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1. 반 유대적 비난에 대한 논박
에바르로디도 각하여! 저는 이 책의 첫권에서 베니게인들(Phoenicians)과 갈대아인들 (Chaldaeans), 그리고 애굽인들(Egyptians)의 기록들을 인용하여 저희 민족의 고대성에 대해말씀드렸던 내용들이 진실한 것들임을 확신합니다. 더욱이 저는 증인으로서 많은 헬라의 역사가들을 인용하였습니다. 또한 저는마네토와 카이레몬,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제부터 우리에 관해 악평을 한 그외의 저자들을 논박할까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문법학자인 아피온 (Apion)을[㈜ 아피온은 북부 애굽지방에서 태어나(아피.2권. 3(29)알렉산드리아 에서 공부했으며, 디베랴, 칼리굴라, 글라우디오 등의 황제 치하시 로마에서 수사학을 배웠다. 특히 칼리굴라 시대 때 알렉산드리아 의 유대인 대변인인 필로(Philo)와 맞서서 논쟁을 벌일 때 반유대 대표의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 황제에게로 파견되기도 했다(고대. 18권. 8:1(257)이하 ). 박학다식하면서도 지나치게 과시 하는 경향이 있는 저술가이며 호머(Homer)의 해설자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대. 2권. 2:3(14). 그는 또한 5권으로 된 애굽의 역 사서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유대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 유대의 역사가 그의 저서 가운데에서 독립본으로 분리되어 있 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연구열로 인하여 \’노동( )\’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그의 과시적인 성격 때문에 디베로 황제로부터\’세계의 심벌\'(cymbalum mundi)이라는 별명을 얻 게 되기도 하였다.] 힘들여 가면서까지 반박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할지 약간의 의심이 생기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쓴 몇몇 사람들을 보면 앞서 말씀드린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비난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이거나 어떤 것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무가치한[㈜ 혹은 \’무뚝뚝한\’.]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가 말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주 질이 낮은 내용이며, 더욱이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가 유식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매우 부도덕하며 평생을 돌팔이로 살아온 사람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심도있게 쓰여진 책의 내용보다는 그런 무가치한 책을 좋아하며, 남을 비난하는데 낙을 삼으며 남이 칭찬 받으면 배가 아파오기 때문에 저는 마치 공개법정에서 우리의 대답을 강요하듯이 우리를 비난해온 이 아피온(Apion)이라는 사람을 주의깊게 조사해 볼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저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먼저 비난했다가 도리어 자기가 저지른 그런 죄악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는 사람을 보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한다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아피온이 기록하고 있는 사실들을 요약하거나 그의 의도를 쉽게 이해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첫번째로 우리가 앞서 살펴본 유사한 여러 사실들과 특히 우리 조상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 그는 사고에 있어서 큰 혼돈과 무질서에 빠진 것 같습니다. 또한 두 번째로, 그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거룩한 결례들에 대한 비난과 성전에서 사용된 다른 법적 의식들에 대한 비난을 온통 뒤섞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출애굽에 대하여
우리 유대 조상들이 원래 애굽인들이 아니었으며, 또는 신체적 질병이나 기타 다른 재앙 때문에 애굽에서 추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저는 이미 필요이상으로 충분히 설명했다고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한 아피온이 자세히 설명한 것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애굽의 역사\’라는 그의 저서 제 3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대의 애굽 사람들에게서[㈜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아마도 아피온은(공적인 의미에 서의) \’장로들\’을 뜻하는 것 같다.] 모세에 대하여 들어왔다. 그는 헬리오폴리스 태생으로서[㈜ 아피. 1권. 26(238)에 보면 마네토도 \’오사르시프\'(Osarsiph)태생으 로 되어 있다.] 스스로 조상들의 관습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마음먹었다. 모세는 도시의 경계지역 여러 곳에[㈜ 혹은 \’여러 벽면 위에.] 모두 동쪽으로 향하게기도하는 집을 세웠다. 그것은 헬리오폴리스에서도 동쪽으로 향하게 했던 것과 같다. 또한 첨탑(obelisk)[㈜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오벨리스크에 관하여는 헤로도투스 ⅱ. 111을 참조하라.] 대신에 모세는 기둥들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배와 같이 생긴 것을[㈜ 혹은 \’물그릇\'(skavfh)는 전문 용어로 해시계의 움푹패인 그릇을 가리킨다.] 놓아 두었다. 그 기둥에서[㈜ 수정된 본문 ; 주춧돌 위에 올라 서 있는 인물상. 이 사본에는 \’사람 의 그림자\’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그릇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마치 태양이 한바퀴 도는 것과 같이 그림자가 원을 그리게 만들어 놓았다\” 이상이 바로 이 위대한 문법학자인 아피온이 우리에게 전하여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허구성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에 의해 증명될 것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을위한 첫번째 성막을 지었을 때 그는 성막에다 그와 같은 표시를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후계자더러 그와 같은 형상을새겨 넣으라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먼훗날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그는 아피온이 그의 저서에서 꾸며낸 내용과 같은 이상스런 장식물들을 모두 피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모세가 헬리오폴리스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대 애굽인들로부터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분명 아피온 자신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모세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나이먹은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다가 자기에게 이야기해준 사람들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Athen. ⅰ. 29(p. 161)에서 라이나흐는 적절히 이를 비교하고 있다 : 알렉산드리아인인 아피온은(페니로프에게) 청혼한 남자가 보여준 \’끌 기경기\’의 본질에 대하여 이다카(Ithaca)의 크테손(Cteson)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한다.] 아피온은 문법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호머(Homer)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조차 자신있게 언급하지 못합니다.[㈜ 오래된 대구를 참조하라 :\”Smyrna, Rhodes, Colophon, Salamis, Chios, Argos, Athenae, Orbis de patria certat, Homere, tua. \”그 대, 호머여! 그대는 조국의 땅 – 스미르나, 로데스, 콜로폰, 살라미 스, 키오스, 아르고스, 아덴 -을 위하여 싸우라!).] 뿐만 아니라 그는 상대적으로 불과 얼마 이전 사람인 피타고라스의[㈜ 때에 따라 사모스인, 에트루리아인, 수리아인, 혹은 두로인으로 매우 다양하게 기술되어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Strom\’. ⅰ. 4, 62, 라이나흐가 인용함).] 출생지가 어디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피온은 이들보다도 훨씬 더많은 연수를 앞서서 살았던 모세의 나이를 쉽사리 결정지어 버립니다. 그는 단지 고대 사람들의 관계만으로 그의 나이를 결정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볼 때 아피온이얼마나 지독한 거짓말쟁이인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가 문둥이, 절름발이, 소경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한 시기를 연대기적으로 결정함에 있어서 얼마나 아피온의생각이 앞서서 언급했던 저자들의 생각과 일치되는가를 봅시다.마네토는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한 시기가 테드모시스왕(Tet-hmosis)이 지배하던 때로서 다나우스(Danaus)가 아르고스(Argos)로[㈜ 아피. 1권. 16(103).] 도망을 치기 393년 이전의 일이라고 이야기하고있습니다. 한편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출애굽의 시기가보코리스(Bocchoris)[㈜ 아피. 1권. 59(305).]왕이 지배하던 때로써 1,700여 년 전의 일이라고 말을 합니다. 몰론(Molon)과[㈜ 아폴로니우스 몰로는 카리아(Caria)태생이며 로데스(Rhodes)와 로마 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의 문하생으로는 키케로(Cicero)나 율리 우스 가이사(Julius Caesar)와 같은 인물이 있음. 그가 유대인들을 맹렬히 비난한 내용이 이책에 이따금씩 나온다.] 그외 몇 명의 사람들은자기들이 좋게 여기는 대로 그 시기를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아피온은 마치 자기의 주장이 앞서 말한 사람들의 주장보다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제7회 올림피아드가 열리던 첫해에 출애굽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같은해에 카르타고(Cathage)가 베니게인들(Phoenicians)에 의해건설되었다고[㈜ 또한 로마의 건국일이기도 함.] 덧붙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카르타고의건축에 관하여 덧붙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연대기적 특징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으로 아피온 자신은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피온은 이러한 특징이 오히려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니게인들이 남긴 기록을 신뢰한다면, 그들의왕인 히람(Hirom)은 카르타고 건설보다도 150년 이상이나 이전에 살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피. 1권. 18(126).] 저자는이미 앞에서 베니게의 기록들을 통해서 히람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히람왕은 성전을 건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피. 1권. 17(109).] 한편 솔로몬은유대인들이 출애굽한 지 612년째 되는 해에 성전건축을 한 것도살펴보았습니다.[㈜ 고대. 20권. 10:1(230)에서의 요세푸스의 설명과 동일함. 다른 부분< 고대. 8권. 3:1(61)에서는 그 시기를 592년으로 기록함>성경의 기록 (왕상 6:1)은 480년이다.] 또한 애굽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추정 숫자도 아피온은 리시마쿠스의 주장과 동일하게 110,000명이라고[㈜ 아피. 1권. 7(34)위에 언급된 리시마쿠스의 발췌문에는 아무런 숫자 표기가 없다.] 주장했습니다. 그다음에 아피온은 안식일의 명칭이 생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놀랍고도 그럴듯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6일 동안의 여정이 끝나자 그들의 사타구니(groin)에 임파선종양(Tumours)이 생겼다. 그들은 지금유대라고 하는 땅에 완전히 도달하게 된 제 7일째 모두 쉬게 되었다. 그 당시 그들은 애굽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따라서 그 7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sabbaton)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타구니에 생긴 질병\’이라는 말을 애굽어로는 삽보(sabbo)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자의 허튼 소리를 듣고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기록하는 것을 알면 그를 증오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11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임파선종양에 걸렸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만일 아피온의 주장대로 그들이 눈이 멀었거나 절룩발이거나 그들의 신체에 질병을 가진 자들이었다면그들은 단 하루도 광야에서의 여행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넓은 광야를 행군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또한 더욱이 그들과 마주치는 적들과 전투를 하며 그들을 정복할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 중에 아무도 6일이 지난 후에도 사타구니에 임파선종양을 가지지 않았었음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강행군하는 사람들은 보통으로는 이런 질병에 잘 걸리지 않기때문입니다. 수만명의 군인이 정상적인 속도로 계속하여 여러날을 행군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그러한 질병이 우연히 발생한다는 것은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도무지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잘난 작가인 아피온은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6일이 걸려 유대땅에 도착하였다\”[㈜ 비록 아피온의 말을 그들이 이처럼 해석할지라도<아피. 2권. 2(21)> 아피온 자신은 위에 나온 발췌문에서 이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말합니다. \”모세는 애굽과 아라비아 사이에 있는 시내(Sinai)라고 하는 산에 올라갔다.거기서 그는 40일 동안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가 그 산에서 내려온 후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렇다면 유대민족이 물도없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말인데, 그들이 온 광야를 가로질러 유대까지 단 6일만에 도달하였다 함은 무슨 말입니까? 또한 소위 문법학자라고 하는 아피온이 안식일(sabbath)이라는 단어를 곡해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이며 무식한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보(sabbo)라는 단어와 사바트(sabbath)라는 단어는 서로 크게 다른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말로 사바트(sabbath)라는 단어는 모든 일로부터 \’쉰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러나그가 주장한 대로 사보(sabbo)라는 단어는 애굽어로서 \’사타구니에 생긴 임파선종양\’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3. 유대 민족의 애굽 기원설에 대하여
이상이 애굽사람인 아피온이 모세의 이야기나 유대 민족의 출애굽에 관해 우리에게 보여준 기록들인데 이것은 다른 작가들보다 한술 더 뜬 소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피온은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 원주민들이었다고 거짓 주장을 한다고 해서 결코 놀랄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애굽의 오아시스[㈜ 애굽 북부, 더베(Thebes) 서부 지역에 있는 대 오아시스(The Great Oasis).참). 아피. 2권. 4(41).26] 출신이면서도 자기 출신지를속이고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기 종족이 불명예스럽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피온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애굽인이라고 비난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그가 애굽인이라는 이름을 치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그는 굳이 자기 조국에 등을 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애국자들은 자기들의 국적을 항상 떳떳이 드러내게 됩니다. 또한 자기의 조국을 부당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애굽이 관련이 있다는 애굽인들의 주장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즉 애굽인들이 우리 유대 민족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불명예에 같이 끌어 들이려는 심보 때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잘난 아피온이란 친구의 우리 민족에 대한 모욕적인 주장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이 그에게 시민권을 준데 대한보답으로서 꾸며낸 이야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아피온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대인이 애굽 출신이라고 함으로써 애굽인들까지도 수치를 당하는 입장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어쨋든 어느모로 보나 아피온은 새빨간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4.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 한 아피온의 비난
이재부터는 아피온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죄악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심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수리아로부터 왔으며 항구가 없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그 지역은 파도가 부딪히는 해변 바로 곁이었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피온이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처소를 비난하려 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출생지가 아닌 자칭 조국 알렉산드리아를 비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다와 근접한 그 도시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자치 지역은 알렉산드리아의 북동부로서 왕궁이 위치해 있던 로키아스(Lochias)곶 부근의 대 항구(Geat Harbour)로 부 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Strabo. ⅹⅶ. 9. 794 ; 아피. 2권 4(36)이 하를 참조하라). 공동묘지(necropolis)는 이 도시의 반대편, 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편으로 만일 유대인들이 그 지역을 무력으로 차지하고 지금까지를 별문제없이 그곳을 잘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그들이 용감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땅을거주지로 할애해 준 사람은 다름아닌 알렉산더대왕이었으며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마게도냐사람들과 똑같은 특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다른 글들을 읽어 보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독립자치지역에서 살면서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더의 덕분이기보다는 오히려 톨레미 소테르(Ptlemy Soter)의 덕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 전쟁. 2권. 18:7(487)이 하(\’유대인 자치지구\’는 분리왕정시대에 이뤄짐). 고대. 7권 1:2(8)(시민권 인정은 톨레미 소테르에 의해 이뤄짐).] (저는 아피온이 유대인의 거주지가 왕궁 근처가 아니고 공동묘지(necropolis)였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이 문장은 아마도 저자가 훗날 잘못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니이 제(Niese)나 라이나흐는 이 문장을 아피. 2권. 4(34)끝으로 이항 한다.] 지금까지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마게도냐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아피온이 알렉산더 대왕의 서한들과 라구스(Lagus)의 아들 톨레미(Ptolemy)의 서신들도[㈜ 혹은 아마도 \’명령들\’.] 읽어 보았다면, 그리고 애굽 왕위 계승자들의 문헌이나 알렉산드리아에 지금까지도 현존한 것으로서 가이사(JuliusCaesar) 대제가 유대인들에게 허락한 권리들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비석을[㈜ 헬라어로는 stele. 참). 고대. 14권. 10:1(188).] 눈여겨 보았다면, 즉 아피온이 이러한 기록들을읽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록과 반대되는 글을 썼다면그는 사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러한 기록들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무식한 바보입니다.
아피온은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 사람으로 불리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이 또한 그가 무식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건설을 위해 소집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설사 그들이 그들의 국적이 다르더라도 그 도시 건축자들의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를 찾기 위해 다른 민족을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디옥에 거주하는 우리 유대인들을\’안디옥 사람들\’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바로 안디옥 시를 창건한셀류쿠스(Seleuchus)가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주었기때문입니다.[㈜ 셀류키드 왕조를 창건한 셀류쿠스 Ⅰ세. 니카토르, 참). 고대. 12 권. 3:1(119). 티투스가 안디옥을 방문할 당시, 이 도시에 거주하 던 유대인들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 청동 탁자에 새겨져 있다,< 전쟁. 7권. 5:2(110)>.]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에베소(Ephesus)가 이오니아(Ionia)지방의 다른 도시들에 거주하면서 알렉산더 후왕들의[㈜ 고대. 12권. 3:2(125)에 기록된 대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티 오쿠스 Ⅱ세 데오스, 주전 262-246 : Schurer \’G.J.V\'(3판) ⅲ. 81을 보라.] 선처로 원주민들과 동일한 특권과 명칭을 얻었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의 친절과 따뜻한 인간성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리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로도 허가하여 다른 모든 민족들이 로마인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전에는 이베리아인(Iberians),[㈜ 이베리아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한 이러한 진술은 라이나흐가 지 적한 대로 과장된 것이다. 50개의 스페인인 사회가 있었는데, 이 들은 아구스도 황제 치하에서 로마인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누렸 다. 베스파시안 황제는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다 다소 하위의 권 리를 부여해 줬다.] 티레니인(Tyrrhenians), 혹은 사비네스(Sabines)등으로 불리워졌던 민족이 오늘날에는 로마인(Romans)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피온이 이런 식으로 시민권을 얻게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그로 하여금 알렉산드리아 사람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유대인이 명예로운 시민권을 얻지 못하였다면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피. 2권. 3(29).] 애굽의 오지에서 태어난 아피온이 어떻게 알렉산드리아인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온 세상의 지배자가 된 로마인들이 애굽인들만 아무 특권도 누리지 못하도록 그들을 금지했습니다.[㈜ 과장된 진술, 아피. 2권. 6(72)이하에 반복되고 있음. 톨레미 왕가 와 다른 로마의 황제들은 애굽 원주민들을 헬라인들보다 열등한 대우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 따라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①사전에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의 적 (籍)을 지닌 자에게는 매우 드물게 시민권이 주어졌다(플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여섯 번째 서신과 황제가 쓴 일곱 번째 답신). ②라이나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원로원에 피선될 자격 이 없는 자\’로 해석함. 참).Mommsem의 \’Provinces\’ⅱ. 241이 하.] 아피온은 어떻게든지 특권을 차지해보기 위해 그러한 특권을 합법적으로 얻은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으러 온갖중상모략을 하여 가진 애를 다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알렉산더 대왕이 갖은 고초 끝에 도시를 건축하고 유대인들의 식민지를 거기에 세우도록 한 것은 이 도시의 주민들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에 대한 보답의표시였던 것입니다. 즉 아무리 보아도 그에게 그토록 충성스럽고 덕스러운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헤카타이우스(Hecataeus)가 우리 유대 민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을 어찌나 존중하였든지 유대인들이 왕에게 보여준 충성심과 정직성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사마리아 지역을 장악하여 살게 하였으며 조세도면제시켜 주었다.[㈜ (가짜 헤카타이우스의)이러한 표현은 사실상 과장된 것이다. 데 메트리우스 Ⅱ세는 주전 약 145년 경 사마리아의 세 군데의 작은 지역(전국은 아님)을 비과세 지구로 유대인들에게 할애하였다(마 카비 1서 11:34:참). 마카비 1서 10:30,38). 그러나 마카비 1서의 내용을 보면 데메트리우스 황제가 일찍이 그 지역에 대한 비준을 마음 먹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라구스의 아들 톨레미도 유대인들에 대한똑같은 생각을 하였다. \”톨레미는 충실하고 용감하게 지켜줄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애굽의 많은 요새들을 유대인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 부분과 고대. 12권. 1:2(8)에서 요세푸스는 아리스테아스 (Arsteas)13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유대인 수비대가 애 굽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Schurer, \’G. J. V\’. 3판. 22). 이 수비대 중의 하나인 델타(Delta)지역의 \’유대인 부대\’가 전쟁. 1권. 9:4(191)<=고대. 14권. 8:2(133)>에 언급되 어 있다.] 또한 구레네(Cyrene)지방과 리비야(Libya)의 다른 도시들을 더욱 공고히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에도 톨레미왕은 유대인 무리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거주하게 했었던 것입니다.[㈜ 술라(Sulla)의 시대에 구레네(Cyrene)의 유대인들은 4개의 유 대인 부류 중의 하나였다<요세푸스의 고대. 14권. 7:2(115)과 함 께 Strabo의 글을 참조하라>.] 그리고 필라델푸스(Philadelphus)라고도 불리웠던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인 톨레미(Ptolemy)는 포로로 그에게 붙잡혀 있던 모든 유대인들을 석방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돈을 많이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떤 업적보다 위대한 다른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우리 유대 민족의 율법을무척 알기 원하였으며 우리 성경을 무척 읽고 싶어 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율법을 그에게 해석해 줄 수 있을 만한사람을 보내주기를 무척 원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율법서들이 정확히 필사(筆寫)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임무를 그저 보통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팔레룸의 데메트리우스(Demetrius of Phalerum)와[㈜ 아피. 1권. 23(218).] 안드레아스(Andreas) 그리고 아리스테아스(Aristeas)와 같은 비범한 사람들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왕의 신변 경호를 맡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비중있는 사람들이 감독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로부터 비롯된 것 이라고 요세푸스는 고대. 12권. 2:1(12)이하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다.] 만일 톨레미왕이 율법을 사용하는 당사자들을 미워하거나 또는 그유럽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분명 그는 유대인들이 삶의 법칙으로 여기는 율법과 신조들을[㈜ 헬라어 본문에는 \”철학\”.] 그토록 배우려 애쓰지않았을 것입니다.
5. 유대인 오니아스와 도시데우스가 총 사령관이 되다
또한 아피온은 그의 조상들인 것처럼 말하는 마게도냐의 모든왕들이[㈜ 이와 반대되는 각주 1을 보라.] 우리 민족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에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서 유에르게테스(Euergetes)라고도 부르는 톨레미 Ⅲ세가[㈜ 그는 통치 초기에 벌어진 수리아 전쟁에서의 그의 업적에 관하 여 홍해 연안의 아둘레(Adulel)라는 곳에 기록을 남김<Mahaffy 의 \’톨레미가의 황제들\'(Emp. of Ptolemies),199>. 그의 예루 살렘에서의 제사 기록에 관하여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유일한 근 거이다.] 수리아의 전역을 장악하게 되자 승리를 기념하여 감사제물을 애굽의 신들에게바치지 않고,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가서 우리 유대율법에 따라하느님께 많은 제물을 드렸으며 전쟁 승리에 어울리는 많은 예물을 봉헌하였습니다. 또한 톨레미 필로메테르(Ptolemy Phi-lometer)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같은 사람들은 아예 전국을 유대인들에게 맡겼으며, 전군을 유대인 총사령관 오니아스(Onias)와[㈜ 레온토폴리스에 있는 신전의 건축자(주전 154년경)인 오니아스 (Onias)Ⅳ세로 추정됨. 그러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음. 도 시데우스(Dositheus)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음.] 도시데우스(Dositheus)의 휘하에 두었습니다. 아피온은 그들의 이름을[㈜ 오니아스란 이름은 헬라어, o[no\”에서 파생됨.] 비난하고 있지만 오히려 아피온은 그 유대인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피온이 자기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를 구해준 데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이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인들이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맞서싸울 때에 그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화해협정을 맺게하여 내전의 불행을 모면케 하는 공헌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주전 146년에 필로메토르(Philometor)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는 후임왕으로 아들인 톨레미 Ⅷ세(Philopator Neos)를 선임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인들이 선왕의 동생인 톨레미 Ⅸ세(Euergetes)Ⅱ,Physcon)를 구레네로부터 불러들이자 그는 젊은 새 왕을 살해하고 군중들을 닥치는 대로 투옥시켰 으며 그의 누이인 왕비와 혼인하였다(Trogus Pompeius가 발췌 한 Justin, 38. 8. 2-4).].\”(아피온의 말에 의하면) 그러나 그후로 대군의 대장인 오니아스(Onias)는 알렉산드리아 시로 진군하였는데 이때는 로마의대사 데르무스(Thermus)가[㈜ 이전의 전쟁 때에 피스콘을 대신하여 활동했던 Lucius Thermus (폴리비우스의 단편,ⅹⅹⅹⅲ.5).] 그곳에 있을 때였다\” 저는 여기에서 오니아스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곳에 입성했던 것은 매우정당하고 옳은 일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스콘(Physcon)이라고 불리우는 톨레미(Ptolemy)가 그의형인 필로메테르가 죽자 구레네(Cyrene)에서 돌아와서 여왕인클레오파트라를 몰아내고 왕자들을 죽인 다음 자기 마음대로 부당하게 나라를 장악하려고 했던 사건이 그 당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니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위하여 톨레미 피스콘을 상대로 전쟁을 감행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필로메테르 왕가가 유대인들이 어려울 때에 베푼 신의를 결코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가 의롭다는 증거를 명백히 보여줬습니다. 톨레미 피스콘은 오니아스의 군대와 한판 승부를 겨룰 속셈으로 (알레산드리아)시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어린이나 부녀자들을 막론하고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모두 나체로 발가벗긴 채 코키리떼에게로 끌고 가 그 코끼리들로 하여금 그들을 짓밟아 죽이려고 이 코끼리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였습니다. 결과는 톨레미 피스콘이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어 버렸습니다. 이 코끼리떼들은 유대인들을 내버려두고 도리어 피스콘의 측근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달려가 수많은 사람들을 밟아 죽여버렸던 것입니다. 또한 이 사건이 있은 후로 피스콘은 무시무시한 유령을 보게 되었는데 그 유령은 그가 유대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피스콘이 가장 아끼던 그의 첩[어떤 이들은 그녀를 이다카(Ith-aca))라고 부르며, 또 어떤 이들은 이레네(Irene)라고 부르기도하는]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피스콘은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였으며 그가 이제까지 저질렀거나 또 계획하고 있던 죄악들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와같은 하느님으로부터의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되자 이날을 축제일로 삼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카비 3서 5-6장의 코끼리의 사건은 톨레미 Ⅳ세, 즉 필로파토 르(주전 222-205)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두 이야기의 기원은 부 림절(Purim)이야기(마카비 3서 6:36)와 유사한 알렉산드리아 유 대인들의 축제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독립에 관한 요세푸스의 설명은 어쩌면 이 두 이야기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피온은 유대인을 칭송하고 칭찬해줘야 할 판국에 그들이 피스콘을 대항하였다는 이유로 유대인을 오히려 비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사람은 모든 사람을 비난밖에 할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피온은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주전 51-30년. 그녀의 이와 유사한 죄의 목록이 고대. 15권. 4:1(89)이하에 기록되어 있음.] 그녀가 우리 유대인들을 핍박했다는 이유로 우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피온은 유대인보다는 오히려 클레오파트라를 비난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까운 친척이거나 그녀를 사랑했던 남편에게나,[㈜ 아마도 \’그녀의 남편들과 연인들\’. 라틴어 역자가 원본을 잘못 이해한 것임(Reinach)] 그리고 모든 로마사람들과 그녀에 많은 은혜를 베푼 로마의 황제들에게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들에게 온갖 불의와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또한 그녀는 아무 죄도 없는 여동생 아르시노에(Arsinoe)를[㈜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에 의해 에베소<고대. 15권. 4:1(89)>, 혹은 밀레도(아피우스(Appius), \’내전\'(Bell. Civillis),ⅴ.9>에 있는 아데미(Artemi)신전에서 안토니에게 살해됨.] 신전에서 살해했습니다. 더구나 그녀의 남동생마저도 은밀히 모략하여 죽여 버렸으며[㈜ 그녀의 두명의 형제 중에서 동생인 톨레미 15세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그녀와 함께 섭정을 했던 사람은 로마에서 주전 약 44년 경에 그녀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여겨진다 : 고대. 15권. 4:1(89).] 그나라에 있는 모든 신전과 자기 조상들의 무덤들도 모두 약탈했습니다.[㈜ 참). 고대. 15권. 4:1(90).] 또한 그녀는 첫 번째 가이사(Caesar)에게서 나라를 물려받았는데도 뻔뻔스럽게 가이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사람에게 반역을 했던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클레오파트라는 사랑을 가장하여 안토니(Antony)를 성적으로 타락시켜 결국 그로 하여금 조국을 등지게 하였으며 그의 친구들을 배반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또한 안토니를 이용하여 그들이 가진 권력을 빼앗고, 많은 사람들을 해고하였으며[㈜ 본문과 의미가 불확실함.] 광란적인 악행에 동조하도록 하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남편이자 동시에 그녀의 아이들의 아버지인 안토니가 해상전투를[㈜ 주전 31년의 약티움(Actium)해전] 벌이는 사이에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안토니가 그의 로마군대와 황제칭호를 버리고 애굽으로와서 그녀를 따르도록 강요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이렇듯 비열한 사람에 대해 더많은 설명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가이사(Caesar)가[㈜ 옥타비우스(Octavius). 주전 30년.]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를 장악하게 되자 그녀는 극도의 잔인성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는 자살 밖에는 다른 희망이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습니다. 아피온이 말한 대로 기근이 닥쳐왔는데도 우리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식량을 배급해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불성실한 사람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 아닙니까?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자업자득의 징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유대인들은 가이사가 애굽인들과 싸울 때에 그에게 협조와 충성을 보였습니다.[㈜ 주전 47년 폼페이(Pompey) 사후에 율리오 가이사와 함께 복역했 던 안티파테르(Antipater) 휘하의 유대인 파견 부대 : 고대. 14 권. 5:3(127)이하, 전쟁. 1권. 9:3(187)이하.] 원로원과 법령들에 보면, 그리고 아구스도 가이사(Augustus Caear)가 보낸 서한들을 보면 우리 유대인이(로마인들에게) 보여준 공로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피온은 그러한 서한들을 조사해 보았어야 했습니다. 특히 애굽인들이 존경하는 알렉산더 대왕과 톨레미 왕가가 통치할 때의 우리민족에 대한 증거들과 원로원과 로마제국의 가장 훌륭한 황제들이[㈜ 혹은 \’장군들\’.] 명한 법령들을 통해 우리 민족에 대한 증거들을 자세히 조사했어야 했습니다. 만일 게르마니쿠스(Germanicus)가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주민들에게 곡식을 분배해 주지 못했다고 한다면[㈜ 디베료의 조카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는 주후 19년에 애굽 을 방문하였으며, 곡창을 개방하여 곡물의 가격을 인하시킴으로 서 비위를 맞추었다.(타키투스 \’연대기\'(Ann.)ⅱ. 59).] 그것은 그 당시에 얼마나 가물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식량이 부족했는지를 말해주긴 할망정 유대인들을 비난할 수 있는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황제들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었는가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식량을 분배하는 임무는 알렉산드리아의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에게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은[㈜ 참). 전쟁. 1권. 8:7(175)(나일강의 펠루시아크 어귀의 방위를 담 당한 유대인 경비대).] 왕들이 자기들에게 특별히 맡긴 책임인 강과 그 모든 유역(?)을 관리하는 책임을 끝까지 지키려고 애를 썼으며, 이에 왕들도 강을 관리하는 모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만 맡기려고 했던 것은 유대인을 신뢰했다는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제2권
1. 반 유대적 비난에 대한 논박
에바르로디도 각하여! 저는 이 책의 첫권에서 베니게인들(Phoenicians)과 갈대아인들 (Chaldaeans), 그리고 애굽인들(Egyptians)의 기록들을 인용하여 저희 민족의 고대성에 대해말씀드렸던 내용들이 진실한 것들임을 확신합니다. 더욱이 저는 증인으로서 많은 헬라의 역사가들을 인용하였습니다. 또한 저는마네토와 카이레몬,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제부터 우리에 관해 악평을 한 그외의 저자들을 논박할까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문법학자인 아피온 (Apion)을[㈜ 아피온은 북부 애굽지방에서 태어나(아피.2권. 3(29)알렉산드리아 에서 공부했으며, 디베랴, 칼리굴라, 글라우디오 등의 황제 치하시 로마에서 수사학을 배웠다. 특히 칼리굴라 시대 때 알렉산드리아 의 유대인 대변인인 필로(Philo)와 맞서서 논쟁을 벌일 때 반유대 대표의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 황제에게로 파견되기도 했다(고대. 18권. 8:1(257)이하 ). 박학다식하면서도 지나치게 과시 하는 경향이 있는 저술가이며 호머(Homer)의 해설자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대. 2권. 2:3(14). 그는 또한 5권으로 된 애굽의 역 사서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유대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 유대의 역사가 그의 저서 가운데에서 독립본으로 분리되어 있 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연구열로 인하여 ‘노동( )’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그의 과시적인 성격 때문에 디베로 황제로부터’세계의 심벌'(cymbalum mundi)이라는 별명을 얻 게 되기도 하였다.] 힘들여 가면서까지 반박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할지 약간의 의심이 생기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쓴 몇몇 사람들을 보면 앞서 말씀드린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비난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이거나 어떤 것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무가치한[㈜ 혹은 ‘무뚝뚝한’.]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가 말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주 질이 낮은 내용이며, 더욱이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가 유식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매우 부도덕하며 평생을 돌팔이로 살아온 사람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심도있게 쓰여진 책의 내용보다는 그런 무가치한 책을 좋아하며, 남을 비난하는데 낙을 삼으며 남이 칭찬 받으면 배가 아파오기 때문에 저는 마치 공개법정에서 우리의 대답을 강요하듯이 우리를 비난해온 이 아피온(Apion)이라는 사람을 주의깊게 조사해 볼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저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먼저 비난했다가 도리어 자기가 저지른 그런 죄악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는 사람을 보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한다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아피온이 기록하고 있는 사실들을 요약하거나 그의 의도를 쉽게 이해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첫번째로 우리가 앞서 살펴본 유사한 여러 사실들과 특히 우리 조상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 그는 사고에 있어서 큰 혼돈과 무질서에 빠진 것 같습니다. 또한 두 번째로, 그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거룩한 결례들에 대한 비난과 성전에서 사용된 다른 법적 의식들에 대한 비난을 온통 뒤섞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출애굽에 대하여
우리 유대 조상들이 원래 애굽인들이 아니었으며, 또는 신체적 질병이나 기타 다른 재앙 때문에 애굽에서 추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저는 이미 필요이상으로 충분히 설명했다고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한 아피온이 자세히 설명한 것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애굽의 역사’라는 그의 저서 제 3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대의 애굽 사람들에게서[㈜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아마도 아피온은(공적인 의미에 서의) ‘장로들’을 뜻하는 것 같다.] 모세에 대하여 들어왔다. 그는 헬리오폴리스 태생으로서[㈜ 아피. 1권. 26(238)에 보면 마네토도 ‘오사르시프'(Osarsiph)태생으 로 되어 있다.] 스스로 조상들의 관습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마음먹었다. 모세는 도시의 경계지역 여러 곳에[㈜ 혹은 ‘여러 벽면 위에.] 모두 동쪽으로 향하게기도하는 집을 세웠다. 그것은 헬리오폴리스에서도 동쪽으로 향하게 했던 것과 같다. 또한 첨탑(obelisk)[㈜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오벨리스크에 관하여는 헤로도투스 ⅱ. 111을 참조하라.] 대신에 모세는 기둥들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배와 같이 생긴 것을[㈜ 혹은 ‘물그릇'(skavfh)는 전문 용어로 해시계의 움푹패인 그릇을 가리킨다.] 놓아 두었다. 그 기둥에서[㈜ 수정된 본문 ; 주춧돌 위에 올라 서 있는 인물상. 이 사본에는 ‘사람 의 그림자’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그릇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마치 태양이 한바퀴 도는 것과 같이 그림자가 원을 그리게 만들어 놓았다” 이상이 바로 이 위대한 문법학자인 아피온이 우리에게 전하여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허구성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에 의해 증명될 것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을위한 첫번째 성막을 지었을 때 그는 성막에다 그와 같은 표시를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후계자더러 그와 같은 형상을새겨 넣으라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먼훗날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그는 아피온이 그의 저서에서 꾸며낸 내용과 같은 이상스런 장식물들을 모두 피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모세가 헬리오폴리스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대 애굽인들로부터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분명 아피온 자신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모세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나이먹은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다가 자기에게 이야기해준 사람들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Athen. ⅰ. 29(p. 161)에서 라이나흐는 적절히 이를 비교하고 있다 : 알렉산드리아인인 아피온은(페니로프에게) 청혼한 남자가 보여준 ‘끌 기경기’의 본질에 대하여 이다카(Ithaca)의 크테손(Cteson)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한다.] 아피온은 문법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호머(Homer)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조차 자신있게 언급하지 못합니다.[㈜ 오래된 대구를 참조하라 :”Smyrna, Rhodes, Colophon, Salamis, Chios, Argos, Athenae, Orbis de patria certat, Homere, tua. “그 대, 호머여! 그대는 조국의 땅 – 스미르나, 로데스, 콜로폰, 살라미 스, 키오스, 아르고스, 아덴 -을 위하여 싸우라!).] 뿐만 아니라 그는 상대적으로 불과 얼마 이전 사람인 피타고라스의[㈜ 때에 따라 사모스인, 에트루리아인, 수리아인, 혹은 두로인으로 매우 다양하게 기술되어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Strom’. ⅰ. 4, 62, 라이나흐가 인용함).] 출생지가 어디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피온은 이들보다도 훨씬 더많은 연수를 앞서서 살았던 모세의 나이를 쉽사리 결정지어 버립니다. 그는 단지 고대 사람들의 관계만으로 그의 나이를 결정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볼 때 아피온이얼마나 지독한 거짓말쟁이인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가 문둥이, 절름발이, 소경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한 시기를 연대기적으로 결정함에 있어서 얼마나 아피온의생각이 앞서서 언급했던 저자들의 생각과 일치되는가를 봅시다.마네토는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한 시기가 테드모시스왕(Tet-hmosis)이 지배하던 때로서 다나우스(Danaus)가 아르고스(Argos)로[㈜ 아피. 1권. 16(103).] 도망을 치기 393년 이전의 일이라고 이야기하고있습니다. 한편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출애굽의 시기가보코리스(Bocchoris)[㈜ 아피. 1권. 59(305).]왕이 지배하던 때로써 1,700여 년 전의 일이라고 말을 합니다. 몰론(Molon)과[㈜ 아폴로니우스 몰로는 카리아(Caria)태생이며 로데스(Rhodes)와 로마 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의 문하생으로는 키케로(Cicero)나 율리 우스 가이사(Julius Caesar)와 같은 인물이 있음. 그가 유대인들을 맹렬히 비난한 내용이 이책에 이따금씩 나온다.] 그외 몇 명의 사람들은자기들이 좋게 여기는 대로 그 시기를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아피온은 마치 자기의 주장이 앞서 말한 사람들의 주장보다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제7회 올림피아드가 열리던 첫해에 출애굽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같은해에 카르타고(Cathage)가 베니게인들(Phoenicians)에 의해건설되었다고[㈜ 또한 로마의 건국일이기도 함.] 덧붙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카르타고의건축에 관하여 덧붙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연대기적 특징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으로 아피온 자신은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피온은 이러한 특징이 오히려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니게인들이 남긴 기록을 신뢰한다면, 그들의왕인 히람(Hirom)은 카르타고 건설보다도 150년 이상이나 이전에 살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피. 1권. 18(126).] 저자는이미 앞에서 베니게의 기록들을 통해서 히람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히람왕은 성전을 건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피. 1권. 17(109).] 한편 솔로몬은유대인들이 출애굽한 지 612년째 되는 해에 성전건축을 한 것도살펴보았습니다.[㈜ 고대. 20권. 10:1(230)에서의 요세푸스의 설명과 동일함. 다른 부분< 고대. 8권. 3:1(61)에서는 그 시기를 592년으로 기록함>성경의 기록 (왕상 6:1)은 480년이다.] 또한 애굽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추정 숫자도 아피온은 리시마쿠스의 주장과 동일하게 110,000명이라고[㈜ 아피. 1권. 7(34)위에 언급된 리시마쿠스의 발췌문에는 아무런 숫자 표기가 없다.] 주장했습니다. 그다음에 아피온은 안식일의 명칭이 생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놀랍고도 그럴듯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6일 동안의 여정이 끝나자 그들의 사타구니(groin)에 임파선종양(Tumours)이 생겼다. 그들은 지금유대라고 하는 땅에 완전히 도달하게 된 제 7일째 모두 쉬게 되었다. 그 당시 그들은 애굽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따라서 그 7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sabbaton)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타구니에 생긴 질병’이라는 말을 애굽어로는 삽보(sabbo)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자의 허튼 소리를 듣고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기록하는 것을 알면 그를 증오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11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임파선종양에 걸렸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만일 아피온의 주장대로 그들이 눈이 멀었거나 절룩발이거나 그들의 신체에 질병을 가진 자들이었다면그들은 단 하루도 광야에서의 여행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넓은 광야를 행군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또한 더욱이 그들과 마주치는 적들과 전투를 하며 그들을 정복할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 중에 아무도 6일이 지난 후에도 사타구니에 임파선종양을 가지지 않았었음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강행군하는 사람들은 보통으로는 이런 질병에 잘 걸리지 않기때문입니다. 수만명의 군인이 정상적인 속도로 계속하여 여러날을 행군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그러한 질병이 우연히 발생한다는 것은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도무지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잘난 작가인 아피온은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6일이 걸려 유대땅에 도착하였다”[㈜ 비록 아피온의 말을 그들이 이처럼 해석할지라도<아피. 2권. 2(21)> 아피온 자신은 위에 나온 발췌문에서 이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말합니다. “모세는 애굽과 아라비아 사이에 있는 시내(Sinai)라고 하는 산에 올라갔다.거기서 그는 40일 동안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가 그 산에서 내려온 후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렇다면 유대민족이 물도없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말인데, 그들이 온 광야를 가로질러 유대까지 단 6일만에 도달하였다 함은 무슨 말입니까? 또한 소위 문법학자라고 하는 아피온이 안식일(sabbath)이라는 단어를 곡해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이며 무식한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보(sabbo)라는 단어와 사바트(sabbath)라는 단어는 서로 크게 다른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말로 사바트(sabbath)라는 단어는 모든 일로부터 ‘쉰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러나그가 주장한 대로 사보(sabbo)라는 단어는 애굽어로서 ‘사타구니에 생긴 임파선종양’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3. 유대 민족의 애굽 기원설에 대하여
이상이 애굽사람인 아피온이 모세의 이야기나 유대 민족의 출애굽에 관해 우리에게 보여준 기록들인데 이것은 다른 작가들보다 한술 더 뜬 소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피온은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 원주민들이었다고 거짓 주장을 한다고 해서 결코 놀랄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애굽의 오아시스[㈜ 애굽 북부, 더베(Thebes) 서부 지역에 있는 대 오아시스(The Great Oasis).참). 아피. 2권. 4(41).26] 출신이면서도 자기 출신지를속이고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기 종족이 불명예스럽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피온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애굽인이라고 비난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그가 애굽인이라는 이름을 치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그는 굳이 자기 조국에 등을 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애국자들은 자기들의 국적을 항상 떳떳이 드러내게 됩니다. 또한 자기의 조국을 부당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애굽이 관련이 있다는 애굽인들의 주장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즉 애굽인들이 우리 유대 민족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불명예에 같이 끌어 들이려는 심보 때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잘난 아피온이란 친구의 우리 민족에 대한 모욕적인 주장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이 그에게 시민권을 준데 대한보답으로서 꾸며낸 이야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아피온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대인이 애굽 출신이라고 함으로써 애굽인들까지도 수치를 당하는 입장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어쨋든 어느모로 보나 아피온은 새빨간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4.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 한 아피온의 비난
이재부터는 아피온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죄악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심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수리아로부터 왔으며 항구가 없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그 지역은 파도가 부딪히는 해변 바로 곁이었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피온이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처소를 비난하려 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출생지가 아닌 자칭 조국 알렉산드리아를 비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다와 근접한 그 도시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자치 지역은 알렉산드리아의 북동부로서 왕궁이 위치해 있던 로키아스(Lochias)곶 부근의 대 항구(Geat Harbour)로 부 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Strabo. ⅹⅶ. 9. 794 ; 아피. 2권 4(36)이 하를 참조하라). 공동묘지(necropolis)는 이 도시의 반대편, 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편으로 만일 유대인들이 그 지역을 무력으로 차지하고 지금까지를 별문제없이 그곳을 잘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그들이 용감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땅을거주지로 할애해 준 사람은 다름아닌 알렉산더대왕이었으며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마게도냐사람들과 똑같은 특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다른 글들을 읽어 보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독립자치지역에서 살면서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더의 덕분이기보다는 오히려 톨레미 소테르(Ptlemy Soter)의 덕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 전쟁. 2권. 18:7(487)이 하(‘유대인 자치지구’는 분리왕정시대에 이뤄짐). 고대. 7권 1:2(8)(시민권 인정은 톨레미 소테르에 의해 이뤄짐).] (저는 아피온이 유대인의 거주지가 왕궁 근처가 아니고 공동묘지(necropolis)였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이 문장은 아마도 저자가 훗날 잘못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니이 제(Niese)나 라이나흐는 이 문장을 아피. 2권. 4(34)끝으로 이항 한다.] 지금까지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마게도냐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아피온이 알렉산더 대왕의 서한들과 라구스(Lagus)의 아들 톨레미(Ptolemy)의 서신들도[㈜ 혹은 아마도 ‘명령들’.] 읽어 보았다면, 그리고 애굽 왕위 계승자들의 문헌이나 알렉산드리아에 지금까지도 현존한 것으로서 가이사(JuliusCaesar) 대제가 유대인들에게 허락한 권리들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비석을[㈜ 헬라어로는 stele. 참). 고대. 14권. 10:1(188).] 눈여겨 보았다면, 즉 아피온이 이러한 기록들을읽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록과 반대되는 글을 썼다면그는 사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러한 기록들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무식한 바보입니다.
아피온은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 사람으로 불리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이 또한 그가 무식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건설을 위해 소집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설사 그들이 그들의 국적이 다르더라도 그 도시 건축자들의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를 찾기 위해 다른 민족을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디옥에 거주하는 우리 유대인들을’안디옥 사람들’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바로 안디옥 시를 창건한셀류쿠스(Seleuchus)가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주었기때문입니다.[㈜ 셀류키드 왕조를 창건한 셀류쿠스 Ⅰ세. 니카토르, 참). 고대. 12 권. 3:1(119). 티투스가 안디옥을 방문할 당시, 이 도시에 거주하 던 유대인들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 청동 탁자에 새겨져 있다,< 전쟁. 7권. 5:2(110)>.]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에베소(Ephesus)가 이오니아(Ionia)지방의 다른 도시들에 거주하면서 알렉산더 후왕들의[㈜ 고대. 12권. 3:2(125)에 기록된 대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티 오쿠스 Ⅱ세 데오스, 주전 262-246 : Schurer ‘G.J.V'(3판) ⅲ. 81을 보라.] 선처로 원주민들과 동일한 특권과 명칭을 얻었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의 친절과 따뜻한 인간성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리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로도 허가하여 다른 모든 민족들이 로마인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전에는 이베리아인(Iberians),[㈜ 이베리아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한 이러한 진술은 라이나흐가 지 적한 대로 과장된 것이다. 50개의 스페인인 사회가 있었는데, 이 들은 아구스도 황제 치하에서 로마인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누렸 다. 베스파시안 황제는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다 다소 하위의 권 리를 부여해 줬다.] 티레니인(Tyrrhenians), 혹은 사비네스(Sabines)등으로 불리워졌던 민족이 오늘날에는 로마인(Romans)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피온이 이런 식으로 시민권을 얻게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그로 하여금 알렉산드리아 사람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유대인이 명예로운 시민권을 얻지 못하였다면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피. 2권. 3(29).] 애굽의 오지에서 태어난 아피온이 어떻게 알렉산드리아인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온 세상의 지배자가 된 로마인들이 애굽인들만 아무 특권도 누리지 못하도록 그들을 금지했습니다.[㈜ 과장된 진술, 아피. 2권. 6(72)이하에 반복되고 있음. 톨레미 왕가 와 다른 로마의 황제들은 애굽 원주민들을 헬라인들보다 열등한 대우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 따라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①사전에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의 적 (籍)을 지닌 자에게는 매우 드물게 시민권이 주어졌다(플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여섯 번째 서신과 황제가 쓴 일곱 번째 답신). ②라이나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원로원에 피선될 자격 이 없는 자’로 해석함. 참).Mommsem의 ‘Provinces’ⅱ. 241이 하.] 아피온은 어떻게든지 특권을 차지해보기 위해 그러한 특권을 합법적으로 얻은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으러 온갖중상모략을 하여 가진 애를 다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알렉산더 대왕이 갖은 고초 끝에 도시를 건축하고 유대인들의 식민지를 거기에 세우도록 한 것은 이 도시의 주민들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에 대한 보답의표시였던 것입니다. 즉 아무리 보아도 그에게 그토록 충성스럽고 덕스러운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헤카타이우스(Hecataeus)가 우리 유대 민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을 어찌나 존중하였든지 유대인들이 왕에게 보여준 충성심과 정직성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사마리아 지역을 장악하여 살게 하였으며 조세도면제시켜 주었다.[㈜ (가짜 헤카타이우스의)이러한 표현은 사실상 과장된 것이다. 데 메트리우스 Ⅱ세는 주전 약 145년 경 사마리아의 세 군데의 작은 지역(전국은 아님)을 비과세 지구로 유대인들에게 할애하였다(마 카비 1서 11:34:참). 마카비 1서 10:30,38). 그러나 마카비 1서의 내용을 보면 데메트리우스 황제가 일찍이 그 지역에 대한 비준을 마음 먹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라구스의 아들 톨레미도 유대인들에 대한똑같은 생각을 하였다. “톨레미는 충실하고 용감하게 지켜줄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애굽의 많은 요새들을 유대인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 부분과 고대. 12권. 1:2(8)에서 요세푸스는 아리스테아스 (Arsteas)13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유대인 수비대가 애 굽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Schurer, ‘G. J. V’. 3판. 22). 이 수비대 중의 하나인 델타(Delta)지역의 ‘유대인 부대’가 전쟁. 1권. 9:4(191)<=고대. 14권. 8:2(133)>에 언급되 어 있다.] 또한 구레네(Cyrene)지방과 리비야(Libya)의 다른 도시들을 더욱 공고히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에도 톨레미왕은 유대인 무리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거주하게 했었던 것입니다.[㈜ 술라(Sulla)의 시대에 구레네(Cyrene)의 유대인들은 4개의 유 대인 부류 중의 하나였다<요세푸스의 고대. 14권. 7:2(115)과 함 께 Strabo의 글을 참조하라>.] 그리고 필라델푸스(Philadelphus)라고도 불리웠던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인 톨레미(Ptolemy)는 포로로 그에게 붙잡혀 있던 모든 유대인들을 석방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돈을 많이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떤 업적보다 위대한 다른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우리 유대 민족의 율법을무척 알기 원하였으며 우리 성경을 무척 읽고 싶어 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율법을 그에게 해석해 줄 수 있을 만한사람을 보내주기를 무척 원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율법서들이 정확히 필사(筆寫)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임무를 그저 보통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팔레룸의 데메트리우스(Demetrius of Phalerum)와[㈜ 아피. 1권. 23(218).] 안드레아스(Andreas) 그리고 아리스테아스(Aristeas)와 같은 비범한 사람들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왕의 신변 경호를 맡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비중있는 사람들이 감독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로부터 비롯된 것 이라고 요세푸스는 고대. 12권. 2:1(12)이하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다.] 만일 톨레미왕이 율법을 사용하는 당사자들을 미워하거나 또는 그유럽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분명 그는 유대인들이 삶의 법칙으로 여기는 율법과 신조들을[㈜ 헬라어 본문에는 “철학”.] 그토록 배우려 애쓰지않았을 것입니다.
5. 유대인 오니아스와 도시데우스가 총 사령관이 되다
또한 아피온은 그의 조상들인 것처럼 말하는 마게도냐의 모든왕들이[㈜ 이와 반대되는 각주 1을 보라.] 우리 민족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에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서 유에르게테스(Euergetes)라고도 부르는 톨레미 Ⅲ세가[㈜ 그는 통치 초기에 벌어진 수리아 전쟁에서의 그의 업적에 관하 여 홍해 연안의 아둘레(Adulel)라는 곳에 기록을 남김. 그의 예루 살렘에서의 제사 기록에 관하여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유일한 근 거이다.] 수리아의 전역을 장악하게 되자 승리를 기념하여 감사제물을 애굽의 신들에게바치지 않고,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가서 우리 유대율법에 따라하느님께 많은 제물을 드렸으며 전쟁 승리에 어울리는 많은 예물을 봉헌하였습니다. 또한 톨레미 필로메테르(Ptolemy Phi-lometer)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같은 사람들은 아예 전국을 유대인들에게 맡겼으며, 전군을 유대인 총사령관 오니아스(Onias)와[㈜ 레온토폴리스에 있는 신전의 건축자(주전 154년경)인 오니아스 (Onias)Ⅳ세로 추정됨. 그러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음. 도 시데우스(Dositheus)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음.] 도시데우스(Dositheus)의 휘하에 두었습니다. 아피온은 그들의 이름을[㈜ 오니아스란 이름은 헬라어, o[no”에서 파생됨.] 비난하고 있지만 오히려 아피온은 그 유대인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피온이 자기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를 구해준 데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이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인들이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맞서싸울 때에 그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화해협정을 맺게하여 내전의 불행을 모면케 하는 공헌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주전 146년에 필로메토르(Philometor)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는 후임왕으로 아들인 톨레미 Ⅷ세(Philopator Neos)를 선임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인들이 선왕의 동생인 톨레미 Ⅸ세(Euergetes)Ⅱ,Physcon)를 구레네로부터 불러들이자 그는 젊은 새 왕을 살해하고 군중들을 닥치는 대로 투옥시켰 으며 그의 누이인 왕비와 혼인하였다(Trogus Pompeius가 발췌 한 Justin, 38. 8. 2-4).].”(아피온의 말에 의하면) 그러나 그후로 대군의 대장인 오니아스(Onias)는 알렉산드리아 시로 진군하였는데 이때는 로마의대사 데르무스(Thermus)가[㈜ 이전의 전쟁 때에 피스콘을 대신하여 활동했던 Lucius Thermus (폴리비우스의 단편,ⅹⅹⅹⅲ.5).] 그곳에 있을 때였다” 저는 여기에서 오니아스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곳에 입성했던 것은 매우정당하고 옳은 일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스콘(Physcon)이라고 불리우는 톨레미(Ptolemy)가 그의형인 필로메테르가 죽자 구레네(Cyrene)에서 돌아와서 여왕인클레오파트라를 몰아내고 왕자들을 죽인 다음 자기 마음대로 부당하게 나라를 장악하려고 했던 사건이 그 당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니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위하여 톨레미 피스콘을 상대로 전쟁을 감행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필로메테르 왕가가 유대인들이 어려울 때에 베푼 신의를 결코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가 의롭다는 증거를 명백히 보여줬습니다. 톨레미 피스콘은 오니아스의 군대와 한판 승부를 겨룰 속셈으로 (알레산드리아)시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어린이나 부녀자들을 막론하고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모두 나체로 발가벗긴 채 코키리떼에게로 끌고 가 그 코끼리들로 하여금 그들을 짓밟아 죽이려고 이 코끼리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였습니다. 결과는 톨레미 피스콘이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어 버렸습니다. 이 코끼리떼들은 유대인들을 내버려두고 도리어 피스콘의 측근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달려가 수많은 사람들을 밟아 죽여버렸던 것입니다. 또한 이 사건이 있은 후로 피스콘은 무시무시한 유령을 보게 되었는데 그 유령은 그가 유대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피스콘이 가장 아끼던 그의 첩[어떤 이들은 그녀를 이다카(Ith-aca))라고 부르며, 또 어떤 이들은 이레네(Irene)라고 부르기도하는]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피스콘은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였으며 그가 이제까지 저질렀거나 또 계획하고 있던 죄악들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와같은 하느님으로부터의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되자 이날을 축제일로 삼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카비 3서 5-6장의 코끼리의 사건은 톨레미 Ⅳ세, 즉 필로파토 르(주전 222-205)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두 이야기의 기원은 부 림절(Purim)이야기(마카비 3서 6:36)와 유사한 알렉산드리아 유 대인들의 축제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독립에 관한 요세푸스의 설명은 어쩌면 이 두 이야기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피온은 유대인을 칭송하고 칭찬해줘야 할 판국에 그들이 피스콘을 대항하였다는 이유로 유대인을 오히려 비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사람은 모든 사람을 비난밖에 할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피온은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주전 51-30년. 그녀의 이와 유사한 죄의 목록이 고대. 15권. 4:1(89)이하에 기록되어 있음.] 그녀가 우리 유대인들을 핍박했다는 이유로 우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피온은 유대인보다는 오히려 클레오파트라를 비난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까운 친척이거나 그녀를 사랑했던 남편에게나,[㈜ 아마도 ‘그녀의 남편들과 연인들’. 라틴어 역자가 원본을 잘못 이해한 것임(Reinach)] 그리고 모든 로마사람들과 그녀에 많은 은혜를 베푼 로마의 황제들에게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들에게 온갖 불의와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또한 그녀는 아무 죄도 없는 여동생 아르시노에(Arsinoe)를[㈜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에 의해 에베소<고대. 15권. 4:1(89)>, 혹은 밀레도(아피우스(Appius), ‘내전'(Bell. Civillis),ⅴ.9>에 있는 아데미(Artemi)신전에서 안토니에게 살해됨.] 신전에서 살해했습니다. 더구나 그녀의 남동생마저도 은밀히 모략하여 죽여 버렸으며[㈜ 그녀의 두명의 형제 중에서 동생인 톨레미 15세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그녀와 함께 섭정을 했던 사람은 로마에서 주전 약 44년 경에 그녀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여겨진다 : 고대. 15권. 4:1(89).] 그나라에 있는 모든 신전과 자기 조상들의 무덤들도 모두 약탈했습니다.[㈜ 참). 고대. 15권. 4:1(90).] 또한 그녀는 첫 번째 가이사(Caesar)에게서 나라를 물려받았는데도 뻔뻔스럽게 가이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사람에게 반역을 했던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클레오파트라는 사랑을 가장하여 안토니(Antony)를 성적으로 타락시켜 결국 그로 하여금 조국을 등지게 하였으며 그의 친구들을 배반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또한 안토니를 이용하여 그들이 가진 권력을 빼앗고, 많은 사람들을 해고하였으며[㈜ 본문과 의미가 불확실함.] 광란적인 악행에 동조하도록 하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남편이자 동시에 그녀의 아이들의 아버지인 안토니가 해상전투를[㈜ 주전 31년의 약티움(Actium)해전] 벌이는 사이에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안토니가 그의 로마군대와 황제칭호를 버리고 애굽으로와서 그녀를 따르도록 강요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이렇듯 비열한 사람에 대해 더많은 설명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가이사(Caesar)가[㈜ 옥타비우스(Octavius). 주전 30년.]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를 장악하게 되자 그녀는 극도의 잔인성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는 자살 밖에는 다른 희망이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습니다. 아피온이 말한 대로 기근이 닥쳐왔는데도 우리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식량을 배급해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불성실한 사람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 아닙니까?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자업자득의 징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유대인들은 가이사가 애굽인들과 싸울 때에 그에게 협조와 충성을 보였습니다.[㈜ 주전 47년 폼페이(Pompey) 사후에 율리오 가이사와 함께 복역했 던 안티파테르(Antipater) 휘하의 유대인 파견 부대 : 고대. 14 권. 5:3(127)이하, 전쟁. 1권. 9:3(187)이하.] 원로원과 법령들에 보면, 그리고 아구스도 가이사(Augustus Caear)가 보낸 서한들을 보면 우리 유대인이(로마인들에게) 보여준 공로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피온은 그러한 서한들을 조사해 보았어야 했습니다. 특히 애굽인들이 존경하는 알렉산더 대왕과 톨레미 왕가가 통치할 때의 우리민족에 대한 증거들과 원로원과 로마제국의 가장 훌륭한 황제들이[㈜ 혹은 ‘장군들’.] 명한 법령들을 통해 우리 민족에 대한 증거들을 자세히 조사했어야 했습니다. 만일 게르마니쿠스(Germanicus)가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주민들에게 곡식을 분배해 주지 못했다고 한다면[㈜ 디베료의 조카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는 주후 19년에 애굽 을 방문하였으며, 곡창을 개방하여 곡물의 가격을 인하시킴으로 서 비위를 맞추었다.(타키투스 ‘연대기'(Ann.)ⅱ. 59).] 그것은 그 당시에 얼마나 가물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식량이 부족했는지를 말해주긴 할망정 유대인들을 비난할 수 있는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황제들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었는가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식량을 분배하는 임무는 알렉산드리아의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에게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은[㈜ 참). 전쟁. 1권. 8:7(175)(나일강의 펠루시아크 어귀의 방위를 담 당한 유대인 경비대).] 왕들이 자기들에게 특별히 맡긴 책임인 강과 그 모든 유역(?)을 관리하는 책임을 끝까지 지키려고 애를 썼으며, 이에 왕들도 강을 관리하는 모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만 맡기려고 했던 것은 유대인을 신뢰했다는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