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적, 타자 지향적 영성

 3.2.1. 전인적(全人的) 영성


  인간은 순수한 육체적 피조물도, 순수한 영적 피조물도 아니다.  인간은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고 육체와 정신(또는 영혼)의 존재이다.


  바울로 사도의 편지에서 나타나는 영과 육의 대결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데로 지향되어 있는 전인적인 인격의 대결이다. 바울로 편지에서의 영과 육의 대결을 잘못 이해할 때엔 육체, 인간의 정서, 정열, 사회적 관계들, 물질적 환경 등을 경시하는 경향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할 경우, 마치 인간은 참으로 영과 육의 존재가 아니라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풀려나기를 늘 기다리며 육체 안에 갇혀있는 영적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육체를 경시하는 영성은 실상 창조주이시고 구속자이시며 성화자로서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부인하는 영성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다. 설령 인간이 육체적인 방식으로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육체적 존재는 말씀의 육화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높은 수준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인간은 항상 활기를 얻게 되었고 그 안에 하느님이 끊임없이 현존하심으로써 새로워지게 되었다.


  물론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만이 아니듯이, 육체적인 피조물만도 아니다. 그러므로 영을 제외하면서 육체를 들어높인 영성은  모순적인 것이며 빗나가 있는 것이다.


  사목자는 영적인 곤경에 처해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육체적 곤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이한 봉사까지 지향해야 한다. 사목자가 육체와 영혼을 지닌 사람인 것처럼 그 사목자가 봉사하는 사람들 또한 육체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목적 영성은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3.2.2. 타자 지향적 영성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여성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개인적인 것으로만 제한하고 고립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해야하는 것이지 그들로부터 우리를 폐쇄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인과 함께 살 수 없다” 라든지 “성인과 함께 사는 것은 순교한는 것이다” 라는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가끔 신성함을 괴상함이나 이상함과 동일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사람이 성인같애서 함께 식탁에 앉으면 좀 야한 농담조차도 결코 해선 안된다든지 너무 조심스러워해야 할까?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 곳에서나 함께 기도하기를 강요한다고 할 때 그의 그러한 열성 때문에 성인이랄 수 있겠는가? 성인과 결혼했다면, 그의 거룩함이란 정열을 가지고 바라보거나 접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거룩함이나 신성함이란 괴상함이나 괴팍함이 아니다. 그것은 건전함이다. 그것은 상식적이고 건강한 것이다. 만일 성인이 우리에게 복음의 가장 높은 규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따라 생활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실패를 상기시켜 주기만 한다면 성인과 함께 살거나 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성인들은 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명함과 정의 그리고 절제와 용맹의 덕을 지닌 분들이다.  그들은 자비와 연민의 정을 지닌 분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우리의 유한한 인간적 여러 요구와,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분명히 보기 때문에 섬세한 유우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기적인 거시 아니라  타자 지향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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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적, 타자 지향적 영성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2.1. 전인적(全人的) 영성

      인간은 순수한 육체적 피조물도, 순수한 영적 피조물도 아니다.  인간은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고 육체와 정신(또는 영혼)의 존재이다.

      바울로 사도의 편지에서 나타나는 영과 육의 대결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데로 지향되어 있는 전인적인 인격의 대결이다. 바울로 편지에서의 영과 육의 대결을 잘못 이해할 때엔 육체, 인간의 정서, 정열, 사회적 관계들, 물질적 환경 등을 경시하는 경향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할 경우, 마치 인간은 참으로 영과 육의 존재가 아니라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풀려나기를 늘 기다리며 육체 안에 갇혀있는 영적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육체를 경시하는 영성은 실상 창조주이시고 구속자이시며 성화자로서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부인하는 영성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다. 설령 인간이 육체적인 방식으로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육체적 존재는 말씀의 육화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높은 수준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인간은 항상 활기를 얻게 되었고 그 안에 하느님이 끊임없이 현존하심으로써 새로워지게 되었다.

      물론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만이 아니듯이, 육체적인 피조물만도 아니다. 그러므로 영을 제외하면서 육체를 들어높인 영성은  모순적인 것이며 빗나가 있는 것이다.

      사목자는 영적인 곤경에 처해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육체적 곤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이한 봉사까지 지향해야 한다. 사목자가 육체와 영혼을 지닌 사람인 것처럼 그 사목자가 봉사하는 사람들 또한 육체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목적 영성은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3.2.2. 타자 지향적 영성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여성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개인적인 것으로만 제한하고 고립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해야하는 것이지 그들로부터 우리를 폐쇄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인과 함께 살 수 없다” 라든지 “성인과 함께 사는 것은 순교한는 것이다” 라는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가끔 신성함을 괴상함이나 이상함과 동일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사람이 성인같애서 함께 식탁에 앉으면 좀 야한 농담조차도 결코 해선 안된다든지 너무 조심스러워해야 할까?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 곳에서나 함께 기도하기를 강요한다고 할 때 그의 그러한 열성 때문에 성인이랄 수 있겠는가? 성인과 결혼했다면, 그의 거룩함이란 정열을 가지고 바라보거나 접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거룩함이나 신성함이란 괴상함이나 괴팍함이 아니다. 그것은 건전함이다. 그것은 상식적이고 건강한 것이다. 만일 성인이 우리에게 복음의 가장 높은 규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따라 생활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실패를 상기시켜 주기만 한다면 성인과 함께 살거나 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성인들은 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명함과 정의 그리고 절제와 용맹의 덕을 지닌 분들이다.  그들은 자비와 연민의 정을 지닌 분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우리의 유한한 인간적 여러 요구와,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분명히 보기 때문에 섬세한 유우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기적인 거시 아니라  타자 지향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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