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든 예수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고 우리에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였다는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구나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는 분을 계시 되었기 때문이다(요한 14,6; 마태 6,4.18; 11,27; 루까 10,22). 하느님의 이와같은 모습은 이‘잃었던 아들’의 비유 이야기 – 사실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가 더 어울리는 제목일 수 있다. 아들이 주인공이라기 보다 아버지가 주인공인 것이다. 아버지는 방탕했던 아들을 면박하거나 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들로서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 (루까 15,11-32) 가운데 구체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의 공적 생활과 설교는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삶과 말씀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임하도록하는 사건이었다. 예수의 육화는 하느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실제의 사건이 되게 한 것이다. 본래 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이야기는 15, 1-2에서 보듯이 예수와 죄인들의 관계를 놓고 비난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거론 된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너희는 내가 죄인들과 더불어 행동한다고 비난하지만 , 하느님 역시 나처럼 죄인들을 다루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위치에 서서 행동하셨다는 사실이다. 유비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우리에게 이해하도록 하신 분은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특별히 마태오 11,27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읍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읍니다.” 예수가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귀절들은 예수가 계시의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주는 계시적인 말씀이다. 예수 자신만이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우리를 인도하고 아버지께 개방시키는 분이며, 그러한 권위를 지니고 우리에게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고, 가르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진리“는 스토아 철학이 가르치는 것처럼 자연의 본성을 탐구해서 얻게 되는 그런 진리가 아니다. 이 진리는 성자와 관련된 계시적이고 역사적인 진리다. 그야말로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이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이심이 선언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은 모든 이들, 공중의 새들, 들의 풀 한포기까지(마태 6,26-30), 참새 한마리까지(마태 10,29) 돌보시는 분이시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예수 역시 구약성서의 인간이해, 즉 하느님으로보터 창조된 존재라는 점을 전제하고 출발한다.(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읍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제 아내와 합하여 한몸을 이루리라’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마태오19,4이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라는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는 옳은 사람, 옳지 못한 사람의 구별이 없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의 구별이 없다(마태 5,45), 여성과 남성의 차별도 있을 수 없었다.(마태 19,4이하), 오히려 대접 받지 못한 당시의 여성들에게 극히 이례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셨다(루까7,13-15; 36-50; 8,43-48; 요한 4,7-26). 힘없는 어린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받아들였다(마대 11,26;18,1-5; 마르10,13-16; 루까 8,42.49-56; 9,37-42).병자나 소외된 이간일수록, 장애자일수록, 병신일수록,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마르 2,17)자신은 그들을 위해 필요한자로 처신하셨다. 따라서 보잘 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도 업신여기는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마태18,10).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의식주는 물론 머리카락 하나까지 돌보시는 분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귀한 존재인 까닭이다(마태 10,30). 따라서 어느 인간이든지 악에로 인도하는 잘못은 엄청나다. 그 잘못을 모면할 길이 없다(마태5,19; 18,6-7). 반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베푸는 선행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세상창조 때부터 준비한 상급이 베풀어진다. 모든 인간은 그러기에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자매들이다. 여기서 형제나 자매에 대한 모독은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중죄가 된다(마태 5,22).
그러므로 예수에게서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어렴풋이 보여준 하느님의 부성을 명료하게 보게된다. 신약의 커다란 특징은 성부의 종말론적인 계시자 예수라는 인격안에서 구체적으로 계시가 드러났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완성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경향은 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하느님을 ‘abba’라고 부르는데 있다. 이 용어는 예수의 입으로부터 발설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ipssisma vox Jesu).희랍어로 쓰여진 신약성서가 아람어인 ’abba’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갈라 4,6; 로마 8,15). 이것은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가 그 다음 세대를 이어 받고 있는 초기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중요했고, 그래서 상당히 존중되어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아 단어는 예수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운데 살아가셨다는 독특성을 보여준다. (이미 하느님 나라에 관한 부분에서 언급되었지만, ‘abba’란 말을 더듬거리는 어린아기의 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남다른 신뢰와 친밀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스캔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속화한 것도 아니요, 하느님의 신성을 실추 시킨 것도 아니다. 예수의 ’abba‘ 하느님은 하느님의 나라와 관련해서 또한 다스림의 권한을 지니신 주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거룩해야하고, 그분의 나라는 도래해야 하고, 그분의 뜻은 성취 되어야 하는 것이다(마태 6,9이하).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의 창조주 이시다.동시에 모든 불의와 죄를 단죄하시는 종말의 심판관이시다(마태 7,21; 18,23-35). 이와같이 아버지에 대한 언명 속에서 극단적으로 인격화된 방식안에서 예수의 메시지 전체가 요약되고 있다. 이것은 한편 인간들이 희망하는 것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이 희망의 성취를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앙이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사랑안에서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오로지 선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서 게시된 하느님께 이제 누구나 온전한 신뢰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로마 8,16). 그리고 하느님은 부성애로써 인간을 감싸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아주 자상한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마태 6,25-34; 10,29-31). 이런 점에서 주의 기도 (마태 6,9-13; 루까 11,2-4)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소박한 신뢰성과 경외감을 동시에 잘 표현해 주고 있는 아주 좋은 예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위와 주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인 행위로써 하느님께 대한 경외감을 심화 시켜준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만민의 심판관 이시고(로마 14,10-12; 히브 12,3), 동시에 아버지로서 악에 대한 진노를 참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로마 2,8-9; 데살 후 1,6-10). 따라서 아버지로서의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코린 후 1,3; 로마 2,4; 12,1)과 동시에 준엄한 하느님의 모습(로마 11,22)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진노도 자비와 함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부성애로써 말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사랑의 한 측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해서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성이 배제되는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경외함으로써 모든 행실에 있어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드러내도록 촉구해 주고 있다(마태 5,48; 코린 후 7,1; 히브 12,10; 베드 전 1,15-17).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찿아 나서는 목자, 동전 한잎을 되 찿아 기뻐하는 여인, 비록 한시간 밖에 일을 하지 못했지만 여전 하루 품삯을 지불하시는 포도밭 주인 등의 비유에서처럼 자비로운 분으로서의 인격적인 하느님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4. 신약의 하느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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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신약성서의 하느님에 관한 종합적 결론
1. 신약세서 증언되느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절정으로 계시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는 최고 적임자다. 예수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한 분(히브 1,3; 고로 1,27; 2,2)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 이를 수가 없다(에페 2,18; 2,12; 요한 14,6). 다시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의 육화이기 때문이다.
2. 예수가 계시한 하느님은 구약성서에서 진술하고 있는 야훼 하느님과 동일한 하느님으로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주이시며(마태 19,4), 모든 창조물과 인간을, 풀 한포기, 머리카락 하나까지 돌보시는 분이요(마태 6,25이하; ㅂ0,26이하 참조),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는 조상들의 하느님(사도 13,13이하; 5,30; 22,14),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마태 22,32), 이스라엘의 하느님(마태 15,31)이시며,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다 (요한 17,3; 로마 3,30; 16,27; 코린 전 8,4-6).
3. 무엇보다도 예수에 의해 소개되느 하느님은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다시말해 인격적이신 분이요, 인간에 대해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지닌 분이시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압바’라 부를 만큼 하느님과 예수의 친밀성은 ‘아버지와 예수가 하나이다’(요한 10,30),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마태 11,27)는 표현 속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은 역시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되신다(마태 6,7이하; 7,25이하; 5,43이하참조).물론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다. 다시말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갈라 4,5).
또 성령으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갈라 4,6). 예수에 의해 아버지로 소개되는 하느님은 바로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과 더불어 자비로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다. 여기서 일체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체험을 뛰어 넘는다. 하느님을 남성 또는 여성으로 표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서 소개하는 이유는 본래 아버지로서 지니는 의미들, 생명의 시여자, 삶의 보증인, 보호자등의 의미를 포괄하는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적절한 비유가 ‘탕자의 비유’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소개되면서 자비의 측면을 전하고자 했던 예수의 의도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의 핵심 메시지와 잘 맞아 떨어진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자비와 사랑으로 선사되는 선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은 역시 선물로서 체험되며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되도록 하는 하나의 관계다.
4.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한편으로 분노의 하느님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죄인과 용서받지 못할 종들을 바깥 어두운 곳에로 내쫓으며(마태 22,1), 심지어 영원한 불 속에 처 넣으기도 하신다(마태 25,41).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한이 이런 표현 속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긴 하지만 분노하시는 하느님, 벌을 선고하시는 하느님은 탕자의 아버지로 소개되는 모습과 걸맞지 않는다.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느님으 로 이해할 때, 이렇게 분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사랑의하느님의 면모만이 아니라 정의 하느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충분하지가 않다. 자녀의 배신과 잘못을 교정하고 선도하고자 하는 교육적 목적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자녀로서의 배신과 잘못의 심각성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5.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부활 체험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이심이 고백된다. 이것은 예수과 하느님의 친밀성이 드러나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부활 사건은 그 친밀성을 확인하고 보증해주고 있다. 예수의 뜻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으며(마르 14,36), 예수의 행동은 바로 하느님의 처신(요한 9,4)이었다. 예수는 바로 보이지 안흔 하느님의 가시화, 즉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나자렛의 예수와의 관심과 용서라는 사랑의 친교 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추구되고 탐색되고 있으며, 수락되고 보살핌을 받고 해방되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인간들의 모든 권력의 무효화를 선언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며, 만인을 위한 자유와 사랑의 하느님 나라를 이끌어 드리는 공동체를 설립하게 하는 전권이 주어져 있다. 이 전권의 부여가 하느님의 임재이며,하느님의 영역이어서 마침내 하느님이 인간들 가운데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함께 하느님의 육화, 인간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6. 신약성서는 또 다른 위격으로서 성령을 하느님으로 체험하고 있다. 다시말해 삼위일체적 정식을 지향하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진술하고 있다. 하느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인간들과 더불어 계시면서 그분의 사랑과 용서와 배려가 끊임없디 계속되고 있음을 체험한 것이다.
7. 하느님에 관련된 인간적인 표현은 하느님의 신성을 그릇되게 드러내거나 욕되게 할 위험성에 언제나 직면해있다. 이런 위험성을 충분히 감안할 때, 인간의 언어로써 하느님을 완전히 묘사할 수도 없을 뿐더러, 혹시 그렇더라도 그 하느님은 인간의 추리나 논리로 규정된, 곧 인간이 조작해낸 신으로 하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 신앙은 하느님의신비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여백으로 남기고 있다. 또 한편으로 인간의 표현이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정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로써 드러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로써 무엇인가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면전에로 불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이와같은 사실을 감안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찿게되어 있고, 동시에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매우 역동적이듯이 인간에게 계시되는 하느님의활동도 역시 역동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가 처한 삶의 현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체험된 하느님을 묘사할 수 밖에 없다. 하느님에 관한 성서적인 표현도 이런 차원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역사의 하느님, 또는 계시의 하느님은 인간의 추리나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된 바로 그 하느님인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볼 때,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하나의 생동감이 넘치는 場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한마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언제나 인간을 향해 당신자신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이와같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놀라운 신비를 성령의 도움으로 터득하게 된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고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계시된 하느님, 곧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계시된 유일신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
1. 문제제기
하느님에 관해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 논증으로 하느님이 증명될 수도 없고, 하느님의 부재가 증명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이 특별히 한 인간, 한 사건, 또는 신비적인 체험안에서 계시되었다는 판단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많은 종교가 “인간은 신을 볼 수 없는 존재”(티모 전 6,16)라는 점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체험을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우리는 그러한 체험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절재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떤 성사적인 방법안에서만 자기 계시하시며, 하느님의 통교는 인간과 그 공동체의 역사적인 상황으로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과 그 공동체에 자신을 드러낼 수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계시란 받아들인 것이다. 다른 말로 수용자의 처지에 따르기 마련이다.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우리는 신비를 말할 수 있다. 하느님 문제는 인간존재의 문제의 또 다른 거대한 신비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관한 유일한 그리스도교적 체험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역시 인간이며,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역사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 해석, 표현 역시 애매모호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고, 왜곡될 수 있는 주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하느님이 자신을 분명하게, 나자렛의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내셨다는 그리스도교적 신념이 있다. 거기엔 인식하거나 설렴함에 있어서, 또는 하느님의 실재를 이론적 표현 양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오류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왜곡은 신앙의 이차적인 일로서만 가능하다. 애매모호성 은 항상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성격상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언어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그리스도교적 신념은 신학을 위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만일 하느님이 한분이시라면, 어떻게 성서와 교히의 신경이 하느님안에 복수형을 인정하고 있는가? 다시말해 성부, 성자, 성신을 이야기 하는가? 예수가 주님이심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적 신앙과 깊이 관련되었다. 구원역사에 있어서 예수의 위치는 죄로 말미암아 받게된 상처와 간격을 치유하고, 새롭게 하고, 화해케하기 위해 그가 성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의미에서, 또 성부와 함께 성령을 파견하셨다는 문맥안에서만 만들어진다. 그리스도교인의 하느님 이해는 다른 한편으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없다. 삼위일체의 이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으로부터 떼어 놓고서는 설명되어서는 완전하게 표현될 수가 없다. 이러한 면은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에서 더욱 세밀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2. 성서의 하느님
2.1 구약성서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의 친밀성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을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하느님에 관한 이해의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전개는 구약성서로부터 시작된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철학적 사변에서는 흥미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날 하나의 격언이 되다시피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과 이해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이 그들의 하느님 이해에도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둥세기적인 구별, 즉 본질과 존재의 구별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의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였다. 이름을 통해서 그들에게 알려진 하느님이였다. 야훼라는 이름이 모세와 그의 후손들에게 알려졌다(출애 3,13-1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야훼는 그 이름으로 인식되고, 고무되고, 알려진 모든 행위와 현실이었다. 야훼를 부른다는 것은 야훼께 승복한다는 것이었다. 야훼의 이름은 영광스러운 것(시편 72,19), 위대한 것(열왕 상 8,42), 경이로운 것(신명기 28,58), 찬양 받아야 하는 것(시편 148,13)이었다. 그 이름은 역시 모든 것이 나오는 근거요 원천(시편 54,3), 현양의 원천(시편 33,21; 89,25). 야훼의 이름은 모든 것을 받쳐 주고 지탱하게 해주는 것(시편 124,8), 신뢰할 만 한것(시편 33,21,이사 50,10)이다. 야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야훼를 안다는 것이다(이사 52,6; 64,1). 그리고 모세가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발견했다는 것은 그의 사명을 성공으로 이끌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기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읍니까?” 하느님 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셖다.“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낸신 분은 나다- 라고’하시는 그 분이다‘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셖ㅆ다. “너는 이스라엘ㄹ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부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출애 3,13-15).
야훼라는 이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규정하기 어렵다. 학자들간에도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일치를 보이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 이름이 존재한다(to be)는 아람어 동사와 어원적으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것만크은 동의를 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 고고학자 W.F Albright는 사역동사형으로 해석하여 본래의 긴 이름의 첫 단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즉 yahweh- aser- yihweh( 이세상에 존재하게 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 분“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이이름은 하느님의 창조적 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또 다른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그 이름은 ”나는 존재하게 될 그 분이다“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다시말하면 하느님은 계속 과정안에서 계시될 것이며 우리를 미래를 이루기 위해 동료 협조자로 소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어떻든 이 낱말의 정확한 원천은 야훼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다른 신들의 칭호와 구별되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야훼만이 홀로 창조주시다. 야훼만이 홀로 계시자이시다. 야훼만이 홀론 역사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야훼만이 홀로 판단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야훼만이 당신이 창조하신 만큼 넓은 세상을 왕국으로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야훼만이 홀로 살아계신 하느님(여호 3,10;사무 전 17,26; 열왕 하 19,4; 시편 42,3; 84,3; 이사 37,4. 17; 예레 10,10; 호세 2,1)이시다. 사실상 생명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그분이 명령으로 보존되고 있다(시념ㅇ 30,15-20). 그분은 야훼라는 낱말에 숨어계시는 살아계신 유일한 분이시다 (이사 55,3; 에제 20,11.13.21).