이 바벨론에서 메르발(Merbal)을 모셔다가 왕이 되게하였는데 그는 4년간 통치하였다. 그가 죽은 후 백성들은 그의형제인 히롬(Hirom)을 데려다가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20년간 다스렸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고레스가 바사의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기간을 합산해 보면 총 기간은 54년 하고도 3개월이[㈜ 위에서 언급된 숫자의 총계는 55년 3개월이다.]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재위 7년째[㈜’17 ‘을 잘못 표기했을지 모름.] 되는 해에 두로를 호위하기 시작하였고, 바사 왕 고레스는 히람왕의 재위 14년째 되는 해에 바사 왕국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관해 갈대아와 두로인들의 기록은 우리 유대 민족의 기록과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산출된 증거들은 우리 유대민족의 고대성에 대해 분명하고도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가 됩니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는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22. 헬라의 증거


     그러나 한편 야만인들의 기록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단지 헬라사람들 외에 믿을 수 있는 가치는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의문점들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유대 민족을 알고 있었던 바로 헬라인 당사자들의 증거들을 좀더 제시하고, 또 그들 자신의 문서에서 유대에 관하여 언급해 왔던 헬라역사가들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주전 6세기경의 남부 이탈리야에 살던 크로토나(Crotona)와 우 호관계를 지녔던 유명한 사람] 아주 오랜 옛날 사모스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지혜나 경건심에 있어서 어떠한 철학자들보다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그는 우리 민족의 교리를 아는데 머무르지 않고 오래 전부터[㈜ ejkpleivstou는 고대. 15권. 7:4(233)에서 보면 일시적 의미로서 ‘오래전 ‘의 뜻으로 쓰임. 그러나 Whiston 번역판에 보면 ‘매우 많은 양’으로 되어 있다. 라이나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교리들을 추종하고 경배하는 사람이었음이 명백합니다. 그가 지은 저서가 현존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중에서 헤르미푸스(Hermippus)가[㈜ 주전 3세기경의 스미르나(Smyrna). 그는 철학자들과 또 다른 여 러 사람들의 자서전을 썼다.]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모든 종류의역사에 관해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헤르미푸스가 피타고라스에 관해 기록한 첫 번째 저서에서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피타고라스는 크로토나(Crotona) 태생의칼리폰(Calliphon)이라는 한 제자가 죽게 되자 그가 밤낮으로 칼리폰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나귀가 쓰러져 있는[㈜ 아마도 당나귀에 대한 유대 사이비 종교의 우화에 관하여 언급 하고 있음(민 22:27). 발람선지의 우화에 대한 암시.] 곳으로 지나가지 말라고 그가 분부해 줬다는 사실을 긍정하였다.또한 다시 목마르게[㈜ 문자적으로는’목마름 ‘으로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함. 라틴어 역에는 ‘더러운’으로 표기됨. 라이나흐는 ‘맛없는’으로 해석함.] 하는 물을 마시지 말 것이며 온갖 종류의비난받을[㈜ 참). 출 22:28, 레 19:16.] 일을 삼가라 당부하였음을 긍정하였다.” 그 후에그는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유대인과 트라키아인(Tracians)의 교리를 계속적으로 실천하며 모방하였다.” 실제로 말하면[㈜ 예를 들어 유세비우스, ‘복음에의 준비'(Preap. Evang.) ⅷ. 12, 664에 아리스토불루스가] 피타고라스가 유대의 많은 율법을 가져다가 자기네의 철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민족이 옛부터 여러 도시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사실상 어떤 사람들은 우리 유대의 여러 풍습을 따라 살았으며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도 여겼던 것입니다. 데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라는[㈜ 소요학파 학교의 지도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하생이자 후 계자. 그외 여러민족의 유럽들을 요약한 법률서적은 아리스토텔 레스의 저서 ‘정치학’의 부록으로 고안된 작품인 것 같다. 그 의 유대인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유세비우스, ‘복음에의 준 비’, ⅸ. 2, 404 A에 인용되어 있다.] 사람은 그의 ‘율법'(Laws)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같이 선언하였습니다. “두로인들의 율법은 이질적인 맹세(For-eign oaths)를 백성들로 하여금 금하고 있다.” 그는 몇가지 다른 율법들을 나열하다가 특별히 고르반(Corban)이라고 하는 맹세도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르반 맹세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고 유대인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히브리어에서 ‘하느님께 드린바 되었다'[㈜ 엄격히 말해서 고대. 4권. 4:4(73), 막 7:11에 해석된 대로 ‘선 물’을 뜻한다.’금기된 ‘이란 의미로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이며 서약을 동반한 맹세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 하면 고르반(Corban)은 마 23:16이나 라이트풋(Light foot)의 주 석에 나타난 것처럼 맹세를 뜻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되는 그러한 맹세였습니다.

     사실상 힐리카르나수스의 헤로도투스(Herodotus of Hallica-rnassus)는 유대 나라와 친숙하지는 않았으나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유대에 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콜키아인들(Colchians)에 관한 그의 두 번째 저서에서[㈜ 헤로도투스 ⅱ. 104 ; 요세푸스가 고대. 8권. 19:3(262)에서 나타 난 문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부위를 할례하였던 민족은 콜키아인들과 애굽인들, 그리고 에디오피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베니게인들과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수리아 사람들은[㈜ 만일 헤로도투스가 블레셋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실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시대 때에 할례를 받지 않 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유대인들을 지칭한 것이 이치 상 정당한 것이다.] 할례를 애굽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데르모돈강(Theriver Thermodon)과 파르데니우스(Parthenius)강[㈜ 소아시아의 강듶.] 근처에서 사는 수리아 사람들과 그들의 이웃인 마크론인들(Macro-nes)은[㈜ 본도(Pontus)에 있다.] 말하기를 그들은 이미 콜키아인들로부터 할례를 배웠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인류 가운데서 할례를 행한 유일한 백성들이었으며, 그들은 모두 애굽인들을 모방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애굽인과 에디오피아인 두 나라에 관한 한 나는 이들 중 어느 쪽이 다른 한쪽으로부터 할례를 받아들였는지 말할 수 없다.” 위의 헤로도투스의 말에는 “팔레스틴이 수리아인들이 할례를 행한다”고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할례를 한 팔레스틴의 거주자들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유대에 대하여 말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고대의 시인인 코에릴루스(Choerilus)는[㈜ 사모스에 살고 있던 헤로도투스의 젊은 동년배 친구. 헬라와 바 사 전쟁에 관한 그의 몇몇 서사시 단편이 현존하고 있다.] 바사의 아하수에로(Xerxes)왕이 헬라를 원정할 때를 말하면서 우리 유대민족을 언급합니다. 원정을 지원한 나라들을 열거하면서 그는맨 마지막에다 우리나라 유대의 이름을 삽입하였습니다.

     “이제 언뜻 보기에도 신기한 한 민족을 통과했다. 이상하게도그들은 입으로는 베니게 말을 사용하였으며 넓은 호수 근처의 솔리미아동산 (Solymian hills)에 거주하였으며, 그들은 머리를둥글게 깎았으며 빗지 않아 단정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의 피부는 마치 연기속에서 그을린 말머리 같이 생겼다.”

     여기에서 말하는 솔리미아 동산이란 유대인이 거하는 지역을말하고 또한 넓은 호수도 역청질의(Bituminous) 호수가 수리아의[㈜ 요세푸스는 Solymi와 그의 파생어인Hierosolyma를 각각 유대인 과 예루살렘으로 일치시켜 생각하였다. 그리고 ‘넓은 호수’ (broad lake)를 사해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착상은 매우 훌륭 한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백성은 분명희 동부의 에디오피아 사람들을 말한다. 코에릴루스(Choerilus)는 호머의 ‘오딧세 이’ ⅴ. 283으로부터 ‘솔리미아의 언덕들’이란 말을 인용한다. (이 언덕들의 이름은 바로 ‘에디오피아인들’이란 낱말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이다). 그는 또한 아하수에로의 군대 목록에다 동부 에디오피아의 친구인 헤로도투스에 관하여 서로 서술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헤로도투스70). 이러한 사실은 서부 에디오피아 사람들의 기록인 ‘단지 언어와 머리털에 있어서’과는 다르다. 그들은’곧은 머리카락 ‘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의 머리에다가 말머리 가죽을 뒤집어 썼던’사람들이며 그 말의 귀와 갈기를 달고 다녔다.: 자신들의 표현에 의하면 베니게인들이 원래 홍해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베니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헤로도투스 ⅶ. 89)-이 시인의 표 현으로는 이 ‘넓은호수’란 홍해를 가리킨다. 머리카락을 둥글 게 삭발하는 습관은 인근 아랍지역에서는 성행하였지만 유대인 들 사이에는 분명히 금지되어 있었다(레19:27, 참). 렘9:26)] 어떤 것보다 크고 넓은 호수이기 때문에 코에릴루스가여기서도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하층 계급의 헬라인들은 물론이고 철학적 지식의 진보를 이루어 최대의 존경을 받은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단지 아는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유대인에 관해 깨닫게 되면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제자로서 소요학파 가운데 누구 못지않은 인물인 클레아르쿠스(Cleardhus)는 그의 잠에 관한 저서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록한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세비우스 ‘복음에의 준비'(Preap. Evang.)] “나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유대인과 나눈 대화를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그 유대인이 한 말을 되풀이 하자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네. 그러나 그가 한 말 가운데에는 기사(奇事)와 철학이 들어 있네. 히페로키데스(Hypero-chides)여, 자네가 쉽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 이제 자네가 볼때에는 다소 신기하고 꿈과 같은 일들을 이야기 하겠네.” 그러자 히페로키데스는 겸손히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 ‘저희 모두가 선생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듣기를 갈망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기를”그렇기 때문에 수사학자(Rhetoricians)의 규칙을 따르는좋겠네. 따라서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느 나라의 출신인지를 알아 보도록 하겠네. 그리하여 우리 스승의 가르침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일세.” 이때 히페로키데스는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좋을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이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였다). “이 사람은 유대 태생으로서 코엘레수리아로부터 왔었네. 이 유대인들은 인도의 철학자들로부터[㈜ 클레아르쿠스(Clearchus)는 ‘교육에 관하여’라는 그의 저서에 서 동방박사의 후손인 인도 신비 수도자의 계보를 추적하였다. 또한 우리의 근거가 되는 인물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Diogenes Laeritus)는 ‘몇몇 사람들은 유대인들도 동방박사들 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라고 덧붙인다. 메가스테네스 (Megasthenes)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과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 이 서로 교제했다고 한다(클레멘트. ‘Strom’ ⅰ. 15). 역자는 라이나흐(T. Reinach)의 주석을 인용하였다.] 유래한 자들로서 인도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칼라니(Calani)[㈜ 칼리누스(Calanus)는 알렉산더 대왕을 추종했다가 그의 군대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했던 사람의 이름이다(플루타르크. ‘Alex.’65등).]라고부르고 있는 반면에 수리아인들은 그들을 유대(Judaea)라고 부르고 있네. 그들은 이 이름을 그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이름을 따라 붙였는데 그 나라의 이름은 유대(Judaea)라고 불리우고 있네.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은 예루살렘(Hierualeme)인데 어색하기 짝이 없네. 그런데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자 높은 지역에서 바닷가 가까운 지역으로 내려와 마침내 언어에서뿐 아니라 영혼에 이르기까지 헬라 사람이되어 버렸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아시아에 있을 때[㈜ 주전 약 347-344경 그의 친구 헤르미아스(Hermias)와 함께 무 시아(Mysia)에 있는 아타르네우스(Atarneus)에서.] 그가 찾아온 바로 그곳에서 우리도 함께 있게 되었는데, 그때 그사람은 우리와 다른 철학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철학의재능을 시험해 보곤 했네. 그는 많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살아 왔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그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우리와 주고 받았네.” 이상은 이 사실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설명한 내용을 클레아르쿠스가 전해준 것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유대 사람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놀라운 인내와 절제에 대해서도 특별히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에 관한 이러한 사실들을 더 상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클레아르쿠스의 책만으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기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클레아르쿠스의 저술의 주요 목적은 다른 데 있었으므로 그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본론에서 벗어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자요 활동가인 아브데라의 헤카타이우스(Hecataeus of Abdera)[㈜ 헤카타이우스(주전. 4-3세기)가 유대인들에 관하여 역사를 기록 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그 역사서가 독립본이든 애굽역 사의 일부로 기록된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유대의 묵시문학 들이 그의 저작인가에 대해선 불분명하다. 최근의 비평가들( T.Reinach, J. G. Muller)은 다음에 나오는 발췌문들은 모두 알 렉더와 그 뒤를 이은 4왕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으며 아주 공 정한 것으로 보인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젊은 시절에는 알렉산더 왕과 동시대에 살았으며, 후에는 라구스(Lagus)의아들인 톨레미(Ptolemy)와 동일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역사를 그저 부수적으로 기록하였다기보다 저서 전반에걸쳐 유대인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저는 이제까지 제가 대략적으로 언급했던 몇가지의 사실들을 언급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따라서 저는 먼저 헤카타이우스가 살았던 시대를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저서에는 가사(Gaza) 지방에서 벌어진 톨레미와 데메트리우스(Demetrius)의 전투를 기록하고 있는데 카스토르(Castor)의[㈜ 연대기에 관한 저서의저자. 대략 주전 2세기경의 인물] 역사서에 의하면 이 전투는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지 11년째 되는 해이자 117회 올림피아드대회가 열린 해에 벌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올림피아드에 대해서도 기록하면서 말하기를 “이 올림피아드 대회때 톨레미는 가사에서 폴리오크레테스(Poliocretes)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격파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알렉산더 대왕은 114회 올림피아드 대회때 죽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알렉산더와 톨레미 시대에는 번영했었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헤카타이우스는 같은 의도로 다음과 같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톨레미는 가사 전투가 끝난 이후 수리아의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겸손함과좋은 인간성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따라 애굽으로 갔으며 그의 정사를 도와주려고 하였다.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유대의 대제사장인[㈜ (무관사) ajrciereuv”를 ‘대제사장’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Ezekias’는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당시의 대제사장은 분명 오니아스(Onias)였다(고대. 11권. 8:7(347).] 히스기야(Ezechias)라는 인물이 있었다.(이것은 헤카타이우스가 말한 것이다). 그는 대략 66세 가량의나이를 가진 자로서 그의 백성 중에서 상당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각이 있는 자였으며 연설을 감동적으로 하였으며 어느 누구보다 사건을 처리하는데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말하기를 유대의 제사장들이 땅의 소산의 십일조를 거둬들이고공공업무를 주관하였고 제사자의 총수는 약 1,500명이었다고 한다.” 헤카타이우스는 이 히스기야라는 인물에 관해 두 번째 언급하면서 이처럼 말합니다. “그는 우리와도 친밀했는데 이 높은지위를[㈜ 아피. 1권. 22(188)에 나오는 단어 kairoiv와 아피. 1 권.22(189)에 나오는 단어 ‘이러한 영광’의 정확한 뜻은 분명 치 않다(대제사장직이나 몇몇 특별한 직임이 그에게 톨레미 소테르에 의해 수여되었다).] 획득한 후 그의 친구들을 몇몇 모아놓고 그 사람들에게 [이민]의 유익에 대해서 [알려주는 글]을 읽어 주었다. 히스기야는 유대인의 주거생활과 정치체제에 대하여 애착심을 가지고 글을 기록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설명은 할 수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 헤카타이우스는 다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우리 유대인은 율법을 매우 존중히 여기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느니보다 차라리 참고 고통당하는 것을 원한다. 유대인은 인근 주변 국가들이나 유대를 찾아온 사람들로부터 나쁜 평판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바사(Persia)의 왕이나 총독들로부터 무자비하게도 잦은 침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단념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옷을 벗기우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극도로 처참한 죽음에 이를지라도 그들은어떤 민족보다도 더 용감하게 닥친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조상들이 물려준 종교를 거절하지 않았다.” 헤카타이우스는 또한 유대민족의 율법에 대한 완강한 고집에 관하여 꽤많은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알렉산더가 바벨론에 있을 때였다. 그는 무너져 썩어 버린 벨 신전을 재건하려 하였다. [㈜ 이러한 계획은 Arrian ‘Exped. Alex.’ ⅶ.17과 Strago. ⅹⅥ . 1,5,738에 잘 증명되어 있다. 여가는 이에 관하여 Reinach의 글을 참조하였다.] 이에그의 모든 군사들에게 명하여 흙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직 유대인들만이 그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매를 맞으며 심지어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면서도 끝내 불복하였다. 마침내 왕은 그들을 용서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조용하게 살도록허락해 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마케도냐(Macedoni-an)사람들이 바벨론을 침입하여 [오래된]신전들과 제단들을 다시 세울 때 유대인들은 그 신전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들은 총독에게 많은 벌금을 물기도 했으나 때로는 용서를 받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였습니다.” 이런 점으로 봐서 그들은 칭찬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그는 또한 유대 국민이 수가 많다는것에 관해서도 언급하였습니다. “바사인들은[㈜ 헤카타이우스는 갈대아인을 바사인으로 착각함. 유대의 위조범 은 이러한 혼돈에 대해서 아무런 혐의가 없어야 했다(왜냐하면 여기에서 인용된 저자가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우리 국민들을 수만명씩이나 바벨론으로 이송하였으며, 또한 수리아에서생긴 폭동을 이유로 애굽과 베니게로 수만명을 옮겼다.” 헤카타이우스는 그의 역사 저술에서 유대 국가의 넓이와 그 땅의 비옥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땅은 약3,000,000만 아루래(arourae)이며,[㈜ 아피. 1권. 13(86)의 각주를 보라.] 이 땅들은 주로 아주 양질의 비옥한 흙으로 되어 있고 각종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유대 나라는 결코 좁은 땅이 아니다.” 헤카타이우스는 유대의 예루살렘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기를 매우 빼어난 도시구조를 지닌 매우큰 도시로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기록합니다.또한 그는 이 도시에 사는 많은 군중들에 관하여, 그리고 성전건축에 관하여서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유대나라에는[㈜ 요세푸스가 살던 시대에 갈리리만 해도 204개의 성읍과 마을이 있었다(자서. 45(235).] 여러 지역에 견고한 요새들과 마을들이 있다. 그런데 약 50스다디온(Stade)[㈜ 스다디온은 길이의 단위로서 퍼얼롱보다 약간 길다. 여기에서 50스다디온은 과장이다. 다른 곳에서는 40(유세비우스 ⅸ. 35에 티모카레스, 아리스테아스105), 33(전쟁. 5권. 4:3의 요세푸스), 27(유세비우스’복음에의 준비’36, 242에 수리아의 토지측량가) 스다디온으로 산정해 놓았다.] 정도의 둘레를 지닌 한 강한 도시가 있는데 대략 12,000,000명의 인구가 살고있다. 사람들은 이 도시를 예루살렘(Jerusalem)이라[㈜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 부르고있다. 이 도시의 중앙에는 한 개의 돌벽이 있는데 그 길이는 5플레드론(plethron)[㈜ 플레드론(plethron)은 100헬라 피트(약 98영국 피트 정도).] 정도이며, 넓이는 약 100규빗(cubits)[㈜ 이 또한 분명 과장된 표현이다. 60규빗이 고레스왕에 의해 제정 된 넓이이다(스6:3).] 정도이고 한쌍의 대문이 붙어 있는데 그 안에는 둘 다 금으로 되어있는 제단과 촛대가 있으며 그 안에는 사각형의 제단이 있다. 이제단은 깨지지 않은 흰돌로 만들어졌으며 각변의 길이가 20규빗에 놓이는 10규빗으로 되어 있다. 그 제단 바로 곁에는 큰 건축물이 잇는데 그 안에는 둘 다 금으로 되어 있는 제단과 촛대가있으며 2달란트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이 촛대 위에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은 빛이 밤낮으로 비췄다. 그 건물 안에는 어떤 형상이나 헌물도 놓여지지 않으며 어떤 식물이나 그와 유사한 어떤 것도 심겨있지 않다. 제사장들은 밤이나 낮이나 정결의식(Purification)을 행하며, 성전 안에 있는 동안 포도주를 절대로금했다.”[㈜ 레 10:9, 겔 44:21, 참).아피. 2권. 8(108)] 더욱이 헤카타이우스는 우리 유대인들이 알렉산더왕을 따르는 외국인 지원부대이며 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후계자를 추종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헤카타이우스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그 또한 스스로 그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때 유대인 한 병사의 행동에 관하여 알게 된 사실들을 말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홍해(Red Sea)로 가고 있을 때 모솔라무스(Mosollamus)라는[㈜ 메슐람(Meshullam)의 헬라화된 형(스8;16).]

    이름의 한 사람이 따라왔다. 그는 우리를 호위하는 유대 기병의한 사람인데 대단한 용기와 건장한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헬라인이나 야만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최고의 궁사(弓士)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를 지나가고 있을 때 한 점장이가 새 한 마리로 점을 치고 있다가 그들 행인들을 모두 제자리에 멈춰 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모솔라무스는 그들이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때 점장이는그에게 점괘를 알려 주는 새를 보여 주면서 말하였다. “만일 새가 제자리에 서 있으면 당신들은 모두 제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새가 일어나 앞으로 날아가면 당신들은 앞쪽으로행진해야 합니다. 또한 새가 뒤쪽으로 날아가면 당신들은 다시되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모솔라무스는 대꾸를 하지않고 활을 꺼내 새를 향해 쏘았는데 결국 그 새는 화살에 맞아죽고 말았다. 따라서 점장이와 많은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그를저주했다. 그는 이렇게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불쌍한 친구들, 왜 이렇게 야단입니까?” 그리고는 죽은 새를 집어들고 이어서 말했다. “자기 앞일도 내다보지 못하는 새가 어떻게 우리가행진할 방향 정보를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미래를예견했다면 유대인인 이 모솔라무스가 그에게 활을 쏘아 죽일것이라는 것을 알고 무서워서 이곳으로 날아오지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면 헤카타이우스의 증거에 관해서는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해 더 상세한 것을 알기 원하거든 그의 저서를 구하여 보면 될 것입니다. 비록 아가르다르키데스(Aga-rtharchides)가[㈜ 다수의 역사, 자리에 관한 저서를 지은 저술가인 주전 2세기경의 크니도스(Cnidos). 특히 홍해에 관한 저서를 썼다.] 유대인의 단순성을 비웃는 듯한 표현을 했을지라도 유대인에 관한 언급을 한 이상 그에 관해서 다루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아가르다르키데스는 스트라토니케(Stratonice)가[㈜ 안티오쿠스 Ⅰ세의 딸인 스트라토니케는 마게도냐의 데메트리 우스 Ⅱ세와 결혼하였다. 주전 약 239년 경에 데메트리우스가 재혼을 하려하자 그녀는 조카인 셀류쿠스 Ⅱ세를 지원하려고 도망해 버렸다. Justin. 1에 나오는 설명과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어떻게 남편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버리고 마게도냐(Macedonia)로부터 수리아(Syria)로 왔는지, 그리고 셀류쿠스(Seleucus)왕이 그녀와 결혼해 주지 않자 그가 바벨론(Bal-ylon)지방에서 전투를 시작하고 있을 즈음 그녀가 어떻게 안디옥(Antioch)지방에서 폭동을 일으켰는지, 또한 셀류쿠스왕이돌아와 안디옥을 장악하게 되자 그녀가 어떻게 셀류키아(S디-eucia)로[㈜ 오론테스(Orontes) 어귀에 있는 수리아의 항구인 셀류키아 피에 리아(Seleucia Pieria).] 도망쳤는지, 그리고 즉시 배를 타고 도망할 수 있었는데 배를 타고 도망치지 말라고 하는 꿈을 따르기로 하다가 붙잡혀 결국 죽고 말았는지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아가르다르키데스가 이 이야기를 진술하면서 미신을 따르는 스트라토니케를 비웃는 내용과 함께 그는 우리 유대 민족에 관하여 이와 유사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대. 12권. 1:1(6)에 있는 요약 형태의 글에서 인용함.]”유대인이라고 알려진 백성이 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이라는[㈜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요새화된 튼튼한 성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매 7일마다 하루씩안식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데 아무도 이 날에는 무기나 농사도구도 들지 않고 다른 공적인 봉사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들의 성소에서 손을 들고 저녁때까지 기도를 한다. 따라서 라구스(Lagus)의 아들 톨레미(Ptolemy)가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 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이 사람들은 이 미친 관습을 지키느라 결국 예루살렘을 지키지 못하고 이 못된 군주에게 내맡겨버리고 말았다.[㈜ 날짜 불분명함. 아피안(Appian)은 톨레미 Ⅰ세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에 관하여 언급한다(‘Syr.’ 50).] 또한 그들의 율법에 따라 그들은 어리석은 짓을 자주 행했던 사실이 널리 알려진 바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을제외한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허황된 규칙들을 무시해야 한다는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과 같이 불확실한 이성으로는 무엇을 행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보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 한낱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아가르다르키데스는 기록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편견없이 생각하는사람들에겐 매우 위대한 일로 여겨질 것이며, 많은 찬사를 받을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민족과국가를 보존하기 이전에 율법을 엄수하며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신앙을 끊임없이 앞세우는 그들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23. 히에로니무스나 다른 사람들의 악의적인 침묵


     한편 어떤 역사가들은 유대민족에 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우리에 관해 아는 바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우리를 시기했거나, 혹은 다른 부정직한 이유때문입니다. 저는 몇가지 특수한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알렉산더의)후계자들의 역사 [History of(Alexantder’s) Successors]를 기록했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라는[㈜ 주전 약 360-265년경의 드라키아(Thracia) 케르소나세 (Chersonese)에 살던 카르디아(Cardia)의. 그가 쓴 알렉산더 의 죽음으로부터 피루스(Pyrrhus)의 죽음까지의 분할통치 (Diadochi)의 시기에 관한 역사는 이 시기에 관한 유력한 것 이다. 그가 수리아인을 임명한 사건에 관하여는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사람이 있는데, 그는 헤카타이우스(Hecataeus)와 동시대에 살았으며 안티고누스(Antigonus)와[㈜’애꾸눈 ‘이란 별명이 있었다. 약 주전 381-301년 알렉산더의 장군이었으며 그의 사후에 아시아 지역의 군주였다.] 친구지간이었기 때문에 수리아(Syria)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헤카타이우스가 유대에 관한 전 역사를 기록했던 사실은 잘 알고 있는 반면 히에로니무스는 그가 유대 국경에 가까운 곳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에 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두 사람들의 시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 사람 헤카타이우스는 우리를 신중히 기억해 둘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 히에로니무스는 악의를 품은 나머지 분별력을 상실한 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앞서 말씀드렸던애굽인들과 베니게인들과 갈대아인들, 그리고 많은 헬라의 역사가들의 기록들을 통해서 유대민족이 고대성을 지녔다는 사실에대해서 충분한 증명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드린 여러 기록들 외에도 데오필루스(Theophilus), 데오도투스(Theodotus), 므나세아스(Mnaseas),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헤르모게네스(Hermogenes), 유헤메루스(Euthemerus),코논(Conon), 조피리온(Zopyrion),[㈜ 요세푸스는 이러한 이름들을 간접적인 정보를 통해 알게 되었 던 것 같다. 그러한 정보가 문헌상의 것이든 아니면 로마의 동 료 문필가들의 구두를 통해서 들은 것이든 간접적이었던 것으 로 추측된다. 라이나흐(Reinach)는 이들 모두가 알렉산더 폴리 히스토르(Alexander Polyhistor)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 두사람의 경우엔 이러한 생각이 가능하다. 데오 도투스[만일 시켐(Sichem)과 디나(Dinah)의 이야기에 관한 6보 시(六步詩)의 저자를 의미한다면]는 아마도 사마리아인일 것이 다. 므나세아스(Mnaseas)가 아피. 2권. 9(112)와 고대. 1권. 3:6(94)에 재언급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아마도 알렉산드 리아의 유명한 도서관원이었을 것이다 유헤메루스(Euhemerus) 는 그리스신화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외에도 많은 책들(나는 모든 헬라의 서적들을 낱낱이 밝히지 않았다)을 통해서 우리 유대국가에 대한 분명한 기록들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앞서 말씀드린 많은 저자들은 우리 유대민족의 아주 고대의 사실들에 관해서 많은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성서를 숙독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람들은 제가 언급하고자 하는유대의 고대성에 관해 입증을 해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 팔레레우스(Demetrius Phalereus),[㈜ 주전 345-283년경. 아덴의 연석가. 후에 톨레미 Ⅰ세의 치하에 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원이 됨. 이 모세오경의 헬라어본을 만드는데 역할을 담당했던 가짜 아리스테아스 (Pseudo-Aristeas)와 요세푸스에 의해 신임받음(고대. 2권. 46). 그러나 본문에서 그는 유대 역사가인 다른 데메트리우스와 혼 돈하는 것 같다.] 장로인 필로(Philo), 그리고 유폴레무스(,Eupolemus)와[㈜ 주전 2세기 경의 성경 주제들에 대한 유대 저술가들. 장로 필로 (Philo)는 서사시인, 유폴레무스(Eupolemus)는 역사가.] 같은 사람들은유대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다지 커다란 과오를 범하지는않았습니다. 유대의 성경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작은 실수들은 용서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4. 유대에 대한 비방


     제가 처음에 이 저서에서[㈜ 아피. 1권. 1(4)이하] 말씀드리려고 의도했던 것 중에말씀드리지 못한 한가지 특별한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향해 퍼부었던 주장과 비난들이 새빨간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이 스스로 제시한 증거를 역이용해서 그들의 억측을 공격하려는 것입니다.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백성들에 대해 악의를 품은 탓에이러한 자기 모순에 빠지는 법이라고 저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역사를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모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민족들의 품위를어떻게든지 격하시키려 애를 쓰면서 그 나라의 정치체제를 비난하려 합니다. 예를 들면 데오품푸스(Thepompus)는[㈜주전 378-300년경의 키오스(Chios) 출신. 이소크라테스 (Isocrates)의 문하생이자 예리한 역사가.] 아덴(Athene)시를 맹렬히 비난 하였으며,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아데나이우스(Athenaeus)가 그의 저서 ‘라코니카'(Laconica) ⅳ.139에 언급되어 있다. 주후 4세기에 아덴의 궤변가로 알려진 사실은 불분명한 것이다.] 라케다이몬(Lacedaemon)을 비난하였으며, ‘삼두정치'(Tripoliticus)를[㈜ ‘세 나라의 책’혹은’ 세 수장(首長)의 책'(trikavrano”)으로 불리움. 작은 팜플렛 형식의 책으로서 아덴, 스파르타, 더베 등 의 나라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의 적인 람프사쿠스(Lampsacus) 의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에 의해 데오폼푸스의 명의로 출 간되다. 그는 데오폼푸스(Theopomus)의 문체를 교묘하게 모방 하여 그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파우사니우스 ⅵ. 18.3).] 쓴 저자(그는 몇몇 사람들이 추정하는 것처럼 데오폼푸스가 아님)는 더베(Thebes)시를 비난했던 경우를 들 수가 있습니다. 티마이우스(Timaeus)도[㈜ ‘까다로운 사람'(!Epitivmaio” )이라는 별멍을 지니고 있다. 참).

     각주 11. ] 앞에 열거한 백성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을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악한 비평들은 주로 그들이 최고의 평판을 지닌 백성들과경쟁관계를 지닐 때 사용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시기심과 악 감정으로 이런 행동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이러한악평을 함으로써 그들의 명성이 높아질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어리석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묵인이 될지 몰라도 건전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라면그들이 지닌 엄청난 죄악성을 정죄하게 됩니다.


     25. 이런 비난은 사악한 애굽인들이 지어낸 것임


     그런데 우리 유대 민족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사람들은 애굽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지 몇몇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진리를 왜곡한 역사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다른 나라에서 애굽으로 왔다는 사실도 있는 그대로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출애굽을 한 과정에 관해서는 정확한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실제로 애굽인들이 유대 민족을시기하고 증오하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애굽을 통치했었기 때문이며,[㈜ 즉, 야곱의 12아들 중 하나인 요셉의 시대. 요세푸스는 분명히 힉소스(Hycsos)를 유대인의 조상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후 우리 민족은 출애굽하여 자기네 땅으로다시 되돌아 가서 그곳에서 번영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종교적으로 유대의 종교와 애굽의 종교가[㈜ 혹은 ‘민족들.’]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애굽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적대 감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이것은 유대의 거룩한 예배의 방식이 애굽의 율법에 따르는 방식보다 낫기 때문이며 유대의 신의 관념 또한 짐승을 섬기는 것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 지역마다 특징이 다르기는 하지만 동물신을[㈜ 참). 예를 들어 쥬베널(Juvenal), ‘Sat.’ⅹⅴ.과 아피. 2권. 6(65)] 섬기는 것은 매 한가지요 처음부터 신에관해 그토록 저급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 자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유대인이 지니고 있는 고상한 형식의 제사 형태를 본받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사람들이 유대의 제

    도가 우월하다고 인정합니다. 그 때문에 애굽인들은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극도로 흥분한나머지 분별력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부 애굽인들은 애굽의 고대 기록과 심지어 자신들의 기록까지도 서슴없이반박할 만큼 어리석음과 광기의 극치에 도달해 버리고 말았던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욕심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상실하고만 것입니다.


     26. 마네토의 비방


     이제 저는 화제를 바꿔 이전에 제가 유대의 고대성에 대한 증인으로서 약간 다룬 바 있는[㈜ 아피. 1권. 14(73)] 애굽의 중요한 역사가들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마네토(Manetho)입니다. 그는 애굽의 거룩한 책들로부터 애굽의 역사(The Egyphian his-tory)를 번역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제하였습니다. 즉 “유대 민족은 수만명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들어왔으며그곳의 거주민들을 정복하였다.” 계속해서 서술합니다. “유대는후에 그 나라에서 나와 유대라 불리우는 나라에 정착하였으며그곳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건설하였다.” 이제까지의 말은 그가 고대의 문헌들을 인용한 것이지만 이제부터는 외국에 퍼져있는 유대에 관한 소문이나 낭설들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그리하여 마네토는 문둥병과 기타 질병에[㈜ 참)’애굽의 종양’<아마도 상피병(上皮炳)>, 신 28:27] 걸린 애굽인들이정죄되어 버림받고 유대인들과 함께 있다가 애굽을 떠났다는 터무니없는 사실을 끌어 들였습니다. 마네토는 이같은 거짓말을정당화하기 위해 아메노피스(Amenohis)라는 가공의[㈜ 문자적으로는 ‘첨가함.’] 왕을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왕은 가공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언급한 다른 왕들처럼 정확한 통치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음을 살펴볼수가 있습니다. 마네토는 이같이 가공의 왕을 설정한 후에 목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사건을 언급한 적이 언제 있었느냐는식으로 이 왕을 중심으로 거짓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비평은 불합리하다. 마네토는 애굽으로부터 2번의 추방을 명백히 구분한다. ①예루살렘을 창건했던 힉소스의 추방 사건. 아피. 1권. 13(85-90). ②나병환자 등이 오사르시프(=모세) 의 주도하에 추방한 사건. 오사르시프는 힉소스의 후예들과 함 께 돌아와 전국을 석권하였다, 아피. 1권. 26(232-250). 두 번째 의 추방사건을 주도한 아메노피스(Amenophis)의 신원은 불분 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요세푸스가 그를 ‘가상의 인물’로 칭하 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마네토는 이미 이전에도 아메노피스라 는 이름의 왕을 세 명이나 언급하였다, 아피. 1권. 15(95-97). 요세푸스는 그의 비평에도 불구하고518년간(=393+59+66)이라는 시간적 격차를 계산함으로써 그가 보다 후대의 아메노피느 Ⅳ 세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요세푸스의 계산법은 마네토 방법과도 같은 것 이다. 그러나 라이나흐는 마네토가 그를 아메노피스 Ⅲ세로 동 일시 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아피. 1권. 15(97)] 목자들이 애굽을 떠난 것은 이미 518년전의 테드모시스(Tethmosis)[㈜ 아피. 1권. 15(94) : = Thoummosis, 아피. 1권. 14(88).]왕 때의 일인데도 그것을 잊어 버린양 엉뚱한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마네토도 테드모시스왕 때 유대인들이떠났고 테드모시스를 이어 세도스(Sethos)와 헤르마이우스(Hermaeus),[㈜ 하르마이스(Harmais)라고 불리움. 아피. 1권. 15(98).] 두 형제 때까지 중간 왕들의 통치 기간이 393년이라고[㈜ 참). 차피. 1권. 16(103)] 고백은 하고 있습니다. 세도스는 애굽(Egyptus)이라고 부르며 헤르마이우스(Hermaeus)는 다나우스(Danau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네토는 또한 세도스(Sethos)가 헤르마이우스를 애굽에서 추방시키고 59년간 애굽을 다스렸으며, 그가죽자 장남인 람프세스(Rhampeses)가 66년간 왕위에 올랐음을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네토는 우리 유대의 조상들이 오랜 옛날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메노피스(Ame-nophis)라는 가공의 왕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이 왕은 선왕(先王)중의 한 사람인 오르(Or)와[㈜ 제 18대 왕조의 제왕, 아피. 1권. 15(96). 아마도 호루스 (Horus)신과 혼돈하고 있는 것 같다. 헤로도투스, ⅱ. 42는 애굽 에서 더베의 신 제우스(the Theban Zeus, Amun)의 환상을 보 기를 각광했던 헤라클레스에 관한 유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찬가지로 신들을 보기를 무척 바랐다. 또한 그는 그러한 자기 소원을자기와 같은 이름을 가진 파아피스(Paaphis)의[㈜분명 역사적인 인물, 즉 아메노데스(Amenothes혹은 Amenophis)를 지칭함. 그는 하리(Hapi)의 아들로서 아메노피스Ⅲ 세의 장관이었는데 비문을 곁들인 그의 조상(彫像)이 마리에테 (Mariette)에 의해 발견되었다.(Maspero, ‘고대사'(Hist. ancienne.),1987, ⅱ. 299, 448 ; 라이나후가 인용함).] 아들 아메노피스(Amenophis)에게 말하였다. 파아피스는 지혜가 뛰어나고미래의 일들을 알아 맞추는데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자로 알려있었다.” 마네토는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이 아메노피스는 동명이인인 아메노피스왕과의 전투에서 문둥병자와그밖의 다른 불결한 사람들을 완전히 없애면 그가 신들을 볼 수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아메노피스왕은 그의 충고를 기꺼이받아들여서 몸에 흠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애굽으로부터 추방시켜 버렸다. 그렇게 추방된 사람은 80,000명에 이르렀다. 그는 이사람들을 나일강의 동쪽에 있는 채석장으로[㈜ 참). 헤로도투스, ⅱ.8.] 내보냈다. 그리하여 그들끼리만 어울려 일하도록 함으로써 나머지 애굽 사람들과 격리시켜 놓았다.” 계속해서 마네토는 말합니다. “나병에 감염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박식한 제사장들도 있었다. 따라서 현인이자 선지자인 이 아메노피스는 제사장들이 행여 폭력을 당하게 될 경우 신들이 자신과 왕에게 진노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는 또한(그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어떤 사람들이 이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올 것이며 애굽을 정복할 것이며,결국은 13년 동안 그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들에 관해 왕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이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 글을 남겨두고 자살해 버렸다. 이 일로 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네토는 계속합니다(저는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채석장으로 내보내졌던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계속적으로 비참한 일을 했다. 그후 그들은 왕에게 목자들에의해 황폐화되어 버린 도시인 아우아리스(Auaris)를 그들의 거주지와 보호구역으로 할당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왕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이 고대 도시인 탐욕 시는 고대 신학(The Ancient Theology)에 따르면 티폰(Typhon)에게[㈜ 참). 아피. 1권. 14(78, 86)] 봉헌되었던 도시였다. 그러나 한편 그들이 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게되자 이곳은 반동의 거점이 되었고, 그들은 스스로 오사르시프(Osarsiph)라는[㈜ 설사 오사르시프가 중요한 구실을 감당하였고 또한 모세와 동 일한 인물을 확인되었다 하더라도<아피. 1권. 26(250)>, 라이나 흐가 말한 대로, 오사르시프란 이름은 ‘요셉’이라는 단어의 변 형으로 보이며, 애굽의 이름인 오시리스(Osiris)가 첫음절에 대 체되어진 것은 요셉이라는 이름이 히브리어 ‘야'(JAH, 하나 님)에서 파생된 것으로 오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가진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제사장을 지도자로 뽑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에게 순종할 것임을 맹세하였다. 따라서 그는 먼저 그들을 통제하는 법을 제정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애굽의 신들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과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 것과 애굽인들이 가장 존귀히 여기는 동물들을 회피하지 말고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파멸시켜야 한다는내용이었다. 또한 그들은 다만 동맹권 안의 사람들하고 연합해야 한다는 법도 정하였다. 그는 위의 법 외에도 애굽의 관습에주로 반대되는 법들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명령하기를 아메노피스왕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부지런히 성읍 주변에 벽을 쌓으라고 하였다. 한편 자신은 문둥병에 걸린 제사장들과 우호관계를 맺는데 전념하였다. 그리고는 테드모시스(Tethmsis)에의해 그 땅에서 예루살렘(Jerusalem)이라고 하는 곳으로 추방된 목자들에게 사절을 파견하였다. 오사르시프는 이곳에서 아메노피스에게 부당하게 학대받아 온 자기들의 형편과 처지를 알렸으며 애굽과의 전쟁에 자기를 지원하는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또한 먼저 목자들이 옛 성읍과 고향인 아우아리스(Auaris)로 되돌아 오도록 호위해 줄 것이며 그들에게 풍부한 지원을 해 줄 것임을 약속하였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목자들을 도와서 지원해 줄 것임을 약속하였다. 목자들은 오사르시프(Osarsiph)의 메시지를 듣고 몹시 기뻐했고 아메노피스 군대를 쉽게 정복하여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따라서 20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몰려들었다.순식간에 그들은 아우아리스로 몰려왔다. 한편 애굽의 왕인 아메노피스는 그들이 침략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파아피스(Paapis)의 아들인 아메노피스가 전에 그에게 예언했던 말들을상기하였다. 그리고는 첫 번째로 애굽의 군중들을 소집하여 놓고그들의 지도자들과 상담하였다. 또한 특히 제사장들을 보내어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동물들을 데려다가 가능한 한 안전하게숨기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주로 성전에서 그 동물들에게경배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의 성상들에 가장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명하였다. 아메노피스는 또한 아직 5살밖에 안된 아들을 친구에게[㈜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후에 이름이 붙여진 에디오피아의 왕] 보냈었는데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람프세스(Rhampeses)[㈜ 여기에 나오는 족보는 라이나흐의 견해, 즉 이 이야기에 등장하 는 아메노피스왕은 곧 아메노피스 Ⅲ세<아피. 1권. 15(97)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요세푸스는 이 왕은 가상의 인물이라고 한다<아피. 1권. 26(230)] 이름을 따서 지은 라메세스(Ramesses)라고도 했으며 세도스(Sethos)라고도 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가장 용감한 300,000명의 애굽 사람들만 골라 적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나일강을 건너가 대진하였다. 그러나 아메노피스는 목자들과의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신들에게 대항하는싸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그는 멤피스로 돌아와 그 곳을 보수하였다. 그곳에서 아메노피스는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했던 신성한 동물들과 아피스(Apis)를 만나자 곧 애굽의 많은 무리와 전 군대를 동원하여 에디오피아로 행군을 강행하였다. 에디오피아는 아메노피스왕에게 종속된 나라였기 때문에 에디오피아 왕은 그를 영접하였다. 또한 아메노피스왕과 함께 한 모든

     무리를 돌보는가 하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양식을 공급해 주었다. 에디오피아 왕은 이 운명적으로 결정된 13년의 기간동안처음부터 이 애굽인 망명자들을 위해 성읍과 마을들을 할당해주었다. 더우기[㈜ 혹은 ‘특히.’] 에디오피아 왕은 애굽의 국경 지역에다가 아메노피스왕의 경호를 위하여 에디오피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를설치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에디오피아에 피신한 왕의 상황이었다. 한편 솔리마 백성들(Solymites)[㈜ 솔리미테스(Solymites)는 히에로 솔리마의 거주민들을 말한다.

     <아피. 1권. 26(241)>. 참).아피. 1권. 22(173)이하의 각주.]이 내려와[㈜ 혹은 ‘뒤로’.] 불결한 애굽인들과 합세한 후에 애굽인들을 어찌나 처참한 방식으로 학대하였는지 애굽을 원수시하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오히려 목자들의 통치가 황금기[㈜ 문자적으로 ‘황금’.]처럼 보였다. 그들은 온 성과 마을을 불질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신전을 약탈하고 많은 신상(神像)들을 파괴시켰으며,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많은 성역들을 존경하던 제사에 사용되어지던 동물들을 불태워 죽이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 동물들을 목잘라 죽이도록 하였으며 마침내 그들의 모든 옷을 벌거벗긴 채 국외로 추방해 버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루살렘 주민들의 정치 체제와 법을 제정한 제사장은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태생으로로서 그의 이름은 헬리오폴리스의 신인 오시리스(Osiris)의 이름을 딴 오사르시프(Osarsiph)라고[㈜ 참). 아피. 1권. 26(238).] 알려진다. 그러나 이사람이 유대 백성에게로 넘어간 후 그의 이름은 바뀌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곧 모세(Moses)라 했다고 한다.”


    27. [마네토의 비방에 나타난 사실]


     이외에도 애굽인들이 유대인에 관해 언급한 사실이 더 있으나 간결성을 꾀하기 위해서 생략하겠습니다. 하지만 마네토가 한말을 계속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후에 아메노피스왕은 그의대군을 이끌고 에디오피아에서 돌아왔다. 또한 그 아들인 람프세스(Rhampses)도 또 다른 군대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리하여이 양 부자는 목자들과 불결한 백성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 합세하여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많은 사상자를 낸 후에 그들을 수리아의 변방까지 쫓아버렸다.” 이상의 사실들은 마네토가 기록한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네토가 얼마나 이 사실에 관해 소홀히 다루고 있으며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을 하고있는가에 관해서 이제 증명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상 마네토 역시 목자들이애굽인이 아니며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와서 애굽을 통치했으며다시 출애굽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에별을 가진 애굽 사람들이 우리와 섞여 살지 않았으며 자기 백성들을 인도했던 모세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몇 세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사실들을 마네토 자신의 기록들을 토대로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28. 마네토의 모순에 대한 비판


     우선 마네토는 처음부터 얼토당토 않는 말을 꾸며대고 있습니다. 마네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아메노피스왕은 신들을 보기를 갈망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보기를 원하는신이란 어떤 신일까요? 만일 이 신들이 한낱 소나 염소나 악어,혹은 개코원숭이(baboons)와 같이 그들의 율법이 경배하도록 제정한 그런 동물신이라면 그는 이미 신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이 하늘의 신들이라면 어떻게 그 신들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떤 동기로 신들을 보기 원했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문자적으로는 ‘제우스신에 의해(그렇다)’. 이 평범한 헬라 문 구는 유대인의 저서에서는 다소 이상하게 들리며(회복된 본문에 따라) 아피. 2권. 37(263)에 다시 사용된다.] 한 선왕이[㈜ 혹은<아피. 1권. 26(232).] 그들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이 아메노피스왕은 그 신들이 어떤 종류의 신이며 어떤식으로 했더니 그 신들을 볼 수 있었는가에 대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원문에 a[n을 삽입하여 ‘그러므로 배웠어야 했을 것입 니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신들을 보기 위한 궁리로서 한 현명한 선지자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현명한 선지자였다면 왜 그 왕이 신을 보고자 하는 갈망이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사실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몸이 병신이거나 나병환자라고 해서 신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가정이어디 있겠습니까? 신은 결코 신체의 결함을 노여워하기보다는 사악한 생활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더구나 80,000명이나 되는 문둥병자나 불결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루에[㈜ 아피. 1권. 26(234)에는 이 말이 언급되어] 불러 모을 수가있겠습니까? 왕이 그 선지자의 충고를 어찌 태만하게 여겼겠습니까? 몸에 흠을 가진 사람들은 애굽 밖으로 추방하라는 명령이었다면 어찌 그들을 내어쫓지 않고 채석장으로 보냈겠습니까? 애굽을 정화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노동인력이 부족했던 때문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조치에 왕이 동의한 이유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마네토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선지자는 신들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리고장차 애굽에 임하게 될 사건들을 예견하고서 자살해 버렸다. 또한 이 선지자는 애초부터 왜 자기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지 못했을까요? 왜 그는 그 왕이 신들을 보고 싶어하는 그 욕망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즉시 반박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그의 생애에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의 불행을 그토록 두려워한 이유는또 무엇입니까? 아니면 그토록 서둘러 자살할 만한 어떤 악조건이 그에게 있었을까요?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바보스런 사실을 고찰해 봅시다.왕은 이러한 사실들에 관해 들었고 장차 벌어질 사실들로 인해두려워했으면서도 이 불구자들을 애굽 밖으로 결코 내쫓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네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왕은 그때 그들의 요청에 따라 전에 목자들이 살던 성읍에 그들을 거주케 하였다. 이 도시의 이름은 아우아리스(Auaris)라고 불리운다. 그후 그들이 이 도시에 들어가 살면서 한때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을 지냈던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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