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아브라함의 이삭헌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세기 22장 2절)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뜻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인물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 장본인을 다시 세워 쓰실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제로써 찾아 세우려던 모든 뜻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다시 세우시어 이삭 헌제로써 그의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인가 ?
첫째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1차였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으며,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3차였다. 그런데 3수는 완성수(후편 제3장 제2절 Ⅳ)이기 때문에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연장되기 제3차만이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이 섭리를 완성해야 할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실체로 헌제하여, 보다 큰 것으로써의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위에는 자세히 말한 바와같이, 헌제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입장은 곧 아담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아담과 그의 자식 가인에게 침범함으로써 2대에 걸쳐 그들을 빼앗아 갔었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하늘 편에서도 아브라함과 그 자식의 2대에 걸쳐서 빼앗아 올 수 있는 섭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째로 아담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으나, 섭리 적으로 보아 노아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소생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심정의 터 위에 있었기 때문에, 방주로써 직접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소생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터전과 장성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의 기대 위에 부름 받아, 완성 ‘상징헌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렇듯 ‘상징헌제’에 실수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벨이나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한 역사적인 심정의 기대를 조건으로, 그를 다시 세워 한 번 더 헌제를 하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에도 ‘상징헌제’를 하던 때와 같이, 먼저 아담가정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이삭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워야 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다시 자기의 처 사라와 남매의 입장에 서 가지고 사라를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어 일단 그의 처가 되어진 처지에서, 다시 찾아오는 역사를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때에도 사라와 함께 인류를 상징하는 노비와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제물을 찾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창세기 20장 1 ~ 16절).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헌제를 어떻게 하였는가 ? 아브라함이 그의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의 자식으로 받았던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죽이려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세기 22장 12절)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그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은, 벌써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이삭으로부터 사탄을 분립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탄이 분립된 이삭은 벌써 하늘 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야’라고 하신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에 대한 책망과 이삭헌제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이 기쁨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이삭을 다시 하늘 편으로 분립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 모리아 산상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는 3일기간을 소비하였다. 그렇기 대문에 이 3일기간은 그 후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는데 있어서의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야곱도 하란에서 그 가족을 이끌고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기간이 있었고(창세기 31장 20~22절), 모세도 역시 애급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 사탄분립의 3일기간을 지난 후에야 홍해를 향해 출발하였었다(출애급기 8장 27~29절). 예수님도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실 때, 사탄분립의 무덤 3일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본 진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법궤가 사탄분립의 3일노정을 걸었던 것이다(민수기 10장 33절).
ⅲ. 뜻으로 본 이삭의 위치와 그의 상징헌제
아브라함은 일단 그의 상징헌제에 실패하였지만, 그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룰 수 있는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데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그러나 예정론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는, 또다시 같은 섭리를 되풀이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상징헌제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던 것이고, 또 그로부터 연장된 복귀섭리를 연장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창세기 22장 2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이삭)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장 4~5절)고 하심으로써 이삭을 통하여 선민을 부르실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 했던 충성은, ‘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삭을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도 이삭과 같이 죽은 입장에서,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함과 동시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로 침범했던 사탄을 분립하였고, 더 나아가서 뜻을 중심하고 이삭과 일체불가분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난 이삭과 아브라함은 서로 그 개체는 다르면서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삭을 중심한 섭리에로 연장되더라도, 그 섭리에서 이삭이 성공만 하면, 이 성공은 바로 이삭과 한 몸된 아브라함의 성공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섭리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연장되었어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아브라함이 실패도 하지 않았고 또 그 섭리가 연장도 되지 않은 것과 같이되었던 것이다.
이삭헌제 때의 그의 나이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창세기 22장 6절), 번제에 쓰일 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의 부친에게 물어봤던 것(창세기 22장 7절)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이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삭 자신이 그것을 협조하였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미루어 알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뜻에 대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나이에 도달해 있었던 이삭이, 만일 번제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부친에게 반항하였다면, 하나님이 그 이삭헌제를 받으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충성과 그에 못지 않은 이삭의 충성이 합동하여 이삭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사탄을 분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제를 중심하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첫째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그 실수 이전의 입장으로 탕감복귀해 가지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섭리적인 사명을 이삭에게 넘겨줄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이삭으로서는, 그가 뜻 앞에 순종 굴복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음에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에게로 옮겨진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세기 22장 13절)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것은 그대로 이삭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세워진 ‘상징헌제’가 된 것이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던 사실로 보아, 아브라함이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데 있어서도, 이삭이 그를 협조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드렸다 하였지만, 뜻으로 보면 그와 한몸이 되어 그의 사명을 이어받은 이삭 자신이 헌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넘겨받고 그를 대신한 입장에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

ⅱ. 아브라함의 이삭헌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세기 22장 2절)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뜻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인물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 장본인을 다시 세워 쓰실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제로써 찾아 세우려던 모든 뜻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다시 세우시어 이삭 헌제로써 그의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인가 ?
첫째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1차였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으며,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3차였다. 그런데 3수는 완성수(후편 제3장 제2절 Ⅳ)이기 때문에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연장되기 제3차만이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이 섭리를 완성해야 할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실체로 헌제하여, 보다 큰 것으로써의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위에는 자세히 말한 바와같이, 헌제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입장은 곧 아담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아담과 그의 자식 가인에게 침범함으로써 2대에 걸쳐 그들을 빼앗아 갔었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하늘 편에서도 아브라함과 그 자식의 2대에 걸쳐서 빼앗아 올 수 있는 섭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째로 아담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으나, 섭리 적으로 보아 노아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소생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심정의 터 위에 있었기 때문에, 방주로써 직접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소생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터전과 장성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의 기대 위에 부름 받아, 완성 ‘상징헌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렇듯 ‘상징헌제’에 실수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벨이나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한 역사적인 심정의 기대를 조건으로, 그를 다시 세워 한 번 더 헌제를 하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에도 ‘상징헌제’를 하던 때와 같이, 먼저 아담가정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이삭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워야 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다시 자기의 처 사라와 남매의 입장에 서 가지고 사라를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어 일단 그의 처가 되어진 처지에서, 다시 찾아오는 역사를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때에도 사라와 함께 인류를 상징하는 노비와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제물을 찾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창세기 20장 1 ~ 16절).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헌제를 어떻게 하였는가 ? 아브라함이 그의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의 자식으로 받았던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죽이려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세기 22장 12절)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그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은, 벌써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이삭으로부터 사탄을 분립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탄이 분립된 이삭은 벌써 하늘 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야’라고 하신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에 대한 책망과 이삭헌제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이 기쁨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이삭을 다시 하늘 편으로 분립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 모리아 산상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는 3일기간을 소비하였다. 그렇기 대문에 이 3일기간은 그 후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는데 있어서의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야곱도 하란에서 그 가족을 이끌고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기간이 있었고(창세기 31장 20~22절), 모세도 역시 애급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 사탄분립의 3일기간을 지난 후에야 홍해를 향해 출발하였었다(출애급기 8장 27~29절). 예수님도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실 때, 사탄분립의 무덤 3일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본 진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법궤가 사탄분립의 3일노정을 걸었던 것이다(민수기 10장 33절).
ⅲ. 뜻으로 본 이삭의 위치와 그의 상징헌제
아브라함은 일단 그의 상징헌제에 실패하였지만, 그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룰 수 있는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데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그러나 예정론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는, 또다시 같은 섭리를 되풀이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상징헌제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던 것이고, 또 그로부터 연장된 복귀섭리를 연장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창세기 22장 2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이삭)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장 4~5절)고 하심으로써 이삭을 통하여 선민을 부르실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 했던 충성은, ‘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삭을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도 이삭과 같이 죽은 입장에서,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함과 동시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로 침범했던 사탄을 분립하였고, 더 나아가서 뜻을 중심하고 이삭과 일체불가분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난 이삭과 아브라함은 서로 그 개체는 다르면서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삭을 중심한 섭리에로 연장되더라도, 그 섭리에서 이삭이 성공만 하면, 이 성공은 바로 이삭과 한 몸된 아브라함의 성공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섭리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연장되었어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아브라함이 실패도 하지 않았고 또 그 섭리가 연장도 되지 않은 것과 같이되었던 것이다.
이삭헌제 때의 그의 나이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창세기 22장 6절), 번제에 쓰일 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의 부친에게 물어봤던 것(창세기 22장 7절)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이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삭 자신이 그것을 협조하였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미루어 알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뜻에 대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나이에 도달해 있었던 이삭이, 만일 번제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부친에게 반항하였다면, 하나님이 그 이삭헌제를 받으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충성과 그에 못지 않은 이삭의 충성이 합동하여 이삭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사탄을 분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제를 중심하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첫째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그 실수 이전의 입장으로 탕감복귀해 가지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섭리적인 사명을 이삭에게 넘겨줄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이삭으로서는, 그가 뜻 앞에 순종 굴복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음에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에게로 옮겨진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세기 22장 13절)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것은 그대로 이삭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세워진 ‘상징헌제’가 된 것이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던 사실로 보아, 아브라함이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데 있어서도, 이삭이 그를 협조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드렸다 하였지만, 뜻으로 보면 그와 한몸이 되어 그의 사명을 이어받은 이삭 자신이 헌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넘겨받고 그를 대신한 입장에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